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 3.문화 민족주의

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국가적 진화를 단념한 좌파의식은 진화의 주체를 국가가 아닌 민족으로 보고 새로운 방향모색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계몽주의자들의 민족적 위상은 그들이 근거한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연유한 바가 컸다. 그들은 거의 지주 자산가였다. 그러므로 체제를 전면 부정하면서 자신의 지주 기반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지주의 속성 때문에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한 경제이론 즉 민족경제로서의 상공업적 인식도 창출하지 못하였다. 1907년부터 국채보상운동이나 광무사 같은 철도의 민족화를 기도했으나 시기가 늦었던 것은 물론, 일제의 농간으로 어느 것도 다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민족적 부르주아로서의 길을 빼앗겨 가면서 일본 제국주의체제에 편입되어 갔다. 따라서 그들에 의한 시민민족주의가 민중민족주의와 만날 수 없었던 것이다. 단지 1907년 여름부터 좌파적 지향이 민중과 만날 수 있는 여지는 있었고 또 만나고도 있었으나 계몽운동의 대세는 아니었다. 때문에 1910년대의 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었다.

1907년 정미조약 등의 망국사태 이후에 발생한 좌파노선에서는 사회진화론의 실체인 민족의 더 결속된 역량을 위하여 어문과 역사와 종교에 대하여 관심을 강하게 쏟으면서 국학민족주의를 강화하고 체계화시켜 갔다. 물론 국학 또는 국학민족주의가 종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앞에서 본 바와 같이 그것이 민족운동 조직으로 의미 있게 활동을 전개한 시기는 그렇게 빨랐던 것이 못되었다. 오히려 너무 늦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계몽주의는 우선 적기를 상실한 반성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그 대두 시기1904도 그렇고 좌파가 분화된 시기1907도 그렇다. 그리고 계몽운동은 체제 속에서 전개한 구국운동이었으므로 독립운동상의 의미도 같은 때의 의병전쟁에 비하면 우회성의 한계를 면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1894년부터 반식민지 하에 놓이게 되었고 1904년부터는 준식민지화된 대한제국이었는데 그러한 현실인식 자체부터 의병만큼도 정확하지 못한 탓이 큰 원인이 아니었던가 한다. 그리고 또 중요한 원인은 계몽주의의 담당주체였던 시민계층이 특히 지주의 경제 기반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근대상공업이나 근대 자본주의 또는 제국주의에 대한 논리적 이해가 부족하였다는 데에 있었다. 때문에 구국운동을 망국일 아침까지도 혁명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그의 원인遠因은 시민층이 중층적으로 형성되지 못하여 시민민족주의를 만족스럽게 발달시키지 못했다는 데에도 있었다고 하겠다. 따라서 시민민족주의의 역사적 임무였고 또 역할이기도 한 대중문제나 그 지성을 수용하지 못하여 민중민족주의가 별도로 존재한 우리의 근대사적 특징과 과제를 안고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말 계몽주의는 시민민족주의를 성장시키는 데에 공헌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1910년대 독립운동에서 공화주의 이념이 성장하는 기초가 되어 대한광복회나 조선국민회를 탄생시켰으며 아울러 독립운동 방략을 새롭게 발전시켜 해외독립운동의 방향을 정착시켜 간 것이라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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