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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콘텐츠/대한민국임시정부 [] 에 대한 전체 27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1 "한국임시정부 의정원 각 당파 명부"

    비밀 문건 독립당(獨立黨) 민석린[(閔石麟) 본명 민필호(閔弼鎬)]이 보내옴.

    42 한국 각당파 개략

    기밀 한국 각 당파 개략 국내외 한인의 일반상황 1. 국내상황 착취, 억압, 차별대우 등은 일본이 줄곧 가져온 한국에 대한 통치 수단이었다. 과거 우호국 인사들은 때때로 교활한 일본의 허위적 선전에 현혹되어 한인의 원한에 대해 추호의 동정심과 자신감도 주지 않았다. 한인들은 피눈물을 삼키고 모욕의 고통을 참으며 비참한 운명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에서 수십년 생활하고 한국 및 한인의 내부 정황을 철저히 인식하였다고 주장하는 외국 선교사들은 단지 표면적인 내용으로 추론, 한국인 사이에 친일파를 증가시킬 뿐이었다. 아울러 그들은 한국광복운동이 절망의 길로 달리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1919년 3월 1일, 파리평화회의 전야, 한국을 되찾자는 독립운동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되었고 열정이 들끓은 2백만 한인의 비장함과 맹열함은 전세계 인민들에게 한인의 무궁한 역량을 보여주었다. 지난날 털어 놓을 수 없었던 원한과 분통은 오늘 날 자유와 독립의 함성 중 세찬 물결을 일으키고, 일본 참략자의 앞잡이들을 격동시켰다. 이번 반일운동 중, 특히 일본 경찰국에서 두목으로 활동하던 신철(申哲)은 이번 독립운동에 비밀적으로 참가한 탓으로 일본 침략자들에게 총살되었고 그로부터 이들은 피의 대가를 깨닫게 되었다. 당시 한인들은 윌슨 대통령(遜總統)의 민족자결원칙이 기필코 실현될 것이라 굳게 믿었고 바로 이런 믿음이 한인들을 선동하여 독립운동의 도화선을 당기게 하였으며 적의 잔혹한 행위를 용감히 물리치게 하였다. 과거에 비해 모든 조건이 우월한 오늘날 전체 한인들은 일본 침략자들과 투쟁할 결심을 내리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도 한국인의 겉모습 혹은 일본의 앞잡이 및 낭인의 행동으로 한국을 평가한다면 이는 극단적으로 틀린 행위이다. 인류란 자고로 생존을 위해 노력하고 자유를 추구하며 생존하기 위해 분투하는 존재다. 그러나 현재 한인은 자기의 재산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없고 일년 내내 열심히 일하여 획득한 농작물 모두를 일본 침략자들에게 고스란히 받쳐야만 한다. 한인들은 일본 참략자들을 위해 헤아릴 수 없는 피땀을 흘렸고 침략자들이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은 전부 도맡아야만 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한 저렴한 대가는 한인들을 절망의 처지에 몰아 넣었다. 그러나 일본 침략자들은 이것으로도 부족하여 무수한 한인 청년들을 전선에 보내어 총알받이로 한인을 이용하고 나무와 돌로 취급하였다.그리하여 한인의 적개심은 더이상 참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고 한인들은 동맹국의 승리를 간절히 기대하게 되었다. 2. 적국내 한인의 상황 적국에 거주한 약 2백 5십만 한교(韓僑-한인교포) 중 10만명은 중등(中等)이상 학교 학생이고 나머지는 대다수 노동자이다. 많은 노동자는 군수공장, 광산 등 지역에서 강제 노역을 하였다.(1938년 조사에 따르면 도쿄, 오사카, 고베 등 각 공장 중, 주요 간부는 약 3만명에 달함.) 경각성이 있는 지식인들의 마음 속 깊이 파묻힌 자신감은 우리가 더이상 추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일본의 한국 노동자 및 그들의 견문을 통해 자유를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다가오고 있음을 정확히 인식하였다. 일본 침략자들은 같이 일을 하는 한국 노동자를 매일 모욕하고 구타하였으며 심지어 많은 한국 노동자들이 적의 단도에 목숨을 잃었다. 그리하여 한국 노동자들은 정당 방위로서 주먹 대 주먹, 단칼 대 단칼의 대립으로 발전하여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더이상 적앞에서 주눅이 들지 않는 태도를 보였다. 3. 중국 점령 지역내 한인의 상황 기아에 허덕이며 방황하는 한국인민과 무지한 일부 대중은 9.18 및 7.7사변 후 일본 침략자의 거짓 선전에 현혹되어 일확천금의 환상을 갖고 동북에 유입되었다. 초기 화북 등 지역에서 일본 침략자들은 한인들의 유입을 최대한 장려하고 편을 들었다. 일본 침략자들은 중국인들이 자신들에 대한 적개심을 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한인을 사주하여 밀수하고 아편 따위를 피게 하였다. 아울러 일본 침략자는 전문 인원을 파견하여 중국인을 능욕하고 구타하는 등 온갖 비열한 짓을 일삼았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발발 후, 일본 침략자들은 중국인을 화유하고 한국인을 억압, 착취하는 반면 중국인을 옹호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지난날 한인이 중국인을 홀대하던 상황이 지금은 중국인이 한인을 홀대하는 추세로 발전하여 한인은 일본과 중국 양측의 거듭되는 위협을 받게 되었다. 예전에 실업자들은 현재 다른 지역에서 또 다시 기아에 처하게 되었으며 실업 청년들은 일본 침략자들에 의해 강제로 징병되었고, 무고(無辜)한 청년들은 원한을 마음속 깊이 품고 광명이 찾아드는 그날을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수의 지혜로운 청년들은 될수록 일본 침략자들의 징병을 피하거나 은닉 후, 기회를 찾아 한국혁명운동의 진영을 찾아 광복운동에 참가할 것을 간절히 희망하였다. 4. 아메리카주 상황 아메리카주에 거주한 1만 여명의 한교 중 7천여명은 하와이, 2천여명은 아메리카주,기타 나머지 한인은 쿠바, 멕시코, 남아메리카 등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5. 중경 상황: 자유 활동이 보장된 중국의 한교(韓僑) 중, 서안 한국 광복군 제2부대 백여명의 군대와 팔로군(八路軍) 중 약 3백여명의 군대를 제외한 기타 한교는 대다수 중경에 밀집되었으며 인원수는 약 300 여명에 달한다. 그리하여 중경에 거주한 한교의 움직임은 자유로운 활동이 보장되어 있었으며 중국의 한인은 중국에 거주한 전체 한교의 활동을 대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A.한교 동태 중경에 거주한 한교 인원수는 300여명이지만 실제로 현지 공작에 참여한 인원수(선구자들 포함)는 100 여명에 해당하고 기타 한교는 전부 부녀, 아동 그리고 노인들이다. 100 여명 정도의 활동자는 40년간 광복운동을 위해 동북, 화북, 화동 등 지역에서 적극 활동하여 온 지도자 및 수행원들이다. 이들은 다가오는 일본의 착취에 못이겨 결국 중국 항전과 함께 모든 활동 무대를 중경으로 옮기게 되었다. 참여자의 인원수는 적지만 그 중 민족주의자, 공산주의자, 무정부(無政府)주의자, 기회(投機)주의자,…(원본판독불가)…정객(政客) 등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 중, 민주주의자들이 실제상 한국임시정부를 옹호하는 것 외에, 기타 참여자는 전부 임시정부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는 우리 정부를 절대적으로 옹호하지만 암암리에 정권을 탈취하기 위해 간교한 음모를 계획하고 있으며, 정권을 획득하기 전 줄곧 정부의 강화작업을 방해하고 있었다. 이 밖에 대의(大義)를 깊이 파악하지 못한 자는 개인적 영웅주의를 추구하고 개인적 지위 획득에만 심취하여 정부의 옹호문제에 관해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다. 현재 한교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다음 두가지로 총괄할 수 있다. 1)기아의 위협, 2) 현재 진행 중인 황동범위 확장의 어려움. 중경 교민 중 한교만이 제일 비천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매 교민은 매월 4백 20원의 생활비로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 기타 지역 한인들은 삼사십 여년간의 고통을 겪었지만 그들의 마음은 오직 애국의 열성으로 넘쳐 흘렀다. 그러나 그들은 지난 날 한국의 통치 과정 중 상호간의 불일치로 인해 정책상 단일한 방침의 결핍이라는 결과를 초래하였고, 결국 여러개의 당파로 분열되었다. 근래 이런 문제점을 부단히 개선하였지만 마음 속 깊이 내재되어 있는 습관이 간혹 드러나곤 한다. 오래 지속된 중국의 항전(抗戰), 한국 광복군의 구성, 한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인정 및 태평양 전쟁의 발발 등은 한인들을 극히 흥분시켰다. 미국에 거주한 한인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견고한 단결 정신을 보여주고 주미한교연합회를 구성하여 중경의 임시정부와 광복군 설립에 호응하였다. 그러나 3, 4년 이래 그들이 매일 기다리던 광복군의 전투관련 보고는 한장도 받지 못하고 임시정부의 승인(承認)문제는 점점 멀어지기만 했었으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냉정한 태도는 이들을 크게 실망케 하였다. 