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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자료

    • 신문명
      국민보
    • 발행일
      1952-02-20 WEDNESDAY
    • 생산정보
      국민보 제三천一백七十六호 신한국보 제一百호


    선조대왕 임진왜란 때에 사명대사 (성은 임이오 자는 송운)는 일본에 가서 풍신수길과 말할 때 의기가 높고 언사가 명백하여 수길이 크게 감복하여 대우하기를 부처님과 같이 하였다.

    하루는 수길이 조용히 물으되 귀국에 좋은 보배가 많다하니 어떠한 것이 가장 보물이냐 한즉 송운은 대답하되 우리나라는 별로 보물로 여기는 것이 없고 너의 머리를 제一 큰 보물로 안다하니 수길이 처음에는 노하는 빛이 있다가 다시 크게 웃으며 후히 대접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전 하여 김성一이 일본에 갔었는데 관백(풍신수길)은 김씨를 시험하기 위하여 문앞에 현관에다가 「시관」이라 쓰고 그들 영접하니 그가 꾸짖어 말하기를 「시관」은 일본사람의 하인관을 의미함이니 (일 하인은 곧 이시자로 날일 아래 한일하고 점복하고 사람인) 국빈에 대하여 이러한 모욕이 어디 있느냐 하니 관백(풍신수길)이 크게 놀래고 탄복하였다 한다.



    김덕영은 천고에 용맹스러운 장수라. 무등산에 들어가서 三척의 큰 칼을 만드니 밤에 청백기가 한동리에 차고 산이 五六일을 울고 또 용마를 얻어 장사 五천인을 데리고 의기를 세우고 왜병을 치니 청정이 그림 그리는 사람을 몰래 보내어 화상을 그려다 보고서 크게 놀래면서 말하기를 참으로 장군이라 하고 감히 범치 못하였다. 때에 조정이 화친코자 하여 덕영으로 하여금 싸우지 못하게 하고 간신히 무함하여 이목학과 같이 반하다 하여 옥중에서 죽이니 왜병이 듣고 서로 축하며 국민들은 슬프게 울었다.



    진주성이 함락할 때에 의병장수 고중후 (경명의 아들)과 김천일과 유복립과 황섭들이 싸우다가 죽으니 왜병 장수가 진주에 들어와서 촉석루에서 술을 마시고 논개를 불러 놀새 기생 논개가 왜적의 장수를 취함을 보고 등에다 업고 물로 뛰어들어가니 왜적의 장수가 뛰어 나오고자하나 논개의 손이 힘껏 잡고 놓지 않음으로 강 가운데 빠져죽으니 후에 사람들이 촉석루 아래의 바위에 의낭암이라 하고 바위 위에는 사당을 지어서 제사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