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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열전

서재필 생애와 민족운동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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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이민족 식민지가 되어 갖은 수모와 억압, 착취를 당해야 했던 굴욕과 고난의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굴욕과 고난의 민족 수난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조국과 겨레를 향한 숭고한 사랑, 불타는 정열, 강철 같은 의지로 국권을 회복하고 고난받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구원의 일대 드라마가 펼쳐졌고, 민족정신이 크게 앙양되었습니다.
그동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애국선열들의 생애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냈습니다. 1992년 제1차로 유인석·김규식·김구·홍범도(1)·신규식·한용운·안중근 등 일곱 분의 열전을 내어 놓은 데 이어, 이번에 제2차로 이강년·서재필·홍범도(2)·이종일·차리석 등 다섯 분의 열전을 새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열전은 연구소가 지난 10년간 『독립운동사 자료총서』와 『한국독립운동사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애국지사들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내고 연구해온 데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안정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바탕에는 조국을 찾기 위해 쏟은 애국지사들의 피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열전 발간 사업은 바로 이 분들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배금주의, 무분별한 소비문화와 외래 풍조에 휩쓸려 범죄와 부조리, 이기주의가 증대해 가며, 도덕성은 날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성취하고 나아가 세계 일류 국가에 진입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민족의 대업에 헌신하는 새로운 국민적 기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재충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끝으로 집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연구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7년 3월 1일
독립기념관 관장 박유철

머리말

한국 근대사에는 꺼져가는 국운에 맞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온 선각자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암울했던 우리 민족에게 한 가닥 등불이 되어 민중을 계몽하여 민족의식을 고양하고, 자주독립을 위해 헌신하는데 온 힘을 다했다. 그 가운데 서재필은 우리 근대사에 빼놓을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인물로, 그의 생애와 활동을 돌아보는 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의 좋은 거울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송재(松齋) 서재필(1864~1951)의 생애는 구한말 격동기에서 해방정국의 격동기에 이르기까지 파란만장한 우리 근대사에 한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항 이후 밀어닥친 외세의 침투에 맞서 개화의식을 배양해 갑신혁명(갑신정변, 1884)을 단행한 것을 비롯하여, 『독립신문』·독립협회를 통한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제1차 한인회의’ 개최와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한국친우회 결성 및 활동을 통한 독립운동, 그리고 해방정국에서 보여준 민주화와 민족통일을 위한 끊임없는 그의 노력 등은, 근대적인 민주국가 건설을 위한 희생과 열정을 유감없이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서재필의 생애는 일반적으로 『독립신문』·독립협회활동을 중심으로만 연구되고 알려져 있어, 그 이후 전개된 활발한 독립운동이나 해방 이후 보여준 민주주의·민족통일을 위한 활동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때문에서 서재필하면 단순히 개화의 선각자 또는 민중계몽을 위한 개화운동가로서만 알려져 있을 뿐, 전 생애를 통해 나타나고 있는 활동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갑신정변(1884)에 참여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활발히 활동하던 그가 미국에 돌아가 이후 조용한 여생을 보냈더라면 그에 대한 평가가 제한적일 수 있겠으나, 엄연히 그의 활동이 미국에서도 한국을 위해 계속 전개되었음을 감안할 때, 그의 대한 평가는 전 생애를 조명하는 가운데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가 미국시민권을 가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이라는 이름을 갖고 친미주의자로 활동했다 하여, 활발히 전개했던 한국 내에서의 계몽·개혁운동마저도 과소평가 받는 일도 있다. 그러나 서재필이 미국식 사상과 풍습을 익히고 친미주의자로 행사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때문에 그가 미국의 이익을 위해 앞장서서 고국의 발전에 누를 끼치거나, 도의적으로 볼 때 민족감정을 손상시켜 민족을 배신하는 일을 한 적이 있었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않았음을 그의 긴 생애를 통해서 익히 알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서재필은 한국 내 지도자적 인물로 충분히 나설 수 있었지만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 때문에 항상 배후에서 활동하려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미국시민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한 데서 나온 것임을 감안할 때, 한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그의 모든 노력이 한국정부로부터 어떤 부나 명예를 바라고 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오히려 고국을 위해 가치 있는 일을 하고자 했던 그의 순수한 한민족에 대한 사랑과 연민에서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그의 국적문제를 갖고 서재필의 생애를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하는 일을 해서는 안될 것 같다. 국적이 어디에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서재필의 생애는 오늘날 안일하게 생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한편, 성실하게 삶을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는 좋은 귀감이 되고 있음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고국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미국으로 망명했던 그가, 온갖 시련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서 한국에 돌아와 보여준 그의 선구자적인 개척정신과, 독립운동으로 사업이 피폐된 이후 62세 고령의 나이에 다시 의학도로 돌아가 의사의 길을 걷는 만년의 삶은 한마디로 어떠한 환경에도 좌절하지 않고 도전하는 그의 불굴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자 한국인상의 저력을 심어주었다고 하겠다. 그 자신도 회상하기를, “젊은 시절 훌륭한 뜻을 갖고 있었으나, 모든 일을 너무나 성급히 서둘러서 본래의 훌륭한 목적을 잃어버리고 비참한 실패를 하였다.”고 말한 뒤, “그 결과 나는 고귀한 목적을 저버리지 않고 그것을 달성하고자 노력함에 있어서 매일 주어진 일을 하나하나 최선을 다하기로 결심했다.”고 함으로써, 삶의 굳은 신조를 쓰라린 실패를 통해 얻은 다음 이를 크게 성장시킨 인물이었다.
이러한 그의 인물됨을 살펴보는 것을 통해 아무쪼록 이 책이 독자들에게 서재필에 대한 이해와 평가를 바르게 하는 데 일조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의 삶의 대부분이 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고 또 최초의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국제인으로 산 점을 감안할 때, 그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고찰이 현재 수많은 해외 한인들에게 어떻게 고국을 사랑하고 고국을 위해 헌신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사표가 될 수 있기를 바라고 싶다.
1997년 3월 1일
혹성산 산록에서 지은이 삼가 씀

제1장 개화의식의 성장

1. 출생과 성장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음력 1863. 11. 28) 서광언[徐光彦, 뒤에 광효(光孝, 서광효)로 고쳐짐]과 어머니 성주 이씨의 4형제 중 둘째아들로 외가인 전라남도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당시 지명은 동복군 가내리)에서 태어났다. 본가는 충청남도 논산군 구자곡면 금곡리이고, 형제로는 형 재춘(載春, 서재춘)과, 동생 재창(載昌, 서재창), 재우(載雨, 서재우)와 정해은에게 출가한 누이동생이 있다. 어머니는 동복군의 명문가인 성주 이씨 이기대(李箕大)의 다섯째 딸로 네 아들을 모두 이곳에서 낳았다. 아버지가 생원 진사과에 합격한 뒤 서재필이 태어나, 집안에서는 두 가지 경사가 겹쳤다 하여 서재필을 쌍경(雙慶)으로 부르기도 했다.
7살 때 서재필은 충남 대덕군에 살던 7촌 서광하(徐光夏)의 양자로 입양되었다. 서광하의 부인은 김온순(金蘊淳)의 딸인데, 그는 세도가 당당했던 안동김씨의 후예로 고종년간에 청주목사·공조판서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김성근(金聲根, 1835~1918) 또한 1862년 문과에 합격한 뒤 도승지, 전라도관찰사, 1902년에는 탁지부대신을 지낸 인물이었다.
서재필은 양자로 입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양어머니의 권유에 의해 서울에 있는 외삼촌 김성근 집에 보내져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외삼촌의 사랑채인 사숙(私塾)에서 천자문을 비롯하여, 『동몽선습』·『사기』·사서삼경 등의 한문공부를 시작하였다. 이 때 같이 공부한 학동 중에는 사촌인 서병억을 비롯하여, 이완용도 있었다.
서재필의 한문공부는 일종의 과거준비를 위한 것이었다. 공부에 남다른 영특함을 보인 그는 18세가 되던 1882년 음력 3월에 실시한 알성시에 응시하여 합격했다. 이 해의 과거는 중궁전(민비, 명성황후)이 건강을 회복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왕이 친히 임재하여 양반 자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별시였다. 당시 이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갑과 1인, 을과 3인, 병과 19인 총 23인이었다. 서재필은 병과의 세 번째로 합격했는데, 합격자 중 최연소로 벼슬길에 올라 조선 엘리트 관료로서 앞날이 보장되었다. 첫 번으로 받은 그의 벼슬은 경적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도장 등을 관장하던 교서관(校書館)의 부정자(副正字)였다.

2. 개화사상의 형성과 호산육군학교 유학

서재필이 김성근의 집에 기숙하면서 학문을 연마하는 동안 그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당대의 선구적인 개화파 지식인들과의 만남이었다.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는 김옥균을 비롯하여 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 개화파 지도자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서재필은 이들과 자연스럽게 만나면서 과거에 급제하기 이전부터 이미 이들과 접촉하며 개화사상을 체득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서재필은 12세나 위인 김옥균과의 만남을 통해 그가 가진 꿈과 야망을 존경하게 되었고, 김옥균 또한 서재필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김옥균이 나이 어린 서재필을 중요한 동지의 한 사람으로 선택한 배경에는, 그가 김성근과 같은 집안 사람이었는데다 같은 동네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 서로 가깝게 교제할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던 점과, 김옥균과 서재필 둘 다 양자라는 것과 모두 머리가 뛰어나고 모험심이 강하고 담대한 점이 서로에 대한 애정을 갖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서재필은 “나의 개화사상과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은 김옥균”이었다고 밝힐 정도로 그에 대한 회상은 각별하였다.

누구 누구 하여도 나에게 제일 강한 인상을 끼친 이는 김옥균이었다. 그의 서와 평문은 물론이고 사죽에 이르기까지 통하지 않은 데 없는 그 높은 재기는 나를 사로잡지 않고는 마지아니하였다. 나는 그에게 십여 년 연하이었으므로 그는 나를 늘 동생이라고 하였다.
…나는 그(김옥균)가 대인격자였고, 또 처음부터 끝까지 진정한 애국자였음을 확신한다. 그는 조국이 청국의 종주권하에 있는 굴욕감을 참지 못하여 어찌하면 이 수치를 벗어나 조선도 세계 각국 중에서 평등과 자유의 일원이 될까 주주야야로 노심초사하였던 것이다. 그는 현대적 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시대의 추이를 통찰하고 조선도 힘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려고 절실히 바랐었다. 그리하여 신지식을 주입하고 일신 기술을 채용함으로써 정부는 일반 사회의 구투(舊套) 인습을 일변시켜야 할 필요를 확각(確覺)하였다.(『동아일보』, 1935. 1. 2 「회고갑신정변」)

이밖에 서재필은 서대문 밖 봉원사의 개화승 이동인과도 접촉하면서 개화사상을 받아들였다.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인사들은 이동인이 일본에서 가져온 각종 서양 물건들과, 역사·지리·물리·화학·정치 등 서양 학문에 관한 서적들을 열심히 돌려가며 읽었다. 여기에 대해 서재필은,

그래서 그 책을 다 읽고 나니까 세계 대세를 대강 짐작할 것 같거든. 그래서 우리나라도 다른 나라처럼 인민의 권리를 세워보자는 생각이 났단 말이야. 이것이 우리가 개화파로 첫 번째 나서게 된 근본이 된 것이야. 다시 말하면 이동인이라는 중이 우리를 인도해 주었고, 우리는 그 책을 읽고 그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이야.(김도태, 『서재필박사자서전』, 85쪽)

하여 그의 역할을 높이 샀다.
당시 청년개화파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1881년 1월 신사유람단 40명이 4개월 동안 일본을 돌아보고 9월에는 김윤식을 주축으로 하는 청년 38명이 천진을 돌아보고 왔다. 특히 그중에서 김옥균은 3회에 걸쳐 일본을 왕래하며 정치적 견문을 넓혔으며, 박영효는 2회, 윤치호는 2회, 서광범은 1회, 유길준은 1회에 걸쳐 일본을 견문했다. 이들이 시찰 후 얻은 결론은 부국강병이었다.
1882년 조미수호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의 체결과 더불어 서구 문물이 들어오기 시작하자, 청년개화파들은 조선의 서구화 과정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결심에 따라 어떠한 정치적 개혁도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특별히 김옥균은 조선이 무력한 이유는 조선의 일반 대중이 과학 문명의 지식에 어둡고 지도계급에 있는 사람들은 무지하고 우둔하기 때문이라고 믿었다. 그는 누차에 걸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한 가지 길은 백성 전체를 교육시키는 데 있으며, 이 교육의 임무는 젊은이들이 맡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늙은이들은 전혀 이런 일을 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이와 같은 그의 초급함에는 일본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가 컸었다. 당시 김옥균의 심정을 서재필은 이렇게 대변했다.

그(김옥균)는 구미(유럽·미국)의 문명이 일조일석의 것이 아니고 열국간 경쟁적 노력에 의한 점진적인 결과로 몇 세기를 요한 것이었는데, 일본은 한 대(代) 안에 그것을 달성한 양으로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는 자연히 일본을 모델로 치고 조선을 개혁시킴에, 일본의 우의와 조력을 청하여 백방으로 분주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35. 1. 2, 「회고갑신정변」)

이외 당시 청년개화파들의 심정이 어떠했던가를 명료하게 설명해 주는 것은 박영효의 고백이었다.

신사년(1881년) 12월에 나는 일찍이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실정을 탄하여 장차 개혁의 의지를 품고 동지 서광범·김옥균 등 3인이 일본을 시찰한 일이 있으니,…이 이래로 3인이 항상 합심 동력하여 때가 오기를 기다렸더니, 마침 그 다음해 일본에 사절을 보내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호기가 도래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원하여 공사가 되었던 것이다. 이때 일본은 명치유신(1853) 후의 대개혁을 단행하던 때라, 상하가 결속하여 내치외교에 국운은 날로 융성하여 가는 판이었다. 3개월 동안 그 정황을 살핀 우리 일행은 선망하여, “우리나라는 언제나…” 하는 초급한 마음이 일어나는 동시에 개혁의 웅심을 참으려 하여도 참을 수가 없었다.
나의 일평생을 지배한 관념은 정히 이때에 받은 충동에서 나온 것이니,…5백 년 종사에 천고의 유한을 품게 된 것도 모두 이때에 뿌린 씨앗이었다.…이때가 오히려 만시지탄이 있다 하나, 능히 상하일치하여 개국 진취의 보무를 멈추지 않았던들 종사의 운을 오히려 아직 구제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귀국 총총히 곧 동지를 규합하여 국정개혁을 도모하기로 맹약하였다.(박영효,「갑신정변」,『신민』 14호, 1926)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들의 모임이 시작한 때는 1877년경이었으나 이들이 교유의 차원을 넘어 결당(結黨)의 모습을 갖춘 것은 1879년이었다. 그들이 갑신정변(1884)을 모의하게 된 것은 1883년 김옥균이 임오군란(1882) 직후 일본을 방문하여 일본의 개화지식인들을 만나면서였다. 여기서 김옥균은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일은 일본의 본을 받는 것이라 확신하였다.
새로운 조선을 건설하는 일을 위해 김옥균은 먼저 유능한 젊은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키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재필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일본유학을 당부하였다. 이에 대해 서재필은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하루는 그가 나에게 국방을 충실히 하자면 정예한 군대밖에 없는데, 현하의 우리 급무로 그우(右)에 출(出)할 자 무엇이냐 하며, 일본으로 건너가 무예를 배우라고 권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곧 승낙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15인의 다른 학생들과 일본으로 향하였다.(『동아일보』, 1935. 1. 2, 「회고갑신정변」)

문관으로서의 출세의 길이 훤히 열린 서재필이 이처럼 무예를 배우러 일본으로 향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를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뒤에도 그러했지만 그는 일단 결심을 하면 주위의 누가 뭐라 해도 앞을 향해 돌진하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위의 인용문에는 15인의 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를 포함하여 17명이었다. 이들은 신문 간행을 위해 한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돌아가는 우장탁조(牛場卓造)와 송미삼대태랑(松尾三代太郞)의 인솔을 받아, 일본의 장기[長岐(나가사키)]를 거쳐 동경에 도착했다. 동경에 도착한 때는 1883년 5월 20일이었다.
처음 6개월간은 복택유길(福澤諭吉)이 경영하는 경응의숙에 들어가 일본어를 배우고, 1883년 11월 경 동행했던 17명 중 14명이 호산(戶山)육군학교에 들어가 신식 군사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14명 중에는 서재필과 그의 동생 재창(서재창)이 유일한 양반 자제였고, 그 나머지는 모두 평민 출신이었다. 박영효 집의 하인 이규완, 서재필 집의 하인 임은명, 노동자였던 윤경순과 그의 형, 그리고 박응학·신중모·그의 동생 신복모 등이었다.
호산육군학교는 일본의 육군병학료가 1873년 호산에 세운 일종의 출장소였다. 이 출장소는 1875년 정식으로 육군 호산학교로 독립되어 검술·체조·나팔·보병 등의 전술을 가르치다가, 보병 전술에 관한 부분은 육국보병학교로 독립시켜 천엽[千葉(치바)]으로 이전해 갔고, 호산학교는 검술과 체조를 위주로 가르친 일종의 하사관 양성기관이었다.
호산학교 유학시절 서재필은 계속적인 김옥균과의 만남을 통해 한국의 실상과 세계정세를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다. 김옥균은 차관교섭 차 일본 동경에 머무르면서 서재필을 비롯한 호산학교 유학생들과 1주일에 한 번씩 만나 한국 실정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에 대해 서재필은 회고하기를,

그는(김옥균) 주일 한국공사는 아니었으나, 일본의 관리들과 일본에 파견된 외국 사절들에게 외교적으로 상당히 친밀한 교유를 하였던 것이다. 매 일요일이면 우리는 반드시 그를 동경 축지[築地(쓰키지)]에 심방하였다. 그때마다 그는 우리를 친형제 같이 대접하고 숨김없고 남김없는 가슴속의 말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그는 조국 쇄신에 대한 우리의 중차대한 임무를 말하는 동시에, 나라에 돌아가 우리가 빛나는 대공훈을 세울 것을 믿어 의심치 아니하였다. 그리고 그는 늘 우리에게 말하기를 일본이 동방에 영국 노릇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아세아(아시아)의 불란서(프랑스)를 만들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이 그의 꿈이었고 또 유일한 야심이었다. 우리는 김(김옥균)씨의 말을 신뢰하고, 우리 진로에 무엇이 닥쳐오든지 우리의 이 책임을 이행하겠다는 결심을 하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35. 1. 2, 「회고갑신정변」)
라 하고, 김옥균과 만날 때면 우국충정의 담론을 나누었다고 했다.

제2장 구국혁명의 길

1. 갑신정변(1884) 참가와 실패

호산육군학교에 유학한 서재필 등은 장기간 제대로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 7~8개월 뒤 귀국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재정이 곤란하여 이들의 유학경비를 지탱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 유학생은 1884년 7월 말 서울에 돌아왔다. 1년 2개월 만의 귀국이었다.
귀국 당시 조선에서는 호산학교 유학생들을 사관생도로 불렀고, 서재필은 그 대표로 활동했다. 대부분 신분이 별로 높지 않은데다 벼슬을 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이라, 양반출신에다 유일한 과거 급제자였던 서재필이 능히 대표가 될 수 있었고, 또 지휘관으로서의 자질도 갖추고 있었다.
개화파인사들은 이들의 귀국을 환영하면서 사관학교 설립을 고종에게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고종은 관심을 표명하고 이들 유학생들을 궁성 안으로 불러들여 새로 배워온 교련과 체조를 시범토록 하였고, 그들이 훌륭하게 해내자 매우 기뻐하였다. 그 결과 고종은 조련국을 설치하여 서재필을 사관장으로 등용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사관학교는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설립되지 못하고 말았다. 1882년 일어난 임오군란 이후 1,500여 명의 군대를 주둔하면서 일부 한국 군대의 훈련까지 맡고 있던 청나라 군대의 압력과, 친청(親淸) 수구태도를 가지고 있던 민씨(명성황후) 측이 반대하였던 것이다. 오히려 그들에게 궁궐 수비대로 근무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부풀었던 꿈이 산산조각나자 서재필 등은 절망과 실의에 빠졌고, 동시에 집권층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되었다.
청나라는 임오군란(1882) 이후 한국의 국내 문제에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자국의 식민지로 만들려 했고, 여기에 편승한 친청 수구파들의 기승은 날로 높아만 갔다. 이러한 때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은 무엇보다도 청나라 세력을 꺾고, 그들의 추종세력을 물리친 후 부국강병의 완전한 자주독립국으로 만들려는 생각을 갖고 은밀히 일을 추진해 나갔다. 그러나 혁명의 중추세력으로 한성판윤의 지위에 있던 박영효가 수구파에 의해 경주유수로 좌천되고, 이후 곧 면직되자 그들에게 일종의 위기감이 감돌기 시작했고, 이때 비상한 방법 즉, 혁명의 방법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특명전권사절로 미국과 유럽의 선진문명을 보고 온 민영익이 개화파에서 이탈하여 민씨(명성황후) 측과 합세함으로써 개화파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박영효의 몰락과 민영익의 이탈 이외 당시 국제정세는 크게 변하고 있었다. 1884년 6월 청국은 안남(베트남)사건으로 불란서(프랑스)와의 전쟁에서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온 것이다. 이제 청국이 조선문제를 돌아볼 겨를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때를 혁명의 호기로 생각했다. 혁명은 청의 세력을 몰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 힘을 배경으로 개화를 저해하고 있는 수구파를 함께 제거하기로 굳어졌다. 혁명의 방법으로는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수구파를 초대하여 처형하는 것으로 확정했다.
서재필은 나이로 보나 그의 정치적 지위로 보나 정변(갑신정변, 1884)의 핵심 결정에 참여할 위치에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거사가 구체화됨에 따라 거사의 주역인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 등과의 직접적인 상의와 지시를 들을 수 있었다. 김옥균은 서재필에게,

우선 서(서재필)군은 호산학교 출신 동지들을 우리 편으로 단단히 묶어 놓기 바라오. 머지않아 있을 사대당파와의 최후 대결에서 당신들이 절대로 중요한 역할을 해야만 될 테니까. 또한 최선을 다해 새 사람들도 더 많이 뽑아 모집하십시오. 상세한 내용은 후에 더 밝히리다.(『동아일보』, 1935. 1. 2, 「회고 갑신정변」)

라고 부탁했다. 이후 서재필은 즉시 호산학교 출신 동료들을 결속하는 일에 주력하면서, 당시 국내에 있던 일본 군대와의 긴밀한 연락을 취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개화파에 의해 단행된 갑신정변(1884)에 서재필은 병사를 인솔하고 국왕을 호위하는 행동대원으로 참가했다. 우정국 연회가 한창이던 오후 8시경 “불이야!” 하는 외침과 함께 거사는 시작되었다. 고종은 경우궁으로 옮겨지고 서재필은 소총과 칼로 무장하고 사관생도들과 더불어 왕의 경호를 맡았다. 12시경 수구파의 주요 인사들이 제거되었고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정변(갑신정변, 1884) 다음날 새 정부 수립을 알리면서 근대국가를 향한 혁신적인 정책들이 발표되었다. 그 가운데 『갑신일록』에 실린 혁신정강 14개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케 하고 청에 대한 조공허례를 폐지할 것.
2. 문벌을 폐지하고 인민평등의 권을 제정하여, 재능에 의해 인재를 등용할 것.
3.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奸吏)를 근절하고, 궁민을 구제하며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할 것.
4. 내시부를 폐지하고 그 중에 재능있는 자만을 허통·등용할 것.
5. 그동안 국가에 해를 끼친 탐관오리 중에 심한 자를 처벌할 것.
6. 각도의 환자[還上]를 영구히 면제할 것.
7. 규장각을 폐지할 것.
8. 조속히 순사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9.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10. 그동안 유배 혹은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11.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중(營中)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조속히 설치하고, 육군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12.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 밖의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
13. 대신과 참찬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閤門) 내의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공포할 것.
14. 의정부·6조 외에 일체 불필요한 관청을 혁파하되, 대신·참찬으로 하여금 이를 심의하여 품계토록 할 것.

서재필은 새정부에서 병조참판겸정령관으로 임명되어 이번 정변(갑신정변, 1884)의 핵심인물로 부상하였으나, 정변(갑신정변, 1884)이 3일천하로 끝나 모든 것이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수구파의 민씨(명성황후) 세력이 청국의 원세개에게 군대를 요청함으로써 그들의 힘으로 이 정변(갑신정변, 1884)을 무위로 돌리고 만 것이다. 정변(갑신정변, 1884)군 150명 정도로 청나라 군사 1,500여 명을 상대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서재필은 청군 병력이 밀려오자 결사항전을 전개했으나, 수적으로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다음에 재기의 기회를 보자고 권유하는 김옥균의 말에 따라 서재필은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일본공사관으로 후퇴했다. 그때 함께한 인사들로는 김옥균·서광범·박영효·서재필·이규완·유혁노 등 9인이었다. 모두 일본공사 죽첨(竹添, 다케조)을 따라 공관으로 들어갔는데 공관 직원들로부터 쓰레기 취급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조선정부로부터 주동자 9인에 대한 신병인도 요구를 받자 뒷마당 물이 없는 우물에 들어가 있으라는 요구까지 했다. 김옥균은 우물 속에 들어가 숨느니 감옥소에 죽는 것이 낫다고 소리치는 바람에 더 이상 이런 요구는 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난 후 김옥균은 서재필에게 일본인과 같이 행동하자고 제의했다. 일인들은 인천에 있는 일본영사관으로 피했으나, 개화파 9인은 인천 영사의 소개로 한 일본인 집에 숨었다.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장 기노시와의 집이었다. 이런 가운데 이들은 일인들과 함께 인천항에 정박 중인 천세환(千歲丸)이라는 일본 배에 승선했다.
이 사실은 안 민씨(명성황후) 일파는 서상우와 뮐렌도르프를 보내 이들 망명객들을 체포하려 했다. 그러나 키는 작았지만 단단하게 생긴 그 배의 선장 십승삼랑(辻勝三郞)이 권총을 꺼내들고, “이 배안에서는 나만이 주인이다. 따라서 나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여기에 들어오지 못한다.”고 소리침으로써 무사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간신히 자유의 몸이 된 서재필과 그의 망명동지들은 배 밑의 석탄창고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12월 11일 배는 인천항을 출발했다. 3일 동안의 항해 끝에 배는 나가사키에 도착했다. 가는 도중 서재필은 줄곧 온갖 잡동사니가 널려있는 배 밑바닥에서 사흘 동안 주먹밥을 먹어가며 동지들과 함께 괴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초조한 시간을 상념에 잠긴 채 흘려보냈다. 열흘 사이에 천당과 지옥을 오간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다시 못 볼지도 모르는 고국의 산하를 눈물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서재필은 기어이 조국을 위해 몸 바칠 기회를 찾아오고야 말리라는 한 가닥 희망을 걸며 자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일본을 떠난 후 다시 권력을 잡은 민씨(명성황후) 세력은 정변(갑신정변, 1884) 가담자들을 ‘대역죄’로 몰아놓고 철저하게 응징했다. 이들은 정변(갑신정변, 1884) 가담자들을 왜놈에게 붙은 역적놈들이라 하고 하나도 남기지 말고 대역부도의 죄인으로 능참해야 한다고 했다.
서재필의 가족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일본으로 떠난 직후 반역자의 가족이 된 서재필의 부모가 먼저 자결하고, 이어 부인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당시 단 하나의 혈육이던 두 살 된 아들은 어머니가 죽은 후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굶어 죽었다. 또 갑신정변(1884)에 함께 참여했던 동생 재창(서재창)은 자결하지 못하고 붙잡혀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참형을 당했다. 근대적인 국가를 수립하려던 서재필의 노력은 가족몰살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다주었고, 그 자신 또한 도망다니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했다. 여기에 대해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닷새 전만 하더라도 고국이 일본이나 그 밖의 여러 진보국가들과 같이 자주국가로 개혁되어 전지할 위치에 서있었으나, 이제 우리는 천세환의 배 밑에 숨어 낯설은 나라 미지의 세계로 만리창파를 헤치고 도망하는 신세가 되었으니, 우리 운명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김도태, 147쪽)

이렇게 근대적인 국가수립을 위한 갑신정변(1884)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되돌아보면 갑신정변(1884)의 실패는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 개화파들의 개혁의지가 민중들로부터 한낱 ‘분별없는 젊은이들’로 밖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188명의 희생자를 낸 폭력혁명이 당시의 유교적 통치윤리 속에서 용납될 수 없었다는 점, 지나친 대일(對日) 의존도, 그리고 150 : 1,500이라는 군사적 열세를 젊은이들의 혈기만으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무모함 등이 실패의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거사 준비에 있어서 철저한 사전 검토를 거치지 못하고, 일본을 믿고 급진적인 혁명을 시행한 것은 개화파의 중대한 실수였다. 그 후 50여 년의 세월이 지난 1935년 서재필은 자신의 실패담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갑신정변(1884)도 다른 나라의 혁명과는 달라서 피압박 민중의 분기로 된 것이 아니고, 그 당시 특수 계급의 몇몇 청년의 손으로 된 것이었다.…실패의 근본 원인은 둘이니, 하나는 일반 민중의 성원이 박약한 것이고, 또 하나는 너무도 타에 의뢰하여 하였던 것이다.…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이 있고 훈련있는 후원이 없이 다만 몇몇 개인의 선각자만으로 성취된 개혁은 없는 것이다.…이는 마치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것과 같다.(『동아일보』, 1935. 1. 2~3, 「회고갑신정변」)

그러나 갑신정변(1884)이 하나의 역사적 실패로 그칠 수만은 없다고 본다. 친청 수구세력을 제거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근왕사상(勤王思想)과, 청나라의 종속상태를 청산하고 독립노선을 걸으려던 민족주의적 성향, 내정을 근대화하려던 개혁의지 등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개화파들의 행동에 대해 재한선교사 헐버트(Homer B. Hurbert)는 다음의 글로 이들 행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개화파는 자기들이 살고 있는 시대보다 훨씬 앞선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곧 그들 조국의 무궁한 번영이었다. 조선이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해서, 조선이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에 대한 찬사가 감소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충의는 어느 누구보다도 순수한 것이었다.(신복룡 역, 『대한제국멸망사』, 128~129쪽)

2. 일본 망명

1884년 12월 13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9명의 비운의 동지들은 즉시 경찰서로 끌려갔다. 이들의 초췌한 모습에 놀란 일본 경찰은 그들을 보통 범죄자로 착각했기 때문이다. 일단 신원이 판명되자 일본 외무성에 연락이 취해진 후 여관으로 안내되어 휴식을 취한 후, 다음날 동경으로 갔다. 註1) 도착 후 이들은 일본 개화의 선각자인 복택유길의 집에 초대되었으나, 폐를 끼치길 원치않아 게이꼬쿠의 한 하숙집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생계유지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그 하숙집에도 오래 체류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헤어져 각자 자기생활을 꾸려가기로 작정했다.
이때 우연하게도 조선으로 떠날 계획이던 몇몇 미국 선교사들이 한국어를 공부할 기회를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이들 망명객들과 연락이 되었다. 박영효는 존 헤론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게 되었고, 서재필은 헨리 루미스 목사댁으로 이주해 들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 4개월 동안 그 집에 있으면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자신도 간단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루미스 목사 부부는 미국 성서학회의 파견을 받고 조선에 지회를 개설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서재필을 만났는데, 서재필은 이 부부를 통해 미국과 미국 국민의 관습 및 생활방식을 익히는 새로운 경험을 얻었다. 김옥균은 일본에 유력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생활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서재필을 비롯한 망명동지들은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야 했고 더구나 일본에서의 생활도 안전하지 못했다. 정변(갑신정변, 1884)에 실패한 서재필을 비롯한 개화파 인사들을 일본정부가 냉담하게 대했고,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이들의 신변에 위협이 될 물밑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갑신정변(1884) 실패 이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민비(명성황후) 중심의 조선정부는 서상우를 특차전권대신으로 일본에 보내, 다케조(竹添) 주한공사가 갑신정변(1884)에 일본군을 동원시킴으로써 내정간섭을 했다며 항의의 뜻을 전했다. 그중에는 김옥균·서재필 등 일본으로 망명한 주동자들을 조선에 인도하라는 요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일본은 처음에는 다케조 공사로 하여금 ‘사변시말서’를 조선정부에 제출함으로써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나 조선정부는 다케조가 이번 사건의 당사자이고 ‘반란자’들을 피신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에 교섭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으로 나왔다.
상호간 문제해결이 쉽지 않자 해를 넘긴 1885년 1월 3일 일본정부는 전권대신 이노우에와 외무성서기관 곤도, 미국인 고문 스티븐스 등을 수행원으로 하여, 2개 대대의 병력과 7척의 군함을 대통시킨 교섭단을 조선에 파견했다. 일본은 비록 다케조의 정변(갑신정변, 1884 )간여로 약점을 잡히긴 하였으나, 정변(갑신정변, 1884) 실패 직후 흥분한 조선 민중들이 일본공사관에 불을 지르고 또 임오군란(1882) 때 일본인 40여 명이 피살된 것을 명분삼아 오히려 조선정부에 대한 공세적 태도로 나왔던 것이다.
4일 후인 1885년 1월 7일부터 일본정부는 좌의정 김홍집을 전권대신으로 한 조선의 교섭단과 협상에 들어가 결국 1월 9일 다섯 개 항의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것이 한성조약(1885)이다. 다행히 이 조약에는 일본에 있던 서재필 일행의 신변을 조선에 인도한다는 내용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한성조약(1885) 제1조는 “조선국은 국서를 일본에 보내 사의를 표명한다.”고 되어 있어, 이 조문에 따라 조선정부는 서상우를 특명전권대사로 하고 묄렌도르프를 동부사로 하는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들의 임무 중에는 김옥균·서재필 등의 망명인사들을 조선에 송환하기 위한 비밀협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을 전해들은 망명객 일행은 일본도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이들은 일본으로 망명할 때, 일본정부의 후대를 받음은 물론 강력한 군사지원을 얻어 청국과 한번 싸우기 위해 귀국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개화파의 일본관이 얼마나 순진하고 소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조선정부의 수구파 세력과 화해조약(한성조약, 1885)을 체결하고 한걸음 더 나아가 청국과의 타협책을 추구함으로써 망명객들은 당혹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즉 일본이 조선의 개화정책을 지지하여 개화파 인사들과 함께 정변(갑신정변, 1884)에 참가했지만, 이것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태도를 돌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노우에와의 면담에서 각자 자활책을 찾아보라는 그의 냉담한 말에 서재필 일행은 일본인들로부터 배신당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때 일본인 지도자들 못지않게 자기와 자기 동지들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외국 정부를 그렇게 노골적으로 믿었다는 것이 천진난만한 짓이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천진난만했던 것은 교육의 부족이라 느끼고 배우지 않고는 자신과 국가에게까지 해를 끼치게 된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미국으로 가 공부를 하기로 결심 했다.
이 사실을 선배동지들에게 알리자 박영효와 서광범은 찬성하여 같이 미국에 가기로 했다. 김옥균도 이에 찬성했으나 자기만은 그대로 일본에 남아 있겠다고 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일본내 유력자들과 교유하여, 일본정부가 조만간 청국과 조선에 대한 정책을 바꾸게 하는 데 촉매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서재필·서광범·박영효 세 사람은 이때부터 미국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생활비도 모자란 이들이 미국행 배에 오른다는 것은 당장은 불가능했다. 우선 이들은 글씨를 써서 팔기로 했다. 박영효는 임금의 사위인 부마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사는 사람이 있었고 서광범도 글씨를 써서 팔았다. 그러나 서재필은 젊고 명망도 약했기 때문에 그의 글씨를 사 줄 사람이 없어서 글과 그림에 능한 김옥균의 것과 박영효·서광범의 글을 파는 데 노력했다.
3개월의 악전고투 끝에 서재필 등 세 사람은 미국행 3등 뱃삯과 약간의 여비에 해당하는 90원가량을 모았다. 마침내 1885년 4월 초순 미국 화물선 차이나호(S.S. Empire of China)를 타고 3등칸에서 약 2주일을 지낸 후 4월 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배 안의 긴 여정 동안 서재필은 이제 자신을 위협할 사람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과 함께, 지난날 조급함과 무모함에 대해 반성할 시간적 여유를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국땅에서 헤쳐나가야 할 생활에 대한 공포를 느끼면서 앞날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배제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제3장 미국 망명과 새로운 삶의 도전

1. 망명 초기시절

서재필·서광범·박영효 세 사람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가진 것이라곤 뱃삯으로 쓰고 남은 몇 달러와 일본에 있던 미국인 선교사들이 써준 몇 장의 소개장뿐이었다. 일행 중 서광범은 약 1년 반 전인 1883년 9월부터 11월까지 한국에서 처음으로 파견한 보빙사 민영익 일행의 종사관으로 미국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나, 영어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서재필만이 일본에서 과외로 익힌 짤막한 영어 몇 마디를 구사할 수 있었다. 더구나 아는 사람도 없는 이국땅에서 자신들을 돌볼 사람은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재필은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아는 사람도 없고 돈도 없고 언어도 통하지 않으며 이 나라 풍습에도 익지 못하였다. 이처럼 생소한 곳에서 우리는 온갖 고초를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는 금릉위이던 박영효 씨나 바로 1년 전까지 워싱턴 우리 공관에서 참사관생활을 하던 서광범 씨의 지위를 알아주는 이가 전혀 없었다. 註2) 그러니 아무 명목도 없는 나인지라, 나 자신 남이 몰라준다고 물론 낙심하지를 아니하였다. 우리 세 사람은 태평양의 거친 파도에 밀려서 캘리포니아 해안에 표착한 쓰레기 같이 외롭고 가엾어 보이는 존재들이었다.(『동아일보』, 1935. 1. 3,「체미오십년」)

비록 미국정부 측의 관심거리는 못되고 비운의 인물들이기는 했으나, 박영효·서광범·서재필 일행은 샌프란시스코의 유력 신문인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 Francisco Chronicle)』 기자의 관심을 끌었다. 1885년 6월 19일자에 「은둔자의 나라에서 온 망명자들-반란 끝에 온 표류자-샌프란시스코는 세 진보당 지도자들의 피난처」라는 기사가 실려 이들 망명객과 한국의 정치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한국에서 온 세 명의 망명자들은 버클리에 있는 캘리포니아 대학에 입학할 생각을 하여 보았으나, 그 생각은 포기하고 그보다 하급의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기로 작정했는데, 재정적인 문제도 있고 하여 아직 위급상태는 아니지만 진보적인 인사들의 도움이 필요하겠다는 말로 글을 마쳤다. 이 기사를 통해 서재필 일행은 영어를 배우고 또 미국 사회에서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하는 의지를 기지고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기사는 서재필에게 미국에 정착하는 데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미국은 1882년 ‘중국인 배척법’이 설정되는 등 캘리포니아주에서 동양인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했다. 더구나 영어를 전혀 할 줄 모르는 동양 청년이 취직을 하고 영어강습소에 입학하려면 그야말로 형언하지 못할 고초가 있을 것인데, 이 신문기사는 소상하게 이들 망명객들의 신분을 밝혀주고 그들의 처지를 설명해 주었으므로, 뜻있는 미국사람들이 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베푸는 데 훌륭한 소개장 역할을 감당했으리라 짐작된다.
한편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서재필 일행은 존스 여사라는 하숙집에 방을 구했다. 한 달 정도 이곳에서 생활하던 세 사람은 선교사들의 말을 좇아 소개장을 들고 사람들을 찾아다녔지만 그들이 원하는 물질적인 도움을 얻지 못했다.
이제 살아갈 방도를 구해야 했다. 영어를 못하는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단순노동뿐이었다. 그러나 박영효와 서광범은 양반이 노동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심지어 미국사람은 양반도 몰라주는 나라라고 불평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양반도 죽으면 그만이지만 노동자도 살아있으면 교육받은 인간이 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수주일간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고통과 물질의 궁핍을 겪은 세 사람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서로 살 길을 향해 뿔뿔이 헤어지기로 했다. 서광범은 한국에 파견된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 Underood)의 형이자 당시 뉴욕에 살면서 타자기 발명가로 큰 사업가로 활동하던 존 언더우드에게 도움을 청하는 편지를 내, 그의 요청에 의해 뉴욕으로 떠났다. 박영효는 미국은 살 곳이 못 된다 하고 왕족에게 왕족대우를 해주는 일본에 가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중, 미국을 방문 중인 복택유길의 조카를 만나 그에게 돈을 꾸어 일본으로 떠났다.
이제 서재필만 남게 되었다. 혼자 남게 된 21세 청년 서재필은 어떤 역경이라도 헤쳐나가야겠다고 단단히 결심했지만 현실의 장벽은 너무나 높았다. 아무리 돌아다녀도 일자리가 구해지지 않았다. 공부를 해보겠다는 결심조차 가망성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래서 샌프란시스코 바닷물에 빠져 죽을까도 생각했다. 그러나 한번 최선을 다해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렇다, 나는 아직 젊고 건강하며 이성이 살아있다. 더구나 항상 나는 한 인생을 자기 마음대로 처분해 버릴 수는 없다고 믿어오지 않았던가. 인간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한 인간의 생명이란 그 인간 자신 만큼이나 중요한 사회의 생명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은 내 것인 동시에 조선의 생명이다.”라고 그는 생각했다.
서재필은 직장을 찾기 시작했다. 그때 어느 한 친절한 기독교인을 만나 그를 통해 일자리를 얻고 영어공부를 할 기회를 가졌다. 그러나 처음에는 가는 곳마다 영어를 할 줄 아느냐는 질문을 받고 “못한다.”고 말하면 면접은 끝나고 말았다. 십여 번 이상 거절당한 후 이제는 괜한 오기도 생겼다. 이 때 한 가구상에 들어갔을 때 또다시 영어를 하느냐고 질문을 받자, 이번에는 팔에 근육을 움켜쥐고 단단히 생긴 다리를 가리키면서 서투른 영어로 “영어는 잘못하지만 힘은 세다.”라고 대답했다. 그의 용기를 높이 산 가구상 주인은 많이 걸어 다닐 용의만 있다면 가구점의 광고지를 붙이는 일을 해보라고 했다.
서재필은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신나게 일을 했다. 얼마를 지난 후 서재필은 그 가구점 주인으로부터 자기가 고용한 세 사람 중 당신이 최고라는 말을 들었다. 다른 두 사람은 미국인이었는데, 이들은 하루 5마일 밖에 뛰지 못했지만 서재필은 하루 일당 2달러에 10마일을 뛰었던 것이다.
이때를 회상한 서재필은 그 당시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그 중 제일 쉬운 일이 가구상의 광고지 붙이는 일이라 했다. 그렇지만 어려웠던 점은 발에 맞지 않은 신발이었다고 회상한다.

일 자체는 그다지 힘들지 않았으나, 일본제의 잘 맞지 않는 구두를 신고 온 종일 뛰어 다니는 것이 고통이었다. 갈라지고 해어진 발바닥이 밤에는 얼얼하고 쑤셔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이를 악물고 그 고통을 참고, 다음날도 그 괴로운 광고지 붙이는 마라톤을 하였다.(『동아일보』, 1935. 1. 3, 「체미오십년」)

최소한 생존에 필요한 돈을 벌게 되자 서재필은 영어의 장벽을 없애기로 결심하는 한편 교회활동에 열심히 참가하기 시작했다. 기독청년회(YMCA)에서 운영하는 야간학교에서 영어를 배우는 동시에 일요일에는 성경공부·예배·기도회 등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특히 발음과 억양을 배우는 데 교회예배가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성경과 친해져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함으로써 자연 영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다.
초창기 어려운 미국생활 시절 서재필에게 가장 큰 위로를 준 것은 바로 기독교신앙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보다 이 땅에서 낮은 자의 몸으로 사신 것에 감동을 받고 그를 따랐다. 그는 성경에 여러 애매하고 모순된 점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체험을 통해 예수가 인생의 길이라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자신이 죽느냐 사느냐의 갈림길에서 싸우고 있을 때,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15:5)한 성경말씀을 통해, 자기 생명은 자기 이상의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살을 단념하고 일생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이러한 서재필의 기독교 입문은 그가 근대인으로 태어나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는 미국이 누리고 있는 물질적 번영의 원천이 기독교에 있다고 판단하고, 기독교를 단순한 개인구원의 차원을 넘어 사회변혁의 방편으로 이해하였다.
서재필은 메이슨 스트리트교회를 통해 여러 친구들을 사귀었다. 이제 영어도 익혀 자기표현이 어느 정도 가능해지자 그가 평범한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이 교회 내 알려지게 되어, 그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 것이다. 그 가운데 보험회사 중역이자 이 교회 장로인 제임스 로버트와 서재필과의 만남은 각별했다.
미국으로 건너온 지 1년이 지난 1886년 봄 어느 일요일 서재필은 로버트의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윌리암 홀렌백(John Wells Hollenback)이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홀렌백은 로버트와 동서지간으로, 펜실베니아주 윌크스바레서 탄광을 경영하는 부호이자 해리힐맨아카데미와 라파예트대학 이사직을 맡고 교육사업에도 큰 관심을 가진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휴가를 이용해 태평양연안을 여행하는 중이었는데 마침 로버트를 통해 서재필의 사정을 전해 듣게 되었다. 홀렌백은 서재필과의 만남을 통해 무엇보다 미국에 온지 1년 정도 밖에 안 된 동양의 한 젊은 혁명투사가 영어를 잘하는데다, 그가 쓰는 단어도 지성적인 것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여기서 홀렌백은 고향 윌크스바레에 같이 간다면 모든 학비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했다. 이러한 제의이면에는 기독교 선교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던 홀렌백이 서재필에게 신학공부를 시켜 조선에 선교사로 파송하려는 생각도 갖고 있었다.
공부를 하겠다는 것이 서재필이 미국에 온 중요 목적이었기 때문에 홀렌백의 호의를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홀렌백을 ‘미동부로부터 온 구호의 천사’라 부르고, 그와의 만남을 ‘천재일우의 행운’이라 부를 정도로 기뻐했다. 이러한 기쁨은 그날그날의 생계를 걱정하면서 겨우 생활을 유지하던 것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제2의 인생을 출발한데 따른 기쁨이었다.

2. 해리 힐맨아카데미 시절

1886년 9월 서재필은 해리 힐맨아카데미(Harry Hilman Academy)에 입학했다. 그의 학비는 홀렌백을 통해 지원받았고, 생활은 스코트(Edwin L. Scott)라는 이 학교 교장집에 기거하면서 잔디를 깎고 불을 때는 등 가사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숙식을 해결했다.
힐맨아카데미는 애팔래치아산맥의 동북 끝에 놓여 있는 조그만 광공업 도시 윌크스바레에 지방 유지들이 자녀교육을 위해 세운 자그만한 사립고등학교였다. 이 학교는 미국의 다른 사립 아카데미와 마찬가지로 학비가 비싸고 학생 대부분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교였다. 인격도야도 중요시 했지만 한편으로 명문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세워진 일종의 예비학교였다. 이 학교는 초등과정과 예비과정이 있고 예비과정에 다시 문과·이과로 나뉘어져 있었다. 초등과정은 한 학년밖에 없었으나, 예비과정은 문과·이과 모두 6학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1888년 이 학교의 학생 총수는 115명이었다. 그러므로 각 반의 학생 수는 적으면 4~5명, 많으면 9~10명 정도밖에 안 되었다. 자연히 학생들은 교사로부터 개인지도를 받을 수 있는 좋은 여건에 있었다.
서재필은 예비과정의 문과에 속했다. 그러나 입학 당시는 예비과정 1학년이나 2학년에 들어갔을 것이지만 성적과 능력을 평가받고 월반하여 바로 4학년으로 진급한 것으로 보인다. 1888년 9월 6학년에 올라 그 다음해 6월 졸업을 했기 때문이다.
힐맨고등학교가 실시하던 교육방법은 서재필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일본의 호산육군학교보다 규율이 엄하지는 않았지만, 엄격하면서도 학생들의 존경을 받는 스코트 교장의 지도아래 수업내용은 충실하면서 방식은 민주적이었다. 교육은 교사의 일방적인 지도에 의하지 않고 학생들의 토론에 의해 진행되었다. 이 토론에 참여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여러 책을 섭렵하고 연구해야 하는 방식은 서재필에게 흥미를 주어 더욱 그를 학업에 정진하게 만들었다. 입학 후 2년이 되었을 1887년 6월 그는 우등생이 되었고, 수학과 희랍어·라틴어에 장려상을 받았다. 그리고 1888년 6월 학생회에서 개최한 연설회에서「가필드대통령에 대한 찬사」라는 제목으로 웅변한 것이 2등으로 뽑혀 10달러의 상금을 받기도 했다.
서재필은 정규과목 외에 실생활을 통하여 영어를 배우고 미국의 풍습도 익혔다. 웅변법은 각 학년을 통한 필수과목이었고, 교내 ‘리노니아(Lenonia)’라는 문학 및 써클을 통해서도 다양한 지식을 익혔다. 그가 훗날 배재학당에서 조직한 협성회는 아마 이 리노니아를 본떴을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스코트가족과 함께하는 가정생활은 서재필에게 많은 교육적 경험을 주었다. 교장 부인은 어머니와 가정교사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아 특히 언어소통이 불완전했던 첫해 동안 서재필의 숙제를 일일이 챙겨다 주었다. 더욱이 판사를 지내다 은퇴한 교장 장인을 통해 그는 미국의 정치·법제도·사고방식·민주주의의 원리 등을 익힐 수 있었다. 여기에 대해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는 퇴직 법관으로 주법원과 연방법원에서 오랫동안 법관으로 일한 분이었다. 그는 밤마다 입법과 법정에서의 자기 경험을 말해 주었는데, 미국 생활과 제도를 알기에 목마른 나에게는 유익하고도 견줄 데 없이 흥미있는 일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듣는 것이 정규학과에서 배우는 것보다 더 많다고 생각했다. 미국 학생들은 자기 부형들이나 나이든 친척들로부터 학과 이외의 여러 가지 훈련과 교육을 받지만, 천애일각의 고독한 신세였던 나에게는 그만한 연령, 그만한 경험의 인물과 그다지도 친밀한 관계를 가진 것이 참으로 희귀한 기회였던 것이다.(『동아일보』, 1935. 1. 3. 「체미오십년」)

서재필이 해리 힐맨아카데미에서 받은 교육은 그의 인격 및 사상형성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서당에서 받은 교육, 그리고 일본에서의 군사교육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이 학교에서 받은 3년간의 체계적인 교육이 무엇보다 더 크게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훗날 서재필이 귀국하여 『독립신문』발행과 독립협회 활동을 하면서 국민을 교화하고 계몽하는 데 크게 사용했던 서양의 사고방식들은 거의 다 이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생각된다.
워낙 명철한 두뇌에다 한국과 일본에서의 교육, 그리고 윌크스바레에서의 좋은 환경에 힘입어 서재필은 힐맨 아카데미에 입학한지 3년만인 1889년 6월 졸업했다. 졸업할 때 졸업생 대표로 고별연설자로 선발되었는데, 이는 아마 학교 성적이 좋았을 뿐 아니라, 인품도 다른 학생들의 모범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서재필은 졸업하기 1년 전인 1888년 6월 19일 자신의 이름을 필립 제이슨(Pilip Jaison)으로 고치고 미국시민증을 받음으로써 미국으로 귀화했다.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은 서재필이란 이름을 거꾸로 하여 ‘필재서’로 하고 이것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었다. 한국인으로는 최초의 미국귀화인이 되었다.
사실 서재필은 고등학교에 들어갈 때부터 홀렌백과 스코트 교장으로부터 귀화 권유를 받았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에 투신할 만큼 애국심이 뛰어난 젊은 서재필에게 미국귀화란 쉽게 결정한 문제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귀화를 조선에 대한 배신행위로 생각했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바뀌어 갔다. 그는 미국시민권 획득 조치가 ‘비애국적’인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그의 동기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그것을 획득하는 자신의 동기가 출세를 위한 것이라면 비애국적인 것이요, 오히려 그것이 조선을 위한 것이라면 시민권을 획득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에 눌러 살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홀렌백이나 스코트가 생각했던 것처럼 선교사가 되어 조국에 돌아간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때 서재필의 구상은 언제고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해서 조선 국민을 위해 일할 때가 오리라 보고, 그는 미국에서 정치학이나 법학을 공부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느꼈다. 무엇보다 민권사상을 제대로 조선에 전파하려면 이를 다루는 정치학이나 법학이 가장 적합할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조선 내 보수층의 반발을 대비해야 하는데 이럴 때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것은 미국시민권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미국시민권 획득은 조국에서 정치지도자로 활동하거나, 독립운동의 지도자로 활약하는 데 결격사유를 만들어 줌으로써 보다 큰 정치인으로서 성장하는 데 장애요인이 되었다. 그가 귀국하여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운영하던 때 미국시민권은 그의 활동과 생명을 보장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서재필이 3·1운동(1919) 이후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할 때 독립운동계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부터 포기한 것과 해방 후 귀국하여 정치지도자로서의 길을 권유받았으나 이를 물리친 사실은 그의 미국시민권이 한국을 위한 활동에 장애물로 작용하였다.

