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창영 郭昌榮 |
한글명 | 곽창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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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郭昌榮 |
본 관 | |
이 명 | |
출신지 | 충청남도 아산(牙山) |
생몰년월일 | 1878. 9. 21 ~ 1950. 3. 4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
관련 사건 | 송악면 만세시위 |
주요 활동 | 1919년 3월 31일 아산군 송악면 만세시위 주도 |
포상훈격(연도) | 대통령표창(2010) |
1878년 9월 21일 충청남도 아산군(牙山郡, 현 아산시) 송악면(松嶽面) 거산리(巨山里)에서 출생하였다.
아산 지역의 독립 만세 운동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온양공립보통학교(溫陽公立普通學校) 학생들이 주도하여 1919년 3월 11일부터 3월 15일에 걸쳐 온양 지역을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3월 11일에 내려진 휴교령으로 인해 서울에서 귀향한 학생과 지역의 교사 및 유지들이 결합하여 3월 31일부터 4월 4일까지는 아산군 대부분 지역에서 횃불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3월 31일에는 송악면 궁평리(宮坪里)와 동화리(東花里)의 유지들의 주도로 궁평리·동화리·거산리·역촌리(驛村里)·송학리(松鶴里) 등의 마을 주민이 참여한 횃불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아산 횃불 만세 시위 보도(『매일신보』 1919.4.5) |
궁평리와 동화리의 주도자들로부터 연락받고, 만세 시위에 동의하여 거산리의 횃불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다. 마을 간의 사전 연락을 통해 만세 운동의 날짜로 통지받은 3월 31일 저녁, 최영래(崔永來)·박광래(朴光來) 등과 함께 마을 주민들을 독려하여 산 위로 올라가 횃불을 밝히고 ‘독립 만세’를 고창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다.
이날의 시위 이후 횃불 만세 시위 참여자를 체포 및 검거하려고 출동한 헌병에 체포되어 온양헌병분견소로 연행되었다. 헌병의 조사에서 거산리의 횃불 만세 시위를 주도한 점이 인정되어 즉결심판에 회부되었다. 1919년 4월 25일 즉결심판에서 보안법 위반을 이유로 태형 90도(度)의 처분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0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