이들은 이에 관한 원인을 알기 위해 평소 상호간의 모순을 해결하고 상호간의 잘못을 지적하였고 이는 치열한 공방전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실망 속에서 발생한 무의미(無聊)한 극단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러나 시기를 신속히 이용할 수 있는 공산주의자(소수)들은 중경에서 상호간의 관계를 소월하게 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려 민족진영을 극력 분열시키려 한다. 그리하여 작년 초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미국 한교간의 갈등이 더욱더 심각해 졌으며, 그 결과 쌍방이 모두 피해를 입고 그 어떤 이익도 얻지 못하게 되었다. 현재는 카이로회담으로 인해 부당한 전쟁은 점차 사라지고 있는 추세임을 알게 되었다.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인 원조에 대해 앞으로 꼭 보답을 할 것이다. 현재 임시정부가 총체적인 활동 방침을 지시히고 고관을 파견하여 각종 잘못된 문제들을 해결할 경우, 문제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것이다. 아울러 단결을 강화하면 기필고…(원본판독불가)… 임무 활동 결과에 대해 말하자면, 40여 명의 한교(韓僑)의 희생을 목격하면서 몹시 애석하였다. 열사중 80~90%는 청년과 유아였다. 그 중 대다수는…(원본판독불가)… 질병으로 생명을 잃었다. 영양결핍, 주거 지역의 불청결, 위행시설의 낙후 등은 사망율을 증가시키는 원인이다. 현지에서 활동하는 한교들의 열정은 사실임을 증명할 수 있지만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임무를 이행할 수 없게 되어 그들은 마음을 졸이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당시 옳고 그름을 의논하고 정부를 규탄하는 등의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 전체 한교들은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런 근심을 마음 속에 묻혀 두지만 이성적이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 채 정부 기관을 비난, 정부의 지도자들에 대한 원망이 끝이 없고 지도자들을 강력히 규탄하였다. 상술 내용은 교란 분자들에게 적절한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B.정부 3.1운동의 결과로 인해 중경에 정부를 조직 및 성립하였다. 같은 해 4월, 각지에 분산되었던 국무위원회는 다시 상해에 집중되어 새로운 조직을 창립하였다. 이는 전체 한민족의 독립사상을 대표하고 전체 한민족을 통솔하는 최고 독립기관이다. 이 기간, ′3.1′ 운동의 실패로 국내 인민들과…(원본판독불가)…연락을 취할 수 없고 반동분자(反動份子)들이 교란을 피웠다. 그리하여 정부는 많은 고난과 좌절을 겪어야만 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정부는 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한민족의 최고 지도기관이다. 게다가 국제상 한국정부의 지위가 상승함에 따라 반동분자(反動份子)들은 표면적으로 정부를 옹호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처하게 되었다. 때때로 정부에 대해 교란을 피우는 교란분자(搗亂份子)들은 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날뛰었으며 정권을 획득하기 전까지 현 정부 세력의 강화에 대해 극단적으로 불만을 토로하였고 우호국이 한국임시정부에 대한 호감을 극렬히 방해하였다. 우호국이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은 전체 한민족에게 최대 경사인 것이다. 그러나 교란분자(搗亂份子)들은 이를 방해하려고 안간힘을 다 쓰고 있었다. 이러한 치욕스러운 현상은 중국의 한인 사회에서 쉽게 보고 들을 수 있으며 아울러 오늘의 폴란드에서도 이와 흡사한 수치스러운 작풍들을 볼 수 있다. 지난해 모스크바회의 결과는 한국임시정부를 새로운 고난에 빠뜨렸다. 즉 소련정부는 영국이 각 망명(亡命) 정부에 대한 정책 실행을 방해하기 위해 폴란드의 망명정부를 타격하였다. 이는 각 망명정부의 운명은 기필코 각 나라 인민의 자유사상에 따라 결정해야 함을 결의하였다. 사실상 우호국 인사 중,많은 인사들은 현재 한국임시정부가 3천만 한인들이 공동으로 옹호하는 정부로 인정받고 있는 지를 의심하였다. 수단을 가리지 않고 정부를 반대하는 반동분자(反動份子)들은 이 약점을 이용하여 불통일(不統一) 현상을 강화하여 정부를 위협하고 정권을 탈취하려고 망상한다. 이런 어려움속에서 한국 정부는 정확한 이론을 견지하고 전체 한교를 이끌며 넓은 아량으로 이들을 너그럽게 포용하였다. 한국 정부는 한층 더 분발하고 부단히 노력하였다. 정부가 우호국에게 물질상 원조를 요구하여 전체 한교의 생활을 유지하고 긴밀한 활동을 개시하여 그들의 사기를 북돋을 경우, 내부의 질서가 정확히 확립되고 외부의 긴장한 활동 현황도 쉽게 파악될 것이며 정부의 권위도 나날이 제고될 것이다. 따라서 한국 정부에 대한 우호국의 믿음도 자연적으로 커질 것이다. 전후(戰後) 한국의 독립에 대한 보증은 하나의 주제에 해당하고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은 일종의 해석에 해당하다. 현재 주제만 존재하고 해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한때 성행하던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논조는 이미 잠잠해 졌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반드시 승인을 받아야 하는 그 필연성은 현재 전략상 한인의 사기를 고무시킬 수 있는 무한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군사 전력상, 동맹국과 법적 관계를 구축하여 동맹국과 현지에서 함께 작전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 우호국의 원조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원조란 바로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다. 이는 임시정부의 절실한 요구일 뿐만 아니라 환경 및 정치적으로 막대한 효과를 거둘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C.광복군 "한국 광복군은 한국을 대표하는 국가의 군대인데 어찌 ′청천백일(중국 국민당의 상징)′의 모표(帽徽)를 달고, 하물며 임시정부와의 관계가 어찌 이토록 취약할 수 있는가? 혁명군의 제일 중요한 정치훈련을 어찌 중국 정치부가 장악해야 하는가? 이 외에 불합리한 9개 활동기준으로 어찌 활동을 발전시킬 수 있는가? 광복군은 한국 군인을 구제하는 기관일 뿐이다. 그러나 총 사령부의 직원을 제외한 기타 지역의 직원은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데 왜 그들을 구제하지 않는가?" 이 내용 전부는 일반 한인들의 광복군에 대한 비평이다. 상술된 내용으로 보아 당대파는 한면에 9개 활동기준을 이용하여 정부를 비난하고 심지어 정부 주석과 군부 총사령 등을 국가를 욕되게 하고 국가의 주권을 상실하게 한 죄인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의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9일의 시간 소모하였다. 의회 기간, 반대 당파은 격렬한 공격을 시도하고 심지어 정부 주석 및 총사령 등이 사직할 것을 강요하고 정권을 박탈하려 하였다. "일의 진실된 상황은 강력한 변론보다 더 설득력이 있다(事實勝於雄辯)"란 말이 있듯이, 광복군의 9개 활동기준은 정부 혹은 군사 당국이 체결한 조약이 아니라 전시(戰時) 중국이 동문 명령(通令)을 각지 군사 기관에 보낸 일종의 공문일 뿐이다. 의회 중,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반대 당파는 암암리에 서안 광복군 제 2부대에 사람을 파견하고 대원을 선동하여 본 부대 대장 이범석(李範奭-한국독립당원)을 살해할 것을 계획하였다. 중국 군사위원회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조사한 결과 이번 사건이 사실임이 완전히 드러났고 이는 이미 회피할 수 없는 사실로 되었다. 광복군이 활동하기도 전에, 이런 고난을 당하게 되었지만 광복군은 반드시 이미 군부를 개선해야 했어야 했느며 개선 작업을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⑴ 광복군 9개 활동기준을 취소하고 다시 평등상조의 원칙을 세운다. ⑵ 사람을 모집하고 훈련시킨다. ⑶ 정식 군대를 조직하기 전, 몇십명 혹은 몇백명으로 구성된 유격대(遊擊隊)를 조직하여 태극기를 들고 전선에 파견하여 중국 유격대와 같이 작전에 참여하게 한다. (이는 선전상 제일 유효한 방법이다). 방법 D.각 당 1. 한국독립당 한국독립당(이하 한독이라 한다)는 정부의 당이고 정부 주석 아래로 3분의 1이상의 한독 당적의 국무위원 및 한독의 지도자들은 이 당의 사상을 계승하고 수십년 역사를 가진 지도인물들을 기반으로 하여 민족주의를 계승하는 정통당(正統黨)이다.이 당은…(원본판독불가)…30여년의 긴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당은…(원본판독불가)…동맹회, 제1, 2차 혁명과 북벌전(北伐戰役)에 참가하였다. 한독의 당원은 중경외에 동북, 서안, 한국본토 및 미주에 분산되어 있다. 한독은 항상 당을 지도하는 역할로 기타 당파를…(원본판독불가)…하고 통일을 위해 노력하였다. 