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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점필 權點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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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점필
한자명 權點弼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권점필(權點必)
출신지 경상북도 안동(安東)
생몰년월일 1896. 1. 6 ~ 1944. 1. 18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18일 경상북도 안동군 안동면 만세시위 참여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5)

1896년 1월 6일 경상북도 안동군(安東郡) 안동면(安東面) 법상동(法尙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이명은 권점필(權點必)이다.

안동의 독립 만세 시위에는 1919년 3월 13일부터 3월 27일까지 모두 14회에 걸쳐 1만여 명이 참가하였다. 안동군 19개 면 중 11개 면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안동면의 만세 시위는 기독교계와 송기식(宋基植) 등의 유림계에 의해 준비되었다. 안동교회 목사 김영옥(金泳玉), 장로 이중희(李重熙)는 도쿄 유학생 강대극(姜大極)과 안동군청 서기 김원진(金元鎭)의 권유에 따라 3월 13일 안동면 장날에 맞춰 거사를 준비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재명(金在明)은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향하여 아버지인 안동교회 장로 김병우(金炳宇)와 함께 시위 준비에 가담하였다. 하지만 사전에 계획이 발각되어 거사 전날인 3월 12일에 강대극·김원진·김영옥·이중희 등이 체포되며 시위는 진행되지 못하였다.

다행히 체포를 피한 김병우를 비롯하여 김계한(金啓漢)·김익현(金翊顯)·이인홍(李仁洪)·황인규(黃仁圭) 등은 다음 장날인 3월 18일의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송기식을 비롯한 유림 역시 김병우와 연락하며 만세 시위를 준비하였다.

3월 18일 낮 12시경, 30여 명의 기독교인과 함께 안동면 삼산동(三山洞) 곡물전 앞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남문통과 북문통을 오가며 행진에 앞장섰다. 유림이 이끄는 시위대가 동문통부터 행진하여 합류하였다. 경찰과 군인의 제지로 시위대가 해산하면서 14명이 체포되었다. 오후 4시경, 기독교인 60여 명과 함께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며 다시 만세 시위를 벌였다. 밤이 되면서는 시위 군중이 더 많아져 자정을 넘어서는 2,5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관공서로 몰려가 구속자 석방을 요구하였고, 경찰과 수비대가 총을 쏘면서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로 인해 일제에 붙잡혀 4월 7일 대구지방법원 안동지청에서 이른바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항소하였으나, 5월 2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였고, “조선 신민으로서 조선 독립에 대해 기뻐서 축하의 만세를 부른 것뿐이고 보안법 위반이 될 만한 행위는 하지 않았다”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으나 6월 5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당해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김정인⋮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4.9 ; 「판결문」, 고등법원, 1919.6.5 ; 『경상북도경찰부 편, 『고등경찰요사』, 1934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3, 1970 ; 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경상북도사』(중), 1983 ; 안동교회, 『안동교회80년사』, 1989 ; 광복회 대구경북연합지부, 『대구경북항일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안동의 독립운동사』, 안동시, 1999 ; 김희곤, 『안동 사람들의 항일투쟁』, 지식산업사, 2007 ; 김희곤, 『안동독립운동인물사전』, 선인, 2010 ; 경상북도 편,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201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