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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규면 金圭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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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규면
한자명 金圭冕
본 관  
이 명 호 白秋, 金規免, 학봉(學奉), 金洙千, 金基三, 南七
출신지 함경북도 경흥(慶興)
생몰년월일 1880. 3. 12 ~ 1969. 2. 2
운동계열 노령방면
관련 단체 신민단,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대한의용군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보, 상해청년동맹
관련 사건 3.1운동, 봉오동전투, 자유시참변,
주요 활동 신민단 단장, 한인사회당부위원장, 3.1운동 이후 간도와 러시아연해주, 흑룡주의 항일무장투쟁을 지도, 고려공산당 부위원장으로 사회주의운동에 관계, 상해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 교통차장총장대리로 활약, 중국의 북벌에 참여하는 등 중한연대활동에도 참여
포상훈격(연도) 독립장(2002)

1880년 3월 12일 함경북도 경흥군(慶興郡) 상하면(上下面) 태양동(太陽洞, 두루봉촌)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백추(白秋)이고, 이명은 김규면(金規免)·학봉(學奉)·김수천(金洙千)·김기삼(金基三)·남칠(南七)이다. 단 1881년 3월 12일 출생했다는 의견이 있다. 서울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와 무관학교 속성과를 졸업하였다.

1907년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신교육운동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제의 한국 강점 이후 교육의 자유가 사라지자 침례교에 입교하여 교사와 목사로 활동하였다. 1914년 침례교 교단이 말콤 펜윅(Malcom C. Fenwick)의 후계자를 둘러싸고 분열되자, 서양 선교사들의 교리와 교회 운영 방식, 특히 조선총독부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를 비판하며 “국외(외국인선교사)로부터의 독립”이란 기치를 내세우며 스스로 성리교(聖理敎)라는 ‘독립교회’를 창설하고 그 감독에 취임하였다. 외국인 선교사들에 종속적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며, 주로 북한·만주·연해주 지역의 기독교도들을 규합하여 300여 교회와 신도수 3만 명에 달할 정도로 교세를 확대하였다. 1915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포교규칙(布敎規則)을 제정하자 총독부에 자신의 교회를 등록할 것을 거부하였다. 1917년 태평양서원(太平洋書院)을 설립하여 교재 발간·배포를 통한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3·1운동 직전 한·중·러 국경지대인 훈춘(琿春)에서 자신의 독립교회 핵심교도 200~300명을 주축으로 군사행동을 주요 활동 목표로 하며, 신민회를 계승한다는 취지의 대중적인 비밀 군사조직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을 창설하였다. 창립 직후인 1919년 3월 12일, 발표한 헌법과 강령에서 신민단은 ‘지연(地緣)에 기초한 파벌과 부당한 야망의 타파에 의한 민주제’에 의한 ‘조국의 완전한 독립’과 당파 초월의 ‘민족대동주의(民族大同主義)’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동휘(李東輝)와 비밀 회동을 가진 후, 1919년 4월 신민단을 한인사회당(韓人社會黨)과 통합시켰다. 대회에서 한인사회당 부의장 겸 군사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통합 후에도 신민단은 훈춘과 북간도에 지부를 유지한 채,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로 옮겼는데, 이 지역 기독교 신도들 사이에서 세력을 확장하였다. 1920년 4월 6일 상하이(上海)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의해 러시아령의 독립자금 모집을 통일적으로 책임질 재무관서(財務官署)의 재무관으로 선임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김규면(앞줄 왼쪽 첫번째, 1920) [판형2]

한인사회당 김립의 제안에 따라 신민단 자금 500원을 한인사회당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박진순·박애·이한영) 파견 비용으로 제공하였다. 1920년 7~8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코민테른 제2차대회에 참여하여 대회가 채택한 선언서에 한인사회당 대표 박진순과 함께 한인 빨치산 대표로서 서명하였다. 창립 이후 신민단은 항일 무장투쟁을 위한 군인과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로부터 무기 구입과 운반 활동을 전개하였다. 신민단 군대는 훈춘현(琿春縣) 동거우(東溝) 초모정자(草帽頂子)에 근거하여 훈춘구역 부단장(副團長) 신우여(申禹汝)의 지도하에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한편, 일부 군대는 북간도로 이동하였다. 이동한 신민단 군대는 1920년 6월초 봉오동전투와 10월말 청산리대첩에 참여하였다.

