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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한선교사보고문건

    재한선교사보고문건에 대한 전체 53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71 조지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7-21발신자:수신자: 조지 글리슨(George Gleason)수신주소: 국제 YMCA 347 메디슨 가 뉴욕친애하는 조지(George)자네가 모트(Mott) 박사와 내게 보낸 한국에서 발생한 독립운동에 대해 쓴 신중하고 설득력 있는 보고서는 바버(Barber) 씨를 통해 잘 받아 보았다네. 난 그 보고서를 매우 관심 있게 읽어보았네. 이 보고서를 지난 주 유럽에서 돌아온 해러다(Harada) 박사에게 보여줄까 하네. 자네가 서울에 있을 때 해러다(Harada) 박사도 그곳에 있었다고 하네. 동양 교회 연합의회(Orient of the Federal Council of the Churches)와 관련하여 위원회가 이 문제에 대해 신중하게 준비하고 발표한 장황한 성명서를 자네도 곧 보게 될 것이네. 바버(Barber) 씨를 통해 자네가 이곳 미국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뻤다네. YM 및 YWC 연합회와 선교단의 상호 관계와 오사카(Osaka)에서의 교회 설립에 관한 문제에 대해 자네와 함께 조만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하네. 이번에 얼마 동안이나 미국에 머물지 알려주게나. 부인께도 안부 전해 드리고 자네도 잘 있게나. 자네의 벗으로부터.RES: C.

    72 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10-14발신자: 수신자: 존 모트(John R. Mott) 박사수신주소: 347 메디슨 가 뉴욕친애하는 존(John) 세키야(Sekiya) 씨가 글리슨(Gleason)에게 보낸 편지의 사본을 보내 주어 정말 고맙네. 얼마 전에 글리슨(Gleason)이 한국의 상황에 대한 그의 의견을 적어 보냈는데 나는 그의 판단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네. 세키야(Sekiya) 씨의 편지를 받아 볼 수 있어 기쁘네. 모든 국가가 숭고하고 명예로운 정책을 수행하는 올바른 인재를 찾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세키야(Sekiya) 씨는 올바른 인재이지만 이러한 일본인이 드물다는 것이 일본이 가지고 있는 어려운 점이라고 생각하네. 자네의 벗으로부터.RES: C.

    73 로버트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9-17발신주소: 347 메디슨 가 뉴욕발신자: 존 모트(John R. Mott)수신자: 로버트 스피어(Robert E. Speer)수신주소: 156번 가 뉴욕친애하는 로버트(Robert)일본에서 근무하는 비서관 가운데 한 명인 조지 글리슨(George Gleason) 씨가 최근 미국으로 돌아와 서울 교육부 장관인 세키야(Sekiya) 씨가 그에게 보낸 편지를 자네에게 보내 달라고 내게 요청했네. 자네도 이 편지를 보면 관심을 가질 것이네. 브라운(Brown) 씨도 이 편지를 보고 싶어할 것이네. 자네의 벗으로부터.(서명)존 모트(John R. Mott)

