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간행물

전체

독립운동가열전

운강 이강년 의병장
발간사

발간사

우리나라 근대 100년의 역사는 외세의 침략으로 국권을 잃고 이민족 식민지가 되어 갖은 수모와 억압, 착취를 당해야 했던 굴욕과 고난의 역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굴욕과 고난의 민족 수난기에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계셨습니다. 그 분들은 조국과 겨레를 향한 숭고한 사랑, 불타는 정열, 강철 같은 의지로 국권을 회복하고 고난 받는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하고 희생하셨습니다. 그리하여 민족 구원의 일대 드라마가 펼쳐졌고, 민족정신이 크게 앙양되었습니다.
그 동안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애국 선열들의 생애를 『독립운동가열전』이란 이름으로 펴냈습니다. 1992년 제1차로 류인석·김규식·김구·홍범도(1)·신규식·한용운·안중근 등 일곱 분의 열전을 내어 놓은데 이어, 이번에 제2차로 이강년·서재필·홍범도(2)·이종일·차리석 등 다섯 분의 열전을 새로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이 열전은 연구소가 지난 10년간 『독립운동사 자료총서』와 『한국독립운동사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애국지사들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새로운 자료들을 찾아내고 연구해 온 데 기초한 것입니다. 우리가 독립국가의 국민으로서 안정과 행복을 누리고 있는 바탕에는 조국을 찾기 위해 쏟은 애국지사들의 피땀과 눈물이 있었습니다. 열전 발간 사업은 바로 이 분들의 생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물질만능·배금주의, 무분별한 소비문화와 외래 풍조에 휩쓸려 범죄와 부조리, 이기주의가 증대해 가며, 도덕성은 날로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을 성취하고 나아가 세계 일류 국가에 진입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이러한 민족의 대업에 헌신하는 새로운 국민적 기상과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재충전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끝으로 집필을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은 연구원 여러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97년 3월 1일
독립기념관 관장 박유철

머리말

19세기 중엽 개항 전후의 조선사회에서는 위기의식의 도전 속에서, 이를 스스로 극복하려는 위정척사론과 동학사상 그리고 개화사상이 각기 생장하였다. 제국주의 일본은 이 세 민족 사상에 바탕을 둔 민족운동을 저지, 탄압하면서 조선을 식민지화하여 갔다. 특히 일제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1894)을 계기로 갑오왜란을 감행하고, 청일전쟁(1894)을 도발하였으며, 이듬해에는 을미사변(1895)까지 일으켰다. 한편 이와 같은 일제의 압력을 받고 있던 개화파 정부는 갑오(갑오개혁, 1894)·을미개혁(1895)을 추진하여 단발령까지 공포하였다. 이런 속에서 위정척사론에 바탕을 둔 전국의 많은 유생들이 항일의식을 견지한 농민을 규합, 전개한 한민족의 민족운동이 의병전쟁이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 전후부터 국권회복운동으로서 의병전쟁과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었다. 특히 이 의병전쟁은 일제침략에 대한 항전과 국권수호의 민족정신의 맥락으로 뒷날 독립군 그리고 광복군으로 계승되어 독립전쟁론의 원류가 되었다
의병의 개념에 대하여 백암 박은식이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에서,

의병이란 민군이다. 나라가 위급할 때 즉시 의로써 일어나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하여 적을 무찌르는 자이다.

라고 말하였듯이 민군은 군사적 지식이나 경험이 없고 무기나 기율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여 일단 정규군인 적을 만나면 패산하기는 자명한 이치인 것이다. 그러나 여러 어려운 여건 속에서 비교적 성과를 크게 올린 의병부대도 있었다. 곧 운강 이강년 의병부대인 것이다.
의병전쟁을 시기별로 대별하면 전기의병(갑오·을미의병)과 러일전쟁(1904. 2∼1905. 9)의 여세로 강제로 체결된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 전후에 재기한 중기의병(을사의병,1905), 그리고 1907년 광무황제(고종)의 강제퇴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전국적 규모로 확대된 후기의병(정미의병,1907)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 이 의병전쟁 세 시기에 모두 걸쳐 활약한 의병장은 드물다 하겠다. 운강(이강년)의 「고결팔역동지(告訣八域同志)』에

강년(이강년)이 끓어오르는 피를 억제하지 못하고 더 참을 수 없어서 병신년 이래 13년에 걸쳐 두 번 의기를 들고 싸운 지 30여 회의 큰 싸움에서 왜추 백여 명을 죽이고 금년 6월 4일 불행히도 세궁역진하여 적의 탄알에 맞아 사로잡힌 몸이 되었다. 이제 옥중에 갇혀 오랜 동안 욕보이다가 장차 죽게 되었으니 왜적을 토벌하는 것도 이제 그만인 것이다.

라고 운강(이강년)이 순국하기 직전에 8도 동지들에게 영결(永訣)하면서 스스로 밝혔듯이 1896년에서 1908년 순국하기까지의 13년간 전기의병(을미의병, 1895) 때와 중기·후기의병(정미의병, 1907) 때에 두 번에 걸쳐서 의병을 일으켜 싸웠다고 밝혔다.
이와 같이 구한말 의병 전쟁기에 국권회복을 위하여 처절하게 싸워 불멸의 업적을 남기고 장열하게 순국한 운강 이강년 장군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불리한 여건 속에서 전개한 영웅적 의병항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고증자료의 한계를 비롯하여 필자의 둔함과 게으름으로 선열께 자못 누가 되는 글이 되지는 않았는지 몹시 두렵다. 강호제현의 질정을 바란다.
끝으로 이 글을 집필하는데 청권사(淸權祠) 여러분과 이구용 선생님을 비롯하여 운강(이강년) 선생을 연구하시는 분들의 글에서 도움을 받았음을 이 자리를 빌어 다시 감사드린다.

