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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81 현순씨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25 발신자: 수신자: 현 순(Soon Hyun)수신주소: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905-907 컨티넨탈 트러스트 빌딩|| 워싱턴|| D. C.친애하는 현 순(Soon Hyun) 씨께귀하께서 보내신 3월 21일자 서신을 관심 있게 읽어보았습니다. 지난 월요일 귀하께서 저의 사무실에 전화를 주셔서 서신 내용에 대한 귀하의 의견을 제게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회견에서 제가 언급한 내용에 대해 귀하께서 잘못 아시고 계시는 부분을 한 두 가지 정정하려 합니다. 저는 일본이 한국을 ‘절대’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라든지 한국은 ‘절대’ 폭력을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말한 것은 “현 국제 정세에서 일본은 자발적으로는 한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은 군사를 일으켜 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할 만큼 충분한 힘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먼 미래의 상황을 감히 판단할 수 없기에 ‘절대’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귀하께서는 “교회 방침은 정치적 문제에 마땅히 중립적 자세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일부 미국의 저명한 교인들이 한국보다는 일본에 유리한 입장을 취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누군가 어떤 사안에 대해 중립적 자세를 유지하려 하면 반드시 양쪽 모두에게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교롭게도 저희가 일본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솔직한 서신을 받은 그날 한 저명한 일본인으로부터 저희가 부당하게도 한국 혁명가들에게 동조하고 있다는 불만을 들었습니다. 특히 귀하께서 하신 말씀 중에 “과거에 한국과 일본에 대해 논쟁이 일어났을 때 일본인들하고만 상의했고 한국인들과는 상의하지 않았다”라는 말에 매우 놀랐습니다. 저희의 목적은 무고하고 가련한 한국 국민들에게 행해지는 학대를 저지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한국 국민들은 희생자였기 때문에 그 폭력을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우리의 항의를 일본에게 효과적으로 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문제를 일본인들과 상의하는 것은 당연하며 현명한 방법이 아니었을까요?귀하께서 말씀하신 사항은 저희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입니다. 저희 정보 출처는 수없이 많으며 믿을 만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발생하고 있는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한 귀하의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본인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경계 조치를 취해 발표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이 공식 발표되면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발생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라는 말에 의문을 제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일본의 만행에 대한 모든 믿을 만한 정보는 공식적으로 처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문 보도의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기 위해 신문 보도를 통제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출처가 분명한 사실 보도에 대해서는 어떠한 제재도 없었습니다. 그밖에도 귀하의 서신 내용에 대해 언급하고 싶은 사항들이 있지만 이만 줄여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서신은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귀하의 솔직한 서신에 대한 솔직한 답변으로 단순히 보내 드린다는 것을 이해하시리라 믿습니다. 귀하의 서신으로 미루어 보아 귀하께서는 동양교섭 연합회 위원회(Federal Council’s Commission on Relations with the Orient)를 만나시기를 바라는 것 같습니다. 이 연합회 회장이신 헤븐(W. I. Haven|| D. D.) 경을 만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분은 뉴욕에 있는 전도사의 집에 계십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재배

    82 모리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01발신자: 수신자: 로렌드 모리스(Roland S. Morris) 대사수신주소: 미국 국무성|| 워싱턴 D. C.친애하는 벗 모리스(Morris)에게 한국 상황에 대한 우리의 근심은 날로 더해 간다네. 일본 경찰 및 헌병들이 지속적으로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고 있네. 우리 선교 위원회의 회의에서 자네도 잘 알고 있는 인물이자 나의 동료인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는 한국의 상황을 일본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호소하는 것이 우리에게 나쁜 영향을 줄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네. 물론 공식적인 호소는 매우 신중하고 현명하게 판단하여 결정할 문제라네. 이런 부류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성명서를 작성하기 전에 그것이 과연 유용한 조치인지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네. 우리는 자네의 솔직한 자문에 매우 고맙게 생각하네.조만간 뉴욕에 계속 머물 수 있겠나? 그렇게 되면 개인적으로 만나 의논하고 싶네.자네의 벗으로부터