3. 공무원시절과 의사로의 진출

25세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서재필은 곧이어 대학입학시험에 합격해 이스튼시에 있는 라파예트대학으로부터 입학허가서를 받았다. 희망하는 전공분야는 법학이었다. 그는 법학공부가 미국에서의 취직문제나 한국에 나갈 경우 민주주의의 활동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러나 입학 후 그의 지원을 아끼지 않던 홀렌백으로부터 받은 조건은 서재필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홀렌백은 자신의 사무실에 서재필을 불러, “네가 라파예트대학을 마친 후 프린스튼에서 신학을 공부해 목사가 되겠다는 약속을 한다면 이후 7년 동안의 학비를 지원하겠으니, 이 사항을 서면으로 약속하라.” 하면서 이 일은 자선사업이 아니라 하나의 거래라고 했다.
서재필은 고민에 빠졌다. 법률을 배워 미국에서 정치방면이나 변호사가 되어 활동하는 한편, 조선을 독립시키고 지도하는 일에 힘을 다해보고 싶은 자신의 꿈이 홀렌백의 제의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자신의 일생을 좌우할 심각한 기로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서재필은 자신의 소신대로 밀고 나갔다. 그는 홀렌백에게 호의는 고맙지만 서면 약속은 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이유를 첫째는 조선정부가 나를 역적으로 몰았기 때문에 귀국한다면 그 즉시 교수형에 처할 것이고, 둘째는 하나님을 믿고 일생동안 기독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은 보장할 수 있으나, 현재 하나님으로부터 선교사가 되라는 소명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은 은인에게 단호히 거절하는 말을 한다는 것은 서재필에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신의 양심을 은인 앞에 속인다는 것이 더 큰 죄를 범하는 것으로 생각한 그에게, 이런 태도는 오히려 평소 가진 그의 진솔한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재필의 정중한 거절에 실망한 홀렌백은 더 이상 재정지원을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서재필은 그동안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한다고 말하고 그의 사무실에 나왔다. 홀렌백은 착잡한 마음으로 일어서는 서재필에게 20달러를 쥐어주었다.
이제 서재필은 대학진학도 생활도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했다. 고학을 통해 대학을 다니려 했으나 학비를 댈만한 마땅한 직업을 가질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라파예트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근심에 쌓인 서재필에게 도움의 손길을 준 사람은 항상 자신의 생활에 많은 관심을 가져준 스코트 교장이었다. 서재필은 스코트 교장을 통해 워싱턴에 있는 데이비스라는 사람을 소개받았다. 데이비스는 워싱턴의 스미소니안박물관에 근무하는 오티스에게 보내는 소개장과 클리블랜드 미국 대통령의 개인비서로 있던 헨들리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각각 써 주었다.
서재필은 이 소개장을 들고 워싱턴으로 향했다. 그는 스미소니안박물관에 있는 오티스를 만나 가지고 온 소개장을 보여주었다. 오티스는 박물관 직원은 모두 국회가 임명하기 때문에 국회의 허락 없이는 채용할 수 없다고 말한 뒤, 만약 서재필이 동양에서 온 많은 예술품을 설명할 수 있다면 시간제로 고용하겠다고 했다. 서재필은 기꺼이 이 제의를 받아들이고, 박물관에서 중국·일본·조선 등지에서 온 칼·쇠붙이·각종 골동품 등을 감정하면서 한 달 동안을 일했다.
그러는 동안 서재필은 백악관으로 헨들리를 찾아가 데이비스의 소개장을 내보였다. 여기서 그는 솔직하게 직장 알선을 받기 위해 클리블랜드 대통령과 면담하고 싶다고 말하자, 헨들리는 놀라면서 “젊은이여, 미국 대통령이 직업소개소를 하고 있지는 않소.”라고 말하고는 모든 공무원은 새로운 정부공무원법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공무원 지망자는 모두 공무원 자격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나서 미국공무원 자격심사위원장인 오브라이언에게 소개장을 써주었다. 즉시 오브라이언을 찾아가자 그는 서재필에게 일주일 이내로 다시 와서 시험을 보라고 하면서 그동안에 미국시민증과 그의 품행이 단정하다는 것을 보증하는 두세 사람의 미국 시민으로부터 추천서를 제출하라고 말했다.
마침내 서재필은 20여 명의 다른 응시자들과 함께 시험을 보았다. 수험 번호는 3번이었다. 시험결과를 알기 위해 일주일 후 오브라이언을 찾아갔더니 그는 유감스럽게도 서재필이 시험에 불합격했다는 것이다. 시험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 서재필은 자신의 불합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자, 오브라이언은 수석시험관 웹스터를 불렀다. 이들과 함께 서재필의 답안지를 조사해 본 결과 답안지 중 처음 두 장은 수험번호 3번이 적혀있었지만, 나머지 열다섯 장에는 모두가 2번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행정 사무상의 착오였다. 실제로 서재필이 받은 점수는 97점으로 합격점수 75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서재필은 공무원 임명통고를 받을 때까지 대기하라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갔다.
두 주일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답답해진 서재필은 다시 오브라이언을 찾아가 임명장을 받을 가능성을 문의했다. 여기서 그는 공무원의 정원은 한정되어 있었는데 신입 공무원이 임명되려면 결원이 생겨야만 한다는 말을 전해 듣자, 다시 스미소니안박물관의 오티스를 찾아갔다. 오티스에게는 미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 관장으로 있던 빌링스 박사라는 절친한 친구가 있었다. 이 도서관은 스미소니안박물관에서 불과 한 블록쯤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거의 매일같이 두 사람은 점심을 같이 먹곤 했었다. 그래서 하루는 오티스가 빌링스를 만나 혹시 정부부처 가운데 중국과 일본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을 쓸 만한 부처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빌링스는 그러한 사람을 자기가 찾고 있던 중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자기가 책임맡고 있는 도서관에는 동양으로부터 수천 권의 의학관련 서적과 잡지가 있는데, 이 글을 아는 사람이 없어 분류조차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오티스는 적임자가 있으니 빌링스가 육군장관에게 번역관이 필요하다고 요청하라고 일러주었다.
며칠 후 서재필은 미국 특별공무원자격 심사위원장 사무실에서 일본어와 중국어에 대한 특별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은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요한복음 15장과 누가복음 15장의 성경말씀 몇 구절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재필이 과거 샌프란시스코에서 영어를 배울 때부터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한 구절들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전혀 없이 만점을 받고 시험에 통과했다. 마침내 일주일만에 서재필은 의무감실로부터 사서로 임용되어, 미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Army Surgeon General Library)에 출근하라는 통지서를 받았다. 한국인 최초의 미공무원 임명이었다.
이러한 안정된 직업을 얻기까지 서재필의 노력은 홀렌백과 헤어진 후 스스로 생존을 책임져야 한다는 절박함에서 나온 끈질긴 집념의 결과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로 생각했다. 조선에서 과거시험을 위해 한문을 배우고, 일본에서 유학생의 한 사람으로 일본어를 배울 때, 이것이 미국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과정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그가 충실히 영어를 공부한 것은 호구지책을 위한 것이었으며, 생전 알지 못하던 사람들의 소개를 통해 결국 월봉 100불이나 받는 미국정부 공무원이 된 것은 반드시 자신의 힘에 의한 것이었기 보다, 그의 형편을 불쌍히 여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취직 후 처음 서재필은 동양의학서들의 저자와 제목을 번역하는 일을 맡다가, 후에는 중요한 의학서적들의 요점을 발췌하여 영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았다. 이러는 동안 의학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게 되었고, 이제 돈 걱정이 없어지자 공무원생활을 해나가면서 학업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심했다.
서재필에게 의학공부를 하도록 영향을 끼친 사람은 자신의 상관이자 도서관 관장이던 빌링스였다. 그는 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을 설립하고 이를 세계 최대 의학도서관으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사람이었다. 서재필은 의학자로서 학식이 높고 친절한 빌링스를 존경하였다. 그런데 그가 의학공부를 권유하고 자신 역시 매일 의학서적을 읽게 되면서, 서재필은 원래 정치학이나 법학을 공부할 계획을 변경하여 의학공부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다.
서재필은 1889년 가을 공무원신분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는 컬럼비안 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전신) 야간학부인 코코런 과학학교에 입학했다. 1년 동안의 정규 대학 과정을 밟은 뒤 1890년 가을 학기부터는 같은 대학의 의학부에 입학하여 의사로의 첫 길을 밟았다.
서재필의 대학진학에 가장 기뻐해 준 사람은 빌링스였다. 그는 도서관 근무시간을 서재필의 편의에 맞추어 조정해 주었을 뿐 아니라 도서관 전체를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 서재필은 이러한 호의에 힘입어 공부에 전념해 1년 후 의학부 입학자격을 얻었다. 마침내 1892년 3월 소정의 과정을 마치고 그는 한국인 최초의 의학사(M.D)를 받아 의사가 되었다. 머리가 명석하고 자립심이 강했던 데다 새로운 학문을 배우는 즐거움과 주위의 많은 도움이 그를 빠르게 성장시켰던 것이다.
서재필은 컬럼비안대학 의학부를 마친 후에도 미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에서 번역담당 사서로 계속 일하면서, 1년 동안 가필드병원에서 수련의 과정을 끝냈다. 수련의 과정을 마칠 1893년 여름경 서재필은 미육군 군의참모부 의학연구소로 배치됐다. 이 일은 빌링스가 세균학 권위자로 1893년 5월 미육군 의무총감에 임명된 스턴버그에게 서재필을 소개하자, 스턴버그가 미육군 군의참모부 의학연구소 소장 월트 리드에게 서재필을 조교로 쓰도록 주선하면서 이루어졌다. 병리학과 세균학에 탁월한 업적을 갖고 있던 월트 리드는 빌링스와 스턴버그에게 발탁되어 의학연구소 소장 외에 빌링스의 후임으로 의학도서관 관장으로도 활동한 능력있는 의학자였다.
서재필은 리드의 지도아래 당시 신학문이던 병리학·생화학·세균학 등을 배웠고, 그의 조언에 따라 6개월 동안 주말마다 존스 홉킨스대학 월리암 웰치 교수의 강의를 들으려 볼티모어에 갔다. 만약 그가 개업하지 않고 리드와 함께 연구생활을 계속했다면 병리학 분야에 세계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 만큼, 당시 서재필의 의학공부는 눈부신 발전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1894년 모교 교수였던 존슨의 권유로 공무원직을 사직하고 개업을 하였다. 존슨 박사는 국가공무원의 진급 기회가 현실적으로 극히 제한을 받고 있으니, 차라리 개업을 하라고 한 것이다. 그의 권유는 능력에 비해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제약을 받아야 하는 서재필의 처지를 헤아린 사려 깊은 배려였다.
이리하여 서재필은 워싱턴 시내에 병원 사무실을 얻어 병리전문병원을 개업했다. 병원 운영이 얼마나 잘 되었는지 확실치 않으나, 병리학이라는 분야가 미국에서 새로운 의학이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병원이 잘 운영되었다고는 볼 수 없었다. 서재필이 온갖 정성을 쏟아 환자 치료에 성의를 다 보였을 것이라는 예상되기에 점차 이 병원에 대한 명성이 올라갔다고 보여지나, 유색인 의사에 대한 차별 때문에 병원운영이 원만하게 운영되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한편 1894년은 서재필에게 잊을 수 없는 한 해였다. 이해 그는 병원을 개업하여 성공적인 장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을 뿐 아니라, 시카고와 워싱턴 사회에 이름있는 명문가의 딸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서재필이 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나게 된 것은 병원을 개업한 후 숙식을 한 호텔에서 해결하던 때였다. 그때 이 호텔에는 제임스 화이트 부부와 부인의 전남편 사이서 태어난 뮤리엘 암스트롱이 함께 머물고 있었다. 암스트롱의 친아버지 조지 부캐넌 암스트롱(1822~1871)은 남북전쟁시 미국 최초로 철도우편사업을 창안한 군인이자 사업가였다.
호텔에서 두 사람은 자주 마주쳤고 대화를 나누면서 사랑이 싹텄다. 서재필은 암스트롱에 대해 예술과 세계문화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매력있고 민감한 소녀로 보았다. 암스트롱은 처음엔 수줍어했지만 서재필에 관해 무언가 신비롭고 매력적인 점을 느끼게 되었다. 서재필은 서로의 관심사를 나누고 사귈수록 그녀와 더 같이 있고 싶어 했다. 암스트롱은 박식했고 표현력이 솔직한 편이었으면서도 예모가 밝았다. 그런가 하면 그녀에게 서재필은 결코 불가사이한 존재만이 아니라 외모로나 지적으로 탁월한 인간이라고 느꼈다.
참고로 서재필과 뮤리엘 암스트롱의 외모에 대해선 1897년 11월 7일 한국에 가기 위해 제출한 여권신청서에 기재된 것에 따르면, 서재필은 키가 173cm로 퍽 크다고 할 수 있고, 이마는 넓고 높다고 했으며, 코는 약간 메부리코며, 얼굴은 둥글다고 되어 있다. 뮤리엘 암스트롱은 1871년 시카고에서 태어났고, 註3)키는 167.7cm로서 이마는 좁으며, 눈빛은 회색이고 코는 중코이며, 머리는 갈색이고 얼굴은 둥글다고 했다. 마침내 이들의 사랑은 1894년 6월 20일 결혼으로 맺어졌다. 결혼식은 워싱턴 카비넌트교회에서 200여 명의 축하객이 참석하는 가운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서재필의 결혼식 소식은 시카고와 워싱턴의 여러 신문지상에까지 보도되었다. 『워싱턴포스트』지의 한 기사는 “신랑 서재필의 학자로서의 명성은 워싱턴에서만 알려진 것이 아니다.”라고 하여, 그를 칭찬하였다.
서재필의 이번 결혼은 재혼에 해당된다. 이미 조선에 있을 때 그는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집안 어른들이 선택해 준 규수와 결혼한 바 있었다. 그러나 1884년 갑신정변으로 첫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자신 또한 이국땅에 남게 됨으로써 그동안 독신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뮤리엘 암스트롱을 만나면서 그가 선택한 결혼을 이루게 되었다.
이번 결혼은 서재필에게 고국을 떠난 지 10년 만에 느낀 행복감을 안겨 주었으리라 생각된다. 정변(갑신정변, 1884) 참여에 따른 가족몰살과 일본·미국으로의 망명, 막노동 시절과 주경야독하던 의과대학 시절 등을 거쳐오면서 겪어야 했던 온갖 어려움들이, 한순간에 씻어 내리는 계기가 이번 결혼을 통해 나타났으리라고 보여지는 것이다.
비록 단란한 신혼생활을 통해 정신적인 안정감을 회복했지만 서재필의 경제사정이 결혼이전보다 더 나아졌다고 할 수 없었다. 서재필의 경제사정은 당시 워싱턴 공사관에 근무하면서 서재필과 친하게 지내던 박용규가 1897년 10월 8일 윤치호에게 설명하고 있는 데서 잘 알게 된다. 서재필은 의사개업은 하였으나, 인종차별문제 때문에 수입이 적어 자기가 동정하여 서재필 부부를 공사관 건물 내에서 무료로 지내게 하였으며, 수개월 동안 이들 부부의 식비도 대 주었다는 것이다. 서재필은 그 후 서울에 돌아가 박용규에게 200불을 반환했다고 하는 것을 보아, 서재필부부의 경제사정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4장 한국귀국과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1. 한국 귀국과 초기활동

1) 귀국 배경

서재필이 온갖 어려움을 물리치고 새로운 인생길을 개척하고 있는 동안 한국의 정세는 급격히 변하고 있었다. 서재필이 참여했던 갑신정변(1884)을 물리친 수구파 세력과 청나라는 조선에서 한동안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으나 오래가지 않았다. 1894년 동학혁명(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면서 청·일(청국·일본) 양국이 이를 제압한다는 구실로 한국에 파병하였으나, 청·일(청국·일본)간의 세력다툼으로 전쟁이 발생하였다. 그 결과 일본이 청나라를 물리치고 동양의 강국으로 등장하는 한편, 한국을 그들의 세력권 하에 놓았다. 한국에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4년 7월 23일 군사적 위협과 강압수단을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은 민씨(명성황후) 정권을 몰아내고 새로운 정권을 수립했다. 그런 다음 내정개혁의 명분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는 등 갑오개혁(1894)을 실시하여 조선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자기들의 강압 하에 조선 정계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으나 약간의 시일이 경과되자 용이치 않음을 알게 되었다. 기존 정치세력의 반발을 상쇄시키는 동시에 내정개혁의 정당성을 밑받침해 줄 새로운 정치세력과 이들을 동조해 줄 만한 인물이 필요함을 느낀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은 갑신정변(1884)의 실패로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 박영효·서광범·서재필 등 개화파 인사들을 끌어들여 귀국시킴으로써, 자국의 의도와 기대에 부응하는 역할을 그들에게 담당시키려 했다.
이런 계획이 결정되자 일본은 즉각 행동을 개시했다. 일본정부가 일차적으로 귀국을 주선해 준 사람은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영효(1861~1939)였다. 1894년 7월 28일 일본 외무대신 육오종광(陸奧宗光, 무쓰)은 조선에 와 있는 대조규개(大鳥圭介, 오오도리) 공사에게 박영효의 본국 귀환에 대비하도록 지시했다. 이어서 그는 부산 영사대리 영롱구길(永瀧久吉, 에이다끼)에게 보낸 8월 4일자 전보문을 통해, 8월 6일 동경을 떠나 부산에 도착하게 될 박영효에게 필요한 지원을 해주라는 훈령을 내렸다. 박영효의 9년 8개월에 걸친 망명생활이 막을 내리게 된 셈이다.
일본정부는 박영효의 귀국조치와 함께 미국에 남아있는 서광범(1859~1897)과 서재필의 귀국을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요청하는 형식을 빌려 서둘렀다. 외무대신 무쓰(육오종광)는 미국주재 전권공사 율야신일랑(栗野愼一郞, 구리노)에게 훈령하여 서광범과 서재필의 귀국을 주선하고 여비도 대여하여 주도록 지시했다.
서광범은 당시 서재필과 함께 워싱턴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서재필과는 달리 이렇다 할 직업도 없고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 공사의 귀국 권고를 받자 이를 선뜻 받아들여 1894년 9월 15일 미국을 떠나 일본으로 간 다음, 12월 9일자로 갑신정변(1884)의 반역죄가 사면되는 것을 보고 12월 13일 마침내 귀국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어렵게 의사가 되어 개업을 한 뒤 결혼까지 하면서 미국생활의 기반을 다지는 데 분주했기 때문에 일본 측의 권고를 도무지 실감있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는 구리노(율야신일랑) 공사가 무쓰(육오종광)에게 보낸 1894년 9월 8일자의 기밀문서에서도 나타난다.

서재필은 당지에서 의술개업 면허를 얻고 Dr. Philip Jaisohn이라 칭하면서 개업하고 있는바, 특히 동인의 처는 미국인이어서 차제에 아무리 권고하여 보아도 도저히 귀국할 가망이 없음.(『일본외교문서』 제27권 제1책, 555쪽)

이와 별도로 서재필이 일본 측의 권고를 거부한 데는 갑신정변(1884) 직후 당한 일본으로부터의 배신감 또한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한 때 조선의 개화를 위해 일본에 의존한 일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조선의 자주 독립을 위한 수단이었지 결코 일본의 조선지배나 간섭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이런 의도와 달리 일본 측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서재필을 친일 인사로 분류하여 자기네 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 실패 후 미국 망명길에 오르면서 일본이 신의 없는 나라라는 강한 인상 때문에 서재필의 마음속에는 그들의 권고를 무모하게 믿고 받아들일 수 없었다.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귀국 종용과 함께 일본 측은 갑신정변(1884)의 결과 받은 역적의 죄를 사면해 줄 것을 조선정부에 요청했다. 처음 조선정부는 여러 가지 구실을 붙여 거절했으나, 일본정부의 집요한 요청에 따라 마침내 1894년 12월 9일 대역의 죄를 사면해 주었다. 이로써 망명 개화파 인사들의 귀국 장애물이 사라졌다. 이와 함께 서재필이 귀국할 의사가 없다고 확인한 일본정부는 박영효와 서광범을 조선정부에 등용해 줄 것을 요청하여 12월 17일 박영효를 내무대신에, 서광범을 법부대신에 임명토록 했다. 이른바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이 수립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갑오개혁(1894)이 진척됨에 따라 서재필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국내 정치적 여건은 한층 성숙되어 갔다. 서재필은 주미일본공사의 권고를 거절하였으나 이를 계기로 한국정계의 추이에 관심을 가지고 관망하였다. 이제는 역적의 죄명이 씻어지고 떳떳이 고국에 돌아갈 수 있었으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1894년 5월 군부대신 조희연의 진퇴문제로 총리대신 김홍집이 사임하고 학부대신 박정양이 총리대신으로 취임하면서 인사이동이 단행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서재필은 그해 6월 2일자로 외부협판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서재필과 함께 정부를 운영하기를 바랐던 박영효와 서광범의 집념이 있은 것으로 이해된다.
당시 조선 내각은 두 파로 갈라져 있었고, 이 두 파는 사사건건 의견이 대립되어 혼란을 빚고 있었다. 한 파는 전총리대신 김홍집을 중심으로 외부대신 김윤식, 탁지부대신 어윤중, 내부협판 유길준이 가담하고 있었다. 또 한 파는 내부대신 박영효와 법부대신 서광범 등 해외망명파였다. 그밖에 농상공부대신 김가진, 탁지부협판 안경수 등이 속해 있는 소위 중도파도 있었으나 위 두 파가 사실상 정권을 좌우하였다. 서재필을 끌어들이려 한 파는 갑신정변(1884) 때의 동지들인 해외망명파였다.
조선정부가 직접 그에게 관직을 내리는 형식으로 귀국을 종용했으나 서재필은 이를 거절했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여러 해 동안의 뼈를 깎는 고생 끝에 겨우 마련한 의사로서의 미국생활 설계를 하루아침에 포기하기란 어려운 심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두 차례에 걸친 고국정부의 요청을 계기로 “조선병에 걸려 마음이 들떠 있었다.”라고 후에 회상할 정도로 마음은 항상 조국에 가 있었다. 언젠가 고국으로 돌아가 국민에게 봉사하고 싶다는 자신의 염원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정계에 또다시 변동이 일어났다. 1895년 7월 6일 내부대신 박영효가 쫓겨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국가에 대한 반역음모에 가담했다는 죄로 체포령이 내려져 해외로 다시 망명을 해야 했다. 박영효는 일본 측의 알선으로 귀국했으나, 그들의 의도와는 달리 옛날의 정적이던 민비(명성황후)와도 결탁하는 한편, 노골적인 반일정책도 추진하여 일본 측과도 사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거기에 김홍집과의 불화, 친러파의 책동 등이 겹쳐 사건이 일어났던 것이다. 박영효가 쫓겨 가자 서재필의 외부협판직도 7월 11일자로 자동 면직되었다.
이 무렵 서재필은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 한국공사관 건물 내에 무료로 방을 빌려 의사활동을 했다. 원래 그는 독립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아저씨뻘인 서광범이 땀 흘려 일하지 않는 것을 보고 같이 워싱턴 시내에 있었지만 그를 만나는 것을 꺼려했고 윤치호가 에모리대학에서 수학한 뒤 워싱턴에서 서재필을 만났을 때 냉담하게 대한 것도 자기에게 의지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그러했을 정도였다. 이처럼 독립심이 강했던 그가 공사관의 방을 빌려 산다는 것은 어려운 경제적 이유도 있었겠지만, 그가 본국 정부의 외무협판으로 임명된 관계로 공사관 직원들의 권유가 있었던 점과, 점점 커져가는 한국에 대한 관심이 보다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뜻밖에 1895년 가을 박영효가 워싱턴에 나타났다. 국가에 대한 반역음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체포령이 내려 망명길에 오른 박영효는 일본을 거쳐 도미하였던 것이다. 오랜만에 이루어진 동지들 사이에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것이다. 이들의 접촉기간은 당시 『한성신보』 1895년 10월 1일자의 기사와 10월 25일자 기사를 미루어 보면, 아마 9월 하순부터 10월 하순까지 적어도 한 달은 넘은 것 같다.
박영효와 더불어 한 달이 넘도록 함께 기거하면서 그동안 쌓이고 쌓인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서재필은 비로소 자기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고국의 현실을 보다 실감있게 인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 소식에 오랫동안 굶주렸던 서재필에게 들려온 소식이란 가슴 아픈 일 뿐이었다. 조선은 망해가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나라를 구하려 드는 자가 없었다. 국왕과 왕비는 왕권보전에만 급급했고, 정치인은 국민을 희생시켜 사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관직을 얻는 데만 열중했으며, 국민은 조국을 등지고 망명할 당시와 똑같이 무관심했다. 설상가상 망해가는 조국을 구해보려는 몇몇 지사들의 노력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일본이나 러시아에 의해 저지당함으로써, 실망과 좌절의 연속이었다.
고국의 현실에 눈뜬 서재필에게 박영효는 귀국을 종용했다. 박영효는 국제적 미아상태를 시급히 청산하기 위해서는 서재필의 귀국이 자신의 정치적 재기에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는 계산을 했을지 모른다. 한편 서재필도 당초의 기대와는 달리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의사생활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탈출구를 찾아야 할 처지에서 고국산천이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고, 또 자신의 역할을 필요로 하는 고국에서 적극적으로 자아를 실현해 보고자 하는 욕구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에게 본국 사정을 듣게 되자 나는 즉각적으로 국가를 위해 큰 일을 하여볼 좋은 기회가 닥쳐왔다고 깨달았다.”고 회고하는 것을 보면,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때라는 사명감이 더 컸었음을 보여준다.
그의 의식 속에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마음 깊이 그리던 자유와 독립의 이상을 실천하려던 의지가 새롭게 타올랐다.
한편 국내 김홍집내각의 외부(外部)는 서재필이 귀국할 의사를 확인하자, 1895년 11월 9일자로 그를 주차미국공사관 3등참사관에 임명했다. 워싱턴의 주미한국공사관에서는 박용규가 박영효의 도움을 받아 서재필의 귀국을 도왔다. 마침내 11월 10일 워싱턴을 출발하여 12월 26일 고국을 등진지 11년 만에 돌아왔다.

2) 신문간행계획

서재필이 귀국할 당시 조선 정계는 매우 혼미했다. 1895년 10월 8일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이 발생하여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이완용·이윤용·이하영·이채연·민상호·현흥택 등은 미국공사관에 피신하였고, 이범진·이학균은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하였다. 이러는 사이 11월 28일에는 국왕을 궁성 밖으로 옮겨 친일정권을 타도하려던 반혁명운동, 소위 춘생문사건이 발생하였다. 일본 측은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 1895)으로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때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이용해 미국 선교사들의 춘생문사건 관련설을 흘렸다. 이 때문에 미국인과 일본인들 사이에 반목의 골을 깊게 만들었다. 친일내각에서 쫓겨나 피신해 다니는 구미(유럽·미국)파 관리들의 수는 점점 늘어갔다.
그러나 표면상 친일세력이 주축을 이룬 당시 김홍집내각은 오히려 춘생문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일본 측의 처벌요구에 지극히 미온적이었으며, 새로 내부대신의 중책을 맡은 유길준도 조심스럽게 이들 피신 인사들의 신변보호를 강구해 주는 형편이었다.
이러한 때 서재필은 부인과 함께 조용히 귀국했다. 그리고 조용한 한 여관방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인천에서 서울로 오는 동안 잠시 볼 수 있었던 고국의 상태가 망명하기 전보다 별로 나아지지 않은 데에 가슴 아파 했다.
다음날 아침 그는 유길준에게 연락하여 자신의 방에서 감격적인 상봉을 했다. 서재필과 유길준은 갑신정변(1884) 이전에 김옥균·박영효 등과 비밀리 절간에서 만나, 이동인이 일본에서 가져온 서양 세계에 관한 책들을 읽고 그의 이야기를 듣던 시절부터 알게 된 사이였다. 유길준은 한국인 최초의 일본유학생이었으며, 그 후 미국에 파견되었던 최초의 조선사절단원이었으며, 1883년 당시 미국에서 사절임무를 마친 후 귀국하지 않고 계속 남아 공부를 한 최초의 미국유학생이기도 했다.
서재필은 유길준을 통해 국내외 흐름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먼저 그동안 일어났던 국내 정세의 변화와 조선을 둘러싼 일본과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해 익히 알게 되었다. 또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이 반정부 활동을 하는 정치인의 피신처가 되고 있다는 것과, 이 때문에 미공사관 직원이 불신을 받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개혁 정책과 경제발전정책을 강력히 추구할 수 있는 평온과 안정이 필요한 때라는 유길준의 말에 그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어서 유길준은 서재필에게 정부 내에서 함께 일할 것을 권유하였다. 유길준은 서재필을 입각시켜 현내각의 위신을 제고시키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국내 정계동향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에게 확답을 주지 못한 것 같다. 좀 더 세부적인 정세분석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인가 정부와 민중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은 강하게 일고 있었다.
이후 서재필은 아펜젤러 목사의 요청으로 그의 집에 잠시 머물러 있으면서, 정동에 있는 미국선교사들과 구미(유럽·미국)외교관, 그리고 피신중인 윤치호 등 정동구락부 인사들과 접촉하였고, 또 한편으로는 김홍집내각의 여러 진보적 인사들과 관계를 맺어 나갔다. 여기서 그는 권력 내부에 들어가 국내 수구파로부터 만일의 위해(危害)를 당하는 것보다, 권력 외부에 안전하게 남은 채 정부와 민중을 계몽하는 사업을 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이 같은 신중한 판단은 그가 갑신정변(1884)을 회고하면서 쓴『동아일보』1935년 1월 2일자「회고 갑신정변」에서도 잘 나타난다.

무엇보다 제일 큰 갑신정변(1884) 실패의 원인은 그 계획에 까닭도 모르고 반대하는 일반 민중의 무지몰각이었다.…동서양을 막론하고 민중의 조직과 훈련이 있는 후원 없이 다만 몇 개인의 선구자만으로 소원 성취된 혁명은 없는 것이다.

갑신정변(1884)의 급진적인 개화운동으로 인한 쓰라린 실패경험이 그를 신중하게 처신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서재필은 점진적이고 온건한 개혁활동으로 근대적인 계몽활동에 주력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그의 거처는 주미공사로 발령받고 미국으로 떠난 서광범의 집으로 옮겨졌다.
서재필은 서울에 돌아온 지 10여 일이 지난 1896년 1월 8일 오후 2시 오늘날 청와대 앞뜰인 궁성의 신무문 밖에서 거행된 관병식에 참석했다. 그가 귀국 후 공식석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날이었다. 이날 그는 국왕 어전에 불려가 외국사신의 통역을 맡았는데 이를 계기로 특별히 고종의 부르심을 받았다. 서재필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그동안 지내온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기회를 만듦으로써 고종이 과거 역적으로만 알았던 서재필에 대해 호의적인 태도를 갖게 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이와 같은 기회를 얻게 된 데는 유길준의 알선과 노력에 의해서였다. 당시 일본 측은 처음 그의 귀국을 시도하는 때와 달리, 서재필을 현 친일내각의 반대세력인 정동파에 준하는 미국파 또는 ‘미국인의 괴뢰’로 부각시킴으로써, 파쟁을 불러일으키거나 은연 중 압력을 가하려고 급급하고 있었다. 반면 김홍집내각은 유길준을 중심으로 정동파와의 화해와 제휴의 길을 암중모색하고 있었다. 이들은 일본 일변도의 의존관계를 지양하고 구미(유럽·미국) 여러 나라들과 다양한 협조관계를 이룩하여 대외적 취약성을 극복하려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개화정책의 내용과 명분을 보강시켜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이를 구미(유럽·미국)사정에 정통한 서재필에게서 찾았다. 이 때문에 유길준은 서재필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각부 대신과 고관들, 그리고 각국 외교사절들과 무관들이 배석하는 국왕의 관병식에 초청했던 것이다.
유길준의 이러한 노력은 서재필의 공개강연회 주선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서재필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점차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바를 구체화 시키려 했다. 그의 구상은 우선 신문을 발간하려는 계획이었다. 당시 그의 근황을 보도한 『한성신보』 1월 20일자 기사를 보면, 서재필은 귀국계획으로 우선 국·영문의 신문을 발간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다.

서재필 씨는 근자에 서양으로부터 귀국하였기 때문에 감개무량함을 참지 못하는 점이 많아,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워야 되겠다고 하는 중에, 우선 제일착으로 영·한문의 신문을 발간할 생각이라고. 목적은 사회개량의 지도에 두고 또한 조선의 현상을 서양 각국에 알려야 되겠다고도 한다.(『한성신보』, 1896. 1. 20)

유길준은 관병식 참석 문제로 서재필과 접촉할 시기 그의 국내활동을 위해 20년 계약의 중추원고문직을 제의했으나, 서재필은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러다 양자간에 민중계몽과 정부사업에 필요한 국·영문 신문의 발간계획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인식이 구체적으로 합의되자, 서재필은 10년 계약의 중추원고문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서재필이 처음에 거절했던 중추원고문직을 수락한 것은 김홍집내각의 신문발간계획과 자신의 계획이 일치되었기 때문이었다. 특별히 유길준은 1883년 이미 박영효와 함께 『한성순보』 창간준비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고, 구주 여러 나라의 견문을 통해 누구보다 신문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런 유길준의 생각에서 볼 때 김홍집 내각의 신문창간은 절실히 필요한 사업이었는데, 이 구상을 서재필에게 알림으로써 그의 동의를 받아낼 수 있었다.
이를 볼 때 서재필의 신문발간 구상은 그를 끌어들이기 위한 당시 김홍집내각의 진보적인 여러 인사들로부터 사전에 시사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서재필 또한 내각 입각보다 민중계몽적인 사업에 뛰어들기를 원하고 있은 마당에, 신문발간 계획이 구체화되면서 유길준과 합의하게 되고, 곧 이어 김홍집내각이 이 사업을 지원하기 위해 중추원고문직에 임명하자 이를 받아들이게 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추원고문직은 서재필에게 큰 특전이었다. 중추원고문직은 거의 유명무실한 한직이었는데, 그에게 월봉 300원의 거액을 지불하면서 그것도 향후 10년간 재직하도록 조처한 것은 신문발간을 위해 서재필의 자유로운 국내활동을 보장하기 위함으로 보여진다. 서재필 자신도 비록 실권은 없지만 많은 급여를 받으면서 정부로부터 자기가 하고 싶은 신문간행을 지원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서재필이 중추원고문직을 수락함과 동시에 정부의 재정적 지원을 약속 받고 신문간행에 손을 대게 된 때는, 대략 1월 19일경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윤치호의 1월 15일자 일기에 20년 계약의 고문직 제의를 서재필이 거절했었다고 언급하고 있으나, 『한성신보』 1896년 1월 20일자에 그가 중추원고문으로 임명되었다는 것과 함께 국·영문의 신문을 발간하기로 했다는 기사가 보도되고 있기 때문이다.
서재필과 유길준 사이 신문창간이 완전히 합의되었으나 이때에는 아직 신문 제목을 『독립신문』으로 정하지 않았고, 오직 국·영문판을 동시에 창간하며, 창간 예정일을 3월 1일로 하되, 그 안에 모든 준비를 완료하려고 했다. 따라서 신문 간행을 결정한 뒤 서재필은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그는 순검이 끄는 인력거를 타고 매일 같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이처럼 서재필이 준비에 분망하고 있을 때 갑자기 난관에 부딪히게 되었다. 일본 측으로부터 강경한 반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서재필의 신문간행 계획은 당시 일본 측에게 비상한 충격을 주었던 것 같다. 신문간행에 가장 반대한 사람은 일본공사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 고무라)이었다. 그는 서재필의 신문창간이 한국과 한국인들의 이익을 대변하게 될 것과, 당시 유일한 일본인 신문으로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던 『한성신보』와 경쟁하게 될 것을 예상하고 극력 반대했다.
여기에 대해 서재필은 「체미오십년」에서 회고하기를 ‘일본공사 고무라(小村壽太郞)는 나와 면회하여 한국은 미국과 사정이 다르고 민도가 뒤떨어진 나라이니, 미국사상인 민권주의사상, 즉 데모크라시를 전파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문을 창간 할 경우 그냥 두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하였다.
이러한 반대가 일어난 때는 신문을 간행키로 결정한 지 10일 뒤인 1월 31일 경이었다. 이날 오후 서재필은 윤치호를 불러 신문간행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을 말했다.

일본인들이 이것을 그대로 두지 않을 것 같다. 그들은 한국이 두 개의 신문을 가질 만큼 발전되어 있지 않는 한, 그리고 그들의 『한성신보』가 존재하는 한, 그와 경쟁적인 어떠한 신문창간의 기도도 이를 단연코 분쇄하여 버릴 것이라고 말하였다. 일본의 의사에 반대하는 어떠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암살해 버리겠다고 그들은 강력하게 암시했다. 그들은 나를 독약처럼 미워한다. 내가 며칠 전 한국 상인들에게 석유를 일본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부터 직접 수입하는 것이 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소비자자의 이익이 된다고 역설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나는 혼자이다. 미국정부는 나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다. 한국정부나 민중들은 일본의 암살로부터 나를 보호할 수도 없고 하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보호받지 못한 채 혼자이다. 나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다.(『윤치호일기』 1896년 1월 31일조)

요컨대 일본 측은 한국이 두 신문을 간행할 만큼 발전되어 있지 못하므로 그들이 간행하는 『한성신보』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구실을 내세우고 반대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본 측의 의사에 반대되는 일을 하는 자는 누구든 암살해 버릴 계획을 갖고 있다는 점, 또 그들은 서재필을 독약처럼 미워하기 때문에 자기 신변은 매우 위험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 등이다. 이 일로 서재필은 미국으로 돌아갈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또한 일본 측은 유길준을 위협하여 신문창간의 중지를 요청했다. 이 때문에 유길준과 고무라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유길준은 서재필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신문간행을 승인하고 정부에서 보조금까지 주겠다고 확약했는데, 이처럼 일본으로부터 반대를 받게 되자 크게 당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일본의 세력의 영향 하에 있었던 유길준은 결국 일본의 위협과 항의에 굴복하여, 타협책으로 새 신문을 『한성신보』와 합작하여 간행하려는 생각으로 후퇴하려 했다.
당시 『한성신보』는 일본외무성에서 자금을 받아 운영하는 일본인 경영의 신문이었다. 1895년 2월 16일 창간된 이 신문은 1면과 2면은 순 한글로 3면과 4면은 일어로 간행되고, 신문의 내용은 매우 편파적이어서 일본의 입장을 두둔하고 정당화하는 데 앞장선 친일신문이었다. 민비시해사건(을미사변, 1895)의 경우 이 신문은 완전히 은폐하는 기사로 메꾸어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외국인들의 분노를 자아내기까지 했다. 따라서 유길준이 이러한 신문과 합작하겠다는 것은 조선 민중을 우롱하는 처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고무라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신문간행을 허락한 유길준을 내부대신직에 쫓아내려고 기도하는 한편, 서재필을 한국에서 추방하려는 공작까지 펴 신문간행은 거의 가망없게 만들었다. 이로 볼 때 일본 측이 새 신문의 발간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고 반대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얼마동안 서재필로서는 난망한 시기였다. 그런데 바로 며칠 후 1896년 2월 11일 아관파천(1896)이 일어나 일본의 내정간섭과 영향력이 갑자기 배제됨으로써 사태는 급전하였다. 국왕이 궁성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게 되면서, 친일내각은 무너지고 박정양내각이 새로 세워지게 된 것이다. 총리대신 김홍집, 탁지부대신 어윤중, 농상공부대신 정병하는 피살되고, 유길준은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자연히 일본의 압력은 없어지고 서재필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아관파천(1896) 후 서재필은 옛날 건양협회의 잔여 세력과 정동구락부 세력의 도움으로 신문창간에 더욱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되었다. 아관파천(1896)을 단행한 세력은 이범진·이윤용 등 친러파였지만, 그에 동조한 정동파 사람들 속에는 서재필을 지원해 주는 민영환·이완용·윤치호·이상재·이채연 등과 건양협회 세력으로 박정양·안경수·한규설·김가진·김종한 등이 신정부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그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서재필은 『독립신문』 창간작업에 분주할 즈음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발간되던 『Korean Repository』1896년 3월호에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한 바가 있다. 여기서 그는 10여 년간 해외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나라의 형편이 예전보다 더 악화되어 있고, 국민은 더욱 절망상태에 있다고 말한 뒤, 교육 즉, 정부와 민중에 대한 계몽을 누누이 강조하였다.

나는 이 글에서 정치를 논하려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나의 생각을 일반 민중에게 설명하려는 데 있다.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가 하고자 하는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이 있을 뿐이다.…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국가는 당장의 구호를 필요하고 있는 실정인데, 국민들에 대한 점진적인 교육이 오히려 긴급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라는 나의 주장에 대해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 구호사업도 아직 착수되어 있지도 않거니와, 또 구호사업을 벌인다 해도 거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어떻든 교육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이고 항구적인 자산이 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고 싶다.

이것은 곧 발간될 『독립신문』이 앞으로 정부와 민중을 상대로 한 계몽 사업에 진력하는 신문이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인 계몽활동에 대한 서재필의 생각은 신문발간계획에만 국한시킨 것이 아니라, 강연과 결사체의 결성 등 여러 방면으로도 확산시키려 했다.

3) 공개강연회 개최와 건양협회 결성추진

일정한 준비기간이 필요로 했던 신문발간 계획과 동시에 서재필은 한국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했다. 유길준의 각별한 호의와 주선으로 첫선을 보인 1월 19일 강연회 광경에 대해 『한성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다.

공개강연이라. 작일 오후 1시쯤부터 남별궁(현 을지로입구 전 국립도서관자리)에서 개설하니, 그 변사는 서재필 씨가 연설하니, 조선에서 공개하여 연설하기는 처음이라. 그 연설 방청자는 3~4백 명이나 있는데 그 청중 중에는 유길준·정병하·김가진 씨 등이더라. 유길준 씨가 청중에게 소개하되, 이번 연설은 그 요령만 연설하다가 차후 매일에 개설한다 하더라.(『한성신보』, 1896. 1. 20)

위 내용에서 볼 때 공개강연회는 먼저 유길준·정병하·김가진 등의 정부 측 인사들과 3~4백 명의 청중이 운집하여 성황을 이룬 사실과, 이 강연이 처음부터 매주 일요일마다 열리는 정기강연회로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두 번째 강연이 있은 1월 26일 강연회에는 일본 측의 위협이 노골화되어 강연회를 지속시킬 수 없었다. 이렇게 된 데는 조선의 정부와 민중을 위해 신문발간계획을 추진하려 했던 서재필이, 1월 26일 서울의 상인들을 규합하여 ‘한성상무회의소’를 발족시켜 석유직수입회사 설립안을 가결시키는 한편 건양협회 결성을 추진하려 함으로써, 일본 측의 기존 세력과 이익기반에 도전하는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일본 측은 1월 말에서 2월 초에 이르는 사이에 서재필의 정부 측 지원자인 유길준과 김가진의 퇴각을 기도하면서, 서재필의 추방공작도 추진하였다.
이처럼 서재필의 강연이 있은 이후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지만, 이번 공개강연이 사회에 던져준 인상과 영향은 의외로 컸었다. 3~4백 명의 청중이 장내를 가득 메울 정도로 성공적이었을 뿐 아니라, 이들의 집단적 각성을 일깨워 주었다는 점에서 강연의 성과를 주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서재필은 공개강연을 통해 국가의 자주적 자세 확립의 필요성과 민중의 존재의식 각성에 주력했다. 그는 민중이 피동적으로 움직이는 무기력한 백성의 위치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국가의 운명을 이끌어가는 역사의 주체자로서 역할하는 “자뢰(自賴)하는 백성”의 상을 제시함으로써 민중의 세력화를 암시했다. 이 때문에 서재필의 강연은 낮은 민도를 구실로 민권 사상의 보급을 극력 통제하려고 한 일본공사 고무라에게 질시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1월 25일경 그는 정기적으로 실시하기로 계획한 공개강연의 개시와 더불어 ‘사회개량과 풍속교정’의 목적 달성에 필요한 제반 활동을 지속적으로 주도할 조직체로 건양협회(建陽協會) 결성을 추진했다. 그는 새로 제기하는 일마다 주위의 호의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나, 그것을 이용하여 정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보다는 오히려 독자적인 활동영역을 구축하는 데 부심했다. 이것이 건양협회 결성 추진으로 나타난 것이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어느 일본기자의 통신보도를 보면 그의 근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문발간을 제기하면 찬성자가 즉시 나타나고, 홀로 연설회를 열어도 청중이 장내를 가득 메운다. 그러면서도 씨는 정계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하려 하지 않고 도리어 사회개량·풍속교정을 자기의 임무라고 선언하고, 그러한 목적하에 건양협회라는 것을 만들려고 한다.(『한수통신』 1896. 2. 3, 「서재필 씨의 주선」)

서재필의 건양협회 조직구상은 그동안 사회적 지지를 확보하지 못해 고심하던 개명관료들의 자주지향적 개화의욕과 부합하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건양협회의 구성세력은 온건개화파인 갑오개혁(1894) 집권관료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은 김홍집내각이 1896년 1월을 기해 국가의 대외적 자주를 표명하기 위해 사용한 ‘건양(建陽)’이라는 연호에서 이름을 따 건양협회를 결성하려 했다. 이들은 구미(유럽·미국)세력을 배경으로 한 정동구락부나 일본세력을 배경으로 한 조선협회와 달리 자주적인 결사체를 조직하려 했으며, 서재필은 이들 세력을 현재적 세력으로 결사화 하는데 노력했다. 즉 이를 통해 그는 장차 자신의 개혁의지에 대한 민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나아가서는 민중세력의 형성을 도모할 활동주체로서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이러한 의도로 2월 8일 계동에서 47명이 모여 내부단계의 결성을 보았다.
그러나 2월 23일 정기강연회에서 공개적으로 발족시킬 예정이던 건양협회는 2월 11일의 아관파천(1896)으로 유산되고 말았다. 본래 김홍집체제에 근거를 두고 있던 건양협회가 아관파천(1896)으로 와해되면서 그 기반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다행히 아관파천(1896) 후 새로 조각된 박정양내각이 그의 신문활동 계획을 계속 후원해 서재필의 계몽활동을 도와줌으로써, 미완성으로 끝난 건양협회의 정신을 독립협회의 창립으로 연결시켜 그 맥을 이어갈 수 있었다.

2. 자주·자강의 계몽운동 전개

1) 『독립신문』 간행

(1) 『독립신문』의 창간

일본 측의 방해로 신문창간이 난망한 때, 아관파천(1896)으로 사태가 급전하면서 서재필의 신문발간 계획은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아관파천(1896) 후 새로 들어선 박정양내각은 서재필의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박정양내각이 서재필의 신문발간을 지원한 이유는 첫째, 박정양내각도 전 내각 못지않게 신문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한 점이다. 신정부로서는 한국에 대해 왜곡보도를 일삼고 있는 일본 측의 『한성신보』에 대항할 한국인의 신문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둘째, 서재필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던 점이다. 새로운 내각을 지원한 세력 중에는 구미(유럽·미국)세력을 배경으로 한 정동파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미국 등 구미(유럽·미국) 제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두텁게 유지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는데, 미국시민권을 가진 서재필을 통해 이 문제를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 본 점이다. 이 때문에 아관파천(1894) 후 서재필의 지위는 크게 강화되어 그 자신이 신 정부의 주요 인사들과 직접 교섭할 수 있었고, 국왕도 알현하였다. 또한 신 정부도 1896년 3월 13일자로 서재필을 신문담당부서인 농상공부의 임시고문관으로 임명하여 그의 활동을 적극 도우려 했다.
셋째, 당시 개화적인 분위기를 감안할 때, 서재필의 신문발간사업은 새로 집권한 내각에게 근대적인 개화정책을 계속 추진한다는 명분과 함께 국내외에 신정부의 위상을 제고시킬 수 있는 좋은 재료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점이다.
이러한 이유로 신 정부는 서재필의 계획에 대해 협조하였고, 오히려 전 내각보다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신문을 발행하도록 해주었다. 신정부는 서재필이 유길준으로부터 받은 신문창간비용 4,400원의 지출 승인서를 재인준하여, 그에게 신문사 창립비 3,000원과 주거비 1,400원을 지급하였다. 그뿐 아니라 신 정부는 신문창간사업을 지원하여, 정동에 있는 정부소유의 건물을 전 내각이 결정한 대로 신문사 사옥으로 사용하도록 허락하였고, 신문의 우송비를 타인쇄물의 우송료보다 훨씬 더 저렴하게 취급하도록 특혜를 주었다. 이것은 신정부가 김홍집내각에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신문 창간을 지원하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창간작업이 본격화되자 서재필은 국내외에 한국민의 자주·자강을 나타내는 의미로 신문제호를 『독립신문』이라 정하고, 신문발간을 위해 독립신문사를 설립했다. 사장겸 주필은 서재필이 앉고 회계겸 교보원(校補員, 후에 총무겸 교보원으로 바뀜)에는 주시경을 임명하여 국문 주필로 삼았으며, 기자는 두 종류로 나누어 관청출입기자 1명을 두었고, 시정출입기자로 손승용을 임명했다. 한성사범학교 교사이며 감리교단의 삼문출판소를 맡고 있던 헐버트가 인쇄직공 두 사람을 빌려주어 창간을 도와주었다. 영문판 『The Independent』의 편집은 서재필 자신이 맡았다.
그런데 서재필은 독립신문사를 자기의 사기업으로 등록했다. 이렇게 등록할 수 있었던 데는 신 정부가 러시아 공사관에서 불안정한 상태로 유지되고 있어 신문사를 자신의 사기업으로 등록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신정부로서도 삼림·광산·철도 등 거대한 이권이 강대국에 침탈되고 양여되는 판국에 신문에 대한 소유권을 거론할 형편이 못 되었다.
서재필은 정부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일본 대판에 인쇄기를 주문한 뒤, 이 시설을 가동해 마침내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 창간호를 발행하였다.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일반 국민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크게 환영하였다. 당시 일본에 유학 중인 학생들은 『친목회보』 3호(1896년 12월) 잡보란에 「조선에 독립신문」이라는 제목으로 이 신문의 발간을 환영했다.

대조선국 『독립신문』은 오백년 후 신문자라는 문자는 별로 다름이 없이 언문(한글)과 영문으로 하였으니 국민의 이목을 일신케 함으로 오백년 후 신문자라 하노라.…지금 들은 즉 본 신문을 창립한 자는 서재필 씨라 하니, 그는 조선국민에 사표이다. 그를 향하여 백배 감사하노라.

한편 『독립신문』과 함께 삼문출판사에서 헐버트가 간행하고 있던 월간 영문잡지 『Korean Repository』 1896년 4월호에서도 「The Seoul Independent」라는 제목하에 그 발간을 축하하면서, 이 신문이 한국 국민에게 매우 유용할 것임을 밝혔다.

편집인이 한문을 버리고 한글만을 사용한 것은 대단히 현명한 일이라 생각한다. 어떤 정부대신은 이 신문을 읽을 수 없다고 불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대신이나 양반은 한글을 읽지 못한다 해도 그것을 읽는 수백 명의 평민이 있고, 또 이 나라의 근본적인 발전은 그들에게 구해야 된다는 의견을 감히 내놓는 바이다. 우리들은 『독립신문』의 창간을 환영하며, 아울러 큰 성과가 있기를 바란다.

(2) 『독립신문』의 체제와 운영

『독립신문』은 가로 22cm, 세로 29cm의 A4판 4면으로 발행되었다. 1면과 2면은 논설과 관보·잡보·외국통신을, 3면은 광고를 싣고 있다. 1면에서 3면까지는 제호부터 본문기사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한글을 사용하고 있으며, 4면은 영문으로 논설을 비롯한 국내의 정치동향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서재필이 한글과 영문의 신문을 간행하려던 원래의 계획이 그대로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4면은 외국인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창간호 논설에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고 하여, 내국인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독립신문』은 첫 해는 주 3회, 다음 해는 격일간, 그리고 나중에는 일간으로 발행되었다. 그리고 국문판과 영문판도 1897년 1월 1일부터 분리되어, 영문판은 4면의 독립된 신문으로 발행하고 그 크기도 2배로 확대하였다. 국문판과 영문판의 내용은 일치하지 않았다. 논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는데, 이는 상대하는 독자층이 전혀 다르기 때문이었다.
서재필이 사장 겸 주필로서 국문판 논설과 영문판 Editorial(사설)을 주로 담당했다. 그가 쓴 논설의 내용은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광범위하게 걸쳐 있었다. 주시경은 국문판 담당주필이 되어 『독립신문』의 편집과 제작을 담당하였고, 때로 논설도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영문판 『The Independent』의 편집은 서재필이 편집과 제작의 책임을 맡고, 뒤에 1897~98년에는 한성사범학교 교사인 호머 헐버트의 동생 아쳐 헐버트의 도움을 받았다.
회계업무는 처음에는 주시경이 ‘회계겸 교보원’의 직함으로 담당했다가, 총무로 사실상 『독립신문』의 실무를 전담한 후에는 이준일이 담당했다.
『독립신문』은 서울 정동의 본사 외에도 지방으로 확산되어 인천·원산·파주·개성·평양·수원·강화 등지에 지국을 설치하였다.
『독립신문』은 창간초기 정기구매자에게 1부에 1전을 받았다. 창간 당시 『독립신문』의 생산비는 1전 6리였는데, 판매가격이 1전이었으므로 1부 당 6리의 적자를 본 셈이었다. 그 이후 독립신문사의 적자운영을 극복하기 위해 1897년 1월 1일부터 국문판과 영문판을 분리함과 동시에, 국문판은 1부 2전씩, 월 25전, 연 2원 60전으로 인상하였으며, 영문판은 매장에 5전씩, 월 75전, 연 6원을 받도록 했다.
그러나 신문사 수입의 대종을 이루는 국문판 신문대금 수입이 예정대로 잘 징수되지 못하여, 신문사의 운영은 흑자를 내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독립신문』이 영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국민의 계몽을 목적을 창간된 것이므로 이 적자는 감수되었다. 서재필은 “매월 150원 내지 180원의 손해를 보았으나 그것은 모두 내 자신의 부담이었다.”고 말한 바와 같이, 주필 월봉 150원을 받지 않고 무보수로 일함으로써 적자를 충당했다. 그의 생활비는 중추원고문직에 따른 수입으로 충당되었다.
서재필은 신문판매를 위해 가판제도를 도입했는데, 이 경우 신문판매자가 20%의 이윤을 얻도록 배정하였다. 신문배달은 주로 우송에 의존했으나, 서울의 경우 배달원을 고용하여 이용하기도 했다.
『독립신문』의 국문판 발행부수는 서재필의 회상에 의하면, 처음에는 300부밖에 인쇄치 못하던 것이 후에는 500부가 되고 나중에는 3,000부까지 발행하게 되었고, 영문판도 의외로 구독자가 늘어 미·영·러·중(미국·영국·러시아·중국) 등에 상당한 부수가 발송되었다고 했다. 실제 국문판과 영문판을 합하여 1898년 1월 현재 『독립신문』의 정기구독자는 1,123명이었다. 여기에 가두판매분과 무료지를 가산하면 1898년 1월 현재 약 1,500부 정도라고 추산할 수 있다. 또한 1896년 11월 독립협회에 등록된 회원수가 2,000명 내외이었으나, 1898년 7월 3,000명으로 증가한 것을 고려할 때, 그 발행부수도 계속 증가 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독립신문』의 구매방식은 오늘날과 같이 한 사람이 한 부를 읽고 접어두는 것이 아니라, 돌려가며 읽고 때로는 시장에서 낭독도 하였으므로, 실제로 『독립신문』을 읽거나 듣는 사람의 수는 발행 부수의 수십 배가 되었을 것이다. 이것은 평양에 최초로 현대식 병원을 설립하는 데 공헌한 바가 있는 로세타 홀 박사가 뉴욕으로부터 보내온 편지 내용을 보면, 이를 잘 이해할 수 있다.