재작년 34차 회의 중, 한독은 기타 당파 의원들이 의정원에 참가하는것을 환영하고 한국 광복군내의 특별 당부를 취소하였으며 민족혁명당원 2명을 국무위원으로 임명하였다. 더욱이 민족혁명당과의 합당을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34, 35 두 차의 회의중 시종 적색(紅色), 흑색(黑色) 두가지 의원이 국무위원에 참가하고,공동으로 독립운동을 지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최근에 각 당파의 연합체제를 주장하고 정부 기구내 합리적인 협력 통일을 이루며, 자본확대로 정부의 힘을 증강시켜야 함을 주장하였다. 한독은 시종 일관된 입장으로 정부를 추대하고 있다. 한독은 기타 당의 반대, 파괴의 음모와 그 어떤 고난도 마다하지 않고 정부를 오늘 이날까지 이끌어 오는데 이바지하였다. 한국 전 민족의 대표기구인 임시정부의 힘을 강화하기 위해 한독은 모든 이익을 희생하였다. 예를 들면 한독의 명의로 중국의 제일 높은 당국으로부터 한국 광복군 조직에 관한 허가를 받고 이를 한독의 군대로 소유하지 않고 이에 대한 창립권을 정부에 귀환하여 국군을 건설하였다. 또한 한독의 명의로 중국당국의 물질적 지원을 받아 생긴 소득 전액을 정부에 공헌키로 하였다. 이와 같은 예는 수업이 많아 일일히 열거할 수 없다. 상술 내용과 같이 한독은 정부를 위해 자신의 아려움은 아랑곳 하지 않고 조금의 불평도 없었다. 왜냐 하면 정부의 발전이 당의 발전이자 국가의 발전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반대당파 및 반동분자(反動份子)들은 한독이 어려운 틈을 타서 한독의 당원을 부추켜 한독을 파괴할 여러가지 음모를 꾀하였다. 상술된 내용은 모두 허구가 아니다. 때문에 임시정부를 공고히 하고 민족주의의 통일국가를 건설하려면 반드시 독립운동의 중추인 한국 독립당을 육성시켜야 한다. 2. 민족혁명당 민족혁명당은 의열단(義烈團)을 중심으로 창립되었기 때문에 민족혁명당의 진상을 명확히 하려면 반드시 의열단(義烈團)을 검토해야 한다.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의열단 단원들이 민족혁명당을 이끌어 온 것이 사실이다. 의열단은 25년전 청년 테러단에 의해 조직 및 창립되었다. 의열단이 해체되는 날까지 의열단 단장직은 줄곧 김약산[金若山- 김원봉(金元鳳)의 호]이 맡았다. 의열단을 창립한 그 당시부터 민족주의를 신봉하고 창립한 수십년 동안, 의열단이 진행한 암살, 파괴 등은 적들에게 상당히 큰 타격을 주었다. 민국 3년(즉 1921년)에 이들은 공산주의에 가까웠지만 이념상 그 어떤 변함도 없었다. 그후 3.1혁명의 하강기가 다가옴에 따라 의열단도 기타 혁명단체와 다름없이 극도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바로 이때 중국 광주에서 황포사관학교를 개설하였다. 본교의 단원은 김약산(金若山)의 영솔하에 남하(南下)하여 김약신(金若山), 최사림(崔士林)의 명의로 제4기 훈련을 받게 되었다. 당시 의열단은 중국 용공(容共,공산주의를 허용) 정책의 영향을 받아 한국 공산주의 집단-ML[즉, 마르크스(馬克斯, 레닌(列寧)]파- 이는 공산주의 각파 중 파벌(派閥) 투쟁이 제일 격렬하다.]에 가입하였다. 그로부터 의열단은 ML파의 단체임무를 책임지고 대표하는 단체가 되었다. 의열단 중, 철저한 민족주의 추종자는 결연히 의열단과 관계를 이탈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북벌(北伐) 성공과 무한(武漢) 정부가 창립됨에 따라 그들은 무한에 집중되기 시작하고 무한정부의 해체와 더불어 황포사관학교의 약 2백명 한인이 강서성(江西成)의 홍군에 가입하였다. 김약산(金若山)이 바로 가입자 중 한 사람이다. 민국 9년(1927년) 그는 중앙군의 포로가 되었으나 압송 시 기회를 타서 탈출 후 상해로 갔다. 상해에서 발을 붙일 수 없음을 인식하고 북평(현 북경의 옛 이름)으로 옮겨갔다. 김원봉은 ML파의 청년 이론가 안광찬(安光瓚), 한위건(韓偉健) 등 선생님을 초빙하여 공산주의 학술을 연구하는 한편 청년들을 모집하여 레닌학교를 창설하였다. 민국10년, ML파가 국내에서 제3차 조선 공산당 조직회를 개최하여 적들을 일망타진하였다. 그리하여 의열단 자체가 계속 존재할 의의를 잃게 되었고 민국 11년(즉 1929년) 상해에서 의열단 해체 선언을 발표하고 그후 비밀리에 조선 노동자 공산당기구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민국14년(1932년), 윤봉길(尹奉吉) 열사 [김구(金九)선생 애국단 단원]가 폭탄 투척으로 시라카와(白川) 등 적군의 우두머리를 암살했으며, 그 후 한국 혁명자들은 왜구들의 치밀한 수색 체포하에 혁명 근거지인 상해를 떠나 경호(京滬,북경과 상해), 경항일대(京杭, 북평과 항주)등 중국 내지에서 분산되어 망명하였다. 이 사건이 발생 후, 중국 정부와 민간의 한인에 대한 태도가 완전히 바뀌어 극히 돈독한 동정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위험하고 중대한 폭사(炸死) 사건′을 직접 지휘한 김구(金九) 선생이 사건 발생 다음날 이미 사망한 이동녕(李東寧) 선생과 비밀리에 가흥(嘉興, 지명)에 은거하였다.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불행하게 체포되어 본국으로 압송되어 결국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때 한국 혁명가의 위험과 고난이 최고봉에 이르렀다. 이 기회를 타서 북평에 잠복하여 있던 김약산(金若山)은 갑자기 남경에 나타나 이전에 해체된 의열단 명의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이전 황포 동창회를 통해 물자 원조와 인심을 얻어 내는 한편 한인 교포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실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민국17년(1935년)에 경호일대 한인은 연석회의를 개최하고 의열단, 한국독립당, 대한인독립당,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 등이 연합 통일된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였고 이 때는 기세가 매우 왕성한 시기였다. 그러나 미주(美洲)에 있는 한인독립당은 당시 합당(合黨) 사실을 부정하였다. 그해 9월 한국독립당은 선언을 재제정하고 민족혁명당(이후 민혁이라 약칭한다)과 이념이 상이함으로 합당 관계의 이탈을 성명하였다. 민국 19년(1937년) 즉 중화민국 26년 6월, 신한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같은 이유로 신한(新韓, 신한독립당) 및 조혁(朝革, 조선혁명당)을 공동 조직하고 결연히 민혁을 이탈하였다. 이렇게 수차례의 분열을 거친 민혁은 단지 몇명의 민족주의자만 남게 되었다. 민족혁명당을 창립한 그해, 김구(金九) 선생 등 선배들은 민족진영의 붕괴에 대해 애석한 나머지 민족혁명당에 참가한 기록이 없는 한독당원을 소집하여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다. 민국22년(1940년)에 이르러, 한국독립당과 조선혁명당은 기강(綦江, 지명)에서 협력하여 현재의 한국독립당을 조직하고 민족주의자의 통일전선을 완성하였다. 민족주의자들이 선후(先後)로 분리된 후,민족혁명당은 의열단 단원들에 의해 활동이 되었고, 중국에서 실행하는 정책상 김약산(金若山)은 급진적인 청년 부하들을 만족시킬수 없어 청년 단원들은 김약산(金若山)의 주의(主意, 혹은 이념)에 대한 불신으로 의열단 성장에 막대한 불평을 갖게 되었다. 7.7사변 발생 후, 중국[국공(國共)]이 연합 협력의 정책을 실시함에 따라, 공산당은 공개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청년 단원들은 공산당원의 자극을 받게 되었으며 그해 김약산(金若山)을 퇴치시키고 조선청년전위동맹인 적색(紅色)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런 곤경에도 불구하고 민혁은 돌발적인 사태를 만회하기 위해, 작년4월까지 한국독립당과 이념이 상이한 당원 및 정권을 획득할수 없는 비열(卑劣)자들 혹은 이탈 또는 제명된 자들을 조직하여 조선민족혁명당, 해외전권(專權)위원회, 한국독립당 통일동지회(統一同志會), 조선민족해방투쟁동맹(즉 청년전위동맹 후신)을 조직하였다. 그후, 이는 4당 연합으로 불려졌다. 사실상, 약 20명의 당원을 소유한 조직 중, 여러가지 모순이 혼합되고 각자가 상이한 이념을 지닌 단체가 어떻게 자체의 정확한 이념을 표현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당원 선언 중, 민족혁명당은 공농소자산계급(工農小資產階級)을 대표하여 민족혁명당이 정부연맹임을 천명하였다. 현명한 한외(韓外) 인사 여러분, 당신들은 그들의 한문과 중문 선언으로부터 그 정체(政體)의 존재를 알아볼수 있을 것이다! 근래 민혁은 류동설(柳東說) 등 8, 9명을 한국독립당을 이탈하고 민혁에 가입하도록 선동하고 있다. 류동설(柳東說)은 민혁의 주석직에 위임되지 않는 한 절대 가입하지 않음을 표시하였지만 민혁은 중앙 간부 3, 4 직위는 가능하지만 주석은 불가능함을 표시하여 쌍방은 대립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류동설(柳東說)은 조선혁명당으로부터 민족혁명당(현재 민혁아님)으로 옮겨 왔지만 결국 이념의 충돌로 인해 조선혁명당 재개편 시기에 공동으로 민혁을 탈당하였다. 그 후,기강(綦江)에서 3당이 통합될 때, 류동설(柳東說)은 한국독립당 간부로 임명되었다. 그의 정치노선은 순환치 않았고 그의 정치주장은 모호(朦朧)한 것이였다. 이번 한국독립당으로부터 탈당 시 선전한 선언 중, 탈당에 관한 그 어떤 견해 혹은 주장도 표명하지 않고 오직 통일을 위해 탈당하였음을 설명하였다. 