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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권재형 權在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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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권재형
한자명 權在衡
본 관 안동(安東)
이 명 중보(重宝)
출신지 경상북도 영덕(盈德)
생몰년월일 1872. 9. 17 ~ 1929. 10. 17
운동계열 3.1운동
관련 단체  
관련 사건 창수면 3.1운동
주요 활동 1919년 3월 19일 영덕군 창수면 만세시위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1)

1872년 9월 17일 경상북도 영덕군(盈德郡) 창수면(蒼水面) 신리동(新里洞)에서 태어났다. 이명은 중보(重宝)라고도 하였다.

1919년 3월 19일 신리동 동민 이수각(李壽珏)·이현우(李鉉祐)·이현설(李鉉卨) 등과 함께 영해면(寧海面) 성내(城內) 장터에서 일어난 만세 시위 참여하려고 영해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과정에서 창수면 신기동(新基洞)에서 영양군(英陽郡)의 이종구(李鍾龜)가 규합한 창수면 오촌동(梧村洞)과 삼계동(三溪洞) 주민 10여 명과 만났다. 이들은 지금 영해의 만세 시위에 참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므로 창수면 창수동으로 가서 만세 시위를 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먼저 신기동 마을로 들어가 군중을 모았다. 당시 신기동 주민들은 도로 공사로 전답을 수용당해 울분에 차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시위대에 가담하면서 숫자는 15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들 시위대와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창수동으로 이동하는 동안 계속 주민들이 동참하면서 시위대는 약 400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선두에서 이들 군중을 선도하여 독립 만세를 외치며 창수면주재소(蒼水面駐在所)를 향해 갔다. 그러나 주재소 경찰들은 전날인 3월 18일 영해와 병곡 주재소 및 면사무소가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만큼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시위대는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 만세를 외치며 주재소에 이르렀다. 이현우·이현설 등과 함께 선두에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주재소 안으로 들어가 사무실 건물·기기·공문 서류 등을 파손하고, 객실과 일본인 주임순사 숙소까지 들어가 닥치는 대로 집기를 부수고 총기 2정, 대검 3자루 등 무기류까지 파기하였다. 이에 놀란 경찰은 모두 황급히 도주하였다. 주재소를 장악한 뒤 오후 7시경 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자진 해산하였다. 곧이어 시위를 진압할 목적으로 파견되었던 일본군 1개 분대 6명이 출동하였으나 시위 군중이 해산한 뒤였다.

이 일로 붙잡혀 1919년 6월 5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의 중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권영배⋮

|참고문헌|

「판결문」, 대구지방법원, 1919.6.5 ; 경상북도경찰부, 『고등경찰요사』, 1934 ; 김정명 편, 『조선독립운동』Ⅰ, 원서방, 196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3권, 1983 ; 김희곤 외, 『영덕의 독립운동사』, 영덕군, 2003 ; 경상북도, 『경북독립운동사』 Ⅲ(3·1운동), 2013.
  • 판결문(대구지방법원, 1919.6.5)
  • 창수주재소 3·1운동 만세 시위 터(경북 영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