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2장 한말의 구국운동 - 3.문화 민족주의

로써 그 여파가 널리 퍼져 갔다. 주시경은 외래종교의 선교를 정신적 침략으로 이해하였다.96)그리고 일제는 식민사학을 통하여 회유책의 일환으로 양국동조론으로써 일본의 시조신인 천조대신 동생素盞鳴尊의 아들 오십맹신五十猛神이 곧 단군이라 했다.97)그에 따라 계몽주의단체의 대표격인 대한자강회 고문이었던 대원장부大垣丈夫는 공공연히 양국인의 동조동종同祖同種을 말하면서 단군을 일본사에 부용적 위치로 전락시켜 갔다.98)민족사학조차 그에 물들어 가던 당시에99)단군교를 창시한 것은 민족주의의 정신적 측면에서 의의가 컸다. 그리하여 1910년대에 더 많은 지사들이 단군교大倧敎에 입교하여 교세를 발전시켜 갔다.

그러나 한편, 한말 구국운동의 위치에서 보면 내용 여하간에 때가 너무 늦었다. 그리고 처음에는 종교이론의 측면에서 많은 한계가 있어 선교도 쉽지 않아 다른 종교세를 능가하지 못한 채 대한제국의 멸망을 맞아야 했다.

이와 같이 한말 계몽주의는 근대주의근대국가론, 사회진화론사회경쟁론, 국학적 민족주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계몽주의는 그의 원류인 개화개명주의의 외향성보다 주체적이고 진보적이었다. 그러므로 시민민족운동의 사상으로 정착되고 있었다.

그러나 구국운동의 논리로 보면 산만한 점이 많아 대중적 민족역량으로 집약되는 데에는 한계가 컸고, 또 시기로 보아도 이론 정립이 이미 때늦은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계몽주의 구국단체는 많았으나 행동강령은 구호에 머물렀고 실천논리로 구체화되지 못한 사례가 많았다. 그리하여 구국운동으로 작동하면서 오히려 일제침략에 함몰해 간 경향이 있

 

었다. 따라서 구국논리가 더 선명한 유생의병儒生義兵이나 농민 또는 민중의병과 민족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없었다. 한말 구국운동을 구조적으로 파악하는 데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통합개념에서 이해되어야 하지만, 실제는 서로 대립되었는데, 그 이유가 적어도 이념적인 측면에서도 존재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이념상의 차이가 존재한 그 이유는 담당주체의 사회경제적 이익과 전통적 체질의 상이성에 연유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1907년 후반부터 계몽주의의 방략이 수정되면서 민족운동의 강경론左派이 대두하여 시민민족주의와 민중민족주의가 만나고 있던 현상을 별도로 주목해야 한다.

이상에서 계몽주의의 변천과 그 사상적 특성에 대하여 살피면서 독립운동사적 의미에 대하여도 추적해 보려고 노력하였다. 먼저 계몽주의 조직이 등장하는 것은 1904년 국민교육회부터라는 점을 거론하고 그것은 그에 앞서 있던 보안회와 헌정연구회 같은 직접적 정치조직의 길을 피한 우회적 구국운동단체로 출발하였다고 분석하였다. 그와 같은 정치우회성은 그 뒤의 대한자강회나 대한협회 그리고 5학회 등에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그러니까 1904년부터의 준식민지 상태와 대한제국의 군주정치라는 현실체제에 대한 긍정적 기초 위에서 사회진화론적 계몽주의가 추구되었다는 것이 한말계몽운동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1907년 정미조약 등에 이르러서는 좌파적 분화가 일어났다. 즉 정미조약 등을 망국사태로 인식한 계몽주의자들은 우선 일제의 식민사태와 융희황제의 무력한 군권 하에서는 종래와 같은 계몽운동이 구국의 실효를 거둘 수 없다는 판단 아래, 공화주의를 표방하면서 지하조직인 신민회나 대동청년단을 결성하게 되었고 아울러 계몽운동의 방략도 의병전쟁의 방향으로 수정을 가하면서 독립군기지개척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때에 우파 계몽주의는 식민체제 속으로 함몰해 갔다고 하겠다. 그러므로 그들은 별다른 정치이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진화만을 막연

68   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