    83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판독 불가독립을 위한 모든 노력을 다하여 시위를 재개할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새로운 통치자에게 공정한 판단을 내리기로 결정했다면 정부의 관용을 얻기 위한 한국 지도자들의 노력이 계속되지 못할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오는 10월 워싱턴에서 열릴 국제 연맹(League of Nations) 회의에서 한국 문제를 다룰 것이라 확신합니다. 또한 가을에 열릴 캐나다 국회에서도 한국 문제와 캐나다 선교단의 관계를 다룰 것입니다. 그들의 정보가 정확한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박사님께서 연맹 협회(League Assembly)의 미국 대표자들과 연락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뉴욕 타임스 시사 기록 6월호에는 3월 14일 도쿄(Tokyo)에서 열린 각료 회의에서 일본은 한국에서 군사 체제를 철폐하고 민간 체제로 대체하기로 결의된 개혁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미국 국민들은 이 개혁이 적당한 시기에 실시되리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결과는 달랐습니다. 8월 5일 일본 언론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습니다. “한국의 새로운 행정에 대하여 민간에 동요가 일어나고 하라(Hara) 수상도 행정 개혁에 동조할 것이라는 전반적인 기대에도 불구하고 수상은 국방부 장관에게 세이토(Saito) 씨를 남작으로 추대할 것을 승인했습니다.”이 임명은 확고히 실시되었습니다. 세이토(Saito) 씨는 은퇴한 장군으로서 국방부 장관이 남작으로 추대한 인물입니다. 이것이 민간 체제입니까? 일본의 이러한 위장의 일본 언론을 속이지는 못했습니다. 다음은 8월 7일자 일본 언론에 실린 몇 가지 의문 사항들입니다. 요로슈(Yorodsu) - 조선 총독 임명법은 개정될 것입니다. 하지만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이 새 총독으로 임명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법률 개정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이 세트수머(Satsuma) 출신이 아니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가 세트수머(Satsuma) 파벌에 속한 인물이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하세가와(Hasegawa) 장군이 표명하는 죠슈(Choshu) 군사 집단이 단순히 세트수머(Satsuma) 해군 그룹으로 대체된 것이라면 한국 국민이 요구하는 사항에 최소한의 만족도 줄 수 없을 것입니다. 타이쇼(Taisho) 시대의 세이유카이(Seiyukai) 내각이 여전히 육군 또는 해군의 도구로 활용된다는 사실은 실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미야코(Miyaco) -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이 한국의 총독으로 추천되었다는 소식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해군 대장이라는 직위는 민간 관료 이상의 군 명령권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일본 정부가 한국에 군사 체제를 계속 유지하려 한다는 사실을 믿었다면 이것은 국가적인 커다란 손실이 될 것입니다. 해군 대장의 직위를 벗어버린 세이토(Saito) 남작이 이러한 국가적인 손실을 만회할 수 있는 행정 능력이 있는가의 질문에 그 누구도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타이쿄 마이니치(Tikyo Mainichi) -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은 해군 대장으로서가 아닌 단순한 정치인으로서 한국의 새로운 총독으로 추천되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변명에 불과합니다. 해군 대장이라는 직위가 정치인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문제는 별도로 하고서라도 해군 대장이라는 직책은 해군 장관 이상의 가치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독일의 지멘스 슈케르트(Siemens-Schuckert) 사건은 아직도 우리 미국 국민들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습니다. 당시 수상이었던 야마모토(Yamamoto) 백작과 당시 해군 장관이었던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이 추문과 연관이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야마모토(Yamamoto) 백작이 그 사건과 연루되어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조선 총독으로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을 임명할 것이라는 결정에 한국 국민들이 실망할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식민 행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민간 관료를 원하고 있습니다. 