1920년 여름 러시아 연해주 수청 지방 한인 마을들에 마적(홍의적) 토벌을 목적으로 정재관(鄭在寬)·박춘성(朴春成)·김경천(金敬天) 등과 창해소년단(滄海少年團, 또는 창해청년단)을 조직하고 (명예)단장으로 추대되었다. 창해소년단은 본부를 수청 다우지미에 설치하고 수청 지역을 3개 구역(우지미, 칫쿤, 신영거우)으로 나누어 지부를 설치하였다. 1920년 8월 말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훈춘 초모정자에서 신민단 간부총회를 개최하였는데, 박경철(朴景喆)·장기영(張基永)·신우여·한경서(韓京瑞)·이승조 등 신민회 간부들과 한민회 간부들이 참석하였다. 총회에서는 무장 활동은 모연대(募捐隊)와 연락대의 일부만 남기고, 후일을 대비하여 무기를 암치(暗置)하고 각 지방에 흩어져 지방대를 조직하고 선전과 조직 사업을 전개하고 신민단과 한민회 간의 협력을 결의하였다. 이후 일제가 만주 침략과 경신참변을 일으키자 신민단 지휘부와 독립군들은 러시아 연해주 각지로 퇴각하였다. 신우여·한경서는 추풍(秋風, 수이푼)으로 가서 솔밭관군대에, 박경철·고상준·이승조·고상준은 아누치노를 거쳐 수청으로 가서 혈성단 또는 한창걸군대 등 수청빨치산부대에 합류하였다.

일제 측의 김규면에 관한 보고(1921.11.2) [판형2]

이동휘·김립·박진순과 함께 ‘한인사회당 총간부’의 명의로 소집되어 1921년 5월 20~23일 상하이에서 개최된 ‘제3회 한인사회당 대표회’에는 불참하였으나 대표회에서 창립된 고려공산당(상해파)의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상해파 계열 한인부(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원동부 소속)의 주도로 1921년 3월 러시아 마사노프에서 개최된 ‘전한의병대회’에서 결성된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 전한군사위원회에 참여하였다. 간도의 독립군부대와 연해주의 한인 빨치산군대들을 통합하고 군수품 보급을 위해서 한형권이 가져온 모스크바 자금 일부인 4만 루블을 사용하였다.

이 전한군사위원회는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에서 조직한 고려혁명군정의회와 이를 후원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극동비서부)의 탄압을 받아 자유시참변(1921.6.28) 당시 많은 사상자를 내고 무장해제당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참변 당시 코민테른 동양비서부(극동비서부) 부장 슈미야츠키(Boris Shumiatsky)와 그의 후원을 받은 국민의회(國民議會)와 이르쿠츠크파 연합 세력의 체포와 총살 위협에 맞서 싸웠다. 국민의회 측의 무고를 받아 상해파 인사 12인과 함께 일시 정치보호부에 감금되었고, 국민의회의 김기룡이 체포하러 왔지만 흑룡주(아무르주) 당국의 보호로 위기를 면하였다. 자유시참변을 피해온 박일리아(朴允天)와 함께 원동공화국의 인민혁명군 후방사령부에 소속되어 군인과 피복신발 등 위문품을 모집하여 전선으로 보내는 사업을 하였다. 이후 서간도에서 이동해온 군비단(軍備團)과 이만의 독립군들이 연합하여 1921년 8월 말 이만에서 ‘고려의용군사의회(군사위원회)’을 조직하자(위원장 마용하, 비서 임상춘, 사령관 이용, 군정위원 최태열 등)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23년 1월부터 6월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상해파이면서도 박애·김정하와 함께 중립파에 속하였다. 당시 창조파가 러시아령에 ‘신정부’를 수립하고 군무총장으로 선임되었다는 풍문이 돌기도 하였다. 결국 창조파(創造派)가 조직한 국민위원회의 위원(위원 총수 32명)으로 선출되었으나 참여하지 않았다. 원동해방전쟁(시베리아내전) 종결 후인 1923년 중국으로 가 중국노동자 파공운동(罷工運動)에 가담하였다. 1924년 4월 상하이에서 윤자영(尹滋瑛)·현정건(玄鼎健)·김상덕(金尙德) 등이 결성한 청년동맹회(靑年同盟會)에 가입하였는데, 그 기관지로 1925년 3월에 창간한 월간잡지 『거화(巨火)』 사의 사장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 5월 30일 이래 중국 각계 단체의 배영(排英)·배일(排日) 운동이 일어났다(5·30사건). 특히 상해대학학생연합회(上海大學學生聯合會)가 반제 운동의 일환으로 동맹휴교와 시위운동을 계획하고 각 대학교와 중학교에 격문을 배포하자, 윤자영·이범홍(李範洪)·조덕진(趙德津)·김호(金浩)·이덕환(李德煥) 등과 함께 청년동맹을 대표하여 6월 5일 상해대학학생연합회를 방문하여 동정의 뜻을 표하고, 일영(日英) 배척 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응원하겠다는 뜻을 전달하고 배일(排日) 전단 수천 부를 상하이 프랑스 조계 내외 지역에 살포하였다.

