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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영만 權寧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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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영만
한자명 權寧萬
본 관  
이 명 권태담(權泰膽), 권태점(權太點)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盈德)
생몰년월일 1877. 3. 15 ~ 1950. 4. 6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 만세시위에서 참가
포상훈격(연도) 애족장(1990)

1877년 3월 15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영해면(寧海面) 괴시동(槐市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권태담(權泰膽), 권태점(權太點)이다. 1919년 3월 18일 영덕군 영해면 성내동(城內洞) 장날에 일어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다.

영덕에서의 3·1운동은 서울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온 김세영(金世榮)이 주도하여 계획하였다. 영덕군 지품면(知品面) 낙평동(洛坪洞)의 예수교 북장로파 교회 조사(助事)였던 김세영은 평양의 신학교에 입학하러 가던 중 잠시 서울에 머물고 있었다. 때마침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고, 평양의 신학교마저 휴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평양 행을 단념하고 귀향하여 영덕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만세 시위 계획은 김세영을 비롯하여 낙평동 교회의 구세군 참위 권태원(權泰源)과 병곡면(柄谷面) 송천동(松川洞) 교회 조사 정규하(丁奎河) 등이 준비하였다. 김세영은 3월 13일에 일본 경찰의 예비 검속에 걸려 체포되었으나, 전날 김세영과 만났던 권태원은 김세영의 말에 따라 정규하와 함께 만세 시위 계획을 구체화하고 함께할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3월 18일 오후 1시경 성내동주재소 앞 시장에서 2.000여 명의 대규모 군중이 참가한 가운데 만세 시위가 전개되었다. 군중 대열에 합류하여 함께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장 부근을 행진하였다. 시위를 주도한 인사들은 단 위에 올라 군중을 대상으로 연설하거나 노래를 지휘하였다. 시위 행렬은 일본 경찰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영해공립보통학교(寧海公立普通學校)까지 이어졌다. 이곳에서 훈도와 학생들에게 시위 참여를 종용한 이후 다시 주재소로 향하였다. 주재소 책임자인 일본인 순사부장 스즈키 쓰루지로(鈴木鶴次郞가) 시위대에 해산을 명하자 분노한 시위대는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기물을 파괴하고 서류들을 찢어버렸다. 이어서 영해공립보통학교·영해공립심상소학교·영해면사무소·영해우편소 등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만세 시위는 이튿날까지 지속하였다. 이에 포항의 헌병대와 대구의 보병 제80연대 병력이 시위 진압을 위해 영해에 지원 출동하여 실탄 사격을 하였다. 이어 대대적인 검속을 실시하였고, 시위 참여자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검사의 심문 과정에서 송천동 사람의 권유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게 되었고, 또 시위 과정에서는 면사무소에 들어가 만세를 불렀다고 진술하였다.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요, 공무집행 방해, 건조물 손괴, 기물 파손, 공문서 훼기, 상해, 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불복하여 항소하였다 9월 3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원판결이 취소되고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박준형⋮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6.5 ; 「판결문」, 대구복심법원, 1919.9.30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3, 1971 ; 광복회대구경북연합지부 편,『대구 경북 항일 독립운동사』, 1991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김희곤 외, 『경북독립운동사』 Ⅲ, 경상북도, 2013.
  •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19.9.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