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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역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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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유적지
미확인유적지
상태
객관적조사 "한국독립운동과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공화국 극동지방 남동쪽 끝에 있는 연해주의 중심도시이다. 동해에 면해 있으며 무라비요프 아무르스키 반도의 남단, 금각만 연안에 위치한 도시로서 태평양 방면에서 이나라 굴지의 항만도시이다. 항구는 11월부터 3월까지 결빙하지만 쇄빙선을 이용하여 겨울에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을 가진 항구이다. 도시의 이름은“동방(보스토크)을 정복하자(블라디)”라는 러시아에서 유래한다. 중국명은 하이첸웨이이다. 1860년에 러시아 해군기지로 개항하여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러시아 극동정책이 활발해짐에 따라 경제적, 군사적으로 그 중요성이 높아졌다. 1903년 시베리아 철도의 개통으로 러시아 중심부와 육로로 직결되면서 그 철도의 종점으로 국제적 의의도 높아졌다. 혁명운동사에서도 1905~1907년에 제1차 러시아 혁명기에 군대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으며, 1917년 10월 혁명 때에는 재빨리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는 등 시베리아, 극동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 19세기 말에 동방연구소가 개설되어 문화적 중심지가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운동의 최대 근거지 가운데 하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처음으로 이주한 한인들은 개척리 마을에 거주하였다. 바로 이 거리가 과거에 까리에스키 즉 고려인 거리가 형성되어 있던 곳이다. 이 거리의 344호에 해조신문사가 위치하고 있었으며, 대동공보사는 600호에 위치하고 있다가 후에 469호, 67호 등지로 각각 이전하였다. 그리고 이 거리에 한인학교가 들어서 있었고, 또한 성명회가 조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개척리에서 한인들의 활동은 지속될 수 없었다. 러시아 당국은 1911년 봄에 돌연 장티푸스의 근절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한인 마을을 강제로 철거시키고 러시아 기병단의 병영지로 삼았다. 그리고 한인들은 이곳을 떠나 러시아 당국이 지정한 시의 서북 편 변두리인 개척리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넘어 5정 가량 되는 곳으로 옮기도록 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신개척리 신한촌이다. 이곳은 구개척리에서 걸어서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다. 신한촌은 한인독립운동의 기지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러시아 지역의 한인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권업회, 권업신문, 대한광복군정부, 한인신보사, 일세당, 대한국민의회, 노인동맹단 등이 이곳에 있었으며 이동휘 등 수많은 한인 애국지사들이 신한촌에 거주하며 활동하였다. 또한 블라디보스톡 지역의 3·1운동이 이곳을 시발점으로 하여 이루어졌으며, 한민학교 등 신한촌에서 수많은 독립운동계획들이 수립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크라스키노(한국 명: 연추)는 구한말 대표적인 항일의병근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바로 대표적인 의병장인 최재형, 이범윤, 안중근, 유인석 등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동하였다. 이범윤은 경기도 고양(高揚) 출신이다. 1900년에 정부에서 만주로 이주한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변간도관리사(北邊間島管理使)를 두게 되었는데, 이때 그가 파견되었다. 1902년 6월 간도에 도착한 이범윤은 동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사포대를 조직하였다. 그 후 러·일 전쟁이 일어나자 이범윤은 러시아군측에 가담하여 한국을 침략하는 일본군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러시아가 패전하자 간도에 대한 일본군의 간섭이 잦아지고 1907년에는 드디어 통감부 임시간도 파출소가 생겨 이곳에서의 구국운동이 어렵게 되었다. 그는 항일투쟁을 전개할 뜻으로 노령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연해주에서의 활동도 용이하지는 않았다. 일본은 외교경로를 통하여 한국 독립운동을 견제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러시아도 국내 사회주의 혁명 세력을 탄압하기 위하여 한국인의 무장 활동을 견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한 여건 하에서 이범윤은 무기를 구입하고 군사를 훈련하여 국내 침공작전을 감행하였다. 유인석은 1842년 1월 27일 강원도 춘천 남면 가정(柯亭)에서 태어났는데 가정리는 고흥 유씨 일족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14세때 양평의 화서 이항로에게 글을 배웠는데 1868년 화서가 별세한 뒤 중암 김평묵과 종숙인 성재 유중교를 스승으로 모시며 위정척사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되었다. 1907년 8월 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군대 해산마저 당하자 1908넌 7월 원산에서 해로로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하였다. 이때 그의 문인 50여 명이 수행하였다.