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석정 盧錫正 |
|
| 한글명 | 노석정 |
|---|---|
| 한자명 | 盧錫正 |
| 본 관 | 광산(光山) |
| 이 명 | 노기준(盧基俊, 盧基準) |
| 출신지 | 전남 광주(光州) |
| 생몰년월일 | 1892. 8. 6 ~ 1967. 12. 12 |
| 운동계열 | 국내항일 |
| 관련 단체 | |
| 관련 사건 | 대한민국 군제특파원 및 대동단의 군자금모집사건 |
| 주요 활동 | 1920년 5~11월 군자금 모집, 1929년 9월 신간회 광주지회 검사위원, 1930년 11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후보 |
| 포상훈격(연도) | 애국장(1990) |
1892년 8월 6일 광산 노씨 세거지인 전라남도 광주군 본촌면(本村面) 일곡리(日谷里)에서 노문규盧(汶奎)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이명은 노기준盧(基俊), 盧(基準)이다. 1921년 12월 대구형무소에서 작성한 「신분장지문원지」에는 개국 503년(1894) 8월 6일생으로 기재되어 있으며, 일제 경찰 혹은 사법기관에서 작성한 각종 자료에는 1894년을 기준삼아 환산한 나이를 기록하였다.
부친 노문규는 유학을 대성했다는 평을 받은 인물로, 1903년 전남 사림(士林)의 천거를 받아 전라남도 관찰부 주사로 임명된 후 정6품 승훈랑(承訓郞)에 올랐으며, 1908년에는 대한협회 광주지회(光州支會) 교육부장을 지냈다. 맏형 노석신盧(錫新)은 1921년 일곡리 자택의 사랑채에 개량서당을 설립하고 30여 명의 아동들에게 무료교육을 베풀었던 인물로, 매월 수십 원에 달하는 서당 운영비를 부담할 정도의 자산가였다. 교육을 중시하는 가풍 속에서 성장하는 동안 유학 교육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신지식도 접하여 훗날 한문으로 문장을 짓고, 근대적 언론기관에서 기자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1919년 3월 만세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1920년 국내로 들어와 5월 하순경 거주지인 광주군 본촌면 일곡리 이윤호(李允鎬)의 집에서 대한민국 군제특파원(軍制特派員)이라 칭하는 조선군정서의 한준호(韓俊鎬)·박문용(朴文鎔)·정용택(鄭容澤) 등을 만나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합의했다. 이에 따라 같은 마을의 노진영(盧軫永)에게 군자금을 요구하여 7월 25일 서울에서 박문용과 정용택에게 1백원을 제공하도록 주선하였다. 9월 21일경 이윤호와 함께 대한민국 군제특파원 호남파견단장 민재식(閔在植) 명의로 군자금을 요구하는 유고문(諭告文)을 전남 곡성군내 자산가들에게 발송하였다.
이 무렵 이윤호를 통해 대동단(大同團) 명의로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 있던 신덕영(申德永)·최양옥(崔養玉)·김정련(金正連)·유선주(劉善柱)·노석중(盧錫仲)·노형규(盧衡奎) 등과 연결되었다. 1920년 10월 8일경부터 11월 3일경까지 신덕영·최양옥과 함께 위 유고문 수신자들을 직접 방문하여 곡성군 삼기면(三岐面)의 정호필(鄭鎬弼), 화면(火面)의 정원채(鄭遠采)·신유선(辛有善), 겸면(兼面)의 심상홍(沈相洪) 등으로부터 군자금을 수령하였다.
1920년 11월 5일 최양옥과 함께 광주로 귀환하던 중 전남 담양경찰서 창평주재소 순사에게 붙잡혔다. 1921년 5월 31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위반으로 징역 7년을 받고, 같은 해 12월 13일 대구복심법원에서 형이 확정되었다. 대구형무소와 대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24년에 징역 5년 4월로 감형되었으며, 1926년 7월 7일 가출옥으로 풀려났다.
1927년 10월 고향에서 일곡청년야학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청년들을 교육시켰다. 1928년 6월~9월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이 교우회의 자치 획득, 조선인 본위 교육 실현 등의 요구조건을 내걸고 동맹휴학투쟁을 벌이자 학부형회를 조직하여 사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
1929년 9월 3일 개최된 신간회 광주지회 임시대회에서 이윤호·전용기(全龍基) 등과 함께 검사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30년 9월 신간회 전국대표대회를 앞두고 광주지회의 대표회원 후보로 지정되었다. 신간회 전국대표대회가 금지된 후, 그 해 11월 9일에 개최된 전국대회 대행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중앙집행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이에 앞서 1929년 1월 동아일보 광주지국 기자가 되었다. 1930년 4월 18일 오랫동안 침체상태에 빠져있던 광주기자단을 쇄신하기 위하여 광주기자단 혁신대회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오홍근(吳洪根)과 함께 강령 규약 수정 및 건의안 기초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일주일 여의 준비 끝에 4월 25일 개최된 혁신대회에서 임시의장을 맡아 광주기자동맹의 탄생을 이끌어내었다. 1931년 1월부터 1932년 6월까지 동아일보 여수지국장을 지낸 후 여수 천일(天一)고무공장 총감독이 되었다.
광복 이후 전남 광산군 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정치 활동을 재개하였다. 1946년 10월 12일 한국독립당 전남도당 선전부장, 1949년 3월 8일 국민회 전남본부 결성 추진위원, 1949년 3월 31일 국민회 광주지부 선전부장으로 각 선출되었다. 이무렵 호남신문사 부사장을 지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