1997년 2월
저자 삼가 씀

제1장 출생과 성장

1. 가계와 성장

가계註1)



운강 이강년 선생은 1858년(철종 9년) 12월 30일(양력 1859 년 2월 18일) 경북 문경군 가북면 도태리(현재 문경시 가은읍 상괴리)에서 조선 제3대 태종의 차남 효령대군의 19세손으로, 이기태(李起台)와 부인 의령 남씨 남복영의 딸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운강(雲崗), 자는 낙인(樂寅)이며 태어날 때 집 뒤 둔덕산이 크게 연일 울었으며, 어머니의 태몽에 태양이 입에 들어가는 꿈을 꾼 뒤 잉태하였으므로 아명을 양출(陽出)이라 하였다 한다. 당시 사람들은 둔덕산이 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하여 나라가 어지러운 때인지라 길한 징조인지 흉한 징조인지 궁금해 하였으나 운강(이강년)이 태어나자마자 이 산의 울음도 그쳤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 같은 출생에 얽힌 사정을 가지고 장차 아기가 자라면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가문은 왕실 후손이면서도 벼슬이 종 5·6품의 당하관에 그쳤으며, 그 생활 환경도 명문 사족으로서의 명성을 누리지는 못한 것 같다. 그러나 향촌에서 전통적인 학문을 닦고 도의를 숭상하는 가풍을 유지해 온 것 같다.
그의 조부인 이덕의(李悳儀)는 효행의 명성을 떨쳤으며, 아버지는 13세 때에 일찍 한시를 읊을 만큼 학문적으로 숙성하였다 한다. 그러나 8세 때에 아버지를 여의였으므로 자연히 조부로부터 학덕을 쌓았을 것이다. 그가 3세 때에 옥편에서 신체부(身體部)의 속자(屬字)를 알만큼 어려서부터 총명하였으며 아버지 상을 당하여서는 어린 나이에 여막에 거처하기를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아 보는 사람은 이를 신기하게 여겼다 한다. 조부를 여의고는 당시에 삭주부사(朔州府使)로 재직 중이던 백부 기택(이기택)이 맡아 양육을 하는데 선생의 천품이 영특하고 총명하며 용력과 담력이 출중할 뿐 아니라 글 읽기와 무예에도 능하여 “우리 가문을 흥기시킬 장재라.” 하면서 기호의 이름 있는 학자들을 초빙하여 학문을 교육시키고 병서를 강독케 하는 등 많은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성장하면서 전통적인 선비가문으로 조부를 비롯한 향촌 유생으로부터 유학을 수학하였을 것이다. 그의 초기의 학통은 이와 같이 지정된 인사나 사숙(私淑)이 없이 면학하여 학문적 깊이와 내용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선생의 묘갈명(墓碣銘)에 ‘고아로서 학문에 힘써 경사(經史)를 통달하고 기풍이 강개활달(慷慨豁達)하고 병법도 아울러 익혔다.’ 하였고 『기려수필(騎驪隨筆)』에는 ‘인품이 활달 강개하며 담력이 범상치 않았고 이미 어린 나이에 문장과 학문이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한편 당시 국가의 기강이 문란하여 양반자제들이 백성을 학대하는 등 그 위세가 오만 불손함을 보고 분개한 운강(이강년)은 그들을 꾸짖어 동리에서 몰아내는 등 백성을 구한 것이다. 그리고 그의 백부가 삭주부사였으므로 자주 그곳을 찾았을 때 그곳은 기향(妓鄕)이므로 유혹에 빠지기 쉬운 곳인 데도 항상 돈행상지(敦行尙志)하고 여자 보기를 더러운 물건같이 여겼던 것이다. 이와 같이 그는 한눈을 팔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을 뿐 아니라 의리로서 사회정의와 애민정신을 실천한 청년으로 성장한 것이다. 따라서 향민의 사랑과 존경의 대상으로 장성하여 갔다.

2. 벼슬과 낙향

운강 이강년은 장성하여서 8척 2촌의 장골로 풍채가 늠름하고 담이 크며 위엄이 있어 무리를 압도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봉의 눈매에 칼날 같은 눈썹과 붉은 얼굴빛을 띠었고, 수염이 휘날리며, 말소리가 우렁차서 대장부의 기상이고 평소에 학식은 물론 무예와 병서에 능하였고 그림에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특히 그의 무풍은 백부 이기택이 무과(武科) 출신으로 평북 삭주부사로 재직하고 있음도 그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22세 때인 고종 16년(1879년) 3월 6일(음력) 정시 무과에 합격하였다. 벼슬로는 선천(宣薦)에 들어 종6품인 절충장군 행용양위부사과(折衝將軍 行龍驤衛副司果)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이 무렵의 정국은 보수와 개화의 대립 갈등 속에서 혼미를 거듭하였으며 민심이 도탄에 빠졌고 밖으로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이 첨예화하여 갔다.
1876년 강화도조약으로 문호가 개방되어 한국의 근대화가 추진되었으나 동시에 일본의 침략도 수반된 것이다. 이로 인하여 안으로 개화에 대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이 심화되었고(辛巳斥邪運動; 1881) 급기야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과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 10)이 일어났던 것이다. 특히 갑신정변(1884)은 보수적 유생의 견지로는 일본공사(竹添進一郞)와 친일당(親日黨)이 결탁하여 왜병을 궁궐에 끌어들여 일으킨 변란으로 국가적 위기로 여겨졌다.
1884년 겨울 운강(이강년)은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고 말았다. 무능하고 부패한 민씨(명성황후) 외척 정권과 날로 첨예화하는 청·일(청국·일본)의 대립 각축 속에서는 더 이상 사환(仕宦)의 길이 무의미하였던 것이다. 향리에 돌아온 후 옥봉서원에 칩거하면서 대의(大義)에 뜻을 두고 학문에 더욱 힘쓰면서 울분의 마음으로 우국의 나날을 보내었던 것이다. 때로는 영남과 호남 등지를 두루 여행하면서 국가적 위기상황을 체험하고 10여 년을 지냈던 것이다.

3. 학통과 위정척사사상

구한말의 구국의병 전쟁의 사상적 맥락은 민족적 위기의식 속에서 배태된 위정척사운동과 동학농민운동(동학농민전쟁, 1894)의 양대 원류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가운데 주동적인 항일 구국의병운동(전쟁)의 사상적 근원은 개항 전후부터 활발하였던 항일척사론이었다. 척사론은 두 차례의 양요기에 상소를 올려 ‘양이(洋夷)’와의 척화를 주장한 이항로(李恒老), 그리고 개항 이후 류인석(柳麟錫) 등 화서문인(華西門人)이 주도하였다.
류인석을 중심으로 한 동문제자들은 을미사변(乙未事變, 1895)과 단발령(斷髮令)을 만고소무지대변(萬古所無之大變)으로 인식하여 주자학적 전통질서의 재확립만이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구국부도(救國扶道)의 유일한 길이라는 신념을 굳게 지켜 나갔다. 춘추의리에 바탕을 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은 조선 말기 이래 역사적인 상황의 변천에 따라 민족과 민족문화의 보존을 위하여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실천을 전제로 한 이데올로기이다. 다시 말해 항일의병전쟁이 일어나기 이전에 전개되었던 화서의 존화양이론이 어디까지나 성리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철학적·이론적 단계에 머물러 있었던 데 비하여, 류인석의 존화양이론은 소중화론(小中華論) 등과 같은 화서의 이론을 철저하게 계승한 토대위에서 의병전쟁·요동망명 등을 거치는 동안 그 이론이 또 다른 차원으로 발전되면서 강력한 실천논리를 표방하게 되었던 것이다.
의암 류인석을 사사하였던 운강(이강년)은 기병하면서 그 막하로 자원하여 들어가 문하생으로 의리를 강명하였다. 의암(류인석)이 요동에서 거이수지(去而守之) 할 때에도 직접 요동을 왕래하였다. 이 시기가 그의 일생을 통하여 학문과 사상적 성숙도가 가장 고조된 때이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춘추대의적 존화양이론에 접맥되어 항일의 정신적 맥락이 더욱 강력해졌던 시기였던 것이다.
특히 ‘양이’의 대상이 일제 침략세력으로 더욱 구체적으로 한정되어가면서부터는 ‘존화양이론’ 그 자체가 의병전쟁의 이론체계로 발전되고 있다.
강수명(姜秀明)의 제문에는

