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4권 1920년대 이후 미주·유럽지역의 독립운동 - 제3장 미주한인사회의 변화와 신진단체의 출현 - 5. 유럽에서 외교 및 선전활동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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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럽에서 외교 및 선전활동 전개
1. 이승만의 국제연맹 및 소련과 접촉

제1차 세계대전 종결 이후 베르사이유조약과 워싱턴조약에 의하여 유지되어 왔던 세계의 ‘불안한 평화’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동요되기 시작했다. 대공황에 취약하게 노출되었던 일본과 독일이 아시아와 유럽에서 각각 대외 팽창정책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만주침공이 그 신호탄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만주국’ 수립이 선포되면서 관동군을 앞세운 일본의 대륙침략은 중국본토로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였다.

이로 인하여 동북아시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두고 있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은 영국의 리튼경Lord Victor Bulwer-Lytton을 단장으로 한 조사단을 구성하고 ‘만주사변’의 진상을 파악하기로 했다. 리튼조사단은 1932년 2월 말부터 일본과 중국을 방문하여 정부 당국자들을 만나고 만주 현지를 시찰하는 등 본격적인 조사 활동을 벌였고, 그 결과를 종합하여 10월 초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서는 9월 18일 일본군의 군사행동이 정당방위라고 볼 수 없으므로 ‘만주국’은 승인될

 

수 없다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의 만주에 대한 기득권을 인정하는 등 중일간 협상과 타협에 의한 사태 해결을 유도하는 결론을 내렸다. 리튼보고서The Lytton Report가 국제연맹에 제출되자 이 보고서의 해석과 채택을 둘러싼 중·일간 외교전이 1932년 말부터 제네바를 무대로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일분쟁과 연계하여 국제연맹에 한국문제를 제출하고자 나섰던 사람이 이승만이었다. 그는 1933년 1월 초부터 5월 중순까지 제네바에 머물며 국제연맹 및 그 회원국 대표들과의 접촉을 시도했던 바, 한국인으로서 연맹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은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56)

이승만의 제네바행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조건이 갖추어짐으로써 가능했다. 첫번째는 그의 여비 및 활동비의 조달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것은 하와이의 대한인동지회였다. 1921년 7월에 설립된 동지회는 이승만에게 ‘절대적 충성’을 맹세한 일종의 친위조직이었는데, 1929년 이후 대공황 발생과 동지식산회사의 파산으로 말미암아 상당한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으면서도 총 1만 달러에 달하는 거액을 모금하여 지원했다. 동지회가 이 시기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적극 후원했던 것은 1930년대 초 하와이 한인사회를 양분시켰던 동지회와 교민단의 충돌로 인하여 실추된 이승만의 위신을 살리고 이를 통하여 동지회의 결속을 다지려 했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제네바행 여권 확보였다. 이 문제는 미 국무부가 의외로 협조적인 태도를 보임으로써 쉽게 해결되었다. 이승만은 미국 시민권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자 획득이 자유롭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이승만이 대한인국민회의 대표로 파리강화회의에 출석하고자 했을 때 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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