이는 통일의 열성(熱誠)으로 오히려 통일을 분열시키는 것 아닌가? 이 자체가 모순이 되는게 아닐가? 3.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민족해방동맹이라 하지만 동맹 인원은 3명뿐이니 진정 당의 존재를 인정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은 공산주의의 유일한 단체라고 주장하며, 하나의 주의(主義) 진영(陣容)으로 자체의 입장을 대표하고 유지한다. 그들은 ML파계통, 김약산(金若山)의 의열단 단원이며 조선 노동자 공산당 준비회에서 공동 조직한 일원이다. 철저하지 못한 김약산(金若山)의 행동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 결국 7.7사변 그 해에 이 단체를 조직하였다. 조직 초기, 십여명의 동맹 인원이 있었지만 파벌(派閥)성이 강한 탓으로 현재 3명만 남게 되었다. 1940년 그들은 민족주의자 3당 통일의 영향을 받아 그 이듬해 3월 낙양의 공산주의 청년들이 조직한 청년전위동맹과 결합하여 조선해방동맹을 성공적으로 조직하였다. 군중의 지지가 없는 상황에서도 오랜 경력을 바탕으로 지도하여 왔지만 결국 1941년 7월 재분열되어 예전의 상태를 재현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민혁의 공산주의자(음공-陰共)에 대해서도 통제할 능력을 잃었다. 그러나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공산주의를 지지하고 옹호함으로써 중국공산당의 호감을 얻게 되었다. 팔로군(八路軍) 지역 내의 대다수 한인은 민혁 중, 김약산(金若山)의 역량을 만만히 보지 않았다. 4.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 단체 중경에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두사람에 불과하다. 그중 한사람은 민족혁명자연맹에 속하고 다른 한 사람은 조선무정부주의총연맹에 속하며 이 두개 단체는 가히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한개 주의 진영(陣容)임으로 최초로 공산주의자 단체의 승인을 받고 이를 기반으로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였다. E.통일문제 ′통일′은 그 어떤 나라 혹은 민족을 막론하고 필수적인 것이다. 통일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통일돼야만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다. 그리고 통일은 또한 약소한 민족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이기도 하다. 중국은 항전을 통해 통일되었다. 전 세계 각국은 중국이 이미 통일된 국가임을 승인하고 일부분 사람들은 중국의 통일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외국 인사들에게 언론 및 문학상 중국이 통일되지 않음을 표시하고 선전하였다. 이런 불행한 현상들이 한국의 독립운동 전선에서도 볼 수 있다. 재작년 34회 의회 중 적색(紅色) 및 흑색(黑色), 민혁과 무당무패(無黨無派)의 여러 의원들이 참석하였다. 민혁은 국무위원 2명, 차장 4명(9명 부하 및 9명의 차장중 4명을 차지함), 적색/흑색 측은 각각 차장 한명을 파견하여 이번 회의에 참석하였다. 의회중 민혁측은 시종 ′통일′은 바로 ′투항′이라고 여겼고 정권이 전부 민혁에 점령되지 않을 경우 완전 ′통일′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전체 지도권을 획득해야만 진정으로 ′통일′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불통일(不統一)′이란 구호를 내걸고 통일을 강력히 방해했을 뿐만 아니라 외부인에게 불통일의 국면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그릇된 관념으로 이들은 금년35회 의회 중 수치스러운 면을 보여주었다. 이로 보아 민혁은 통일에 대한 희망을 외치고 다지지만 결국 불통일 국면을 연출하는 것이였다. 어떻게 하여야 적합한 연합 통일이 가능할 것인가? 현재 통일 실패의 근본 원인은 바로 한개 집단 내에 두개 이상의 이념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이런 서로 상이한 이념 때문에 연합 통일의 신념이 동요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으로 통일의 국면을 확대 및 보강할 수 있을가? 이 문제는 강력한 수단으로써 만이 성공할 수 있지만 특수 환경 중, 중경 한인 사회는 절대 무력의 수단으로 통일을 달성하지 않을 것이며 아울러 여론의 힘으로 통일을 완성하지도 않을 것이다. 유일한 방법은 경제적 역량과 활동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경제적 역량이 정부에 집중된 후 최선을 다해 정당의 이념을 확고히 할 수 있는 단체를 육성시킨다. 한편으로 교민생활을 안정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 긴밀한 활동을 전개할 경우 현재의 국면이 일신 될 것이다. 그렇다면 3, 4개월 이내 혼탁한 국면을 정화하고 다가오는 10월 정기의회(定期議會) 전까지 반드시 기대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마직막으로 우방(友邦)이 늘 적은 액수로 각 한인단체에 제공하는 방법에 대하여 한인독립운동을 원조한 당국에 충실한 의견을 제기한다. 임시정부에 대해 집중 원조할 것을 희망한다. 왜냐하면 이는 통일을 촉진하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F. 의회 한국독립당은 34차 회의에서 성공적인 통일의 국면을 확대 및 강화하고 통일의 활동효율을 높이기 위하여 이번 35차 회의 중 처음부터 끝까지 조선민족혁명당의 일체 교란에 순응하여 부당한 정치적 전쟁을 피한다. 그리고 기타 당의 의견을 수용하고 균등한 배석을 기준으로 국무 위원회 10위원중 민혁당 4인석, 적색/흑색 두 당이 각각 1인석씩 차지할 것을 허용한다. 한독은 정부에 공헌이 제일 큰 당이고 의원 중 의석을 제일 많이 차지한 당이지만, 국무위원 중 4인석만 차지하였다. 이로부터 한국독립당의 아량을 볼 수 있지만 이는 한국독립당의 과도한 양보이기도 하다. 기타 당들도 이 사실을 승인해야 할 것이다. 한국독립당과 비교해 소수를 차지하고, 독립운동 중 지도분자가 극소수를 차지한 민혁은 당 내부에서 국무위원 지위를 쟁탈하는 추악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야말로 나눠줄 물건은 적고 사람은 너무 많은 것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당 내부에서의 맹렬한 암투가 발생한 후, 이를 즉시 제지해야 하지만 이는 단지 표면적인 결정일 뿐이었고 이후 한국독립당 측에 의석을 몇개 양보할 것을 재차 요구하였다. 이는 무리한 요구일 뿐만아니라 불가능한 요구였다.…(원본판독불가)…를 연출하기 위하여 고의로 회의를 100일 이상 연장하였다. 그동안 한국독립당 내부의 부패를 일삼는 자들을 선동하여 당적을 이탈하게 하고, 서안 광복군 제 2부대 중 적색분자를 쫓아내고 부대의 간부를 암살하, 군권(軍權)을 박탈하려고 음모하였다. 아울러 의회의 정(正) 회장 및 부(副) 회장과 결탁하여 회의를 무기한으로 연장하여 헌장(憲章)을 위반하였다. 한국독립당 의원은 이런 억지 노릇을 참을래야 참을 수 없어 위헌(違憲, 헌장 위반)을 이유로 의회의 폐막을 인정하였다. 이 국면을 더이상 악화시키지 않고 신속한 활동의 필요성을 위해 잠시 의회를 닫지만 이는 정세에 유익하다. 그러나 일부 의원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의회를 닫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회의에 참석한 인수는 1/3도 되지 않음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원본판독불가)… 의원문제와 통일문제는 동일한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으며 통일문제에 비해 의원문제는 더 해결하기 쉽다. 결론 한국독립운동은 한국임시정부를 중심으로 이를 최고 지도기구로 인정해야 하며, 이 정부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단체는 한국독립당을 유일한 정당으로 인정해야 한다.한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 사이의 유구한 역사에 대하여 모르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또한 현대 중국 원로(元老)들은 한국독립당 지도자와 중국국민당 사이의 오랜 역사에 대해 이해가 깊다. 중국에 있는 30여년간, 한국독립당은 북양군벌(北洋軍閥) 및 공산당에 현혹되지 않고 시종 일관의 정신으로 국민당을 뒤따랐다. 자신이 확립할 자리는 없었지만 국민당을 향한 그 뜻은 변하지 않았다. 이전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변함이 없지만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한국과 국민당의 역사 및 희망을 어찌 민혁과 비교할 수 있는가? 지난 1년간 국민당이 민혁에 속아 한국독립당 및 임시정부에 대해 보여준 행동은 정말 한국독립당으로 하여금 가슴 아픈 눈물 흘리게 할 정도였다. 우리는 전후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걱국 시 기초를 어떻게 닦을 지에 대해 우려한다. 사실상 우리는 반드시 이 문제에 주의해 민족주의 대집단인 한국독립당을 주체로 국가를 건설하고 이끌어나가야 한다. 이는 또한 합리적이고 매우 합당한 선택이다.