선생의 뜻은 이미 끊어진 화맥(華脈)을 부지(扶持)하고 이미 땅에 떨어진 성인(聖人)의 도를 잇게 하고 이미 망한 종사(宗社)를 보지하고 이미 짐승이 되고 또한 죽은 생령을 건지는 데 있었으니 뜻 또한 크지 않겠는가. 선생의 일(事)은 공(孔, 공자)·맹(孟, 맹자)의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정도(正道)를 책임지고 춘추의 존왕양이(尊王攘夷)의 대의에 의지하여 잔예(殘穢)를 제거하고 천하를 소청(掃淸)하여 일의 성공을 꼭 믿으니 일 또한 크지 않는가?

라고 하였으니 운강(이강년)은 위정척사를 정도로 춘추의 존왕양이의 대의에 서서 기병하였던 것이다.
즉 운강(이강년)은 화서[華西 李恒老(이항로)]→중암[重菴 金平黙(김평묵)]→성재[省齋 柳重敎(류중교)]→의암(류인석)으로 이어지는 화서학파의 적전지통(嫡傳之統)을 계승하였으며 특히 의암(류인석)의 문하생으로 존왕양이론에 입각하여 토적복수(討賊復讐)의 항일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척사론의 대응 사상운동인 개화운동에 대하여는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던 것이다. 류인석의 『소의신편(昭義新編)』에서는 “이강년이 입요(入遼)할 때 종가(宗家)를 들렀다가 효령대군묘 중수의 종전수록(宗錢收錄) 명단에 적당(賊黨; 개화친일 적당-주)

구한말 위정척사운동 계보註2)이 있어 저녁을 들려다가 먹지 않고 일어났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각도열읍』에 격고(檄告)한 글을 보면

머리를 깎고 복색(服色)을 변경하니 나라의 풍속은 오랑캐로 변하였고 국모를 시해하고 임금을 협박한 갑오·을미의 원수를 아직도 갚지 못하였다. 이민을 보낸다는 것은 우리를 바다 밖으로 쫓아낼 음흉한 계책이요 저들이 이 강산을 빼앗아 영주하겠다는 것은 고금 천하에 없었던 일이다. 그 허다한 죄상은 하늘도 미워할 것이니 우리 국민된 자 모두가 저들을 죽일 의무가 있는 것이다. (중략)
아, 우리나라는 소중화의 문명이 있어 열성조(列聖祖)의 교화를 입어 문명의 치적이 한당(漢唐)의 규모를 능가하였고, 유현(儒賢)을 배출하여 주사(洙泗; 공자가 설교한 곳)와 낙민(洛閩; 정자와 주자가 강학한 곳)의 연원을 이어 받았다. 그런데 근화강산(槿花江山)에 운수가 비색하여 종사가 멸망하였으니 저 무고한 백성이 도탄에 빠진 것이 가련하도다. 온 국민이 통분하게 여기니 불의의 영화가 얼마나 갈 것이며 천리가 순환하니 액운이 다하면 통할 날이 있을 것이다.
무릇 의거에 응모한 우리 충의지사(忠義之士)들은 모두 강개하여 나라에 보답할 뜻을 간직하였을 것이다. 계급을 가리지 않고 함께 포용하였으니 좋은 계책은 남김없이 시행하였고, 의리와 사욕을 분간하여 취택하였으니 사사로운 정리는 깨끗이 잊어버렸다. 대의를 밝히려면 살아서 노예가 될 수는 없는 일인데 왜적을 소탕한다면 죽은들 무슨 여한이 있으랴. 산천초목도 우리에게 향응할 것이며 천지신명도 우리를 도와줄 것이다. 어찌 다만 한 때의 공훈이 있을 뿐이겠는가. 참으로 만고의 강상(綱常)을 붙들려는 것이니 후회함이 없게 하라. 신상필벌(信賞必罰)은 일월과 같이 어김이 없으리라.

라고 하여 전통적인 복제를 서양식 복제로 개혁한 것은 화맥·도맥(華脈·道脈)을 위시하여 조선의 정맥(正脈)과 고유풍속까지 모두 일시에 단절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변복령(變服令)·단발령과 더불어 의병전쟁의 명분을 더욱 강화시켜 준 사건이 을미국모의 원수를 갚는 것임을 언급하였다. 그리고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과 광무황제(고종)의 강제퇴위는 곧 종사의 멸망이라고 인식하여 통분하였으며 대의로서 왜적을 소탕하는 것만이 왜적의 노예에서 벗어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운강(이강년)의 재기의병은 전기 때와 같이 유림주도 척사의병의 성격을 계속 유지한 것으로 복수구국(復讐救國)을 의로 삼았다고 할 수 있다.