    74 글리슨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19-08-09발신자: 한국 중앙 정부 교육부발신주소: 서울|| 한국|| 일본발신자: 세키야(T. Sekiya)수신자: 조지 글리슨(George Gleason) 씨수신주소: 347 메디슨 가 뉴욕(N. Y.)친애하는 글리슨(Gleason) 씨께일본을 떠나실 때 글리슨(Gleason) 씨의 의견을 담은 편지를 제게 보내 주신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글리슨(Gleason) 씨가 한국에서 수집한 자료를 일본의 이익을 위해 활용할 수 있게 해주신 호의에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글리슨(Gleason) 씨의 제안에 좀더 일찍 답변을 해드렸어야 했지만 제 생각으로는 제안된 행정 개혁이 다소 인식될 때까지는 답변을 보류하는 것이 좋을 같아 답변이 늦어졌습니다. 헌병 체제를 비롯한 몇 가지 중요한 행정 개혁이 곧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따라서 한국 행정에서 한국 국민들에게 가장 불만족스러웠고 외국인들의 비난을 거센 비난을 받았던 행정 체제가 곧 새롭게 개혁되어 글리슨(Gleason) 씨가 서신에서 제기했던 문제점들이 조만간 해결될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헌병 체제는 한국과 일본을 병합할 당시 긴급한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채택했던 방법이었지만 전 총리였던 테라우치(Terauchi) 백작은 헌병 체제를 조만간 철폐하겠다고 여러 번 선언했습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행정이 개혁될 기회가 찾아온 것입니다. 한국에서 일부 선교사들이 일본인들과 부분적으로 오해가 생겨 이 혼란한 시기에 경솔한 행동을 한 사실은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선교사들은 한반도가 일본제국의 일부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선교사들이 한국을 일본과 같은 체제의 독립 국가로 생각하는 것이 오해를 일으키는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선교사들이 이러한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한국이 일본의 속국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여 정부 관료에 협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필요에 따라 일본 관료들의 행정에 대해 선교사들이 충고와 경고의 발언을 함으로써 일본에게 호의를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또한 일본 관료들이 한국인들을 대하는 행동에 대해 질책과 격려를 보내 주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해 선교사들이 일본 관료와 마찬가지로 두 민족을 하나로 여겨 한국을 큐슈(Kyushu) 또는 호카이도(Hokkaido)와 같이 생각하여 차후에 선교단이 일본 본토와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견할 때 차별을 두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선교단이 이러한 제 의견을 일본과 한국에 대해 채택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한국의 교회 및 선교사들이 일본 본토의 교회 및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선교사들과 일본 기독교인들이 미래를 위해 협력하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한국에서 발생한 시위로 인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경험을 했으며 우리 일본 행정 방법이 여러모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결점을 보완하려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는 가장 공정한 견해로 비판해야 합니다. 제 생각으로는 한국의 선교사들은 한국의 국민들의 입장에만 치우쳐 공정하지 못한 비판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본 정부가 어떻게 해야 진실로 한국을 공정하게 통치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사실을 선교사들을 비롯한 미국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보여줄 수 있을까요? 좌우간 한국에 있는 우리 일본 관료들과 선교사들||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 및 미국 국민들이 서로를 더욱더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의 진심 어린 공정함이 결국 한국 국민들에게 전달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한국과 일본은 그 민족의 기원이 동일하며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므로 선교사들과 미국의 일본인들이 우리를 도와준다면 두 민족의 화합은 결국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사미(Usami) 씨는 현재 도쿄(Tokyo)에 계십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사항은 제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힙니다. 제가 만일 미국에 갈 수 있다면 미국 국민들로 하여금 우리가 현재 해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문제점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하지만 글리슨(Gleason) 씨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 주실 것을 믿기에 안심이 됩니다. 자료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기꺼이 보내 드리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세키야(T. Sekiya)P. S. 모트(Mott) 박사와 스피어(Speer) 박사에게 저의 의견을 전해 주시길 바랍니다.

    75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18발신자: 캐나다 장로 교회 외국인 선교단발신주소: 전보 주소: 버테로스(Buteros) 토론토(Toronto)발신자: 수신자: 아서 브라운(Arthur J. Brown) 박사수신주소: 156 - 5번 가 뉴욕(N. Y.) 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1) ‘노래포(Norapawi) 마을의 대학살’에 관한 일본 정부의 성명서와 함께 오타와(Ottawa)의 일본 총영사와 교신한 편지 사본|| (2) 글릭(Gulick) 박사에게 보내는 제 편지의 사본을 함께 보내 드립니다.미주마츄(Midzumachi) 영사가 영종(Yungjung)|| 군도(Kondo)(간도Kando)|| 만주(Manchria)의 저희 선교단에게 보낸 서신과 관련하여 일본 정부가 캐나다 정부에게 항의한 내용에 대해 한국 선교단도 많은 관심을 보이실 것입니다.저희가 현재 일본 영사를 통해 일본 정부의 회신을 바라는 또 다른 서신의 사본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글릭(Gulick) 박사에게 보내는 제 편지에는 일본 영사가 보낸 서신 내용 중 필요한 사항을 모두 언급했습니다. 재배(서명)AEA: ML