총독 임명 결정이 사실이라면 생존을 위한 요구를 하고 있는 한국 국민들에게 오히려 커다란 부담을 안겨 주게 된 것입니다. 위에 언급한 기사들은 일본의 주요 언론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이 민간 총독을 원한다는 언론의 주장을 경고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한국 국민의 여론은 결국 어떠한 개혁도 독립을 원하는 한국인들을 충족시킬 수 없을 것이라는 우려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한 달 반 전 헌병 체제가 철폐될 것이라는 기사가 서울신문(Seoul Press)에 연일 보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공식적인 예측도 실현되지는 않았습니다. 동봉한 신문 기사 스크랩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겠습니다. 서울신문(Seoul Press), 8월 5일: (4) 헌병을 기반으로 하는 현 경찰 체제를 일반 경찰 병력으로 대체합니다. 서울신문(Seoul Press), 8월 10일: 4. 헌병과 경찰이 분리됩니다. 헌병은 육군 사령관 지휘하에 배치될 것이며 군 경찰의 임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또한 경찰은 해당 지방 관료 휘하에 배치되어 정부 장관의 경찰국 지휘자의 통제를 받을 것입니다. 이러한 개혁으로 헌병은 앞으로 서울이 아닌 도쿄(Tokyo)로부터 명령을 하달받게 될 것이며, 경찰은 서울에서의 지시를 따르게 될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는 다음 주부터 새로운 제복을 입게 될 것입니다”라는 말을 하는 헌병의 삽화도 실렸습니다. 이것이 ‘헌병 제도 철폐’가 진행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새 총독인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은 아직 한국에 오지 않아 정권을 인수하지 않았지만 조만간 한국에 도착할 것입니다. 박사님께서는 제 서신을 받으신 후 이 문제에 대해 스콧(Scott), 스켈(Schell) 등 여러분들과 함께 의논하시기 바랍니다. 애비슨(O. R. Avison) 재배(서명)

    84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사본발신일: 1919-08-26발신주소: 신천(Shyenchun)발신자: 스테이시 로버츠(Stacy L. Roberts) 수신자: 브라운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반갑게도 스켈(Schell) 씨 부부와 스콧(Scott) 씨가 저희 집을 방문했습니다. 스콧(Scott) 씨는 로스(Ross) 박사 부부의 집에 머물렀고 스켈(Schell) 씨 부부는 저희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은 저희와 한국인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며 이곳의 실제 상황을 확실히 인식하였습니다. 연례 직원 회의와 장로교 여름 회의 때문에 저는 평양(Pyeng Yang)에서 열렸던 집행 위원회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선교 위원회 사무관들과 집행 위원회가 모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이 흔한 기회가 아닌데|| 제가 참석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관할하는 10개의 순회 구역 가운데 한 곳만을 제외하고 모든 구역의 목사님을 비롯한 직원들이 투옥되거나 피신중이기 때문에 그들의 업무를 대신한 후임자를 물색해야 했습니다. 그날|| 선교 위원회 사무관들과 집행 위원회가 신천(Shyenchun)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그들을 만나기 위해 여러 지부를 돌아다녔고 마침내 그들과 함께 불타 버린 8개의 교회 가운데 한 곳을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교회 전소 사건에 대해 박사님께 서신을 보내거나 구두로 전달할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간 교회는 지난해 제가 250엔을 대출 받아 투자하고 한국인들이 완공한 것으로서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교회였지만 연기 속에 모든 것이 사라졌습니다. 총 500엔을 빌려 완공한 교회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이 교회는 불타 버린 교회 중 규모가 큰 교회 가운데 하나이고|| 나머지 교회는 작은 것들이었습니다. 선교단은 박사님께 이 교회 재건 요청을 할 것입니다. 물론 교회 관계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목사님은 살해되었으며 주요 장로님들도 투옥되었고 교인들은 다소 실망했지만 아직도 한국의 교인들은 교회가 재건될 날을 기다리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교인들의 힘으로 교회를 재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박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들이 스스로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은 믿지만 그들이 1|| 2년 안에 두 번이나 교회를 완공하길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규모가 큰 세 개의 교회와 남자 전문학교가 불타 버린 이곳 신천(Shyenchun)에는 기근이 심각하여 교회 재건이 불가능합니다. 박사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이곳에는 해마다 장마철이 있지만 올해는 사실상 비가 거의 오지 않아 전국토의 절반 가량이 가뭄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신천(Shyenchun)과 평양(Pyeng Yang) 주민들은 3|| 40년간 최악의 기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곡식은 약탈당하고 일부 주민들은 이곳을 떠나고 있습니다. 