제2장 1896년 의병항쟁(전기의병) -1896. 2. 23.∼1896. 8. 23.-

1. 기병의 배경

(1) 정치·사회적 배경

갑신정변(1884) 이후 한국을 사이에 놓고 열강 세력의 경쟁은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하였다. 청·일(청국·일본) 대립에서 정치적으로 위축된 일본은 다시 그 세력의 만회를 모색하면서, 특히 경제적 진출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므로, 한국 농촌은 날이 갈수록 곤궁해지고, 따라서 농민층에서는 반제국주의 배일의식이 고조되어 갔던 것이다.
친청 보수적 민씨(명성황후) 정부는 국가적 위기를 능동적으로 타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농민을 도탄에 빠트렸으므로 이에 1894년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초래한 것이다(제1차 봉기, 음력 1월). 이를 호기로 삼은 일본은 청일전쟁(1894)을 도발하고(7. 25, 음력 6. 13.)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한국의 반식민지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일제는 군사적 위협으로 한국 정부에 내정개혁을 강요하였다(7. 3, 음력 6. 1.). 정부는 이를 내정간섭이라하여 거절함은 물론 현재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므로 일본군의 요구는 내정간섭이며 일본군의 철수를 선결문제로 내세워 그들의 개혁 요구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안을 일부 받아들였던 것이다(7. 13, 음력 6. 11.). 그러나 일본은 철병을 거부할 뿐 아니라 경복궁을 침범하는 침략행위를 강행한 것이다(7. 23, 음력 6. 21). 이 사건은 일제가 조선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의 변란임이 틀림이 없다.
경복궁을 무력 침범한 일제는 자신들의 무력행사를 열강에 은폐하기 위하여 흥선대원군(이하응)을 유인·입궐시켰다.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등장은 곧 민씨(명성황후)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였다. 일제는 광무황제(고종)로 하여금 정무와 군무를 임시로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섭정토록 조치하였다. 그러나 이는 광무황제(고종)의 대권을 박탈하여 조선정부를 장악하고자 한 것에 불과하다. 더욱이 조선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시키고 경복궁을 무력점거 하였다. 이어 개화파들에 의한 친일정권이 수립되어 갑오경장(甲午更張, 갑오개혁, 1894)을 추진한 것이다.
이 사태에 격분한 동학농민군은 반개화 투쟁과 아울러 반침략 투쟁을 재개하였다(동학의 제2차 봉기, 음력 9월). 그러나 이 사건을 위기상태로 인식한 계층은 동학농민만이 아니었다. 즉, 척사유림들 역시 이 사건을 침략행위로 간주, 반침략투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뚜렷한 징후가 궁궐 침범 1개월 후인 7월 말에 나타났다(공주 유생 徐相轍(서상철) 등이 안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갑오경장(갑오개혁, 1894)은 근대화를 향한 역사적인 개혁의 측면도 있으나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추진되었기 때문에 온 국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운강(이강년)은 이와 같이 정국이 불안하고 나아가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워짐을 느끼고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여 말하기를 “지난 임진왜란(1592) 때의 왜놈 원수만으로도 오히려 뼈아프다고 이르겠거든 이제 거듭 악을 부려 우리 군왕을 욕하고 우리의 의복과 머리털을 허물고 우리의 예의를 더럽히어 오백 년 종사를 위태롭기 한 터럭 같은 데도 오히려 한 사람도 나라의 보존을 도모하는 자 없으니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하며 밤낮으로 통곡하여서 집안일은 돌보지 않았다. 그리하여 운강(이강년)은 토적(討賊; 친일적당)과 토왜(討倭)의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심하였다.
이 시기에 동학농민군이 봉기하면서 동학의 한 무리가 떼지어 문경 지방의 여염마을을 침범하여 노략질하매 운강(이강년)은 칼을 뽑아 이를 무찌르고자 하였는데 그 모친 남(남복영)씨가 “작은 적은 겁내고 큰 적에게는 용감하여야 한다. 이 모기 같은 것을 보고 어찌 큰 적에게 하는 것을 쓰랴?” 하니 운강(이강년)은 모친의 뜻을 좇아 드디어 그만 두었던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1894)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교체와 박영효(朴泳孝)의 음모사건, 친러파의 대두와 민씨(명성황후) 외척의 재등장 등 정계의 혼돈 속에서 을미사변(1895)이 일어났다. 친러세력의 등장으로 조선에서 세력을 잃어버린 일본은 조선 내부에서 자국의 이익을 해치고 반일세력을 배후에서 조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명성황후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일본은 명성황후와 친러세력을 몰아내고 세력을 다시 만회하기 위해 군인출신으로 거칠고 과격한 미우라를 주한공사로 보내 명성황후를 살해하려는 계획을 은밀히 추진했다. 미우라는 이 흉계를 위해 훈련대 간부들과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이용하기로 하고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에게 수차 사람을 보내 설득을 하여 시해의 승낙을 받고 마침내 8월 20일 새벽 일본이 낭인(浪人; 불한당)들과 함께 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쳐들어왔다. 그리고 광무황제(고종)와 태자를 끌어내 칼로 위협하고 옥호루에서 궁녀로 변장한 황후(명성황후)를 찾아내 살해한 뒤 석유를 뿌려 시신을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을미사변(1895)은 친러파의 득세에 대한 일제의 세력 만회 계책 등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흉모였다. 국가 운명에 대해 크게 근심하게 만든 충격적인 사건인 것이다. 곧 이어서 새로 구성된 김홍집 친일내각은 일본의 사주를 받아 단발령 등 을미개혁(1895)을 단행하니 전국적으로 유림과 백성들은 “내 목은 내 놓아도 머리는 자를 수 없다.”고 항의하며 각지에서 상소와 성토를 하여 그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 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의 발발의 계기가 된 것이다.

(2) 역사적 전통의 배경

한국사는 유사 이래 이웃 침략민족과의 항쟁에서 한결 같이 단결하여 대항하였으므로 오늘의 민족국가의 주체적인 역사와 전통문화를 계승 발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와 같이 문화와 역사가 있는 한민족이 타율적인 지배를 받을 때 저항하는 것은 당연한 논리이다.
구한말 의병전쟁은 바로 일제 침략에 대한 문화 민족으로서의 항쟁이요, 생존권 수호를 위한 항쟁이었다. 그러므로 의병 사상의 원류는 인간 본래적인데 있고 한국 역사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민족자존의 의지표현이 독립운동이고 그의 일환이 의병전쟁이었던 것이다. 그러한 민족적 노력은 정부적 차원에서도 수행되고 민간의 노력으로도 표현된다. 정부의 힘이 모자라면 민간의 힘을 합치고 정부가 무능하거나 민족 의지에 배반하면 민간 독자적으로 민병을 조직하여 저항한 것이다.
의병이란 민병을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적으로 보면, 고대 3국시대로부터 비롯되지만 특히 조선조에 와서 임진왜란(1592)이나 병자호란(1636), 그리고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 때의 의병 등은 모두 민족자존을 위한 항쟁으로서 정신사적으로 구한말 의병전쟁이 한민족의 정신사적 맥락을 이은 것이다.
임진왜란(1592) 때에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高敬命)은 『마상격문(馬上檄文)』에서

의리는 의당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돕고, 군량을 도우며 혹은 말에 올라 남 먼저 전장으로 달리고, 혹은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두렁에서 일어나되 제 힘이 미치는데까지 오직 의로 돌아가라.

