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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이상호 李相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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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이상호
한자명 李相浩
본 관 영천(永川)
이 명 자 : 심원(深源), 호 : 월중(月中)
출신지 경북 영일(迎日)
생몰년월일 1875. 5. 20 ~ 1949. 6. 21
운동계열 의병
관련 단체 정용기·정환직 의병부대(산남의진)
관련 사건 중기의병, 후기의병
주요 활동 196년 정용기 의병부대에서 소모 활동, 197년 정환직 의병부대에 무기와 군량미 조달, 참모장으로 활동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875년 5월 20일 경상북도 영일군(迎日郡, 현 포항시) 기계면(杞溪面) 오덕리(梧德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영천(永川)이고, 자는 심원(深源)이며, 호는 월중(月中)이다. 1906년 3월 정용기(鄭鏞基)의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참여하였고, 1907년 정환직 의병부대에 무기와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정용기·이한구(李韓久)·정순기(鄭純基)·손영각(孫永珏) 등은 산남의진이 영천(永川)에서 계획될 때 이를 지도하는 한편, 이규필(李圭弼)·백남신(白南信)·정완성(鄭完成) 등에게 각 지방에 대한 연락을 담당하도록 하고, 각 지방별로 인원을 배치하여 창의 계획 진행에 대한 책임을 맡겼다. 이때 김석정(金石井)·이경구(李景久)와 함께 예안(禮安)·안동(安東) 지방에 대한 책임을 맡고, 거사 계획을 추진하며 소모활동을 펼쳤다.

1907년 10월 8일 산남의진의 본진이 영일군 죽장면(竹長面) 입암전투(立岩戰鬪)에서 일본군에게 패하자, 전사한 대장 정용기의 부친 정환직(鄭煥直)이 다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남은 장수들과 군사를 수습하고 재기하였다. 이때 경북 각지에서 새롭게 군사를 모집하여 산남의진의 진용을 다시 편성하였는데, 경주에서 많은 수의 병사를 모집하고 무기와 군량미를 조달하였다. 이후 경북 흥해(興海)·청하(淸河)·신령(新寧)·의성(義城) 등 여러 지역에서 전과를 올렸다.

다시 산남의진이 동해안 쪽을 향해 북상할 때 영일군 기계(杞溪)에서 정환직 대장을 뵙고 여러 지역 전투의 선봉(先鋒)이 되기를 요청하여 참모장(參謀長)에 올랐다.

의병부대와 함께 영덕(盈德)에 도착하였을 때 주방(周房)에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의병부대에서 물러났다. 이 무렵 정환직 대장도 의병부대를 일시 해산한 상황에서 일본군에게 붙잡혀 사망하였다. 대세가 기울어졌음을 한탄하고 어쩔 수 없이 관동(關東) 지방으로 가서 은신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80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산남의진 입암전투 격전지(경상북도 영일) [판형3]

 

⋮권영배⋮

|참고문헌|

산남의진유사간행위원회, 『산남의진유사』, 1970 ; 『산남창의지』(영인본) 하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 제1권, 1970.
  • 산남의진 입암전투 격전지(경상북도 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