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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독립운동가

김광섭 金珖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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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한글명 김광섭
한자명 金珖燮
본 관 전주(全州)
이 명 호 : 이산(怡山)
출신지 함경북도 경성(鏡城)
생몰년월일 1904. 9. 22 ~ 1977. 5. 23
운동계열 문화운동
관련 단체 해외문학연구회, 극예술연구회, 한국자유문학가협히
관련 사건 창씨개명, 민족말살정책
주요 활동 『해외문학』, 『시원(詩苑)』, 『자유문학(自由文學)』, 『동경』, 「성북동 비둘기」, 「고독」, 「벌」, 이산문학상
포상훈격(연도) 애국장(1990)

1904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鏡城)에서 아버지는 인준(寅濬)이며, 3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이산(怡山)이다.

1911년 가산이 기울자 온 가족이 북간도로 이주했다가 1년 만에 돌아왔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으며 1917년 함북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1920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 중퇴하고 중동학교로 전학하여 1924년에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하였다. 재학 중 같은 대학 불어불문학과에 적을 둔 이헌구(李軒求)·정인섭(鄭寅燮) 등과 친교를 맺는 가운데 해외문학연구회에 가담·활동하였다. 1927년에는 와세다대학의 한국인 학생 동창회지인 『R』에 시 「모기장」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학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1932년 졸업한 후 곧바로 귀국하였다. 시인이 되어 해외문학(海外文學)·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 동인으로 시작(詩作)과 함께 해외 문학 번역 소개와 신극 운동에 참여하고, 『시원(詩苑)』 동인으로 활동하였다. 1933년 『삼천리(三千里)』에 「현대영길리시단(現代英吉利詩壇)」을 번역·발표하였고, 같은 해 시 「개 있는 풍경」을 『신동아』에, 평론 「문단 빈곤과 문인의 생활」을 『동아일보』에 각각 발표하였다. 이듬해 『문학(文學)』에 「수필문학고(隨筆文學考)」, 『조선문학(朝鮮文學)』에 「현대영문학에의 조선적 관심」을 발표하는 등 여러 장르에 걸쳐 활발한 문학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5년에는 유치진(柳致眞)의 작품을 공연하려다가 일제 경찰에 구금되었다. 「춘향전」·「마의태자」 등 역사물이나 고전 작품이 식민 지배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1938년에 첫 시집인 『동경』을 펴냈다. 1934년 7월에는 김동인(金東仁)·이광수(李光洙)·심훈(沈熏)·강경애(姜敬愛) 등 부르주아 문단 작가와 프로 문학가 등 78명과 더불어 조선어학회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지지하는 성명서에 참여하였다. 문학가로서 어문민족주의에 대한 높은 관심은 이를 가능케 하는 요인이었다.

「알범」초 ; 평론가 김광섭(『동아일보』 1938.7.2) [판형3]

1933년 4월부터 10여 년간 모교인 중동학교 영어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교 시보사를 맡아 문학적인 소질이 있는 학생들을 후원하였다. 본격적으로 시작에 들어선 것은 1935년 『시원』에 「고독(孤獨)」을 발표하면서부터다. 이 시는 일본에 의해 주권을 상실한 좌절과 절망을 비유하였다. 이러한 경향성을 지닌 작품은 「동경(憧憬)」·「초추(初秋)」 등으로, 만주사변을 배경으로 한 고독·불안·허무의식 등이 주요한 바탕이 되었다. 1937년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하여 연극 운동에 가담하면서 서항석(徐恒錫)·함대훈(咸大勳)·모윤숙(毛允淑)·노천명(盧天命) 등과 교유하였다. 1938년 제1시집 『동경』을 간행하였다.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광섭) [판형2]

1940년까지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수업 시간에도 일제의 민족 차별 정책, 한국어 말살 정책, 『동아일보(東亞日報)』·『조선일보(朝鮮日報)』 폐간 등 언론 탄압 정책을 비판하여 학생들의 독립사상을 앙양하였다. 1941년 2월 21일 이로 인하여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다. 1942년 9월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3년 8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겪었다. 당시 「벌」이라는 시에서 항일적인 울분을 표현하였다.

나는 2223번

죄인의 옷을 걸치고

가슴에 패를 차고

이름 높은 서대문 형무소

제3동 62호실

북편 독방에 홀로 앉아

“네가 광섭이냐”고

혼잣말로 물어보았다

3년하고도 8개월

1천 3백여 일

그 어느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시간을 헤이고 손꼽으면서

똥통과 세수대야와 걸레

젓가락과 양재기로 더불어

취기나는 어두운 방

널판 위에서 살아 왔다.

광복 후에는 민족주의 문학을 건설하기 위해 창작과 단체 활동을 병행하였다. 이 무렵의 시로는 「속박과 해방」·「민족의 제전」 등으로 광복의 환희와 민족의식을 표현하였다. 중앙문화협회의 창립, 전조선문필가협회 총무부장, 민주일보 사회부장,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출판부장, 『민중일보』 편집국장, 미 군정청 공보국장 등을 거쳐 정부 수립 후에는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주로 경희대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한국자유문학가협회를 만들어 위원장직을 맡아 『자유문학(自由文學)』지를 발행하였다. 1966년에는 대표작인 「성북동 비둘기」를 발표하였다. 1989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이산문학상’을 제정하여 매년 시상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박환⋮

|참고문헌|

『동아일보』 1934.7.10 ; 국가보훈처, 「김광섭」,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6, 1988 ; 「身分帳指紋照會回報書」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8·10, 1976 ; 김현승, 「김광섭론」, 『창작과 비평』 봄호, 1969.
  • 김광섭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광섭)
  •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42.5.31)
  •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김광섭)
  • 「中東學校 生徒의 動搖에 관한 건」(1935.3.6)
  • 김광섭
  • 「알범」초 ; 평론가 김광섭(『동아일보』 1938.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