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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명식 金明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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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명식
한자명 金明植
본 관 김해
이 명 호 : 솔뫼, 송산(松山), 필명 : 나산(拏山)
출신지 전라남도 제주(濟州)
생몰년월일 1890. 9. 26 ~ 1943. 4. 11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신생활사필화사건
주요 활동 1916년 동경 조선인유학생학우회 가담,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조직, 1921년 서울청년회 참가, 1922년 1월 신생활사 이사, 주필, 1927년 신간회 제주지회장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9)

1890년 9월 26일 제주군(濟州郡) 신좌면(新左面) 조천리(朝天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호는 솔뫼, 송산(松山)이고 나산(拏山) 등의 필명을 사용하였다. 그의 조부 김응전과 종조부 김응빈은 해미군수와 제주판관을 역임하였고 부친 김문주도 정의군수를 역임하는 등 제주의 명문가 출신이다. 어렸을 때부터 한학을 수학하고, 1908년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 제주지부가 설립되자 가입하였다. 이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상경하여 1908년 한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무렵 제주도 출신 고순흠(高順欽)과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단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김명식 강연 보도(『매일신보』 1920.5.1) [판형2]

1910년 경술국치가 되자 고향으로 돌아가서 동향의 죽암(竹岩) 고순흠, 매원(梅園) 홍두표(洪斗杓)와 함께 평생을 한국 독립을 위해 바칠 것을 맹세하는 송죽매(松竹梅) 결의를 하였다. 이후 홍두표와 일본으로 건너가서 1915년 와세다대학 전문부 정치경제과에 입학했다. 1916년 조선인유학생학우회(朝鮮人留學生學友會)의 간사부장·회장 등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학우회의 기관지 『학지광(學之光)』에 몇 편의 시와 논문을 기고하였다. 1916년 봄에 도쿄에서 한국, 중국, 대만의 청년 40여 명이 일본제국주의를 타파하고 서로 협력하고 민족평등, 국제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조직한 신아동맹단(新亞同盟團)에 김철수, 장덕수 등 10여 명과 참여하였다.

1919년 도쿄에서 2·8독립선언의 주도자로 참가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1920년 6월 신아동맹단이 명칭을 바꾼 사회혁명당(社會革命黨)에 참여하였다. 1920년 4월 조선노동공제회 발기인·평의원, 동아일보사 주필이 되었다. 6월 조선청년회연합회기성회 발기에 참여하고 지방부 집행위원이 되었다. 8월 조선노동공제회 기관지 『공제(共濟)』에 「노동문제는 사회의 근본문제」라는 글을 기고하였다. 12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창립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1월 서울청년회 결성에 참여했고 5월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상해파) 창립대회에서 기관지 주간 및 국내부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22년 1월 ‘김윤식사회장’을 둘러싼 논쟁으로 동아일보 불매동맹이 결성될 무렵 동아일보사를 퇴사하고 잡지사 신생활사(新生活社) 창립을 주도하여 이사가 되었다. 3월 조선청년회연합회 제3차 정기대회에서 서울청년회의 김사국 등으로부터 ‘사기공산당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퇴진을 요구받았다. 6월 서울청년회에서 제명당했다. 11월 「러시아혁명 5주년 기념호」가 문제가 되어 ‘신생활사 필화사건’이 발생하여 출판법 위반으로 붙잡혀 12월 22일 첫 공판을 받았다. 1923년 1월 경성지법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4월 함흥형무소로 이감되었는데 형무소에서 늑막염과 폐병을 얻었고, 7월 26일 형집행정지로 출옥했는데 이때부터 청각을 잃고 오른쪽 다리를 사용할 수 없는 신체장애자가 되었다.

서울청년회 해체 보도(『중외일보』 1929.8.30) [판형4]

1927년 신간회 제주지회장이 되어 활동하다가 1928년 3월 치료를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다. 오사카(大阪)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운동을 지도하다가 1930년 6월 검거되어 오사카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1931년 출옥하여 제주도로 돌아와 1932년 이후 잡지 『비판』에 「조선종교론」, 「민족단체 재건계획에 대하여」 등의 글을 비롯하여 『삼천리』, 『신동아』, 『조광』, 『조선일보』 등에 사회운동, 민족문제, 국제정치 등 글을 기고하였다. 1943년 5월 감옥생활과 고문으로 인한 건강 악화에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다가 제주도 조천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전명혁⋮

|참고문헌|

『동아일보』 ; 『조선일보』 ; 『매일신보』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3.1.16. ; 金正明 編, 『朝鮮獨立運動』 I, 原書房, 1967 ; 姜德相·梶村秀樹 編, 『現代史資料』 29, みすず書房,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4(대중투쟁사 자료집), 고려서림, 1984 ;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 제2권, 청계, 1986 ; 강만길·성대경 편, 『한국사회주의운동인명사전』, 창작과비평사, 1996 ; 박종린, 「꺼지지 않은 불꽃, 송산 김명식」, 『진보평론』 제2호, 1999년 겨울 ; 전명혁, 『1920년대 한국사회주의운동연구-서울파 사회주의그룹의 노선과 활동-』, 선인, 2006.
  • 김명식 강연 보도(『매일신보』 1920.5.1)
  • 서울청년회 해체 보도(『중외일보』 1929.8.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