    76 시드니 글릭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18발신주소: 439 컨페더레이션 라이프 빌딩발신자: 수신자: 시드니 글릭(Sidney Gulick|| D. D.) 경수신주소: 자선 연합회(United Charity) 빌딩 4번 가|| 20번 가|| 뉴욕(N. Y.) 친애하는 글릭(Gulick) 박사님께간도(Kando) 문제로 노스(North) 박사와 브라운(Brown) 박사가 일본 영사와 회견한 내용에 대한 글릭(Gulick) 박사님의 의견에 대해 간략하게 글을 보내게 되어 기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짧게나마 답변을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동봉한 내용 중 다른 사항은 물론 일본 정부에 대한 첫번째 보고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여기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선 노래포(Norapawi) 마을의 대학살에 관한 육군성의 비평문입니다. 이것은 민간이 아닌 군에 의해 조사 재판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당연한 것입니다. 오타와(Ottawa)의 일본 영사도 이 비평문을 신뢰해야 합니다. 저희도 선교사의 보고서를 신뢰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일본 정부는 그들의 대령이 저희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에 대해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 사항이 전반적인 문제의 핵심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설명을 확보해 달라고 영사에게 요청할 것입니다. 영사도 짐작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대령이 보낸 서신의 사본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마이즈(Shimidzu) 씨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입니다. 하지만 그가 정부가 보낸 육군성의 비평문을 정확한 보고서로 간주한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우리 선교사들은 이 문제를 과장하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일본인들은 살해한 시신의 절반을 불에 태워 버렸다는 것도 사실입니다.재배AEA: EJ

    77 암스트롱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14발신주소: 일본 총영사관 오타와(Ottawa)발신자: 시마이즈(S. Shimidzu) 총영사수신자: 암스트롱(A. E. Armstrong) 경수신주소: 부서기관|| 외국인 선교단|| 캐나다 장로교회|| 토론토(Toronto)담당자 귀하귀하께서 간도(Kando) 귀속 문제를 다룬 1920년 12월 4일에 보내 주신 서신과 제가 1920년 10월 6일 보내 드린 서신에 대해 글을 띄어 보냅니다. 일본 정부가 보낸 서신 내용을 귀하께 알려 드리게 됨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1) 귀하께서 서신에 언급하셨듯이 일본 정부에 전달해 달라고 제게 요청하신 문제에 대해 정부로부터 확실한 답변을 받아 귀하께 전하라는 지침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저희 일본 정부는 간도(Kando)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들로부터 간도(Kando) 귀속 문제에 대해 수많은 보고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희 정부는 일본에 대항하여 정치적인 활동이나 반역 행위를 하는 한국인들과 선교사들이 직접적인 연관이 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교사들이 가지고 있는 정보를 명백히 또는 간접적으로 표명하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정보는 근거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 것입니다. (2) 귀하께서 원했던 바와 같이 일본인 군 관계자가 용정(Yongjung)에 있는 캐나다 선교사에게 보낸 서신의 사본을 받아 보았습니다. 이 사본을 읽고 난 후의 저의 의견은 이렇습니다. 우선 현재 논쟁이 되고 있는 푸츠(Foots) 박사에게 보냈던 서신의 사본을 귀하께서도 보셨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푸츠(Foots) 박사는 한국에 있기 때문에 귀하께서 그 서신을 쉽게 받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 지난 12월 1일에 제가 보내 드린 서신에서도 언급했듯이 논쟁이 되고 있는 그 서신의 내용은 어떠한 정부의 승인도 없이 미주마츄(Midzumachi) 영사가 개인적인 책임하에 단독으로 작성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의 서신은 귀하와 제가 서신 왕래하는 것처럼 공식적인 교신으로 간주되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귀하께서 제게 그 서신을 요청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3) 또한 귀하께서 지난 12월 14일 보내신 첨부서에 있는 네 가지 성명서에 대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10월 30일 푸츠(Foots) 박사의 서신에서도 다루어졌던 사건에 연루된 세 그룹은 푸츠(Foots) 박사의 11월 3일자 서신과 엠마 팰리드로프(Emma H. Palethorpe) 양(날짜 표시 없음)의 서신에서도 각각 언급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은 지난 2월 8일 제게 보낸 회신을 작성하는 시기에도 여전히 조사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조사가 끝나면 제게 통보될 것입니다.‘노래포(Norapawi) 마을의 대학살’이라는 제목의 마틴(S. H. Martin|| M. B.|| C. H.) 박사의 서신과 관련하여 그 사건에 대해 믿을 만한 진술서를 받았으며 이 서신에 동봉합니다. 첨부한 문서를 다른 문서와 비교하여 근본적인 차이점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른 사건에 관한 믿을 만한 진술서가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4) 비록 제 의견은 이렇다 해도 저는 우리의 동포인 한국 국민들의 정신적?도덕적?물질적 향상과 평화를 촉진하기 위해 우리 일본 정부와 동양의 선교단이 서로 협력해야 한다는 사실에는 귀하의 생각과 같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서명) 시마이즈(S. Shimidzu) 총영사

