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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고윤원 高允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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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고윤원
한자명 高允源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기도 고양(高陽)
생몰년월일 1893. 8. 5 ~ 1950. 8. 1
운동계열 만주방면
관련 단체 대한독립단
관련 사건
주요 활동 대한독립단 국내 지단 설립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93년 8월 5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독도면(纛島面) 면목리(面牧里, 현 서울특별시 중랑구 면목동)에서 태어나 농업에 종사하며 살았다.

1919년 5월경 양주군(楊州郡) 구리면(九里面) 상봉리(上鳳里)에서 친분이 있는 최승환(崔承煥)을 만나 독립운동 계획을 공유하였고,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의 조맹선(趙孟善)·김유성(金有聲)과 연락하며 국내 정보를 전달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그리고 장차 국내로 들어올 대한독립단, 즉 독립군을 맞이할 목적으로 독립군환영단(獨立軍歡迎團)을 조직하였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 선전물을 배포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는 데 노력하였으며, 이에 김일원(金一源)·한진교(韓震敎) 등이 합류하여 선전물 제작을 계획하였다.

대한독립단은 1919년 3월 13일 중국 펑톈성(奉天省) 류허현(柳河縣) 삼원포(三源浦)에서 조직되었다. 보약사(保約社)·항약계(鄕約契)·농무계(農務契)·포수단(砲手團) 등의 단체가 통합하여 만들어졌다. 대한독립단 주요 간부로 도총재 박장호(朴長浩), 부총재 백삼규(白三圭), 단장 조맹선, 사한장(司翰長) 김기한(金起漢), 총참모 조병준(趙秉準) 등이 있었다.

해동불교청년회(海東佛敎靑年會)를 통해서도 대한독립단 활동을 진행하였다. 1920년 4월 함남 함흥에서 조직된 해동불교청년회는 포교 활동을 가장하여 국내 각지에 대한독립단 지단을 설치할 계획을 세웠다. 회장 이범대(李範大)가 중국 관뎬현(寬甸縣) 왕보석(王寶石)에 있는 대한독립단에서 군자금 모집원 겸 시찰장(視察長)의 직책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에 국내 각지의 유생, 승려들을 대한독립단에 가입시키고 단비로 1원씩 징수하고자 하였으며 부자들을 대상으로 군자금을 모집하려고 하였다. 인원이 늘어나자 부서를 정하여 단원 명부를 작성하고 독립운동 선전물을 인쇄하는 등의 활동도 병행하였다.

1920년 8월경 최승환과 국내로 잠입한 대한독립단 사한장 김기한의 권유로 대한독립단 지단에 가입하였다. 김기한은 1919년 11월경 국내 각지에 대한독립단 지단 설치, 선전물 배포, 단원 및 군자금 모집의 명령을 받고 국내에 잠입하였다. 중국 지린(吉林)에 대한독립단 본부를 두고, 서울에 총기관, 각도에 지단을 설치하고 군대를 모집하여 대한독립단 본부의 국내 진입에 맞춰 전투할 계획이었다. 이때 대한독립단 지단에 가입하였고, 안영기(安永基)의 집을 빌려 김기한이 숨어 지낼 수 있도록 하였으며 선전물 인쇄를 도왔다.

경기도 단원 손명근(孫命根) 등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과 관련한 모든 활동이 드러났다. 1921년 4월 17일 동대문경찰서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았고 같은 해 5월 16일 검사국에 압송되었다. 1921년 9월 30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및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호진⋮

|참고문헌|

「판결문」, 경성지방법원, 1921.9.30 ; 「朝鮮獨立團檢擧」, 『동아일보』 1921.4.17 ; 「獨立軍歡迎團을 조직한 高允源, 동대문서에 톄포」, 『동아일보』 1921.5.17 ; 「被捉事件一束」, 『독립신문』 1921.5.25 ; 「判決事件一束」, 『독립신문』 1921.10. 14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 제Ⅰ권 분책』, 도쿄 : 原書房,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0집 : 독립군전투사자료집, 197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자료집』 제14집 : 대중투쟁사자료집, 1978.
  • 류허현 삼원포에 있었던 대한독립단 본부 터(중국 지린)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1.9.30)
  • 항일 봉기를 촉구하는 대한독립단 경고문(1919.7)
  • 고윤원 체포 보도 보도(『동아일보』 1921.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