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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호 韓相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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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한상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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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자명 | 韓相浩 |
| 본 관 | |
| 이 명 | |
| 출신지 | 함북 경성(鏡城) |
| 생몰년월일 | 1900. 2. 23 ~ 1921. 8. 25 |
| 운동계열 | 만주방면 |
| 관련 단체 | 철혈광복단, 북로군정서 |
| 관련 사건 | 용정 15만원 탈취 사건 |
| 주요 활동 | 1910년대 중반 철혈광복단 조직, 북로군정서 특파원으로 군자금 모집 |
| 포상훈격(연도) | 독립장(1963) |
1900년 2월 23일 함경북도 경성군(鏡城郡) 주을온면(朱乙溫面) 약수동(藥水洞)에서 태어났다. 만주로 건너간 후에는 옌지현(延吉縣) 길인향(吉仁鄕) 와룡동(臥龍洞)에 거주하였다. 일찍이 간도로 건너가 명동중학교(明東中學校)를 졸업하고, 와룡소학교(臥龍小學校) 교사로서 재만 한인에게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철혈광복단(鐵血光復團)·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대 중반 윤준희(尹俊熙)·임국정(林國楨)·최이붕(崔以鵬) 등과 함께 비밀결사인 철혈광복단을 조직하였다. 철혈광복단은 1919년 3월 13일 룽징(龍井) 만세시위를 이끌었고, 그해 7월 북간도의 민족운동 방향을 평화시위에서 무장투쟁으로 전환하기로 결정하는 등 북간도 지역 독립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철혈광복단에서 활동하면서 당시 남만주에 본거를 두고 있던 북로군정서에 가입하여 특파원으로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19년 9월 비밀 편지를 받고 기독교 병원 뒤에 위치한 공동묘지에서 윤준희·임국정 두 명과 만났다. 윤준희 등은 상부의 지시에 따라 같은 해 12월에 조선은행 회령(會寧)지점에서 거액의 현금이 다음 해인 1920년 1월경 룽징으로 송금될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1920년 1월 특파대장 윤준희, 특파원 임국정·최이붕 등과 함께 자금을 탈취하여 독립군 양성과 무기 구입자금으로 충당하기로 결정하였다.
1920년 1월 2일 동지이며 조선은행 룽징출장소 직원인 전홍섭(全弘燮)으로부터 이 달 4, 5일경 현금 15만원이 룽징으로 송금될 거라는 연락을 받은 후 박세웅(朴世雄)·김준(金俊)을 새로이 포섭하여 계획을 실행해나갔다. 같은 달 4일 6명의 대원을 2개 조로 나누어 허룽현(和龍縣) 동양리(東陽里)에 매복하였다. 현금을 싣고 다가오는 호송순사 구니토모(國友嘉相次)와 진길풍(陳吉豐)을 사살하고 현금을 탈취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에 「용정 15만원 탈취 사건」으로 불렸다.
1월 10일 동지들과 자금을 나누어 소지한 두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신한촌(新韓村)에 도착하였다. 탈취한 자금으로 당시 그곳에 출병하였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무기를 다량 구입하여 북로군정서에 제공하였다. 북로군정서에서는 이 무기를 공급받아 독립군을 신무기로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후일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일제 경찰의 밀정 엄인섭(嚴仁燮)의 밀고로 윤준희·임국정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제 헌병에게 붙잡혔다. 일제 헌병대에서 모진 악형을 당하다가 청진(淸津)으로 압송되었다. 청진지방법원과 경성복심법원을 거쳐 1921년 4월 4일 고등법원에서 이른바 강도살인죄,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사형을 받았다. 그해 8월 25일 서대문감옥에서 동지 윤준희·임국정과 함께 형 집행으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