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 1. 1910년대의 독립운동
105인 사건으로 끌려가는 애국지사들

이었다. 처음에 일제는 안명근安明根의 독립군 모집과 경비조달을 위한 활동정보를 입수하고4)1910년 12월 그와 관계한 황해도 일대의 애국지사들 160여 명을 검거했는데,5)그것은 한말 이래 의병과 계몽주의자가 많았던 황해도 일대의 민족조직을 파괴하는 작업이었다.6)

그에 이어 1911년 1월에는 양기탁·주진수 등 신민회新民會간부급 인사 33명을 검거하였다. 신민회 인사의 망명은 5단계로 진행되었는데, 첫번째가 1910년 5월 청도회의靑島會議를 개최한 것이었고, 다음이 청도회의 실패 후 이회영·이관직李觀稙등의 서간도西間島개척이고, 셋째가

 

안동 일대 인사의 망명인데 그들은 양기탁 등의 검거가 진행되던 소란 중에 망명하였다.7)다음이 양기탁 등 서울의 중앙간부들의 망명계획인데, 그들은 망명 직전에 모두 검거되었다.8)마지막의 것이 서북지방 회원의 망명인데 그들은 앞의 안악사건과 뒤에 말하는 105인사건으로 모두 검거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05인사건은 1911년 9월에 일어난 일이다. 그 해 7월에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의 보안법위반사건에 대한 재판을 끝낸 일제가 그와 관련 있는 인사가 평안도 일대에 많다는 판단 아래 사전에 그들을 검거하여 민족 기반을 파괴한다는 계산으로 감행한 조작사건이 105인사건이다. 당시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암살사건’이라 조작하여 600여 명의 애국지사를 검거하였다.9)1년간에 걸친 악형 끝에 1912년 9월 105명에게 실형을 언도함으로써 105인사건이란 이름이 붙었지만 당시의 인사들은 각 지방의 중류 이상의 지도자들로서 독립운동의 구심체적 위치에 있던 인사였다.10)원래 일제가 조작한 것이었으므로 재판에 불복하여 1913년 7월에 고등법원 판결에서 윤치호尹致昊·양기탁·임치정林蚩正·안태국安泰國·옥관빈玉觀彬등 6명 외에는 모두 풀려났지만, 그로 인한 민족사회의 타격은 컸다. 그러니까 일제로서는 사건을 조작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105인사건으로 신민회의 독립군기지 개척의 계획이 크게 위축된 것은 물론이고, 또 독립운동 전반에서 그를 주도할 중산층의 일각, 특히 계몽주의 좌파左派가 큰 타격을 입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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