    43 당선 축하문 기안

    중앙집행위원회비서처문고 구분기관수신발신초고필사 서한김구(金九), 김규식(金奎植)년 월 일년 월 일월 일 시4월 27일 시 요지 한국임시정부 주석과 부주석에 당선된 것을 편지로 축하함 자료제보존인간수발송 제 호 차 회의월 일 시월 일 시4월 27일 시 비서장부비서장비서과장처장 오철성(吳鐵城) 월 일 시월 일 시월 일 시4월 26일 9시월 일 시 1. 백범(白凡) 선생께 방금 귀국 임시정부 재선에서 집사님께서 주석을 연임하셨다는 소식을 들어 알았습니다. 대중들이 기대하는 바이고, 매우 기쁘고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귀국 독립의 전망이 점점 밝아오기를 축원합니다. 이에 특별히 편지를 보내어 축하 드립니다.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합니다. 아우 오철성(吳鐵城) 삼가 올립니다. 2. 규식(奎植) 선생께 방금 귀국 임시정부 재선에서 집사님이 영광스럽게 부주석에 당선된 것을 알았습니다. 긴밀히 단결하고 상호 부조하면서 시국의 난관을 이겨냅시다. 귀국 독립의 전망에 좋은 일이 많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에 특별히 편지를 보내어 축하 드립니다.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합니다. 아우 오철성(吳鐵城) 삼가 올립니다.

    44 김구 주석 당선 축하에 대한 회신

    방금 귀함을 받고 황송하게도 지나친 치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화려하게 수식하신 말씀에 부끄러워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번에 어찌되어 여러 사람들에게 당선되었는데 임무가 막중하고 재능이 딸린다는 것을 깊이 느꼈습니다. 각하께서 때때로 지침을 내리시어 그대로 할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에 특별히 회신을 보내어 감사를 표합니다.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합니다.