기근이 매우 심한 지역의 한 교회 관계자가 어느 날 찾아와서 주민들을 기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제게 10||000엔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그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구할 곳도 마땅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 스켈(Schell) 씨와 스콧(Scott) 씨와 함께 논의했고 그들은 박사님께 당장 서신을 보내어 이곳 상황을 알려 드리라고 제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어떤 조치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지만 돈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돈을 구할 수 있다면 만주(Manchria)에서 곡식을 들여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교회를 재건하고 심각한 기근에 시달리는 주민들을 위해 돈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박사님께서 이 문제를 긍정적으로 고려하시고 선교 위원회가 저희 부탁을 들어주시리라 믿습니다. 스테이시 로버츠(Stacy L. Roberts) 재배(서명)

    85 1919년 8월 25일 필립 스와츠(Philip A. Swartz) 경의 서신에서 발췌

    발신일: 1919-08-25발신자: 수신자: 스와츠 부인저희는 몇 주 후에 있을 북경(Peking) 또는 패오팅푸(Paotingfu) 회의에서 스콧(Scott) 씨와 스켈(Schell) 씨를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회의를 통해 저희는 이곳의 상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귀하께서도 아시다시피 불길한 예감이 드는 정치적 사건이 많이 있습니다. 이곳 중국의 군사 정당은 일본과 결속하여 민간의 자유뿐만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급속히 제한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산둥(Shantung) 지역의 저희 업무에는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늘 신문에 국가 주석의 명령으로 군인들이 사업가 및 학생 대표단을 체포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그들의 죄목은 언론 자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한 사람들을 재판도 하지 않고 처형한 산둥(Shantung)의 마 리앙(Ma Liang)의 행위를 저지해 달라는 탄원서를 국가 주석에게 제출했다는 것입니다. 군 지도자들은 지린성(Kirin)을 식민지화하는 남경(Nanking)의 밸라이(Bailie) 박사 업무를 중단시켰습니다. 스와츠(Swartz) 부인의 평안함을 바라며.

    86 브라운에게 보낸 편지

    사본발신일: 1919-09-10발신자: 애비슨(O. R. Avison) 수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수신주소: 외국인 선교단 선교 위원회 비서관|| 미국 장로 교회|| 뉴욕(N. Y.)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이 서신과 동봉한 문서는 새 총독의 공식 성명서 번역본을 포함한 서울신문(Seoul Press)의 오늘의 토론 기사의 사본입니다. 이것은 새 총독이 한국에 도착하기 전에 약속했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해 다시 한번 다룬 기사입니다. 저희 병원에서는 90대의 매를 맞은 후 석방된 사람들을 비롯한 많은 부상자들을 일요일 10시부터 치료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잔인한 처벌 방법에 대해 적절한 조치를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즉시 세이토(Saito) 남작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부상자들 가운데 최소한 네 명은 학생들이었습니다. 저희 활동 지역인 남대문(South Gate) 교회에서 오늘 오후 저희 보좌관이 체포되었습니다. 그가 어떠한 죄로 체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 교회의 목사님은 지난 3월 1일부터 계속 투옥된 상태이며 그의 사전 조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제 서대문(West Gate) 형무소 책임자가 이 사실을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앞으로 일부 의학 관련 강의는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희 학교 정규 학생과 더불어 37명이 입학 신청을 했습니다. 네 명의 의대생은 아직 서대문(West Gate) 형무소에 감금된 상태입니다. 애비슨(O. R. Avison) 재배(서명)

    87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관한 1919년 서울신문(Seoul Press) 기사에서 발췌

