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 2. 망명정부 수립계획
2. 망명정부 수립계획

독립의군부나 민단조합의 복벽주의는 대중적 기반을 얻지 못하여 결성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해체당하고 말았다. 그런데 복벽주의와 달리 입헌군주론의 보황주의는 별도로 존재하였다.32)그의 대표자는 이상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상설이 1910년대 전반까지만 해도 해외독립운동계에서 카리스마적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보황주의는 그가 활동한 연해주나 북간도 그리고 중국본토의 동포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를 따르던 이동녕·이회영·박은식·신채호·신규식 또한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보황주의입헌군주론에 동조하고 있었다.

1914년 이상설은 이동휘李東輝·박용만朴容萬등과 연락하여 그동안의 독립군기지 개척의 성과로 준비된 각처의 독립군 역량을 결집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톡海蔘威에서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결성하였다.33)

 

그런데 그 해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러시아정부에 의해서 모든 독립군 단체가 해체당할 때 대한광복군정부도 해산되고 이상설은 북경으로 망명하였다.34)그는 북경에서 새로운 전략으로서 망명정부 수립계획을 세우고 이의 실천 조직인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을 만들었다. 즉 광무황제를 국외로 탈출시켜 망명정부를 세울 전략을 계획한 것이다.35)그리하여 1915년 외교부장 성낙형成樂馨이 국내로 잠입하여 광무황제 망명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실패하였다.36)당시 광무황제는 이른바 이왕직장관李王職長官을 비롯한 친일 관리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서 독립운동자가 접근하기가 극히 어려웠으므로 사전에 발각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박은식·신채호 등 구한말 신민회 인사들이 보황주의적 신한혁명당에 참가하고 있는 점이다. 그렇다면 신민회 당시에는 공화주의자였으나 이때에 보황주의자로 태도변화가 이루어졌는지, 혹은 신민회 당시에도 보황주의자였는지, 혹은 원래 양자를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런데 어느 것이 되었든지 신한혁명당의 계획이 실패하고 이어 그의 총수였던 이상설이 1917년 초에 타계한 후, 그 해 상해에서 신규식·박용만·박은식·신채호가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을 발표할 때는 대한제국의 멸망은 융희황제의 주권포기로 단정하고37)동시에 보황주의를 청산하고 공화주의를 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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