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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권 金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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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권
한자명 金權
본 관  
이 명  
출신지 경기도 고양(高陽)
생몰년월일 1924. 6. 25 ~ 1996. 4. 10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광복군 2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 편입되어 광복군 모집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24년 6월 25일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중면(中面) 일산리(一山里, 현 고양시 일산서구 일산동)에서 태어났다.

1943년 10월 20일에 공포된 일제의 ‘조선인학도 육군특별지원병제’에 의해 강제징집되어, 1944년 1월 20일 일본군에 입대하였다. 2월 중국 저장성(浙江省) 사오싱현(紹興縣)에 주둔한 일본군 히노키(槍) 부대에 배치되어 복무하였다. 일본군 복무 중에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할 것을 맹세하고, 1944년 7월 10일 동기 이희화(李熙和)와 함께 부대를 탈출하였다.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후, 중국군의 도움을 받아 장시성(江西省) 상라오시(上饒市) 옌산현(鉛山縣) 하구진(河口鎭)에 있던 중국 중앙군 제3전구로 갔다. 사오싱에서 하구진으로 가는 도중에 당시 저장성 진화시(金華市) 이우(義烏)에 주둔하고 있던 요코이(橫井) 부대를 탈출한 학도병 김영관(金榮觀)·신의철(申義澈)·박승유(朴勝裕) 등을 만나 동행하였다.

이후 중국 중앙군 제3전구 내 충의구국군(忠義救國軍)에 들어가 항일 활동을 하였다. 충의구국군은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반공주의자 다이리(戴笠)가 상하이(上海)에서 민중들을 모아 조직한 별동무장대의 후신이었다. 1938년 5월 충의구국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중국 국민당 정부의 방침에 동조하며, 국민당 군사위원회 별동군으로 공산당 팔로군과 일본군에 저항한 부대였다. 충의구국군에서 유격 활동을 한 광복군 출신으로는 박철원(朴哲遠)·유재영(柳在榮), 그리고 같은 히노키 부대에서 근무한 이희화 등이 있으며, 일본군 부대를 탈출한 많은 한인 사병이 광복군에 입대하기 전 활동한 부대였다.

충의구국군에서 활동하던 중 징모 제3분처 주임 김문호(金文鎬)를 만났다. 김문호는 징모 제3분처 위원 신정숙(申貞淑)과 함께 상라오와 하구진 일대에서 충의구국군과 합동으로 공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징모 제3분처 공작원과 함께 일본군 점령 지역에서 지하공작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강제 징병된 한국인 사병 및 애국 청년들의 초모(招募) 활동을 하고, 모집된 병력을 시안(西安)으로 후송하는 일을 맡기도 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원 기념사진 [판형4]

그 뒤 충의구국군 난징(南京) 지구 한국인 지하공작 책임자로 있던 장동식(張東植)의 권유로 이희화 등 10여 명과 함께 1945년 광복군에 입대하였다. 광복군 제2지대 제3구대 강남분대에 편입되어 광복군 모집 및 일본군 정보 수집 등의 공작 활동을 전개하다가 광복을 맞아 조국으로 돌아왔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82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여성구⋮

|참고문헌|

김승학 편,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65 ; 추헌수 편, 『자료한국독립운동』 3권, 연세대학교출판부, 1973 ;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독립운동사』 5권, 196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4권, 1972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6권, 1975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남 탓 하지 말고 자신부터 책임지는 자세 절실” 인터뷰-김영관 광복군 동지회장」, 『국방일보』 2011.12.13 ; 「나는 91살의 ‘광복군’, 나라 잃은 아픔 뼈에 새긴 작은 태극기 - 애국지사 김영관 할아버지, 역사의 페이지에 녹아든 삶의 기록」, 『뉴스한국』 2015.12.12.
  • 광복군 제2지대원 기념사진
  • 김권
  • 한국광복군 국내 제2지대 설치 위임장(김승학)
  • 한국광복군 사열사진
  • 광복군 제2지대원 기념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