라는 충절로 격문을 띠었다. 이와 같은 의병사상의 원류는 역사 속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는데 구한말 의병전쟁 직전의 구국사상운동은 위정척사사상과 동학농민운동(1894)이란 양대 원류로 압축할 수 있을 것이다.
『운강창의일록』 서문에,

의리는 도적을 토벌하는 방패요 나라에 보답하는 근본이다. 그러나 그 의리로써 능히 위태롭고 망해가는 시기에 힘을 다하여, 몸이 죽더라도 뉘우치지 않는 자는 고금을 통하여 흔히 있는 일이 아니다. 명나라 원숭환(袁崇煥)이 일족의 군사로 만주의 오랑캐와 싸우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었으니, 그가 어찌 하늘의 운수가 이미 다 된 것을 몰라서 그랬겠는가. 의리로 보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운강(이강년) 선생 이(이강년)공은 이씨 왕조의 원숭환이었다. 그는 단신으로 원수 갚는 군사를 일으켜, 창을 베개 삼고 와신상담하면서 잠시도 편안할 겨를이 없었으며 적과 싸워 승전도 매우 많았지만 패한 일도 적지 않았다.

라고 하였다. 그도 성패를 떠난 역사적 전통인 구국성전(救國聖戰)을 각오하고 출정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의병사상의 원류는 역사 속에 깊이 뿌리 내려져 있다가 한말 의병전쟁으로 다시 분출된 것이다.

(3) 위정척사사상

구한말 의병전쟁의 사상적 맥락의 하나는 민족적 위기의식 속에서 배태된 위정척사사상으로서 항일 구국운동은 개항전후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척사론은 두 차례의 양요기에 상소를 올려 ‘양이’와의 척화를 주장한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 그리고 개항 이후 류인석 등 화서문인이 주도하였다. 의암 류인석은 존화양이의 견지에서 공자·주자·송시열·이항로를 동일 선상에서 파악, 최고로 존승하였을 뿐만 아니라, 단군·기자에 대해서도 조선에 처음으로 中華의 기틀을 마련해 준 인물들이라 하여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류인석은 「화(華)」를 수호하기 위한 항일운동의 기본적인 방안으로서 거의(擧義; 군사적 항쟁)와 수의(守義; 정신적 항쟁)를 병용하였는데, 여기에 힘입어 그는 효과적이면서도 장기지속적인 항쟁을 펼칠 수가 있었다. 류인석은 원래 당시 유자들의 행동방안으로 거의·거수(去守; 守義)·자정(自靖) 등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제시하면서 상호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였다. 그러나 을미의병(1895)의 정당성에 대한 논리를 펼쳐가는 과정에서 자연히 이 세 가지 가운데 ‘거의’에다 가장 큰 비중을 두게 되던 것이다. 1885년 을미사변(10. 8, 음력 8. 20)과 연이어 변복령과 단발령(12. 30, 음력 11. 15)까지 내리니 이와 때를 같이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의암(류인석)의 『소의신편』에

이번에 거의한 이유는 격문과 통문에서 먼저 위로 국모의 원수를 갚는 것을 언급하고, 다음에 단발하는 일이 불가하다는 것을 말했다.
오로지 의병으로 말하건대, 공적으로는 천하에 국가로 하여금 장차 이적·금수를 면하게 하고, 사적으로는 내 몸으로 하여금 장차 이적·금수를 면하게 함이었다.

라 하여 의병전쟁의 명분을 제시한 것이다.

2. 문경의병부대의 창설

일제가 저지른 을미사변(1895)으로 온 국민이 이를 갈고 복수의 일념으로 위국사신 창의복수(爲國捨身 倡義復讐)의 의병전쟁을 전개한 것이다. 더욱이 두 달 뒤에는 단발령까지도 공포하였다. 국모시해의 소식을 들은 운강(이강년)은 격분을 견디지 못하여 다음과 같은 시를 읊었다.

십년을 영남과 호서(湖西) 사이에 감히 몸을 두었는데
이제 어쩌다 근심과 두려움으로 병과 서로 이웃했나?
임금의 은의(恩義)에 보답함이 오늘임을 알았네
천지의 강상(綱常)을 붙듦이 오직 한 분(임금을 가리킴)에게 있도다
일의 성패는 내가 부르는 것
평생의 영화화 욕됨이 필경 뉘 탓인가?
공사(公私)의 큰 슬픔이 가장 가시기 어려워
오히려 원수의 하늘 이고서 부질없이 섶에 누웠네

