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명곤 金明坤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명곤
한자명 金明坤
본 관  
이 명  
출신지 전라남도 해남(海南)
생몰년월일 1886. 1. 18 ~ 1922. 8. 10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해남면 만세시위
주요 활동 1919년 4월 6일 해남군 해남면 만세시위 주도
포상훈격(연도) 대통령표창(1993)

1886년 1월 18일 전라남도 해남군(海南郡) 황산면(黃山面) 한자리(閑子里)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해남군 해남면(海南面) 고도리(古道里)에 거주했으며, 해남면에 있던 해남공립보통학교(海南公立普通學校) 학생이었다.

1919년 4월 해남보통학교 학생 김규수(金奎秀)는 만세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다는 소식을 듣고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1일 밤 김규수는 학교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잠든 후 신건희(申健熙)·김한식(金漢植)에게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벌어지는 만세 시위 소식을 전하며 독립운동을 권유하였고, 이들은 이에 찬성하였으며 윤옥하(尹玉夏) 역시 찬동하였다. 4월 2일 김규수·임영식(任永植)·김한식은 학생 윤준하(尹俊夏)·박동렬(朴東烈)·이사국(李士國) 등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당시 해남보통학교 학생으로서 4월 3일 학교 기숙사에서 학생 박천홍(朴天洪)에게 시위 참여를 권유받고 진홍수(陳洪洙) 등과 함께 동의하였다. 4월 5일 오후 3시경에는 김규수·김현태(金鉉泰)·신건희·임영식·윤옥하·윤준하·박동열·박천홍 등과 함께 학교 기숙사에 모여 다음날인 6일 해남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를 벌일 것을 결의하였다. 또한 졸업생 등과 함께 태극기를 제작하였다.

4월 6일 해남면 장날을 기해 장터에 모인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이들과 함께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몰려든 시위대의 숫자가 적었던 데다 처음부터 경찰의 심한 감시로 인해 시위는 오후 3시 무렵 해산되었고, 시위를 주도했던 15명과 함께 경찰에 붙잡혔다.

1919년 5월 6일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청에서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4개월 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고태우⋮

|참고문헌|

『판결문』, 光州地方法院 長興支廳, 1919.5.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 1969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3, 1977 ; 김진호·박이준·박철규, 『국내 3·1 운동-2 남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김명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