    45 제36차 임시의회 선언 기사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제36차 임시의회선언 사랑하는 국내외 동포 여러분! 작년 10월에 열린 임시정부의정원 제 35차 정기회의와 최근에 열린 제 36차 임시정부의회는 우리나라 민족독립운동 상에서 아주 중대한 역사적, 현실적 의의를 갖고 있습니다. 이 두차례 회의는 국내와 국외로부터 오는 일체 곤란과 장애를 극복하고, 끝내 이의 장엄하고 중대한 임무를 완성하였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은 마음을 합쳐 서로 돕는 분위기 속에서 개원을 선고하였습니다. 제 35차 정기회의는 군사, 외교, 선전, 재정 등 주요 의안들을 무난히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임시약헌의 수개와 정부주석, 국무위원의 선거 등 제일 중요한 문제에 대하여 각의원들 사이에서는, 특히 각당파 동지들 사이에서 약간의 의견 분기가 있는 바람에 해결하지 못하였고, 일시적으로 페원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 때문에 우리동포들은 당연히 매우 큰 우려를 느끼고, 우호국 인사들도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고 있는데, 이는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 전체 의원들은 임무를 완성하기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의견의 일치를 이루었습니다. 하여 본월 20일에 제 36차 임시정부의회를 열어 임시정부의 약헌을 수개하고 정부의 주석과 국무위원을 선거하여, 끝내 지난 의회에서 실현하지 못했던 임무들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번에 수개하여 반포한 임시헌장은 독립운동가의 영도적 지위를 확보하고 제일 진보적인 민주집권제원칙을 주안으로 채용하였습니다. 하여 전후 두번에 걸친 의회에서 끝내 제일 중대한 성과를 이루었습니다. 이 헌장은 틀림없이 우리 삼천만 민족의 일체행동의 최고 준칙이 되었습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여 온 국내외혁명전사들! 전체 동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 모두의 임시헌장을 열렬히 옹호하고 준수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당선된 정부주석, 부주석과 전체 국무위원들은 우리의 혁명운동에서 제일 많은 공헌을 한 민족지도자들이였으며, 우리 민족의 각대 혁명정당의 영수들이였습니다. 이번에 민족주의 각당과 사회주의 각당의 권위가 있는 지도자들은 함께 연합하여 전민족통일전선정부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이번 의회의 중대한 성공일 뿐만아니라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상에서, 특히 임시정부의 발전사 상에서 새기원을 연 대서 특필할 사건입니다. 이후부터 우리 임시정부는 대내적으로 전민족의 일체 반일세력을 통일, 지휘할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전민족의 의사와 권력을 대표할수 있습니다. 이러면 반드시 전민족의 권위적이고 능력적인 최고영도기관이 될 것입니다. 민족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는 국내외의 혁명전사들! 전체 동포들이여! 우리는 여러분이 우리 모두의 임시정부를 절대로 신임, 용대해주고 정부의 모든 법령과 결의를 충실히 집행해 주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동포 여러분! 오늘날 우리는 오로지 임시정부의 영도하에서, 전민족이 통일하고 단결하는 조건하에서, 그리고 오로지 중국, 미국, 영국. 소련등 동맹국가들과 함께 분투하는 조건하에서 만이 우리가 공동으로 분투하는 조건을 마련할 수 있고, 우리의 자신과 용기를 증강할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의 적인 일본제국주의의 붕괴와 우리 민족의 최후승리가 눈앞에 임박하였습니다! 카이로회의 이후 우리 민족의 반일혁명의 고조는 더욱 높아졌습니다! 전체 혁명전사들! 전체 동포 여러분! 모두들 함께 활발히 일어나 민족단결을 공고히 하고 전세계 동맹우호군들과 함께 발을 맟추어 노력하고, 최후승리를 이룰 그날까지 분투합시다! 대한민국 26년(1944) 4월 24일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의원일동

