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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두형 金斗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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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두형
한자명 金斗衡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94. 8. 18 ~ 미상
운동계열 국내항일
관련 단체 구국단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20년 구국단 가입, 군자금 모집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12)

1884년 8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임하면(臨河面) 임하리(臨河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장두철(張斗徹)과 정인호(鄭寅琥)는 독립운동을 할 것을 결의하고 동지를 모아 구국단(救國團)을 결성하였다. 두 사람은 구국단원 모집 활동을 펼치면서 국내외를 연결하는 운동 방식을 취하기로 결정하고 역할을 분담하였는데, 정인호가 국내를 맡고 장두철이 국외를 맡기로 하였다. 이에 그해 4월 장두철은 구국단원 여학생 박정식(朴貞植)과 함께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상하이로 건너간 장두철은 1919년 6월 박정식을 서울에 파견하였다. 장두철은 인쇄물을 갖고 국내로 들어오다가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박정식에게 정인호와 모든 일을 의논하여 시행할 것을 당부하며 구두로 임무를 전달하였다. 박정식은 서울로 들어와 정인호와 협의하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 3월 장두철이 다시 장지동(張志東)을 보내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재촉하였다. 구국단은 1920년 3회에 걸쳐 충청남도 논산군 성동면(城東面) 정지리(定止里)에 사는 윤일병(尹一秉)을 찾아가 독립운동 자금으로 수 만 원을 낼 것을 요구하였다. 1920년 말 정인호가 구국단 가입을 권유하자, 서병두(徐丙斗)·이종한(李琮漢)과 함께 구국단에 가입하였다. 정인호와 이종한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장과 재무부장 인장을 각각 만들고, 태극기가 새겨진 인장도 제작하였다. 정인호는 서병두·이종만(李鍾萬)과 함께 서울 인의동(仁義洞) 자신의 집에서 인쇄기계를 이용하여 ‘군자금 제공은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조선 민족의 의무’라는 취지를 담은 군자금납 명령서와 영수증 용지 수십 매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선임장 용지 수십 매를 인쇄하였다. 이 문서를 정인호와 함께 조선 내 부호에게 널리 반포하는 역할을 맡은 뒤, 각지를 돌아다니며 전단 배포와 함께 전라도에서 다수의 독립운동 자금을 확보하였다.

구국단 보도(『매일신보』 1921.3.20) [판형4]

1921년 초 정인호와 함께 논산군 논산면(論山面) 노성리(魯城里)의 윤기병(尹夔炳)과 노봉식(盧奉植), 전북 익산군 북일면(北一面) 신룡리(新龍里)의 임병철(林秉喆) 등에게 1만 원 혹은 2만 원에 해당하는 군자금납 명령서에 임시의정원 의장과 임시정부 재무부장의 인장을 날인하여 발송하였으나, 군자금을 받아내지는 못하였다. 이에 정인호와 윤상기(尹相驥)는 노봉식의 집에 직접 찾아가 미리 요구한 군자금 1만 원을 내놓으라고 압박하였다. 그러나 1921년 3월 8일 구국단의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이 발각되자, 경기도 경찰부로부터 정인호·서병두·이종한·윤상기 등과 함께 붙잡혔다. 1921년 3월 22일 검찰에 송치되어 1922년 2월 14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 1921.12.19, 경성지방법원 ; 「판결문」, 1922.2.14, 경성지방법원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0집, 1971 ; 『동아일보』 1922.2.2 ; 『신한민보』 1921.5.5.
  • 구국단 보도(『매일신보』 192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