적어도 귀하의 귀중한 신문 한 부가 이중 삼중으로 의무를 다하고 있습니다. 즉 우선 매리 커트리 박사가 이 신문을 읽은 후에는 볼티모에 있는 박 선생에게로 그것을 보내고, 그가 유심히 그 신문을 읽고 나서는 뉴욕시에 있는 그의 부인에게로 전해졌다가 다시 저에게로 보내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이 신문을 즐겨 읽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사랑하는 조선에서 유익한 기여를 하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이미 이 신문은 유익한 일들을 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 앞길에 밝고 유용한 장래가 촉망됩니다.(임창영,『서재필박사전기』, 128쪽)

이처럼 『독립신문』이 당시 많은 사람으로부터 인기를 끌게 된 것은 신문 값이 싸다는 것과 읽기 쉬운 한글로 된 점, 그리고 서재필 개인에 대한 일반인들의 호기심 등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서재필이 미국시민의 자격으로 치외법권적인 신변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입장에서 정부와 고관 및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과감한 비판을 가할 수 있었고, 그의 개혁의지와 계몽사상이 신문지면에 강하게 반영될 수 있었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적극적인 호응이 가능하였다고 보여진다.
『독립신문』은 창간 이후 폐간될 때까지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다.(신용하, 『독립협회연구』, 40~44쪽)
제1기는 『독립신문』이 창간된 다음 독립협회가 창립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 『독립신문』의 논조는 국민의 계몽을 주로 하였으며, 정부에 대해 매우 협조적이었다. 『독립신문』은 정부의 시책을 국민에게 해설하여 전달하고 정부도 『독립신문』이 제시한 제안을 채택하는 데 큰 열의를 보였다. 이 시기 『독립신문』은 당시 사회문제로 대두하였던 지방의 의병을 회유하는 데도 정부시책에 협조하였다. 『독립신문』은 이때 처음 창간된 만큼 논설은 온건하였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커서, 국민의 의식과 사상의 변화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제2기는 독립협회 창립 이후부터 1898년 5월 11일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윤치호에게 인계하고 출국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시기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운동을 지원하고 독립협회 회원과 국민의 계몽에 주력하였다.
그러나 이 당시는 개혁파와 수구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어 정권을 장악한 친러수구파들은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혁파를 탄압하기 시작할 때여서 『독립신문』의 논조는 1897년 봄부터 점차 날카로워지기 시작하여 수구파정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을 서슴없이 고발하였다. 또 제정러시아가 1897년 8월부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보내어 본격 적인 침략간섭정책을 전개하고, 각종 이권을 침탈하자 이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고 저항하였다.
이런 이유로 수구파 정부는 『독립신문』에 대한 탄압을 격화하여 1897년 12월 중순에는 폐간의 위기까지 몰고 갔다. 1897년 12월말 서재필의 추방이 한·중·러·일·미(한국·중국·러시아·일본·미국) 사이에 합의되어 1898년 1월 『독립신문』의 인수 문제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대두하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로 『독립신문』의 논조는 1898년 1월부터 더욱 격렬해져 수구파정부의 정책과 제정러시아의 침탈정책을 가차없이 비판하고 독립협회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제3기는 서재필이 한국에서 추방된 후 윤치호가 『독립신문』의 주필을 맡은 1898년 5월 12일부터 독립협회가 해산당하는 1898년 12월 30일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 『독립신문』은 독립협회의 주요 대변지가 되어 그의 자주민권운동을 지원하였고, 발간도 1898년 7월 1일부터는 주 3회의 격일간에서 일간지로 발전하였다.
제4기는 독립협회가 해산 당한 1898년 1월 1일 이후부터 『독립신문』이 폐간되는 1899년 12월 4일까지의 시기이다. 이 기간에는 『독립신문』의 주필이며 독립협회의 회장이던 윤치호가 독립협회 해산 후 덕원감리겸부윤으로 임명되어 서울 정계서 떠난 뒤 주필직을 그만두었으므로 처음에는 아펜젤러가, 1899년 6월 1일부터는 엠벌리가 주필이 되어 『독립신문』을 운영하였다. 이 기간 『독립신문』의 논조는 종래까지의 논조를 원칙적으로 지속하였으나 그 내용과 표현방식이 모두 온건하게 되고, 정부정책에 대한 비판보다 주로 국민의 교육계몽에 주력하였다.

(3) 『독립신문』의 역할과 성격

『독립신문』의 발간은 당시 한국의 사회발전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독립신문』은 처음부터 보도적 기능보다 계몽적 기능을 강조하여 창간되었으며 이 신문의 논설과 기사에서 제시된 많은 주장들은 모두 당시 한국인의 의식과 사상의 변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한국의 사회발전에 박차를 가하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면 『독립신문』에 대한 서재필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창간 논설을 통해 이 신문이 한국민족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여 ‘조선만을 위함’, ‘한국인민의 이익을 위한 신문’, ‘한국인을 위한 한국’이 될 것임을 밝히면서, 『독립신문』의 주의(主義)를 분명히 하였다.

우리가 『독립신문』을 오늘 처음으로 출판하는데 조선 속에 있는 내외국 인민에게 우리 주의를 미리 말씀하여 아시게 하노라.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귀천을 달리 대접하지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게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대언하여 주려함.
정부에서 하시는 일을 백성에게 전할 터이요 백성의 정세를 정부에 전할 터이니, 만일 백성이 정부일을 자세히 알고 정부에서 백성의 일을 자세히 아시면, 피차에 유익한 일만이 있을 터이요, 불평한 마음과 의심하는 생각이 없어질 터임.
우리가 이 신문을 출판하기는 취리하려는 게 아닌고로 값을 헐하도록 하였고, 모두 언문으로 쓰기는 남녀·상하·귀천이 모두 보게 함이오, 또 구절을 띄어 쓰기는 알아보기 쉽도록 함이라.
우리는 바른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오,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폐할 터이요, 사사백성이라도 무법하게 일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에 설명할 터이옴.
우리는 조선대군주 폐하와 조선정부와 조선 인민을 위하는 사람들인 고로 편당있는 의논이든지 한 쪽만 생각하는 말은 우리 신문상에 없을 터임.
또 한쪽에 영문으로 기록하기는 외국 인민이 조선 사정을 자세히 모른 즉, 혹 편벽된 말만 듣고 조선을 잘못 생각할까 보아 실상 사정을 알게 하고자 하여 영문으로 조금 기록함.
그리한 즉 이 신문은 조선만 위함이 아니라 이 신문을 인연하여 내외남녀·상하·귀천이 모두 조선일을 서로 알터임.
우리가 또 외국 사정도 조선 인민을 위하여 간간이 기록할 터이니, 그걸 인연하여 외국은 가지 못하더라도 조선 인민이 외국 사정도 알 터임.
오늘은 처음인고로 대강 우리 주의만 세상에 고하고 우리 신문을 보면 조선 인민이 소견과 지혜가 진보함을 믿노라.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불편부당함.
둘째, 양반·상인의 신분차별이나 지방차별 없이 전국 국민을 평등하게 대 함.
셋째, 전국 인민을 공평하게 대변함.
넷째, 정부 정사를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의 실상을 정부에 알리어 정부와 백성 사이에 의사소통을 시킴.
다섯째, 국문전용과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일반 국민이 모두 신문을 읽도록 함.
여섯째, 신문가격을 저렴하게 하여 일반 국민이 구독할 수 있도록 함.
일곱째, 부정부패와 탐관오리와 모든 불법행위를 고발함.
여덟째, 영문판을 발간하여 한국의 사정과 한국민의 입장을 세계에 알림.
아홉째, 국민에게 나라안 사정을 알게 함.
열번째, 국민에게 외국 사정을 알게 함.
이와 같은 생각으로 시작한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이 당시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 수행한 역할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신용하, 45~54쪽)
첫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근대사회 확립에 필요한 지식과 사상을 공급하여 당시 한국의 민중의식을 깨우쳐 발전시키는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먼저 신문이란 나라의 등잔불과 같고 인민의 선생이라 하여 그 직무가 가볍지 않다고 천명한 뒤 이를 수행하기 위해 신문이 해야 할 일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신문의 목적은 제일 인민의 의복과 음식과 재산과 목숨과 권리와 지위와 행실과 처지를 보호하여 줄 뿐 아니라, 점점 더 나아가게 하여 주어 그 인민들이 더 부요하고, 그 인민의 의복·음식·거처가 점점 학문있게 되어가게 하며, 그 인민의 권리를 아무라도 해롭지 않게 하여 주며, 인민의 행실들이 점점 높고 정직하여 세계에 점잖은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며, 아무쪼록 약하고 가난하고 궁하고 세 없는 사람을 보호하며 역성하여, 인민들이 모두 의리 있고, 충심 있고, 학문 있게 하도록….(『독립신문』, 1898. 4. 12, 「논설」)

둘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자주독립과 국가 이익의 수호를 위해 지대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당시 열강의 침략간섭정책을 낱낱이 들어 비판하고 나라의 독립과 국가 이익을 수호하는 데 진력하였다.

우리 신문이…어떤 나라에만 편벽되지 아니하고 다만 대한만 위하여 오늘날까지 열심히 일한 것은 아는 사람도 있거니와, 대한 관민 중에 설령 모르는 이가 있더라도 몇 해 아니되어 우리가 대한에 정성이 있는 것을 알 터이오.(『독립신문』, 1897. 12. 6, 「논설」)

외국들이 조선을 만만히 보아 근일에 들으니 일본과 아라사(러시아)가 다시 조선 일에 인연하여 무슨 약조를 하여, 말로는 조선을 위하여 이렇게 약조도 하고 담판도 한다니, 만일 이 두 나라가 무슨 약조를 하여 조선더러 말하기를, 우리가 이러 저러한 약조를 하였으니 그대로 조선서는 알고 약조대로 시행하라 한다고 조선이 그대로 시행할 지경이면 조선이 자주독립국이라 할 까닭이 무엇이뇨.(『독립신문』, 1897. 9. 4, 「논설」)

셋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당시 국민의 이익을 대변하고 국민의 권리를 되찾아 수호하는 데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는 “신문이 전국 인민의 제일가는 친구”라 하면서, 한국사상 처음으로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인민이 나라의 주인임을 밝혔다.

정부에 벼슬하는 사람은 임금의 신하요 백성의 종이라. 종이 상전의 경계와 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그 상전을 잘 섬길 터인데, 조선은 거꾸로 되어 백성이 정부 관인의 종이 되었으니, 백성은 죽도록 일을 하여 돈을 벌어 관인들을 주면서 상전 노릇을 달라하니 어찌 우습지 아니하리오.(『독립신문』, 1896. 11. 21, 「논설」)

넷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국문전용, 국문 띄어쓰기, 쉬운 국어쓰기를 실행하여 민족언어와 민족문자의 발전, 그리고 민족문화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서재필은 창간 논설을 통해 『독립신문』이 한문을 안 쓰고 국문으로 쓰는 것은 상하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한 뒤, 배우기 쉬운 국문이 한문보다 월등히 우수함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독자의 통신과 편지를 요청하여 이를 선택하여 게재할 것을 약속하면서도, 한문으로 쓴 것은 접수하지 않겠다고 알려 반드시 국문으로 통신할 것을 부탁했다.
다섯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당시 지방에 성행하던 관리의 부정부패와 국민수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해 사회정의를 바로잡는 데 기여했다. 서재필은 대신들로부터 지방 아전에 이르기까지 탐관오리들은 가차없이 고발하여 규탄하였다. 이 때문에 『독립신문』은 민중의 친구가 되어 사랑과 지지를 받았지만, 탐관오리들부터는 규탄을 받아 폐간의 위협까지 받게 되었다.
여섯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자신이 창간한 독립협회에 일종의 대변지 역할을 담당케 하면서 독립협회의 사상형성과 자주민권·자주자강운동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의 계몽적 활동을 독립협회를 통해 실현시키려 했다.
일곱째, 한국역사상 최초의 민간지로 창간된 『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한국 민중에게 신문의 사회적 역할과 그 중요성을 알게 하고, 여론과 공론을 형성하여 정치·사회활동을 전개하는 방식을 성립시켰으며, 광무 초기의 신문과 출판물의 발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했다.

우리 『독립신문』이 생긴 이후로 한 가지 개명된 것은 인민들이 차차 신문이 긴요한 물건인 줄을 알아, 이왕에는 신문을 무엇인지도 모르고 전에 못 보던 것인 고로, 덮어놓고 시비하는 자도 있고 비웃는 자도 있고 당초에 볼 생각을 아니하는 자가 많이 있더니, 근일에는 그런 사람들도 차차 신문이 없어서는 세상이 캄캄하여 견딜 수 없겠다고 하는 이가 많이 있으니, 이것을 보면 다른 것을 그만두고 우선 그만큼 사람들이 열리어 신문 없이는 못쓰게 되는 생각이 나게 되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칭찬하는 것이 동양풍속으로 논하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나, 실상을 말하자니까 인민이 이만큼 열린 것은 『독립신문』의 효험이라 할지라.(『독립신문』, 1898. 4. 12, 「논설」)

그리고 서재필은 『독립신문』이 창간된 이래 이 신문의 본을 떠 국문으로 띄어쓰기를 하며 발간하는 신문이 1898년 4월 현재 서울에서 5가지나 나오게 됨을 밝혀, 언론의 발흥과 여론을 통한 사회운동의 전개에 실로 크게 공헌하였음을 밝혔다.

근일에 성내에 다른 신문들이 많이 생겨 『독립신문』 외에 전 국문으로 『독립신문』의 본을 떠서 글자를 띄어 써가며 출판하는 신문이 다섯이 있으니, 삼년 전에는 신문이라 하는 것을 이름도 모르던 나라에서 지금은 국문신문이 다섯이오, 영자신문이 하나이요, 국한문 석간신문이 하나이요, 일본 글자로 하는 신문이 하나이라.(『독립신문』, 1898. 4. 12, 「논설」)

여덟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한국인에게 세계정세를 알게 하고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자기의 위치를 인식하게 했으며, 세계 각국의 문물을 소개하여 한국인의 시야를 넓히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독립신문』을 발간하는 목적 중의 하나가 세계사정을 한국인들에게 알리는 것임을 밝혔다.

우리가 신문을 일 년 반을 출판하여 하루 걸려 대한 관민을 대하여 말할 때에 우리 목적인 즉, 첫째는 세계물정과 외국 정치와 풍속과 신문을 게재하여 대한 관민이 세계가 어떻게 되어가는 것을 알게 하며…(『독립신문』, 1897. 12. 16, 「논설」)

서재필은 『독립신문』을 통해 당시 어떤 다른 신문보다 외국 사정을 소개하는 데 주의를 많이 기울였으며 서구시민사회를 소개하는데 많은 배려를 하였다.
아홉째, 서재필은 『독립신문』의 영문판인 『The Independent』를 통해, 한국사정을 한국인의 입장에서 세계에 알리고, 한국인의 의사와 주장을 세계 각국 사람들에게 알리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우리는 한국인과 외국인 사이의 긴밀한 우의를 증진시키는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며, 한국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문제에 대해서 두려움 없이 사실을 발언할 것이며, 전 세계에 대하여 한국에 관한 일을 계몽할 것을 공중에게 약속하는 바이다.(『The Independent』, 1897. 1. 5, 「Editorial Notes」)

당시 국제 열강들은 한국을 둘러싸고 일시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서로 견제하면서 한국을 속국화할 침략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사정을 각각 자기들의 입장에서 왜곡하여 세계에 보도함으로써 한국에 불리한 기사가 많았다. 이러한 때 서재필은 영문판 『The Independent』를 통해 한국사정을 공정하게 세계에 알림으로써 한국의 독립과 권익을 옹호하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2) 강의활동과 협성회 조직

『독립신문』 발간으로 분주하게 움직일 5월 중순경, 서재필은 배재학당 교장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특별강의를 요청받고 이를 수락했다. 배재학당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매주 목요일 오후 3시마다 하는 연속 강의였다. 서재필이 강의 부탁에 적극 응했던 것은 이미 귀국 초기 아펜젤러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 머물면서 한국에서의 활동 계획에 서로가 이해를 같이한데다, 서재필 자신이 계몽과 교육활동에 대한 강한 사명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첫 강의는 1896년 5월 21일에 시작되었는데, 『독립신문』을 창간한지 40여 일이 지난 뒤였다.
당시 배재학당은 영어부와 한문부가 나뉘어져 있었고 학생은 총 160여 명, 교사는 미국 선교사 2명, 한국인 5명이 있었다. 학교가 설립된 지 10년이 지났으나 여전히 학생의 수준도 일정하지 않고 교재 또한 적당한 것이 없는 실정이었다. 또한 언어의 장벽 때문에 선교사들이 아무리 열심히 가르쳐도 학생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세계사를 교수하는데 한문으로 된 교재를 갖고 한국인 교사가 가르칠 정도였다. 따라서 교육 내용이 학생들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서재필은 미국에서 10여 년간 거주한데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정식으로 졸업하여 외국 선교사들과도 정식으로 어깨를 견줄 만한 풍부한 교양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그 만큼 서양지식을 체득한 사람은 없었다.
서재필의 강의는 목요일마다 진행되었다. 이른바 그의 목요강좌가 시작되자 학생들은 열렬히 환영하였다. 그 정황에 대해서는 배재학당의 교사로 있던 벙커가 1896년 8월 21일 감리교 선교부 연례회 석상에서 이 학당에 대한 보고를 하는 자리에 잘 나타난다.

몇 달 전부터 서재필이 학생들에게 실시하고 있는 연속 강의에 대해 특별히 말하고 싶다. 이 강의는 예배당에서 실시되고 있는데, 언제나 학생들로 의자가 꽉 메워져 있다. 강의는 한국말로 하기 때문에 학생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유럽을 설명하려고 할 때에는 지도위에 그 지역을 표시하고 나서 일반 역사와 교회발달사를 훤히 알 수 있도록 설명한다. 우리는 서재필이 앞으로도 이 강의를 계속하여 예정했던 계획의 전부를 학생들에게 들려주도록 바라는 바이다.(『Korean Repository』 Vol 3.)

또 학생들이 크게 호응한 사실에 대해 『The Independent』 1896년 10월 24일자 「Local Items」에는,

배재학당 학생들은 매주 실시되고 있는 서재필의 강의에 열심히 참석하고, 서재필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지식과 세계정세를 알려고 애쓰는 이러한 청중을 가르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라고 쓰고 있다.
서재필의 강의는 세계의 지리뿐만 아니라 역사·정치학도 다루었다. 정치학을 다루면 자연히 한국의 정치현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차 학생들은 바깥 세상에 눈을 뜨게 되고 또 국제사회 속에서의 한국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서재필의 강의는 적어도 1년 이상은 실시되었다.
첫 강의를 시작한 지 약 6개월이 되는 1896년 11월경 서재필은 배재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토론회를 제안했다. 자기 강의만 듣고 만족할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일반지식이나 국내외 문제를 서로 토론을 통해 해결하고자 한 것이다. 이미 서재필은 미국 고등학교시절 과외활동으로 ‘리노니아’라는 문학토론회에 참가하고, 또 그 회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바 있어 토론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그러한 회(會)를 본떠 배재학당에 토론회를 만들어 학생들 스스로 문제해결을 해나가고자 했다.
서재필이 제안한 토론회에 대해 학생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으나, 여러 사람 앞에 자기의사를 주장하는 경험을 갖지 못한 이유로 선뜻 나서지 못하였다. 서재필은 학생들로 하여금 먼저 회를 조직하여 모임을 개최하도록 했다. 그는 학생들과 함께 모임 이름을 협성회(協成會)로 정한 뒤, 11월 30일 그 첫 번째 토론회를 열었다. 한국에서 최초로 행해지는 토론회였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매 토요일 오후 2시마다 개최되었다. 그런데 학생들은 회의 진행방법이나 절차에 대한 지식을 갖지 못했으므로, 서재필은 먼저 토론을 진행시키는 과정에 이들을 가르쳐야만 했다. 그 첫 번 모임에 대한 『독립신문』의 1896년 12월 1일자 「잡보」란은,

배재학당 학도들이 학원 중에서 협성회를 모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아 의회원 규칙을 공부하고 각색 문제를 내여 학원들이 연설공부들을 한다니, 우리는 듣기에 너무 즐겁고 이 사람들이 의회원 규칙과 연설하는 학문을 공부하여 조선 후생들에게 선생들이 되어, 만사를 규칙있게 의론하며, 중의를 좇아 일을 걸쳐하는 학문들이 퍼지게 하기를 바라노라.

라고 말하여, 협성회가 의미있는 모임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또 서재필은 『The Independent』 1896년 12월 3일자 논설을 통해, 이번에 새로 시작한 토론회가 학생들에게 매우 유익하게 진행되어, 앞으로 한국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임을 시사해주었다.

며칠 전 배재학당 학생들이 새 토론회의 진행을 지켜보았다. 회원들의 질서정연한 모습, 의회규칙의 엄격한 적용, 회중에서의 성실한 토론, 전회원의 열성적인 토론참여, 자기의 주장을 거리낌 없이 표현하는 용감한 태도 등은 한국의 안녕을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주었다.

협성회의 토론회는 매주 거르지 않고 열렸다. 서재필은 토론 제목을 실생활에서 부딪히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에서 택했다. 이를 테면, 제1회의 제목은 “국문과 한문을 섞어 씀이 가함”, 제2회는 “학도들에게 양복을 입음이 가함”, 제3회는 “아내와 자매와 딸들을 각종의 학문으로 교육함이 가함” 등이었다.
협성회는 1898년 3월 중순까지 42회가 열렸다. 주제에 대한 찬반토론도 시작하였는데, 모두 열심히 참여함으로써 방청하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이러한 협성회에서의 경험과 성과는 서재필로 하여금 독립협회에서도 토론회를 시작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협성회는 날로 성황을 이루었다. 회원의 토론기술도 향상되었고 주제에 대한 파악도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일반의 관심도 높아가 가입하는 회원이 늘어갔다. 협성회를 발족 1년이 되는 1897년 12월경에는 200여 명으로, 1898년 3월에는 약 300명까지 증가했다. 서재필은 협성회 회원 중 좋은 의견을 내세우는 사람이 있으면 이들의 글을 받아 『독립신문』에 게재토록 하여 학생들의 참여를 격려했다.
이처럼 서재필은 협성회의 토론회를 통해 최초로 다수결지배의 원칙과 반대의 자유, 의사표현의 자유를 알게 하였고, 누구나 동등한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는 평등의식을 고취시킴으로써 회원들에게 정치적 각성을 고취시키고, 사회계몽활동에 나서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회원 중에는 배재학당 학생뿐만 아니라 한국인 교사도 가입하여 회를 주도했는데, 이 때문에 협성회가 교사인 양홍묵과 이익채가 각기 초대 회장과 부회장이 되어 회를 이끌어갔다. 이외 회 운영에 적극 참여한 사람은 노병선·윤창렬·이응진·문경호·김규찬·정도원·최학구·김열근·민찬호·박인식·김기원·신흥우·주상호(주시경의 첫 이름)·오신영·오경선·정대희·이병철·권정식 등이었다.
협성회는 토론활동뿐 아니라 일반인의 회 가입도 적극 권장하였다. 그러나 배재학당 관련자가 아니면 정식회원이 못되고 찬성원이 되었다. 1898년 3월말 찬성회원은 68명에 달했는데, 여기에는 도산 안창호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안창호는 언더우드가 설립한 민노아학당(경신학교의 전신)의 학생이었다.
협성회의 소문은 지방으로까지 확산되었다. 1897년 6월 16일 황해도 장연군 송천에서 서상륜과 김윤오가 협성회 조직을 원하자, 서울의 협성회는 회의 규칙에 밝은 김홍경과 김필순을 특별히 파견하여 회를 지도토록 해주었다.
한편 회원들은 협성회의 활동상황과 자신들의 주장을 일반에게 널리 알려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매주 회보를 발간키로 했다. 이에 따라 1898년 1월 1일 『협성회회보』를 창간했다. 회원들은 이에 그치지 않고 1898년 3월 19일에는 주간 『협성회회보』를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키로 했다. 이에 따라 신문이름도 『매일신문』으로 하고 마침내 1898년 4월 9일 창간호를 발간했다. 신문사 사장은 당시 회장이던 양홍묵이 취임했다. 신문운영은 회원들이 낸 재정으로 운영되었고, 회원 스스로가 신문의 기사를 쓰고 식자와 교정을 하는 등 모든 운영을 독자적인 힘으로 담당했다.
이처럼 서재필에 의해 시작된 협성회는 많은 결실을 맺어 이제 사회적 영향을 끼치는 데까지 발전하였는데 그러한 발전에 대해 『매일신문』은 논설을 통해,

우리가 선생(서재필) 신문(『독립신문』)에 배운 것이 많아 신문 목적도 대강 짐작하고, 학문도 좀 있어 남에게 선생 노릇을 좀하고 싶은즉, 전에 가르친 선생을 혹 시비할 도리도 있을 지라.(『매일신문』, 1898. 4. 14)

라 하여, 그동안 새로운 사상을 체득케 해 주고 국민을 계몽하는 일을 하게 한 서재필의 공로를 잊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3) 독립협회 조직과 활동

(1) 독립협회의 창립

서재필은 귀국 후 유길준과 『독립신문』에 대한 발간을 협의하고,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활동 반경을 점차 넓혀가면서, 신문 발간만으로는 국민 계몽활동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정부와 민중을 한 덩어리로 뭉쳐 실질적인 계몽과 개혁활동을 전개할 결사체가 필요함을 깨달은 것이다. 당시 김홍집내각에 뿌리를 둔 개명관리들은 서재필의 이러한 생각이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자주적인 세력단체 결성구상과 부합된다고 보고 서재필과 함께 건양협회 발족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건양협회는 아관파천(1896)으로 김홍집내각이 와해되면서 내부결성 단계로만 그쳐 공식적인 발족을 하지 못하고 유산되었다.
다행히 아관파천(1896) 후 자신의 위상이 오히려 강화되고 신문발간에 대한 신정부 측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1896년 4월 7일 『독립신문』이 창간되자, 서재필은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했다. 우선 그는 아관파천(1896)으로 중단되었던 공개강연을 새로운 형태로 전환하여 5월 21일부터 매주 목요일 오후 3시마다 배재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목요강좌를 실시했다.
이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서재필은 김홍집-박영효 내각 시(1894. 12. 17~1895. 5. 21) 박영효 계열에 의해 사대유물의 제거작업 일환으로 1895년 2월에 헐린 영은문 자리에 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할 목적으로 독립문과 독립공원을 세울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이를 실행하고 추진하기 위한 지원세력으로 서재필은 독립협회 창립을 구상하였다. 서재필의 독립협회 구상은 그 이전 건양협회 결성추진에 참여했던 경험을 발전적으로 탈바꿈시키려 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진보적인 인사들과의 모임을 통해 자신의 지원세력을 만들어 갔다. 먼저 이전부터 접촉해 왔던 건양협회의 잔여 세력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끌어들이는 한편, 당시 있던 정동구락부 세력을 끌어들였다. 정동구락부 세력은 주로 외교관계 사람들로 구성되어 외국외교관들과 교제를 하고 있던 관료세력이었다. 주요 구성원 중 한국인 회원은 민영환·윤치호·이상재·이완용·이윤용·이채연 등이었고, 외국인 회원은 미국공사 씰, 프랑스 영사 플랑시, 한국정부의 고문 다이와 리젠드, 미국선교사 언더우드·아펜젤러 등이었는데, 미국시민권을 가진 서재필도 자연 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면서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다음 서재필은 위 두 세력에 가담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독립개화정책을 지지하던 남궁억·오세창·송헌빈·정현철·심의석·팽한주 등 관료 세력을 끌어들였다. 이들 세력은 중견관료층으로 정책결정의 표면에는 자주 떠오르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큰 세력이 되어 개화정책의 추진 실무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들의 정책추진과 서재필의 근대적 활동계획과는 상통하는 것이 많아, 서재필이 이들을 끌어들여 협력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보여진다.
서재필의 독립협회 결성계획은 조용하게 추진되었다. 비록 서재필은 『독립신문』 발간을 통해 자신의 대중적 인기는 상승되었으나, 당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수파 세력을 감안할 때, 갑자기 새로운 단체를 설립하려 한다면 보수파의 노골적인 반대를 자초하게 될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따라 그는 머지않아 모든 파벌을 흡수하든지 아니면 보수세력의 기세를 꺾고 압도할 만한 새로운 단체결성은 적당한 시기가 올 때까지 매우 신중을 기하기로 했다.
그의 신중한 생각은 서재필이 건양협회 결성을 내부적으로 준비하면서, 1896년 1월 26일 두 번째 공개강연을 할 때, 한성상무회의소의 발족과 석유직수입회사의 발기를 역설함으로써 일본 측을 자극하여 모든 계획을 취소해야 했던 경험 때문이었다. 일본 측은 이미 그의 신문발간 계획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그럴 때 서재필이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에 저촉되는 사업들을 제의하자, 먼저 그의 활동을 적극 후원하던 김가진을 구속시키고 유길준과 자신의 추방공작을 전개하여 서재필을 당황시켰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으로 서재필은 조용히 진보적 인사들과 만나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기려 하였다.
서재필은 독립문과 독립공원 설립에 대한 자신의 구상이 집권내각을 비롯한 개화파 관료들로부터 적극 지지를 받자, 1896년 6월 7일 중추원 건물에서 14명이 모인 가운데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이때 참석한 14명의 발기인은 안경수·이완용·김가진·이윤용·김종한·권재형·고영희·민상호·이채연·이상재·현흥택·김각현·이근호·남궁억 등이었다. 이들 모두는 서재필이 접촉한 건양협회 잔여 세력과 정동구락부 세력, 그리고 양자의 어느 쪽도 아닌 중견개명관료 세력들이었다. 서재필은 이 자리에서 새로 세울 문을 ‘독립문’으로 이름짓고, 이번 일을 정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 국민의 성금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그리고 이를 추진 할 결사체의 이름을 ‘독립협회’로 확정지었다.
이렇게 대체적인 기본 윤곽을 잡은 후 6월 20일경 고종으로부터 독립문 건립에 대한 재가를 받자, 서재필은 『독립신문』 국문판과 영문판 6월 20일자 「논설」을 통해 처음으로 독립문 건립의 필요성을 일반에게 공개적으로 주시시키기 시작했다. 그 중 『The Independent』6월 20일자 사설은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오늘 우리는 국왕이 서대문 밖 문의 옛터에 독립문(Independent Arch)라고 명명할 문을 건립하기로 결정한 사실을 경축하는 바이다. 우리는 그 문의 조각명이 국문으로 조각될지 알지 못하지만 그렇게 되길 바란다.…이 문은 다만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으로부터 러시아로부터 그리고 모든 구주(유럽)열강으로부터의 독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은 조선이 전쟁의 폭력으로 열강들에 대항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조선의 위치가 극히 중요하여 평화와 휴머니티와 진보의 이익을 위해서 조선의 독립이 필요하며, 조선이 동양열강 사이의 중요한 위치를 향유함을 보장하도록 위치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러한 것이다. 전쟁이 그의 주변에서 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그의 머리 위에서 쏟아질 것이다. 그러나 힘의 균형의 법칙에 의하여 그는 손상받지 않고 다시 일어설 것이다.
독립문이여 성공하라. 그리고 다음의 세대로 하여금 잊지 않게 하라.

이러한 논설을 게재하여 독립문 건립사업을 공개한 것은 서재필이 국왕의 재가로 이번 사업에 정치적 보장을 확보하게 되었다고 판단한 때문으로 보인다.
독립협회 창립총회는 1896년 7월 2일 새로 지은 외부(外部) 건물에서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총립총회에서는 「독립협회규칙」을 심의 제정하여 독립문과 독립공원의 창건을 독립협회의 사업목적으로 확정·공포하고 임원을 선출하였으며, 국민들에게 독립협회 사업의 지원을 호소하는 ‘독립협회윤고(輪告)’를 채택했다.
독립협회 규칙에 의한 창립 당시 조직을 보면, 서재필은 국적이 미국으로 되어 있어 공식상 회원이 되지 않고 고문으로 있기로 했다. 회장은 건양협회계통의 안경수가 선출되었으며, 위원장은 이완용이 되고, 위원은 김가진·김종한·이채연·권재형·현흥택·이상재·이근호가 되었으며, 간사원으로는 송헌빈·남궁억·심의석·정현철·팽한주·오세창·현제복·이계필·박승조·홍승관이 선출되었다. 뒤에 독립협회 회장으로 활약한 윤치호는 당시 민영환의 수행원으로 함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 사절로 파견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기위원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그밖에 서기 약간명과 회계장 1명을 두기로 했고 회원은 보조금을 송부하는 모든 인원으로 하여 제한을 두지 않았다.
회의는 통상회와 특별회로 나누어 통상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개최하고, 특별회는 서기가 각원에게 통지하여 소집하며, 모든 안건은 위원이 회의에 제출하여 다수결로 결정하도록 하였다.
또한 이날 독립협회 창립과 동시에 발기위원들은 시범적으로 510원의 보조금을 헌납한 뒤, ‘독립협회윤고’를 각계에 발송하여 이번 사업이 전 국민의 성금으로 이루어지는 국민적 행사가 되도록 호소했다. 이 윤고에는 독립문·독립공원 뿐만 아니라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건립하는 것도 독립협회의 사업임을 알렸는데, 이를 볼 때 창립 이전부터 이미 독립관 개수건립 문제도 함께 거론되어왔음을 알 수 있다.
독립협회 창립에 대해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이번 일이 정부의 경사가 아니라 전 국민의 경사로 축하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달 초 이튿날 새 외부에 여러분들이 모여 의론하기를 조선이 몇 해를 청국 속국으로 있다가 하나님 덕에 독립이 되어, 조선 대군주 폐하께서 지금은 세계에 제일 높은 임금들과 동등이 되시고, 조선 인민이 세계에 자유하는 백성들이 되었으니, 이런 경사를 그저 보고 지내는 것이 도리가 아니요, 조선 독립된 것을 세계에 광고도 하며, 또 조선 후생들에게도 이때에 조선이 영영히 독립된 것을 전하자는 표적이 있어야 할 터이요, 또 조선 인민이 양생을 하려면 맑은 공기를 마셔야 할 터이요, 경치 좋고 정한 데서 운동도 하여야 할지라. 모화관에 새로 독립문을 짓고 그 안을 공원으로 꾸며 천추만세에 자주독립한 공원이라고 전할 뜻이라.
이것을 하려면 정부 돈만 가지고 하는 것이 마땅치 않은 까닭은, 조선이 자주 독립된 것이 정부에만 경사가 아니라 전국 인민의 경사라. 인민의 돈을 가지고 이것을 꾸며놓는 것이 나라에 더 영광이 될 터이요. (『독립신문』, 1896. 7. 4, 「논설」)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을 위한 독립협회 창립은 각계각층으로부터 즉각 광범위한 호응을 받았다.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통하여 성금 헌납자를 공고하는 한편, 헌납자가 협회 가입의사를 밝히면 회원으로도 가입시켰다. 그 결과 보조금 헌납자는 거의 전원이 독립협회 회원이 되었으며, 또한 입회를 완전히 개방하여 누구든지 임의 가입신청만 내면 입회 허가를 받았으므로 회원수는 급속히 증가되었다.
초기 독립협회는 당시 서재필의 접촉범위 내에 있던 옛 건양협회 잔여 세력과 정동구락부 세력, 그리고 이 두 세력에 포함되지 않는 중견 개명관료 중심이었기 때문에 그 성격이 민중적 사회단체가 아닌 소규모 고급관료 클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재필의 설립 의도에는 독립협회를 통해 정부 내 관료뿐만 아니라 의식있는 한국 민중들에 대해 민주주의 사상과 자주·자강의 근대 의식을 함양하고 계발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민중세력의 성장에 따라 급속히 민중단체로 전화될 요인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한 요인을 들면, 첫째, 회원가입이 전적으로 개방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누구의 추천이나 보증인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각자가 헌금표에 가입신청만 하면 접수되어 정회원이 되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둘째, 입회의 목적이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으로 뚜렷하게 구체화되고 있고, 어느 특정계층의 이해에 충돌하지 않는 민족적 사업이었으므로 광범위한 애국적 민중의 참여가 가능한 점이다.
셋째, 독립협회의 운영규칙이 민주화되어 있은 점이다. 모든 의사결정 이 회원의 과반수 이상의 다수결원칙 또는 위원의 다수결에 의해 결정되도록 규정하였으므로, 민중의 대거 참여시 민중의 의사대로 운영될 수 있는 통로가 개방되어 있었다.
넷째, 모든 임원은 회원의 투표에 의해 선출되었고, 회원은 헌금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1인 1표의 권리를 갖고 있으므로 민중이 다수회원이 되는 경우 이들의 의사에 따라 임원을 선출할 수 있은 점이다.
다섯째, 위원을 통해 어떠한 사항이든지 회의에 상정시켜 집행할 통로를 열어 두고 있어, 민중의 사회적 요청에 대한 요구를 수용할 수 있은 점이다.(신용하, 88~89쪽)
이를 볼 때 독립협회는 구조적으로 민중적인 단체로 전화할 요인을 충분히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2) 독립협회 활동

독립협회는 1896년 7월 2일 창립한 이후부터 1898년 12월말 해산당할 때까지 4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신용하, 89~90쪽) 먼저 제1기는 1896년 7월 2일부터 1897년 8월 28일까지의 시기로 독립협회가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사업에 주력하던 때이다. 이때에는 정부의 개혁관료층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고급관료들이 보조금을 헌금하고 회원이 되었으며 간부직을 맡아 보았다. 민중들도 독립문 건립에 호응하여 광범위하게 참여하기는 했으나 보조금 헌납자로서 다만 소극적인 참가에 불과하였고, 독립협회의 모든 조직은 고급관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창립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사업을 성대하게 착수하였고 매 일요일마다 독립관에서 통상회를 가져 관료층이 독립협회에 가입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제2기는 독립협회가 토론회에 주력하던 시기로 1897년 8월 29일부터 1898년 2월 26일까지이다. 이때에는 독립협회 내 일부 간부들이 적극적으로 민중계몽에 앞장서서 매주 일요일에 토론회를 개최하고, 자각한 일부 민중들이 적극 토론회에 참여함으로써 뚜렷한 민중진출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시기 독립협회는 그 조직이 민주적 운영원칙에 의거, 내부변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확고한 대중적 기반을 갖는 민중의 단체가 되기 시작하였다.
제3기는 독립협회가 구국선언상소를 하고 본격적인 자주민권자강의 민중운동을 전개하던 시기로 1898년 2월 27일부터 1898년 8월 27일까지이다. 이때의 독립협회는 나라의 독립과 발전을 위한 본격적인 정치·사회운동을 전개하고, 수구파 정부의 부패와 무능한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여 고급 관료들이 대부분 이곳을 떠나고, 대신 민중과 민중을 대변하는 선각적 지식인들이 독립협회를 주도하였다. 이 시기 독립협회의 조직은 민중에 의해 지배되고 그 세력도 크게 확장되었다. 하지만 수구파 관료들에 대한 비판으로 미움을 산 서재필은 이 시기 이들의 추방공작에 의해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야 했다.
제4기는 독립협회가 ‘관민공동회’를 개최하고 자강개혁 내각을 수립하며 의회개설운동을 전개하고 수구파관료 및 보부상단체인 황국협회와 어려운 투쟁을 전개하던 시기로, 1898년 8월 28일부터 1898년 12월말까지이다. 이때에는 독립협회의 민중세력이 ‘관민공동회’를 전후하여 대승리를 거두어 국가의 자주와 자강이 약속한 듯하였으나, 일부 수구파 관료들과 황국협회의 반격을 받고 힘겨운 투쟁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1898년 11월 4일 해산당했다가 만민공동회의 투쟁에 의해 11월 26일 다시 복설되어, 황국협회의 공격에 대항하여 처절한 투쟁을 전개하여 재차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왕의 전격적인 탄압정책으로 12월 말 협회 자체가 강제 해산당함으로써 독립협회의 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독립협회보다 민중과 만민공동회가 더 적극적으로 선두에 나서서 자주민권자강투쟁을 전개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조직은 완전히 민중에 의해 주도되어 진다.
서재필의 독립협회 활동은 독립협회의 창립 전부터 그가 추방당하는 1898년 5월까지이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독립협회 회원들과 함께 근대시민운동을 전개하는 데 노력해, 독립협회가 민중과 호흡하는 사회단체로서 정치와 사회의 개혁에 앞장서는 선구자적 단체로 나아가게 했다. 그러나 그의 독립협회 활동은 그 직책이 고문이라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자신이 선두에 나서 활동하기 보다는 독립협회의 책임과 권한을 가진 회원 중심의 민주적 방식에 의한 운영에 오히려 자신의 힘을 다했다. 이러한 그의 독립협회 활동을 다음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 건립

서재필이 제안한 독립문·독립공원·독립공원[독립관] 건립사업은 독립협회의 창립과 더불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자주독립에 대한 열망이 이미 팽배했기 때문에 각계각층의 백성들이 독립협회의 목적을 지지하고 이 사업을 위한 보조금을 헌금하였다. 1896년 7월부터 1897년 8월까지 14개월간의 독립협회에 대한 보조금헌금 액수는 5,897원 19전 2리였다. 당시 보조금 헌금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발기인들이 510원을 헌금한 것을 비롯하여 왕태자도 1,000원을 하사하였고, 시민층·농민층·지식인층·학생층, 그리고 각계각층의 백성들이 이 민족적 사업에 동참하였다. 이 같은 현상은 창립 당시 독립협회가 고급관료의 주도하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민중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독립협회는 창립 2개월 후인 1896년 9월 6일 서재필에게 독립문 건립을 담당하도록 계약하고 그 비용을 3,825원으로 책정했다. 서재필은 독립문의 설계와 감독을 맡고, 먼저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형으로 하여 기본설계를 했다. 세부 설계도는 독일공사관의 스위스인 기사로 하여금 작성하게 하고, 시공은 심의석에게 담당시켰다. 심의석은 당시 유명한 건축기사이자 실제 독립문 건립을 담당한 자로 독립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간사원에도 선출된 인물이었다. 석공은 한국인 고급기술자들이 담당하고 역사(役事)는 주로 중국인 노동자들을 고용했다.
1896년 11월 9일 독립협회는 독립문의 기공식 일자를 11월 21일 하오 2시 30분으로 정하고, 각계각층에 다음의 청첩장을 발송했다.

대조선국 독립협회 회원들이 십일월 이십일일 오후 두시 반에 독립공원에서 독립문 주춧돌을 놓을 터인데, 예식을 시행하고 축사를 연설할 터이니, 각하의 참석하심을 바라옵나이다.
건양 원년 십일월 십사일
총대위원 이완용·권재형·이채연

마침내 1896년 11월 21일 토요일 오후 2시 반에 개최된 독립문 기공식은 무려 5,000~6,000명의 내외 귀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히 거행되었다. 이날 참석한 사람은 독립협회 회원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정부 각부 대신·각 학교학생·각국 공·영사 및 외빈들이 참석하였으며, 돈의문 밖 서쪽 외곽에는 차와 말이 구름처럼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
기공식은 배재학당 합창단의 ‘조선가’가 불러지는 가운데 시작된 후, 독립협회 회장 안경수가 독립문의 초석을 놓았다. 이어서 아펜젤러 목사가 조선에 하나님의 축복이 내리시기를 빌고 조선의 독립을 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기도를 하자, 안경수 회장이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연설을 통해 독립협회가 불과 5개월 전에 몇 명으로 시작한 것이 이제 2,000여 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 성장했음을 알리고, 독립협회의 일과 같이 나라일도 이렇게 합력해서 수행되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 뒤 한성부윤 이채연이 연설을 하고 배재학당 학생들의 ‘독립가’ 합창이 이어졌다. 외부대신 이완용은 ‘우리나라의 미래’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하였고, 그 뒤 서재필은 ‘조선내의 외국인’이라는 제목으로 영어와 한국어로 짧게 연설했다. 다음 배재학당 학생들의 ‘진보가’ 합창과 육영공원 학생들의 체조시범으로 기공식 행사를 마치고, 이어서 성대한 연회가 베풀어졌다.
독립문이 완공된 것은 기공한 지 만 1년 후인 1897년 11월인 것으로 보인다. 준공된 독립문에 대해 『The Independent』 1897년 12월 30일의 기사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대조선 독립협회는 독립관 앞에다 독립문의 건축을 완공하였다. 그리고 이 청결하게 보이는 백색 화강암문은 조용하게 서 있으나, 독립협회 회원들의 거대한 애국주의의 훌륭한 정신과 정력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독립문은 조선인의 진보와 애국심의 발전의 가장 뚜렷한 징표의 하나이다.

독립문 건립에는 예정보다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이 때문에 『독립신문』 1898년 1월 18일자는 독립문을 근일에 완공하였음을 보도하고, 비용이 3,825원이 들었는데 아직 지급하지 않은 경비가 1,000여 원이므로 보조금을 보내줄 것을 호소하였다. 부족한 금액은 이같이 『독립신문』을 통해 여러 차례 보조금 헌금을 호소하여 백성들의 성원으로 완결지었다.
완공된 독립문은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강암으로 축조되었고, 높이가 42척(13.2m), 가로 33척(9.99m), 세로 21척(6.36m) 터널의 폭이 17척(5.15m)로 건립되었다.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독립문의 정면에 한 글로 ‘독립문’이라는 이름을 새겨 넣고, 중국을 향한 독립문의 북쪽 머리에는 한자로 ‘獨立門’이라고 새겨 넣었다. 서재필이 처음부터 이 문의 이름이 국문으로 쓰여지기를 희망한 대로 한글로 이루어졌으나 다른 한편에 한자를 쓴 것은, 독립문 건립으로 인한 당시 많은 보수층인사들의 반발심리를 어느 정도 무마하려던 계산도 깔렸으리라 생각된다.
독립공원은 당시 독립문과 전 모화관 일대 지역에 나무를 심어 꾸몄다. 당초 서재필의 독립공원 건설계획은 이곳에 과수와 관상목과 화초와 여러 가지 관목을 심어 공원을 꾸밈과 동시에 공원을 세 부분으로 나누어, 그 일부는 옥외운동을 위한 운동장으로 보존하고, 한 일부는 관리와 시민의 산보와 휴식을 위한 휴식처로 만들며 다른 한 부분은 시민들이 일주일에 1~2회씩 시사문제에 대한 강연을 듣는 장소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막대한 경비가 소요되었으므로 기금부족으로 인해 계획대로는 건설되지 못하고 부분적인 공사로 공원을 마무리 지었다.
한편 독립관은 독립문 부근의 모화관을 개수하여 이루어졌다. 모화관은 중국사신이 조선을 출입할 때 환영잔치와 송별잔치를 베풀던 곳으로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 이후 사용하지 않고 방치된 공용건물이었다. 서재필은 이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이라 이름하고 독립협회의 집회장소와 사무소로 활용하게 했다. 독립관의 개수에도 막대한 경비가 들어 약 2,000원이 소요되었으며, 1897년 5월 23일 완공되었다. 독립관의 개수가 완공되자 독립협회는 5월 23일 왕태자가 국문으로 쓴 ‘독립관’의 현판식을 거행하고, 매 일요일 오후 3시마다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강연회를 갖기로 하였다.
이처럼 서재필에 의해 이루어진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건립은,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에 크게 이바지하고 나아가 우리나라의 근대개화사에 하나의 유산을 남겼다. 이에 대해 신용하 교수는 그 의의를 밝히기를 첫째, 이 사업이 각계각층의 성금으로 이루어짐으로써 서재필이 기대했던 ‘자주독립’의 사상을 온 백성들에게 널리 알리고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둘째, 이 사업이 고급관료들과 각계각층의 민중들의 자발적인 헌금에 의해 진행되고,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이루어짐으로써 이후 독립협회를 크게 발전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셋째, 이 건립사업을 계기로 세계에 대해 자주독립의 결의를 공포하고 한국인의 자각과 독립의지를 과시하였다.
넷째, 장구하게 보존할 기념물을 건립함으로써 후손들에게 자주독립의 중요성과 독립의지를 각성시켜 주었다(신용하, 261쪽).

토론회 개최와 민권의식의 고취

서재필은 독립문·독립공원·독립관의 완공이 가까이 오자 향후 사업을 계획하고 독립협회가 어떤 성격의 단체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검토하였다. 그는 윤치호와 함께 독립협회를 일종의 학회로 개편하고 이를 위해 부속건물로 강당과 도서관 및 박물관을 건립할 구상을 하였다.
그런 다음 1897년 5월 23일 ‘독립관’의 현판을 걸고 독립관 개수가 완성되자, 서재필은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이 독립관을 독립협회의 집회장소로 하여, 매 일요일 오후 3시마다 회원들이 이곳에 모여 강론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회원들은 이 계획에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창립 초기 독립협회는 회원들이 독립관에 모여 토론회나 강연회를 하기보다 한담이나 하는 사교단체의 성격이 짙었다.
1897년 8월 8일 오후 독립협회 통상회에서 서재필은 윤치호와 함께 회원들에게 독립협회를 좀 더 유용한 기구로 개편할 것을 주장하고 토론회를 조직할 것을 제의했다. 서재필은 한국 백성이 공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집회를 운영하는 법에 익숙하지 못함을 알고 토론회를 통한 훈련이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그는 배재학당 학생들을 상대로 한 목요강좌와 협성회를 통해 직접 학생들에게 토론을 지도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있었는데, 이러한 활동 경험을 독립협회로 연결시키려 하였다. 이와 동시에 독립협회 지도자들도 서재필이 주관한 협성회의 토론회 성공에 자극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제의를 적극 찬성하였다.
독립협회는 토론규칙 제정을 위한 3인 위원회을 선출하여 위원으로 윤치호·권재형·박세환을 지명하였다. 이들은 토론회 개최를 위한 준비를 하고 매 일요일 오후 3시에 독립관에 모여 토론회를 열되, 다음의 규칙을 따르도록 했다.

· 논쟁이 될 수 있고 회원과 방청인의 지식에 유익한 주제를 일주일 전에 선정한다.
· 연사 4명을 일주일 전에 선정하여 주제의 결정을 찬성하는 우편과 반대하는 좌편으로 양분하여 토론을 준비한다.
· 토론회 당일 회원들은 토론자로서 토론에 참가할 수 있게 한다.
· 회원 이외의 방청인의 참관을 적극 권장한다.
· 토론 후의 승부는 참석한 회원과 방청인의 다수의견에 따라 결정한다.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1897년 8월 29일 오후 3시 독립관에서 ‘조선에 급선무는 인민의 교육’을 주제로 76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제1회 토론회가 개최됨으로써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제2회 토론회는 방청인만도 200여 명이나 참석했으며, 토론회 참가자와 방청인 수는 계속 증가하여 제8회부터는 약 500명이 참가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독립협회 토론회는 1898년 12월 3일까지 34회에 걸쳐 진행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이면에는 서재필이 독립협회의 토론회 활동을 『독립신문』에 계속 보도하여 일반인들의 관심을 촉구시킨 데서도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처음 시작하는 토론회는 다수의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생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서재필은 토론회 벽두부터 수개월 동안 찬반을 토론한다는 것은 건전한 결정을 이룰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점, 건설적인 토론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의견의 차이점이 결코 개인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순전히 문제점에 관한 것임을 토론 참가자들은 기억해야 된다는 점, 그리고 논법은 내용면에서 설득력 있고 태도 면에서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한다는 점 등을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납득시켜야 했다.
그렇지만 곧 토론규칙과 방법에 익숙해져 토론회가 훌륭하게 진행되었음은 서재필의 다음 회상에서 잘 알 수 있다.