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한 유인석은 그곳에서 활약중인 최재형·이범윤 등의 의병진을 방문 격려하고 이상설·안중근 등을 만나 해외에서의 무력항쟁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관일약(貫一約)이란 의병규칙을 만들어 질서를 잡았다. 1910년 6월 13도의군도총재로서 항일운동을 주도하였다. 크라스키노는 남면으로 넒은 뽀시에트만을 끼고 있었다. 시내에는 국경도시 답게 과거의 군 막사들이 이곳 저곳에 흩어져 있었다. 우리는 먼저 크라스키노 산 위에 위치한 영웅탑을 보기 위하여 산 정상으로 향하였다. 탑에는 1938~1939년 사이에 일본과 러시아와의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추모하는 탑이라고 적혀 있었다. 산 정상에서 크라스키노 시내 및 주변 일대를 전부 바라볼 수 있었다. 크라스키노 시내에는 여러 기념비들이 서 있었다. 우선 시내 중앙에는 1945년 8월 9일부터 동년 9월 3일까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사망한 658명의 사람들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탑이 서 있었다. 이 중 유빈산이란 한글 이름이 있어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또한 시내에서 중국 훈춘 방향으로 1938년 8월 7일 국경지역인 하산 호수 전투에서 사망한 크라스킨(1906. 6. 16~1936. 3. 25)과 뽀자르시킨(1905~1938) 등 군인의 추도비와 무덤이 있었다. 빨치산스크의 원래 명칭은 스찬이며 수청(水淸, 水靑), 소성(蘇城)으로도 불렸다. 이곳은 블라디보스톡에서 자동차로 4시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 중국인들이 개척한 곳이며 산이 높고 물이 맑아 수청이라고 불린 곳이다. 연해주를 남북으로 길게 뻗은 시보데알린 산맥의 끝 부분에 위치한 이곳은 내전기에 빨지산들이 이곳 험준한 산악에 의지해 용감히 싸웠다고 하여 1972년에 빨지산스크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한국인으로는 1896년 3월 1일에 김광성, 김경오 등이 처음으로 개척하였다. 20여 개의 한인 마을 있었다고 한다. 이곳은 크라스키노와 함께 의병항쟁의 책원지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의병소모와 군자금의 상당부분을 담당하였다. 의병들은 해로로 녹둔도(鹿屯島, 두만강 최하단)로 건너가 이곳에서 다시 중국배를 이용해 성진 부근으로 국내 진공작전을 전개하였으며, 총기 400여정을 모아 크라스키노로 이동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빨치산스크는 대한국민회 원동지회의 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대한국민회는 수청 신영동, 동령, 만춘동, 우지미동, 개터, 동개허, 홍석동, 십여촌, 승지동, 고려개, 신풍동, 중흥동 등지에 지회를 갖고 있었다. 1911년 10월 20일에는 수청일대에 있는 12개 지회가 연합하여 대한인국민회수청지방총회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또한 박영갑, 장기영 등이 1911년 10월 경 미국에서 와 한인사범학교 설립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우스리스크는 1935년까지는 니콜스크-우스리스크로, 그리고 1935년부터 1957년까지는 보로시로브로 그리고 이후 오늘날까지는 우스리스크로 불리고 있는 곳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2km 떨어진 곳으로 과거 발해의 5경 12부 중의 한 부가 있었다. 발해가 멸망한 후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가 1860년 북경조약의 체결로 러시아 영토가 되자 점차 한국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870년 지신허로 이주해 온 한인들 가운데 96명이 청나라 배 3척을 나누어 타고 추풍으로 향하다가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러 암초에 부딪혔다. 그 중 22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들이 하루에 10 여 리를 걸어 8일만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과거 러시아 병사들이 지냈던 토굴에서 거주하며 이 지역의 개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많은 한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1917년 5월 한족의 제1차 대표자대회가 이곳에서 개최되어 전로한족회가 조직되었으며, 《청구신보》도 이곳에서 간행되었다. 그리고 전로한족회 제2차 총회 역시 이곳에서 개최되었다. 우수리스크는 의병운동을 활발히 지원했던 최재형 등이 총살당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연해주 지방과 연흑룡강 지방에 주둔한 일본군이 예기치 않게 극동공화국을 기습했다. 일본인들은 24시간 동안 블라디보스톡, 니콜스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브스크, 쉬코토보, 포시에트, 기타 연해주 지방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했는데, 이것은 사전에 작성된 계획에 따라 수행된 것이었다. 이때에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서 연해주 지방과 연흑룡강 지방노동자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군은 이 도시를 점령하자 이 도시에 참석한 많은 대표위원들을 체포 살해했다. 체포된 사람들 중에는 한인무장 유격대 대표위원들인 최재형, 김이직(당시 북문10호 거주), 엄주필, 카피톤 황, 이경수 등이 있었다. 달레네첸스크(이만)는 1910년대 권업회에서 이곳 라불유 지역에 한인 농장을 개척하기 위하여 노력한 곳이다. 즉 이곳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여 독립전쟁을 준비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또한 1920년 청산리 전투 이후 많은 독립군들이 소련과 만주의 국경지대인 이곳으로 피신하여 활동하였으며, 대한총군부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특히 1921년 이만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다."

참고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