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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청학 權淸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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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청학
한자명 權淸學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출신지 경상북도 달성(達城)
생몰년월일 1899. 4. 15 ~ 1981. 12. 13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동화사 지방학림
관련 사건 대구부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30일 대구부 만세시위에 참여
포상훈격(연도) 애족장(2007)

1889년 4월 15일 경상북도 달성군(達城郡, 현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兪伽面) 음동(陰洞)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1919년 3월 당시 달성군 공산면(公山面) 도학동(道鶴洞, 현 대구광역시 동구 도학동)의 동화사(桐華寺)가 운영하는 지방학림(地方學林, 현 동화사 승가대학)의 학승(學僧)이었는데, 이때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

대구 지역 3·1운동은 1919년 3월 8일 서문밖 시장과 3월 10일 덕산정(德山町) 시장 곧 남문밖 시장, 그리고 3월 30일 남문밖 시장 만세 시위로 크게 3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가운데 3월 30일 만세 시위는 도학동 팔공산(八空山)에 있는 동화사의 지방학림 학승들이 주동하여 일어났다. 3월 23일 불교중앙학교 학생 윤학조(尹學祚)가 동화사로 내려왔다. 그는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들을 만나 서울 지역 만세 시위 상황과 불교계의 만세 시위 참여 소식을 전하며, 이곳 학생들도 만세 시위에 적극 참여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처음에는 공산면 백안(百安) 시장에서 시위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좀 더 효과적으로 전개하려고 장꾼들이 많이 나오는 대구 남문밖 시장에서 일으키기로 하였다. 3월 28일 김문옥(金文玉)과 함께 지방학림 학생 전원을 동화사의 심검당(尋劍堂)으로 모이게 하였다. 여기서 김문옥과 함께 “신문기사를 보아 알 수 있듯이 국내 각지에 있어서는 이미 독립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도 조선 민족의 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라고 발의하자 모인 학생 전원이 찬성하였다. 이어서 만세 시위를 일으킬 장소는 남문밖 시장, 일자는 오는 장날인 3월 30일로 정하고 준비를 서둘렀다.

하루 전날인 3월 29일 지방학림 학생 9명은 태극기 등 준비물을 숨겨서 동화사를 출발하여 대구부 내 동화사 출장소인 김상의(金尙儀) 집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30일 날이 밝자 김문옥과 함께 준비해 온 천으로 큰 태극기를 만들어 긴 장대에 달아 들고 학생들과 함께 남문밖 시장으로 들어갔다. 오후 2시경이 되자 장을 보러 나온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학생들은 시장 한가운데서 준비한 큰 태극기를 펼쳐 높이 세우고, 작은 태극기를 장꾼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대한 독립 만세”라고 크게 외쳤다. 군중도 모두 호응하였다. 학생들이 선두에 서고 군중이 뒤를 따르면서 시장 안은 순식간에 대규모 만세 시위의 장으로 변하였다. 이에 황급히 달려온 경찰들은 총칼로 위협하여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는 데 안간힘을 다하였다. 이때 동화사 지방학림 학생 김문옥·이성근(李成根)·이보식(李普植)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9명의 주도 인물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19년 4월 15일 이성근 등 학생 8명과 함께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항소를 제기하였으나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고, 다시 상고하였으나 7월 3일 고등법원에서도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옥고를 겪었다. 지방학림도 약 1개월 동안 강제 휴교를 당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4.15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5.19 ; 「판결문」, 고등법원, 1919.7.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권·9권 ;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2013 ; 권영배, 「대구지역 3·1운동의 전개와 주도층」, 『조선사연구』 6, 1997.
  • 동화사 포교당 3·1운동 만세의거지(대구 중구)
  • 판결문(고등법원, 19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