토의된 주제는 대체로 정치와 경제의 문제였으나 종교와 교육의 문제도 짚고 넘어갔다. 처음에는 한국인들이 청중 앞에 서서 공개 연설을 하는데 수줍어했으나 몇 번 지도해 주고 격려해 준 다음에는 그 중 수백 명이 매우 효과적인 연설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나는 발견했다. 나는 한국인들이 공개 연설에 천부적인 재질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물론 거기에서 발언된 모든 것들이 논리적이거나 계몽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생각들이 숱하게 쏟아져 나왔고 그러한 것들은 매우 유익했다. 그 밖에도 평등한 입장에서 여러 가지 주제를 토의하는 조용하고도 질서 있는 태도는 그곳에 참석한 청중들과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놀라운 자극을 주었다.(멕켄지, 신복룡역, 『한국의 독립운동』, 61쪽)

토론회의 주제는 모두 당시의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부문에 걸친 긴급한 문제를 선택했다. 이들 주제를 내용별로 분류하면, 신교육 진흥에 관한 것이 3회, 산업발달 주장이 5회, 민족문화에 관한 것이 1회, 미신 타파가 3회, 위생과 치안에 관한 것이 3회, 자주독립이 3회, 신문보급에 관한 것이 1회, 대외정책에 관한 것이 1회, 수구파 비판이 2회, 이권반대가 2회, 자유민권에 관한 것이 5회, 의회설립 주장이 1회, 독립협회 지회설치가 1회로 되어 있다.
토론회가 끝날 때에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안경수·윤치호·이상재·남궁억·지석영 등 다수의 독립협회 지도자들이 계몽연설이나 강연으로 회를 마무리했다.
독립협회는 토론회를 통해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이를 보면 첫째, 일반 회원들이 토론회에 참석하여 자유로이 자기의 의사를 발표함으로써 민중회원들이 독립협회의 표면에 뚜렷이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둘째, 방청인들이 토론회에 참가하여 감화를 받아 독립협회의 활동에 동조함으로써 회원이 현저히 증가하고 독립협회의 세력이 급속히 신장하게 되었다
셋째, 토론과정에서 회원들이 주제를 중심으로 서로의 견해를 교환함으로써, 독립협회의 집단의식과 사상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넷째, 토론회를 통해 참석자들은 공동의 집단의식을 갖게 됨으로써, 회원 간의 연대의식이 강화되어 독립협회가 하나의 민중적인 사회단체로 나아갈 수 있었다.
이렇게 서재필에 의해 제안된 토론회가 독립협회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 주고 독립협회의 내부구조를 변화시키며, 국민을 계몽하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되자, 회원들 모두는 토론회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독립협회는 단순히 토론으로 끝나는 토론회에서 벗어나 당면한 시국 문제를 직접 실천으로 옮겨 해결하려는 수단으로서 토론회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그 시기는 ‘구국선언상소’를 결정한 제21회(1898. 2. 13) 토론회부터 비롯되었다. 이 회의 토론주제는 「사람의 목숨이 지극히 귀하나 남에게 종이 되고 살기를 얻는 것은 지극히 귀한 인명을 천하게 대접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죄를 얻음」이었다. 당시 정국은 한국주재 러시아공사 스페이어가 절영도에 석탄기지로 만들고 한러은행을 설립하려 하는 등 한국의 주권을 위협할 때였다. 그리하여 이날 토론 참석자들은 러시아가 한국을 노예로 만들려 한다고 규탄하면서 격렬하게 토론한 뒤, 독립협회 회원 135명이 서명해 1898년 2월 21일 고종황제께 구국선언 상소를 올렸다.
그 이후 토론회는 독립협회의 자주자강운동과 병행하여 진행하고 토론회의 주제도 이 운동에 쟁점이 되는 문제를 다루었다. 이제 독립협회는 토론회를 통해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사항을 낱낱이 검토하여 해설하고, 또 회원과 민중간의 의견을 모아 발전시킴으로써 대중적 기반을 확고히 자리잡는 사회단체가 되었다.
이와 같은 독립협회 토론회의 성과에 대해 서재필은 1898년 봄 출국하기 전에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이 때 독립협회의 주목적은 민족적 발전과, 관습·법률·종교 및 기타 외국의 여러 가지 관련된 사정에 대한 문제를 토론하기 위한 것이었다. 독립협회의 주목적은 최근까지 한국에게는 전혀 생소한 여론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었다. 독립협회는 참으로 유용한 지식정보를 배포하는 중심기관이다. 따라서 그것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대회장이라기보다 하나의 교육기관이다. 이 매주의 토론회는 회원들의 사고에 놀라운 영향을 미치었다.…그들은 점차 단결의 정신과 민족주의와 자유주의적 관점과 교육의 중요성에 고취되게 되었다.(『Korea Repository』 1898. 8)

이처럼 독립협회의 토론회는 회원을 비롯한 일반 민중들에게까지 민권의식을 성장시키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러나 토론회는 독립협회가 1898년 8월 14일 자주자강운동을 위한 시위집회를 위해 잠시 중단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이것이 사실상 토론회의 종결로 이어졌다. 당시 수구파세력을 상대로 한 매우 긴장된 시위 때문에 토론회를 병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후 독립협회는 어려운 가운데 1898년 11월 말 다시 토론회를 재개하려고 시도했으나 12월 3일 1회밖에 개최 하지 못하고 종결되고 말았다.

의회설립운동

서재필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통해 국민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대의정치제도에 관심을 가졌다. 그리하여 처음에 그는 관찰사와 군수 등의 지방관을 지방민이 직접선거로 뽑는 지방자치를 제창하였고, 다음에는 행정부에서 입법사무를 분리하여 이를 전담하는 기관을 독립시키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마지막으로는 의회제도의 도입을 주장하였다.
그는 지방자치의 원리와 의의에 대해 이르기를, 지방민이 투표를 통해 지방관을 선거하면 유능하고 양심있는 인물이 뽑힐 것이고, 지방관은 지방민의 신임을 생각하여 부정을 저지를 수 없을 것이며, 민선에 의한 관리이기 때문에 자기를 선출해 준 지방민을 위할 것이며 지방민의 여론에 따르면서 관민이 상의하는 정치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았다.

관원들을 백성들이 투표하여 뽑아 그 중에 지식있고 정직하고 물망있는 사람으로 중임을 맡기는 까닭에, 관원들은 돈 한 푼이라도 무리하게 취할 수 없고, 도둑질도 없고, 원이 백성 섬기기를 아비와 같이하여 관민이 만사를 상의하며(『독립신문』, 1897. 1. 16, 「논설」)

정부에서 사람을 골라 보내지 말고 백성들 더러 관찰사와 원을 투표법으로 골라 정부에 보하고, 정부에서 그 사람을 시켜 보내면, 그 사람이 일을 잘하든지 못하든지 정부에 책망이 없을 터이요, 또 이렇게 뽑은 사람이 대신이나 협판이 천거한 사람보다 열 번에 아홉 번은 나으리라.(『독립신문』, 1896. 4. 16, 「논설」)

그는 이와 같은 지방자치가 한국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그 증거로 『독립신문』 1897년 1월 16일자 「논설」에 한국인들이 러시아에서 이러한 제도를 실시하여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음을 밝혔다.
한편 서재필은 지방자치제에 이어 행정부로부터 입법기관을 분리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1897년 2월 정부의 조칙에 따라 3월 23일에 발족한 교전소(校典所)가 관제개혁과 법률의 개정 및 정비를 시도할 때, 이를 주도하여 민권을 신장시키고 전제 군주권을 제한하는 입법정치를 구상했다. 그는 교전소 신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극 환영을 표했다.

조칙으로 교전소를 배설하여 정부대신 몇과 외국고문관 몇을 명하시어, 각식 법률과 규칙과 장정을 개정하여 각 마을들이 규모 있게 착란 없이 정부일을 일신케 하라 명령이 계셨고, 또 우리가 들으니 의정부 찬성들이 아무쪼록 각색 법률 규칙을 새로 정돈하여 일을 옳게 하려고들 한다니, 조선 인민에게 큰 경사라.(『독립신문』, 1897. 3. 30, 「논설」)

그리하여 서재필은 교전소에 독립협회 회원들을 대폭 참여시키려 했다. 그러나 기대를 모았던 교전소가 설립된 지 두 달도 못되어 자취를 감추게 되어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교전소를 통한 기대는 무산되었지만 서재필은 대의제도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서재필은 독립협회의 ‘구국선언상소’를 소개하는 자리에 공론의 중요성을 언급하면서 의회제도 설립의 필요성을 시사하였다.

나라마다 공론을 가지고 백사를 하는데 대한은 공론하는 사람들이 없는 고로 정부에서 세상 공론이 어떠한 지 알 수도 없고, 또 공론이라 하는 것은 공변되어야 공론이어늘, 그저 사랑에나 모여 한두 사람이 말하는 것은 공론이 아니다. 그런고로 나라마다 인민들이 모이는 처소가 있어 여럿이 규칙있게 모여 정대하게 만사를 토론하여 좌우편 이야기를 다 들은 뒤에 작정한 의논이 공론이라.
이런 공론하는 인민들이 있을 것 같으면, 정부에서 일하기고 쉽고 또 하는 일을 그르칠 리가 없는지라.…처음으로 대한에 독립협회가 생겨 회원들이 혈심으로 맹세하고, 다 위국애민 하자는 목적으로 의론을 하여 인민의 지식을 넓히고 또 공론을 만드니, 이런 경축할 일은 대한사기에든지, 한·당사기에도 없는 일이라. 이 사람들의 혈심으로 한 상소가 응당 국민 간에 좋은 사업이 될 장본일러라.(『독립신문』, 1898. 2. 24, 「논설」)

서재필의 의회설립구상은 독립협회를 통해 구체화 되었다. 이미 독립협회는 서재필의 주도하에 교전소에 독립협회 회원들을 대거 참여시키려 한바 있을 정도로 의회설립 문제에 눈을 뜨고 있었다. 독립협회는 자강개혁을 위한 정체(政體)개혁에 가장 긴급한 일이 의회를 설립하여 전제군주제를 입헌군주제로 고치는 일이라고 보았다. 그들은 의회를 설립하여 민중을 국정에 참가시킨 뒤 민중의 공론에 따라 내정개혁을 단행하고 자주독립을 굳게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서재필은 1898년 3월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의회 개설 문제를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이어서 4월 3일 독립협회 제25회 토론회 주제를 ‘의회원을 설립하는 것이 정치상에 제일 긴요함’으로 정하고 회원과 백성을 상대로 의회설립의 시급함을 널리 계몽하였다.
한편 윤치호는 1898년 3월부터 로버츠의 『의회통용규칙』을 번역하여 이를 요약한 책을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배포했다. 또 『독립신문』에 이 책에 대한 일반공매 광고를 내고, 토론회의 회의진행과 의회를 개설했을 때의 회의진행훈련을 시작하였다.
독립협회의 이러한 의회설립 움직임에 대해 정부 측은 리젠더(Legendre)를 통해 자문원(諮問院)의 설치가 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1898년 4월 14일 리젠더는 윤치호를 방문하여 정부대신들의 행정을 감시하는 기관으로 서재필이 주장하는 ‘완전한 대의정부’는 시기상조이므로, 절충안으로 자문원의 설치가 적합하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이에 대해 서재필은 『독립신문』 논설을 통해,

의정원이 따로 있어 국중에 그 중 학문 있고 지혜 있고 좋은 생각 있는 사람들을 뽑아, 그 사람들은 행정하는 권리는 주지 말고 의논하여 작정하는 권리만 주어, 좋은 생각과 좋은 의논을 날마다 공평하게 토론하여 작정하여 대황제 폐하께…재가를 물은 후에, 그 일을 내각에 넘겨 내각에서 그 작정한 의사를 규칙대로 시행하여…(『독립신문』, 1898. 4. 30, 「논설」)

라 하여 본격적인 의회설립을 주장하는 장문의 논설을 게재하고. 독립협회의 목표도 하나의 의회설립을 통한 완전한 대의정부 수립임을 명백히 했다.
서재필은 의회를 설립하여 입법과 행정을 분리하면, 다음과 같은 좋은 점이 있다고 하였다.
첫째, 입법부와 행정부의 역할이 전문화되기 때문에 능률적이 될 것이다.
둘째, 모든 일이 좌우 양편의 의논을 거친 후에 작성되므로 황제가 공평하게 작성한 결정사항을 대신들은 재능을 가지고 집행하면 되므로 행정에 실수가 없을 것이다.
셋째, 어떤 사항이든지 찬반 양편의 주장을 참작하여 결정되므로 국민의 의사와 주장이 충분히 반영되어 국민에게 유익할 것이다.
넷째, 정책 결정과정이 공개되어 전 국민이 이를 알게 되므로 자신의 불만을 정부에 말할 수 있게 되므로 정부와 국민 간의 관계가 친밀하게 될 것이다.
다섯째, 의회설립으로 국민·정부·군주가 상합되어 외국이 한국을 침범·능멸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수구파의 추방공작으로 서재필이 1898년 5월 한국을 떠나게 되면서 그의 의회설립운동은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들에게 이어졌다.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들은 이해 7월 3일과 12일에 각각 국왕에게 상소하여 정식으로 의회원 설립을 간곡하게 제의하고, 이어서 10월 28일부터 11월 2일까지 종로에서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의회설립을 강경하게 요구하였다. 그 결과 11월 4일 박정양내각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여 독립협회의 의회설립안과 타협하게 되었다. 서재필이 오랫동안 꿈꾸던 의회설립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곧이어 수구파들이 독립협회에 대해 반격을 가함으로써 의회설립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중추원관제가 공포된 바로 그날 수구파 세력이 소위 ‘익명서 사건’을 조작하여 전격적으로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을 구속하고, 뒤이어 독립협회를 혁파하라는 조칙을 내려 중추원관제의 실시를 중단시킨 것이다.
비록 서재필이 구상한 의회설립운동은 결실을 맺지 못하였지만, 이 운동을 통해 한국 최초로 백성이 주인이라는 의식을 널리 전파하고 민주주의 사상을 널리 보급시킨 것은 한국의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크나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만민공동회의 개최

아관파천(1896)에 의해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무는 동안 한국은 일본의 구속에서 벗어났으나 또 다시 새로운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문제가 열강의 끊임없는 이권침탈과 제정(帝政)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이었다.
제정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열강들은 고종의 신변 안전을 보장해 주는 대가로 온갖 방법으로 광산·철도·삼림·전선 등의 이권을 침탈해 갔으며, 고종은 전제권을 행사하여 자기의 신변 안전을 확고히 하기 위해 국내의 귀중한 자원을 외국에 넘겨주었다. 고종이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미국은 1896년 3월 운산금광 채굴권과 경인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고, 제정러시아는 1896년 4월 경원·경성광산 채굴권, 8월에는 인천 월미도 저탄소 설치권, 9월에는 무산·압록강유역·울릉도 삼림벌채권 등을 획득하였고, 프랑스는 같은 해 7월 경의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였으며, 영국과 독일도 특정 지역을 지정하지 않은 광산채굴권을 각각 1개씩 획득하였다. 집권한 조병식·민종묵·이윤용·민영기·김홍륙·유기환 등 친러파들은 열강의 이권침탈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열강에 의지하여 자기들의 사리와 권력유지에 급급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그동안 침투한 일본 상인세력을 발판으로 아관파천(1896)으로 실추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먼저 한국주재 일본 공사 고무라는 러시아공사 웨베르(베베르)와 각서를 교환하여, 한국 내 러시아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일본 상인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일본군대의 한국 주둔을 관철시켰다. 또 일본 측은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야마카타를 특사로 보내 러시아 외상 로마노프와 의정서를 교환하여 러시아가 한국문제에 대해 단독으로 간섭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비밀협정을 체결하였다. 그 결과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공동보호령이 되어, 한국을 둘러싼 열강들 사이에 일종의 세력균형이 형성되었다.
이러는 가운데 개혁파들과 일부 보수파는 협동하여 1897년 2월 20일 국왕을 경운궁으로 환궁시키고, 10월 13일 고종을 ‘황제’로 등극시킴과 동시에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어 대외적으로 완전한 자주독립국임을 재선언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내부 기초는 매우 허약하여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려는 제정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에 무력하게 대응하였다. 제정러시아는 1896년 6월 6일 해군제독 알렉세예프가 고종황제를 알현하여 한반도의 군사적 가치를 확인한 이후, 1897년 9월 2일에는 주한러시아공사를 온건한 웨버에서 스페이어로 교체하여 본격적인 침략간섭정책을 강화하였다. 스페이어는 한국에 오자마자 군사기지 설치의 제1차 작업으로 부산 절영도에 석탄고기지의 조차를 요구하였고, 대한제국의 군사권 장악을 위해 1897년 8월과 11월에 사관과 사병을 한국에 불러들이고 레미노프를 기기창의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스페이어는 서울에 1,300여 명의 러시아군을 상주시킬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대한제국의 제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1897년 10월 25일 기존의 영국인 브라운을 해고하고 알렉세예프를 탁지부의 재정고문으로 새로 임명하였다. 같은 해 12월에는 재정권을 장악하기 위한 금융기관으로 한러은행 창설을 계획하였다.
1898년에 들어서면서 열강의 이권침탈은 더욱 본격화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제정러시아는 1월 초부터 부산 절영도 석탄고기지 조차에 대한 인준을 다시 강력하게 요구함과 동시에, 이를 실현하기 위해 1월 21일 러시아군함을 부산에 입항시켜 수병을 절영도에 상륙시켰다. 일본은 1월 29일 1895년에 약속한 경부철도부설권의 인준을 공식적으로 요구해 왔으며, 이를 지원하기 위해 군사 2척을 인천항에 입항시킬 것임을 예고하여 위협하였다. 한편 미국은 2월 14일 이전에 약속한 서울시내의 전차 부설권의 인준을 받아냈으며, 영국은 1898년 초부터 군함을 인천에 입항시켜 무력시위를 하고, 러시아·일본·미국 등이 얻은 것과 유사한 이권을 획득하려 했다.
밖으로부터 열강의 각종 침탈이 가속화되어 주권의 위협이 자행되고, 안으로는 친러수구파 내각이 이들과 야합함으로써 1898년 초부터 대한제국은 자주독립을 잃어버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였다. 자주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하기 위해 자강개혁을 주장하는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개혁세력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먼저 독립협회는 1898년 2월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와 한러은행의 설립이 자주독립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토론회를 통해 강력히 비판한 결과, ‘구국선언상소’를 올린 것을 비롯하여 계속해서 공한을 보내 이의 철회를 요구했다. 그리고 3월에는 이전에 일본에 조차된 절영도 석탄고기지의 반환을 위한 공한을 외부(外部)에 보내고, 이러한 이권침탈을 가능케 한 부패한 친러파와 부패관리 민종묵을 규탄하는 공한을 의정부에 각각 발송하였다.
이러한 공한들이 발송되는 가운데 서재필은 1898년 3월 7일 통상회에서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구속될 위험을 각오하지 않은 회원은 독립협회에 탈퇴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정열적인 연설을 하였다. 이어서 정교가 필사각오를 맹세하자 참석한 모든 사람이 이에 찬동하였다.
제정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이 독립협회의 민족운동을 통해 전면적인 저항에 부딪히자, 러시아공사 스페이어는 3월 7일 장문의 조회를 외부에 보내어, 군사교관과 재정고문관을 보낸 것은 한국 황제가 요청한 것이므로 만일 한국 정부가 러시아의 원조를 불필요하다고 인정한다면 24시간 이내 회답을 보내 달라는 최후통첩을 하였다. 이것은 자위력이 없고 제정러시아의 지배하에 있는 한국 황제가 이를 거절하지 못할 줄을 알고, 고종을 협박하여 한국을 더욱 러시아의 예속적 지위 밑에 두어 고종으로 하여금 독립협회를 탄압하려는 협박장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서재필은 이 기회에 제정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을 완전히 배제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당시 독립협회 회장 이완용을 비롯하여, 정교와 독립협회 여러 지도자들에게 대대적인 민중집회를 개최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여기서 국민대표를 뽑아 이들을 외부에 보내 외부대신에게 러시아의 요구를 반대할 것을 강력히 요청하자고 하였다. 독립협회 내에는 처음 집회의 폭력화될 것을 우려하여 이완용과 윤치호의 반대가 있었으나, 민중집회의 필요성에는 모두 절감하여 서재필의 제안에 찬동하였다. 마침내 1898년 3월 10일 오후 2시 종로에서 한국 최초의 민중집회가 개최되었다.
민중집회는 서울시민 약 8,0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을 대대적으로 규탄하였다. 이 날 집회에서는 시전상인 현덕호가 임시회장으로 선출되고, 현공렴·홍정후·이승만·조한후·문경오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의 학생들이 러시아의 침략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자주독립을 역설하는 연설을 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장붕·현공렴을 총대 위원으로 선출하여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즉시 돌려보내고 대한의 자주독립권을 지키자’는 요지의 결의안을 외부대신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민중집회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모인 사람의 수가 기대 이상으로 많은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였고, 민중과 연사가 모두 이성적이면서 자주독립수호를 위한 확고한 결의를 보임으로써 민중의 성숙도를 증명해 주었다. 그리고 이번 집회에 만여 명의 사람이 모였다 하여,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명칭의 이름이 붙여졌고 서울의 정계와 외교계는 이 같은 대규모의 민중집회가 질서정연하게 성공한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독립협회와 러시아의 압력의 사이에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 철수문제 대책에 부심하고 있던 한국정부는 ‘만민공동회’의 결과 3월 11일 ‘자국의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한국 정부와 인민의 의사이므로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하기를 희망한다’는 요지의 문서를 러시아공사관에 송달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 측도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아 들여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철수해감으로써 독립협회의 주장은 관철되었다.
‘만민공동회’의 성공은 서재필이 제안한 우리나라의 근대적인 민중운동과 민주적 정치운동이 최초로 승리를 거두는 것임을 의미하였다. 그리고 이 민중집회를 통해 종래 개화운동에서 결여되었던 민중과 개화운동의 결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이후 독립협회가 정치단체로서의 성공적인 출범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서재필은 이러한 ‘만민공동회’의 성공을 “민의의 승리”로 표현했다.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 개최를 계기로 운영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회원 및 민중들의 발언권이 강화되면서 독립협회의 운영이 간부중심에서 회원 중심으로 변화된 것이다.
이러한 변신으로 독립협회의 힘은 더욱 강화되었다. ‘만민공동회’를 통해 민중의 힘을 배경으로 한 독립협회는 러시아의 절영도조차 요구를 철회시켰고, 이 조차요구의 근거가 된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기지 반환도 요구하여 관철시켰다. 그리고 러시아의 재정간섭 우려가 있는 한러은행도 폐쇄케 하고, 프랑스의 광산채굴지 요구도 좌절시켰다. 또한 독립협회는 만민공동회를 발전시켜, 1898년 10월 28일부터 6일 동안 대대적인 ‘관민공동회’를 개최하여 헌의6조를 결의하는 등, 자주민권의 자강운동을 보다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그러나 ‘만민공동회’를 통해 이권을 상실한 러시아와 일본 등 열강은 정부내 수구파들과 협동하여 보복조치를 강구하기 시작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만들고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우매한 민중을 선동하고 지도하는 인물로 서재필을 지목한 뒤 집요하게 추방공작을 전개한 것이다. 그 결과 서재필은 이들의 추방공작에 의해 결국 1898년 5월 14일 ‘만민공동회’를 개최한지 약 2달 만에 한국을 떠나게 된다.

4) 서재필 추방공작과 이한(離韓)

(1) 추방공작의 전개

서재필이 『독립신문』을 발간하고 독립협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는 동안 친러수구파 정부는 그의 활동에 대해 반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 시기는 1897년 2월경부터라 할 수 있다. 1897년 2월 조칙에 따라 설립된 교전소에 서재필이 독립협회 회원을 대거 참여시켜 민권을 신장시키고, 국왕의 전제군주권을 제한하려는 입법기관으로 구상하려 하자, 국왕과 친러수구파들은 그를 불온시하기 시작했다. 그 후 이들은 이 해 8월 제정러시아 측의 사주를 받아 미국공사관에 대해 『독립신문』의 폐간을 요청하였으며, 국왕과 내부(內部)는 온갖 방법으로 독립협회의 독립문 건립까지도 방해하기 시작했다. 서재필의 활동이 그들에게 위협과 탄압의 대상이 된 것이다.
서재필에 대한 탄압 배경에는 당시 한국에 세력침투를 노리는 제정러시아가 적극 가담하고 있었다. 제정러시아는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는 것을 이용하여 친러수구파들과 합세하여 서재필의 활동을 모함하기 시작했다. 1897년 8월부터 제정러시아는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한국내정에 노골적으로 간섭하여 친러수구파로 내각을 조직하게 하고 13명의 훈련교관을 파견하는 등 본격적인 침략간섭정책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러나 서재필은 신변의 위협과 탄압에 조금도 굴하지 않고 공·사석에서 서슴없이 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김홍륙·이용익·홍종우·조병식·이명상 등이 제정러시아 측과 결탁하여 인민수탈을 자행하며 국정을 문란시키고 있다고 공격하였다.
이에 대해 스페이어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방해하는 제일인자를 서재필로 지목하고 그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을 나타내었다. 1897년 9월 20일 윤치호가 예방했을 때 스페이어는,

이 나라에는 수많은 어리석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소. 내가 이 나라를 떠나기 전에 친미파가 없어지기를 바라고 있소. 친미파는 미국에 있어야 하고 한국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미국신문이라 할 수 있소. 그리고 그가 만든 독립협회·독립문·독립공원 그 모두가 부질없는 짓들이오.(『윤치호일기』, 1897년 9월 20일조)

라고 하였고, 윤치호가 다시 10월 12일 그를 방문하였을 때도 서재필에 대한 비판을 그치지 않았다.

황제는 서재필을 몹시 싫어하고 있소. 황제는 그를 미워하기 때문에 나는 그의 인물됨과 그의 나쁜 영향력을 여태까지 황제에게 말하지 않았소.…나는 여태까지 서재필을 불리하게 만드는 일을 하거나 말도 한 바 없소. 그런데도 세계에서 가장 유식한 사람인 것처럼 무턱대고 뽐내는 따위의 바보짓을 계속한다면, 몹시 사랑하는 미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으로 나는 믿소.(『윤치호일기』, 1898년 10월 20일조)

스페이어는 황제를 구실로 내세우고 있으나, 실은 자신이 서재필을 몹시 미워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서재필의 추방공작은 국제적으로 전개되었다. 먼저 제정러시아 측은 스페이어 공사가 한국 내 국왕과 수구파 내각을 조종하면서 서재필 추방공작을 강력하게 추진함과 아울러, 주미러시아대사 캐시니로 하여금 루즈벨트 미대통령을 통해 그의 소환을 추진하도록 했다.
일본 측은 『독립신문』이 자국의 대한침투정책에 저항하는 신문이고 자신들의 『한성신보』에 경쟁되는 신문이라 보고 서재필추방공작을 전개하였다. 일본정부는 고문으로 있는 미국인 윌리엄스를 내세워 미국정부에게 서재필추방을 요청하였다.
미국 측은 러시아·일본 측의 요청을 받고 서재필추방공작에 가담하였다. 미국 측으로서도 열강의 이권침탈을 반대하는 서재필을 불온시하고 있었는데, 특히 미국공사 알렌은 고종 편에 서서 위협적으로 그의 출국을 재촉하여 서재필의 입장을 매우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에 대해 서재필은 회상하기를, 미국인들을 가리켜 ‘돈키호테’라고 조소하였고 당시 서울에 거류하던 미국인들도 자신에 대해 그만 단념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다고 한다.
대한제국정부는 친러수구파 조병식이 외부대신이 된 1897년 12월부터 제정러시아와 측과 결합하여, 미국 측과 서재필추방을 위한 본격적인 공작을 전개하였다. 친러수구파가 서재필의 추방공작을 전개한 것은 무엇보다 그동안 그의 개혁활동이 자신들의 정권유지책과 배치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수구파 정부에 대한 비판과 제정러시아의 침략간섭정책에 대한 비판, 탐관오리의 부정부패 고발, 전제군주권에 대한 비판, 국정개혁과 민권신장의 주장 등으로 친러수구파가 누려온 기득권 유지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본 것이다. 이리하여 조병식은 12월 13일 미국공사 알렌을 조회하여 서재필은 미국정부로부터 초빙된 것도 아니고 미국정부가 추천한 것도 아니므로 그 계약기간의 만기를 기다릴 것도 없이 중추원고문에서 해고할 터이니, 그의 계약서를 회수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것은 한국정부가 정식으로 미국 측에게 서재필의 추방결정을 통고한 것이었다. 또한 조병식은 12월 14일 농상공부에도 조회하여 서재필을 이미 해고하였으니 『독립신문』도 폐간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외부의 이러한 요청에 따라 농상공부 통신국은 『독립신문』의 우송을 거절하기도 하였으며, 지방에서는 『독립신문』의 우편배달이 잘 되지 않는 일이 자주 일어나게 되었다.
서재필은 정부의 무모한 탄압에 대해 『독립신문』 12월 16일자 논설에서 신문의 사명을 분명히 밝히고, 이를 모르고 신문을 해치려는 자는 뒤에 가서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근일에 들으니 어떤 관인들이 『독립신문』을 미워하여 아무쪼록 신문을 해롭게 하려 한다니, 이것은 어린아이의 생각이라. 신문을 미워하는 것은 곧 공담을 싫어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을 위하여 우리가 생각하건대 대단히 그 사람 명예에 해로울 듯 한 일이요, 공평되게 한 말을 사혐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각이 좁은 연고라.
우리가 신문하는 것은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유조한 일이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닌 줄은 거진 대한 관인이 다 알 터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몸만 위해서 신문을 출판할 것 같으면 우리가 남에게 인심을 잃을 말을 하였을 리가 없은즉,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신문의 목적은 우부 우맹이라도 가히 알 터이라.…우리는 조금이라도 우리 해하려는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 사람을 불쌍히 생각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건대, 이 사람들이 속히 깨달아 자기 가족과 후생과 전국 동포 형제를 참사랑하게 될 것 같으면, 그때는 우리신문을 자기의 제일가는 친구로 알 터이오, 당장에 미워하고 해롭게 하려면 마음을 후회할 듯하더라.

(2) 독립협회의 서재필재류운동

친러수구파의 서재필추방공작이 거세게 몰아치자 독립협회는 그의 재류운동을 전개하였다. 독립협회는 대한 민중의 진정한 친구이며 모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해 온 서재필을 기한 만료 전에 중추원고문직에서 해고하여 추방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당하다고 극력 반대하였다. 독립협회는 신용진·남궁억을 총대위원으로 선정하여 1898년 4월 25일 정부에 서한을 발송하여 그의 재류를 정식으로 요청했다. 그 내용은 서재필이 중추원고문에 고용된 지 3년이 되지만, 한 번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여 정부가 국가 재정을 낭비하였으며, 그의 재류가 민중을 계몽발전시키는 데 반드시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그러나 이때는 대한제국정부가 서재필에게 중추원고문직 계약분에 한에 급료를 이미 지불하고 출국을 독촉하고 있은 때였으며, 미국공사도 본국에 서재필이 해임되어 출국직전에 있음을 보고한 후였다. 이로 인해 정부는 4월 28일 의정부참정 박정양 등의 이름으로 독립협회에 회신하여 서재필의 재고용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때 정부가 내세운 이유로는 첫째, 서재필이 인민의 개명진보에 큰 기여를 하였으므로 재정을 낭비한 것이 아니며, 둘째, 서재필은 이미 해고되었으니 재류여부는 본인의 의사에 달린 것이고, 셋째, 앞으로 각자 스스로 진보하여 국가의 독립기초사상을 확고히 다져 외국고문관을 고용하는 일이 더 이상 있지 않기를 바란다고 했다. 여기에는 서재필이 한국에 있는 동안 쌓은 많은 자주·자강의 계몽활동 성과에 대해 정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민중들과 일부 독립협회 회원들은 회장 윤치호의 동의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4월 30일 숭례문 내에서 만민공동회를 개최하여 서재필의 재류를 요청하는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이날 대회에서는 정부에 그의 재고용 내용을 담은 공한을 발송하고, 서재필에게도 모국의 재류를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로 결의하였다. 이를 위해 총대위원으로 최정식·정환모·이승만을 선출하였다. 그 중 서재필에게 보낸 서한은 다음과 같다.

경계자는 각하가 본래 우리나라 대대로 높은 벼슬을 지내온 후손으로 일찍이 갑과에 동과하고, 또 사관의 명을 받아 인방에 가서 졸업하고 돌아와 2~3동지와 더불어 우리나라의 자주독립의 기초를 창립코자 하다가, 일과 마음이 어긋나 외국에 떠돌면서 마음을 썩이고 피를 토하기 풍상을 지내여 다한 지 10여 년이었습니다.…다행히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의 기회를 만나…고종께서 중추원고문의 명을 제수하셔서 어언 수년에 또한 동지군자와 더불어 독립문을 세우시고, 『독립신문』을 만들어 우리 이천만 동포형제들을 교도하고 점점 나아가게 하여 지금에 이르렀으니, 각하의 고심혈성을 곧 온 나라가 함께 듣고 보는 바입니다.
이번에 외국인 해고의 날을 당하여 각하도 또한 그 하나에 들어있으니, 그 억울한 감정은 여기서 언급할 필요조차 없으나, 들은즉 각하가 장차 호연히 행장을 꾸린다 하니 그 불가한 것의 큰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대개 각하가 외국에 투적한 것은 진실로 만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오, 절절이 각하를 위하여 애석한 일입니다. 또한 각하의 조종분묘가 우리나라에 있고, 각하의 종친 친척이 우리나라에 있고, 각하의 영제가 또한 중한 직임을 맡았으니 각하가 어찌 차마 여기를 버리고 가려 하십니까. 첫째는 우리 대황제폐하의 호대한 은혜를 저버림이오, 둘째는 조상대대로 물려받은 은택을 잊음이오, 셋째는 우리 동포형제의 우의를 외롭게 함이 옵니다.…각하는 부모의 나라를 버리고 어느 곳으로 가서 천고불후의 이름을 세우려 하십니까. 만일 각하가 고집하여 마음을 돌리지 아니한 즉, 오직 우리 이천만 형제 중에 반드시 울분을 토하는 자가 있어 장차 이르기를, 각하가 단지 자기 자신만 위하는 꾀요, 중의를 돌아보지 않은 것이라 할 것입니다. 하물며 오늘날 만민공동회가 특히 각하의 떠남을 만류하려 하오니, 오직 각하는 세 번 생각하소서.(『독립신문』, 1898. 5. 5, 「만민공동회 편지」)

민중들의 원망이 깃든 서한에 대해 서재필은 아무런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자기가 떠나는 것을 반대한 열정을 이기지 못해 안타까운 심정을 표시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서재필은 그들에 대한 우의에 감동했다. 서재필은 민중대회 참석자들의 애국심에 사의를 표하면서 5월 2일 만민공동회 총대위원 앞으로 답장을 보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이 떠나는 이유는 나의 본의가 아니고 나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사정들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양해해 주길 바란다고 하였다. 또 그는 나의 출국문제는 정부와 미국공사가 합의하는 일이어서 정부가 재고용하기 전에는 재류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알렸다. 마지막으로 그는 내가 시작한 개혁운동을 여러분들이 계속 추진하길 부탁하면서, “당신들이 단합하여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개혁운동이 성공할 것임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회신에 대해 독립협회는 5월 2일 재차 정부에 서재필 재고용을 청원하는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정부는 이미 결정된 일이니 돌이키기 어렵고 서재필의 재류여부는 본인의 자유라는 답장을 거듭 보내왔다. 이것은 사실상 그의 재고용을 거절하는 것으로 서재필의 재류는 불가능해졌다.

(3) 『독립신문』의 인계와 이한(離韓)

서재필은 자신의 추방공작이 제정러시아 측뿐만 아니라 직접적으로 고종을 비롯한 친러수구파 내각과 미국 공사 알렌의 협공을 받고는, 더 이상 국내 체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미국에 있는 장모로부터 전보를 받았는데, 모친이 중병에 걸렸으니 죽기 전에 딸을 보기 원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에 가서야 이 전보가 주미러시아 대사 측의 장난이었음이 밝혀졌지만, 이 일이 당시 출국문제로 고심하던 서재필에게 한국을 빨리 떠나도록 결심하는 데 크게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알렌에게 계약기간 내의 월급을 지불해주면 해고에 응하겠다고 알렸다.
이러한 자신의 출국문제에 관한 서재필의 심정은 「체미오십년」에서도 그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어느 날 미국공사는 내가 황제와 모모세력에 적대적 태도를 취함은 가장 불현명한 일인즉, 위해가 신변에 미치기 전에 가족동반하여 미국으로 다시 가라고 권하였다. 하나 얼마동안은 더 계속하여 보다가 “내가 종자를 뿌렸은즉, 내가 떠난 뒤에라도 거둘 이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고 나는 하릴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기를 결심하였다.

서재필은 미국국적을 갖고 있어 법률상 미국인이 되어 있었으므로 그의 추방여부는 한국정부와 미국공사의 결정여하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미국 측이 그의 소환을 결정한 다음 이것을 피하는 길은 다시 한국에 재입적하는 것인데, 한국정부가 그를 추방하기로 결정하고 미국에 요청한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면 신문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동안 전력을 기울여 추진한 사업이고 또 당시 백성들이 열렬히 호응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폐간할 수 없었다.
서재필은 자신의 추방이 확실해 지자 『독립신문』의 인계문제에 심혈을 기울였다. 『독립신문』을 인수하려고 한 나라는 제정러시아를 비롯하여 일본과 한국정부였다. 당시 『독립신문』의 사회적 비중과 영향력에 비추어 보아서 이 신문을 누가 인수하느냐 하는 것은 중대한 문제여서 『독립신문』 인수를 둘러싸고 삼자가 움직였다.
먼저 제정러시아 측은 서재필에 대해 10,000원을 지불하고 독립신문사를 인수할 것을 제의했다. 그러나 서재필은 편집인은 자신이 지명하는 인사로 하여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뒤, 신문사를 제정러시아 측에 판매하는 것보다 차라리 굶는 편이 더 낫다고 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본 측은 『독립신문』의 매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당시 주한일본변리 공사 가등증웅(加藤增雄, 가또)은 서재필의 해고논의가 있은 1897년 12월 외무차관으로 승진한 고무라와 『독립신문』의 매수를 상의한 뒤, 고무라에게 서재필과 접촉하여 매수교섭을 전개토록 하였다. 그러나 서재필과 구체적으로 매매를 약속한 일본 측은 한편으로 서재필도 모르게 비밀리 한국정부에게 『독립신문』 매수공작 훈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것은 일본 측이 『독립신문』을 러시아 측이 매수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면서 자기들도 매수하지 않고, 한국정부로 하여금 매수케 하여 폐간시킬 계획을 획책한 것이었다.
대한제국정부는 윤치호의 권고와 일본공사 가또(가등증웅)의 비밀 권고에 따라 『독립신문』 매수를 고려했으나, 서재필이 추방되면 이 신문은 자연 폐간될 것으로 보고 매수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서재필 또한 정부에 매수되면 곧바로 폐간될 것이라고 보고 이에 응하지도 않았다.
독립신문사의 판매가 성사되지 않자 서재필은 신문사를 자신의 소유로 그대로 남겨둔 채, 윤치호에게 인계시켜 계속 발간하기로 결정했다. 윤치호는 서재필이 출국하는 경우, 『독립신문』의 국문판 주필을 자기에게 맡겨 줄 것을 서재필에게 요청한 일도 있어 이 신문사에 대한 인수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결국 서재필은 1898년 5월 6일 윤치호에게 신문사를 인계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서재필)는 나에게 『독립신문』의 국문판과 영문판을 모두 인수하라고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민을 위하여, 당신을 위하여, 그리고 내 자신을 위하여 그렇게 하십시오. 그것은 대사업이며 현정부 밑에서 협판을 하는 것보다 나은 일입니다. 러시아인들이 나에게 10,000원에 신문사를 팔라고 요청하고 있소. 그러나 나는 신문사를 러시아인에게 파는 것보다는 굶는 편이 낫습니다. 당신이 신문사의 책임을 인수하게 되면 정치나 정치적 인물들을 조심하십시오. 신문을 지속해서 최소한 1~2년 만에 유지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그 사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날 것입니다.(『윤치호일기』, 1898년 5월 6일조)

윤치호와 『독립신문』 인수인계문제에 대한 합의가 있자, 1898년 5월 11일 서재필은 ‘독립신문사’를 공식적으로 재설립해, 형식상 편집인 겸 소유자 측은 서재필로 하고, 실질적인 경영자 측은 윤치호로 하는 계약을 맺었다. 또한 서재필은 중단되지 않고 『독립신문』이 발행될 것을 확실히 하기 위해 독립신문사의 인쇄시설을 배재학당 내에 있는 삼문출판사에 임대해 주었고, 그 조건으로 『독립신문』의 국문판과 영문판이 자기가 처음 발행했을 때와 똑같이 인쇄되도록 설정하였다. 이 때문에 윤치호가 『독립신문』을 인수한 후에는 『독립신문』의 국·영문판뿐만 아니라, 기독교출판물도 인쇄하게 되었다.
『독립신문』 운영에 관한 계약이 성립되면서 서재필은 안심하고 출국할 수 있었다. 서재필의 중추원고문직 해고에 따른 7년 10개월의 잔여임기 급여지급 문제는 4월 말 알렌의 협조로 대한제국정부가 서재필에게 가옥임차료와 신문사 설립시 차용한 비용을 제외한 24,400원(미국행 여비 600원 포함) 경비를 지급하기고 약속하면서 해결되었다.
대한제국정부가 서재필에게 이렇게 큰돈을 지불하기를 원치 않았지만 그를 해고한 마당에 어떻게 할 수 없었다. 또한 그 무렵 서재필의 제안으로 독립협회가 만민공동회와 같은 민중집회를 개최하여 정부의 정책을 규탄하고 있었으므로, 협회를 주도하고 있는 서재필을 조속히 추방하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여러 조건이 충족되자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오전 11시 30분 30여 명의 독립협회 회원들이 환송하는 가운데 인천항에서 고국을 떠났다. 갑신정변(1884) 때는 대역무도의 한 사람으로 쫓기어 일본배 밑에 숨어서 망명길에 올랐던 서재필이 이번에는 많은 사람의 환송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받으며 고국을 떠난 것이다.

5) 서재필의 근대국가건설론

(1) 전통사상과 체제에 대한 인식

서재필은 한국의 유교적 전통문화와 체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먼저 그는 유교적인 학문인 사서삼경에 대해 이르기를,

사서삼경을 읽어 가지고는 이 세계에 무용지물이 될 터이니, 무슨 학업이든지 실상 학문을 배워 이 세계에 무슨 일을 한 가지 능히 하게 되어야 그 사람이 남에게 대접도 받고, 무엇을 하여 먹고 살든지 살 방책이 생길지라.(『독립신문』, 1896. 12. 22 「논설」)

라 하여, 실용적인 입장에서 유교적 학문을 무용하다고 보았다.
또 서재필은 신분차별의 유교적 가치관이 능력중심의 평등한 사회 건설을 방해하고 있다고 하였다. 공연히 양반행세를 하면서 윗자리에 있는 자가 밑에 있는 사람을 학대하거나 본인의 능력이 따르지 못하고 노력도 하지 않는데, 세습적으로 지위를 차지하는 것, 여성의 권리와 교육을 무시하는 유교적 여성관 등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가 『독립신문』을 창간할 때 기존의 한문이 아닌 한글로 신문을 만들어 한문을 모르는 상민이나 천민 및 부녀층도 다 읽을 수 있도록 한 것은, 유교적 남녀구별이나 상하귀천의 신분차별을 타파할 강한 비판정신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분차별 문제 외에 서재필은 관존민비의 폐해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가하였다. 그 예로 그는 공연히 트집을 잡고 백성의 인신(人身)을 구속하여 재물을 강탈하고, 지나치게 많은 종류의 잡세를 부과하여 수탈을 일삼는 것, 매관행위를 하는 것, 법을 무시하거나 불공평하게 실시하고 약한 자를 괴롭히는 것, 조령모개하여 공적인 일에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 것, 연구심과 책임감이 없이 벼슬만 차지하려 하고 일신의 안전과 영화만 생각하는 것, 상소는 잘 하나 책임 있는 자로서 임금께 직언하는 자가 없는 것 등을 들었다.
서재필은 ‘무(武)’보다 ‘문(文)’을 더 숭상하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하여, 독립을 유지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무’의 중요성이 적지 않다고 하였다.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부강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무’를 숭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과거 문과에 합격한 뒤 군사기술 습득을 위해 일본 호산육군학교에 유학한 일과, 미국에 건너가서 당시 조선에서 천대받는 의학을 공부했던 직접적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서재필은 유교적 가치관 가운데 ‘충(忠)’을 매우 강조하였다. 그는 ‘충’이란 국가에 대한 ‘충’이자 군주에 대한 ‘충’도 포함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국가는 백성으로 구성되어 있고, 백성의 안녕복지를 위해서 노력하며, 그들을 위하여 국가에서 정한 법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이 ‘충’의 길이요, 군주를 사랑하는 길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재필은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 각 관청과 학교에서 고종의 사진을 걸어놓고 경례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고종 탄신기념이나 조선왕조 건국기념 등의 행사를 독립협회 주최로 열리도록 했다. 또 그때마다 배재학당을 비롯한 각종 신식학교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부르게 하거나, ‘황제폐하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시키곤 했다. 이와 같은 ‘충’에 대한 그의 인식은 국가와 군주를 동일한 개념으로 보았기 때문에 나온 것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서재필이 ‘충’을 지극히 높인 것에 비해 ‘효(孝)’에 대한 언급은 별로 많지 않았다. 오히려 ‘효’를 ‘충’을 위한 방편으로 이해하였다.

나라라는 것은 부모보다도 중하고 형제, 처자보다도 더 높은 관계가 있는 것이라. 부모와 형제, 처자는 죽어도 내가 사는 도리가 있거니와, 나라가 망하면 내가 살 도리가 없는 것이니(『독립신문』, 1897. 7. 31 「논설」)

서재필은 유교적 전통사회의 폐해에 대해 많은 지적을 하였으나, 전근대적인 관료행정체제를 갖고 있는 조선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에 대해서는 깊은 성찰을 보이고 있지 않았다. 유교적 관료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결함에 대한 비판보다, 제도의 비능률성·비합리성에 초점을 맞추고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관료층의 부정과 불법, 아첨·중상모략·무책임 등의 행동을 지적하고 시정을 요구하지만, 왜 이런 것들이 잘 시정되지 않고 의타적이고 사대주의적인 관인근성(官人根性)이 생기는 지에 대한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선 그의 인식에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를 볼 때 전통사상 및 체제에 대한 서재필의 의식은 근본적인 변혁을 요구하는 것보다 체제 내에서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제한되고 점진적인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2) 근대국가건설론의 성격

근대국가건설론에 대한 서재필 생각의 뿌리에는 사회진화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독립신문』에 사회진화론이라는 말을 직접 언급하고 있지는 않으나, 본래 생물학에 대한 조예가 깊은 그가 진화론적 인식을 보여주는 주장은 많이 보인다. 그 가운데 몇 가지만 보면,

백인종은 오늘날 세계 인종 중에 제일 영민하고 부지런하고 담대한 고로 천하 각국에 모두 퍼져 차차 하등인종들을 가르치고, 토지와 토목을 차지하는 고로, 하등인종 중에 백인종과 섞여 학문과 풍속을 배워, 그 사람들과 같이 문명진보를 못하는 종자들은 차차 멸종이 되어, 미국과 같은 나라에는 토종이 백인종의 학문과 개화를 배우지 않는 고로, 몇 천만 명이었던 인종이 이백 년 이래로 다 죽어 오늘 자못 몇 천 명만 남아,(『독립신문』, 1897. 7. 17 「논설」)

라고 하였고, 또 독일의 교주만 조차를 ‘독일의 영광’이라 칭송하면서,

과학은 우리에게 약육강식의 법칙을 가르쳐 준다. 그 법칙은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The Independent』, 1897. 11. 30 「Editorial Notes」)

라고 하여, 적자생존·약육강식의 사회진화론적 견해를 밝히고 있다.
이처럼 사회진화론적 사상은 서재필의 근대국가건설론의 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즉 그는 힘이 약하면 남의 나라에 먹히게 된다고 말하고,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침범하는 것이 나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약해서 노예적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니 만큼, 한국도 빨리 부강하게 되어 일본으로부터 대마도를 찾아오고, 만주를 차지해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였다.(『독립신문』, 1896. 5. 3 「논설」)
그러면 사회진화론에 바탕을 둔 서재필의 근대국가건설론은 어떠한 모습이었는가. 그는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국제사회에서 한 국가가 살아남으려면, 서구의 문명을 적극 수용해서 자본주의적 산업경제를 일으켜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조장을 세워 각색 물화를 제조하며 장사하는 집이 동네마다 일어나 외국 물건을 수입하여 내국 물건을 수출할 줄을 알고, 화륜선을 지어 세계 각국에 조선 국기를 단 상선과 군함이 바다마다 보이며, 국중에 철도를 거미줄 같이 늘어놓아(『독립신문』, 1896. 10. 10 「논설」)

근일에 조선서 유지각한 이들이 마차회사를 만들어 물건을 마차로 싣고 다니게 하며, 은행들을 배설하여 인민의 상업이 흥왕하게 하며, 활판소를 배설하여 외국 학문을 번역하여 인민의 교육을 도와주라 하니,…우리 생각에 정부만 튼튼하고 내지만 종용하면, 조선 사람들도 차차 눈과 소견이 열려 동양 안에서 내노라고 하게 될 듯하더라. 이런 회사들은 전국 인민이 보호하여 보존케 하며 흥황케 하는 것이 곧 나라 근본을 길러 주는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노라.(『독립신문』, 1897. 1. 10 「논설」)

이러한 근대 문명을 수용하는 모델로 서재필은 문명국화된 일본을 본받아야 할 것이라 하였다. 그의 일본에 대한 인식을 보면,

일본도 삼십 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만 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오리오만은, 일본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쓰고(『독립신문』, 1896. 4. 25 「논설」)

인민을 교육하여 학문을 배우게 하고 법률을 공평하게 시행하여 사람들이 학문도 배우고 물건 제조하는 법도 배우며, 사람의 재산이 많아지든지 사람이 바른 말을 하여도 법률에만 범치 않으면, 그런 사람을 일본 천황이라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그런 권리를 정하여 시행하니, 오늘날 일본이 동양에 제일 부강한 나라가 되었는지라. 그 사람들도 구미(유럽·미국) 각국에 가서 이것을 배웠다가 그렇게 되었는지라.(『독립신문』, 1896. 12 .3 「논설」)

라 하여, 일본이 일찍이 개국하고 구미(유럽·미국)에 유학생을 배워 서양의 사상과 정신, 과학과 기술을 배워 문명국가를 이룩하는 데 성공하였으니, 우리도 일본의 길을 답습하면 충분히 일본과 같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이 때문에 서재필은 국가의 정체(政體)는 일본과 독일의 권력구조와 같이 군주국을 유지하면서 개명관료들에 의한 위로부터의 개혁을 추진하는 입헌군주국의 형태를 지향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일본에 대한 인식은 단지 문명국가로 발전하기 위한 답습이지 일본이라는 나라가 좋기 때문에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일본의 부흥과 발전을 보고 경탄하고 한국도 일본과 같이 부흥 번영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본사람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는 한국사람은 일본인에 대해 ‘타고난 증오감’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일인의 앞잡이가 되어 동족의 재산을 약탈하는 것을 ‘거머리’라고 규탄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경제적 침투에 깊은 우려를 표명하여 일본상인의 불법,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나 전당포의 부동산 갈취 등을 고발하고 그들의 침략성을 폭로하였다.

일본과 청국이 싸운 후에는 조선이 독립이 되었다고 말로는 하였으나 실상인 즉 일본 속국이 된 것 같은 지라. 조선내정과 외교하는 정치를 모두 일본 공사관에서 하였으니, 독립을 하여도 남의 나라 사신이 그 나라 정부 일을 결정하는 나라도 또 있는지 우리는 듣고 보지 못하였노라.(『독립신문』 1896. 5. 16, 「논설」)

그런데 서재필은 산업화된 문명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외국의 제도와 문물을 덮어놓고 받아들이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서양이 문명화했으니 거기서 많은 것을 본받아야 하겠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 전에 그것을 옳게 받아들이고 스스로 진보할 수 있도록 실상을 따지며 실용성을 검토해 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즉 “지금 갑자기 외국 규칙과 법률과 풍속을 갖다가 억지로 사용할 생각을 말고”, 우선 진실과 사리를 옳게 판단할 수 있도록 먼저 땅에 거름을 주듯 국민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재필의 근대국가건설론은 국민의 의식개혁이 뒤따라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의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입장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그가 신문 이름을 『독립신문』이라 한 것을 비롯하여 독립협회·독립문·독립공원 등에 ‘독립’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도 이러한 주체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었음을 이해된다.
이러한 ‘독립’에 대한 그의 생각은 해방 후 1898년 『신민일보』사장 신영철과의 대담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독립’은 피 흘려서 찾는 것이고 그래야 하는 것인데, 한국사람들은 ‘독립’은 외국에게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1895년에 하관[下關(시모노세키)]에서 열렸던 청일강화조약(시모노세키조약, 1895)에서 일본은 한국에 독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일본을 위하여 주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지금 한국 문제를 해결하려고 내조한 유엔위원단이 정부를 수립한다고 하는데, 그 정부도 한국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므로 오래 지속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독립’이란 말은 내가 지어낸 말인데, 나는 당시 한문을 잘 알지는 못하였습니다. 말하자면 앵무새처럼 흉내를 내는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남에게 의지하지 말자’는 정신에서 ‘혼자 서자’는 의미로 ‘독립’이라는 말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혼자 선다’는 것은 결코 ‘고립(孤立)’이나 ‘유아독존(唯我獨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은 ‘자립’인 것입니다. ‘자립’·‘자주’·‘자율’ 이것이 독립정신인 것입니다. 한국사람들에게는 이것이 결핍하여 있다는 것입니다.(『신민일보』, 1948. 3. 14)

그런데 서재필의 근대국가건설론에는 국방력을 강화시키는 것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방력 강화의 일차적 목적을 그는 다만 제국주의 침략세력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였던 의병이나 동학도들을 진압할 정도의 수준에서 파악하였다.