그리고 땅을 치고 통분하면서 “이제 나라는 영망하였다. 억 만인의 백성이 모두 짐승이 되고 오백 년 예의의 나라가 오랑캐의 것이 되고 말았구나! 수천 년 성인의 도리가 더러운 땅이 되었구나!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사생화복(死生禍福)을 돌아볼 겨를이 없다.” 하고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평소에 친분이 있어 서로 가까이 사귀던 판서 심상훈(沈相薰)을 찾아가 국모 시해의 원수를 갚을 방책을 강구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먼저 심(심상훈) 판서에게 “상공은 임금의 인척이며 중신으로서 국변(國變)을 당하여 편안한 가운데 구차하게 자리나 지키고 있겠는가?” 라 물으면서 함께 기병할 것을 권유했다. 심(심상훈) 판서는 “나는 용렬(庸劣)한 인물이므로 능히 일을 일으키지 못한다.” 라 하고 다만 배후에서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등 미온적인 답변을 하므로 운강(이강년)이 노하여 꾸짖기를 “나라의 남다른 예우(禮遇)를 받고도 오히려 용렬한 인재임을 가지고 핑계댄단 말인가?”라 하고 돌아와 의병부대 창설을 준비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먼저 뜻이 통하는 인근 유림들과 동지들에게 기병의 뜻을 전하는 한편 군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손쉬운 대로 가산을 정리하여 돈을 얻고, 종제 이강수에게서 2백 냥을 희사 받아 군량미와 필요한 화약·총포를 장만하여 밀령점(密嶺店) 산포수 박일교에게 숨겨두도록 하였다. 특히 창검의 일부와 철여의(鐵如意; 무기의 일종으로 쇠뭉치)는 그 백부가 삭주부사로 있을 때 주조한 것이다.
운강(이강년)의 문경의병부대 창설에 앞서 경기도 지평의 이춘영(李春永)과 안승우(安承禹) 등이 의병을 일으켜(1. 13.) 원주를 거쳐 제천에 들어갔다(1. 17). 이들이 류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추대하니(2. 3) 곧 호좌창의부대(湖左倡義部隊)가 창설된 것이다.
이 시기에 운강(이강년)은 말술을 마시며 칼을 두드리고 긴 한숨을 지었는데 ‘제천의 의병이 매우 성하다.’라는 말을 전해 듣고 부대 창설에 착수한 것이다.
1896년 2월 23일(음력 1월 11일) 나이 만 36세인 운강(이강년) 선생은 집을 나서며 노모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나라가 왜적으로부터 침략을 받아 그 존망의 시각을 다투는 이때에 소자 비록 용렬하오나 왜놈들을 몰아내어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이 한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다만 어머니에게는 불효가 큼을 용서하소서.”라고 아뢰니 모친 남(남복영)씨는 그윽한 눈으로 아들 운강(이강년)의 의연하고 대견한 모습을 응시 하면서 “장하다. 네 뜻이 정녕 그렇다면 어찌 말리겠느냐. 큰 뜻을 이루는 데에 이 어미로 하여금 조금이라도 구애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였고, 곁에 있던 아내 강씨도 머리를 조아리며 “어머님 뫼시는 일은 과히 염려 마시고 부디 몸조심 하소서.” 하니 운강(이강년)은 부인을 바라보고 “고맙소. 부인을 믿고 떠나니 잘 부탁하오.”라 하고 아들 승재(이승재)와 두 명의 노복을 데리고 도태장터로 향하였다.
운강(이강년)의 문경 의병부대 편성은 유림인사들 중심의 그 문중과 산포수 그리고 농민군 등으로 처음 도태장터에서 부대를 조직·편성하였다.
이때 운강(이강년)은 기병의 목적과 그 동기를 설명하고 “나라의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여러분 모두 종군해야 합니다. 만약 명령을 어기면 목을 베겠습니다.” 라고 연설하니 이에 참여한 군중이 60여 명으로 그 명단은 대략 다음과 같다.
이강초·강병수·신기·이강수·이승재·심거벽·박일교·신경희·장복삼·신태원·장경한·황부교·김덕용·김만식·이제재·김정진·김만식·김양한·조기봉·임재진·김원한·김신윤·오태섭(이상 문경 가은인), 서종국·김병후·권복제·서상업·김인성·안재덕·윤명구(이상 농암인), 박문영·이종국(이상 충북인), 이민수·김성옥·김만원(이상 상주인), 권재중·이만홍·채상진·유시연·정재덕(이상 안동인), 심장섭(영천인), 김성직(풍천인), 배상균·한태섭 등 60여 명이었다.
그리고 의병들을 각각 총칼로 무장시켜 창의기(倡義旗)를 앞세우고 왕릉 장터로 행군하여 주둔하니 모인 의병 수가 300여 명이 되었다. 창의대장에 추대된 운강(이강년)은 의병의 편제를 정하고 군사훈련을 시작하였다. 정방척후에 박일교, 후방척후에 심거벽, 전령에 강병수, 돌격대 책임에 심장섭을 각각 임명하고 포수를 중심으로 군대 경험이 있는 유능한 인물로 하여금 총기를 다루는 요령 등 군사 조련을 가르쳤다.
2월 25일 문경의병부대는 바지골-탑재를 넘어서 농암 장터에 주둔하고 창의소를 세우니 이때 증원된 의병수는 500여 명으로 큰 부대가 되었다. 운강(이강년)은 곧 관군과 일본수비대의 습격에 대비하여 문경·마성·괴산 방면 등 사방으로 정찰을 내보냈다.

○ 안동부관찰사 김석중 처단

농암 장터에서 주둔한지 하루가 지난 후 사방으로 정탐을 나갔던 의병이 돌아와 보고 하기를 “안동부관찰사 김석중이 안동의병장 권세연의 기습을 받고 오늘 새벽 도망쳐 서울로 떠났다.” 고 하여 척후병 박일교 등으로 추격시켜 김석중과 순검 이호윤·김인담을 연풍에서 잡아왔다.
운강(이강년)은 잡혀온 이들을 운집한 군중에게 “이 자들이 적의 앞잡이로서 백성을 해쳤다.” 하여 목을 베어 매달아 군중들에게 본을 보였다. 김석중은 단발령을 집행한다 하여 강제로 상투를 자르고 이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일삼는 탐관오리였으며 특히 친일배로서 매관으로 안동부관찰사가 된 자였다.
김석중은 죽기 직전에 남길 말이 없느냐고 묻자 “제가 죽는 것은 곧 삼천금이 죽는 것과 같습니다.” 라 하며 발악하였다. 그는 말을 잘해 말 값이 천 냥이며, 또한 글을 잘해 천 냥이며, 끝으로 인물이 천 냥 어치나 된다고 말하고 효수된 것이다.

3. 문경 지역 전투

문경의병부대 창설의 소식은 문경새재 교통요지를 장악하고 있는 일본군 병참부대를 긴장시켰다. 그동안 600여 명으로 불어난 의병부대는 극히 일부 의병에게는 화승총이 지급됐으나 대부분은 창·칼 등의 무장일 뿐으로 맨주먹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은 신식 소총과 기관총까지 보유하고 청일전쟁(1894)에서 승리한 정규 전투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운강(이강년)은 먼저 가까운 문경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습격하여 무기와 탄약을 탈취하기로 방침을 세우고는, 섣불리 일본부대를 공격할 수 없으므로 먼저 안동에서 의병을 일으켜 활동 중인 권세연 의병장을 만나서 문경 병참부대를 양쪽 의병부대가 함께 힘을 합쳐 공격할 것을 의논하기 위해 아들 승재(이승재)와 참모 2명을 대동하고 갔다. 그러나 권세연 의병장으로부터 현재로서는 안동 지역의 자체 활동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어 도울 수 없다는 답변을 듣고 돌아왔다.
그리고 또한 협력하여 문경의 일본군을 치려고 류인석 호좌 의병부대에 원군을 청하였던 바 충주 호좌의병부대에서 종사가 답서를 가지고 왔는데 그 글에 ‘지금 부장(副將)한 사람에게 한 부대 군사를 보내니 협력하여 성사하기를 바란다.’ 하였기에 즉시 500명 군사를 선발하여 문경 일본군 병참부대 가까이 있는 모곡에 주둔하였다. 여기서 문경에 있는 적의 병참과의 거리는 불과 10리인데, 저들이 만약 선수를 써 오면 이편에서 제압을 당하게 될 것을 염려하였는데 종시 충주부대에서 소식이 막연한 채 날이 밝으려 했다.
그리하여 작전상 수비하기가 용이한 석현(石峴)의 산성인 고모성(姑母城; 麻姑城)으로 이진하여 원병이 오기를 기다렸다(2. 26, 음력 1. 14).