    78 1920년 10월 29일 반란군에 관한 내용

    1920년 10월 29일 리우세이슨(Riuseison)의 경비사령부로부터 소간도(Shogando)에서 수백 명의 반란군들이 모여 리우세이슨(Riuseison)에서 남쪽으로 19마일 정도 떨어진 나니쇼(Nanychyo)의 교신 거점을 공격하려 한다는 정보를 받았습니다. 약간의 군인과 경찰이 합세하여 70명의 군인들이 반란군들을 진압하기 위해 그곳으로 출발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10월 30일 아침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으며 각 지역에 배치되었습니다. 군인과 경찰들은 마을에 파견되어 집집마다 수색을 했습니다. 이때쯤 약 절반 가량의 무장 반란군들이 종렬로 도망을 갔습니다. 군인들은 그들에게 총격을 가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나머지 반란군들은 도주했습니다. 반란군들의 강력한 대항에도 불구하고 경찰들은 계속해서 가옥 수색을 하여 수많은 총탄, 이전 정권에서 사용했던 태극기, 군복, 반란 문서 등을 찾아냈습니다. 신중한 조사를 한 후 반란군들이 본거지로 사용했던 사립학교 및 기독교 교회와 숙소로 사용했던 열두 채의 가옥을 불태웠습니다. 사망한 반란군들의 시신을 세 지역에 모아 놓고 국가 풍습에 따라 화장을 했습니다. 그 당시 군인들은 또 다른 임무가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들 시신의 화장을 끝내기 전에 그곳을 떠났습니다. 이 정보를 받은 시기까지 화장은 마무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군인들을 그곳에 다시 파견하여 끝내지 않은 화장의 뒷수습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한편 사건 장소에 외국인들이 찾아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그들은 시신의 절반을 화장시킨 현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이 사진들은 대단히 과장된 진술서와 함께 알 수 없는 곳으로 전달되었습니다. 그 진술서에는 시신의 절반 가량이 불에 던져졌다고 밝힌 부분이 있으나 그것은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이후 판독불가.