조선은 세계 만국이 오늘날 독립국으로 승인하여 주어 조선 사람이 어떤 나라에게 조선을 차지하라고 빌지만 아니하면 차지할 나라가 없는 지라. 그런고로 조선서는 해·육군을 많이 길러 외국이 침범하는 것을 막을 까닭도 없고, 다만 국중에 해·육군이 조금 있어 동학이나 의병같은 토비나 진정시킬 만하면 넉넉할지라.(『독립신문』, 1897. 5. 25 「논설」)

국방력 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 본성을 외면하는 것으로, 그의 근대국가건설론의 한계를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더욱이 동학이나 의병운동을 폄하하는 것은 그의 근대국가건설론이 일반 민중 속에 깔려있는 강렬한 민족의식을 수용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 때문에 그의 근대국가건설론은 광범위한 일반 민중의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된 젊은 학생층 및 지식층 위주로 국한됨으로써 당시로서는 큰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의 노력은 당시 보수적인 한국 사회에 근대적인 국가건설에 대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이후 수많은 민중과 그 지도자들에게 활발한 구국계몽운동을 전개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제5장 미국에서의 독립운동

1. 독립운동 투신배경

1) 사업가로의 변신

서재필은 1898년 5월 14일 한국을 떠나 미국에 간 직후 미육군 군의관으로 복무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미국은 1898년 4월부터 스페인과 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옛 상관이던 리드박사가 당시 급속히 퍼지고 있는 황열병 연구팀장으로 쿠바로 떠난 것을 알고 미국 도착 직후 육군 군의관으로 입대한 것이다. 그는 미서전쟁이 끝나는 이 해 12월까지 쿠바에서 황열병 환자를 수송하는 하지호에서 근무한 뒤 필라델피아로 돌아오게 된다.
군복무 후 서재필은 곧 펜실베니아대학 소속의 유명한 위스터(Wister)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하였다. 그가 당시 어떠한 연구를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연구소 연보 1903년 3월란에 보면 해부학 도보(圖報)를 출판하는 데 종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의학관련 출판에 관계한 것으로 보인다.
1904년 서재필은 위스터연구소를 그만두고 해리 힐맨아카데미학교 1년 후배인 해롤드 디머(Harold Deemer)와 윌크스 베리에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다루는 ‘디머 앤 제이슨(Deemer & Jaisohn)’ 회사를 설립하였다. 그 다음해 그는 필라델피아시 체스트너트에 ‘디머 앤 제이슨’회사 지사를 설립하여 1913년까지 운영하게 된다.
서재필이 사업을 시작한 동기에 대해 『동아일보』 1935년 1월 3일자 「체미오십년」에서는,

내가 미국에서 다시 돌아와 보니 3년간이나 의학과 인연을 멀리하고 있었던 만큼 그 길에 낙후된 느낌을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다시 대학의 연구생이 되든지 아니면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그 때 마침 펜실베니아에 사는 한 학교 친구가 인쇄업을 경영하니 같이 해 보자고하여 나는 그와 함께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라고 하여, 3년여의 한국 생활로 의학지식이 낙후되어 의사로서의 활동을 재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업 방면에 뛰어들었다고 회상하였다. 그러나 그가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위스터연구소에서 연구원에 종사한 사실을 감안할 때, 미국 도착 이후 몇 년 동안은 다시 의사의 길로 가려고 노력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던 중 연구소에서 의학관련 출판일에 종사하면서 옛친구인 디머를 만나 인쇄 및 문구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본격적으로 인쇄일에 관여하게 된 것은 한국에서의 『독립신문』 발행 및 운영의 경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고는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사업가로 변신한 서재필은 사업이 확장되자 해롤드 디머와의 동업관계를 청산하고 1914년부터 1924년까지 필라델피아에서 단독으로 ‘필립 제이슨회사(Philip Jaisohn & Company)’라는 사업체를 운영하였다. 그의 사업은 처음 5,000달러로 시작한 것이 10년 후에 15,000달러로 확대되었고, 필라델피아 시내에 두 곳의 상점과 종업원 70여 명을 가진 사업체로 발전하였다.
사업가로서 뿐만 아니라 서재필은 공익활동에도 분주하였다. 필라델피아 상업협회의 회계직과 메이슨의 중요 회원으로 활동했고, 제1차 세계대전(1914)시기에는 연합국에 차관조달을 담당하는 ‘전미안보연맹’의 회원으로도 관여했다. 이로 인한 활동으로 그는 필라델피아시 정치·종교·교육계 인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이것은 3·1운동(1919) 이후 서재필이 필라델피아에서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할 때나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 및 한국친우회 활동시, 유력한 미국인들의 협조를 이끌어내는 데 유리한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3·1운동(1919) 이전까지 서재필은 재미한인사회의 전면에 뚜렷하게 나서지 않고 있었다. 더구나 국내와의 관계도 『독립신문』의 운영권을 윤치호에게 인계해 준 뒤 서재필이 형식적으로는 편집인 겸 소유주로 남아 계속 신문에 관여하였으나, 1899년 12월 4일자로 신문이 폐간되면서 완전히 단절되었다.
그러나 갑신정변(1884)의 주역이자, 『독립신문』·독립협회를 창설했던 과거 경력 때문에 재미한인사회에서 항상 일정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한 예를 살펴보면, 먼저 이승만·윤병구와의 만남을 볼 수 있다. 1905년 8월 러일강화회의(포츠머스 강화회의)가 미대통령 루즈벨트의 주선으로 포츠머스에서 개최된 것을 안 하와이 한인들은, 이 해 7월 에와친목회와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공립협회가 협력하여 조미수호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 1882)에 의거 한국의 독립보장과 강화회의(포츠머스 강화조약, 1905) 참석을 요청하는 청원서를 미대통령에게 제출하기로 하고 윤병구와 이승만을 그 대표로 선정하였다. 대표로 선정된 이들 두 사람은 필라델피아에 있는 서재필을 찾아와 이번 일을 어떻게 착수할 것인지에 대해 자문을 구했는데, 서재필은 그들과 함께 영문 청원서를 완성하고 이것이 미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런데 당시 미국은 1904년 1월에 이미 러·일(러시아·일본)문제에 관해 일본과 호의적인 중립을 약속한 바가 있고, 1905년 7월 태프트-가츠라 사이에 밀약(가쓰라태프트협정, 1905)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지배권을 인정하고 있었다. 특히 루즈벨트는 일본에 대해 호의적인 입장을 갖고 있어 한국문제가 받아들여질 분위기가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 게다가 주미대한제국공사 대리 김윤정이 본국 정부의 지령이 없다는 이유로 협조하지 않아, 서재필의 노력은 결국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한편 1907년 5월경 고종의 밀사로 파견된 이상설 특사가 잠시 뉴욕에 들렀을 때 서재필이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할 문서를 이승만과 함께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미국에 온 여운홍이 1918년 1월 14일자로 일본을 떠나면서 서재필과 시국문제를 협의하였고, 3·1운동(1919) 소식이 대한인국민회에 처음 전해졌을 때는 중앙총회장 안창호가 그 소식을 즉시 서재필에게 알려 협조를 구하기도 하였다.
이를 볼 때 3·1운동(1919) 이전 서재필은 외견상 사업가로서 활동한 것으로 보이나, 실제로는 국내외에 있는 애국지사들과 직·간접으로 교류하면서 한국 사정을 계속 교감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그는 기회가 오면 언제라도 이들 한인들과 함께 민족 독립운동의 전면에 나설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영문잡지 발간계획

서재필이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때는 1918년 11월 제1차 세계대전(1914)이 종결된 직후라고 볼 수 있다. 그는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가 한국의 사정을 널리 알려 세계열강의 동정과 지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고, 영문잡지 발간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그의 구상은 1918년 12월 19일자로 대한인국민회(‘국민회’로 약함)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보낸 서신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

각하(안창호)의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세계에 오직 한국밖에는 그 생명을 보호하는 장기나 혹 기관이 없는 나라는 다시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은 정복주의나 제국주의의 밥이 되었소이다. 오늘날 한국이 일본의 밥이 되어 그의 모든 권리가 박멸되고 백성들이 승전국의 노예가 되어 구차한 명(命)을 보전하였으나, 아직까지 누군가가 일본의 불공평한 학대를 항거하거나 스스로 보호하고자 하는 자가 없으며, 또 누군가가 통일한 힘으로 그 육체와 영혼을 결박한 일본의 무거운 기반을 벗기를 꾀하는 이도 없도다.
내가 아는 한 이 세계에 한국의 친구와 참마음으로 한국을 돕고자 하며 한국의 사정을 위해 세계에 여론을 일으킬 자가 없으니, 그 이유는 한인들이 스스로 그 원통한 사정을 표하는 자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장차라도 한인에게 동정을 표할 나라는 없을 것이로소이다.…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은 미주에서 제일 고등한 영문잡지를 시작하되, 한국·일본·중국의 역사상과 현시의 정형을 게재하고자 함이니, 이러한 기관으로 우리는 세계의 눈앞에 한국이 어떻게 국치(國恥)당한 것과 일본이 어떻게 한인을 대우한 사실을 들어내고자 함이라. 이것이 우리의 마땅히 또 능히 만들어 놓을 만한 기관이며, 또는 우리가 이것으로 능히 해외나 해내에 있는 한인의 생명을 보호하리라.(『신한민보』, 1919. 2. 20, 「서재필박사의 편지」)

이 편지에서 서재필은 새로 발간하려는 영문잡지는 일본의 한국 지배 상황을 전세계에 널리 알려 공의와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한국의 친구가 되도록 하여, 능히 한인의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 계획임을 밝혔다. 이를 위해 그는 한 주에 50달러씩 한인들에게 사게 해서 자본금 50만 달러를 모아 여기서 나오는 이익금으로 운영한다면 영구적으로 발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서재필의 제안 배경에는 당시 이승만·정한경을 대표로 선정하여 파리강화회의(1919)에 보내려 한 국민회의 계획을 무모하고 실익이 없다고 판단한 데서 나왔다. 그는 1919년 2월 3일 파리행 여권을 발급받기 위해 잠시 필라델피아에 온 이승만·정한경에게,

금회지사는 만사가 허사라. 평화회의에 가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라. 결국 우롱만 당할 것이 뻔하오. 설사 파리에 가서 유익한 일이 있다고 가정 하여도 여권이 나오지 않을 것이라(강덕상편, 『현대사자료』25, 444쪽)

했는데, 이는 당시 한국민족이 국제사회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열강들에게 한국문제를 거론시킨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는 미정부가 윌슨의 국제연맹 창설문제에 몰두하면서 일본과의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자 하려는 상황을 감안해 볼 때, 한인대표들에게 파리행 여권을 발급해 줄 것이라 기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판단했다. 이런 저간의 사정을 감안한 서재필로서는 먼저 식민지 한국에 대한 동정여론을 일으키는 것이 한국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름길로 보고 영문잡지 발간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의 잡지발간 구상의 배경에는 과거 『독립신문』 창간시 가졌던 계몽활동의 중요성에 대한 경험이 지금까지 그대로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고, 현재 하고 있는 인쇄사업 또한 잡지발간을 착안하는 데 좋은 여건을 제공해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겠다.
서재필의 영문잡지 발간 제의에 대해 국민회에서는 1919년 1월 4일과 2월 24일에 두 번씩 논의하였으나 부결시켰다. 부결 원인은 그가 제시한 50만 달러(뒤에는 25만 달러로 낮추어짐)의 돈은 재미한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라는 점과, 그만한 돈이면 그 일보다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이러한 결정 이면에는 국민회가 당시 현안문제를 이승만·정한경의 파리강화회의(1919) 참석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는데다 이 일을 계기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여 국민회의 위상을 강화하려는 데 더 큰 관심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돈이 드는 영문잡지 발간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것이다.
서재필은 국민회의 힘을 통하지 않고 한인들의 자발적인 의연을 통해 독자적으로 영문잡지를 발간하고자, 1919년 2월경 뉴욕한인들이 모인 공동회에서 잡지발간의 취지를 설명하고 2,000달러를 거두었다. 그리고 자신도 이번 일을 위해 개인 재산 7만 달러를 내놓겠다고 한 뒤 모자라는 돈은 한인들의 공동출자를 통해 충당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 일의 협력자로 생각한 이승만이 당시 윌슨 대통령을 만나는 데 더 관심을 쏟고 있는데다, 3·1운동(1919)이 발발한 이후부터는 대외적인 외교 활동을 위해 오히려 서재필에게 잡지발간 계획을 중지하도록 요구함으로써 더 이상 일을 추진할 수 없었다.
한편 서재필의 영문잡지 발간계획은 긍정적인 의도와는 달리 방법면에서 재미한인의 생활상태를 고려하지 못한 과욕을 보이고 있었다. 그가 잡지발간을 위해 제시한 총금액은 국민회 1918년도 총수입이 23,310달러에 총지출이 15,146달러인 것과 비교할 때 막대한 액수였다. 또 재미한인의 월평균 수입이 하와이한인의 경우 25~30달러이고 북미한인의 경우 50~150달러였으니, 그의 계획이 재미한인들의 경제적 실정을 감안하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재필의 영문잡지 발간계획은 현실을 무시한 과욕과 협조자의 부족 등으로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지만 국제정세의 변화에 대처해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무엇인가 해보려는 그의 의도는 높이 평가될 수 있으며, 더구나 곧이어 3·1운동(1919)이 발발한 뒤 선전활동의 중요성이 미주 한인사회에 대두되면서 그의 구상이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서재필의 통찰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비록 성사되지 못했지만 서재필로 하여금 3·1운동(1919) 이후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하고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여건을 마련해 줌으로써 나름의 의미가 있었다고 하겠다.

2. 독립운동의 전개

1) ‘제1차 한인회의’ 개최

(1) 개최배경과 과정

재미한인사회에서 국내 3·1운동(1919) 소식을 접한 것은 현순의 전보가 3월 9일 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전달되면서 비로소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재미한인사회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국민회는 미국이 주도하는 파리강화회의(1919)를 한국독립의 호기로 판단 이승만·정한경을 한인대표로 선정하고 이들을 파리로 파견하는 데 힘을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미정부가 한국문제를 일본의 국내문제로 간주하여 한인대표에게 여권 발급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모처럼 일어난 독립운동의 열기는 침체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국내 3·1운동(1919) 소식이 전파되자 재미한인사회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당시 『신한민보』 1919년 3월 13일자 호외는 3·1운동(1919) 소식을 받은 충격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요사이 속이 썩어오던 일을 생각하면 스스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나니. 작년 11월 이후 바라고 기다리던 가운데 얼마나 헛꿈을 슬퍼하였느뇨? 대전란 평화 당시 천재일시의 좋은 기회를 만나…평화회의의 대표자를 뽑아 놓았지마는, 국제관계가 가로걸려 출경이 곤란하고 가령 길이 순하게 열려 프랑스 파리에 건너간다 할지라도, 뒷소리 없는 백면서생 두서너 사람이 열강을 향하여 국가의 원통한 사정을 말함이 당연히 홀로 피를 토함과 다름이 없는 것이라. 그런고로…서양친구들이 말하기를 당신네들이 바다 밖에서 무슨 활동이 있어야 할 것이라 하여 우리도 그와 같이 생각하여 무슨 좋은 소식이 바다를 건너오기를 바랐지마는, 지금 내지의 형편을 보건대 대전란 이후 일본 경찰이 더욱 엄밀한 가운데 꿈적하면 잡아다가 강도·절도로 몰아 죽이는 터이니…바랄 수 없는 것이라.
그럼으로 슬퍼하였더니 3월 9일 오늘에 와서 3개월의 몽상이 일조에 이루었도다. 장쾌하여도 이렇게 장쾌하고 신기하여도 이렇게 신기한 일은 진실로 무엇에 비할 데 없으니, 기쁨에 겨운 우리는 눈물을 뿌렸노라.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3·1운동(1919) 소식을 즉시 재미한인들에게 알렸다. 먼저 그는 이승만·정한경을 비롯하여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백일규와 국민회 각 지방회에 소식을 전하고, 아울러 서재필에게도 전달하여 앞으로의 일에 협조를 부탁하였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익재미너(Sanfransisco Examiner)』지와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Sanfransisco Cronic1e)』지에도 알려 3·1운동(1919) 소식이 전 세계에 확산되도록 하였다.
3·1운동(1919) 소식은 재미한인들에게 독립운동 방략에 선전외교의 중요성을 인식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먼저 『신한민보』는 3·1운동(1919) 소식을 받은 직후 재미한인들이 나아갈 활동방향에 대해 언급하기를, 민첩한 선전활동을 통해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각국에게 알리는 것이 현재 한인들이 해야 할 급선무로 지적하였다.

오늘 우리들은 우리의 모든 힘을 특별히 외교방면에 대하여 극히 조심하며 주의하며 극력하여, 일본인 이외의 각국 사람의 동정을 얻도록 힘써야 되리니, 이는 곧 오늘날 한인의 제일 큰 급선무라 하노라.
우리는 아직 병력으로 일본과 전쟁할 수 없거니와 설혹 그러한 능력이 있다하더라도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민은 지난 4년 동안 지루한 싸움(제1차 세계대전, 1914)으로 수많은 생명과 재산을 잃었으므로 싸움이라면 머리를 흔들고 불찬성할 것이니 다만 민첩한 외교수단으로 각 국민들에게 말하여 깊은 동정을 얻도록 힘 쓸 것이다.…

한국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고는 도저히 동양의 평화를 길이 보전치 못할 이유를 논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말하여 세계 인민으로 하여금 우리의 참사정을 알게 함이 제일 상책이라 하노라.(『신한민보』, 1919. 3. 13, 「논설」)

또한 국민회에서는 안창호가 3월 13일 중앙총회 위원회의에서 3·1운동(1919) 이후 처음으로 재미한인이 취해야 할 것을 다음 세 가지로 제시하면서 선전외교로의 활동방향을 구체화시켰다.

첫째, 개개인의 독립의 각오와 일치된 행동을 가질 것.
둘째, 미국 각 언론·잡지나 종교계에 3·1운동(1919)소식과 기독교 박해사실 등의 한국사정을 미국민에게 알려 그들의 동정을 얻고 한인활동에 많은 도움을 얻도록 할 것
셋째, 이러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북미·하와이·멕시코 재류동포들의 재정공급의 책무를 다할 것.(『신한민보』, 1919. 3. 20, 「논설」)

이것은 3·1운동(1919)을 계기로 국민회가 그동안 추진해 온 강화회의 대표파견을 통한 청원외교 방면을 탈피하여 선전외교 방면에 주력할 것임 예고해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한국독립을 위한 선전활동의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는 시기에 서재필은 미주지역에서 처음으로 3·1운동(1919)에 대한 한인들의 공식적인 반응을 표명하기 위해,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First Korean Congress, 일명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 대회의 목적은 3·1운동(1919)으로 나타난 한국의 실상과 새로운 독립국가 건설의 열망을 미국사회에 전파하기 위함이었다.
처음 서재필은 뉴욕에서 각국 신문기자를 초청, 이승만·정한경의 연설로써 한국에 대한 동정을 일으키고자 구상했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필라델피아에 다수의 한인 동포들을 모은 가운데 미국내 각 언론계·사업계·종교계·교육계 등의 대표를 초빙하여 그들에게 한국사정을 전파하는 대규모 집회행사를 개최하기로 한 것이다.
이러한 계획변경 원인을 서재필은 세 가지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이번 대회가 이들 세 사람만의 행사가 아니라 미주한인 전체가 동참한 한인 전체의 행사로 확대시키려 한 점.
둘째, 필라델피아라는 지역이 미국의 독립선언과 헌법을 기초한 역사적인 도시라는 점에서 3·1독립운동(3·1운동, 1919)의 의미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 라는 점.
셋째, 필라델피아는 시간적으로 부족한 대회 준비기간을 효과적으로 대처하는데 서재필 자신이 모든 제조건을 잘 갖추고 있는 점.
그리하여 1919년 3월 24일 서재필·이승만·정한경은 ‘대한인국민회 총대표회위원’의 명의로 국민회 중앙총회와 각 지역 재류동포 및 유력한 미국인들에게 대회 개최를 알리는 다음의 청첩장을 보냈다.

미주 동편 몇 지방의 동지가 수차 의논할 결과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시에서 북미대한인연합대회를 열고…국어와 영어로 연설하여 대한독립선고의 주의를 발표하며, 독립운동에 대하여 우리는 생명과 재산을 바쳐 도울 뜻을 선고하며, 평화회의에 글을 보내 독립을 승인하라 하며, 옥에 갇힌 충애지사를 일인의 악형과 학살에서 보호하라고 공포하며, 우리가 독립을 회복한 후에는 공화정체를 쓸 것과 외교·통상·선교 등에 있어 국제상 책임을 다하며, 동양 평화와 만주개방을 보호한다는 뜻을 공포하며,…이 도성에 큰 길로 국기를 받치고 행렬하여 독립관에 가서 큰 연설과 축사와 만세로 폐회할 터이외다.
이 일에 제일 긴요한 것은 미주 각처에 산재한 동포가 다수히 모여야 할지니, 남녀노소를 물론하고 무슨 책임을 불계하며 이때는 제백사하고 경비를 자담하여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여하기를 저마다 주의할지라. (『신한민보』, 1919. 4. 3, 「대한인총대표회 청첩」)

‘제1차 한인회의’는 1919년 4월 14일부터 16일까지 필라델피아의 리틀극장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는 급하게 준비되었고, 특별히 한인들이 적은 미동부지역에서 개최되는 지리적 요인 때문에 많은 한인들이 참석할 수 없는 형편이었으나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3일 동안의 연 참가자 수가 100~150명 정도였는데, 이것은 당시 하와이를 제외한 북미한인의 수가 약 1,000여 명인 것과 자비를 부담해서 참석해야 함을 감안할 때, 짧은 준비기간에 적지 않은 사람이 참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석자들 중 미국인 인사로는 톰킨스(F.W. Tomkins) 목사, 밀러(H.A. Miller) 교수, 샤드트(A.J. Schadt) 교수, 딘(J.J. Dean) 신부, 쿡(Mrs. E.L. Cook) 재한선교사, 데밍(Mr. Demming) 재한선교사, 버코바이츠(H. Berkowitz) 유대교율법학자, 베네딕트(G. Benedict) 기자, 맥비(C. McBee) 목사, 리머(Reimer) 박사, 맥카트니(McCartney) 목사 등 11명이었다.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미국의 중·동부지역 한인유학생들이었다. 여기에는 미주한인유학생회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국민회는 윤병구와 민찬호를 파견하여 이 대회에 큰 관심을 보였다.
‘제1차 한인회의’의 계획은 서재필이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결정했으나 실질적인 대회 준비나 운영은 그 자신이 주관하였다. 이번 행사가 처음 뉴욕에서 필라델피아로 바뀌게 된 하나의 배경에 이승만·정한경과는 달리 미국사회에서 사회·경제적 그리고 지역적 기반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서재필을 염두에 둔 것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대회를 성공적으로 진행시키기 위해 필요한 연사의 초청이나, 장소선정, 그리고 시가행진에 필요한 필라델피아시측의 협조문제는 그의 노력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로 인해 서재필은 ‘제1차 한인회의’ 개회시 의장으로 선출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순서를 주도하여 사실상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에 직접 발을 들여놓았다.
서재필이 독립운동에 직접 뛰어들게 된 계기는 바로 3·1운동(1919) 소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사실은 서재필이 1925년 7월에 열린 하와이 범태평양회의 참가를 위해 잠시 샌프란시스코에 들렀을 때, 자신을 위해 베푼 국민회 환영식상에서 다음과 같이 잘 밝히고 있다.

30년 전(1898년) 인천항을 떠날 때 내 뒤를 받들어 주지 않아 한인들이 다 죽은 백성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1919)을 보니 산 백성인 줄 알았고 이런 백성은 반드시 자유독립을 하고 말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연설도 하고 선전사업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신한민보』, 1925. 6. 25)

이 대회의 조직 구성을 보면 먼저 의장은 서재필이 선출되었고, 간사는 임병직·김현철·장기한이, 서기는 천세헌이 각각 임명되었다. 대회 진행을 위한 경비는 참석자들의 자발적인 의연을 통해 충당하기로 하여 총 4달러의 많은 돈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 액수로 3일간의 대회를 진행시키기에는 부족하리라고 생각되며, 그로 인해 당시 성공한 사업가인 서재필의 찬조출연이 피할 수 없었다고 생각된다.

(2) 내용과 성격

‘제1차 한인회의’는 오전에는 주로 초청연사의 강연을 듣는 것으로 하고, 오후에는 주제별로 작성한 결의문 및 호소문을 발표하고 토의하는 순서를 가졌다. 각 주제별 결의문의 작성·발표는 미리 선정된 기초위원을 통해 하도록 했는데, 이 일은 본 대회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중심 활동이었다. 6개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
·「워싱턴의 미국 적십자본부에 보내는 호소문」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
·「일본의 지각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
·「미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

이들 각 결의문 중 몇 개를 살펴보면 먼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에서는 현 임시정부가 고매한 기독교인들이며 고등교육을 받은 자로서 모두 민주정부의 원칙을 신봉하고 있는 사람들이 세운 정부이기 때문에, 재미한인들은 도의적·물질적·육체적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밝혔다.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에는 우리의 투쟁 목표는 아시아 민주주의의 실현이고 희망은 기독교 신앙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므로 이 호소가 미국민의 지지를 얻을 만한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였다.
「일본의 지각 있는 국민들에게 보내는 결의문」에서는 일본 국민들이 지성 있고 현명하다면 일본정부에게 국제 정의의 원칙과 진정한 민주주의 정신을 받아들이게 해야 된다고 하였다.
「미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보내는 청원서」에서는,

우리의 유일한 목표는 우리 민족을 위한 자결이라는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다시 얻어 기독교 민주주의라는 기본이념 아래 자유국민으로서 성장하는 것입니다.(원성옥역, 『최초의 한국의회』, 191쪽)

라 하여 기독교 민주주의의 이념이 독립된 국가 건설의 이상임을 제시하였다.
위에서 언급된 이들 각 결의문의 일관된 관점은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 민주주의와 기독교정신을 실현하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서재필이 대회 개회사에서,

분명한 것은…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정착시킬 어떤 단호하고도 결정적인 조처를 취해야 하고, 그래야만 대륙에 민주주의와 나아가 기독교정신이 확고히 토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라 언급함으로써 이미 예고되고 있었다.
‘제1차 한인회의’는 몇 가지 점에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한국독립의 목표와 새로운 국가건설의 열망이 미국의 그것과 통일하게 보면서 미국을 과신하고 있는 점이다. 「미국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가운데 한국민이 주장하는 ‘자유’, ‘아시아 민주주의의 실현’, ‘기독교신앙의 전파’ 등은 “진정한 자유와 국제 정의의 실현을 위한 선구자적 사도”인 미국이 기꺼이 지지할 만한 것들로 인식하였다. 또한 이승만은 “한국 국민의 목표와 열망이 우리의 동맹국들과 함께 국제연맹을 구성하고자 하는 미국 대통령의 목적이나 열망과 일치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대회를 주도한 서재필을 비롯한 모든 참석 한인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둘째, 미국민에게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기 위해 대외선전용으로 계획된 집회라는 점이다. 미국 국가를 부르며 대회를 시작하고 있는 점과, 간간이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하였으나 대부분 회의진행을 영어로 진행한 점, 그리고 연사 초청이 모두 미국시민들로만 구성되고 있는 점, 이 대회 「회의록」을 영문으로 만들어 배포한 점, 마지막으로 이 대회가 미 언론에 보도되어 여론화시키는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점 등은, 이 대회가 순수한 ‘한인회의’를 목적으로 한 것보다 미국민을 상대로 한 대외선전용으로 고려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재필은 필라델피아의 여러 신문사들이 이번 대회를 보도하도록 적극 유도하였다. 그 결과 『Philadelphia Record』는 1919년 4월 16일자 논설에서 이 대회의 취지를 적극 지지해 주었고, 17일자에는 이 대회 마지막 날의 시가행진과 독립선언 행사를 상세하게 보도해 줌으로써 한국인들의 독립 열망을 널리 전파하고 여론화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셋째, 기독교 부흥집회를 연상시킬 정도로 종교적인 분위기를 갖고 있는 점이다. 이 대회의 기독교적 분위기는 집회가 기도로 시작하여 기도로 마치고 있는 점과, 대회 마지막 날 아침·정오·저녁 세 번씩 잠시 동안 한국의 독립을 위해 기도할 것을 만장일치로 가결시키고 있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3일 동안 초청된 주요연사가 주로 기독교목사 및 선교사·카톨릭 신부·유대교 랍비 등 종교인이 주축인 사실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의 강연내용은 주로 한국의 기독교 발전상을 찬양하거나 기독교가 한국에 미친 업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그리고 이 대회에서 줄곧 표현된 ‘기독교정신’의 강조는 이러한 기독교적 대회 분위가의 성격을 잘 반영시켜 주는 것이라 하겠다.
‘제1차 한인회의’는 재미한인사회에 임시정부 수립을 축하하는 독립경축일로 큰 영향을 끼쳤다. 먼저 『신한민보』는 1919년 4월 15일자로 대한 독립을 경축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각 지방회에 4월 15일을 대한공화국 건설과 임시정부 조직을 축하하는 행사일로 거행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 결과 샌프란시스코·시카고·따뉴바·푸에블로 지방회 등지에서 독립을 경축하는 축하식을 거행하였다. 또 이승만을 지지하는 하와이 한인들은 호놀룰루에 1,200여 명이 모여 4월 14일을 독립 경축일로 정해 대대적인 축하식을 거행하였고, 그러한 사실을 필라델피아 대회에 알려 참석자들의 사기를 고무시켜 주었다
한편, 파리강화회의(1919)에 참석 중인 김규식이 성공적인 대회 개최를 기원하는 4월 11일자 전보를 필라델피아로 보내고, 상해 거류 한인들이 신헌민의 이름으로 축하 전보를 보내 온 것 등을 보아, 이번 대회의 소식은 미국 뿐 아니라 중국·유럽 등지의 해외 한인들에게도 알려져 독립운동의 사기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서재필은 ‘제1차 한인회의’를 계기로 이후 본격적인 선전외교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는 이번 대회에서 미국민을 상대로 한 전문적인 선전과 홍보의 중요성을 역설하여 필라델피아에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를 조직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또한 그는 이번 대회를 통해 톰킨스 목사·밀러 교수·베네딕트 기자 등과 같은 유력한 미국인들을 자신의 지원세력으로 확보하여 이후 선전활동을 전개하는 데 큰 도움을 얻게 되었다. 특히 톰킨스 목사에 대해 서재필은 “자유와 독립을 위해 잘 무장된 군대의 몇 개의 연대와 맞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여 그의 비중을 높이 샀다.
서재필은 ‘제1차 한인회의’를 통해 여러 생각들을 밝히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독립운동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제1차 한인회의’에 나타난 서재필의 제인식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인식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서재필의 인식은 전적으로 인정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 대회 참석자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을 작성하면서 임정(임시정부)에 대한 지원과 충성을 다하기로 하였으나, 그 실체에 대해 명확한 지식을 갖고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기 임시정부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신한민보』 4월 5일자에 나타난 연해주에 있는 대한국민의회의 것이 전부였는데, 이마저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병옥은 임시정부 실체에 대해 분명한 지식을 요구하였으나 아무도 그 실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서재필은 임시정부는 ‘한국 국민의 의지의 화신’이므로 그것이 어디에 있건 존재하는 한 인정되어야 하며, 또한 그 각료는 한국의 통치자로 인정되어야 할 것임을 단언함으로써 분분한 의견을 종식시켰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미주한인사회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하게 만들어 주는 한편, 이미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으로 피선된 이승만의 향후 위치를 이 대회를 통해 확고하게 인정해 주는 결과를 만들어 주었다. 서재필은 배재학당시절 이승만의 스승이었으나, 한국 국민이 이승만을 국무경으로 선택한 이상 임시정부를 인정하듯 그의 위치도 인정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사실 이승만은 4월 7일 연합통신과의 기자회견을 통해 국무경 직함을 공식적으로 처음 사용했으나 이번 대회를 통해 그의 직책이 대외적으로 승인되고 이후 상해와 한성임시정부의 직함에 대해서도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 대한 인식

서재필은 미국을 한국에 대해 가장 우호적인 나라라고 생각하였다. 그 근거로 그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관계 속에서 찾고 있다. 즉 여타 제국주의 국가와 달리 미국은 1910년 경술국치(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전 한국에 대해 정치·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기보다 도리어 기독교 선교사를 파송하여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였고, 그 계기로 한국에는 독립정신과 민주주의정신이 고양되었기 때문에 미국을 적극 옹호하지 않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그 같은 태도는 다음의 글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민들은 한국을 제외하고는 세계에서 미국을 제일 우호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한국이 타국에 문호를 개방한 이래 대부분의 다른 나라들은 자국의 이익이나 정치적 영향력 확대를 목적으로 접근하였으나 미국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미국은 수백 명의 선교사까지도 보냈던 것입니다. 그들 선교사들은 성경을 가지고 가서 이 억압받고 고난에 찬 민족에게 생의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복음전도를 위한 이 같은 선교사들의 노력은 병원·학교·과학·예술의 분야뿐만 아니라…독립정신과 민주주의정신의 고양으로 이어졌습니다.…이러한 데 한국민이 미국을 우호적으로 생각하는데 어찌 의혹이 있을 수 있습니까.(원성옥역, 110쪽)

여기서 서재필이 유난히 미국의 기독교 전파를 독립정신과 민주주의 정신의 고양으로 관련짓는 것은, 국내 3·1운동(1919)에 한국의 기독교인들과 미 선교사들이 독립운동에 앞장섰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주한인사회에 처음으로 3·1운동(1919) 소식을 전해준 현순의 전보에 따르면, 한국의 기독교가 3·1운동(1919)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를 하였다는 소식을 담고 있은 점과, 한국에서 3·1운동(1919)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다 ‘교회의 유력한 두목’이라는 소식이 퍼지고 있은 점, 그리고 한국 내 미선교사들이 3·1운동(1919)을 돕는다고 일본 관헌들에 의해 생명의 위협을 당하고 있다는 소식 등이 계속 보도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은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의 국무경으로서 첫 기자회견을 할 때, 이번 독립운동에 인도자들의 주의는 “한국을 동양 최초의 예수교국으로 건설하겠노라”까지 하였다. 더구나 1919년 3월 1일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선교사 데밍(Demming)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이 한국인들의 독립을 위한 노력에 대단한 호응을 하고” 있음을 직접 밝히고 있어서, 당시 대회 참석자들은 한국독립에 기독교의 영향력을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내용들은 3·1운동(1919)시 기독교가 다른 어떤 종교보다 큰 역할을 감당하고 있어서 일면 사실과 부합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 서재필 개인적으로 볼 때, 그 자신이 오래 전부터 기독교인으로 있으면서 기독교는 참 종교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한 인식은 과거 그가 만든 『독립신문』에서도 볼 수 있는 일관된 믿음이었다.

세상에 종교가 많이 있으되, 예수교 같이 참 착하고 참 사랑하고 참 남을 불쌍히 여기는 종교는 세계에 다시 없는지라.(『독립신문』, 1896. 8. 20, 「논설」)

또한 그는 3·1운동(1919) 시 단지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일제가 한국인을 박해하는 것을 보고, 기독교는 인간의 ‘자유’에 대한 열망을 일으키기 때문에 일제가 기독교인을 가장 싫어하는 요인이 되는 것이라 보았다.
이처럼 그는 미국시민으로 살아오면서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해 준 미국이 세계의 정의와 인도주의를 위한 나라라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국이 가지고 있는 제국주의의 속성조차 부인하는 태도를 가짐으로써 그의 인식의 한계를 보이고 있다. 그 한 예로 『필라델피아 퍼블릭 레저(Philadelphia Public Ledger)』지 1919년 12월호에 오클리 부인이 「국제연맹 까닭에 충돌되는 세계」의 제목으로 미국의 멕시코영토 매수와 하와이군도 합병, 그리고 필리핀 침략에 대한 예를 들어 미국을 일본과 동일한 제국주주의 나라라고 비판한 것에 대해, 서재필은 “이 공화국(미국)을 저 일본의 제국주의적 군사정치국가와 동등하게 대우하는 언론에 대해 비판하리라”고 반박하면서 평소 자신의 대미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서재필의 미국관은 해방 후 미군정 최고고문시절까지 여전히 변치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해방 후 고국에 방문한 뒤 『아메리카』 8월호(1949.8)에 기고한 「한국독립에 있어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글에서 그는,

나는 외국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을 제일의 의무로 생각하는 충성된 미국시민이며, 또한 나는 미국의 제2차 세계대전(1941) 승리가 곧 한국의 독립을 의미한다.

고 하여, 미국이 불쌍하고 굴욕적인 상태에 있는 한국을 해방시켜 민주주의 형태에 의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만들어준 데 대해 감사하는 동시에 긍지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미국관으로 인해 ‘제1차 한인회의’ 이후 그의 활동은 유력한 미국의 목사나 선교사 및 잡지 등을 이용하여 미국민의 양심에 호소하는 선전활동방면으로 주력하게 된다.
서재필이 미국을 과신(過信)한 데는 군국주의 일본을 제어하기 위한 현실적인 대안이 당시 미국밖에 없다는 인식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가진 미국관은 개항 이후 일반 한인들에게도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서재필만의 특별한 견해라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편향된 대미관(對美觀)은 이후 미 정부를 상대로 한 선전외교활동에서 근본적인 실패의 한계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독립국가 건설구상

서재필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을 통한 결의문에서 독립 후 한국의 정체(政體)문제를 둘러싼 자신의 독립국가 건설구상을 밝히고 있다. 이 결의문에 나타난 주요 특정은 독립된 한국의 정부 형태는 미국정부처럼 민주공화국으로 하되, 정부통치는 초기 10년 동안 국민의 교육수준과 자치능력이 증가하기까지 중앙집권을 행사할 것과, 정부가 가장 중요시해야 할 임무는 국민을 교육시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 독립된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나 교육수준이 낮기 때문에 전면적인 민주주의 실시는 유보되어야 한다는 태도를 밝힌 것이다.
결의문에 나타난 이러한 태도에 대해 『신한민보』는 1919년 8월 28일자 「인도자의 도덕」이라는 논설을 통해, ‘제1차 한인회의’를 주도한 한인지도자들을 크게 비판하였다. 왜냐하면 『신한민보』는 이들 지도자들이 대외적으로는 한국이 기독교 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실현할 것처럼 선전하면서, 실제 독립 후 한국의 정치는 국민의 자유를 제한하고 소수 엘리트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을 해야 한다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재필은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결의문에 나타난 독립국가 건설구상을 대체로 지지하였다. 그러한 사실은 1920년 10월 3일 미국을 떠나는 김규식을 통해 임시정부로 보내게 한 글 속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16개항에 걸친 「한국 정부의 조직과 정책 대강」(Outline of Policy and Organization of Government)이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입장을 표명하였는데, 그 중 주목할 만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형식상 대의제의 정치체제를 가지되, 국민이 민주적인 통치 책임을 가질 만큼 교육수준이 될 때까지 향후 10년간 강력하고 거의 독재적인 중앙정부가 필요하다.
· 헌법은 10년마다 자동으로 바꾸어 가되, 국민의 교육수준이 향상됨에 따라 국민에게 보다 많은 권한과 책임을 주는 방식으로 만든다.
· 독립 후 처음 10년 동안은 명망 있고 인품 있는 외국인 전문가로 구성된 ‘전문위원회’를 신설하여 행정·입법·사법부의 자문역을 담당한다. 정당은 초기단계에 있는 정부의 건설적인 업무를 추진하는 데 방해와 혼란을 일으키기 쉬우므로 처음 10년 동안 어떠한 정당도 인정하지 않는다.
· 국회는 영국식 또는 프랑스식의 양원제를 채택한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한인의 자치능력을 전적으로 부인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1차 한인회의’에서 그는 한인에게 독립이 주어지면 교육이나 국민의 합의를 통해 자치를 수행할 능력이 있음을 하와이 동포의 예를 들어가면서 장황하게 설명하고 있음을 보아 충분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가 의도한 바는 독립 후 다시는 타국의 침해를 받지 않고 항구적으로 나라를 보전·발전시키기 위한 방편에서 나왔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그가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문제는 여러분들이 나라를 되찾은 후 그것을 지킬 수 있고 또한 자치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는 매개 수단”임을 주장하고 있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한국독립 후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강력한 중앙집권을 행사하는 민주정부수립을 원하고 외국인으로 구성된 ‘전문위원회’에 의한 자문정치를 구상하고 있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인들의 민주주의 수준이나 교육수준이 완전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데 미약하다는 판단에서 나온 것임은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이러한 그의 생각이 실제 해방직후 한국정국의 혼란을 볼 때 거의 적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통찰력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2)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의 설립과 활동

(1) 설립 배경

필라델피아 한국통신부(The Bureau of Information for The Republic of Korea; 이하 ‘통신부’로 약함)는 서재필이 미국민들에게 3·1운동(1919)으로 나타난 한국독립의 열망과 일제하 한국의 실상을 정확히 알려, 반일여론과 한국독립을 동정할 친한여론을 일으킬 목적에서 만들었다.
필라델피아통신부의 설립 시기는 1919년 4월 22일경으로 보아지나, 실제 설립 구상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인 4월 15일 서재필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훌륭한 통신사를 두고 있습니다. 그 통신사에는 높은 교육을 받은 훌륭한 학자들이 있는데, 그들은 일본정부와 일본 언론국의 도움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일본 언론은 당시에 좀 더 완벽한 기구로써 이러한 활동을 펴고 있었던 전전(戰前)의 독일 언론국과 함께 가장 감탄할 만한 것 중의 하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 그렇게 열렬히 신봉하고 있는 그 원칙과 이상은 미국인들의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여러분들은 일본인보다 많은 이점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당한 대의명분과 여러분들을 지지해 줄 대중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본인은 여러분들이 여기에 계시는 동안 이 문제에 대한 결말을 짓기 이전에 누군가가 한국인의 대의명분의 진실을 미국 대중 앞에 참되고 정확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미국 내에서의 한국독립연맹이나 혹은, 어떤 다른 기구를 조직하는 문제를 심의해 볼 위원회를 구상하는 제안을 했으면 합니다. 만약…그것을 남녀 할 것 없이 모든 이들이 힘을 모아 조직적으로 현명하게 또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계획을 세운다면, 큰 성과를 거두게 될 것이고 당신들의 작업은 훨씬 더 쉽게 될 것입니다.(원성옥역, 169~170 쪽)

여기서 나타난 서재필의 생각은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1914) 이전부터 미국에 막강한 통신사를 두고 한국에 관한 왜곡된 선전을 계속해 왔다는 점.
둘째, 조직적인 정부의 후원이나 재력 및 적당한 후원기관도 갖지 못한 한인들이 일본과 대항할 수 있는 길은 한인들만이 갖고 있는 진실되고 정당한 대의명분을 주장하는 것이고, 이것은 미국의 이상과 원칙에 부합하므로 미국 국민의 광범위한 호응을 얻을 수 있다는 점.
셋째, 그러나 이 일의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소수에 의한 추진보다 모든 한인들이 참여한 조직적이고 항구적인 기구 설립을 통해 운영되어야 한다는 점.
따라서 서재필이 통신부를 설립하게 된 배경은, 미국 내 막강한 통신사를 두어 한국의 실상을 왜곡되게 선전보도하고 있는 일본의 기만행위를 막고, 한국의 진상을 바로 전해 한국독립의 여론을 일으키려 한 데 있었다.
당시 미국 내 일본의 선전활동은 한국민족에게 심각한 폐해를 주고 있었다. 미국인들 대부분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대한 지식은 서재필이 최근에 한국이 일본의 일부가 아니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느라고 진땀을 뺀 적이 있다고 할 정도로 거의 무지한 상태였고 그것마저 일본의 선전활동에 의해 자치능력이 없는 무능한 민족으로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서재필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그들(일본)은 미국인들을 선동하여 한국인들을 아메리카 인디언과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게 해 놓았습니다. 즉, 그들은 한국인을 연약하고 결단력이 부족하며 상식이라고는 없고 자립할 수도 없는 사람들이며 유모나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다시 말해 그들은 자치국의 국민이 되기보다는 어떤 강대국의 피보호자가가 되는 것이 더 낫다고 인식시켜, 한국인을 잘 알지 못 하는 미국인으로 하여금 당연히 그것을 믿게 합니다. 여러분들이 일반 미국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인상을 뿌리 뽑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힘과 노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원성옥역, 169쪽)

서재필이 지적한 예는 미국 언론에서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 한 예로 3·1운동(1919) 후 『New York Times』지는 1919년 3월 30일자 「이집트와 한국」이라는 논설에서 3·1운동(1919)을 통해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민족에 대해 논평하기를, 한국인은 자치능력이 없기 때문에 독립은 시기상조라 주장하였다.

이집트와 한국의 독립운동은 인민자치권의 문제와 함께 인민자치능력의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과 이집트는 다 같이 이 능력을 결여하였으므로 일본과 영국의 통치하에 놓였던 것이다. 일본이 한국민을 대할 때 불필요한 준엄을 표시하여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혐의는 없지 않으나, 일본의 시정은 유능한 것이어서 한국의 번영을 열어 준 것은 숨길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 일본이 한국민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점차 이를 교도하여 진보된 정치사상을 고무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만약에 즉시 자치를 허용한다면, 한국은 갑자기 무정부상태에 빠질 것이므로 이는 일본에 대하여 중대한 위험이 될 것은 명백하다. 따라서 한국에는 잠시 외부로부터 문명적 통치를 행하는 것이 세계 일반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하다.[『한국독립운동사』(자료5), 94쪽]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이와 같은 한국관계 기사의 취재 근원이 주로 일본의 선전 자료에서 나온다는 점이다. 『The Seoul Press』1919년 3월 7일자 논설을 보면, 한민족은 현재의 실정으로 보아 도저히 독립할 수 있는 능력이 없고 동족인 일본의 보호 아래 생존함이 오히려 다행한 일이며, 세계고금의 역사가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이상 국제연맹과 같은 허망한 존재는 실제에 있어 가망성이 없는 것이며, 민족자결의 이상은 꿈과 같은 것이니 현실을 바로 직시하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의 『뉴욕 타임즈』 논설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언론의 친일적인 경향은 일본의 선전활동과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인들에게 한국인을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으로 인식시킨 것은 일본이 오래전부터 추진해 온 선전활동의 결과였다. 일본의 대외선전활동은 1905년 ‘을사오조약(을사늑약)’을 계기로 한국 지배를 국제여론에서 유리하게 만들 필요성 때문에 시작되었다. 그 중 한국 내의 『The Seoul Press』 발간과 워싱턴의 ‘동양선전국’(Orient Information Bureau) 설치는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그리고 친일미국인을 이용하여 한국지배를 합리화 시키도록 했다. 그 중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한 친일론자는 예일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조지 래드(George T. Ladd), 미국 언론인 조지 케난(George Kennan),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부 총무 아더 브라운(Arther J. Brown)들이었다. 특히 래드는 일본의 사주를 받아 『The New York Times Sunday Magazine』, 1919년 5월 11일자에 3·1운동(1919)에 대한 논평을 발표하면서 한국민족을 평하여, 중국의 저속한 풍습의 영향을 받아온 자치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혹평하고, 일본의 한국 통치는 한국민에게 매우 유익하고 대다수 한인들은 일본의 통치를 만족해하고 있으며, 3·1운동(1919)은 다수의 한인 중 소수 불평자의 소행으로 과소평가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이승만·정한경·윤병구 등에 의해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또 일본은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한 후 『조선개혁에 관한 연례보고서』(『The Annual on Reform and Progress in Chosen』)라는 영문판 연감을 출판하여 미·영(미국·영국) 등 국가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며 왜곡된 식민통치선전을 하였다. 이 연감의 주요 논리는 퇴보한 한국민족이 현명하고 인도주의적인 일본정치인들의 지도로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게 되었으며, 한국인들은 아주 행복해 하며 일본통치 아래서 번영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일본의 선전활동의 폐해와 3·1운동(1919) 후 선전활동의 필요성을 절실히 인식하고 있던 국민회는 서재필의 통신부 설립에 대해 조건부 승인을 하였다. 국민회가 새로 조직될 기관의 대표가 서재필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하에 찬성하겠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파리강화회의(1919) 대표로 선정되었던 이승만이 3·1운동(1919) 이후 노령(러시아령) 임시정부에서 국무경으로 임명되어 이미 활동하고 있으므로 더 이상 국민회를 대표하여 외교업무를 담당할 것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국민회는 이승만의 파리강화회의(1919) 대표직을 해임하였고, 정한경에 대해서는 대표직에서 해임함과 동시에 서재필의 외교사무를 돕는 협찬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서재필은 이번 일의 적임자로 이승만과 정한경을 추천하고 자신은 배후에서 자문역할만 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제1차 한인회의’ 개회 시 의장으로 추천받았을 때, 자신은 귀화한 미국시민이기 때문에 사양하겠다고 한 것을 감안해 볼 때, 국적문제로 한인대표자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고 있은 때문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미국 내에서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지만 미국시민권을 가졌다는 이유로 대한민국임시정부로부터 어떠한 공식직함을 받지 못하였고, 자신 또한 구태여 공식직함을 얻어 활동하려 하지 않았다. 국무총리 대리 안창호가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에게 보낸 1919년 7월 12일자 「서재필 박사 전권특사 선정에 관한 건」을 보면, 서재필은 20여 년간 미국에 거주하면서 내외인의 신망이 두터울 뿐 아니라 한국의 독립운동을 위해 개인자격으로 충분히 열성을 다해 외교에 전력하였음을 인정하는 바임을 전제하고, 그렇지만 그에게는 정부의 공식상의 발언권이 없기 때문에 대미외교에 충분한 효과를 올릴 수 없으니, 그를 전권대사로 임명하여 국제 연맹이나 기타 외교상 발언권을 가지는 자격을 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나 7월 18일 외교위원회 회의에서 미국 국적을 가진 서재필을 특사로 선정하는 것은 법리상 허용할 수 없다고 한 이기룡의 동의와 김병조의 재청으로 부결시켰다.
그렇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공식직함도 필요하다는 생각을 서재필은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1920년 9월경 김규식에게 보낸 「한국정부의 조직과 정책대강」에 임시정부가 자신을 정부의 총고문(General Adviser)으로 공식 임명해 줄 것을 요청한 데서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제안도 그 후 임시정부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아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그가 미국시민이라는 점을 내세워 국민회의 제의를 거부했지만, 국민회가 4월 19일 중앙총회 제20차 위원회의에서 그를 외교고문으로 임명하고 필라델피아에 통신부설립을 정식으로 인정하는 등, 발빠른 조치를 취하자 서재필은 그 결정을 받아들여야 했다.
서재필이 통신부를 맡으면서 가진 각오는 한국에서 자유를 위해 피 흘리고 있는 지금, 자신의 현 사업상 이익이 덜 나더라도 시간과 힘과 지식을 한국을 위해 바치겠다는 심정에서 시작했다고 했다.

통신부가 설치되고 그 필요한 경비는 백성들이 내기로 담보하며 나의 제일 좋은 의견대로 행하라고 나에게 맡기는 지라, 내가 이것을 맡을 때 두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 우리 민족의 속박된 것을 벗어 면할 자유를 얻으려고 한국에서 백성들이 목숨을 추하게 내려놓으며 피를 흘리는 이때에 내가 능히 조금이라도 할 것은, 나의 상업상의 이익이 덜 일더라도 나의 시간의 한 부분을 이 일에 들이겠다는 생각이 났으며, 둘째, 나는 첫 번 한국의 자유와 정치개혁을 위해 모든 것을 다 희생하던 자들 중의 한 사람이라, 대한 백성들이 나의 복귀를 요구하는 이때에 그 같은 일을 위하여 나의 힘과 지식을 내겠다는 생각이 났소이다.
우리들이 한국에 돌아가서 우리 원수와 능히 싸우지는 못하더라도 우리가 정하여 놓은 계획을 가지고 미국에 있어서 능히 싸울 수 있기로, 내가 우리 백성들의 명령을 맡아 일을 시작하였소이다.(『신한민보』, 1921. 4. 18, 「서박사통고문」)

(2) 조직과 운영

필라델피아통신부의 조직은 부장 서재필과 서기 박영로(1920년 9월부터 김장호로 바뀜), 사무원 체스터(Miss. Chester) 등으로 구성되어 있고, 한시적으로 외교협찬원 정한경·베네딕트(G.Benedict)·가터필(Miss. Guthaphel) 등이 활동했다. 서재필은 이 통신부의 부장이었으나, 공식적인 선전활동을 위한 여행경비 외에는 다른 직원 및 외교협찬원과 달리 정기적인 급여를 전혀 받지 않았다. 이는 그가 인쇄 및 문구사업을 병행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기 때문에, 일정한 직업 없이 독립운동에 뛰어든 당시 한인지도자들과는 전혀 다른 위치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통신부의 운영경비는 1919년 9월까지 국민회가 담당하다가 10월부터는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위원부를 통해 매월 800달러 내외를 지원받았다. 구미위원부의 통신부 지원은 이승만이 모든 정부외교는 임시정부가 담당해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집정관 총재의 권한으로 1919년 8월 구미위원부를 설립하면서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통신부가 국민회에서 구미위원부의 관할 하에 들어갔으나, 구미위원부와의 관계는 일정한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이 정부차원의 공식 외교사무를 담당하기 위해 설립된 반면, 서재필의 통신부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외교와 선전활동에 주력하기 위해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한민보』 1920년 10월 21일자와 28일자에 게재된 돌프의 「사업성적보고서」에 따르면, 구미위원부는 설립 이전인 1919년 7월에 이미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중단하였다고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 이후에는 전혀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외교활동을 담당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설립이전에 공식적인 외교활동이 중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이 임정(임시정부)의 외교활동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것은, 구미(유럽·미국) 열강에 대한 외교업무 수행보다 재미한인사회의 재정권 확보에 더 큰 비중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구미위원부는 재정모집 및 관리권을 장악하는 대신, 실질적인 활동의 업무는 민간인을 상대로 한 통신부가 모든 선전외교사무를 담당하는 형태로 되어 있었음을 익히 알 수 있다.

(3) 선전외교활동

서재필은 필라델피아통신부의 활동방향을 국민회 북미총회장 백일규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 크게 세 가지로 밝혔다. 여기서 그는 한국에 관한 모든 사실을 미국시민에게 알릴 것을 전제로 하여 첫째, 책자 발간을 통한 출판선전활동, 둘째, 대중집회를 통한 강연활동, 셋째, 미국인들이 조직하는 친한 단체의 활동지원, 예컨대 한국친우회의 조직과 활동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등으로 하였다.
서재필이 언급한 통신부의 활동방향 중 주목할 점은 통신부의 선전대상이 미국 대중에 국한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한 배경에는 미정부의 대한(對韓)태도가 3·1운동(1919) 후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지 않은 점 때문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미정부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미 국무성의 한 고위 관리는 1919년 4월 20일자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The Christian Science Monitor)』지와의 기자회견에서,

미국정부는 한국문제에 대하여 영국과 이집트 사이의 문제를 다루는 것과 동일한 태도를 취할 것이다. 한국문제는 전적으로 일본의 내정문제로 우리 필리핀에 폭동이 일어났을 경우와 다를 바 없다.