    46 독립평론

    윤봉길(尹奉吉) 열사의 의거 12주년을 기념하자 - 윤봉길(尹奉吉) 열사가 시라카와(白川)를 폭사시킨 사건의 진상 9.18의 치욕을 씻지도 못했는데 1.28전쟁을 맞이하게 되었다. 제 19로군과 제 5군은 용감하게 싸워서 매번 적들의 흉악한 기세를 꺾어놓았지만, 적은 병력으로 많은 적들을 당할 수가 없어 자발적으로 철수하였다. 송호(淞滬)정전협정이 체결되자 4억 5천만 중화의 아들 딸들은 격분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매 사람의 마음 속에 모두 비분이 남아있지만 왜인들은 이를 커다란 영광으로 여기고 의기양양해 하고 있었다. 때는 4월 29일이며 왜국황제의 생일(이른바 천장절)이다. 왜적들은 조계(租界)당국의 경고도 무릅쓰고 상해 홍구공원에서 경축대회를 열고 열병식을 하면서 위세를 나타내려 하였다. 그날 참가한 왜국 군민이 수만이 되고 외빈으로는 상해의 각국 문무 관리들이 초청되어 참가한 외에 기타 사람들은 일체 참가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국의 윤봉길(尹奉吉) 열사는 폭탄을 숨겨가지고 그들의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왜국대중들 속에 섞여 들었다가 적의 수뇌들이 모두 무대에 모이고 대중을 향해 연설할 때 폭탄을 던졌으며, 폭탄이 폭발하자 무대 위에 있던 자들은 화를 면한 자가 없다.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河端)는 당장에서 배가 터져 죽고 시라카와(白川) 등은 모두 중경상을 입었다. (시라카와는 부상이 심하여 약 한 달 후에 죽어버렸다.) 윤봉길(尹奉吉) 열사는 목적을 달성하자 “대한독립만세!”을 세 번 높이 외치고 왜군에 체포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19일에 적국의 가나자와(金澤)에서 태연하게 순직하였다. 비록 윤 의사가 순직하였지만 그의 위대한 업적은 천추에 길이 빛날 것이며 그의 의거는 한민족만의 영광이 아니라 일본에게 침략당하고 있는 온 민족의 영광이다. 지금 윤 열사의 거사12주년 기념일을 맞이하여 본지(本誌)는 중·한 대중들의 항일정신을 고취하여 전투력을 제고하고 최후의 승리를 신속히 얻기 위하여 특별히 이 문장을 게재하여 본 사건의 진상을 폭로하며 독자들이 헤아려 살피기 바란다. 아래의 문장은 한인애국단이 중화민국 21년 4월 29일에 본 사건이 발생한 후 11일이 지난 다음 상해의 여러 신문에 발표한 영문 문장으로서 본문과 크게 차이가 없으며 “도왜실기(屠倭實記)"에 이미 게재되었다. 본단 단장인 김구(金九) 선생은 언제나 말이 적고, 행실에 충실할 것을 신조로 삼아 큰 일이라고 간주하지 않는 한 본 사건의 진상을 세상에 폭로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나 본 사건이 발생한 당일에 왜인들은 지극히 당황하여 한쪽으로는 본 사건의 책임을 프랑스조계 내의 전체 한인에게 덮어씌우고 조계의 관헌과 결탁하여 한인들을 마음대로 수색하고 체포, 위협하고 한편으로는 갖은 구실을 찾아서 외교상으로 중국을 난처하게 하고 있다. 그리하여 김구(金九) 선생은 왜인들의 간계를 밝히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5월 10일에 본 사건의 진상을 영문으로 국내외에 광범하게 알렸다. 다음 문장은 영문문장과 거의 같으며 조금 보충한 것이다. 올해 4월 29일 상해에 있는 10만 왜인들은 열광적인 승전의 기쁨 속에서 왜국 황제의 생일을 경축하고 있었다. 이것은 왜인들이 중국 동북을 강점하고 중국 강남을 유린한 후의 처음으로 가진 경축행사였다. 왜인들은 의기양양해 하면서 새벽부터 다투어 홍구공원으로 달려가 경축행사에 참가하였다. 그때, 상해의 한구석에는 두 명의 기이한 인물들이 자동차 옆에 서 있었다. 한 명은 50여세 되는 늙은 노동자이고, 한 명은 30세가 채 되지 않은 의젓한 청년이며 모두 얼굴에 긴장감과 엄숙함을 담고 있는 것이 아마 간고하고도 막중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늙은 노동자는 비장한 어조로 청년에게 “군(君)은 이제 곧 세상과 하직하게 된다.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유를 위하여 위대한 희생을 자처한 군의 혁혁한 성공은 군의 정신과 함께 영원할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당부하자면, 우리의 적은 왜구 뿐이고 오늘의 거사는 심중하게 하여 절대 왜구 이외의 다른 나라의 인사들을 상하게 하지 말라. 오른 폭탄 두 개를 군에게 줄 테니 하나로 적장들을 폭사시키고 다른 하나로는 자신의 생명을 끊어라.”고 하였다. 청년은 "삼가 명을 받들겠습니다. 선생께선 나라를 위하여 몸을 잘 돌보시고 끝까지 투쟁하기를 바랍니다.”고 하였다. 늙은 노동자는 다시 “군이여, 내세에 다시 만나자.”고 말하였다. 그리고 나서 두 사람은 악수를 하였고 헤어지면서 뜨거운 눈물을 비 오듯이 쏟았다. 이 날 이 때에 이렇게 장엄한 장면을 목격한 사람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일본민족은 원래 법치도 없었으며 옛적부터 야만하고 잔인하였다. 칼을 찬 사무라이들은 마음대로 약탈, 간음, 살인하여도 다른 사람들이 감히 간섭하지 못한다. 사무라이들이 때로는 중·한 연해지구에 출몰하였는데 이들을 왜구라고 불렀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은 새로운 과학을 이용하여 무력을 키우는데 온 힘을 쏟아 부었으며 몇 년이 지나지 않아서 일약 가장 문명한 일등 강도로 도약하였다. 그러므로 지금의 일본정치가 군벌들의 독재에 의하여 운영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이러한 연고로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위정자들은 이를 두려워하고 있다. 이들은 일이 생길 때마다 총칼을 앞세워 위협적인 위세를 떨치며 인민들을 탄압한다. 국내에서 이러한데 더군다나 국외에서는 축하행사를 열며 4억 5천만 대중들의 격분을 자아내고 있다. 4월 29일 왜인의 경비는 미증유였다. 탱크, 비행기, 장갑차, 대포, 기관포 등 병기들을 모두 나열하였으며 홍구(虹口), 갑북(閘北), 강호(江湖) 일대가 모두 경계선 안에 들었다. 수천 명의 무장대오가 말을 타지 않으면 도보로 공원 안팍을 순시하고 있어 바늘이 들어갈 구멍조차 없어 보였다. 중국인[한간(漢奸-적과 내통하는 이들)은 제외]은 물론이고 외국인도 초대장이 없는 자는 공원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견고하기가 금성철벽 같았다. 그러나 이러한 세계일등국 대군벌의 권위가 한 청년의 위대한 정신을 막지 못하는 것이 정말 이상하다. 청년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늙은 노동자와 헤어진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4월 27일에 공원에 와서 세심하게 계획하였으며 다시 홍구에 나와서 시라카와(白川)의 사진을 얻었으며 일본국기를 사서 품에 넣었다. 29일 아침에 양복을 입고 군용물통(안에 폭탄이 있음)을 메고 도시락(안에 폭탄이 있음)을 들고 공원에 왔으나 일본군대와 경찰은 그가 한인인 것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이것으로부터…(원문누락)… 청년이 차를 타고 공원으로 간 후, 늙은 노동자는 급히 모처에 돌아갔다. 그때 상해주재 일본 최고 문무관원들이 모두 상해공원의 경축 무대에 모였으며 일본 교민들이 무대 아래에 둘러서서 의기양양하게 국운의 지속적인 흥성과 황제의 만수무강을 함께 축하하였다. 갑자기 검은 구름이 몰려오고 궂은 비가 내렸다. 이 청년이 손을 쳐들자 도시락이 무대 위로 날아갔으며 우레가 울고 천지가 진동하며 무대 위의 사람들은 소리와 동시에 분분히 쓰러졌다. 때는 오전 11시 40분이다. 가와바타(河端)는 당장에서 배가 터져 죽었다. [가와바타(河端)는 일본거류민단장이며 일본상업회의소 소장 고메사토(米里)와 함께 상해사변의 민간 흉수이다. 사복경찰 대장이고 사무라이를 조종하여 삼우(三友)실업공사 공장의 방화살인사건을 일으켰다.] 상해를 침략한 적의 총사령 시라카와(白川)는 204개의 큰 파편과 무수한 작은 파편에 맞아 5월 26일에 상해에서 죽었다. 제 3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 중장은 눈알이 튀어나와 한쪽 눈이 실명되었으며 제 9사단장 우에다(植田) 중장은 두 다리가 부러졌으며 주중일본공사 시게마쓰(重光葵)도 다리가 부러졌다. 이들은 죽음은 면했지만 모두 불구가 되었다. 이외에도 상해주재총영사 무라이(村井), 거류민단 서기 도모노(友野) 및 왜인부녀 5인 등이 모두 부상을 입었다. 21발의 예포도 한번에 터져버렸고 장엄한 경축대회가 순식간에 처참한 염라지옥이 되었다.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을 알리는 조종이고 살인 방화하는 흉악한 범죄자를 징벌하는 벼락이다. 이 커다란 폭발소리를 듣고 통쾌함을 느끼는 사람은 3천만 동포들뿐 아니라 4억 5천만 중국인, 상해전투에서 죽은 수만 명의 생명들도 이 때로부터 구천에서 눈을 감을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 필부(匹夫)도 뜻이 있다면 수많은 군대를 이길 수 있다. 진심으로 나라를 걱정하는 자라면 지금 위급한 시기에 어찌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서 투쟁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 청년이 바로 국내외에서 흠모하고 존경하는 윤봉길(尹奉吉)열사이다. 열사는 지금으로부터 36년 전에 한국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이 과인하고 신동의 소리를 들었다. 천성이 반항적이어서 어른이라도 무리하게 압박하면 꼭 이치를 따져가며 변론하였으며 다른 사람과 싸우면 절대로 양보한 적이 없다. 15세 때 벌써 중문 시를 지었다. 어느 날 마을의 늙은이가 그의 재능을 알아보려고 운을 주어서 시를 짓게 하였다. 열사는 바로 “불후명성사기명,사기명명만고청, 만고청심도재학, 도재학행불후성(不朽名聲士氣明, 士氣明明萬古青, 萬古晴心都在學, 都在學行不朽聲).”라고 시를 지었다. 열사는 16세에 일문을 독학하여 1년 만에 대화할 수 있었으며 17세에 고향에서 무산자제들을 가르쳤으며 19세에는 야학까지 꾸려서 일년 정도 지난 후, 이런 산골농부들이 어찌 신사조(思潮)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는 회의가 생겼다. 왜인들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 압박이 매우 세밀하며, 한인들은 경제적 착취로 인하여 사람들이 날로 굶어 죽는데 대해 참으려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열사는 크게 한탄하고 나서 죽음으로 나라를 위해 보답하여 동포들을 도탄 속에서 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적들의 감시 하에 모든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하기에 23세에 단연히 조국을 떠나 상해로 갔다. 열사의 부친의 성함은 윤황(尹璜)이며 올해 42세, 모친 김원상(金元祥) 여사는 올해 44세이고, 부인 배용순(裴用順) 여사는 26세, 장자 막순(模順)은 6세이고, 둘째 담(淡)은 3세이며, 둘째 동생 봉석(奉錫)이가 23세, 셋째 동생 영석(永錫)이가 16세이다. 집에 유산이 없고 생계가 매우 곤란하며 농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효도하고 사랑하면서 가정을 버리고 싶지 않지만 나라를 위하여 고루 돌볼 수가 없기에 천륜지정을 아픔을 참고 끊어버렸으며 그 기개가 자못 비장하였다. 나라를 떠나려 하는데 여비가 없어서 부득이 자신이 꾸린 학교의 경비에서 수십 원을 꺼내가지고 압록강을 가만히 건너가지고 청도(靑島)에 갔는데 수중에 돈이 떨어졌다. 타향에서 떠돌아다니면서 갈 곳이 없어 할 수 없이 치욕을 참고 일본인 나까하라(中原)밑에서 세탁일을 하면서 지냈다. 일년 이후에 모은 돈으로 올 때 가지고 왔던 학교에 돈을 부쳐 보내고 나머지 돈을 가지고 상해로 떠났으며 1932년 5월 8일에 상해에 도착했다. 상해에 도착한 후, 열사는 매우 기뻐하였지만 아는 사람도 없고 빈곤에 시달려 어느 물자회사에서 근무하였는데 월급이 10 여원 밖에 되지 않아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그리하여 공장주의 압박에 분개, 홍구시장에서 남새상을 하였다. 열사는 항상 낡은 옷을 입고 큰길로 다녔기에 한인들도 그를 업신여겼지만 참고 견디면서 조금도 후회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김구(金九) 선생에게 발견되었으며 천하지사(天下之事)를 담론하면서 서로 마음이 맞아 선생은 그를 매우 중히 여겼다. 이 선생이 바로 앞에서 말한 늙은 노동자이다. 열사는 4월 26일에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으며 4월 29일에 그의 평생의 큰 뜻을 이루었다. 그의 위업은 일월과 밝기를 다투는 격으로 위대하며 한민족의 영예일뿐더러 전세계 피압박민족의 영광이기도 하다.