1924년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5월 26일에는 이동녕 내각의 교통총장대리차장대리로 선임되었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당시 『독립신문』에 백추(白秋)라는 필명으로 「독립 완성의 기일(期日)은 조직 완성의 당일(當日)로」라는 제목의 장문의 글을 기고하였다. 독립을 완성하기 위한 조직의 완성이 필요함을 역설하되 “평민사회적 국민조직으로 토대 삼고 민중혁명조직으로 주초(柱礎) 삼아 하층구조부터 주력”할 것을 제시하였다.

1925년 5월 9일 중국의 국치기념일(21개조 10주년)에 즈음하여 조소앙·여운형·김상덕·최창식·현정건·손두환 등 30인과 함께 상하이 서문 밖에서 열린 배일 중국인 단체 집합에 참여하여 한중 연합의 항일 투쟁과 공수 동맹을 역설하는 『상해주간(上海週刊)』 특별호를 배포하였다.

독립운동가 김규면 [판형2]

1926년에 시작된 국민당군의 북벌에도 참여하여 한인 동지들을 동원하였다. 그리하여 1926년 3월 북간도 왕칭현(汪淸縣) 동선촌(東鮮村)에 거주하는 동지 김성심(金成心)에게 편지를 보내 광동공산당이 경영하는 학교에 간도지방 한인청년학생들의 입학 권유를 부탁하였다. 이는 졸업 후 동양 혁명과 한국 혁명에 기여할 수 있는 역량 있는 요원들을 양성하려는 뜻이 담겨 있었다. 1927년 장제스(蔣介石) 반공 쿠데타로 많은 동지가 희생되고 국민혁명이 좌절된 뒤 연해주(沿海州)로 돌아와 블라디보스토크의 한 서점에서 동양 서적 판매원으로 일하였다.

1931년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과 고려공산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 재조직 사건에 관여하여 검거될 당시 탈주하였으며, 1933년에는 빨치산꼬미씨야(Commission)에서 빨치산 참여자들에 대한 증명서 발급 업무를 담당하였다. 1934년부터 모스크바 그르임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1969년 2월 2일 사망하였다.

말년에 『이동휘(李東輝) 성재(誠齎) 약전(略傳)에 관한 회상기』, 『노병 김규면의 비망록에서』, 『이만전쟁』 등 직접 관여한 항일 혁명 운동에 대한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반병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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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가 김규면 외
  • 「임시정부 신계획」(『신한민보』 1924.6.26)
  • 김규면
  • 한인사회당자료
  • 「음모단의 각 계통」(『매일신보』(1921.1.7)
  • 「선인에 관한 건」(1920.9.22)
  • 일제 측의 김규면에 관한 보고(1921.11.2)
  • 블라디보스토크의 김규면(앞줄 왼쪽 첫번째, 1920)
  • 독립운동가들 김규면 외
  • 독립운동가 김규면
  • 김규면과 그의 아들 김호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