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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해 徐嶺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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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글명 | 서영해 |
|---|---|
| 한자명 | 徐嶺海 |
| 본 관 | 달성(達城) |
| 이 명 | 서희수(徐羲洙) |
| 출신지 | 경남 부산(釜山) |
| 생몰년월일 | 1902. 1. 13 ~ 미상 |
| 운동계열 | 임시정부 |
| 관련 단체 | 대한민국 임시정부, 고려통신사 |
| 관련 사건 | 1919년 만세운동 |
| 주요 활동 | 1919년 만세운동 참여, 1929년 제2회 반제국주의연맹회에 유불한인회의 대표로 참가, 고려통신사 설립, 1930~1940년대 임시정부 주프랑스 외무행서 외무위원, 주프랑스 특파위원, 주프랑스 대사 등을 역임하며 프랑스에서 외교활동 전개 |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1995) |
1902년 1월 13일 경상남도 부산부(釜山府, 현 부산광역시 영도구) 영선동(瀛仙洞)에서 아버지 서석주(徐錫疇)와 어머니 김채봉(金采鳳)의 8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본명은 서희수(徐羲洙)이고, 호는 영해(嶺海)이다. 아버지 서석주(徐錫疇)는 한약방을 운영하였다. 1916년 3월 24일 부산공립보통학교(현 부산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과정은 부산부 초량동 중화민국 영사관 부속의 화교학교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참여하였다가, 4월 말경 일제 경찰의 수배령이 내려지자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 이때 이름을 서희수에서 서영해로 바꾸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1년 넘게 머물렀다. 그러다가 프랑스 유학을 결심하고 1920년 11월 6일 프랑스로 출발해서 12월 13일 프랑스 남부의 마르세유(Marseille)에 도착하였다.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의 주선으로 파리에서
북쪽으로 70㎞ 떨어진 곳에 위치한 보베(Beauvais)에서 고등중학교 과정을 수학하였다. 1926년 샤르트르(Chartres)시에 있는 리세 마르소(Lycee Marceau)로 진학하였다. 이곳에서 11년이 걸리는 프랑스 정규교육 과정을 6년만에 마치고. 1927년 파리(Paris) 소르본 대학 철학과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학비 조달 등 경제적 문제로 인해 학교를 중퇴하고 로렌 지방 룽위(Longwy)시의 포도농장과 식당 등에서 잠시 취업 활동에 나섰다. 그 후 1928년 4월 파리의 소르본가에 위치한 파리고등언론학교(Ecole supérieure de journalisme de Paris)에 입학해 저널리즘과 관련된 법지식과 정치·경제·사회 여러 분야의 저널 교육을 받으며 학업을 이어갔다.
파리고등언론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7월 독일 베를린(Berlin)의 반제국주의동맹(反帝國主義同盟)이 주최하는 제2회 반제국주의연맹회에 유불한인회(留佛韓人會) 대표로 김백평(金白萍)·김양수와 함께 참석하여 유창한 프랑스어로 한국 문제를 참가자들에게 부각시키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그리고 9월 28일에는 거주했던 파리 시내에 숙소인 말브량슈(Malebranche) 7번지에서 고려통신사(高麗通信社)를 설립하였다. 고려통신사를 통해 1932년 도쿄 의거 전 이봉창(李奉昌) 의사 기념사진, 윤봉길(尹奉吉) 의사 기념사진 등 임시정부에서 전달한 독립운동과 관련된 중요한 자료를 관련 기사와 함께 프랑스 언론에 전파하며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무력을 행사한 사실들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1월 6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이승만과 함께 참석하여 활동을 전개하였다. 1934년 4월 2일에는 임시정부 주프랑스 외무행서(外務行署) 외무위원의 임무를 맡게 되었고, 1936년 3월 8일 임시정부 주프랑스 특파위원, 1945년 2월에는 임시정부 주프랑스 대사를 역임하면서 유럽 각국의 인사들에게 일제 침략의 실상을 고발, 한국의 정세를 널리 선전하며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주요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유럽에서 개최하는 각종 국제회의에 여러 차례 참가해 적극적으로 일제의 억압 사실을 알려 나갔다. 1936년 9월 벨기에 브뤼셀(Brussels)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해 세계평화와 동아시아의 평화에 있어 한국독립이 가지는 의의를 밝혔다. 1937년 11월에는 ‘중국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회의인 구국공약회(九國公約會)에서 각국 기자들을 만나 한국 독립운동의 상황을 설명하고, 임시정부에서 전달받은 선전 자료를 번역해 프랑스 언론에 배부하는 등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프랑스에서 1930~1940년대 유럽지역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요한 외교활동을 담당해 오다가 파리에서 광복을 맞이한 후 1947년 5월 귀국하였다.
귀국 후에는 혼란한 정치 상황에 잠시 정치와는 거리를 두고 프랑스어 교재를 제작하고 연희전문학교과 이화여자전문학교 등에서 프랑스어 강사를 역임하며 주로 교육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러다가 1948년 7월 대한민국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한국독립단의 대표단의 일원이 되어 선발대로 상하이를 거쳐 프랑스로 가고자 했다. 그러나 중국에서 여권 문제로 지체되었고, 결국 사회주의자로 몰려 중국 국민당 당국에 붙잡혔다. 주화대표단의 민필호(閔弼鎬)·박수덕(朴樹德), 그리고 중국국민당의 장샤오셴(張壽賢)·우톄청(吳鐵城) 등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파리 UN총회에는 참석하지 못 했다.
1949년 프랑스에서 상해에 돌아온 뒤, 같은 해 10월 1일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한국인들이 귀환할 때 중국 국적이라는 이유로 억류되어 귀국하지 못하였고, 1955년 무렵까지 상하이의 인성학교(仁成學校) 교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이 있으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