고 언급하고 있었다. 이러한 여건에서 서재필은 미국정부보다 미국민들을 대상으로 한국동정여론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고, 이를 토대로 미국의 언론과 의회에 한국문제를 반영시켜 궁극적으로는 미정부의 대한 정책에 반영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출판선전활동

서재필이 출판선전활동을 위해 가장 먼저 착수한 것은 오하이오주 중심의 한인유학생들이 발간하던 영문잡지의 인수였다. 3·1운동(1919) 이전 이미 필요성을 제기했던 영문잡지 발간계획을 이제 실행에 옮길 여건이 되었다고 보고, 한인학생들이 발간하던 것을 인수한 것이다. 당시 오하이오주 한인유학생들은 미주한인유학생회를 결성하여 월간 영문잡지 『자유와 평화(FREEDOM AND PEACE)』를 발간하고 있었다.
한인유학생의 영문잡지는 한국의 대외선전을 목적으로 월 300달러의 예산으로 파리강화회의 기간(1919. 1~6) 동안만 발간하려고 계획된 잡지였다. 이 잡지는 『신한민보』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아 1919년 3월에 제1호가 나온 이래 통신부에 인계하는 5월까지 매월 1,000부씩 발간되었는데, 재미한인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었다.
서재필은 학생 영문잡지의 인수명분을 “학생 단체에서 발간하는 영문 잡지를 검열하여 우선 완전한 잡지가 되도록 힘쓰겠노라.”고 하여 고급 영문잡지로 발전시킬 포부를 나타내었다. 이에 대해 미주한인유학생회는 서재필의 인수방침에 적극 호응하였고 그 결과 학생 영문잡지는 6월부터 『KOREA REVIEW』(『한국평론』)라는 새 이름으로 통신부에서 본격적으로 출판되어 대미선전활동에 이용되었다.
통신부에서 새로 발간한 『KOREA REVIEW』는 과거 『FREEDOM AND PEACE』를 발간하던 한인학생들에 의해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KOREA REVIEW』에 보면 필라델피아통신부의 주최하에(Under the auspices) 미주한인학생회가 출판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과, 편집 후기에 해당되는 ‘학생란’(Student’s Corner)이 있어 학생들의 동정을 적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서재필은 『KOREA REVIEW』의 발간 목적을 초기에는 한국의 정치적·종교적 자유를 위한 것으로 하였다가, 1921년 3월부터 극동의 정치적·종교적·경제적 제조건을 향상하기 위한 것으로 확대하였다. 주요 게재내용은 서재필이 주로 담당한 것으로 보이는 한국과 극동에 관한 시사 해설을 비롯하여, 미국이나 해외의 신문·잡지 등에서 나온 일본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 상해임시정부의 활동과 한인들의 독립운동 소식, 그리고 한국 친우회 등 미국민들의 한국 지원활동 등을 소개하였고, 그 외에 선전효과를 가진 각종 한국관계 서적을 게재하였다.
서재필은 이 영문잡지를 통해 한국이 부당하게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과 한국민은 충분히 독립할 자치능력이 있다는 데 초점을 모아, 미국민에게 한국의 진실을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필라델피아통신부의 『KOREA REVIEW』는 미국민을 상대로 한 유일한 월간잡지였고, 다른 해외 지역에서의 한인들이 발간하던 선전간행물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었다. 그 예로 일본 측은 이 책이,

일본의 군국주의자는 결코 활동의 손을 늦추지 않고 항시 세계 정부의 실현을 향해 발길을 내맡을 기회를 내리고 있다는 것과, 조선에서의 개혁은 기만에 찼고 조선독립이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위해 긴요하다.(강동진,『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 100쪽)

는 내용을 싣고 있다면서, 일본의 왜곡된 대미선전을 막는 힘쓴 잡지로 평가하고 그 영향력을 인정하였다.
『한국평론』은 초기 1,000부에서 시작하여 1919년 7월에는 1,500부로, 10월에는 2,000부로, 1920년 3월부터는 최고 2,500부까지 점차 확장되었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서재필은 이 책이 미국을 비롯한 주요 열강의 정부·대학·교회 등의 공공기관과 개인 구독자들에게 배포되어 한국의 사정을 여러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자부하였다.
이외도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직·간접으로 발행한 선전책자를 통해 활발한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다. 통신부에서 직접 발행한 책자는,『제1차 한인회의 회의록』(First Korean Congress), 『한국의 어린순교자(Little of Korea)』(박영일 지음), 『한국의 르네상스(The Renaissance of Korea)』(조셉 그레이브스 지음), 『한국의 진실(The Truth About Korea)』(나다니엘 페퍼 지음), 『한국친우회(The League of Friend of Korea)』, 『한국의 독립(Independence for Korea)』, 『민족자결주의를 위한 한국의 호소(Korea’s Appeal Self-Determination)』, 『한국의 적요(Briefs for Korea)』(돌프 지음) 등이 있다.
통신부에서 직접 발행하지 않았으나 대외 선전용으로 활용한 책자는, 돌프가 저술한 『일본의 한국경제관리』(Japananese Stewardship of Korea, Economic and Financial), 『극동에 있어서의 부채와 신용(Balancing Debits and Credits in Far East)』, 켄달이 쓴 『한국의 진실』(『The Truth About Korea)』, 멕켄지가 쓴 『자유를 위한 한국의 투쟁 (Korea’s Fight for Freedom)』, 신흥우가 쓴 『한국의 재흥』(『The Re-birth of Korea』), 김규식 이 쓴 『한국민족의 요구(The Claim of the Korean People and Nation)』, 정한경이 쓴 『한국의 동양정책(The Oriental Policy of the United States)』과 『한국의 사정』(『The Case of Korea』), 멕클라치가 쓴 『아시아의 독일』(『The Germany of Asia』),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발행한 『한국의 정세』(The Korean Situation), 그리고 저자가 불명확한 『한국에서 일본의 포학(『Japanese Atrocities in Korea』) 등이 있었다.
위에서 언급된 선전책자들의 선전대상이 주로 미국인들에 국한되어 모두 논조가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이를 보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졌고 그들은 한국의 기독교를 말살하려 하고 있다는 것, 한국에서 일본의 개혁정책은 순전히 허구일 뿐 아니라 기만적이라는 것, 한국은 오랜 기간 독립국가로서의 지위를 누려왔고 현재 충분히 그러한 자치능력과 민족정신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라는 것, 미국은 과거 한국과 맺은 한미수호조약에 의해 한국을 도울 의무가 있으며, 세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입장에서 약소민족의 정당한 생존권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국제정치적인 측면에서 한국은 동아시아의 요충지인데 일본이 한국을 발판으로 삼아 동아시아의 패권을 차지하려 하고 있다는 것, 이것은 미국의 국익과 상충되는 것이며 결국 미일간의 무력 충돌을 불가피하게 함으로 한국을 우선적으로 독립시켜야 동아시아의 평화는 물론 미국의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내용으로 되어 있었다.

강연 및 기고활동

서재필은 통신부를 통해 미국민을 대상으로 한 강연 및 기고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통신부 설립 이후 3년여 동안 미국 각지에 300회 이상의 연설을 통해 약 10만여 명의 미국인들에게 선전활동을 펼쳤다.
그런데 그의 강연활동은 한국친우회의 조직활동과 병행해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통신부 조직 목적 가운데 이미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그 활동을 도울 계획을 밝히고 있은 사실 외에, 서재필 스스로가 선전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처음부터 동일한 목적을 갖고 두 기관의 조직을 주도함으로써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밖에 서재필은 미국의 언론이나 각종 단체에 대한 기고활동을 통해 한국의 독립문제와 일본의 불법성에 대해 집중 거론하였다. 서재필이 기고한 글을 보면 『Philadelphia Public Ledger』지에 「한국은 실질적인 독립을 원한다」(1919. 8. 22), 「일본은 세계 국가들과 협력을 바란다면 약속을 지켜야 한다」(1919. 11. 23), 「한국민족은 열등민족이 아니다」(1920. 1), 『New York Commercial Journal』에 「동양에서 일본의 특별한 권리」(1919. 7. 21), 『World Trade Review』에 「한국에서의 일본」(1919. 10) 등이 있고, 1920년 7월 30일자로 필라델피아상공회의소에 대해 「한국에서 일본의 무역독점」의 내용으로 글을 써서 미국의 대한무역정책에 대한 입장을 밝혀줄 것을 요구하여 미국의 대일간섭을 유도하였다.
한편 친일선교사 쉬릴(Charles. H. Sherril)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합리화하고 한국민족을 가장 지겨운 민족이라는 내용의 글을『Scribner’s Magazine』 1920년 3월호에 싣자, 서재필은 그가 소속되어 있는 뉴욕의 장로교선교위원회에 1920년 3월 8일자로 항의문을 발송하여 사과를 받아 내었다. 또 그는 미대통령으로 당선된 하딩(Warren G. Harding)에 대해서도 1920년 11월 22일자로 공개서한문을 보내 한미조약의 준수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을 요구하였다.

3) 한국친우회의 설립과 활동

(1) 설립 배경

서재필이 한국친우회(League of The Friends of Korea)를 조직할 구상을 하게 된 것은 ‘제1차 한인회의’ 이튿날(1919. 4. 15) 선전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할 때, 미국 내 친한미국인을 많이 확보해야 될 당위성을 강조함으로써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그런데 구체적인 그의 계획은 국민회 북미총회장 백일규에게 보낸 1919년 4월 29일자 서신에서 보다 잘 나타나고 있다.

우리 일을 위하여 동정과 도덕적 원조를 원하는 백인 친구들을 등록할지니, 그리하면 미국 국민 가운데 장차 우리 조국의 자유를 회복하는 데 일하며, 또 우리와 같이 일할 견고한 단체가 있어 질지라.…우리는 이제부터 마땅히 전력을 다하여 통일적이고 조직적으로 우리 외교를 진행하여, 일반 미인(美人)의 동정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의 조직하는 미국인의 유력한 기관으로부터 자기정부에게 대한공화국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찬조하라고 권고하게 할지라.(『신한민보』1919. 5. 16. 「서재필씨의 편지」)

여기서 서재필은 한인들의 자유회복을 돕는 방편으로 친한 미국인 단체를 조직하여 이들에게 한국 동정여론을 일으키게 할 뿐만 아니라, 미국정부에 대해서도 한국독립을 위한 압력단체로 활용할 계획임을 밝혔다.
이러한 서재필의 뜻에 대해 ‘제1차 한인회의’에 연사로 참석하여 큰 활동을 한 톰킨스(F.W. Tomkins) 목사, 오버린대학 사회학교수 밀러(H.A. Miller), 『I.N.S(International News Service)』 기자 베네딕트(G. Benedict) 등은 적극 협력하였다. 그 중 톰킨스 목사는 한국이 주장하는 독립과 자유를 위해 기꺼이 도울 것을 약속함으로써 한국친우회 조직에 앞장섰다.
한국친우회는 서재필이 톰킨스 목사와 함께 1919년 5월 2일 필라델피아시 시티클럽에서 종교계·교육계·실업계의 각 분야별 저명인사 22명을 초청, 처음으로 발기모임을 가짐으로써 본격화되었다. 이 날 서재필은 미국민이 한국에 기독교를 전파하여 자유와 독립을 한인들에게 가르쳤는데, 지금 한인들이 이를 위해 싸우는 마당에 미국민이 이를 모른 체 한다면 크게 모순되는 일이요 도리가 아니라는 내용으로 한국친우회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발기위원으로는 톰킨스 목사·서재필·베네딕트 기자가 만장일치로 선정되었다.
한국친우회는 이들 발기위원이 중심이 되어 1919년 5월 15일 리딩(Reading)시 라자(Rajah)극장에서 처음으로 대규모 대중집회를 개최한 후 5월 16일에 필라델피아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이 때 발표된 취지문을 보면 한국친우회는 극동에 있는 기독교와 민주주의의 지원을 위해 미국민의 여론조성이 무엇보다도 필요하지만, 이는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와 인도의 측면에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기 위함이지, 한·중·일(한국·중국·일본)의 정치적 문제에 간섭하고자 함이 아님을 명확히 해 순수 민간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질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러한 민간단체로의 성격은 다음의 설립 목적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첫째, 기독교와 자유독립국가를 위해 고통당하고 있는 한국민족들에게 미국민의 동정과 도덕적인 지원을 보낼 것.
둘째, 한국민족이 지금까지 받아온 일제의 학정과 부당한 대우를 가능한 더 이상 재발되지 않도록 미국민의 도덕적 영향력과 호의적인 조정을 다할 것.
셋째, 한국에 관한 진실한 정보를 미국민들에게 알릴 것.
넷째, 세계 모든 민족과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영원한 평화를 증진시키며 하나님의 법이 온 세계에 수립되도록 도울 것.(『KOREA REVIEW』, 1920. 3)

그러나 한국친우회 결성을 주도한 서재필은 이 조직이 보다 정치적인 성격을 가질 것임을 예고하였다. 즉 그는 한국친우회가 성공하여 일백만 이상의 회원을 얻으면 사람의 힘과 금전의 힘을 아울러 얻어 우리가 원하는 무슨 일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다분히 한국독립을 위한 정치적인 운동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친우회는 서재필이 통신부 활동방향을 제시하는 가운데 이미 그 친우회 조직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에 필라델피아통신부와 처음부터 상호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한국친우회에서 회원을 모집할 경우를 보면 연회비 납부금액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고 있었다. 통상회원은 연회비 1달러를 내거나 혹은 『KOREA REVIEW』 구독료를 포함하여 3달러를 낼 경우로 하고, 찬조회원은 5달러 이상, 종선회원은 100달러 이상을 납부할 경우로 정했다. 이러한 구분은 친우회 회원들에게 『KOREA REVIEW』 구독을 유도함으로써 필라델피아통신부의 활동을 도우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필라델피아통신부는 친우회 결성활동을 돕기 위해 한국 실정을 미국대중에게 잘 알릴 수 있는 강사를 지원해 줌으로써 한국문제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데 상호 협조하였다.
그러나 한국친우회는 통신부나 구미위원부 등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지 않고 회비 수입과 의연금에 의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나름대로 독립된 자치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유지되었다.

(2) 각 지역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

서재필에 의해 주도된 한국친우회는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를 본부로 하여 1921년 현재 미국 각지에 21개소와 영국과 프랑스 등 해외에 2개소가 조직되어 총 25,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친우회 결성은 3·1운동(1919)으로 나타난 한국 실정을 국제적인 조직망을 통해 효과적으로 선전함으로써 한국독립을 지지하고 친한 여론을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제 각 지역 한국친우회의 결성 및 활동상황을 살펴보면서 이를 통해 서재필이 주도한 친우회의 성격과 의의를 살펴보기로 하겠다.

필라델피아 한국친우회

필라델피아친우회는 앞에서 언급한 대로 1919년 5월 16일 서재필을 비롯한 톰킨스 목사, 베네딕트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 임원은 회장 톰킨스 목사, 부회장 밀러 교수, 회계 페이스리(H.E. Paisley), 서기 베네딕트 기자이고 서재필을 비롯한 11명이 이사진으로 구성되었다. 특별히 톰킨스 회장의 노력에 힘입어 1919년 11월 20일 첫 총회를 개최하여 친우회조직과 운영에 관한 규약을 제정하는 등, 한국친우회의 본부로서 미 전역에 친한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필라델피아친우회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19년 6월 6일 개최한 워싱턴 D.C. 집회에서는 서재필·그리피스(William E. Griffis) 박사·톰킨스 목사·밀러 교수 등의 강연에 힘입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반기독교적이고 비인도적인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고 한국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이번 성공적인 집회를 통해 한국친우회는 미국 각지로 친우회 결성을 확산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0년 5월 23일 필라델피아 친우회는 톰킨스 목사의 주도와, 오버린대학의 한인여학생 노디 도라 김(Nodie Dora Kim) 및 상원의원 스펜서(S.P. Spencer)의 강연에 힘입어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미대통령과 상원외교위원회에 보내기 위해 결의문을 채택하고, 이 결의문은 스펜스 의원의 도움을 받아 미 의회 『의사록』 1920년 6월 2일자에 수록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톰킨스 회장은 1921년 6월 28일자로 주미일본대사 시데하라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의 독립이 일본에게 이익이 될 뿐 아니라 미·일(미국·일본)간의 친선에도 도움이 될 것임을 주장하여 일본의 결단을 촉구하였다.
한편 필라델피아 친우회는 1921년 7월부터 서재필을 중심으로 워싱턴회의를 대비하는 한국대표단의 활동을 적극 뒷받침하였다. 톰킨스 회장은 워싱턴회의의 미대표단장 휴즈(Charles E. Hughes) 국무장관에게 한국대표단의 활동 보장과 한국독립 보장을 요구하는 공개서한을 발송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1921년 11월 22일 필라델피아시 내 침례교회에서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전 상원의원 토마스(Charles S. Thomas)를 초청하여 강연회를 개최하고 한국 동정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밖에 필라델피아친우회는 1923년 일본에서 관동대진재가 발생하여 한국인 학살문제가 국제문제화 되자 톰킨스 회장의 이름으로 1923년 11월 20일자로 미 국무장관 휴즈에게 항의문을 발송, 일본 측의 시정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하였다.

리딩(Reading) 한국친우회

펜실베니아주 리딩친우회는 리딩시에 거주하면서 서재필과 함께 통신부에서 서기로 활동한 바 있는 김장호의 적극적인 활동에 의해 1919년 6월 26일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리빙우드(F. Livingood), 부회장 존(G.M. Jones), 회계 화이트(W. White), 서기 세너(J.B. Shaner)이고, 블랙번(R.M. Blackburn) 목사를 중심으로 4명의 집행위원회가 있었다.
리딩친우회는 필라델피아친우회와 같이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한국대표단의 활동을 지원하는 데 적극 노력하였다. 리빙우드 회장은 리딩시의 한국친우회 결의문을 미대표단 휴즈에게 보내, 한국문제는 세계 평화와 직결됨을 주장하고 한국대표단의 독립 요구를 수용해줄 것을 요청했다.

포스토리아(Fostoria)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포스토리아친우회는 1919년 8월 3일 1,2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집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윌버(F.A. Wilber) 박사, 부회장 크루익산크(J.L. Cruikshank), 회계 저페(J.M. Jerpe), 서기 프리즈(J.F. Freese)이다. 이 곳 친우회조직은 벡(S.A. Beck) 목사와 헐버트(H.B. Hulbert) 선교사 그리고 보스톤대 학생인 양유찬의 강연활동에 힘입어 이루어졌고, 티핀친우회와 함께 공동결의문을 작성, 미 정부에 대해 한국민을 동정하고 한국의 자유를 위해 거중조정할 것을 요구하였다.

티핀(Tiffin)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티핀친우회는 포스토리아 집회의 연장선에서 1919년 8월 5일 대규모 집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이에 따라 이곳 친우회 조직에는 포스토리아 집회 때 활동한 연사가 동일하게 주도하였고, 그 외 오하이오주립대학생 이병두와 웨슬리안대학생 이춘호도 크게 활약하였다. 조직 구성은 회장 슈만(A.C. Shuman), 부회장 워너(E.H. Warner), 회계 오스카 쉬라더(Oscar Shrader), 서기 제이콥 마틴(Jacob Martin)이다.
이후 티핀친우회는 1919년 8월 18일 홉휄교회 교인들과 함께 한국독립의 당위성과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는 결의문을 작성, 미상원에 보내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핀들레이(Findlay)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핀들레이친우회는 1919년 9월 20일 대중집회에서 헐버트의 연설과 보스톤대 학생 김제봉·양유찬·Y.S. 윤의 활약에 의해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기어(W.H. Guyer) 박사, 부회장 레버(F.W. Reber) 목사, 회계 크래츠(W.E. Crates), 서기 맥로린(W.H. McLaughlin) 목사이다.
이곳 친우회는 9월 21일 리마집회에서 리마친우회와 공동으로 결의문을 채택하여, 미 대통령과 상하 양원에 대해 미 정부가 일본의 비인도적인 기독교탄압과 한인에 대한 만행을 저지시키고 민주정부를 수립하려는 한국민족의 노력을 지지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리마(Lima)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리마친우회는 핀들레이시 집회 다음날인 1919년 9월 21일 집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해밀톤(T.R. Hamilton) 박사, 회계 알스페츠(W.A. Alspach) 목사, 서기 몽고메리(W. Montgomery)이다.

워싱턴 D.C 한국친우회

워싱턴 D.C 친우회는 1919년 10월 1일 100여 명 이상의 회원으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보일(G.L. Boyle) 상원의원[뒤에 올슨(J.C. Olsen) 전 해군장군으로 바뀌어 짐], 부회장 스턴(G.W. Stearn), 회계 콜린스(M.D. Collins), 서기 오텐버그(L. Ottenberg)이며, 그 밖에 서재필을 비롯한 3명의 실행위원과 3명의 대중집회 위원이 있었다.
이곳 친우회는 워싱턴이 미 정치의 중심지라는 인식하에 미국 내 주요 지도자나 주요 단체를 대상으로 한 친한여론 조성에 주력하였다.

샌프란시스코 한국친우회

샌프란시스코친우회는 미국 서부지역에서 유일하게 결성된 곳으로, 1919년 10월 11일 성프란시스호텔에서 한·미(한국·미국)인들이 모여 ‘한국의 밤’을 개최한 후 결성되었다. 이날 개최된 ‘한국의 밤’은 미국인들의 음악회와 같은 성격의 집회였다. 이날 집회에서는 3·1운동(1919)으로 일본에 의해 고초를 당하고 있는 한국기독교의 실정을 담은 활동사진을 상영하여,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한국 국민을 동정하고 반일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신한민보』가 10월 14일자 기사에 “미주서방에서 처음 보는 성황”이라 표현할 만큼 수천 명이 모인 가운데 집회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샌프란시스코친우회의 조직 구성은 회장 맥아피(L.A. McAfee) 목사, 부회장 바로우스(D.P. Barrows) 박사, 서기 그로스(H.C. Gros) 교수이고, 그밖에 10명으로 구성된 평위원회를 두었다. 특히 한국인 8명과 미국인 22명으로 구성된 친우회후원회 조직은 이곳만의 독특한 면을 갖추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친우회의 결성에는 정한경의 활동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는 이곳 집회에서 ‘한국의 사정’을 연설하여 친우회 결성에 크게 기여했을 뿐 아니라, 캘리포니아주 내 시민단체나 상업단체 그리고 교육 및 사회단체 등을 대상으로 한 활발한 강연활동을 통해, 미국민의 친한여론을 일으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시카고(Chicago) 한국친우회

일리노이주 시카고친우회는 1919년 10월 17일 결성된 것으로 보이나 10월 1일에 16명의 ‘한국친우회 평위원회’ 이름으로 결의문을 작성, 펠란(J.D. Phelan) 상원의원에게 보내고 있음을 볼 때, 그전부터 이미 친우회가 결성되었음을 보여준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바버(J.J. Barbour) 상원의원, 부회장에 타이틀(E.F. Tittle) 박사, 회계에 스티븐스(C.N. Stevens), 서기에 은퇴한 한국선교사 가터필(M.L. Guthaphel) 여사이고, 그 외 바버 회장을 포함한 16명의 평위원회가 있었다.
시카고친우회는 한국선교사로 활동한 바 있는 가터필 여사의 노력으로 날로 발전하였다. 그녀는 한국 사정을 소개하거나 한국독립을 찬조하는 일 뿐만 아니라 한인들에 대한 구제활동에도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캔사스시티(Kansas City) 한국친우회

미조리주 캔사스시티친우회는 1919년 11월 10일 결성되었다. 조직구성은 회장 이세트(W.C. Isett) 목사, 부회장 비솦(C.S. Bishop)·콩돈(J.E. Congdon)·쿡(E.F. Cook)이고, 회계에 무디(C.B. Moody) 목사, 서기 브릭햄(E.T. Brigham)이다.
이곳 친우회 결성은 캔사스시티에 있는 한인 학생들과 서재필의 활발한 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 1919년 10월경부터 캔사스시티 팍(Park)대학에 다니고 있던 이용직·백승빈·차의식 등이 선전활동을 통해 『캔사스시티 포스트』지 사장의 협조를 얻어 친한 여론을 형성시켰고, 그런 다음 서재필이 팍대학 학장 하울리(J.W. Hawley)의 협조를 받아 활발한 강연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가능하였다. 서재필은 11월 10일 이 도시에 오자마자 종교계·교육계·상업계 인사들을 대상으로 3차에 걸친 강연활동으로 한국사정을 전파한 결과, 당일에 15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친우회를 결성하였다. 그 다음날 그는 팍대학에서 5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강연활동을 전개하여 학생들에게 한국 사정을 설명했다. 특별히 국민회는 이곳 친우회 결성을 위해 200달러를 후원함으로써 서재필의 친우회활동에 높은 관심과 후원을 보냈다.
그런데 캔사스시티에 친우회가 조직되고 친한 여론이 활발히 조성될 수 있었던 것은 이 도시가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유리한 조건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노력해 온 스펜스(S.P. Spencer) 상원의원을 비롯하여 약소민족에 대해 동정하는 유력인사들이 많은 점과 이 곳 교회에서 많은 선교사를 한국에 보내 평소 한국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은 점, 그리고 한인 동포가 이미 생활기반을 다지고 있으면서 팍대학에 재학 중인 한인 학생들과 연대할 수 있은 점 등을 들 수 있다.

콜럼버스(Columbus)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친우회는 1919년 11월 25일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오하이오대학교 교목 휴스톤(W. Houston) 박사, 서기겸 회계에 소드(H.M. Sourd)이며, 그 외 6명의 이사진이 있다.
콜럼버스지역은 한국친우회가 결성되기 이전부터 이미 한국을 위한 활발한 활동으로 친우회 결성을 위한 여건이 닦여져 있었다. 1919년 6월 27일과 28일에 휴스톤 목사가 주재한 집회에서 서재필을 비롯한 그리피스·벡·가터필 여사 등의 강연활동에 힘입어 한국지원 결의문을 채택한 바 있었는데, 이날 집회에서 오하이오대 교목 휴스톤은 깊은 감명을 받고 한인 학생들과 함께 친우회 결성에 앞장섰다.
휴스턴 목사와 윤영선을 중심으로 한 오하이오대학생들은 이 대학 총장 탐슨의 협조를 받아 대대적인 집회계획을 세우면서 친우회 결성을 구체화 하였다. 이들은 헐버트를 연사로 초청하여 11월 23일부터 12월 3일까지 10여 일간 콜럼버스·얼라이언스·맨스필드 등지에서 순회집회를 개최하였다. 그 결과 콜럼버스 외에 얼라이언스와 맨스필드지역에도 한국친우회가 결성되었다.

맨스필드(Mansfield)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맨스필드친우회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오하이오대 한인 학생들이 헐버트를 초청하여, 1919년 11월 23일부터 12월 3일까지 순회집회를 연 결과 12월 초경에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툴로스(R.E. Tulloss) 박사, 부회장에 맥밀린(McMilln) 박사, 서기 겸 회계에 엘리오트(F. Elliot) 목사이다. 맨스필드친우회는 얼라이언스 한국친우회와 공동으로 작성된 결의문을 미 대통령과 상원외교위원회, 오하이오주 출신 국회의원 및 언론 등에 발송하여 한국 동정을 호소하였다.

얼라이언스(Alliance)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얼라이언스친우회가 결성된 날은 위의 맨스필드친우회 경우와 비슷한 1919년 12월경으로 보이며, 조직 구성은 회장에 브라이슨(F.J. Bryson) 박사, 부회장에 맥카티(B. McCarty) 박사, 회계에 위버(L.L. Weaver) 교수, 서기에 제실(O. Zechiel) 목사이다.

뉴버그(Newberg) 한국친우회

오레곤주 뉴버그친우회는 1919년 11월 11일 한국독립을 지원하기 위해 공동회를 개최한 후 12월 14일 프린드슨교회에서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 깁슨(C.E. Gibson) 박사, 부회장 멘덴홀(H.G. Mendenhall), 회계 밀스(J.D. Mills) 교수, 서기 필(C.S. Piel)이다. 이곳 친우회는 스프링브룩(Springbrook)의 ‘친우교회’를 통해 미 정부에 한국독립을 촉구하는 서한을 발송시키는 활동을 전개했다.

보스톤(Boston) 한국친우회

메사추세츠주 보스톤친우회는 보스톤대학생 양유찬과 김제봉의 주도적인 준비와 이승만과 벡 목사의 연설, 그리고 이 대학 총장 머린을 비롯한 7명의 주요 미국인 인사들의 협조에 힘입어 1920년 1월 11일 대규모 집회 후 90여 명의 회원으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보스톤대학교 총장 머린(L.H. Murlin) 박사, 회계에 마건(H.I. Magoun), 서기에 스타레트(A.M. Starrett)이고, 그 외 실행서기로 유일한과 13명의 집행위원회를 두었다.
보스톤 친우회의 특이점은 보스톤대학교에 재학중인 중·일(중국·일본)의 학생들이 대거 참가하여 한국의 입장을 지지한 점이다.
보스톤친우회는 1920년 4월 20일 대규모 집회에서 이승만·헐버트의 강연활동에 힘입어 1,500여 명의 회원으로 확장시키는 등 두드러진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곳 친우회는 김제봉·양유찬과 마운트유니온대학에 재학 중인 김영기의 노력에 힘입어 크게 발전하였다.

앤아버 (Ann Arbor) 한국친우회

미시간주 앤아버친우회는 오하이오주립대에 재학중인 이병두와 미시간 주립대에 재학중인 정원현·박인준 등의 노력, 그리고 헐버트·벡의 강연 활동에 힘입어 1920년 2월 20일 600여 명이 모인 집회에서 229명이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미시간주립대학교 수학 교수인 루프스(W.C. Rufus), 부회장에 우드햄스(R. Woodhams), 회계에 웰톤(J.W. Welton) 여사, 기록서기에 오코너(W. O’Conner), 집행서기에 이병두이며, 자문위원으로 안아버 종교연맹회장 웰즈(J.M. Wells) 목사를 비롯한 6명이 있었다.
앤아버친우회는 결성 목적을 한국에 있는 고아나 과부 및 노인들을 보호하고 원조하는 데 두고 구체적인 한인구제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2월 20일 집회에서는 229명의 회원으로부터 447달러의 의연금을 모아 미국에 유학 오는 한인 학생들을 돕는 데 사용하였다.

뉴욕 한국친우회

뉴욕친우회는 1920년 2월 26일 맥칼핀호텔에서 서재필이 콜럼비아대학교에 재학 중인 조병옥과 친우회 결성을 위한 사전집회를 가진 후, 그해 4월 20일 성트리니티교회에서의 집회를 통해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스미스(C.J. Smith) 박사, 서기에 길모어(G.W. Gilmore) 교수이다. 이 날 집회에는 서재필을 비롯하여 그리피스 박사와 평양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감리교선교사 노블(Noble), 비행사인 하이(High) 씨와 포프(A.U. Pope) 교수 등의 강연활동이 친우회 결성에 큰 힘이 되었다.

팍빌(Park Vill) 한국친우회

미조리주 팍빌친우회는 팍(Park)대학에 재학중인 이용직·백승빈·차의석을 중심으로 한 한인유학생들의 사전준비와 팍대학 학장 및 여러 교수들의 도움, 그리고 헐버트의 연설에 힘입어 1920년 3월 9일 집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팍빌친우회는 회원수가 200여 명에 이르렀는데, 미국대학 중에서 처음으로 세워진 점에 의의가 있다.

덴버(Denber) 한국친우회

콜로라도주 덴버친우회가 정식으로 결성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으나, 이승만과 정한경의 노력에 의해 친우회가 설립 되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신한민보』 1920년 4월 9일자에 이승만과 정한경이 1920년 3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간 덴버지역의 교회와 대학교 및 각종 사회단체를 돌면서 강연활동을 벌인 후, 정한경이 계속 남아서 친우회를 조직하기로 했다고 보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후 기록이 비록 보이지 않지만 이곳에 한국친우회가 설립되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앞펄퍼키오멘 벨리(Upper Perkiomen Valley) 한국친우회

펜실베니아주 앞펄퍼키오멘벨리친우회는 1920년 8월 3일 김장호의 강연활동에 힘입어 71명의 회원으로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회장에 드롱(C. M. De long) 목사, 부회장에 키스털(W.U. Kistler) 목사, 회계에 리터(R.E. Ritter), 서기에 웰커(A.L. Welker)이고 그 밖에 10명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가 있었다.

마리온(Marion) 한국친우회

오하이오주 마리온친우회는 마리온 지역 목사연맹의 주최로 1921년 1월 2일 대규모 집회를 통해 결성되었다. 이날 집회에서는 한국독립 승인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작성하여 미대통령 하딩과 상하 양원에게 보내기도 했다. 이곳 친우회 결성에는 오하이오주립대학교에 재학중인 이병두의 주도적인 활동과 서재필·벡의 강연활동이 큰 힘으로 작용하였다.

런던 한국친우회

영국 런던친우회는 1920년 10월 26일 영국 하원 의사당에서 멕켄지(F.A. McKenzie)와 파리통신부와 런던주재외교를 담당하는 황기환에 의해 결성되었다. 조직 구성은 의장에 하원의원 로버트 뉴만(Rovert Newman), 명예회계에 히스롭(W.G. Hislop), 명예서기에 윌리암즈(W.L. Williams)이고, 간사위원으로 존 에드워드(John Edwards), 페리 (J.H. Parry), 멕켄지 등 7명이 있었다. 회원은 62명이었는데 그 중 국회의원 17명, 에딘버러 학장 등 학자 6명, 신문기자 4명, 목사 9명, 귀족 3명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런던친우회의 결성에는 멕켄지의 노력이 절대적이었다. 그는 런던 기자로 있으면서 한국을 방문하여 1908년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을 써 일찍이 일본의 불법적인 대한만행을 고발해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그는 1920년 중반기에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써서 3·1운동(1919) 기간에 저지른 일본의 만행과 한국인의 독립 열망을 소개하여 영국 내 한국문제가 논의되게 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멕켄지는 처음 런던친우회의 결성방향을 한국에 대한 기독교적인 동정과 인도, 그리고 애국적인 의무감 때문에 결성하는 것이지, 일본에 대한 반일감정을 조장하거나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행동하지 않을 것임을 나타내어 순수한 인도주의적 활동에 의한 것임을 피력했다. 이러한 그의 의도는 영국이 일본과 동맹을 맺고 있는 상황에서 영국민에게 반일감정을 일으킨다면, 영·일(영국·일본) 간의 외교 마찰으로 확대될 줄 모른다는 우려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의도와 달리 런던친우회는 정치적 색채와 함께 반일감정을 조장하고 있었다. 먼저 10월 26에 채택된 다음의 결의안 내용은 반일감정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첫째, 한국 내 사회·정치·경제·종교에 대한 현황을 널리 선전할 것.
둘째, 한국인을 위하여 정의와 자유의 회복을 지원할 것.
셋째, 한국기독교인의 신앙의 자유를 보호할 것.
넷째, 한국에서 정치와 종교적으로 박해받는 사람과 과부와 고아를 구제할 것.(『KOREA REVIEW』 1920. 12)

또한 런던친우회는 1920년 12월 4일자로 서재필에게 서신을 보내 그간의 활동성과를 전했는데, 그 내용에는 영국 국민들이 동맹국 일본에 대해 지금까지 그토록 공개적인 반일감정을 표출한 적이 없을 정도로 고조되고 있다고 언급하였다.
이를 볼 때 런던친우회는 미국 내의 친우회와 같이 표면상 인도주의적 입장에서 결성하였으나, 결과적으로 반일감정을 고조시키는 데 큰 일익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영향으로 영국 외무성 극동관리 애쉬턴 과트킨(Ashton Gwatkin)은 1920년 말 「한국 및 기타지역에서의 일본의 잔학성에 관한 메모」를 작성·발표할 때 한국에 대한 일본의 잔인성을 영·일(영국·일본)동맹의 재교섭과 연관시킬 것을 주장함으로써 한국문제에 대한 정치적 의미를 부여였다.
런던친우회는 결성 과정과 활동내용을 미국에 있는 서재필에게 상세히 보고하고 있어서 지역상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서로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음을 보여준다.

파리 한국친우회

프랑스 파리친우회에 대한 상황은 임시정부공보 제24호(1921. 6. 22)에 나타난 황기환의 보고가 전부이다. 여기에 따르면 황기환은 1921년 5월 20일 파리에서 각계의 유력한 인사로 구성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였음을 알리고 있다.

(3) 한국친우회의 성격과 의의

이와 같은 한국친우회의 결성과 활동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첫째,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인도적이고 비정치적인인 시민단체로 출발한 친우회가 한국문제에 관한 정치적인 압력단체로 행사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각 지역 친우회가 조직될 때 발표되고 있는 결의문들을 통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 결의문의 주요내용은 미정부가 1882년 한미조약(조미수호통상조약)을 준수하여 부당한 일본지배를 막고 한국의 독립을 승인해줄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것이 단순한 결의로 끝나지 않고 미정부와 의회, 그리고 해당지역 의원들에게 보내짐으로써 한국문제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한 예로 필라델피아친우회와 리딩친우회의 경우처럼 미대표단장 휴즈에게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문제 해결을 강력히 요구하고 있는 것은 친우회가 한국을 위한 정치적인 압력단체로 행사하고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둘째, 한국친우회 결성이 미국의 중·동부에 집중되어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선전활동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원인으로는 통신부와 친우회 본부가 서재필이 있는 미 동부 지역인 필라델피아에 있었다는 점이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자연 친우회 결성은 필라델피아와 인접해 있으면서 미 정치의 중심지역인 뉴욕과 워싱턴 등 미 동부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에 미국 중·동부지역의 한인유학생들이 친우회 결성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국민회가 있는 미서부 지역에서 친우회 활동이 미약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은 당시 국민회의 외교 능력이 미약함을 보이는 것이지 친우회 결성을 방관했다고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캔사스시티친우회 결성시 국민회가 200달러를 보낸 사실과, 캘리포니아주 한인들이 서재필의 방문을 거듭 요청하여 도와줄 것을 요청한 사실 등에서 볼 때, 국민회가 한국친우 회 결성에 큰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선전활동이 정한경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국민회가 안창호가 상해로 떠난 1919년 4월 이후부터 지도력을 상실하고 있은 데다,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한 이후부터 더욱 침체에 빠져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셋째, 친우회 결성이 주로 대중집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이다. 대중집회를 열기 위해서는 장소 선정이나 진행 절차, 그리고 소요 비용·인원동원 등 많은 준비가 필요한데 친우회가 이를 통해 결성되고 있는 점은 미국 시민의 자발적인 호응이 그만큼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친우회의 모든 운영이 회원의 회비나 의연에 의해서만 운영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를 감안해 볼 때 당시 한국문제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대중집회를 통한 친우회 결성은 미국민의 한국 지지 여론을 확산시키는데 상당한 선전효과를 주었다고 보여진다.
그러면 이러한 친우회 결성이 미국 전역에 걸쳐 가능하게 된 요인이 무엇인지 다음 몇 가지로 분석할 수 있다. 먼저, 미국인의 정서에 부합하면서 효과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한 유능한 인재들의 활약을 들 수 있다. 서재필은 통신부의 선전외교활동의 일환으로 친우회 결성에 참여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유력한 미국 인사들을 친우회에 끌어들이거나, 자신이 직접 결성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여기에 이승만·정한경도 가담하여 큰 힘이 되었다.
특별히 톰킨스·헐버트註4)벡註5)·그리피스註6)·가터필註7)·화이팅註8) 등 친한미국인들의 강연활동은 친우회 결성에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 미국인들은 모두 당시 기독교계의 유력한 인사들로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큰 미국 사회에 친한 여론을 선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또 톰킨스 목사를 제외하고 모두 한국에서 사역을 했던 선교사들이었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한국 실정을 잘 전달할 수 있는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친우회 간부진 및 회원들 가운데 기독교 계층의 사람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은 이들 인사들의 활동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한인 유학생들이 친우회 결성을 위한 계획과 준비 그리고 진행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점이다. 이들에 의해 친우회가 결성된 곳을 보면 오하이오주 지역을 비롯하여 미조리주·매사추세츠주·미시간주·뉴욕주 등 13곳이나 되는데, 이것은 미 전체 친우회 결성의 60%를 넘고 있다. 친우회 결성시 대학을 중심으로 한교육계 인사들이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이들 한인 유학생들의 노력이 컸음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미국 내에서 팽배한 반일여론을 적극 이용한 점을 들 수 있다. 친우회 결성 당시 미국에서는 반일여론이 크게 일고 있었다. 이 반일 여론의 논거는 일본의 침략적 팽창주의정책을 우려하는 ‘황화론’ 때문이었다. ‘황화론’이란 인종론에 바탕을 갖고 있는 것으로 일본의 시베리아 및 중국으로의 대륙팽창정책이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는 미국 허스트계 신문의 반일선전 논리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3·1운동(1919)이 일어나 한국에 대한 일본의 비인도적인 탄압행위가 알려지고, 캘리포니아주에서 일본이민의 배척문제가 새로 제기되면서 반일여론은 격화되었다. 더구나 파리강화조약(1919)에서 산동(山東)이권을 일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하자, 미 의회와 언론은 일본이라는 나라는 식민지를 통치할 민족이 못된다고 공박하고, 이번 조약은 인류의 해방을 위해 제1차 세계대전(1914)에 참가한 미국의 정신과 정면 배치된다는 논리를 내세워 반일여론을 선도하였다. 미 의회와 언론의 반일여론 배경에는 강화조약과 국제연맹 결성을 반대하는 데 있었다.
이러한 미국 내 반일적인 분위기는 한국친우회 결성시 미국민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데 유리한 배경을 만들어 주었다.
한국친우회는 미국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에도 결성되어 광범위한 국제적인 조직을 갖춤에 따라, 3·1운동(1919)으로 나타난 한국의 실상을 전파하고 친한여론을 형성하는 데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친우회의 성과에 대해 일본 측은 미국에 있는 여러 한인단체 가운데 “조선우애단(한국친우회)의 행동에 관해서는 금후 다소 주의를 요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고 할 정도로 그 성과를 인정하였다.
한국친우회는 서재필이 1922년 2월 초 워싱턴회의 종결 이후 모든 활동을 중지하기로 하면서 사실상 침체에 빠졌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침체 원인은 이제까지 3·1운동(1919)을 이용한 선전활동이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 내에서 선전재료로서의 가치가 점차 줄어든 점과, 워싱턴회의에서 미국정부가 현상유지정책의 일환으로 일본을 자극할 수 있는 한국문제에 무성의로 일관한 데다, 워싱턴회의 이후 세계열강들의 질서가 일시적인 안정기로 돌아섬으로써 친우회 활동이 더 이상 미국민의 호응을 얻지 못하게 된 것이 주요요인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한국친우회는 일본의 관동대진재로 한인학살문제가 국제사회에 알려질 때, 친우회 회장 톰킨스가 1923년 11월 20일자로 미 국무장관 휴즈에게 항의문을 보내 시정을 촉구하고 있는 것을 보아 1923년 말까지 계속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4) 워싱턴회의의 활동

(1) 준비활동

워싱턴회의는 미국이 해군 군비축소와 악화된 미·일(미국·일본)관계의 조정, 그리고 영·일(영국·일본)동맹의 폐기 등의 이유로 1921년 11월 11일부터 1922년 2월 6일까지 워싱턴에서 개최한 대회이다. 이 회의는 미대통령 하딩이 1921년 7월 11일 위의 현안을 다루고자 영·일·프·이(영국·일본·프랑스·이탈리아) 등 주요 열강들에게 비공식으로 제의한 후 7월 14일 정식으로 발표됨으로써 공개되었다.
워싱턴회의 개최는 파리강화회의(1919) 이후 재미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외 모든 한인들에게도 주목받는 대회였다. 서재필은 이 회의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대비의 필요성을 처음으로 상해 임시정부와 재미한인사회에 제기한 뒤 중심인물로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워싱턴회의를 위한 서재필의 제안은 1921년 7월 14일자로 상해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다음의 서신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본인은 귀하께 미국에서 만국평화회의를 소집하여 원동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여 영·프·이·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일본) 및 중국까지 청한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나이다.…본인이 귀하와 동포 전체에 대하여 제의하는 바는 이 같은 시기와 긴급한 시간을 당한 우리들은 힘과 권세를 다하여 미국에 있는 이 평화회의에 대해 하고자 하는 일을 받들어 양호한 결과를 얻도록 하기를 바라나이다. 한국독립의 생명이 이에 달렸다 하겠는데, 동포들이 협력하여 받들어 주지 아니하면 우리는 효력 있게 일하지 못하겠나이다.(『신한민보』, 1921. 7. 28, 「재무부와 위원부간 내왕공문」)

그는 이 서신에서 이번 회의가 한국의 생사가 달릴 만큼 중요하며 한국독립의 마지막 기회라 판단하고, 전체 한인들이 협력하여 이를 대비해야 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런 다음 서재필은 워싱턴회의를 대비하기 위해 단독으로 재정모금활동을 개시하였다. 그는 7월 15일 뉴욕 한인들과 함께 5명의 준비위원을 선정하여 한인들에게 워싱턴회의에 대한 여론 환기를 담당시키고, 그 중 임초를 재정수전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그리고 그는 워싱턴회의에 관한 자신의 입장과 이번 일에 10만 달러의 재정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구미위원통신 제30호」와 『신한민보』를 통해 재미한인들에게 알렸다. 국민회 북미지방총회장 최진하에게는 임초의 재정모금활동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서재필이 이번 재정모집을 정부 측의 주도가 아닌 민간주도로 시행하고 있는 점이다. 그것은 서재필이 최진하에게 보낸 8월 11일자 전보에서 “이번 특별수전은 정부위원이 하는 것이 아니오 백성들이 하는 것”이라 한데서 잘 나타난다. 여기서 ‘정부’라 함은 상해 임시정부가 아니라 구미위원부를 지칭한 것이었다. 따라서 서재필이 제의한 민간 주도라는 의미는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의 자격이 아닌 순수 민간인 신분에서 자신의 신용에 의해 추진함을 의미하였다. 그는 민간주도의 자금모집 이유를 「구미위원부통신 제32호」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 설명코자 함은 이렇게 함으로 몇 가지 유익이 있으니, 백성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케 하여 나라 일에 직접으로 돕게 하며, 이 일에 성불성간 책임을 자기들이 지게 하며, 자기들이 자의로 거두어 나라 일에 쓰게 하기 위하여 대표들에게 보내는 것을 기뻐함이요, 다소가 당파사상에 연연하여 수전하는 일에 영향이 미칠 점을 감하게 함이요, 공채표를 사라고 서로 권면하는 것이 위원부에서 권하는 것보다 나을지라.

여기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서재필이 민간주도로 재정모집을 한 것이 한인동포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명분임을 내세우고 있으나, 실상은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진행될 때 오히려 재미한인사회를 분란시켜 재정모집에 방해가 될 수 있음을 우려했음을 알 수 있다.
서재필의 구미위원부에 대한 불신은 당시 재미한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구미위원부는 재미한인사회를 단합시킨 역할보다 오히려 분열을 조장하여 이승만 지지세력 외에는 거의 재정적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설립 직후 국민회와의 재정권 관할문제로 서로 반목을 거듭한 이래 초대 위원장인 김규식과 이승만과의 불화, 현순의 무리한 대사관 설립을 둘러싼 내부문제 등으로, 구미위원부는 재미한인사회에서 심각한 불신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재미한인사회에 구미위원부에 대한 불신 배경에는 반이승만 분위기 때문으로 보인다. 반이승만의 분위기는 당시 그를 지지하는 하와이 내 동지회와 교민단 측 사람을 제외하고는 매우 위험한 수준에 오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던 서재필은 모종의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가 줄곧 한인들의 단결을 강조하여 부르짖는 것도 생각해 보면, 이승만 세력과 반이승만 세력과의 화합문제가 주요 과제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 서재필은 한국에 있을 때 배재학당에서 이승만을 가르친 스승이었으나, 지금 그가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이 된 이상 그의 권위에 대해 더 이상 왈가불가 하지 말고 인정하여 그를 중심으로 단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김규식이 이승만과의 마찰로 구미위원부를 떠나고 이승만도 상해 임정(임시정부)의 부름을 받아 상해로 떠날 즈음에 1920년 9월 8일자로 임시정부 각원에게 보낸 장문의 공문 속에 잘 나타나 있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한인은 독립할 자격이 있다. 어떤 국민이든지 자기 정부가 없이 생존할 수 없다. 더욱이 한인은 상당한 지도와 훈련을 받으면 자립·자치할 능력이 있다. 본인도 역시 대한의 정치 즉 독립에 대해 다른 국가를 의뢰하지 않는다. 이 큰 사업은 오직 대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완성할 것이다.
대한인이 금일 상태로 타락된 원인은 일치된 목표를 가지지 못한 때문이다. 만약 이런 정신을 가졌다 할지라도 힘을 합하여 조직된 실효 있는 기관을 통해 일하지 못했다. 한 국가가 스스로 분열하면 타국은 이 약점을 이익 삼아 필경 그 국가를 자기의 이익을 위해 탈취할 것이다.
작년 3월 사변(3·1운동, 1919)으로 판단하여 보건대, 대한인의 대부분 중에 일개 공통의 열망이 있으니, 이는 일본의 통치를 벗어나고 자유를 얻고자 함이라.…여러 세기 중에서 처음으로 동심 협력이 발생하여 대한 사람의 정책 중에서 당파의 폐습을 소멸하였던 것이다. 그런고로 대한문제가 큰 힘을 가지게 되었다.
지도자 되신 제공들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여 외적의 압박하에 고통하는 저 민족을 지도하며 도와주어야 하겠다. 제공이 스스로 분열하며 횡단된 목적으로 사역하는 때는 동포를 도와주지 못할 것이다. 만약 제공이 무슨 이유로든지 저희들의 목적을 달성하게 하는 이 신성한 직무를 행치 아니 하거나 불응하면, 제공은 충신한 대한 사람이라 할 수 없다.
제공에게 나는 이의가 많다. 각 사람 각 성 중에 같은 뜻도 있고 다른 뜻도 있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다. 다 이와 같은 현상은 어느 국민에게나 민족에게든지 다 있는 흔한 일이다.
그러나 저희들의 목표와 목적이 동일할 것 같으면, 저희들은 반드시 공동문제를 위하여 목표로 진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제공의 작은 이의와 같지 않음으로 인해 결코 큰일을 파괴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한 폐습은 지도자 중 대화로 모든 고성을 제거함으로써 타파된다. 과반수의 의향으로 일정한 정책을 결의하고, 한 번 시행된 이상은 각 사람이 마땅히 이 계획에 대해 자기의 원조를 줄일 것이오, 그런 후에는 이것이 법률이 되어 각 사람이 이 법률의 책임을 지고, 이를 좋아하든지 좋아하지 않든지 이를 실행케 할 것이다. 이것은 제공이 정부 행정사무에나 어떤 것이든지 응용할 유일의 방식이다.
대한인 중에는 특수한 지도자가 다수 있다. 또한 저들이 다 애국자인 줄 믿는다. 그러나 저들 중에 많은 사람은 조직적 사역의 경험이 부족하니, 이는 이 일에 생소한 연유이다. 본인이 열망하는 바는 대통령 이하 각 사람이 조직적 사역, 즉 미국에서는 팀원이라 칭하는 것을 연구하길 바란다.
이(이승만) 박사께서는 많은 친구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반대자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를 복종하는 사람도 많으며, 그를 복종하지 않는 사람도 많은 것을 본인도 안다. 아마 제공 중에도 동일한 사정이 있을 줄 안다. 그를 정부의 수석으로 모시게 한 일이 양책(良策)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이 일을 이미 세계에 공포하였는지라, 제공들은 그를 복종치 아니하며 혹은 대통령의 명칭을 쟁론하는 이도 있겠으나 이 문제로 우리의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 때가 아니다.
이미 된 일은 사실이니 우리는 마땅히 그를 옹호해야 할 것이다. 이승만으로 생각함이 아니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생각하자. 이 동일한 의의를 제공들에게도 마땅히 응용할 것을 바란다. 제공이 제공의 직무에 자격이 상당하든지 아니하든지 우리가 제공을 대한민국의 대표자로 세계에 공포하였으니, 우리가 제공을 가불가를 막론하고 마땅히 제공을 옹호할 것이다.
우리의 전투는 일본을 대적함이요 대한인을 대적함이 아니다. 만약 제공이 사소한 사정으로 제공의 동족을 대적함에 시간과 정력을 소비할진대 일본에게 큰 안위를 줄 것이오, 제공 중에 당파전투를 하는 것보다 일본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이 없을 것이다.
제공이 분열될 시에는 제공의 힘도 감소되어 국내 동포들이 제공으로 하여금 완성하길 바라는 목적을 완성치 못할 것은 근본 사실일 것이다.
금번 이(이승만) 박사께서 상해에 가 제공을 친히 만나 그 정부 각인의 직무에 관해 논의가 있을 것을 아노니, 이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또한 김규식도 상해로 내왕하여 정부사업에 대한 여러 계획을 행할 것인데, 김군(김규식)은 본인이 아는바 애국자이다. 그의 심정이 제공 중에도 있을 줄 믿는다. (『신한민보』, 1920. 11. 25, 「서재필 박사가 임시정부 각원에게 보낸 공문」)

이렇게 이승만 개인이 아니라 대통령으로서 그의 권위를 인정하려 했기 때문에, 서재필은 상해에 있던 이승만이 일방적인 지시로 1921년 4월 현순의 뒤를 이어 그에게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직을 임명할 때 이를 수락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이승만이 미국에 돌아올 때까지만 위원장직을 맡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신한민보』, 1921. 10. 20) 비록 통신부가 구미위원부의 조직 안에 편입되어 매월 재정적인 후원을 받고 있어 형식상 이승만의 통제와 간섭을 받는 위치에 있었지만, 서재필이 3·1운동(1919)을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 때 임시정부나 재미한인들로부터 어떤 정치적인 대가를 바란 것이 아니어서 이런 외형적인 조직 구성에 처음부터 크게 개의치 않았고 구미위원부 위원장직에 대한 애착을 조금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서재필이 임시위원장직을 맡았을 때 구미위원부의 상태는 재정 곤란으로 자체 유지도 어려울 정도였고 통신부에 대한 정기적인 재정지원도 할 수 없는 이름뿐인 단체였다. 이러한 구미위원부의 상태는 이미 서재필이 7월 14일자로 이시영에게 보낸 서신에서 충분히 제시되고 있었다. 여기서 그는 북미·하와이·멕시코 지역의 경제가 불황이 되어 한인들의 경제생활이 어려운 상태라는 점, 구미위원부의 신용부족과 한인들 간의 분열이 심한 상태라는 점, 최근에 있은 현순의 유아적 행동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구미위원부 신용마저 소멸되어진 상태라는 점 등을 언급하면서, 이런 상태에서 앞으로 위원부가 얼마나 더 유지할지 모를 정도이며, 현재 3,000달러의 부채마저 갚을 길이 없음을 밝혔다.
이런 모든 사정을 감안한 서재필은 재미한인사회가 갖고 있는 분열과 당파심을 배제하고 모든 한인들의 참여를 도모하고자, 구미위원부의 이름으로 하지 않고 민간주도라는 것을 내세워 전적으로 자신의 신용에 의한 독자추진을 결행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의 재정모집활동은 재미한인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후원을 받았다. 먼저 『신한민보』는 일련의 논설을 통해 이번 회의의 중요성과 한인동포의 자발적인 참여를 강조하여 서재필의 계획을 적극 지지하였다.
지난 8월 11일에 아래에 게재한 서(서재필) 박사의 특전을 접수한바, 곧 이번 열강회의에 외교활동을 위하여 수전하는 것은 정부에서 하는 것이 아니요 전체 백성이 하는 것이니, 임초 씨와 합동하여 각 지방회에서 수전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한지라, 이번 일에 정부의 지시에 따라 특별히 기다리고 있던 북미총회는 능력과 수단을 다하여 이번 일을 도우기로 결의하였도다. (『신한민보』,1921. 8. 18)

