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채주 高采柱 |
한글명 | 고채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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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명 | 高采柱 |
본 관 | 제주(濟州) |
이 명 | 고석주(高錫柱) |
출신지 | 경상남도 통영(統營) |
생몰년월일 | 1861. 11. 5 ~ 1920. 6. 21 |
운동계열 | 3.1운동 |
관련 단체 | 자강회, 한인합성협회, 국민회 |
관련 사건 | 통영면 만세시위 |
주요 활동 | 1906년 하와이에서 자강회 조직, 1907년 한인합성협회 조직에 참가, 1909년 국민회 참가, 1919년 4월 2일 통영군 통영면 독립만세시위 주도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1990) |
1861년 11월 5일 경상남도 통영군(統營郡) 통영면(統營面) 당동리(堂洞里, 현 통영시 당동)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고석주(高錫柱)를 사용하였다.
1906년 6월 4일 하와이 카우아이Kauai섬 막가윌리 농장에서 송건·홍종표·이형기·이관묵과 함께 실력 양성과 교육 장려를 목적으로 한 자강회를 조직하였다. 1907년 9월 2일 오전 9시에 개조합동결의안을 통과시키고, 한인합성협회를 조직해서 하와이 한인 전체의 합동을 이루었다. 이때 카우아이자강회 대표로 손창희와 함께 참가하였다. 1908년 10월 23일 하와이의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와 미주의 공립협회(共立協會)가 각기 대표자를 선출하였고, 11월 30일에 합동 발기문을 발표하고 명칭을 국민회(國民會)로 하였다. 이때 하와이한인합성협회 대표로 김성권·민찬호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귀국 후에는 국민회의 국내 연락책으로 활동하였으며, 고향인 통영의 통영향교에서 장의(掌儀)를 지냈다.
1919년 4월 2일 통영군 통영면 부도정(敷島町) 시장 입구에 모인 군중에게 양손을 들고 독립 만세를 크게 외칠 것을 연설한 뒤 선창하였다. 이후 선두에 서서 통영경찰서 앞으로 갔는데, 경찰서에서 나온 직원들이 막고 소방수가 물을 뿌리자 시장 넓은 곳으로 가자고 선동하였다. 시위대와 함께 시장 중앙으로 이동하여 만세 시위를 계속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3·1운동 격문(경남 통영) |
1919년 4월 18일 부산지방법원 통영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다. 항소하였으나 1919년 5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 이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1919년 6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대구감옥에서 복역하였다. 복역 중에 병을 얻어 보석되었으나, 1920년 6월 21일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