    47 김규식이 오철성에게 보낸 편지

    황송하게도 축하편지를 받아 부끄러움만 더해집니다. 이번에 회의를 통하여 민족의 단결을 완성하고 정·부 주석과 국무위원을 재선하였습니다. 다만 우리 정부가 아직도 간고하고도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기에 귀 당국에서 각별히 도와주셔서 우리 두 민족의 공동 임무를 완수하도록 하여 주십시오. 이에 특별히 삼가 사의를 표합니다. 귀하의 건강과 행복을 축원합니다.

    48 임시의정원 폐회 축하 전문 기안

    중앙집행위원회 비서처 문고 구분기관수신발신초고필사 전보대한만국임시정부년 월 일년 월 일월 2일 11시월 일 시 요지 의정원 회의가 원만히 폐회된 것을 전보로 축하함 자료제보존인간수발송 제 호 차 회의월 일 시월 일 시4월 27일 시 비서장부비서장비서과장처장 3월 5일 3시월 일 시월 일 시5월 3일 시월 일 시

    49 임시정부 각부 부장 취임 보도기사

    중앙일보

    50 기독교 한교복리촉진회 공문 및 회록

    제 1차 회의기록 시간: 중화민국 33년 6월 19일 오후 3시 지점: 중경(重慶) 중한문화협회 출석인원: 진인병(陳仁炳), 갈덕기(葛德基), 가오생(賈吳生), 애덕부(艾德敷), 소경삼(邵鏡三), 최우강(崔友江), 김규식(金奎植), 엄대위[(嚴大衛)본명 엄항섭(嚴恆燮)], 추임지(邹任之), 정약곡(鄭若谷), 팽이납(彭耳納), 사도덕(司徒德), 오철성[(吳鉄城)-온숙선(溫叔萱) 대리출석], 손과[(孫科)-사도덕(司徒德) 대리출석], 황차함[(黃次咸)-송걸인(宋傑人) 대리출석], 최성오(崔省吾), 진철생(陳鉄生), 장해송(張海松), 안원생(安原生), 공상희[(孔祥熙)-진철생(陳鉄生) 대리출석], 경원학(耿元學) 사회부대표: 정약곡(鄭若谷) 사장(司長) 주석: 손과[(孫科)-사도덕(司徒德) 대리출석] 기록: 경원학(耿元學) 1. 규정에 따른 인사 2. 주석보고 오늘 기독교한교복리촉진회 발기인회의의 의의와 중요성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습니다. 사회부 정약곡(鄭若谷) 사장(司長)께서 출석하여 지도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잠시 후에 본 촉진회의 발기경과에 대한 소경삼(邵鏡三) 박사의 보고가 있을 예정이므로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손과(孫科) 원장이 임시로 중요한 공무가 있어 출석하지 못해 너무 유감입니다. 3. 소경삼(邵鏡三) 박사의 발기 경과 보고 한국이 포악한 일본에 의하여 합병당한 후, 독립혁명과 전쟁의 영향으로 어려움이 매우 많습니다. 협진회(協進會)는 필요에 의하여 특별히 본회를 발기하였습니다. 그러나 협진회(協進會)는 솔선하여 주장, 발기한 기구 뿐이고 실제적인 진행은 여러분들의 공동 책무에 의거해야 합니다. 4. 사회부 복리사 정약곡(鄭若谷) 사장의 축사 협진회(協進會)가 한교복리촉진회를 발기하여 조직한 의의는 매우 큽니다. 오늘 발기인회의를 열어서 오랫 동안의 이상을 구체화시킨 것은 성대한 일입니다. 곡(谷)부장께서 사전에 약속이 있어서 친히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제가 부장님을 대표하여 여러분들께 삼가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5. 공상희(孔祥熙) 부원장을 대표하여 진철생(陳鉄生) 선생이 축사 공(孔) 부원장이 참석할 수 없어 전화로 저에게 참가하도록 부탁하였는데 이는 기쁜 일입니다. 이 일은 중대한 의의가 있으며 공 부원장과 저 자신 모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6. 오철성(吳鉄城) 비서장을 대표한 온숙선(溫叔萱) 선생의 축사 이번에 오 비서장을 대표하여 이런 성대한 회의에 참가하게 되어 매우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도움이 필요하면 아무 때나 알려 주십시오. 당연히 미력한 힘이나마 전력을 다하겠습니다. 7. 김규식(金奎植) 부주석의 치사 이번에 한교복리촉진회를 발기하여 조직한 의의는 매우 깊고 영향도 극히 큽니다. 혁명운동 종사자들의 종교생활방면에 대한 공헌이 아주 큽니다. 이러한 저의 뜻을 삼가 여러분들께 말씀드립니다. 8. 토론사항 1) 발기인이 이미 작성한 기독교 한교복리촉진회 회장(會章) 초안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문제 결의: 원칙적으로 통과한 이름, 조직성원 및 대외관계 등을 주비위원회에 넘겨 연구, 협의하게 한 후, 제 2차 발기인대회에서 최종적으로 결정한다. 2) 발기인이 이미 작성한 기독교 한교복리촉진회 사업대강(大綱) 초안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문제 결의: 원칙적으로 통과하였으며 주비위원회에 넘겨서 연구하고 협의하여 처리하게 한다. 3) 발기인이 작성한 발기인명단과 회원명단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대한 문제 결의: 주비위원회에 넘기어 협의하여 처리하게 한다. 4) 기독교 한교복리촉진회에서 건설하려고 하는 한교 신촌(新村)을 어떻게 설계하여 실시하는가에 대한 문제 결의: 주비위원회에 넘겨 책임지고 처리하게 한다. 5) 주비위원을 추천하여 주비위원회를 조직하는 것에 대한 문제 결의: 사도덕(司徒德), 갈덕기(葛德基), 팽이납(彭耳納), 나운염(羅運炎), 최헌상(崔憲詳), 항열(項烈), 소경삼(邵鏡三), 장해송(張海松), 서위렴(徐維廉), 안원생(安原生), 엄대위[(嚴大衛)본명 엄항섭(嚴恆燮)], 최우강(崔友江), 경원학(耿元學)김순애(金淳愛), 가오생(賈吳生), 진철생(陳鉄生), 추임지(邹任之) 등 17인을 주비위원으로 하고, 경원학(耿元學)을 시켜 최단기간 내에 사람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고 모든 것을 진행하도록 하게 한다. 9. 장해송(張海松) 회장의 기도 10. 산회: 오후 여섯 시 정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