○ 고모성 전투의 시련

2월 27일(음력 1. 15) 정월 보름 이른 아침에 적이 갑자기 고모성으로 쳐들어오니, 새로 모집한 군사들이 화약과 탄환도 갖추지 못한 채, 갑자기 강한 적을 만나 오전 8시부터 오후 2시까지 힘을 다해 싸웠으나, 막아내지 못하고 마침내 성이 함락되고 말았다. 적이 불을 놓아 성문과 마을이 전부 잿더미가 되고, 포수 심거벽 등 많은 의병은 적의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문경 부대의 초전은 참패로 끝난 것이다.
운강(이강년)은 잔여 의병을 이끌고 오정산으로 후퇴하여 점검해보니 전사자 31명이고 도망자가 과반수였으며, 부상자가 그 태반이나 되었고 성한 장졸이 100여 명이었다.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고 온 정재덕의 보고에 의하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
“전사자의 수는 31명인데 그들 모두가 적탄에 명중되어 숨졌고 일부는 포탄에 맞아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으며 성곽은 무너지고 시체들은 불에 그을려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일본군의 사상자도 꽤 많은 듯하였으나 시신을 모두 거두어 가고 없어 그 수를 헤아리지 못했다.”고 전했다.
초전에 참패한 운강(이강년)은 재기한 안동 권세연 대장을 재차 방문하여(3. 9∼12) 작전계획을 의논하였다. 고군으로 전세가 불리함을 의논한 후 제천 류인석 부대로 합진키로 한 것이다. 안동 의병부대 기율이 아직 잡히지 않아 협력을 구하기가 어려워 합진을 결심한 것이다.

초기 문경 의병부대 활동도

4. 호좌의병부대와 합진

운강(이강년) 문경 의병부대는 제천으로 옮긴 호좌의병부대와 서신으로 연락을 취하다가 연합작전의 필요성과 문경 고모성 전투의 패인 등 이유로 합진키로 한 것이다. 제천에 오기 전의 영월의 류인석 창의대장은 전 국민이 봉기할 것을 촉구하는 ‘격고팔역(檄告八域)’이란 격문을, 그리고 충주성을 점령한 후에는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을 각기 포고하여 유림과 관리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8도에 띄운 격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아! 우리 팔도 동포들은, 차마 망해 가는 이 나라를 내버려 두시렵니까. 제 할아비 제 아비가 5백 년 遺民이 아닌 바 아니거늘, 내 나라 내 집을 위해 어찌 한 두 사람의 義士도 없단 말입니까. 참혹하고도 슬프구료, 운이라 할까 명이라 할까.
거룩한 우리 조정은 개국한 처음부터 先王의 법을 준수하려, 온 천하가 다 小中華라 일컫거니와, 민속은 唐虞 三代에 견줄 만하고, 儒術은 程子(정자)·朱子(주희) 여러 어진 이를 스승 삼았기로, 비록 무식한 사람이라도 모두 예의를 숭상하여, 임금이 위급하게 되면, 반드시 쫓아가 구원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외다. 그래서 옛날 임진왜란(1592)에는 창의한 선비가 한이 없었고, 병자호란(1636)에는 순절한 신하가 많았으며, 저 중국은 되놈의 천지가 되었건만, 우리나라만은 깨끗하였으니, 바다 밖의 조그마한 지역이지만 족히 싸인 陰 속에 한가닥 陽의 구실을 하였던 것이외다.
아! 원통하외다. 뉘 알았으랴, 외국과 통상한다는 꾀가, 실로 망국의 근본이 될 것을. 문을 열고 도적을 받아들이며 소위 世臣이란 것들은 달갑게 왜적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데, 목숨을 바쳐, 仁을 이루려는 이 선비들은 남의 노예가 되는 수치를 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송나라는 금나라의 꾀를 측량하지 못하였고, 노나라에 있는 周禮는 보전키 어려웠다. 미약한 시골 백성의 신분으로 한갖 나라를 근심하는 한탄만 간절할 따름이었는데, 마침내 갑오년(1894)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입니다. 宗廟社稷은 일발의 위기에 부닥쳤으나 누가 李若水(이약수)의 抱主가 될 수 있으며 주현이 모두 육식을 하고 있으니 顔眞卿(안진경)의 모병(안록산 난 때 안진경이 의병을 일으켰음)을 볼 수 있겠는가. 옛날 고구려가 下句麗로 된 것도 오히려 수치라 이르는데, 하물며 지금 당당한 한 나라로서 小日本이 된다면 얼마나 서러운 일이겠습니까.
아! 저 왜놈들의 소위 신의나 법리는 말할 것조차 없거니와, 오직 저 놈들의 頂踵 毛髮이 뉘를 힘입어 살아왔습니까. 원통함을 어찌하리. 國母의 원수를 생각하면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한 일이 더욱 심하여 임금께서 또 머리를 깎으시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衣冠을 찢긴 나머지 또 이런 망극한 화를 만났으매, 천지가 번복되어 우리 고유의 이성을 보전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 부모에게 받은 몸을 금수로 만드니 무슨 일이며, 우리 부모에게 받은 머리털을 풀 베듯이 베어버리니 이 무슨 변고입니까. 요·순·우·탕의 성왕의 전함도 금일에 이르러 끊어져 버리고 공·맹·정·주(공자·맹자·정자·주희)의 성현의 맥도 다시는 지킬 사람이 없다.
장안의 부로(父老)들은 뒤늦게 한궁(漢宮)의 의례를 다투어 생각하고, 신정의 호걸들은 공연히 초수(포로)의 울음(문천상의 시화 또는 망명객들의 고향을 생각하는 슬픔)을 지었던 것이다.
군신부자가 마땅히 배성일전(背城一戰)의 마음을 갖는다면 천지 귀신인들 어찌 회양(回陽)의 이치가 없겠는가.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그 오랑캐가 되었으리라(공자의 말)고 했는데 요치(淖齒)를 주살하면 누가 과연 편들 수 있겠는가.
무릇 우리 각도 충의의 인사들은 모두가 임금의 培陽을 받은 몸이니 환난을 회피하기란 죽음보다 더 괴로우며 멸망을 앉아서 기다릴진대 싸워 보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 땅은 비록 만분의 일 밖에 되지 않지만 사람은 백배의 기운을 더할 수도 있습니다. 하늘 아래 함께 살 수 없으매 더욱 薪膽의 생각이 간절하고, 때는 자못 위태하여 魚肉의 화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들어보지 못했소. 오랑캐로 변한 놈이 어떻게 세상에 설 수 있겠습니까. 공으로 보나 사로 보나 살아날 가망이 만무하니, 화가 되건 복이 되건 죽을 死字 하나로 지표를 삼을 따름입니다.
말 피를 입에 바르고 함께 맹세하매 成敗와 利鈍은 예측할 바 아니오, 의리를 판단해서 이 길을 취하매 경중과 대소가 여기서 구분되는 것이니, 대중의 마음이 다 쏠리는데 어찌 온갖 신령의 보호가 없겠는가. 나라 운수가 다시 열리어 장차 온 누리가 길이 맑아짐을 볼 것입니다. 어진 이는 당적할 자 없다는 말을 의심하지 마소서. 군사의 행동을 무엇 때문에 머뭇거립니까.
이에 감히 먼저 의병을 일으키고서 마침내 이 뜻을 세상에 포고하느니, 위로 公卿에서 아래로 서민에까지, 어느 누가 애통하고 절박한 뜻이 없겠는가. 이야말로 위급 존망의 계절이라, 각기 짚자리에 잠자고 창을 베개하며, 또한 끓는 물속이나 불 속이라도 뛰어 들어, 온 누리가 안정되게 하여, 일월이 다시 밝아지면 어찌 한 나라에 대한 공로만이겠습니까. 실로 만세에 말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글월을 보내어 타일렀는데도, 혹시 영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면, 바로 곧 역적의 무리와 같이 보아 단연히 군사를 불러 먼저 토벌할 것이니, 각기 가슴 속에 새기고, 배꼽 씹는 뉘우침이 없게 하여, 부디 성의를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펴기 바랍니다.

