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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곽우영 郭宇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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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곽우영
한자명 郭宇盈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순천(順天)
생몰년월일 1874. 7. 4 ~ 1931. 5. 30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목포부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8일 전남 목포부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10)

1874년 7월 4일 전라남도 순천군(順天郡) 순천면(順天面) 영정(榮町, 현 순천시 영동)에서 태어났다.

목포의 만세 시위는 양동교회 교인들과 정명여학교, 영흥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 도쿄(東京)에서 2·8독립선언에 참가하고 돌아온 남궁혁(南宮赫) 등 유학생을 통해 목포에는 일찍부터 독립운동 소식이 전해졌다. 이어서 서울의 3·1운동 소식이 들려오자, 목포에서도 만세 시위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만세 시위는 두 방향에서 준비되었다. 우선 남궁혁이 친구 박상렬(朴相烈)을 비롯하여 오도근(吳道根)·김영주(金永周)·권영례(權寧禮)·오재복(吳在福)·이금득(李今得) 등을 모아 시위 계획을 세우고, 박상렬의 부친이 운영하고 있던 신흥철공업의 등사판을 이용해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조선독립광주신문 등을 인쇄하였다. 거사 일은 4월 8일로 정하였다.

목포 정명여중 독립선언서 [판형4]

같은 기간 양동교회에서도 만세 운동이 준비되고 있었다. 양동교회 장로로서 서상봉(徐相鳳)·서화일(徐化一)·박복영(朴福永)·박여성(朴汝成) 등 교인들과 시위 계획을 세웠다. 거사 일은 남궁혁 등과 함께하기 위해 4월 8일로 정하였다. 이어서 양동교회 지하실에서 태극기 등을 인쇄하였으며, 정명여학교와 영흥학교 학생들에게도 권유하여 태극기를 제작하도록 하였다. 제작한 태극기와 선언서, 경고문은 양동교회 교인들이 목포 곳곳에 배포하였다.

거사 당일인 4월 8일 오전 10시경 양동교회 교인들과 함께 시내로 나가 만세를 외쳤다. 시내 곳곳에서 만세 함성이 들려왔다. 군중을 이끌고 목포 시내를 행진하면서 만세를 고창하였다. 당황한 경찰과 헌병들이 무장한 채 해산을 강요해 정오 무렵 시위대는 흩어졌다. 이날 시위의 주동자로서 관련자 80여 명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가연⋮

|참고문헌|

「권영례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 7.19 ; 「木浦騷擾犯人」, 『매일신보』 1919.4.2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3권 삼일운동사(하), 1971.
  • 유달산의 3·1운동기념탑(전남 목포)
  • 목포 정명여중 독립선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