    발간일: 서울신문(Seoul Press)한국에 바라는 사항9월 4일자 일본 관보는 서울에서 있었던 폭탄 사건을 다룬 주요 기사를 실었습니다. 다음은 이 관보의 기사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이 문제에 대한 최근의 제국 포고령에는 또 다른 간곡한 바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폭탄을 사용하여 무질서한 국회를 해산시키는 등의 방법으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제국의 승인을 얻어 그들의 권력을 남용하는 일부 정치가들을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이 포고령은 전체 황실에 제시되었고 역사에 획기적인 발자취를 남기는 것으로서 그 진의나 효과는 결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국가 연합, 해외 국가 연구소, 국가 교육, 국가 번영에 필요한 훌륭한 포고령을 비롯한 모든 포고령은 그 수가 매우 빈약합니다. 게다가 한번도 경솔한 생각을 함부로 발표한 적이 없었습니다. 각 포고령은 저마다 정치적인 중요한 사항을 제국에 표명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에 관한 최근의 제국 포고령은 현 상황에서 그 중요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 시점에서 이 포고령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아래와 같이 상세하게 인용하겠습니다. “우리는 소중한 한국 땅과 한민족의 안전과 복지를 위한 목적으로 이 포고령을 작성한 것입니다. 또한 한민족이 차별 없는 정당한 대우를 받아 평화롭고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 정부의 행정 조직이 개혁되어야 할 시기가 도래했다고 확신하며 그러한 개혁이 반드시 실현되도록 요구하는 바입니다. 이 포고령은 우리의 확고한 방침을 이행하고 개혁 요청을 실현하여 안정된 문명 정부와 행정 업무를 촉진하기 위한 것입니다. 특히 유럽 전쟁의 종결 및 세계 정세의 빠른 변화라는 견지에서 볼 때 국가의 자원과 국민의 복지 향상을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과 그 국민들에게 온화한 정책을 펼칠 수 있도록 모든 공무원이 우리가 바라는 개혁 요구에 전력을 다하고 국가의 번영에 이바지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공무원들이 각자의 맡은 바에 기꺼이 충실할 것을 요청합니다.”이것은 진정한 한국의 헌장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일본제국은 한국인들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정정할 것이며 한국 국민들의 권리와 ‘온건 정책’을 실현할 것이라고 맹세했습니다. 물론 그들의 맹세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일본의 약속은 신의 없는 단순한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일본제국은 지난날 그들의 약속이 얼마나 신성했나를 주장하며 약속을 지킬 것을 다짐했습니다. 세계 여러 나라는 그들의 약속이 진정으로 실현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 역시 일본인들의 약속이 지켜질 것을 희망하고 있습니다. p. 286 판독 불가총독 성명서에 대한 일본 언론 기사이 성명서에는 궁극적인 자치 정부의 절대적인 주장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자치 정부를 실현하기 위해 급진적인 진보를 기대하는 것은 상식에 벗어나는 것입니다. 한국 국민들은 동양의 여타 국민들보다 정치적으로 뒤떨어진 동양 민족입니다. 그들은 동양의 타락과 부패를 안고 있던 정부로부터 벗어난 지 겨우 10년에 불과합니다. 모든 국가가 소망하는 자유 민주 정부로 나아갈 것을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은 약속했습니다. 한국 국민들이 바라는 것은 자치 정부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자치 정부가 실현될 것을 믿음으로써 국민들은 자신들의 직분에 만족하며 정착할 것입니다.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새로운 법령을 제정하여 한국 국민들이 제안하는 사항들이 실행되어 이루어질 수 있는 실용적인 체제를 마련해야 합니다. 즉 지방 행정에 한국인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효율적으로 승인을 해야 합니다. 또한 세이토(Saito) 해군 대장은 교육제도를 개혁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것은 공립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칠 수 없는 현재의 불합리한 제도를 철폐할 것이라는 말로 생각됩니다. 민간 관료들은 자치제도를 승인하는 것이 현 정부의 성공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급 관료들이 알아야 할 교훈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고급 관료가 알아야 할 사항은 한국 국민들을 통치하는 적절한 수단은 바로 한국 국민이라는 것입니다. 일본인으로 구성된 경찰 및 관료들은 한국인들에게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한국인들이 일본 국민들과 마찬가지로 황제 폐하의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면 한국의 행정에 그들이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해야 합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사실은 정부의 친구이자 동지인 선교사들이 행정 개혁에 찬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폭동의 선동자들이었다는 제안을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국에서의 일본의 의무에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이 문제에 관한 한국인들의 의무도 반드시 지적해야 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독립이 가장 이상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난 봄 한국의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지도자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하며, 한국의 독립 요구를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불행히도 지나친 시위로 인해 전국에서 한국인들에게 가혹한 처벌이 내려졌습니다.

