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연 賈在衍 |
한글명 | 가재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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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賈在衍 |
본 관 | 소주(蘇州) |
이 명 | 서조성(西條誠) |
출신지 | 충청남도 서산(瑞山) |
생몰년월일 | 1923. 4. 8 ~ 1945. 3. 29 |
운동계열 | 학생운동 |
관련 단체 | 인천공립상업학교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1941년 인천공립상업학교에서 일본인 교장 추방운동 전개, 일본인 교사 배척, 1943년 학병반대운동에 연루되어 체포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1991) |
1923년 4월 8일 충청남도 서산군(瑞山郡) 서산면(瑞山面) 동문리(東門里, 현 서산시 동문동)에서 가정로(賈廷魯)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소주(蘇州)이다. 다른 이름으로 서조성(西條誠)을 사용하였다.
1936년 3월 서산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4월에 인천공립상업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는 원래 한국인 학교였는데 1933년 일본인 학교인 인천남공립상업학교(仁川南公立商業學校)와 합병되었다. 명분상으로는 인천남공립상업학교가 인천공립상업학교에 흡수되는 것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국인 학교인 인천공립상업학교가 폐교되고 교사(校舍)와 시설, 교사(敎師)들이 일본인 학교에 흡수되었다.
대전형무소 전경 |
이 과정에서 교장과 여러 교사가 퇴임하거나 전출되었고, 한국인 학생들 또한 탄압받아 집단 퇴학 사건이 일어났다. 이후에도 크고 작은 충돌사건이 잇따랐다. 1939년 새로 부임한 교장 야마모토(山本)는 학생들에게 각반(脚絆) 착용은 물론 등교할 때 반드시 ‘봉안전(奉安殿)’에 경례를 하게 하였다. 매일 아침 조례 시간에 학생들이 무장을 하고 교련 조회로 치를 것을 강요하는 등 한국인 학생들을 위압적이고 차별적으로 대우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비밀리에 한국인학생친목회를 조직하여 서로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노력하였다.
1941년 졸업을 앞둔 39회 졸업생 중 한국인 학생들은 학교 당국과 일본인 학생들 모르게 졸업앨범을 만들어 나누어 가졌다. 이를 알게 된 교장이 조회 시간에 학생들에게 민족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말로 비난하였다. 이에 친목회를 중심으로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단결하여 교장을 명예훼손죄로 고발하고, 그간의 비교육적 행위를 학교 밖으로 알리는 등 일본인 교장 추방 운동을 벌였다.
1941년 3월 졸업 후 전라북도 익산군(益山郡) 이리읍(裡里邑)에 있는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 이리지점에 취직하였다. 이곳에서 항일운동을 지속하던 중 인천공립상업학교 선배들이 체포되면서 한국인학생친목회 조직이 발각되어 경찰에 구속되었다.
1943년 일본 메이지(明治)대학에 유학 중이던 인천공립상업학교 졸업생 송재필이 여름방학 때 귀국하였다. 같은 학교 출신으로 보성전문학교에 다니던 안학순(安鶴淳)을 방문해 학병 반대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각처에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 과정에서 충북 영동경찰서 고등계 형사 김용업(金龍業)에게 발각되었다. 그 여파로 1944년 1월 경찰에 체포되었다. 인천공립상업학교 한국인학생친목회에 가입하였던 고윤희(高允熙)·김여수(金麗洙)·정태윤(鄭泰潤) 등 한국인 학생 24명도 함께 체포되었다.
영동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 조사를 받은 후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1944년 6월 8일 대전검사국으로 송치되었다. 재판을 기다리던 중 모진 고문과 옥고 여독으로 1945년 3월 29일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족장(1986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