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구 李吉求 |
한글명 | 이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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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李吉求 |
본 관 | |
이 명 | |
출신지 | 서울 |
생몰년월일 | 1898 ~ 1926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관련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국민대표회의 |
관련 사건 | |
주요 활동 |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가담, 1921년 1월 유일학생회 참여,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의 개최 반대선언 참여, 1924년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 |
포상훈격(연도) | 애족장(2010) |
서울 수창동(需昌洞) 출신이다. 자료에 따르면 1898년생으로 추정된다. 부친은 이헌식(李憲植)이다.
부친 사망 후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천안군(天安郡) 수신면(修身面)에 있는 전답 15,550여 평을 아내 김용순(金容順)과 함께 전부 매매하고 친형 이덕구(李德求)의 토지를 충청남도 공주(公州)의 부호인 최용주(崔龍柱)에게 5만 6천원에 팔았다. 황해도 개성(開城)의 부호로부터 3만 원을 융통하여 약 8만원의 거금을 마련한 뒤 1919년 중국 상하이(上海)로 건너갔다. 이 일로 1919년 12월 26일 이른바 문서위조 사기죄로 일제 당국으로부터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상하이에 도착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가담하였다. 1921년부터 임시정부의 존폐 문제와 독립운동의 방향을 놓고 국민대표회의가 주장되자, 1922년 8월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반대하는 활동에 참가하였다. 김진태(金鎭泰)·이용환(李龍煥)·오복영(吳福泳) 등 39명과 연명하여 이를 반대하고, 임시정부를 유지하자는 내용의 결의문과 선언서를 작성하여 배포하였다. 한편 1921년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서 조사한 상하이 거주 ‘불령선인’ 유력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프랑스조계 내 거주하며 상하이 소재 유일학생회(留日學生會) 회원으로도 활동하였다. 유일학생회는 1921년 10월 일본 도쿄(東京) 유학생의 2·8독립선언을 기념하여 단체의 이름을 이팔구락부(二八俱樂部)라고 개명하였는데, 1921년 9월 말 상하이의 ‘젬마필드’공원에서 운동회 등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24년 3월 12일에 개최된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출한 사면원(辭免願)이 가결되어 임시의정원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이로 보아 그 이전에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퇴하기 이전까지 활동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상하이에서 선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소문에 보도되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이길구 사망 보도(『중외일보』 1926. 12.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