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강윤국 康潤國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강윤국
한자명 康潤國
본 관 진주(晉州)
이 명 강백(康伯)
출신지 서울
생몰년월일 1926. 9. 28 ~ 2009. 10. 3
운동계열 의열투쟁
관련 단체 대한애국청년당
관련 사건 부민관사건
주요 활동 1945년 대한애국청년당 조직, 동년 7월 24일 부민관 폭파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26년 9월 28일 서울 중림동(中林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강백(康伯)이라는 이름도 사용하였다.

1940년 무렵 일본 도쿄로 건너가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큰 뜻을 품고 있었다. 1942년 일본강관주식회사(日本鋼管株式會社)에서 훈련생으로 일할 때, 한국인 노동자들이받는 부당한 차별 대우에 맞서 궐기하여 농성시위를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곳에서 동지 조문기(趙文起)를 만나 의기투합하여 친일파 처단을 결의하였다.

1945년 부민관 폭파 의거 직전(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판형3]

1945년 1월에 귀국하여 동지 조문기 및 유만수(柳萬秀)·우동학(禹東學)·권준(權俊) 등 6명과 함께 서울 관수동(觀水洞) 유만수의 집에서 비밀결사인 대한애국청년당(大韓愛國靑年黨)을 조직하였다. 임시의장은 연장자인 유만수가 맡았다. 이들은 항일 거사 계획을 세웠는데, 친일 거두 3명과 총독부 고관 3명을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중 1순위는 일본에서 한국인들을 학대하고 학살한 상애회(相愛會) 회장 박춘금(朴春琴)으로 결정하였다.

그러던 중 1945년 7월 24일 서울 부민관(府民館)에서 조선총독과 조선군사령관 및 친일파 거두 박춘금 등이 참석한 가운데 이른바 아세아민족분격대회(亞細亞民族憤激大會)를 개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동지들과 함께 이 기회에 일제 침략자와 친일 민족반역자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조문기·유만수 등과 함께 수차에 걸쳐 비밀 회합을 갖고 폭탄 장치 등 거사에 필요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그리하여 7월 24일 저녁 친일매국대회가 개최되는 곳에 잠입하여 장치해 둔 2개의 폭탄을 터뜨렸고, 아세아민족분격대회는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다. 대의당 당수 박춘금은 사재를 털어 현상금 5만 원을 내놓으며 용의자 검거에 나섰지만 결국 실패하였다. 부민관 폭파 의거는 일제 말기 서울의 한복판에서, 일제의 수뇌들과 친일파의 반민족적 행각을 폭탄 의거로 좌절시키며 일제에게 타격을 가한 거사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김명섭⋮

|참고문헌|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72 ; 조문기, 『슬픈 조국의 노래』, 민족문제연구소, 2005 ; 정병준,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1945년 부민관 폭파 의거 직전(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 부민관폭탄투척의거터 기념석
  • 1945년 부민관 폭파 의거 직전(왼쪽부터 강윤국·조문기·유만수)
  • 당시 부민관의 모습
  • 府民館에 정의의 폭탄 이면 벗은 3청년 용사
  • 강윤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