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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영목 權寧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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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영목
한자명 權寧睦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호: 동도(東島), 이명: 왕동도(王東島)·배량(裵梁)·왕자명(王子明)·옥동보(玉東甫)
출신지 경상북도 영주(榮州)
생몰년월일 1884. 3. 19 ~ 1935. 5. 30
운동계열 중국방면
관련 단체 풍기광복단, 대한광복회,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5년 경상북도 영주에서 대동상점을 통해 독립자금 조달, 대한광복회 총사령 박상진과 협의 후 중국 망명, 1926년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조직 북경촉성회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7)

1884년 3월 19일 경상북도 영주군(榮州郡) 영주면(榮州面) 영주리(榮州里, 현 영주시 영주동)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호는 동도(東島)이다. 이명으로 왕동도(王東島)·배량(裵梁)·왕자명(王子明)·옥동보(玉東甫) 등을 사용하였다.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한 후 가업을 이어 상업에 종사하였다.

1915년 8월 풍기공립보통학교 교사 박제선(朴齊璿)과 영주시장에서 대동상점(大同商店)이라는 잡화점을 경영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였다. 대동상점은 일본 관헌의 감시를 피할 수 있는 풍기광복단(豐基光復團)의 연락 거점으로도 활용하였다. 경영주임이 되어 감독을 맡은 박제선과 함께 유명수(柳明秀)·정응봉(鄭應鳳) 등을 포섭하여 상점을 경영하였다. 기회를 보아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먼저 국제 정세 변화와 만주에서 독립운동 상황을 살피기 위해 박제선과 김노경이 만주를 다녀왔다. 1916년 3월까지 전원이 만주에 건너갈 것을 결정하고 상점을 정리한 후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 총사령 박상진(朴尙鎭)과 협의하였다. 만주 지역의 독립군 양성을 위해 지린(吉林)에 선발대로 파견된 와중에 대한광복회 사건과 관련한 궐석재판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일제 측의 대독립당촉성회에 관련 보고(1926.11.2) [판형3]

활동 근거지를 옮겨 상하이(上海)·베이징(北京) 등지를 중심으로 항일운동에 나섰다. 1926년 말 베이징에서 대독립당촉성회원(大獨立黨促成會員)으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였다. 이 단체는 민족협동전선론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의 통일전선을 모색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후 펑톈(奉天)에서 활동하다가 1935년 5월 30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김형목⋮

|참고문헌|

「朝保秘 第1401號, 大獨立黨組織 北京促成會에 關한 件」, 1926.11.2, 『不逞團關係雜件-朝鮮人의 部 - 在支那各地(4)』,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北促情成 第97號, 北京地方在住鮮人一般槪況」, 1924.9.8, 『不逞團關係雜件 - 朝鮮人의 部-在支那各地(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8.5.3 ; 「판결문」, 경성복심법원, 1919.9.26 ; 「형사사건부」, 대구지방 검사국 ; 조선총독부 북경파견원, 『北京在留朝鮮人槪況』, 1927 ; 조선총독부 경무국 편, 『國外容疑朝鮮人名簿』, 1934 ; 경상북도 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11, 1976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32, 1990 ; 『동아일보』 1935.6.5 ; 국가보훈처 편, 『독립유공자공훈록』 17, 2009.
  • 일제 측의 대독립당촉성회에 관련 보고(1926.11.2)
  • 대독립당촉성회에 대한 일제측 기록(1926.11.2)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8.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