그리고 국민회는 각 지방회에 공문을 보내 수전활동에 협조해 줄 것을 지시한 뒤, 북미총회장 최진하는 임초와 함께 수전활동에 나섰다.
이러한 협조 분위기는 하와이·멕시코·쿠바 등지까지 확대되었다. 그 결과 9월부터 11월 8일까지 모금한 현황을 보면 21,219달러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비록 처음 목표한 10만 달러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당시 어려운 한인들의 경제사정을 감안할 때 짧은 기간에 놀라운 금액이었다. 당시 한인들은 캘리포니아주 한인 동포들의 벼농사 실패와 제1차 세계대전(1914) 이후 미국 경제의 침체로 인해 경제사정이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각 지역별 재정모집상황을 보면, 북미에서 11,538달러, 하와이에서 7,088달러, 멕시코에서 484달러, 쿠바에서 225달러, 그리고 중국인들의 의연이 1,883달러였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최진하는 “이번 일은 서(서재필) 박사의 주관이 아니요 신용이 아니었던들 이만한 성적을 도저히 얻지 못하였으리라.” 하였다.
한편 그동안 상해에 있으면서 임시정부의 내분을 수습하지 못하고 미국에 돌아온 이승만은 대통령으로서의 자질시비에 물려 있었다. 이승만은 1920년 9월경부터 하와이에 머물러 있다가 그해 12월경에 상해에 도착한 뒤, 1921년 6월 29일 하와이로 돌아왔다. 그의 상해 체류시기 임시정부 내부에는 전면 개혁해야 한다는 측과 부분적인 개편을 주장하는 측으로 나누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으로서 수습할 책임을 가진 이승만은 이러한 임정(임시정부)내부의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데다, 오히려 위임통치청원문제로 그의 반대파의 지탄을 받아 대통령의 자질시비문제까지 확대되면서 곤경에 처하였지만, 외교사무의 긴급을 이유로 서둘러 상해를 빠져 나오고 말았다.
이런 상태로 하와이에 온 이승만에 대해 그의 반대 측들은 가만두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박용만 측이 운영하는 『태평양시사』지가 1921년 8월 2일 자에 「도망자탐문」이라는 제목으로 이승만이 대통령으로서 일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상해에서 몰래 도망하였다는 기사를 실은 것이다. 이에 대해 이승만과 그의 지지자들은 격분하여 신문사를 습격하고 박용만 측 사람들을 구타하는 등 유혈충돌을 일으켰는데, 이 일로 미국 언론의 지탄을 받아 하와이내 한인들의 사기는 크게 저하되고 말았다.
따라서 하와이 도착 직후 이러한 분쟁에 말려 있던 이승만은 워싱턴에 도착하는 1921년 8월말까지 서재필의 워싱턴회의 준비에 전혀 동참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방법상의 이유를 내세워 서재필의 재정모집활동에 제동을 걸면서 그의 활동을 위축시키고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임초를 만나 서재필의 재정모집 활동을 들은 이승만은, 8월 13일과 19일자로 구미위원부에게 전보를 보내 공채표 발매를 위한 방침을 정하라고 지시하였다. 서재필 개인 중심의 재정모집방식에서 구미위원부 명의에 의한 방식으로 전환시키려 한 것이다. 그런 다음 그는 정한경에게 한인 동포들의 자금을 거두어 위원부로 직접 보낼 것을 지시하고 8월 27일 서재필을 비롯하여 정한경·돌프·이용직·안정수 등과 회합하여 이 문제를 정식으로 거론하였다. 이에 대해 서재필은 먼저,

그동안 경력을 생각하면 위원부에서 나를 정당히 대접치 아니하였으므로 이 일에 간섭치 말고자 하였으나 만일 위원부를 회복하는 일에 내가 착수하지 않으면 세상 사람의 이목에 한국일이 대단히 손해를 당하겠기로 임시위원장 되라는 요구를 복종하여 본즉, 현순의 반항으로 인해 손해당한 것이 적지 아니한지라, 다행히 돌프와 위원부 사무원들이 양심적으로 도움으로써 위원부의 질서를 대강 회복하여 지금껏 집행하고 있다. (『신한민보』, 1921. 10. 21, 「구미위원부통신」 제32호)

고 하여 그동안 구미위원부내에서 겪었던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밝힌 후, 한인동포들의 경제상의 어려움과 구미위원부에 대한 신용추락으로 이제는 구미위원부의 존폐를 생각해야 할 정도로 위기상태에 있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민족 독립을 위한 큰일을 앞에 두고 재정모집에 대한 방법 문제로 내분을 원치 않았던 서재필은 지금까지 자신이 해 온 방식은 시비는 적고 보다 효력이 많은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승만의 요구가 그러하면 그의 뜻에 따르겠다고 함으로써 마무리 지었다.
그 후 이승만은 10월 3일자로 「대통령훈유」를 발표하여 서재필은 외교 업무를 전담하고, 자신은 재정업무를 관장하기로 했다고 알려, 외견상 재정모집을 둘러싼 내분의 인상을 재미한인사회에 남기지 않도록 조처했다. 그렇지만 이번 일로 서재필은 이승만에 대한 개인적인 실망을 감출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이승만은 워싱턴회의에 대한 외교업무 수행에서도 서재필을 배제시키려 하였다. 상해 임시정부에게 한국대표단 선정시 서재필을 정사(正使)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구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1921년 9월 26일 의정원회의를 열어 이승만의 제의에 대해 토의한 결과, 서재필을 배제시키는 것은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계획에 착오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오히려 분란만 조장한다고 판단하고 그의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러한 이승만의 일련의 행동들은 이번 워싱턴회의에 대한 외교적 성과를 중시한 것보다 구미위원부의 위상강화에 염두에 두면서, 실추된 임시정부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보전에 더 집착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서재필에게는 실망스런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2) 활동의 성과

워싱턴회의에 대한 서재필의 집요한 준비활동은 미주한인사회 뿐만 아니라 상해 임시정부와 국내외 모든 한인들에게 3·1운동(1919) 후 처음으로 거족적인 관심과 참여를 유발시켜 주었다. 특별히 상해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를 준비하는 서재필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줌으로써 이 회의를 한국독립을 위한 중요한 외교사업으로 간주하였다. 먼저 외무총장 신규식은 1921년 7월 20일자 공문에서 이번 회의에 대한 모든 준비를 서재필에게 위임한다는 국무회의의 의결사항을 전달하였고, 9월 29일 임시의정원 회의에서는 이승만·서재필을 각각 한국의 대표와 부대표로, 정한경을 서기로 돌프·토마스를 각각 법률고문으로 임명하여, 워싱턴회의에 대한 외교활동을 공식적인 임시정부의 외교활동으로 만들었다. 또한 임시정부는 홍진을 중심으로 ‘대태평양외교후원회(對太平洋外交後援會)’와 안창호를 중심으로 한 ‘외교연구회’를 조직하여 워싱턴회의를 후원하였고, 한·중(한국·중국) 민간단체들인 한중호조사나 한·중(한국·중국)협회들도 여기에 동참하였다.
이와 함께 국내에서는 13도 지역대표 373명이 연맹 날인한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를 한국대표단에게 보내 대표단의 활동을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한국대표단은 구미위원부와 별도로 워싱턴에 한국대표부사무실을 내고 워싱턴회의에 한국문제를 상정시키려는 노력을 다각적으로 전개하였다. 먼저 1921년 10월 1일 미대표단 단장 휴즈에게 한국대표단이 이번 회의에 참가할 것을 요구하는 청원서를 정식으로 발송하고, 계속해서 미국시민들에게 호소하고자 12월 1일 「군축회의에 드리는 한국의 호소」와, 1922년 1월 25일 「한국의 호소」 속편을 발표하였다. 그런데 이 호소문은 미 의회 「의사록」에 수록되는 성과를 얻었다.
워싱턴회의 대비를 위해 처음부터 준비해 온 서재필은 개인적으로 별도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1년 11월 29일자 워싱턴 연합통신에 의하면, 그는 현재 2천만 한인들이 정치·경제적으로 일본의 노예가 되어 있음을 지적하여 일본의 불법성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하였고, 1922년 1월 22일자로 미대통령 하딩에게 서신을 보내 한국의 호소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휴즈를 예방하여 한국 문제의 절박성과 이번 회의 의사일정에 한국 문제가 포함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서재필의 당시 심정은 휴즈와 회견을 가진 직후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일본인들의 영향력은 매우 큰 것입니다. 일본이 극동정책에 관한 미국의 요구에 부합하기를 거부하지 않는 한 미국은 일본을 가장 우호적인 태도로 대하기 원하고 있기 때문에 현재로서는 조선인들의 주장을 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일본이 실망을 시키면,…미국이 태도를 바꾸어 그 회의석상에서 한국문제를 제기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비공식 정보입니다.
우리의 입장은 미국이나 그 밖의 어떤 나라가 한국문제를 취급하건 안하건 간에 우리가 할 일은 우리 문제에 대해 그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그런 연후에 설사 우리가 실패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한 가지 만족, 즉 우리는 주어진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다는 만족감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무언가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랍니다.(임창영, 204~205쪽)

이러한 일련의 노력으로 미 언론은 각 신문 60여 곳에서 한국의 입장을 지지하고 이번 회의에 한국문제가 거론되어야 할 것임을 주장하는 등 큰 호응을 표시하였다.
한편 한국친우회도 한국대표단의 활동을 돕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먼저 필라델피아친우회회장 톰킨스와 리딩시 친우회장 리빙우드는 각각 휴즈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한국문제 해결에 협조해 줄 것을 요청하였고, 톰킨스는 1921년 11월 23일 토마스 전 상원의원을 초청한 가운데 대규모 집회를 개최, 한국문제를 여론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워싱턴회의는 서재필을 비롯한 한국대표들과 한국친우회의 적극적인 활동에도 불구하고 한국문제를 전혀 거론하지 않은 채, 1922년 2월 6일 폐회됨으로써 한인지도자들에게 상당한 실망을 주었다. 그것은 기대를 걸었던 미 정부가 한국은 국제상의 지위를 가지고 있지 않고 1905년부터 아무런 외교관계가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은데다, 오히려 한국문제로 일본의 반발을 사게 되어 회의를 어렵게 만들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워싱턴회의는 태평양지역에 대한 미국의 입지를 강화해 주었고, 일본의 지위도 서방 열강들에 의해 공인받는 결과를 가져다줌으로써 향후 세계질서는 상대적인 안정기로 돌아서게 하였다.
이러한 결과에 대해 서재필은 적지 않게 낙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는 이번 회의에 대한 활동소감을 1922년 2월 9일자 서신에서 밝히면서,

우리가 아무 이익을 얻지 못한 것은 당장에는 다소 실망하지만,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이번 회의로 말미암아 상당한 (독립의) 기회를 세운 줄 생각하노라.

고 하고, 이번 일로 얻은 소득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름대로 적지 않은 의미를 부여하며 자족했다.

첫째, 한국대표단의 민첩한 활동으로 미 정부뿐만 아니라 열강대표들까지 한국문제를 이해시킨 점.
둘째, 비록 공식으로 거론되지 않았으나, 비밀회의에서 한국문제가 논의됨으로써 한국의 독립운동이 전체 한인들의 열망에서 나온 것임을 알게 한 점.
셋째, 영·일(영국·일본)동맹의 폐기와 중국의 권리인정 등은 장차 한국독립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만든 점.(『신한민보』, 1922. 2. 23)

서재필의 이러한 주장 외에 워싱턴회의를 대비한 그의 주도적인 활동과 역할은 장기적인 한국독립운동의 안목에서 볼 때 의미가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그의 활동으로 인해 미주한인사회와 상해 임시정부를 비롯한 국내외 모든 한인들에게 3·1운동(1919) 이후 분열되고 침체되었던 독립의 의지를 다시 결집하여,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 승화시키고 한민족의 독립역량을 축적시켰다는데 성패를 떠난 큰 의의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워싱턴회의 이후 미주지역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은 사실상 침체 상태에 빠졌다. 그것은 서재필이 이시영에게 보낸 서신에서 이번 활동이 자신의 마지막 활동임을 예고한 바대로, 자기 사업에 충실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워 통신부 일과 한국친우회 일에서 손 떼고 독립운동의 일선에 물러난 것이다. 비록 이승만이 계속 구미위원부를 장악하여 운영하였지만, 서재필이 떠난 구미위원부는 이제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한 채 유명무실해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의 빈자리에 대한 공백이 너무 컸음을 보여준다.

5) 선전외교활동의 침체와 독립운동의 중단

(1) 선전외교활동의 침체와 성과

필라델피아통신부는 1921년 6월부터 구미위원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해, 『KOREA REVIEW』 발간이 중단되는 1922년 7월까지 사실상 서재필의 자비와 자구노력에 의해 유지되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재정지원을 담당한 구미위원부가 재미한인들에게 불신을 받아 자체 유지도 어려워진 점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당시 구미위원부는 재정권 관할문제로 기존의 국민회와 심각한 마찰을 일으킴으로써 미주한인사회를 분열시켜 왔다. 재정권 관할문제는 국민회가 1919년 6월경 상해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아 재미한인사회에 애국금 수합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뒤늦게 이승만이 구미위원부를 설립하여 외교활동을 전개한다는 목적으로 1919년 9월 4일 자로 기존의 국민회 애국금 수합을 전면 중단시키고 공채금 모집으로 변경·강행함으로써 발생하였다. 그 결과 구미위원부로 재정에 관한 전권이 넘어갔으나, 이 문제로 두 기관의 위신추락은 물론 재미한인사회를 분열시키는 주요 요인이 되었다.
한편 구미위원부는 이승만의 사적 단체로 전락되면서 내부적인 분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파리에 가 있던 김규식은 이승만의 요청에 의해 1919년 8월 22일 미국에 건너와 구미위원부의 초대위원장으로 활동하였으나, 그의 역할이 단순히 이승만을 보좌하는 데 그칠 뿐 실질적인 권한을 갖지 못하자, 1920년 9월 위원장직을 사퇴하고 10월 3일 상해로 떠남으로 이승만과 결별하였다.
1920년 9월 현순이 김규식을 이어 임시위원장이 된 후 잠시 국민회와 『신한민보』의 지원을 받는 가운데 미주 각처의 교민사회를 순방하여 모금 활동을 전개하는 등 의욕적으로 일을 추진해 갔으나 성과는 크지 않았고, 구미위원부의 재정수입은 날로 어려워 갔다. 이는 재미한인사회에 독립운동의 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었던 것이 한 요인으로 지적할 수 있다. 그러한 예는 이해 10월 21일자 『신한민보』 논설 「미주한인의 정형서」라는 글에서 잘 이해된다.

작년 이후로 한동안은 참 우리가 과연 힘 있는 선전을 하였다 할 수가 있으나, 어찌되어 그리 되었는지 그 후에 그 기운이 점점 가라앉아 지금은 각 방면의 유력한 활동이 거의 없어졌다 할 수 있으니, 이 날은 우리가 다시 경성하여 저 내지와 원동에서 날로 죽는 우리 형제자매들의 죽음을 일반 공론계에 과격파니 마적이니 도적당이니 도살당이니 하는 누명을 벗겨 주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이 의무와 저 의무를 다 말하자면 그 최종 일점은 곧 돈 문제니 우리가 돈이 있으면 있는 돈을 씩씩히 내어놓으면 임시정부도 찬조할 수 있고, 미주의 선전사업도 잘 진행할 수 있는 바이라.

이런 침체된 분위기를 타개하려고 했던 현순은 1921년 4월 14일 자의적으로 구미위원부와 별도로 대사관 신설을 착수하였다. 그는 곧 미국 정부와 국회에 이 사실을 통보하였으나, 오히려 이 일이 구미위원부에 심각한 내분을 발생시키고 말았다. 구미위원부의 재무를 담당하던 정한경이 현순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강경하게 이의를 제기하고 이 사실을 당시 상해에 가있던 이승만에게 알렸던 것이다.
구미위원부내 현순과 정한경과의 의견충돌이 심각하게 전개되자 서재필은 돌프와 함께 진상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 이승만은 4월 18일자로 전보를 보내 현순을 해임시키는 한편, 서재필을 구미위원부의 새 임시위원장으로 임명하고 조속한 사태수습을 지시하였다.
반면 현순은 임시위원장에 해임되었음에도 불복하고 이승만의 조처에 즉각 반발하고 나섬으로써 구미위원부의 불화는 더욱 가중되었다. 현순은 상해에 보낸 1921년 4월 19일자 전문에서,

나라와 이천만을 위하여 해임 안 받소. 나는 (3·1운동시) 33인의 대표자 됨을 생각할 것이오. 서재필과 돌프는 외국인인 고로 내가 죽어도 외교 안 맺기오. 당신(이승만) 전보받기 전에 외교 시작하였으니, 대통령이라도 고치면 대역부도라 할 것이오.

라고 하여, 이승만과 서재필에 대해 정면으로 맞섰던 것이다.
그런 후 현순은 대사관 설립을 강행하는 한편 5월 11일자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미특파대사관이라는 직함을 사용하여 국무장관 휴즈에게 정식 공문을 보내 자신의 대사관 설립을 기정사실화 하려 했다. 현순의 공문은 워싱턴 발 연합통신에 의해 곧 바로 공개되었다.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새로 임명된 서재필은 외교상의 심각한 결례와 대사관 설립에 대한 불법적인 경비지출 등을 이유로 현순의 실책을 비판하고 사태를 수습해 나갔다. 먼저 그는 미국 정부에 ‘사과공문’을 보내,

폐국 대통령과 정부는 어느 때든지 귀국정부로부터 공식승인을 할 뜻이 있을 때에 비로소 승인을 청할 것이어늘 현순이 이와 같이 무례망동 하였으니, 폐국 정부는 이로써 귀국 정부에 향하여 사과하며…다른 날 폐국이 귀국과 공식으로 한국독립승인을 교섭할 때, 이날의 영향이 도무지 없기를 바란다.

고 하여 현순의 대사관 설립을 백지화시켰다. 그런 다음 서재필은 구미위원부 통신문을 각 처 한인들에게 보내 현순의 외교상의 실책과 임시대통령 이승만에 대한 불복행위, 그리고 4,000여 달러의 재정손실과 업무혼란을 가져왔음을 성토하였다.
이런 가운데 허정·임초·조병옥 등 유학생을 주축으로 한 뉴욕의 대한인공동회는 구미위원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진상을 조사한 후 재미한인 사회와 원통 각처의 동포들에게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 따르면 현순은 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공사임명장을 자의로 사용했을 뿐 아니라, 임시대통령 이승만의 사직권고와 해임명령에 정면으로 맞섰고, 대사관 설립을 구실로 구미위원부의 공금과 중요서류들을 사사로이 관할하는 한편, 불량한 내외국인으로 더불어 공모하여 외교상 큰 손실을 초래하였으며, 구미위원부를 떠나는 조건으로 여비 1,000달러와 공사관 설립에 따른 제경비 500달러를 구미위원부에 요구하였음을 밝혔다.
이러한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한인공동회는 결의문을 작성하였다. 현순에게 경고문을 발하고 사태의 전말을 해외동포들에게 공개할 것, 미주 동포들의 가장 신망받는 사람을 구미위원부 위원으로 선정하여 임시대통령에게 건의할 것, 각 동포들이 이 글을 본 후 개인 또는 단체의 명의로 시국에 대한 의견을 대한인공동회에 보내면 그 중 다수되는 의견을 정부에 건의할 것 등을 결의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현순은 더 이상 워싱턴에 머물러 있지 못하고, 1921년 5월 말 조용히 하와이로 건너갔다.
그러나 재미한인사회는 구미위원부의 내부사정을 잘 몰라 현순과 서재필 어느 쪽이 옳은지 알지 못하고 단순한 당파싸움으로 여겼다. 이 때문에 현순이 몰래 워싱턴을 떠나 하와이에 도착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그를 3·1운동(1919)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자 구미위원부에서 활발히 활약한 인물로 평가하고 성대히 환영하였다. 이에 현순은 자신을 성원하는 안정수를 비롯한 하와이 한인들에게 뉴욕 한인공동회에서 조병옥·임초가 서재필을 부추켜 자신을 모함하였다고 선전하였다. 이 때문에 하와이 한인사회의 여론은 서재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고, 그런 가운데 미국정부에 보낸 그의 ‘사과공문’에 대해서도 한인사회에 좋지 않은 여론이 일고 있었다.
서재필은 하와이 한인동포의 현순 환영소식을 듣고 이번 사건의 전말과 ‘사과공문’에 대한 해명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하여 1921년 7월 9일자로 장문의 편지를 하와이의 『국민보』와 샌프란시스코의 『신한민보』에 각각 보냈다. 그는 이 편지에서 1919년 독립운동이 시작된 이후 한인들이 자유를 위해 모든 정력을 한 곳으로 합하는 줄 알았으나, 외국에 재류하는 가운데 아직까지 당파가 있음을 지적하고, 내가 이 당파를 없이 하려고 노려해 보았으나, 오히려 사방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런 다음 그는 개인의 이익을 국가일 이상에 두려한 사건의 일례로 현순사건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순이 비밀히 하와이로 간 뒤, 그곳 한인들은 열창으로 그를 환영하고 또한 그에게 존경을 표시하였소.…나는 현순 씨의 존경받는 것을 시기하는 것이 아니나 내가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곧 만일 그 한인들이 그 큰 인물 현순 씨가 과연 우리 운동에 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으면, 저들이 저 모양으로 자원하여 그를 저토록 존경하지 아니할 것이오.…한인들은 사실을 알지 못하여 자연 시비, 분간도 어려울 것이오.
현순 씨가 이전에 한국에서나 혹 상해에서 우리 일을 한 것은 지금 이번 사건과는 상관되는 것이 아니외다.…그는 구미위원부에서 불법한 행위를 할 뿐 아니라, 그는 우리 전체의 운동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한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그는 자칭 한국대사라 하여 외국과 상통하는 국제공법과 외교상 사용법을 파괴하였으니, 이는 그 나라의 승인을 얻기 전에는 하지 못하는 법이라.…현순의 무례한 요구는 미국 정부에 아무 결과가 없고 오히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한 무식한 무리의 집합체로 볼 것뿐이오. 총괄적으로 말하면 현순 씨는 한국민족과 한국 정부와 그간 조력하여 이 나라의 동정을 얻은 이에게 수치와 불명예를 주었소.…
이 수치를 벗기 위해 우리의 능력을 다하여 모아야 할 것이오. 이 까닭으로…구미위원부는 미국무부에 글을 보내 현순의 몰각하고 무례한 통첩에 사과하였는바, 그 글을 보면, 독립을 승인하여 달라고 한 것을 사과한 것이 아니오, 다만 그렇게 하지 못할 시기와 처지에 무례히 행동한 것을 사과한 것뿐이오. 우리는 미국무부에 통지하기를 상당한 시기가 되는 때에 우리의 원하는 독립승인을 해달라 하였으니, 이것이 그 공문에 있는 전후 사실이외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나는 현순 씨를 항거할 일이 아무것도 없고 나와 그 사이에 그간 대단히 좋게 지내었소. 그러나 그가 알고 그러는지 모르고 그러는지 우리 일을 방해하는 때에는 불가불 그를…축출시켜야 할 것이오. 만일 현순이 하와이에 가서 조용히 있어 한인의 이익되는 일을 하면 나는 그에게 대해 아무 말도 안하겠소. 그러나 거짓을 가지고 반항운동을 일으키는 때는 그를 항거하지 않을 수 없소. 만일 그가 애국심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나는 그를 권고하여 그런 악의의 운동을 정지하고, 그 자신과 한인에게 유익한 무슨 일을 하라고 하겠소이다.(『신한민보』, 1921. 7. 21)

서재필의 해명으로 현순사건에 대한 진상이 밝혀지자 하와이 교민단은 현순에 대한 그간의 환대를 취소했다. 더 이상 하와이에 머물 수 없다고 판단한 현순은 곧 하와이를 떠나 상해로 건너가고 말았다.
한편 구미위원부의 내부문제 못지않게 미주한인사회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었다. 미국 경기의 침체와 캘리포니아주 한인동포들의 벼농사 실패, 멕시코혁명으로 인한 멕시코 동포들의 생활난 등으로 인해 미주 한인들의 경제가 불황을 겪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제적 불황에다 구미위원부의 내부분열 소식이 미주한인사회에 퍼지면서 전반적인 독립운동의 열기는 급격히 침체하기 시작했다. 더구나 현순문제로 구미위원부는 적지 않은 재정을 허비하고 교민들로부터는 더욱 외면을 당하게 되어, 신용은 땅에 떨어지고 자체 유지도 어려운 형편이 되었다. 구미위원부의 존폐문제는 곧 통신부의 존폐와 직결될 만큼 영향을 주게 되므로, 서재필은 누차 『신한민보』를 통하여 만약 이번에 구미위원부가 폐지되면 그동안의 선전외교활동이 수포로 돌아갈 뿐 아니라, 앞으로의 독립운동도 희망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재미한인들의 지원을 호소하였다.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빠진 통신부의 운영을 위해 뉴욕 한인들은 1921년 4월 20일 대한인공동회를 열고 지원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 날 그들은 한인들 모두가 『KOREA REVIEW』를 구독할 것과, 현 통신부를 영원히 보존시킬 방법을 각처에 있는 다른 한인들과 연구하며, 구미위원부에 대해 더욱 재정적 후원을 더할 것 등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여러 한인단체나 각 신문사에 알리어 공론화시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한편 구미위원부의 통신부에 대한 재정지원은 1921년 5월로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서재필은 통신부운영을 자비로 부담하면서 한인동포들의 지원요청을 강구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1921년 5월 30일자로 전체 한인동포들에게 그동안 통신부 활동의 업적을 열거한 후, 다음과 같이 자신의 방안을 제시하여 통신부가 독립되고 항구적인 기관이 되기를 기대하였다.

영문잡지 『한국평론』과 필라델피아통신부로 말하면 나는 그를 워싱턴에 있는 구미위원부와 갈라서 하기를 원하노니, 그 기관은 한국 백성에게 속한 것이며, 나의 일은 한인 전체를 위함이외다. 내가 그간 그 월보 출판과 사무소 유지를 위해 매월 800달러를 위원부에서 받았지만, 뉴욕 한인들의 의견을 받아 생각하는 것은 만일 미·포·묵(미국·하와이·멕시코)에 재류하는 한인들이 다 매년 4달러씩 내어 『한국평론』을 사보아 한 3~4천 명의 구독자를 얻으면, 우리는 위원부의 협조를 받지 아니하고 필라델피아 일을 잘 진행하겠고, 한인에게 그렇듯 무거운 짐이 될 것도 없겠소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한국평론』 후면에 국문으로 얼마간 발간하여 영문을 읽을 줄 모르는 이로 하여금 국문으로 능히 읽게 하겠소이다. 우리가 영문잡지 대금을 매년 2달러씩 받았지만은 한편에 국문 출판을 가하면 매년 4달러씩 받아야 되겠으니, 만일 구독자 4,000명을 얻으면 그 월보 대금을 가지고 우리는 능히…남의 도움을 받지 아니하고 스스로 경비를 감당하게 될 터이니,…우리 잡지가 비록 우리의 바라는 바와 같이 흡족치 못하다 할지라도, 매월 30센트 이상의 가치가 있는 것은 내가 확실히 아오며, 잡지 구독하는 것으로 여러분들이 능히 한인의 유일한 기관, 곧 여러분의 사정을 미국과 기타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기관으로 유지되겠소이다.(『신한민보』, 1921. 6. 23, 「한인동포들에게」)

위 글에서 서재필은 우선 필라델피아통신부가 구미위원부의 관할에서 벗어나 전체 미주한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독립된 기관으로 운영되기를 바라면서, 그 방법으로 현 영문판에 국문을 추가하여 구독료를 4달러로 인상시키고 4,000명의 독자를 확보할 수 있다면 영구적인 기관으로 존속시킬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 여기서 서재필이 현순의 뒤를 이어 1921년 4월부터 이승만의 지시에 의해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재직했으면서도 통신부를 구미위원부와 분리해서 운영할 것을 밝히는 의도는 구미위원부에 대한 당시 미주한인들의 불신이 감안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는 통신부를 신용 없는 구미위원부 밑에 두는 것보다 따로 떨어져 나와 재미한인들 모두의 것으로 운영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이다.
서재필은 1921년 6월부터 『KOREA REVIEW』에 처음으로 광고를 실어 재원조달 노력을 시작하였고, 8월부터 국문판 네 면을 추가한 뒤 가격도 4달러로 인상시켰다. 그러나 국문판 추가는 8~9월만 실시하고 중단되고 말았다. 중단된 원인은 서재필에 대한 신용이 없었다기보다, 국문판으로 추가한 것이 전체 20쪽 가운데 네 쪽 분량밖에 안되어 한인독자들에게 충분한 내용전달을 할 수 없었던 데다, 한인들의 경제사정 악화가 그에 대한 협조를 어렵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영문잡지 발간을 통해 통신부를 계속 유지하려던 그의 노력은 서재필이 워싱턴회의(1921.11~1922.2)에 대한 활동을 마친 후 『신한민보』 1922년 2월 23일자를 통해 피폐해진 사업을 돌보기 위해 앞으로 통신부와 친우회 활동을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그 해 7월 『KOREA REVIEW』 발간을 마지막으로 사실상 통신부 조직이 유명무실해진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선전외교활동은 3년여의 짧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3·1운동(1919)으로 나타난 한국문제를 미 의회와 언론·교회·선교단체 등에 효과적으로 반영시켜 국제 여론화시키는 데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한 성과에 대해 서재필은 1921년 4월 18일자 재미한인들에게 보낸 「통고문」에서 다음과 같이 자부하였다.

첫째, 한국문제를 국제적인 문제로 만든 것.
둘째. 한국민이 일본에 항거하는 이유를 알린 것.
셋째, 미국뿐만 아니라 유럽에 까지 한국을 동정하는 수천 명의 사람을 얻은 것.
넷째, 일본에게 한인의 인권을 존중토록 한 것.
다섯째, 재미한인사회에 단합된 행동을 일으키게 한 것.
여섯째, 구미위원부의 활동을 도운 것.
(『신한민보』, 1921. 6. 9)

한편 서재필의 선전외교활동에 대한 성과는 일본 측에 의해서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들은 재미한인의 독립운동을 두 가지로 평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상해 임시정부의 재원공급자로서 다른 하나는 배일사상(排日思想)의 선전자로서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그 중 재원공급자로서의 가치는 점차 약해지고 있으나, 배일선전활동에 대해서는 이것이 미국 각지로 파급되어 미국인들에게 배일의 재료로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크게 경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서재필의 선전외교활동은 즉각적인 독립을 이루려는 것보다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여론화시키는 가운데 독립의 목표를 달성하려는 장기적인 방략에서 나온 것이므로, 지속적으로 추진되지 않으면 효과를 상승시킬 수 없는 약점을 갖고 있었다. 이 때문에 그의 선전외교활동이 3년여의 기간으로 끝난 것은 나름의 큰 성과에도 불구하고 일정한 한계를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2) 독립운동의 중단

서재필이 통신부 및 친우회 활동의 중단을 하게 된 배경과 사유를 다음 몇 가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첫째, 한국독립운동에 전념한 관계로 그동안 잘 돌보지 못한 사업이 매우 어려워져 이젠 본 사업을 돌보아야 할 형편이라 하면서 개인적인 사정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다. 사실 그는 3·1운동(1919) 이후 독립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면서 인쇄 및 문방구점을 경영하는 자신의 사업을 잘 돌보지 못하였다. 더구나 3·1운동(1919) 후 선전외교활동 뛰어들면서 자기 사업에 대한 이익이 덜 나더라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적극 나서겠다는 명분을 내세운 그로서는 사업상의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고 있은 터였다. 그리고 미주한인 사회에서 활동 중인 이승만·김규식·현순·정한경 등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자체의 생계능력을 갖출 만큼 재력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활동에 따른 일정한 급료나 비용을 한인들로부터 받아야 했지만, 당시 거의 유일하게 자체 생활능력을 갖고 활동한 서재필로서는 오히려 한국독립을 위해 사비(私費)를 사용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현순의 대사관 설립 문제가 제기되는 1921년 5월까지는 구미위원부의 꾸준한 재정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통신부운영이나 친우회 활동을 꾸려가는 데 재정상 별 어려움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구미위원부로부터 재정지원이 끊기는 1921년 6월부터는 서재필 개인 비용으로 통신부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인 어려움에 직면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때문에 그는 그동안 막중한 사명감을 갖고 시도한 선전외교활동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우려하여, 구미위원부와 독립해서 미주한인들의 직접적인 참여를 통해 통신부를 영구적인 기관으로 존속·운영되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제의는 한인들의 호응을 얻지 못하였고, 『KOREA REVIEW』를 폐간하는 1922년 7월까지 그의 자비 부담을 가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다 워싱턴회의를 대비할 필요성을 미주한인사회와 상해 임시정부에 호소한 뒤 서재필이 직접 이에 앞장섬으로써 통신부 운영에 따른 경제적인 희생을 감수함과 동시에 많은 시간과 재정을 이 회의에 대한 준비와 활동에 정력적으로 투입하였다. 그 결과 스스로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위싱턴회의가 끝날 때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개인사업은 피폐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독립운동 헌신에 따른 서재필 개인적인 요인뿐만 아니라, 당시 1921년 전후부터 불어닥친 전반적인 미국 경기의 침체도 한 몫을 차지했다고 생각되지만, 이러한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자기 사업을 돌아보지 않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던 그의 헌신에 대해서는 정당한 평가가 있어야 할 것이다. 당시 경제적인 어려움에 대해 김도태의 『서재필박사자선전』에는 서재필이 “이 2년간 사재(私財) 76,000불을 제공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어 그 손실이 막대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비록 그가 언급한 이 막대한 손실 금액에 대해 현재 입증할 길은 없으나,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난 뒤 다시 사업에 전력하려 했으나 결국 회복하지 못하고 완전히 파산한 것을 보아,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이유로 그의 사업이 심각한 타격을 받은 점에는 부인할 수 없다고 본다.
둘째, 미주한인들의 어려운 경제사정과 독립운동 열기의 침체, 그리고 이승만의 서재필 활동에 대한 무관심이 또 다른 요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것은 서재필이 1922년 9월 21일자로 이병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저간의 사정을 잘 설명하고 있다.

『코리아 리뷰』문제에 관해 이(이승만) 박사는 그가 돈이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지원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코리아 리뷰』에 대해 의당히 가져야 할 만큼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는 듯하오. 이런 상태에서는 빚을 많이 져 가면서 나 혼자 계속할 수 없습니다. 5월호, 6월호, 7·8월호를 위한 『코리아 리뷰』 출판비는 (나의) 회사경비로 충당했지만, 더 이상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8월호와 9월호는 중단했는데, 내가 앞으로도 그것을 계속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교포들이 그 문제에 관해 어떻게 할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가는 상태로 보아 아무도 그것을 지원할 의사가 없으니, 아마 『코리아 리뷰』는 자연적인 사망을 면치 못할 것 같습니다.

셋째, 그가 1921년 7월 14일자로 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보낸 서신 가운데, 워싱턴회의가 자신의 마지막 활동임을 이미 밝히고 있음을 보아, 선전외교활동에 의해 미국정부가 친한적인 태도변화를 보여주리라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이 고려된 것 같다. 이 서신에서 그는 워싱턴회의에서 한국독립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더 이상 미국에서 구미위원부나 통신부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임을 밝히고, 이번 활동이 미국에 대한 자신의 마지막 활동이 될 것임을 다음과 같이 예고하였다.

성불성은 알 수 없으며 만일 이 평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작정하면 주미위원부를 더 유지할 필요가 없고, 정식으로 공사관을 워싱턴에 설치할 것이며 또한 불행히 일본에 붙여도 위원부를 이곳에 두는 것이 필요함이 없나이다.…만일 이 평회회의에서 한국을 찬성하여 공평하게 작정되면 통신부와 잡지는 사실을 전하여 미국의 큰 동정을 더 얻기 위하여 계속하려니와, 우리에게 불행하게 작정되면 경비와 시간과 재정을 허비하여도 효력을 얻지 못할지니, 통신부와 잡지를 유지하는 것이 요긴치 아니할 줄 압니다.(『신한민보』, 1921. 7. 28)

서재필은 위 서신에서 워싱턴회의 결과 미국이 한국독립문제를 거론하지 않는다면, 이후 미국 내에서의 통신부 유지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망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미 이때부터 미국정부가 한국독립에 대해 호의적인 정책을 전개하리라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였으면서도, 이것이 워싱턴회의 결과를 통해 기정사실화되자 결국 활동을 중지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은 1922년 뉴욕에서 개최된 3·1운동(1919) 제3주년 기념식 행사에서 재미한인들이 나아갈 방향을 밝히고 이후 자신의 활동 방향을 예시하였다.

첫째, 한국을 바로 알리기 위한 선전사업을 계속 추진할 것.
둘째, 장래 한국의 산업과 복지를 위해 청년들에 대한 전문교육을 시행할 것.
셋째, 한국인의 종교적·사회적 훈련을 담당할 기관을 만들 것.
넷째 『신한민보』와 하와이한인들이 발간하는 『국민보』를 하나로 통합한 새로운 한국어 신문을 만들어 한인들의 단결을 도모할 것.
다섯째, 경제활동을 통한 재미한인들의 부를 축적할 것.(『KOREA REVIEW』, 1922. 4)

이러한 그의 제안은 한국의 독립이 단기간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판단에서 근거한 것으로, 향후 교육과 훈련을 통해 차분히 실력을 길러 한국독립을 위한 인재양성에 매진할 것을 바라는 실력양성론적인 태도라 하겠다.
이후 그는 각종 강연활동에 참여하거나, 『동아일보』·『조선일보』·『신한민보』 등을 통한 기고활동을 통해 한국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감당하고자 하였다.

6) 서재필의 독립운동관과 대일관(對日觀)

(1) 독립운동관

강연·기고 등 선전외교활동을 통해 나타난 서재필의 독립운동관은 변함없는 친미적인 태도 위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는 ‘제1차 한인회의’ 때와 같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속성을 철저히 외면한 채, 미국을 민주주의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가진 정의와 인도주의의 나라로 인식하고, 이러한 나라가 저 불쌍한 식민지 한국을 마땅히 도와주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서재필은 미국에 의존하는 사대주의적 입장에서 한국의 독립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미국기독교연합회 동양관계위원회가 발간한 『한국의 정세』에서 한인들은 미국의 개입을 호소하여 독립을 원하고 있다고 지적하자, 서재필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 한인들이 미국에 대해 선전활동을 벌이는 이유는 일본의 왜곡된 선전활동에 맞서 진실을 전파하자는 것이며, 이러한 행위는 미국이 한국을 위해 어떤 무력 개입이나 재정적 후원을 희망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미국민의 동정과 도덕적 후원만을 요구할 뿐이라 하였다. 도리어 그는 한국의 독립은 미국의 안보와 이익에 도움을 줄 뿐이다 하고, 한국은 미국의 이상과 이익에 어긋나는 어떤 후원도 바라지 않으며, 자유를 위한 투쟁을 전개하고 있는 한인들에 대해 지나친 격려도 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서재필의 생각은 한국독립을 위한 우선순위를 분명히 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는 시카고 한인들에게 한 연설 가운데,

나는 우리 민족이 꼭 독립할 줄 믿는다. 미국사람들이 우리의 사정을 가련히 생각하여 깊은 동정을 표하지만…우리를 위하여 행동을 하여 줄 것을 도저히 바랄 수 없다. 하늘도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 것이라.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여 세상의 이목을 일으킬 만한 업적을 할 것 같으면,…이웃 사람들의 동정이 없지 않을 것이다.(『신한민보』, 1919. 11. 22)

라고 하여, 한국의 독립이 다른 나라의 원조에 의해서가 아니라 먼저 한인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려고 노력한 뒤에 타국의 지원을 구해야 한다는 선투쟁 후지원론의 입장에서 독립운동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한국민족이 일본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보는 일부 미국민의 시각에 대해 서재필은, 오랫동안 독립된 문화 민족으로서의 지위를 누려 왔기 때문에 충분히 자치할 능력이 있는 우수한 민족이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한국독립의 정당성을 미국민들에게 확신시켜 주었다.

한국민족이 일본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하는 말에 대해 역사가 명확히 반대 증거하고 있는 바, 일본을 문명화 시킨 것은 한인들이라.…기독교 기원이 시작되기 전부터 일본이 한국 문명을 배우고 모방하였으며, 한국은 예술과 과학과 문학과 법률과 종교를 일본에게 주고, 방적기술, 자기기술 등도 일본에 가르쳤다.(『신한민보』, 1920. 1. 15)

이와 함께 서재필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해야 할 급선무는 한인들 간의 단결이라 보고, 이것이 없으면 독립이 불가능함을 주장하여 전체 한인들의 각성을 누누히 촉구하였다. 이러한 그의 생각은 『신한민보』, 1919년 11월 22일자 「단합과 결심으로 독립을 성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 내지동포들이 저와 같이 허다한 생명을 희생하여 자유와 독립을 위하는 이때에, 우리들은 어떠한 처지를 물론하고 우리가 행해야 할 제일의 요소는 단합과 통일이다. 가령 나라를 사랑하는 열심과 성의는 있다하더라도 그 열심과 성의를 실행할 줄 알지 못하면, 무슨 유익이 사회와 나라에 미치리오.…가령 동포 사이에 서로 불법함이 있거든 만나 평화적인 수단으로 해결할지언정, 공연히 밖에다 파당을 짓지 않는 것이 오늘 우리 거룩한 대한 민족의 양심적 의무이다.

한인들의 단결문제에 대한 서재필의 주장은 여러 곳에서 보이고 있다. 『신한민보』 11월 25일자 「캔사스시티에 한인친구회조직」, 12월 16일자 「서재필박사의 편지」, 1920년 11월 25일자 「서재필이 임시정부각원에게 보낸 편지」와 『독립신문』 1920년 3월 1일자 「서재필이 임시정부국무총리 이동휘께 보내는 글」 중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당시 분열되고 있던 미주한인사회와 임시정부 등에 대해 조속히 내부적인 단합과 통일을 이루고, 그 힘으로 자주독립을 이룰 것을 주장하였다.
이를 볼 때 서재필의 독립운동관은 무엇보다도 한인들 스스로 우수한 문화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단결과 통일에 기초한 자주적인 노력으로 독립을 이루어가되, 이를 위한 방략으로 미국의 힘을 이용하자는 매우 실용적이고 합리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대일관(對日觀)

서재필의 대일관은 1921년 4월 27일과 28일 이틀에 걸친 일인탐정 무꼬와의 대화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대화는 먼저 무꼬가 일본의 교육정책을 개혁하며 기독교를 일본과 한국에 소개하여 한인과 일인이 화합하여 평화적으로 살게 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한 뒤, 이를 위해 서재필이 도와주길 바란다고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일인: 나와 협력하여 일본에 혁명을 일으키자. 현시 일본정부를 파산시키면 일본의 한국독립을 승인하겠다.
서재필: 나는 어떤 당파가 일본을 다스리든지 일본이 자원하여 한국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줄 믿으며, 우리는 그러한 방법으로 독립을 찾지도 원치도 않는다.
일인: 나는 한국과 일본에 미국선교사를 더 많이 보내어 영어를 가르치게 하며 속히 백성들이 기독교인 되게 하길 원하니, 당신은 나를 도와 이 일을 먼저 일본에서 시작하게 하면 나는 그러는 동안 한국에 가서 일하겠다.
서재필: 한국이 일본보다 더 도움을 받아야 할 형편이다. 나의 시간과 모든 있는 것을 다 한국을 위해 쓰며, 당신의 경영하는 것이 좋기는 하나, 나는 재정상으로나 어떠한 방면으로든지 돕지 못할 까닭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나는 도와줄 재정이 없으며, 또한 있어도 일본보다 한국을 먼저 도와주어야 하겠으며, 둘째, 당신이 한국을 도와주겠다고 하는 것은 고마우나, 한국을 돕는 데는 일인을 쓰는 것보다, 한인으로 한인을 돕는 것이 합당함일 줄 안다.

일인: 어떻게 하면 우리가 더 절친하게 되겠는가. 내 생각에는 우리가 협동하면 좋은 일을 할 줄 아나이다.
서재필: 우리는 이에서 더 절친하지 못할 줄 안다. 일본과 협력하여 같이 일하지는 못한다.

서재필: 나는 일인과 협력하는 것보다 한인의 경영대로 한인의 재능으로 하는 것이 좋을 줄 믿는다. 당신의 의견이 좋고 신실하다 할지라도 한인들이 나를 의심할 터이니,…무엇이든지 일본에 상관된 것이면 미워하는 생각이 있다. 당신이 비록 선량하고 한인을 도우리라 하더라도 일인의 명칭으로 하면 한인들은 당신에 대한 의심이 없지 않는다.…당신은 선하고 일인 중에도 당신 같은 자가 많은 줄 아나, 한인에 대해 가한 일인의 잔인한 행위로 인해 한인 눈에 일인은 다 하나요 같게 보인다.
당신의 사상이 철학적이고 기독교적이라 할지라도 한인은 당신의 사상을 의심하며 혹은 정탐으로 생각하고 혹은 무슨 계교를 쓰는 줄로 생각하니, 이는 내 힘으로도 고칠 수 없고 누구의 힘으로든지 고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일인이나 다른 외국사람이 한국을 구원하지 못하고 한인들이 구원할 줄 믿는다. 나는 현시 정치상의 관계를 끊기 전에는 일인과 협력할 수 없다고 본다.
일인: 먼저 길을 닦자.
서재필: 길은 닦는 것은 당신(일본)들에게 있고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당신 개인에 대해 쓰게 생각하는 것이 없지만은 일본 전체에 대해선 쓰게 생각한다.
일인: 당신은 굴릭 박사와 우리 대사로 더불어 의논하겠는가.
서재필: 나는 누구를 막론하고 만날 것이고 조금도 숨김없이 말할 것이다. 그렇지만 공평치 못하고 사사의 유익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다.
일인: 나는 한인사회와 미국사람을 많이 만나 보았으나, 당신과 같은 사람은 아직 만나 보지 못하였다.
서재필: 아니다. 나는 한국을 대표한 사람이 아니요, 한국 행정부에 아무 벼슬도 없는 사람이다. 현재 통신부라는 기관은 미국에 있는 한인들이 나로 하여금 일을 맡아보게 한 것이며, 또한 영문 월보 발행하는 것과 미국인에 한국친우회라는 조직체가 22개 있으므로 나는 개인적으로 일을 도와주는 것뿐이고, 종종 강연하러 다니는 것 외에 나라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없다.
일인: 그렇지만 당신은 우리와 같이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며, 제일되는 사람인 줄 안다.
서재필: 한인 중에 지식 상으로나 무슨 방면으로든지 나보다 나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일인: 당신은 일본사람 중에도 한국독립을 찬성하며 일본내지 형편에 불만족하며 당신과 같이 일할 사람이 있다고 말하겠는가.
서재필: 그는 신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일인과 같이 일한다고 하면 한국 전체 국민이 걱정할 것인즉 피차 이익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일본이 한 가지 할 것은 한인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면 한인이 일인에 대한 감정을 변하게 될 것이다. 일본이 한국독립을 승인하는 것을 세계에 알리고, 진실히 행하면 세계에 신용을 얻어 무슨 방해를 얻지 못할 것이다.…나는 일본이 독일과 같이 미움을 받고 경제가 곤란당하는 것을 보지 않기를 바란다.(『신한민보』, 1921. 7. 7)

일인과의 대화 속에서 나타난 서재필의 대일관은 한마디로 기본적으로 신의가 없다는 것과, 한국사람은 본래 일본을 혐오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단호하게 비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일본의 한국지배는 철저한 동화정책과 말살정책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고, 일본의 동아시아정책은 한국을 발판으로 해서 중국을 독점 지배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본이 3·1운동(1919) 후 한국문제의 개선책으로 군사통치에서 민간통치로 변화시키고 소위 문화정책과 한·일(한국·일본)간의 동등한 대우 등을 선전하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제복만의 변화일 뿐, 한국인의 동등 대우는 일본의 민주주의 수준을 볼 때 전혀 실현 불가능하며, 비록 실현된다 하더라도 한국민족의 반일감정을 억누를 수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한·일(한국·일본)간의 민족 문제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독립 없이는 해결할 수 없다는 시각을 갖고 있었다.

제6장 의사로의 재기와 기고활동

1. 범태평양회의의 참가

서재필은 다시 사업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오랫동안 등한시한 결과 완전히 혼란 상태에 빠진 사업체는 회복을 위한 그의 안간힘에도 불구하고, 1924년 봄 불가피 했던 파산이 밀어 닥쳤다. 근 3년 동안 회사일을 돌보지 못하면서 전념했던 독립운동의 여파가 마침내 파산으로 나타난 것이다. 단 하나 남은 가옥마저 저당 잡히게 되어 서재필로서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서재필은 육체적으로도 무척 쇠약해졌다.
사업실패로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받았으나 서재필은 다시 기운을 내어 두 번째 사업을 시작했다. ‘제1차 한인회의’시 함께 일했던 유일한과 미국 친구 몇몇과 함께 이탄 뉴(Itan New & Co)상회라는 수출입회사를 설립한 것이다. 이때의 상황을 1925년 4월 25일자로 보낸 그 서신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디트로이트의 유일한과 그 밖의 몇몇 조선인 친구 및 미국인 친구들이 미국·중국·조선을 상대로 수출입사업을 하기 위해 회사를 설립했습니다. 사장은 내가 되었고 현재로는 필라델피아와 디트로이트에 사무실이 있지만 앞으로는 그 밖의 여러 중심지에도 사무실이 생길 것입니다.…물론 이 회사의 목적은 경제적 이득에 있지만, 또 하나의 더 중요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우리는 단체활동을 통해 한국 청년들을 사업의 과학성과 협력의 비결면에서 훈련시키기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문제점은 나 혼자서는 회사를 설립할 만한 자본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는데, 이제는 유일한이 그가 가진 돈과 경험을 가지고 나와 같이 일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나는 우리가 성공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 동시에, 이 회사를 기반으로 후에 가서는 한국 동포들의 재력을 개발하기 위해 한국에서 실제로 참된 회사를 시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임창영, 210쪽)

서재필은 유일한과 함께 사업을 시작하면서도 이번 사업이 한국과 한국의 청년들을 위해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회사의 발전은 기대한 바대로 되지 못했다. 투자자들의 소극적인 투자로 사업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사업실패는 서재필에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무척 어렵게 만들어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그러던 중 그의 사기를 북돋우는 일이 일어났는데, 범태평양회의의 참석이었다.
범태평양회의는 태평양연안 국가의 저명한 재야인사들이 모여 비공식적인 모임을 갖고 그들 나라의 경제적·사회적·문화적 제반 사항에 관해 서로 정보를 교환하는 동시에, 그 지역에서 평화와 발전을 도모할 목적으로 만든 조직체였다. 비록 이 회의가 비공식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관계 당사국 정부들은 그 회의 진행 사항들에 대한 주의를 기울였고, 또 그 회의 참석자들 가운데 많은 인사들이 실제로 자기네 본국 정부와 긴밀한 접촉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범태평양회의는 미국의 태평양연구소 주최로 1925년 7월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었다.
서재필은 국민회와 시카고 한인유학생들로부터 이번 회의에 해외 한인대표의 고문으로 참석해 줄 것을 요청받고 기꺼이 수락했다. 그것은 그에게 잠시나마 사업과 재정걱정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줄 뿐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이번 회의에 한국대표단도 참석한다는 것을 알게 된 점이다. 당시 한국대표단은 신흥우·송진우·김양수·유억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특히 신흥우는 서재필이 한국에 있을 때 배재학당에서 가르친 제자였다. 그리고 이 회의 의장은 캔사스주 『엠포리아 가제트』 발행인 윌리엄 화이트였는데 그는 서재필을 존경하는 인사였다.
서재필이 이번 회의를 위해 떠날 때 그의 부인과 딸(스테파니와 뮤리엘)들은 한국 동포들이 아직도 그를 잊지 않았다고 기뻐하면서, 이 기회를 이용해 1~2주일 동안 하와이에 휴식 겸 요양을 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는 이번 회의가 국제평화에 중요한 모임으로 생각하고 회의에 임했다.
서재필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자 이곳 『호놀룰루 애더버타이즈』 1925년 6월 30일자는 그의 도착을 크게 보도하였다. 노투사의 하와이 도착에 대한 환영의 표시였다.
서재필은 이번 회의에서 일본대표단을 논리적으로 외교적으로 궁지에 모으고 한민족의 위상을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범태평양회의는 기조연설을 시작한 뒤 참석자들의 질의와 논평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신흥우가 기조연설을 통해 일본 통치의 실상을 은근히 비판하는 연설을 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일본은 한국을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한 이래 한국 농지의 70% 이상을 강점했다. 이런 비율로 나간다면 머지않아 일본은 한국 농지 100%를 다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 무수한 한국인들은 만주와 시베리아로 이민을 가야 했으며, 그대로 한국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처지도 전보다 더 못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는 모두 이와 같은 사태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하겠다.

