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한국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략 - 제3장 초기(1910~1919)의 독립운동 - 1. 1910년대의 독립운동

개되었는데, 그 중에서 1915년까지 양서兩西지방에서 100명의 부대로 항쟁한 채응언의 활약은 의병전쟁사의 최후의 결정結晶이기도 했다.17)그렇다고 산발적인 몇몇 의병의 활약조차 끝났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18)실제에는 1910년대에 걸쳐 간헐적으로는 계속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그것은 『묵암비망론默菴備忘錄』이나 『장효근일기張孝根日記』 등을 보면, 의병에 관한 기사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19)이와 같이 식민통치 하에서도 의병항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들을 “전혀 그 성질을 달리하여 단순한 초적草賊, 강도의 종류에 지나지 않아 이미 정치적 의미가 있는 폭도는 한 사람도 없다”20)할 만큼 의병들은 일본관헌은 물론 식민통치하에서 안주하는 부호나 지주, 그리고 관리를 가리지 않고 공격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구한말부터 나타난 추세로서 민중의병의 특성이기도 했다. 그것을 도적이라고 하는 것은 식민적 안목에 불과한 것이다. 더구나 1910년대에는 일제의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던 기간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러한 민중적 항쟁은 사회경제적 의미까지 포함하여 뜻있게 이해되어야 한다. 그러한 의병의 기질이 잠재해 있던 기층사회였으므로 3·1운동이 평화적 시위로 계획되었더라도 대중화 과정에서 폭력시위로 확대되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2) 척사유림의 의병조직

위와 같이 일제가 국권을 강탈한 후에도 의병의 항전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식민지하에서 그러한 의병을 조직적으로 재정비하여 총독부를 축출하려는 유림들의 의병 계획이 이루어졌으니 그것이 임병찬林炳瓚을 중심으로 한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의 편성이었다. 유림의병의 계획은 이때에도 척사적이었다. 즉 척사유림의 복벽주의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국권강탈을 당하여 척사유림의 향방은 망명과 자정自靖과 의병의 세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의병조직은 독립의군부와 민단조합民團組合이 대표적이었다.21)

독립의군부를 결성한 임병찬의22)계획은 광무황제의 밀조密詔에서 비롯되었다. 1912년 9월 이식과 1913년 1월 이인순李寅順이 의병 규합의 밀조를 가져왔으므로 임병찬은 아들 응철應喆을 상경시켜 확인하니 또 다시 밀조를 가지고 옴으로써23)계획에 착수했다. 임병찬은 “정이품 자헌대부 독립의군부 육군부장 전라남북도 순무총장正二品 資憲大夫 獨立義軍府 陸軍副將 全羅南北道 巡撫總將”의 명을 받았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전국 8도에 도 대표를 두고 우선 전라도에는 각군 대표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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