    88 일본 평화협회(Peace Society) 비서관 가와카미(I. Kawakami) 씨와의 회담 보고서 및 관련 사항

    작성일: 1921-01-201월 8일 토요일, 저희 집에서 가와카미(Kawakami) 씨와의 회견이 있었습니다. 그는 만주(Manchria)에서 일어난 사건을 비롯한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비공식적으로 한국을 방문했다고 말했습니다. 대구(Taiku)에 도착한 그는 만주(Manchria) 사건에 대해 브루엔(W. T. Bruen) 경과 의논한 다음 신천(Syenchun)으로 가서 목덴(Mukden)에 있는 쿡(W. T. Cook) 경과 그 지역 상황에 대해 회견을 가진 후 캐나다 선교단의 맨스필드(Mansfield) 박사를 만나 간도(Kando) 문제에 대해 의논할 예정이었습니다. 가와카미(Kawakami) 씨는 평화협회(Peace Society)의 와인라이트(Wainwright) 씨와 함께 한국을 방문할 생각이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아 그와 함께 오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저와 가와카미(Kawakami) 씨는 전반적인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한 후 맨스필드(Mansfield) 박사를 만나기 위해 한국 YMCA로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서 가와카미(Kawakami) 씨와 맨스필드(Mansfield) 박사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다음날 저녁 케어(W. C. Kerr) 경과 저는 조선호텔(Chosen Hotel)에서 가와카미(Kawakami) 씨를 만나 회담을 가졌습니다. 가와카미(Kawakami) 씨는 며칠 후 이곳을 떠나 평양(Pyengyang)과 센센(Sensen)을 방문한 다음 돌아오는 길에 서울의 선교사들을 만날 예정이었습니다.1월 18일 예정된 회담이 전도사의 집에서 약 4시 30분 경에 열렸습니다. 이 회담에는 휴 밀러(Hugh Miller) 경, 본윅(Bonwick) 경, 그래그(Gregg) 경, 쿤스(Koons) 경, 케어(Kerr) 경, 젠소(Genso) 경, 톰스(Toms) 경, 스티븐스(Stevens) 지방 행정관, 트윌레이(Twilley) 구세군 소령, 그리고 저자인 제가 참석했습니다. 가와카미(Kawakami) 씨는 윗글에서 언급했던 선교사들과의 회견에 대해 보고했으며, 그가 한국을 방문한 주요 목적 가운데 하나는 그와 어느 정도 친밀 관계가 있는 일본의 경찰 협회와 관련된 사항들을 경찰과 협의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조선호텔(Chosen Hotel)에서의 회담에 가와카미(Kawakami) 씨는 일본 본토에서 집결된 3,000명의 경찰들은 한국에 파견되기 전에 한국 국민들에 대한 경찰들의 태도와 활동 범위에 대해 충분한 조언을 했다고 말했습니다. 가와카미(Kawakami) 씨는 몇몇 경찰관들이 일부 투옥자에게 부적절한 대우를 했기 때문에 그 경찰관들을 해고한 경찰 본부의 처사에 매우 만족한다는 답변을 했습니다. 그는 쿡(W. T. Cook) 경과 함께 마을이 불타 버린 치엔타오(Chientao)를 방문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도쿄(Tokyo)에서 20일에 열릴 국회에 참석하라는 제의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방문을 마치고 가능한 한 일본으로 빨리 돌아가거나 일본에 있는 다른 사람을 시켜 대신 한국을 방문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와카미(Kawakami) 씨는 한국 방문 임무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그의 또 다른 임무는 이곳 상황을 일본에 있는 ‘세력가’인 시부사와(Shibusawa) 백작과 사카타니(Sakatani) 남작에게 보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회담에 참석한 일부 인물들은 고문을 중단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아카이케(Akaike) 씨의 지침이 경찰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위에서 말한 경찰 해고 및 다른 처벌에 대한 소식이 경찰들 사이에 적절히 퍼지게 되면 고문 중단에 유익한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쿤스(Koons) 씨는 약 6주 전에 서울에서 체포된 한 남자의 사건에 대해 관심을 보였습니다. 체포된 남자의 부인은 그녀의 남편을 최근에 만날 수 있었는데 그가 너무 야위어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또한 제3사단으로 알려진 옛 헌병 본부 건물에서 근무하는 경찰들은 매우 악명 높은 경찰들이며 제3사단에 가면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라고 말했습니다. 