    79 일본 군인의 만주(Manchria) 침략

    10월 23일 기관총과 야전포로 무장한 500명의 일본 보병대가 목덴(Moukden)을 떠나 목덴(Moukden) 동부 지역으로 향했습니다. 그들은 푸순(Fushun)에 도착하여 동부 지역으로 진입하여 10월 29일 금요일 하잉킹(Hingking) 중앙 지역에 다다랐습니다. 한편 그곳에서 일본인들은 31일 일요일 하잉킹(Hingking)을 복원하여 일본 왕조의 축제를 위해 그 지역에 있는 한국인들을 초대했습니다. 이 초대에 기꺼이 응하여 호의를 가지고 아홉 명의 한국 기독교 지도자들을 비롯한 여러 명의 한국인들이 왕싱문(Wangtsingmun)에서 출발하여 하잉킹(Hingking)에서 동쪽으로 25리 가량 떨어진 퉁창타이(Tungchangtai)에 도착했을 때 일본 군인들에 의해 체포되어 투옥되었습니다.대규모의 일본 군대가 하잉킹(Hingking)에 남아 있는 동안 이 지역의 중국 지사는 업무상 목덴(Moukden)에 있었기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습니다. 이 지역 전체는 지사 관청에서부터 연결된 전화선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31일 열렸던 축제는 운동, 연설, 향연으로 치러졌으며 일본인 및 한국인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 각각 참여했습니다. 11월 1일 월요일 일본 군대는 아침 일찍 하잉킹(Hingking)에서 출발했습니다. 이날 투옥된 한국인들도 퉁창타이(Tungchangtai)에서 동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으로 이송되어 아무런 항변도 하지 못하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목, 가슴, 배를 칼과 총검으로 찔려 사망했으며, 이들 가운데에는 세 명의 교회 장로와 두 명의 교사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같은 날 일본 군인들은 그 지역에 있는 한국인 교회 중 하나를 전소시켰습니다. 이틀 후 부근의 교회를 모두 부셔 버렸습니다. 군인들은 이 교회를 불태우려 했지만 중국 관료가 그 마을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 때문에 교회에 불을 지르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여 불을 지르지는 않았습니다. 다음날 11월 4일 또 다른 교회가 전소되었습니다. 군인들은 성경이며 찬송가, 한국인 목사의 서적 및 기록부를 모두 찾아내어 불살라 버렸습니다. 그 자리에서 여덟 명이 체포되었으며 여러 지역에서 위와 같은 잔인한 방법으로 여섯 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살해된 여섯 명 가운데에는 두 명의 한국인 교회 장로와 한 명의 교사가 있었습니다. 일부 한국인 기독교 지도자들도 살해되었습니다. 그들은 한국의 독립운동과 연루되기는커녕 어떠한 정치적 편견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언급된 지역명은 위에 설명한 상황의 세부적인 내용과 함께 귀하의 통신원에게 알려 드리겠습니다. 일본인들의 행위는 중국 영토에서 중국의 주권을 무시한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 중국인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이 면 하단 필기체 부분 해독 불가)