그의 연설이 끝나자 서재필은 일본대표를 향해 신흥우가 지적한 내용에 대한 해명을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의했다. 그런데 일본대표 가시라 모도는,

한국은 일본의 속국이기 때문에 한국문제는 일본 국내문제이다. 이 회의에는 어느 나라의 국내문제도 관여할 권한이 부여되어 있지 않다. 더구나 지금 발언한 서재필은 20여년 이상 해외에 체류하여 한국의 실정을 모르고 있다. 사실 병합(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래 한국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으로 전례 없는 발전을 이룩해 왔다. 나는 서재필의 대표자격을 박탈할 것을 동의한다.

고 반박했다. 그러자 서재필은,

필리핀도 미국의 속국이지만 미국은 필리핀 대표를 이 회의에 참가하도록 허락했다. 이번 회의는 전 태평양 연안국가들과 관련 있는 모든 문제를 관심사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문제를 다루는 것도 이 회의의 의무라 할 것이다. 한국문제는 일본의 단독 문제가 아니라 아시아의 관심사요 나아가서 전 세계의 관심사다.

하여 그의 제안을 일축했다.
대표자격문제를 갖고 일본 측과 논쟁이 오고 갈 때, 대영제국의 일부인 캐나다 대표단은 만약 한국대표단의 자격이 상실된다면 캐나다도 회의에 철수할 것이라고 천명함으로써 한국 측에게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해 주었다. 그 결과 일본의 동의는 부결되었고, 오히려 신흥우가 일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범태평양회의 상임위원으로 당선되었으며, 서재필은 이번 회의의 대체의장으로 선임되었다. 국제회의 석상에서 한국과 한국민이 정당한 인정을 받게 되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서재필의 하와이 여행은 재정적인 후원이 미약하여 오래 머무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번 회의참석을 통해 그는 그동안 침체되어 있던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사기를 북돋우는 데 큰 힘이 되었다.

2. 의사로의 재기

서재필은 세 번째 사업을 구상하였으나, 이를 포기하고 대신 오랫동안 정지했던 의사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의학계를 떠난 지 근 20년이 지난 뒤라 의학에 관한 재교육이 필요했으므로 그는 집을 담보로 2,000달러의 빚을 내어 1926년 9월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 특별학생으로 입학했다. 그의 나이 만 62세 때였다. 의학 복귀에 대해 서재필은 이때를 회상하기를,

내가 그 나이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는 것은 고전이었으나, 내 아내는 내가 의학계로 다시 돌아간다는 데 대해 매우 기뻐했으며, 나의 온 식구는 신념과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고 하였다.
서재필은 의과대학에서 임상병리학·면역학·혈청학·백신치료법 등을 배웠고, 1927년 봄에는 비뇨학·피부학 등도 배웠다. 재교육을 마친 그는 개업을 하고 싶어 했으나 개업에 필요한 자금이 없었다. 1927년 6월 이후부터 폴리크리닉병원과 암치료 전문인 제임스병원 등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서 힘든 나날을 보냈고, 1929년에는 병리학 전문의시험에 합격하여 병리학의사로 여러 병원에 근무했다. 그는 자신이 번 수입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빚을 갚는 데 써야 했고, 가족과 떨어져 있은 관계로 자신의 숙식비를 해결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궁색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제적 어려움 속에도 그는 개업을 향한 꿈을 갖고 저축하여 증권시장에 투자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서재필의 의학연구업적은 놀라울 정도로 쌓였다. 그가 1936년 개업하기 전까지 미의학학회에 발표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

·「버크스 카운티 내의 선모충전염 열 가지 예」, 『펜실베니아의학지』 1930.
·「8세 여아에게 나타난 난소 육종의 예」, 『미국의학협회지』1930.
·「척추액의 물리 화학적 변화를 이용한 신경 섬유종의 진단 일례」, 『펜실베니아의학지』, 1931.
·「부고함의 일례」,『미국의학협회지』, 1933.
·「정상세포가 호르몬의 영향으로 암세포로 변할 수 있는가」, 『웨스트버지니아주 의학잡지』, 1934.

의사로서 의학연구에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9년 말 미국에서 일어난 경제대공황으로 서재필은 그동안 개업자금을 위해 증권에 투자했던 돈을 전부다 잃어버렸다. 개업의 꿈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크게 낙심 하였으나 곧 털고 일어나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에 몰두했다. 의사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과외로 연구위탁을 받아 저녁과 주말에도 쉬지 않고 연구과제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설상가상으로 오히려 과로로 인해 1934년 의사로부터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아, 약 1년여 동안 웨스트 버지니아주 휴양소에서 휴양을 해야만 했다.
퇴원 후 서재필은 1935년 펜실베니아 메디아로 돌아와 체스터병원에서 피부과 과장으로 일했고 동시에 체스터에서 1936년 개업을 하였다. 그의 나이 만 72세 때였다. 그 뒤 그는 1941년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자진해서 징병의무관으로 4년간 봉사했는데 이러한 그의 공로로 미국 국회는 1945년 1월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1941년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이 세상을 떠나 그를 안타깝게 하였다.

3. 기고활동

잇단 사업 실패로 인한 경제적인 어려움과 노령의 나이에 시작한 의사로서의 재기활동에 심신은 크게 지쳐 있었으나, 서재필의 마음 깊이 새겨진 고국은 잊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심정을 담아 1922년 9월부터 1940년 6월까지 『동아일보』·『조선일보』·『신민』·『평화와 자유』·『산업』·『신한민보』 등 국내외 여러 신문·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여 고국에 대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려 하였다.註9) 그가 기고한 글 중 몇 가지를 살펴보면 그의 고국에 대한 열정이 어떠했는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먼저 「사회 교화로 본 신민의 사명」 이라는 글에 서는 가정교육·학교교육·사회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궁극적으로는 농촌진흥을 부르짖었다.

우리 민족은 그 본질로 보아서는 세계의 어느 우수한 민족에 비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민족이다. 이렇게 말하면 듣는 사람은, ‘왜 우리는 이렇게 도약하고 가난하고 지혜가 적고 무엇을 이용할 줄도 모르느냐’고 할 것이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민족의 본질적 문제가 아니요, 다만 교육의 차이일 것이다. 즉 그들은 어려서부터 소·중·대학의 순서 있는 교육을 받아서 풍부한 지식을 가졌고, 우리들은 대부분이 무지몽매한 형제가 되어서 사물의 옳은 길을 고르지 못하고 허둥지둥하다가 항상 남의 발밑에 밟히게 된 것이다.…우리들의 현재의 처지를 벗어남에는 오직 교육, 그 교육으로 인한 많은 지식을 흡수함에 있다 하여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없을 줄 안다.…
우리 조선은 장래 어떠한 문화를 건설하게 된다 하더라도 우리 대중의 토대는 향상 농업에 있을 줄 믿는다.…이런 뜻에서 농촌의 황폐와 농민의 몰락은 곧 우리 전민족의 황폐와 몰락을 뜻하게 된다. ‘농촌진홍’, ‘농촌진홍’, 그 얼마나 우리들의 절실한 부르짖음이겠는가.

서재필은 순종이 서거한 한 후 『신민』 1926년 9월호에 글을 썼는데, 여기서 그는 순종의 서거가 주는 역사적 의미를 고국의 미래와 결부시켜 안타까운 자신의 고국관을 밝히고 있다.

국가란 것은 다른 어떠한 조직체에서나 마찬가지의 직능을 하는 대규모의 조직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 국민 최대 다수의 행복을 도모하여 거기 적의한-즉 민족이, 적어도 그 국민 대다수의 신임과 도덕적·물질적 후원을 배경한 정치를 세우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다. 조선이란 나라의 재래정치는 도무지 국민의 복지를 돌아본 정치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옛날 노예소유자 시대에 실시되었던 수단 방법과 비슷하다. 모든 이익은 소유자에게로, 모든 불리한 것은 노복에게로라는 식이었다.
이러한 수단 방법을 쓰는 국가나 사회가 지속하지 못한다는 것은 열 번, 스무 번 증명된 사실이다. 통치자는 서민을 위하여 노력하고 서민들은 자기네의 군주에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통치자와 피통치자 사이에 사랑과 충성이 적었기 때문에 나라는 종국 파멸되고 만 것이다.

서재필은 우리 겨레가 천하에 편만한 ‘인간 악마’들의 손에서 벗어나서 보호되어야 한다는 표현을 하여 간접적으로 일제의 한국 지배를 비판하였으나, 독립을 위한 방법을 논함에 있어서는 정치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평화와 자유』에 기고한 「조선의 장래」에는 우리 겨레가 어떤 일시적인 통치자의 지배를 받든지 어떠한 정권 밑에 있든지, 결국 그들의 운명은 민족 대다수가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 뒤, 행동지침으로 먼저 사물에 선입관을 갖고 보지 말고 감정을 억제하고 이성, 즉 지혜에 의거해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공허한 영예를 쫓지 말고 실제적인 사업을 성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하여, 조선 장래의 당면과제로 그는 정치면보다 한국 민중의 생활수준을 개량하는 것이 더 시급함을 밝혔다.
이처럼 그는 정치운동에 대한 언급보다 경제발전 즉, 우리 민족은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력으로 경제부흥을 이룩하여야 한다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이러한 관점의 글은 일제가 무단으로 한국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어쩔 수 없이 인정한 뒤, 이를 극복하기 위한 장기적인 대안에서 나온 소극적인 대일투쟁 방식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미래를 젊어진 한국의 젊은 청년들에게 당부한 “조국은 청년들에게 무엇을 바라는가”라는 다음의 글은, 서재필이 한국민족에 거는 절실한 소망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청년들이여, 조국이 그대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아는가.…나는 한국을 위해 말할 수 있는 공식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지 않으나, 조국이 청년들에게 무엇을 기대하는지 잘 알기 때문에 이를 여러분에게 전한다. 조국은 현재 당면하고 있는 모욕과 곤경에서 해방시켜 줄 것을 여러분에게 기대하고 있다. 조국은 그대들이 나라와 자유를 사랑하는 신비스런 정신으로 단결하여 한국을 위한 투사로 나서 줄 것임을 굳게 믿고 희망하고 있다. 이러한 운동은 기필코 성공하리라.…
민족운동이 보다 빠르게 진행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공통목표를 위하여 민족의 잠재력을 일깨우고 조직하는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민족 구성원간의 협동심과 팀 플레이는 아직도 완전히 육성되지 않아 개인적 생각과 질투심에 방해를 받고 있으므로 전체 운동에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는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아니다. 시간이 가면 최고의 민족적 장점이 자리를 잡아 지금까지 우리 마음을 슬프게 했던 상호갈등을 해결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조국은 그대들이 그러한 장점의 핵심이 되어 자기의 부와 명예, 아니 생명 자체보다 조국을 더 사랑하기를 고대하고 있다. 아무도 한국인들의 보편적, 그리고 진실한 애국심을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 애국심의 강도에 있다. 환언하면 한인들은 정치적·경제적 자유를 위해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조국은 그대들에게 필요하다면 피를 바쳐 그 대가를 치루기를 고대한다. 그대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가.
나는 그대들의 인생의 최고 목적이 조국을 위한 의무를 다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공부를 하고 그 위대한 목적 수행을 위해 자신을 준비하고 있다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그대들은 서로 화합하여 일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조국은 실패에 관한 어떤 변명 같은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조국이 바라는 것을 그대들이 이루어주기를 고대하고 있다. 그대들은 제발 제각기 행동하여 일하지 말고 될 수 있는 한 협동하라. 그대가 다른 청년들로 하여금 계획에 참여케 하고 일을 나누어 하게 만들면 원하는 일을 보다 많이, 보다 훌륭히 완수할 수 있게 되리라. 비록 그들이 좋은 생각을 제한하지 못하더라도 그대의 생각을 점검해 준다는 것 자체가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조국은 그대들이 폭넓고 포용적인 마음을 가지기를 기대한다. 그대는 이를 거부할 수 있는가.(이우진, 『서재필』, 292~293쪽)

제7장 고국방문과 민주주의·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1. 고국방문 배경

서재필은 1926년 『신민』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 땅에 영주하여 아마 다시는 나의 태어난 땅을 밟아보지 못할 것 같다.”고 하여 자신의 생전에 고국 방문이 어려울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1941)이 발발한 뒤 얄타와 카이로에서 그리고 포츠담에서 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거론하였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해방된 고국을 그리면서 마지막으로 고국의 땅을 다시 밟아보고 싶은 마음은 없지 않았을 것이다.
마침내 한국이 해방되자 그의 염원이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되었지만 해방된 조국의 정계는 그리 평탄하지 않아 참고 기다려야 했다.
해방된 한국은 신탁통치를 둘러싸고 미·소(미국·소련)간의 틈바구니 사이에서 좌우대립으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었던 미군정은 그가 신탁통치에 맹렬히 반대하고 철저한 반공·반소(反蘇) 입장을 보이자 곤경에 빠지고 있었다. 1946년 5월 8일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자 이승만은 우선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김구는 반탁을 고집하는 가운데 통일정부를 수립하자고 나섰으며, 김규식은 극우·극좌 편향노선을 배제하고 중간파 세력을 규합하여 좌우합작으로 미소공동위를 재개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1946년 12월 초 동경을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모스코바 3상회의 결정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방안을 배격하고 직접 독자적인 한국독립안을 가지고 미 국무성과 담판하려 하여 미 군정 최고책임자인 하지와 정면 대결을 벌이고자 하였다.
미소공동위원회가 계속되면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해 각 정당 및 사회단체의 참여가 논의되자 자연 좌우합작문제가 대두되었다. 좌우합작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이란 모스코바 3상회의(1945)의 정책방향이었고, 미 국무성의 공식 견해였다. 따라서 이승만의 단독정부수립안은 하지가 용납할 수 없는 정책이었다. 이에 따라 하지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중심으로 좌우합작을 추진하였다. 좌우합작을 위한 첫 모임이 1946년 5월 25일 김규식의 집에서 열린 뒤, 좌우대표가 정식으로 결정되고 10월 7일에는 합작 7원칙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좌우합작추진운동에 대해 이승만과 한민당은 단독정부에 열을 올리고 있었으므로 이에 거부적이었다. 게다가 7월 19일 여운형이 우익 테러에 의해 쓰러져 좌우합작은 어려운 고비에 빠지고 말았다. 여운형 사망 후 중간파 세력이 대거 집결함으로써, 이제 좌우합작운동은 김규식 중심의 좌우익 편향을 배제하고 민족의 자주노선을 지향한 ‘민족자주연맹’을 중심으로 추진되었다.
서재필을 고국으로 초빙해야겠다는 여론이 나오게 된 시기는 미 군정의 하지가 김규식·여운형과 함께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할 때였다. 김규식은 하지에게 서재필의 초청문제를 제기했다. 김규식이 서재필을 고국에 초빙하려 했던 것은 오랫동안 맺어온 동지적 우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독립협회시절과 미국유학시절에 서재필의 지도와 총애를 많이 받았으며, 3·1운동(1919) 후 구미위원부 시절에는 뜻을 같이하여 독립운동의 선두에서 분투 노력하여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은 사이였다. 해방 후 고국 정계의 중요 인물로 등장한 김규식은 완전히 노년으로 접어든 서재필에게 어떤 정치적인 공헌을 기대하기보다는 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쳐 온 그를 고국에 모심으로써 은혜에 보답하려 했다.
그러나 서재필의 이력을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으로부터 듣게 된 하지는, 혼미한 정국을 수습하고 이승만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하였다. 이리하여 하지는 그의 정치고문 랭돈으로 하여금 미국무성에 공식적으로 서재필의 환국문제를 제의하도록 했다. 1946년 9월 21일자로 보낸 이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9월 14일 한국민주대표의원의 결의에 따라 그 의원의 부위원장이며, 우리가 가장 신망하는 건전한 지도자인 김규식 박사는 하지 장군에게 서재필을 임명하도록 권고하였습니다.…
하지 장군의 생각으로는 그리고 저도 동의하는 바입니다만, 현재의 정치적 혼돈과 과열상태에서 한국에서의 정치개혁운동을 창시하여 명성을 날리고 역사적인 일들에 연관을 가진 서재필 같은 존경받는 위인이 한국에 온다면, 타협을 이룩하고 이성을 되찾는 데 좋은 영향을 끼칠 수도 있고, 우리 사령부에게 현명한 자문도 하여 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서재필이 그를 능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가 이곳에 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그렇게 된다면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좌익의 지도자인 여운형은 사사로운 석상에서 서재필을 환영한다고 말했으며, 현 정치단계에서 그가 유용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 장군은 국무부가 서재필을 타진하기를 바라고 있으며, 만일 그가 여행을 할 수 있고, 정신적으로 건전하다면 한국을 위한 특별고문관으로 임명하기를 바라며, 국무부의 예산으로나 또는 국방부가 그 경비를 지불하도록 바라고 있습니다. 조속한 시일 내에 회답하시기 바랍니다.

이 공문을 받은 미 국무부는 서재필을 방문하여 사정을 타진하였지만, 그해 10월 3일자로 그의 건강상태가 좋지 못하니 기각하겠다는 회신을 서울에 보냈다. 과거 서재필이 폐결핵을 앓았던 것을 이유로 직접 그를 만나 확인하지도 않고 결정된 것이었다. 그 배후에는 이승만지지자들의 서재필귀국반대 노력이 한몫하고 있었다. 이러자 하지는 10월 10일자로 서재필의 귀국을 단념하겠다고 답했다.
그러나 김규식이 끈질기게 서재필의 귀국을 추진하자 마침내 1947년 1월 13일 하지는 다시 워싱턴으로 전보를 보내 그의 귀국을 요청했다.

펜실베니아주 미디아의 사우스가 22번지에 거주하는 서재필을 한국문제의 수석고문, 공무원 15급으로 등용하기를 요청함. 그리고 그의 딸 뮤리엘을 비서, 공무원 6급으로 등용하기를 요청함. 최우선적으로 항공편의 주선을 요청함.

이같은 하지의 의도는 국내의 정치사정이 계속 극한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미국으로 건너간 이승만이 가는 곳마다,

하지 중장은 공산분자를 도울 뿐 아니라 그들의 도구 구실을 하고 있다. 남한의 혼란은 오로지 하지 중장에게 전 책임이 있다.

고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이승만의 스승이자 선배인 서재필과 같은 인물이 이승만을 견제하고 정계를 규합해 주기를 간절히 희망한 데 있었다.
그리고 하지는 1947년 3월 사무연락차 워싱턴에 가면서 서재필을 직접 만나, 한국사람의 이익을 위해 그리고 군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 서울로 와달라고 또다시 요청하였다.
그러나 서재필은 하지의 제의에 대해 고국을 방문하게 되면 어떤 정치적인 역할을 하는 것보다 국민교육에 힘쓸 것이라 하여, 방문목적을 분명히 하고자 했다.

나는 이미 노령으로 아무 야심도 없다. 나는 지위도 원치 않고 명예도 바라지 않는다. 나의 유일한 관심은 국민교육에 있다. 만일 진정으로 한국사람들이 나를 원하고 내가 감으로 인하여 나의 사랑하는 조국 국민을 자유와 독립과 번영으로 인도하는 데 일조가 된다면,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겠다.

서재필의 고국방문이 성사되자 국내에서는 6월 26일 환영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시영·오세창이 명예회장으로 추대되고, 위원장은 김규식이, 부위원장은 이극로·홍명희가 되었으며, 준비위원으로는 당시 정계에서 활약하던 저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1947년 7월 1일 마침내 서재필은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인천항에 도착했다. 고국을 떠난 지 49년 만이었고 그의 나이 83세였다.

2. 민주주의·민족통일을 위한 노력

서재필은 7월 3일부터 미군정 최고고문이자 과도정부의 특별의정관으로서 미군정 본청(구 조선총독부) 207호실에서 공무를 시작했다.
고국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서재필은 평소 가진 계획을 실천해 나갔다. 오랫동안 한국에서 떨어져 있은 관계로 한국말이 서툴러 영어로 할 수밖에 없었으나, 손금성의 통역으로 서재필은 매주 금요일 저녁 일곱 시부터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방송연설을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토크(Radio Talk) ‘국민의 시간’이라 불리는 이 시간을 통해, 그는 모든 국민이 민주시민으로서의 소양을 갖추어 하루바삐 이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라면서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하였다. 그 가운데 ‘선량한 국민과 민주주의’라는 방송연설에는 이러한 그의 생각이 어떠했는지 잘 나타나 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모든 한국사람 대다수의 소원대로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선거된 정부를 가질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이 독립되고 통일되어 민주주의로 되는 그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는 우리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이해하고 실천할 준비를 해야 할 것입니다.
먼저 우리는 어떠한 민주주의 사회이든지 국민 각자가 즐기는 특권은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러한 특권은 비민주주의 정부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와 안전과 각 개인의 행복의 증진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의 특권에는 책임이 따르는 것입니다.
이 책임은 우리의 특권을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이 책임은 우리들의 이웃 사람과 우리들의 친구와 기타 국민의 정당한 소망을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의 책임을 다할 때 타인의 특권을 존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체로 민주주의 국가에서 어떠한 국민이 선량하고 유용한 국민이냐 하면,
첫째, 선량한 국민은 정직하고 진실함으로써 동포의 존경과 신뢰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 선량한 국민은 정직한 노력으로 일용의 양식을 벌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선량한 국민은 자기가 싫어하든 좋아하든 법률에 복종해야 할 것입니다.…
넷째, 선량한 국민은 평화 시나 전쟁 시를 막론하고 항상 국가에 대해 충성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선량한 국민은 국가의 대의와 동포의 복리를 위해 즐겨 자기를 희생해야 할 것입니다.
여섯째, 선량한 국민은 그가 진실로 공익상 가치 있는 목적을 달하려면, 타인과 협력하기를 배워야 합니다.
일곱째, 선량한 국민은 타인의 말을 듣고 읽음으로써 사정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여덟째, 선량한 국민은 피선거인의 과거 정당 이력보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의 업적이 탁월한 자에게 투표해야 할 것입니다.
아홉째, 선량한 국민은 정확한 증거 없이 타인의 행동을 비난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열째, 선량한 국민은 모든 덕행과 비행이 반드시 어떠한 개인이나 정당의 전유물이 아님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찬동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 같이 반대하는 사람의 말도 잘 듣는 것이 지혜로운 일일 것입니다.…
한국을 민주화하는 것만이 한국민족의 살 길임을 나는 확신합니다.…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국민을 민주주의의 길로 지도하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거니와 오직 이 길만이 한국민족에게 자유와 행복을 줄 것임을 우리는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서재필은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방송연설을 통한 국민계몽활동 뿐만 아니라, 각종 모임이나 행사참석을 통한 강연활동에도 활발히 전개하여 민주시민과 민주국가 수립을 위한 자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국내 정국은 더욱 혼란에 빠져들고 있어 서재필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었다. 1948년에 접어들면서 한국 정계는 단독정부수립과 통일을 둘러싸고 민족진영 간에 심각한 분열을 일으켰다.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한독당계와 중간파인 민족자주연맹계 즉 김구·김규식·조소앙·김창숙·조완구·홍명희·조성환 등은 그동안 수차 모임을 가진 끝에, 1948년 3월 11일 남북협상으로 민족자결을 달성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보다 앞서 그들은 2월 4일 회합을 갖고 통일문제를 토의하기 위한 남북회담 개최를 요망하는 서한을 평양의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보내기로 결의했다. 서한을 보낸 다음 김구는 2월 10일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에서, 남북을 통일한 완전 독립의 길만이 유일한 숙원이라는 것을 국민에게 호소하여 큰 감통과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계의 독립촉성국민회와 한민당은 이러한 통일운동에는 아랑곳없이 남한만의 총선거 준비를 전국적으로 추진하여 ‘총선거준비위원회’를 결성하고, 일반 국민들에 대한 선거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국내 정계의 혼란과 민족의 분열에 대한 노투사의 심정은 착잡함이 더했을 것으로 보인다. 서재필의 당시 심정은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대담을 통해 잘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한국은 임자 없는 나룻배인 것입니다. 파도를 따라서 동으로도 흘러가고, 서로도 떠나려 가는 일엽편주인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나라’라고 하면 ‘임금’을 말하는 줄 아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나 김구 씨나 김규식 박사나 김일성 씨 같은 이가 ‘나라’인 줄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국가의 주권은 인민에게 있거늘 인민 자신이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데에 모든 사이비 애국자들의 협작과 음모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에 정당이 수백 개가 있건 만은 그 중에서 산업건설을 위해 진력하고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열의를 경주하는 정당이 과연 몇 개나 되는지 나는 이것을 알지 못합니다. 자주경제의 수립 없이 독립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소위 정치인들은 아는가? 아일랜드 사람들은 경제권 없는 독립을 ‘산송장’이나 다름없다고 영국의 자치권고를 거부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독립을 찾으려는 것은 삼천만 인민이 생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인데, 몇 개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고 대신이 되는 대신 삼천만 인민이 거렁뱅이가 된다면, 세상에 누가 그것을 독립이라고 볼 것인가? 오늘날 한국에는 민족은 있지만은 국가는 주인 없는 빈 땅인 것입니다. 도둑이 들어서 재물을 빼앗아가도 이것을 막을 사람도 없고, 이것을 목격하는 사람도 없는 것입니다.
나는 애국하는 동포들에게 어서어서 ‘자각’을 가지라고 호소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국가의 주인이 되라고 외칩니다. 이(이승만) 박사, 김구 씨를 사랑하는 것이 애국심이 아니라 국토를 사랑하고 동포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애국심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국토를 사랑하고 동포를 사랑하는 길은 무엇인가? 그것은 병자와 어린이와 노인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남자나 여자나 모두 직장으로 나가서 일하는 것입니다. 남의 피나 빨아먹는 ‘이’나 ‘빈대’가 되지 말고 자기의 땀을 흘려서 먹고 사는 신성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자연 국가가 부강해집니다. 국가가 부강해지면, 동포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 자유스럽게 평화스럽게 살 것이오, 국토가 윤택하고 찬란한 광채를 발할 것이니, 여기에 있어 애국심은 본연의 자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신민일보』, 1948. 3. 14)

위 글을 통해 볼 때, 서재필은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해방정국의 정치 지도자와 국민들의 잘못된 의식에 대해 솔직한 심정으로 지적하면서, 정치지도자와 국민이 어떻게 해야 진정 이 민족을 사랑하는 길인지를 분명히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국내 정국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안에 반대한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남북분단을 막아 통일된 국가를 수립하려고 38선을 넘어 남북협상을 강행하였으나,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하고 오히려 이들은 이승만 중심의 우익진영들로부터 공산주의자로 매도당했다.
마침내 1948년 5월 10일 김구와 김규식의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유엔 감시하에 제헌국회 선거가 치러지고 이어서 7월 20일 대통령선거를 치르는 등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이 진행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진행도 평탄하지 않았다. 5·10선거(1948)를 반대하는 좌익세력의 폭동이 전국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정국을 혼란 상태로 빠뜨린 것이다. 이런 혼란스런 가운데 선거는 치루어져 6월 10일 이승만이 국회의장에 피선되고 7월 1일에는 국회에서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제정하며, 12일에는 새 헌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정치일정이 급속히 진행되는 가운데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에 대한 결의를 굽히지 않고 새로운 기구인 ‘통일독립촉성회’를 만들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북한이 남한 측의 단독선거 이유를 내세워 단독정부수립을 추진하기로 함으로써, 김구와 김규식의 민족통일노력은 사실상 무위로 돌아갔다. 북한이 이른바 제2차 남북 제정당 및 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를 1948년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하고 정부수립을 결정한 것이다.
독립의 기쁨과 희망으로 남북한이 서로 힘을 모아 통일국가를 수립하는 대신 이렇게 각각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만 것이다.
서재필은 이미 한국 정치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나 어떤 방법으로든지 기여할 생각은 갖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그는 먼저 남한에서의 단독정부수립이 거의 확정되는 것을 보자, 평소 담아왔던 민주국가수립과 민족통일에 대한 이상을 국민에게 알리기로 했다. 그 가운데 「자유와 민주주의의 길」이라는 제목으로 내외에 천명한 글은, 한국 정부가 반드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데 그 내용을 정리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한국의 독립정부수립을 나는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나 참된 자유와 번영에의 길은 아직도 우리 앞에 놓여 있다. 그 길은 멀고 어려운 길이나, 우리는 조심스럽고 통찰력 있는 계획을 가지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할 것이다. 나는 우리 앞에 놓여진 이 중요한 시기에 한국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나의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1. 우리는 민주주의 정신을 견고하게 지녀야 한다.
일부 한국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의 파괴적인 계략에 대한 미움 때문인지 아니면 민주주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하는 잘못된 편견을 가져서인지, 한국을 위해서는 일종의 독재정치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류가 있다. 이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 독재정치가 일시적으로나마 진척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로 인해 반드시 닥쳐올 엄청난 위험에 대해 자신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다른 어떤 정치이데올로기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일시적인 소리(小利)에 만족하기 보다는 한국을 위한 확고하고 영원한 기초를 세우는 데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어떠한 독재정치도 자유와 번영을 지속적으로 준 적은 없음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길로 가는 우리의 목표달성에는 많은 시간과 인내가 필요하지만 그 길만이 최선의 길이다.

2. 무력으로 이데올로기를 억누를 수 없다.
평화와 번영을 지속하는 길이 멀고 힘들어서 때로는 무력을 통해 지름길을 찾으려 하지만 그 길은 아무데도 없다. 단 한 가지의 길 즉 민주주의의 길은 강제가 아니라 설득과 지도로 해야 할 것이다.

3. 독재정치는 권력의 남용과 부패를 낳는다.
어떠한 독재정치 형태도 바람직하지 않다. 독재정치가 처음에는 우호적일지 몰라도 곧 전제정치화 했음을 역사가 잘 보여주고 있다. 한 독재자가 처음엔 완전하고 훌륭한 의도를 가질지 모르지만, 곧 권력 남용의 욕구에 빠져들기 때문에 공포와 위협의 방법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

4. 외국으로부터 경제적인 원조를 받는 것에 대해
우리 가운데 외국으로부터의 경제원조가 우리나라를 다른 나라에 양도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만약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라면 우방국의 경제원조를 적극 환영해야 한다. 우방국으로부터 정당한 원조를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민주적인 생활방식을 고수하고 민주적인 정부수립에 노력해야 한다. 곧 세워질 한국 정부가 비민주적이라고 의심받는다면 한국이 필요할 때 경제원조를 받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애써 자신을 위해 노력하는 만큼 타인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5. 한국정부의 구성에는 다수층 뿐만 아니라 소수층에게도 문호가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민족화합과 국제적인 우호를 위해 한국의 새 정부는 최대한 많은 정당과 사회단체의 사람들을 포함해야 한다. 불행하게도 남북통일에 대한 의견차이 때문에 일부 사람들이 선거를 반대하였으나,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협조를 얻도록 최대한 관용과 인내의 정신을 발휘해, 새 정부가 모든 합법적인 정당 대표자들에 의해 구성되어져야 할 것이다.

6. 사상의 자유는 존중되어야 한다.
정당 및 정부지도자들 가운데는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국가를 파괴적으로 이끌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러한 자유를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합법적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가 없는 곳에는 어떠한 발전도 있을 수 없고 도리어 침체와 퇴보만 있을 뿐이다. 올바른 사상과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번영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건설적인 사상을 가지는 방법을 우리 국민들에게 훈련시키고, 또 그러한 사상의 자유를 갖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7. 우리는 한국 통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
우리는 남북한의 궁극적인 통일에 기여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해야 한다. 이런 목적의식을 가지고 국회의원들은 너무 성급히 행정부를 구성하지 말고, 먼저 북한 측 사람들에게 공평한 국제단체의 감시하에 뽑혀진 대표를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그들의 참여기회를 열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 결과가 비록 성공치 못할지라도 우리는 한국의 통일을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자세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8. 우리의 외교정책은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국가들과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새로운 정부의 외교정책은 국제평화를 증진시키는 것이어야 하고, 이러한 정책에 헌신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 정부에 구성되는지 주목해야 한다.

9.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는 시대의 필요에 순응해야 한다.
부유한 자는 사상의 발전과 시대의 요구에 부응해 재산제도와 노동관행을 기꺼이 개혁할 수 있어야 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자는 정당한 타인의 재산을 무고히 빼앗기보다 많은 상품과 곡물생산으로 경제적 지위를 개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부자와 빈자가 똑같이 민주적인 과정과 노력으로 모든 국민이 경제적인 번영을 이루는 데 함께 손을 잡아야 할 것이다.

10. 개인의 기본권은 보장되어야 한다.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보장은 민주주의의 최우선 관심이다. 이 원리에 따라 사유재산권과 표현·집회·결사·종교의 자유 등에 대한 제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처럼 서재필이 앞으로 세워질 새로운 정부가 민주정부로서 그리고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해 줄 것을 간절히 호소한 것에 대해 강송파는, 『조선일보』 1948년 6월 13일자 「서재필론-난국에 기대되는 지도자」라는 글에서,

특히 나의 주목을 끄는 점은 진보적인 사상은 신실한 민주세력인 동시에 청정제이니만큼 관용과 경의로써 대할 것이라 한 것과, 박사의 항상 말하는 정치적 좌우세력이 균형하여 상호견제로써 독재가 부식하는 부패정치를 시정방비하고, 민주발전의 촉진을 기할 수 있다는 것 등은 경청할 점이다.

고 하여 그 의미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서재필의 인물됨에 대해서도 그는 난국을 타개할 민족의 지도자로 높이 샀다.

팔십 노령이면서도 오히려 청년에 지지 않을 활달성, 그리고 통일자주독립과 민생문제에 대한 열성은 많은 애국지도자를 포함하여 이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아량 있는 민족지도자의 한 분으로서 촉망함이 어찌 필자 한 사람뿐이랴.

한편 서재필은 단순히 국민에 대한 계몽활동 뿐만 아니라, 범국민적인 정부수립협의체를 만들어 당시 분열되어 있는 지도자들을 단결시키고 이를 통해 공정한 정부수립을 구상하였다. 그는 신홍우에게 자신이 구상한 바를 이승만에게 권유해 주기를 부탁했다. 1년여 동안 서울에 있는 동안 그는 정치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으나, 신홍우를 통해 제시한 것은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정치문제의 관여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누구보다 민주주의를 잘 아는 사람이 민주주의 바탕이 되는 국회가 있는데도, 무슨 협의체를 만들 구상을 한다는 것은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 하여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서재필의 제의가 자신의 독주를 막아 대통령 당선을 방해시키려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민주적인 정부수립을 기대했던 서재필은 그의 오랜 제자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였던 이승만에게 자신의 구상이 냉대받자, 모든 것을 정리할 생각을 가졌다. 정부수립과 함께 미군정청에서의 역할도 끝날 것이기 때문에 한국을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3. 대통령추대운동과 출국

서재필은 국민교육에 힘 쓸 목적으로 고국 방문에 기꺼이 응해 한국에 왔으나, 당시 미군정은 그를 통해 이승만의 독주를 견제하며 혼란된 정국을 수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미 군정의 서재필 초빙동기를 잘 알고 있는 이승만 측으로서는 그의 고국방문과 활동이 그리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그의 행동에 예의주시하고 있던 이승만 측에게 빌미를 제공하고, 서재필로 하여금 정치의 와중에 휩쓸리게 만들어 이승만과의 불화를 야기한 것은, 1948년 『신민일보』 사장 신영철과의 대담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이승만 박사를 한국으로 내보낸 이유는 한국 국민에게 이익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미국은 이(이승만) 박사가 전 국민을 통합하고 지도하기를 위해 그를 밀었습니다. 하지 장군은 그를 친절하게 대했고, 적극적으로 지지했는데, 이(이승만) 박사는 하지 장군을 한국에서 쫓아내기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고, 또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공산당원들은 소련으로 가야한다고 하며, 극렬한 반소(反蘇)운동을 전개했습니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 미국과 소련 간의 관계가 매우 긴장하게 되고, 하지 장군의 입장도 곤란하게 되었지요.
이(이승만) 박사가 극우적인 운동을 이끌어가고 있으므로 미국정부에서는 그를 지지하는 것은 한국의 통일에 지장이 된다고 생각하여 하지 장군 더러 중간파를 이끌 수 있는 지도자를 고르도록 지시했는데,…김규식 박사가 좌우합작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과도입법의원 의장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이승만) 박사는 미국에 돌아가 샌프란시스코에 있었던 기자회담에서, 하지 장군은 공산당에게 모든 원조를 주었고 독립에 방해를 하고 있다고 공격하였고, 따라서 그는 미국정부더러 하지 장군을 소환하도록 하기 위해 미국에 온 것이라 했습니다.

저는 이 기사를 읽고 그에게 충고하기 위해 워싱턴에 가서 그를 만나, “당신은 무슨 권한이 있어서 하지 장군을 사직시키려 하는 것이오. 당신에게 그런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오? 미국사람들은 당신이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당신이 그들을 움직이려고 하시오?” 하고 충고를 했지만, 이(이승만) 박사는 “나는 절대로 자신이 있다.”고 하고 뽐을 내었지요.(『신민일보』, 1948. 3. 14)

그리고 나서 신영철이 ‘그 때 국내에서는 이(이승만) 박사의 계획이 미 국무부 측의 지시를 받고 있는 줄 알았다.’고 하니 서재필은 그것은 다 거짓말이고 거짓 선전임을 일축하였다. 이(이승만) 박사는 그렇게 떠들고 돌아다녔지만, 그 말이 미 국무부에 알려지면서 오히려 국무부의 피해자는 화를 내고, 하지 장군더러 이(이승만) 박사의 거짓선전을 폭로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 것이다.
이처럼 『신민일보』와의 대담에서 서재필은 그동안 있은 이승만의 실정(失政)에 대해 솔직한 견해를 표현했는데, 이러한 기사 보도는 당시 이승만에 대한 그의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곧이어 그에 대한 반격으로 이승만 측 사람들은 서재필이 남한에서의 총선거 반대를 암시하고 이승만을 중상한다고 신문지상에 신랄한 공격을 가했다.
그러는 가운데 서재필을 추대하여 대통령으로 모시자는 운동이 장안에 일어나 그를 거북하게 만들고, 이승만 측에게 좋은 공격의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서재필의 대통령추대운동은 5.10선거(1948)가 끝나고 제헌국회가 소집되어 새 헌법에 대한 기초를 시작하던 중 정계 개편의 움직임이 시작될 때, 정일형·정인과 등을 위시한 일부 정치인들이 서재필을 최고지도자로 추대하고, 독립협회를 재생·확대시켜 새로운 정치운동을 전개할 목적에서 비롯되었다.
이들은 1948년 6월 회의를 갖고 최능진·백인제·안동원·김명준·이용설·노진설·여행렬·정인과·윤석진 등 30여 명이 모여 서재필에게 다음과 같은 간원문을 제출하였다.

우리의 갈망고대하는 독립정부의 수립이 목전에 임박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심원한 용의와 주도한 활동을 요하는 시기에 도달하였나이다.
현하 조국의 정세는 남북의 통일, 민정의 수습, 국제의 수호 등 중대문제가 나열되어 위대한 영도자를 간구하는 현실에 비추어, 각하의 출마를 갈망하는 동시에 좌기 각항에 관한 각하의 결의를 간절히 원하나이다.
1. 각하의 국적을 조국에 환원하실 것.
2. 조국의 영도자로 헌신하실 것.

이러한 간원문을 발표한 뒤 서재필을 추대하려는 운동은 점차 확산되어, 6월 22일 서재필추대 연합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정식 결성식을 결행할 움직임을 보였다.
이처럼 서재필의 대통령추대운동이 표면화되자 독립촉성국민회에서는 6월 25일 우익진영의 20여개 정당사회단체 선전부장회의를 개최하고, 그의 추대운동에 대해 전면적인 반대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였다.
국내 정계가 자신의 추대문제로 소란해지자 분명한 입장을 밝힐 필요성을 느낀 서재필은 다음과 같은 소견을 피력했다.

나는 한국 각지로부터 나에게 한국 대통령 입후보를 요청하는 동시에 내가 출마하는 경우 나를 지지하겠다는 많은 서한을 받았다. 나는 그들의 호의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이다.
나는 과거에 관직에 입후보한 일이 없으며, 지금도 그리고 장래에도 그러하지 아니하리라는 뜻을 그들에게 전달해야 할 것이니, 설혹 나에게 그 지위가 제공됐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수락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미국시민이며 또한 미국시민으로 머무를 생각이다.

추대 측이 대통령 출마에 가장 신경을 쓴 그의 국적 전환문제에 대해 서재필은 미국시민으로 남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들어낸 것이다. 곧이어 서재필은 7월 10일 하지를 찾아가 미 군정 최고고문직 사임을 밝히고 미국에 돌아가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결정 이면에는 이미 처음부터 정치투신에 대한 미련이 없었던 데다, 정부수립을 앞둔 마당에 자신의 역할이 끝났다고 판단한 점, 그리고 자신의 국내 체류가 오히려 이승만 측 비판세력의 중심이 되어 정계를 더욱 혼란시킬지 모른다는 우려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이는 출국 두 주일 전인 8월 28일 한 신문사 기자와의 대담에서 그의 답답한 심정을 헤아릴 수 있다.

나를 낳고 내가 가장 사랑하는 조국과 민족을 내 어찌 떠나고 싶겠소. 나는 군정특별의정관으로서 나의 직책이 끝났으니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이오. 그러나 내가 미국에 돌아간다 하더라도 국민 과반수가 무슨 일을 위해서 도와달라고 한다면, 나는 국민의 의사를 배반하는 것을 원치 않소.

서재필은 만약 국민 대다수가 원한다면 미국에 가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즉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이 자신의 거취에 대해 가장 힘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일절 언급도 없이 방관만 하고 있는 것을 안 서재필이, 대대적인 국민운동을 통해 자기에게 유리하게 변화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마침내 서재필은 1948년 9월 11일 수백 명의 환송객을 뒤로 한 채 인천항을 출발하여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출국하기 직전 그는 고국에 대해,

우리 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고,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라는 것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이것만이 평생의 소원이다.

라고 당부함과 동시에, “조속히 통일국가를 수립하여 잘 살기를 바란다.”고 함으로써 고국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남기고 떠났다.

4. 마지막 여생

미국에 돌아간 서재필의 마음은 매우 착잡했을 것이다. 다소라도 도움을 주고 싶은 마음에서 고국에 돌아갔지만, 미 군정은 자신을 이용하려는 데만 관심을 가졌음을 알고 미 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실망을 했을 것이고, 파쟁을 계속하는 한국 정치인들에 대해서도 실망을 감출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미국에 있으면서도 한국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겠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재필은 1949년 3.1절 행사를 기해 그의 마지막 염원을 담은 당부를 고국 동포들에게 하였다.

오늘날 한국사회가 30년 전보다 얼마큼 낫게 된 게 무엇인고 하니, 지금은 자주독립하는 정부가 생겼고, 그 정부를 세계 각국들이 승인을 해 준 일입니다. 이 정부는 외국 사람들의 힘으로 만들었지만 지탱해 가는 사람은…필경 한국 사람의 손에 달린 것입니다.…
지금 미국이 한국을 도와줄 생각이 있어 한국을 도와줄 듯하지만, 만일 한국사람들이 자기 직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다만 미국을 믿고 있다든지, 미국을 반대해서 일을 한다든지 할 것 같으면 아무 일도 안 될 터이니, 그런고로 불가불 한국사람 손에 달린 일인즉, 그 직분을 알고 3·1운동(1919)하던 정신을 다시 생각해서 전국 인민이 동심으로 협력해서 한국을 참 독립국이 되게 하는 것만이 옳은 일이고, 그리해야만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새로 3·1정신을 깨달아서 동심 합력해 모두 한 몸으로 한 손으로 같이 일을 할 것 같으면 한국이 살게 될 것이고, 만일 그것을 반대한다든지 이를 듣지 않는다든지 할 것 같으면 한국의 미래가 그렇게 좋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직분을 생각하시고 3·1운동(1919)정신을 다시 깨달아서 다 한국을 하나로 살게 만들어 주는 것이 한국사람의 직분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한국은 없어질 것이요, 한국이 없어지면 남한사람도 살 수 없고 북한 사람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나라를 지탱하는 것이 제일의 큰 목적이 아니겠습니까.…
한국이 살면 남북이 다 살 테고, 만일 한국이 죽으면 남한사람이나 북한사람이 모두 멸망할 것이니, 그 직분은 시방 다른 사람한테 달린 것이 아니라, 한국사람들한테 달린 것이오. 내 생각에는 한국이 없어지기를 원하는 사람은 남에도 없을 듯하고, 북에도 없을 테니 다만 그러한 사실을 알 것 같으면 설령 의견이 달라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모두 한국사람이 될 듯합니다.
한 집안으로 4천 년을 살아왔는데, 왜 지금 나뉘어서 두 집이 될 까닭이 있습니까. 둘이 되면 둘 다 약해지고 살 수 없을 터이니, 한 배 속에 든 것과 같아서 한쪽 배가 무너지면 저쪽도 망하는 법입니다. 그러니 아무쪼록 그 배를 보호해서 무너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 첫째 목적입니다. 그 목적을 잊어버리지들 말고 설령 의견이 다른 사람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을 성내서 원수 같이 알지 말고 설명해서 실상 지혜 있는 말을 해 줄 것 같으면, 한국 지탱의 여망은 매우 클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들을 보든지 안보든지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 조국을 잘 살게 해 주도록 만드는 데 있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우리 친구들한테 안부를 전해 주시고, 나는 설령 미국에 있다 하더라도 내 정신은 한국사람들과 같이 있으니, 아무쪼록 합심하고 합동해서 외국 사람이 돕는 것을 이용해서 한국을 잘 살게 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현종민 편,『서재필과 민주주의』, 153~155쪽)

85세 노투사의 마지막 당부는 다시는 나라를 잃지 않도록 스스로 힘과 능력을 기르고 모아, 독립된 국가로서 영원히 보전·발전되기를 바란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그의 기대와는 달리 1950년 6월 25일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 그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서재필은 자신의 비서로 함께 일했던 임창영에게 이 전쟁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털어 놓았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이 도우셔서 내가 이런 일을 끝장내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싸움을 막기 위해 어디서 누구를 막론하고 무슨 일이든지 해 보겠소. 그렇소, 이와 같은 비극을 끝내기 위해서라면 평양·서울·워싱턴·모스크바까지 가서 모든 당국자들께 그렇게 간청하겠소.
나는 이성을 믿고 있소. 비록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로서 선과 악의 양면을 가지고 있지만, 역사는 우리 인간이 악을 억제하고 선을 행해온 것을 보여주고 있소. 마찬가지로 나는 결국에는 우리 동포들도 공존공영을 위해 같이 살며, 같이 일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라는 데 확신을 가지고 있소. 그 가운데 통일된 독립민주의 한국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오.

동족의 참화를 가슴 아프게 생각한 그의 고국에 대한 연민과 열정이 마지막까지 식지 않았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서재필은 6.25전쟁이 한창 진행되던 1951년 1월 5일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찬란하고 파란곡절이 많던 긴 생애를 마쳤다. 그의 나이 87세였다.

연보

1864. 1. 7: 부친 서광언과 모친 성주 이씨의 4남 1녀 중 2남으로 외가인 전남 보성군 문덕면 가천리에서 태어남.
1871.(7세): 충남 대덕군에 살던 7촌 서광하의 양자로 입양됨. 그 후 곧 양어머니의 요청에 의해 서울에 있는 외삼촌 김성근의 집에 들어가 과거공부에 정진.
1882(18세):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교서관 부정자를 지냄.
1883. 5. 20~1884. 7: 김옥균의 권유로 일본 호산육군학교에 유학.
1884. 12. 4(20세): 김옥균·서광범·홍영식·박영효 등과 갑신정변(1884)을 일으킴. 그러나 3일천하로 끝나 일본으로 망명.
12. 13: 일본 화물선 천세환을 타고 나가사키에 도착.
1885. 4.(말경): 미국 화물선 차이나호를 타고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하여 막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영어를 공부함.
1886. 9~1889. 6: 홀렌백의 도움으로 해리 힐맨아카데미에 입학하여 미국의 풍습과 사상을 익히고 학문의 기반을 닦음.
1888. 6. 19: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영어식 이름을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으로 고침.
1889. 가을(25세): 미육군 군의참모부 도서관 사서로 임용되어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뒤, 곧 컬럼비안대학(현 조지워싱턴대학교)의 야간학부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함.
1892. 3: 컬럼비안대학교 의학부를 졸업하여 한인 최초의 의학사(MD)가 됨.
1894. (30세): 의사 개업을 시작.
6. 20: 뮤리엘 암스트롱과 결혼. 이후 두 딸(스테파니·뮤리엘)
1895. 11. 10: 조선 정부의 부름에 응해 워싱턴을 출발.
12. 26: 고국을 등진지 11년 만에 한국에 도착.
1896. 1(32세): 김홍집내각으로부터 10년 계약의 중추원고문에 임명됨. 동시에 유길준과 함께 신문간행계획을 추진.
1. 19: 서울에서 최초의 공개강연회를 개최.
2.: 건양협회 결성을 추진하다 아관파천(1896)으로 무산됨.
3. 13: 농상공부의 임시고문으로 임명됨.
4. 7:『독립신문』을 창간하여 자주·자강의 계몽운동을 시작.
5. 21: 배재학당에서 목요강좌를 시작
7. 2: 외부(外部)에서 독립협회 창립총회를 개최.
11.: 배재학당 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종의 토론회 모임인 협성회를 조직.
11. 9: 독립문건립기공식을 거행.
1897. 5. 23: 모화관을 개수하여 독립관을 완공.
8. 8: 독립협회에서 토론회를 시작.
11.: 독립문 건립을 완공.
1898. 3.(34세): 윤치호를 비롯한 독립협회 지도자들과 함께 의회개설 운동을 전개.
3. 10: 최초의 만민공동회를 개최.
4.: 대한제국정부를 비롯하여 러시아·일본·미국 측의 서재필추방운동이 전개됨.
4.25: 독립협회에서 서재필재류운동을 전개함.
5. 11: 독립신문사를 윤치호에게 인계하는 계약을 체결.
5. 14: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감.
~12: 미서전쟁에 참가하고자 미육군군의관에 입대하여 근무.
1899~1903: 펜실베니아대학 위스터연구소 연구원으로 근무.
1904~1913: 해리 힐맨 아카데미 1년 후배인 해롤더 디머와 동업하여 필라델피아에서 인쇄 및 문구사업을 시작.
1914~1924: 필라델피아에서 필립제이슨회사(Philip Jaisohn & Company)라는 이름으로 인쇄 및 문구사업을 단독으로 운영.
1918. 12. 19(54세):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장 안창호에게 영문잡지 발간을 제의.
1919. 4. 14~16: 필라델피아에서 이승만·정한경과 함께 ‘제1차 한인회의’를 개최.
4. 22(경): 필라델피아에서 한국통신부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선전활동을 전개함.
5. 16: 필라델피아에서 한국친우회를 결성하고 이후 미국 전역과 영국·프랑스 등지에 23개의 친우회가 결성 되도록 함.
1921. 4. 18(56세): 구미위원부 임시위원장으로 임명받음.
7.: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재무총장 이시영에게 워싱턴회의를 대비할 것으로 처음으로 제의하고, 이후 단독으로 재정모금활동을 착수.
9. 29: 임시정부로부터 워싱턴회의 한국대표단 부대표로 임명됨.
1922. 2. 9: 한국통신부와 한국친우회 활동에서 손 떼고 사업에 전념하겠다고 발표.
7.: 『한국평론』7월호 발간을 끝으로 한국통신부의 활동이 중단됨.
1922. 9~1940: 『동아일보』·『조선일보』·『신민』·『평화와 자유』·『산업』·『신한민보』 등에 활발한 기고활동을 전개.
1924.(60세): 필립제이슨회사가 재정난으로 파산.
1925. 4: 유일한과 함께 이탄 뉴(Itan New & Company)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했으나 곧 실패함.
7: 하와이 호놀룰루에 개최된 범태평양회의에 한국대표단 일원으로 참가.
1926. 9(62세): 펜실베니아 의과대학원 특별학생으로 입학하여 의학 공부를 재개.
1927. 6~1935: 여러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
1929.: 병리학 전문의자격을 얻음.
1930.~1934.: 미의학학회지에 병리학연구논문을 발표.
1936.: 펜실베니아 체스타에서 의사개업을 시작.
1941.: 부인 뮤리엘 암스트롱이 별세. 미군 징병검사의무 관으로 자원봉사.
1945. 1: 미국 국회로부터 정병의무관으로 봉직한 데 대한 공로로 훈장을 수여받음.
1947. 7. 1(83세): 미군정최고고문이자 과도정부특별의정관 자격으로 둘째 딸 뮤리엘과 함께 고국을 방문하여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해 노력함.
1948. 6: 최능진·백인제 등 30여 명이 모여 서재필대통령추대운동을 전개.
9. 11: 고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감.
1951. 1. 5(87세): 필라델피아 근교 노리스타운에 있는 몽고메리병원에서 생을 마침.
1977.: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함.

참고문헌

1.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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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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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서재필과 이승만』, 정우사, 1980.
송건호, 『송재 서재필』, 중앙서관, 1983.
이정식, 『서재필』, 정음사, 1984.
신용하, 『독립협회연구』, 일조각, 1985.
송재문화재단, 『인간송재 서재필』, 1986.
임창영저, 유기홍(역), 『위대한 선각자 서재필 박사 전기』, 공병우글자판연구소, 1987.
강동진, 『일제의 한국침략정책사』,한길사, 1987.
이광린, 『한국개화사상연구』,일조각, 1989.
현종민편, 『서재필과 한국민주주의』, 대한교과서주식회사, 1990.
이택희·김운태·양재인·신복룡·이상철·이우진 공동연구, 『서재필』, 민음사, 1993.
오세응, 『서재필의 개혁운동과 오늘의 과제』, 고려원, 1993.

3. 연구논문
최준, 「고종시대 커뮤니케이션형태의 고찰-독립신문과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사학연구』3, 1959.
최준, 「독립신문판권과 한미교섭」, 『중앙대논문집』13, 1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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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보기, 「3·1운동에 대한 미국의 반향」,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 1969.
손보기, 「3·1겨레 싸움과 미국의 반향」, 『한국민족독립운동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9.
박성근, 「독립협회의 사상적연구」, 『이홍식박사회갑기념사학논총』,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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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선주, 「1921~22년의 워싱턴회의와 재미한인의 독립청원운동」, 『한민족독립운동사』6, 국사편찬위원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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