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만석 金萬石

Profile Image
기본정보
한글명 김만석
한자명 金萬石
본 관  
이 명 김선일(金先一)
출신지 제주
생몰년월일 미상 ~ 1909. 3. 4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주요 활동 1909년 제주 광양동 고사훈 의병부대에 참여하여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5)

생년은 알려져 있지 않고 전라남도 제주군(濟州郡)에서 태어났다. 단, 다른 자료에 의하면 1885년경 태어났다는 의견도 있다. 본적은 제주도 제주군 중면(中面) 이도리(二徒里) 광양동(廣陽洞)이다. 양반 출신으로 고사훈(高仕訓, 일명 高承天·高景志)한테 한학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명은 김선일(金先一)이다.

1908년 7월 스승 고사훈이 제주도가 일본인의 손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제주군수 윤원구로부터 전해 듣고 의병 활동을 모색하자 이에 가담하였다. 고사훈은 학맥으로 연결된 전라남도 장성의 의병장 기우만(奇宇萬)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김석윤(金錫允, 일명 金錫命·金勤受)등과 함께 제주군 중면 이도리 광양동에 대장간을 차려 무기를 제조하고 화북리 황사평에서 비밀리 군사훈련을 추진하는 동시에 자금을 모으기 시작하였다.

일제 보고서에 기록된 김만석(1909.3.9) [판형3]

1909년 2월 25일 고사훈의 주도로 이도리 광양동 조병생(趙丙生)의 집에서 창의(倡義)의 구체적 계획을 논의할 때 참가하였다. 김석윤·이중심(李中心)·노상옥(盧尙玉)·한영근(韓永根)·김재돌(金在乭) 등 10명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거사 일은 3월 3일, 거사 장소는 관덕정(觀德亭)으로 결정하고, 이중심과 고사훈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이어 창의에 필요한 격문과 통문을 작성하여 바로 전 제주도민에게 발송하였다. 그리고 제주성 점령을 목표로 고사훈과 함께 대정군 영락리·신평리·광청리·안성리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2월 28일 약 200여 명을 광청리로 집결시켰다. 또한 김석윤과 이중심은 중면을 중심으로 의병을 규합하여 제주성 안에서 호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명월리에서 격문을 순사에게 압수당해 거사가 발각되어, 3월 1일 광청리 민가에서 대정주재소 경찰의 습격을 받고 의병장 고사훈과 함께 붙잡혔다. 지도부를 잃은 의병진은 와해되어 거사는 실패하였다. 1909년 3월 4일 일제의 회유를 거부하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대정동문(大靜東門) 밖에서 고사훈과 함께 총살당했다.

유해는 안성리 주민들에 의해 이른바 돌동산에 가매장되었다. 이후 친척이 없는 관계로 방치되다가, 1977년 제주시가 제주 의병항쟁을 기리기 위해 제주시 건입동 사라봉 남쪽 기슭에 의병항쟁기념탑과 의병들의 넋을 모시는 모충사(慕忠祠)를 건립하였는데 그곳에 안장되었다. 가묘는 제주도 서귀포시 대정읍 안정리에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전병무⋮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3, 1984 ; 조동걸, 『한말 의병전쟁』, 독립기념관, 1989 ;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항일독립운동사』, 제주도, 1996 ; 김찬흡, 『제주항일인사실기』, 북제주문화원, 2005.
  • 일제 보고서에 기록된 김만석(19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