    80 브라운 박사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21-03-21발신자: 대한민국을 위한 미국 및 유럽의 한국 위원회(Korean Commission)발신주소: 905-907 컨티넨탈 트러스트 빌딩, 워싱턴 D. C.김규식(Kiusic Kimm) - 회장헨리 장(Henry Chung) - 비서관현순(Soon Hyun) - 회계원수신자: 장로교 외국인 선교단발신자: 브라운(A. J. Brown) 박사수신자: 브라운(A. J. Brown) 박사수신주소: 156번 가, 뉴욕(N. Y.)친애하는 브라운(Brown) 박사님께지난번 뉴욕에서 가진 회견에서 박사님께서 한국 상황에 대한 제 의견을 물어 보셨지요. 한국 기독교인들에 대해 관대하신 것을 알고 있기에 이 편지로 박사님의 질문에 답변하고자 합니다. 이 편지는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언급한 내용은 한국의 기독교인 및 비기독교인의 전반적인 감정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국 상황에 대한 박사님의 견해는 매우 신중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한민족에게 박사님의 생각을 일깨워 주기 위해 한국인들이 궁금해하는 사항에 대한 박사님의 의견을 담은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는 바입니다. I. 선교단 교회의 방침은 정치적 문제에 엄격한 중립 자세를 유지합니다. II. 한국 독립운동 측면(1) 일본은 절대 한국을 해방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2) 한국은 절대 폭력으로 독립을 쟁취하지 않을 것입니다. (3) 기타 국가는 한국을 대신하여 일본과 투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박사님이 질문하신 사항에 대한 저의 세부적인 답변입니다. I. 한국 국민들도 교회가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자세를 유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국 기독교인들은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선교사들과 거리낌없이 대화를 나누지만 비밀 계획에 대해서는 선교사들과 논의하지 않았습니다.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한국 독립운동 계획도 선교사들에게 전혀 알리지 않았습니다. 중립의 의미는 공명정대함을 말하지만 과거에 미국의 유명한 교인들은 일본인에게는 관대함을 보이고 한국인들에게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논의할 때 일본인들만을 고려한 경우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는 어떠한 개혁도 실행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쿄(Tokyo)에서 신문 개혁을 발표할 때마다 그 개혁은 일본 본토 교회 관계자들 및 간행물에 의해 보도되고 있습니다. 반면 한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본인들의 만행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경계 조치를 취해 발표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상황이 공식 발표되면 일본인들에 대한 분노가 발생할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II. 한국 독립운동 측면(1) 일본이 절대 한국을 해방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박사님의 말씀이 옳았습니다. 범일본제국주의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시아 전체를 일본의 지배 체제하에 두려는 것입니다. 한국은 일본이 아시아로 진출하는 교량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일본은 한국을 계속 구속하고 지배하려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을 함으로써 일본 정치가 및 기타 지도자들은 한국 국민들을 현대 문명으로 인도하여 한민족을 도와준다는 인간적인 목적을 위해 한국을 구속하고 한국을 식민지로 이용하게 되었고, 일부 일본인들은 고압적인 자세로 교회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아시아를 향한 그들의 진정한 의도는 감춘 채 말입니다. 그들의 숨은 의도를 우리가 간과하게 되어 일본이 아시아 전체를 집어삼켜 결국 태평양을 지배하려는 욕망을 드러내게 되는 날 그것은 더 이상 아시아의 문제로만 끝나지 않고 미국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는 제가 논할 사항이 아니라 미국 국민 모두가 중지를 모아야 하는 사항입니다. (2) 한국 국민들이 폭력을 사용하여 독립을 쟁취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1776년 세계 제일의 강국이었던 영국의 지배하에 있던 미국 식민지 주민들이 독립을 쟁취하지 못한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식민지 주민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선택하는 정신으로 8년간의 고된 투쟁 끝에 결국 승리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국민들도 이와 같은 정신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 국민들은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자유인으로서 죽음을 선택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내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일본 전제 정치 횡포의 고통을 참아 왔습니다.이제 우리는 결과에 상관없이 그들과 투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이것은 일부 한국의 지도자들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 국민 전체의 생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선교 위원회가 한국 국민들 가슴에 심어 준 기독교를 비롯한 다른 사상은 이러한 한국 국민들의 결심에 조금도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3) 우리는 다른 나라가 한국 국민들을 위해 싸워 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한국인들은 그 결과에 상관없이 스스로 투쟁해 나아갈 것입니다. 투쟁의 결과가 비극으로 끝날지라도 그 결과는 역사적이며 고결한 비극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나라에 바라는 것은 “자유를 경멸하고 전제 군주에 무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대해 공명정대한 태도를 보이는 것입니다.한국 기독교인들은 자유를 위한 투쟁에 미국 선교 위원회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기대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공명정대만을 바라는 것입니다. 선교 위원회가 우리를 도울 수 없다면 일본인들이 주장하고 있는 “한국은 절대 독립을 얻을 수 없다” “한국은 독립을 얻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일본은 현재 국제 윤리로 보아 한국에 자유를 줄 수 없다” 등과 같은 생각을 지지하여 인간애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정당한 이유를 해치지 말아야 합니다. 극동 지역의 상황을 아는 사람이라면 일본이 말하고 있는 한국에서의 ‘자유주의’ 및 ‘개혁’은 실제로 한국에서는 실행되지 않고 세계 각국에, 특히 미국에게 보여주기 위한 조작된 내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 선교 위원회는 한국 국민들에게 매우 가치 있는 봉사를 해왔으며 그러한 헌신적인 봉사는 세상 그 어느 곳과 견주어 보아도 전대 미문의 혁혁한 결과를 낳아 비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에 미국 선교 위원회의 공로에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입니다. 한국은 극동 지역에서의 기독교 전파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리며, 한국 기독교인들이 믿음을 갖고 복음을 전파한다는 이유로 심한 박해를 당할지라도 기독교에 대한 충성은 변치 않을 것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의 유일한 판단 기준은 구세주가 만든 기준을 따르는 것입니다. 만약 구세주가 이 땅에 계셨더라면 한국에 대해 과연 어떻게 하셨을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이 나라의 무고한 국민이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고 신성한 교회가 더럽혀지며 마을이 파괴되고 있는 시점에서 그리스도는 과연 편의주의를 선택하여 침묵하고 계실지 궁금합니다. 지금까지의 모든 내용은 제가 직접 알고 있는 사항들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저는 1919년 한국의 독립운동이 시작되기 전에 15년간 한국 교회의 목사로서 근무했으며 일본어 및 일본 역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내용들은 저 개인만의 생각이 아니라 한국 국민들 전체의 생각합니다. 이 점을 충분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재배(서명)SH. I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