쿤스(Koons) 씨는 미즈노(Midzuno) 씨가 그의 사무실에 갈 때마다 이 건물을 지나게 되는데 그가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이 건물에 들어가 장관의 지시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살펴보았을 수도 있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쿤스(Koons) 씨는 또한 교육 연구 위원회(Educational Investigation Commission)의 업무에 관해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는 이 기관에 임명된 한국인 직원들을 비평했습니다. 세 명의 한국인 직원들 가운데에서 한 명은 교육 문제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으로서 회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냥 여행을 떠났다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급작스레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 한국인 직원은 사립 법과대학의 책임자로서 이 사람은 직원으로서 충분히 임명될 자격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세 번째 한국인 직원은 이완용(Yi Wan Yong) 백작으로서 충성스러운 모든 한국인들은 그를 대반역자로 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쿤스(Koons) 씨는 교육 연구 위원회가 직원들을 다시 채용하기 전에 진정한 한국 대표자들을 임명해야 하며 교육 연구가 서울 이외의 지역에도 확장되어야 한다는 바람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회담을 끝마친 후 가와카미(Kawakami) 씨는 이날 회담을 갖게 되어 영광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회의를 기약했습니다. 그는 그날 저녁 일본으로 떠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제 보고서에는 지난봄에 허용된 한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신문인 동아일보(Dong-A Daily)의 발간 금지령에 관한 참조문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신문 발간 금지령이 철회되어 다시 발간하도록 허용되었으므로 속히 신문을 발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이 신문은 심한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배제 소년 학교(PaiChai Boy’s School)의 교장이었던 아펜젤러(H. D. Appenzeller) 경은 지난 3월 교장직을 박탈당했지만 세이토(Saito) 남작이 지난 6월 그를 교사로 다시 임명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아펜젤러(H. D. Appenzeller) 경은 교사로서 복직되어 다시 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행정에 차질을 빚지 않도록 하기 위해 교사 복직 제의를 받아들였습니다. 앞서 말한 두 가지 사건은 여론에 민감하게 작용될 의지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이를 보고할 수 있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위원회가 무료 향응을 제공하여 마음껏 술을 마시고 무희들을 초대하는 문제에 대하여 교육 연구 위원회(Educational Investigation Commission)의 회의에서 몇 가지 비평이 있었습니다. 다른 학교는 물론 선교 학교 교사들도 이 연회에 초대되었지만 선교 학교 교사들은 학교 방침에 위배되는 모임에 참석하기를 꺼려했습니다. 재배(서명)

    89 존 윌리스 베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9-12발신자: 수신자: 존 윌리스 베어(John Willis Baor) 박사수신주소: 국제 은행 연맹(Union National Bank)|| 패서디나(pasadena)|| 캘리포니아(California)친애하는 존(John)에게지난 주 뉴욕으로 돌아오는 길에 8월 1일에 작성한 자네의 간단한 글을 읽었고|| 나중에 자네가 보낸 8월 27일자 서신을 받아 보았네. 자네가 연방의회의 동양문제 위원회(Commission on Oriental Relations of the Federal Council)에서 작성한 한국 문제에 대한 글의 사본을 받아 보았는지 궁금하네. 이 위원회는 캐나다 장로교 선교 위원회와 협력하여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는 미국 선교단 선교 위원회의 대표자들로 구성되어 있네. 