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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군남 金君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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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군남
한자명 金君南
본 관  
이 명  
출신지 평안북도 박천(博川)
생몰년월일 1916. 3. 8 ~ 2001. 4. 4
운동계열 광복군
관련 단체 광복군 3지대
관련 사건  
주요 활동 광복군 제3지대 입대 첩보·선무 공작 담당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916년 3월 8일 평안북도 박천군(博川郡) 박천면(博川面) 남부동(南部洞)에서 태어났다.

1942년 중국으로 건너가 동북 지방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43년 중국 쉬저우(徐州)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하였다. 당시 쉬저우 지역에 배치된 일본군 부대에는 1944년 1월 20일 학도병으로 강제징집된 한인 사병이 많았다. 쉬저우는 일본군 내 한인 사병의 탈출을 도모하여 광복군으로 삼으려 하였던 제3지대에는 매우 중요한 작전 지역이었다.

1943년 9월 광복군 제3지대 지대장 김학규(金學奎) 휘하에서 제3지대 군수주임을 맡아 지대원의 첩보·선무 공작을 지원하였다. 1944년 9월 한중특별유격대에 편입되어 한중 연합 작전에도 참가하였다. 9월 하순 송병하(宋炳河)·이영수(李英守) 등과 함께 모집한 예비 병사를 지대 본부가 있는 푸양(阜陽)으로 후송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

미OSS특무부대 주둔지(중국 푸양) [판형2]

1945년 1월부터 추진된 제3지대와 미국 전략사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 : OSS)과의 합작 무전 훈련이 무산되었지만, 2차로 다시 추진되면서 OSS 무전훈련반의 훈련본부요원으로 선발되어 미군 연락장교로 활동하였다. 4월 하순 김학규 지대장은 본부 산타지(三塔集)에서 OSS 무전훈련반의 조직을 편성하였다. 간부 2명, 요원2명, 훈련대원 20명을 선발하였다. 무전훈련반 총책임자 엄도해(嚴道海), 훈련내장 윤영무(尹永茂, 일명 양일한), 훈련본부 요원 조병팔(趙炳八), 훈련대원 김영일(金永逸)·김용관(金容寬) 등 선발대원들은 5월 초 푸양을 떠나, 5월 상순 리황(立煌) 오가점(吳家店) 비행장 근처 미군 막사에 여장을 풀고 3개월 과정 훈련에 들어갔다. 이때 제3지대 본부와 미군과의 연락을 담당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1945년 7월 7일 24명의 대원들이 3개월 예정으로 훈련에 착수하였지만 기초교육 과정이 진행되던 중 일제가 패망해 국내 진공작전(일명 독수리작전)을 실행하지 못하였다.

1945년 8월 광복 후 린취안(臨泉)의 미군부대에서 제3지대 본부가 있는 류자이(劉塞)로 복귀하였다가 부지대장의 명에 의하여 쉬저우지구 특파단으로 파견되었다. 특파단 단장은 린취안에서 지대장을 수행하던 변영근(邊榮根), 부단장은 최광성(崔光星)이었고, 단원은 20여 명이었다. 특파단은 일본군 부대 내에 억류되어 있는 한인 사병들을 인수하여 ‘잠편지대’(暫編支隊) 또는 ‘직할대대’(直轄大隊)를 편성하고, 궁극적으로 광복군 10만 대군을 양성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었다.

또한 교포들의 정신 자세 확립, 특히 독립국 국민의 긍지를 위하여 시국 강연, 잡지 출판, 연극 등을 통한 각종 순화 작업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중국군과의 우호 촉진과 협력 방안을 모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수여하였다.

⋮여성구⋮

|참고문헌|

김승학, 『한국독립사』 하권, 독립문화사, 196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6권, 1975 ; 국가보훈처 편, 『독립유공자공훈록』 5권, 1988 ; 김문택, 『새벽으로 가는 길』, 인하대학교 출판부, 1995 ; 김광재, 『한국광복군』,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7 ; 金祐銓, 「韓國光復軍과 美國OSS의 共同 作戰에 관한 硏究」,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 「애국지사 김군남선생 별세」, 『동아일보』 2001.4.4 ; 「애국지사 김군남옹 별세」, 『국민일보』 2001.4.5.
  • 김군남
  • OSS대원과 김학규(1945.7)
  • 한국광복군대원들
  • 미OSS특무부대 주둔지(중국 푸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