미국 선교 위원회에서 볼 때 한국 문제를 별도로 다루기보다는 위원회를 통해 타국 선교 위원회와 협력하는 것이 최선이었다네. 자네가 이 소책자를 받아 보지 못했다면 내가 보내 주겠네.선교사들과 선교단 선교 위원회가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하거나 일본 정부의 행정 개혁을 위해 애써야 할지에 대해 의문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네. 한국 국민들의 염원에 동조하는 문제라든가 한국 국민들이 독립을 쟁취해야 하는지 하지 않아야 하는지|| 또는 독립을 쟁취하여 그것을 유지할 수 있는지 할 수 없는지에 관한 문제는 별도로 하고서라도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에 대해 한마디도 할 수 없는 처지라네. 만약 선교사들이 한국 독립에 찬성하게 되면 그들은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다네. 그래서 선교사들은 한국 독립 문제에 대해 매우 신중하게 고려하여 행동을 취하고 있다네. 선교사들은 일본 행정 개혁을 촉구하고 있으며 이는 선교 위원회가 기탄 없이 지지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네. 이것은 현재 거의 확정된 것 같네. 올바른 하급 관리를 찾는 것은 현재 일본 정부의 방침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의 재량에 달려 있네. 하지만 개혁은 한국 국민들이 원하는 독립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네. 한국인들이 근본적으로 원하고 있는 것은 일본을 끌어내고 완전한 한국의 독립을 이루는 것이라네. 한국의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정부 승인이나 부인 또는 일본 정부의 단호한 행동으로 이 문제에 관여할 수 없었다네. 내 생각으로는 웰본(Wellborn) 씨가 총회의 블래어(Blair) 씨의 의견을 따르는 것이 좋을 것 같네. 블래어(Blair) 씨는 이 문제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나타내며|| 자신의 발언이나 충고를 훌륭한 판단으로 요령 있게 표현하는 사람일세. 자네의 벗으로부터.RES: C.

    90 미국 장로 교회 총회(General Assembly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 S. A.)

    발신일: 1919-08-27발신주소: 국제 은행 연맹(Union National Bank)|| 패서디나(pasadena)|| 캘리포니아(California)발신주소: 위더스푼 빌딩(Witherspoon Building)|| 필라델피아(Philadelphia)|| 플로리다(Florida)발신자: 존 윌리스 베어(John Willis Baer) 의장수신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 박사수신주소: 156 5번 가 뉴욕친애하는 스피어(Speer)내가 의장에 되는 바람에 현 시점에서 한국을 도와야 한다는 호소를 더욱 많이 받고 있네. 하지만 이 문제는 이전의 일본 이민 정책과 연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캘리포니아(California)에서 민감하게 다루고 있으며 우리가 어떤 계획을 세워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네. 나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나 반평화 선전과 관련하여 혼란을 야기하고 싶지는 않다네. 허스트(Hearst) 지는 반 일본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에게 저지르고 있는 모든 만행을 발표하고자 하네. 오늘 아침 한국에 체류했던 웰본(A. G. Wellborn) 박사와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후 자네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네. 그는 자신의 경험을 자세히 기록한 몇 장의 편지를 내게 남겨 두고 갔다네. 그의 편지를 읽고 나는 그가 매우 청렴하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네. 나는 그가 묘사하고 있는 한국의 상황을 읽고 피가 끓어오르는 분통을 느꼈다네. 브라운(Brown) 박사는 떠났다네. 웰본(Wellborn) 씨는 교회에 종사하는 인물로서 옳은 일을 하고자 한다네. 그는 나를 방문하여 그의 경험을 솔직하게 세상에 알려야 하는지 내게 물었고 나는 당분간 조용히 지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충고를 했다네. 이 문제에 대해 자네의 의견이 있다면 내게 솔직하게 알려주면 고맙겠네. 자네의 벗으로부터(서명) 존 윌리스 베어(John Willis Baer)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