을미 12월 아무날
충청도 제천 의병장 류인석은 삼가 격서를 보냄

충주성에 입성한 후 곳곳에서 의병이 운집하여 류인석 의병 부대는 더욱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나 수안보와 가흥에 있던 일본군이 3개 중대를 충주성 반격에 동원했고 또 관군도 합세하여 반격해 오니 충주성 공방전은 15일간 치열하게 계속되었다. 이 공방전은 전기 의병전쟁 절정의 모습이기도 했는데 그 동안 중군장 이춘영(李春永)이 수안보에 나아가 싸우다가 전사하고, 또 대장소의 참모 주용규(朱庸奎)도 전사하는 등 전세가 불리하여 드디어 충주성에서 퇴각하여 다시 제천에 유진하게 되었다(3. 5, 음력 1. 22).
운강(이강년) 문경 의병부대는 300여 명을 이끌고 호계 선암쪽으로 해서 산북 회룡리-백운암-적성-사인암을 거쳐서 제천으로 들어가 류인석 호좌의병부대와 연합하니 고모성을 떠난 지 보름이나 지난 1896년 3월 12(음력 1. 29)일이었다.

○ 호좌의병부대 유격장

제천 호좌의병부대에 온 운강(이강년)은 유격장에 임명되었고(3. 14), 류인석의 막료로서의 예를 올렸다. 이때부터 사제의 의를 맺어 일생 동안 의암(류인석)을 스승으로 섬기게 되었다. 운강(이강년)의 학문적 성숙을 비롯한 ‘존왕양이론’의 이론적 기반이 이 시기에 이룩된 것이다.
문경 부대가 도착한 것을 비롯하여 권호선(權灝善)의 영춘 부대, 한동직(韓東直)·이인영(李麟榮)의 원주 부대, 이명로(李明魯)의 횡성 부대가 모여 충주성 실함 이후 다시 1만여 명의 대부대가 되었다. 이로부터 5월 23일 제천성의 실함까지 3개월은 을미의병(1895)전쟁 가운데 가장 활동이 왕성하였던 시기라 할 수 있다.
류인석 호좌의병부대는 영월과 제천에서 그 진용을 다음과 같이 개편하였다.

大將: 柳麟錫(류인석)
中軍將: 李春永(이영춘)[李敬器(이경기)·安承禹(안승우)·李完夏(이완하)·元容錫(원용석)·李元厦(이원하)·李元永(이원영)]
中軍從事: 吳明春(오명춘)
中軍軍師: 趙駿敎(조준교) 中軍參將: 韓東直(한동식)
中軍參謀: 金思斗(김사두) 中軍亞將: 李元厦(이원하)
中軍參伍: 朴貞洙(박정수)
前軍將: 安承禹(홍승우)[洪大植(홍대식)·鄭雲慶(정운경)] 前軍中軍: 李正儀(이정의)
後軍將: 申芝秀(신지수)[兪致慶(유치경)]
先鋒將: 金伯善(김백선)[金龍俊(김용준)] 左軍將: 禹冀鼎(우기정)[鄭遠謨(정원모)]
右軍將: 安成海(안성해)[李奎常(이규상)·이강년] 右軍中軍: 尹永勳(윤영훈)
召募將: 徐相烈(서상렬)·李範稷(이범직)·鄭寅卨(정인설) 召幕中軍: 金東觀(김동규)·南泌遠(남필원)
遊擊將: 李康䄵(이강년)
遊擊中軍: 尹基榮(윤기영) 操練將: 安成海(안성해)
奮義將: 李熙斗(이희두) 左翼將: 禹弼圭(우필규)
右翼將: 尹聖鎬(윤성호) 守城中軍: 洪祐範(홍우범)
別陣將: 元友珪(원우규) 左先鋒: 金龍俊(김용준)
鎭東將: 李弼熙(이필희)
捍禦將: 李馨九(이형구) 悍禦中軍: 朴斗河(박두하)
運糧監: 李弼根(이필근)[崔炳軾(최병식)·李範稷(이범직)]
軍器監: 禹憲榮(우헌영)[柳海鵬(류해붕)]
杖義將: 李元厦(이원하) 仗義中軍: 張益煥(장익환)
仗義先鋒將: 金炳壽(김병수)
前啣守令: 李鎬承(이호승)
參謀: 李肇承(이조승)·鄭彦朝(정언조)·尹鼎燮(윤정섭)·權珌洙(권필수)·朱庸奎(주용규)·李直應(이직응)·朴胃淳(박위순)·宋◉(木+奭)(송석)·朴用夏(박용하)
從事: 趙奭增(조석증)·朱永燮(주영섭)·李世熙(이세희)·洪思九(홍사구)·朴宗文(박종문)·姜蘭秀(강난수)·鄭翊(정익)
總裁庶務: 柳洪錫(류홍석)·鄭源(정원)·沈英燮(심영섭)·洪璇杓(홍선표)·元容正(원용정)·元容錫(원용석)·鄭華鎔(정화용)·權寅洙(권인수)·李起振(이기진)·兪致三(유치삼)·李福漢(이복한)·金龍浩(김용호)·金華桓(김화환)·李炳善(이병선)·裵是鋼(배시강)·羅時雲(나시운)
掌書記: 李秉會(이병회) 掌財用: 金永祿(김영록)
掌賓客: 張忠植(장충식) 可客所 從事: 安公淑(안공숙)·安愼模(안신모)
義僧將: 武總(무총)
永春守城將: 申肯休(신긍휴)·元道常(원도상)
丹陽守城將: 金炳璜(김병황, 단양군수)·沈義慶(심의경)
淸風守城將: 李建龍(이건룡, 청풍군수)
堤川守城將: 李敏政(이민정) 忠州守城將: 元道常(원도상)
原州守城將: 金炳大(김병대)[洪祐範(홍우범)·이병화·具哲祖(구철조)]
寧越守城將: 朴齋昉(박재방) 砥平守城將: 安種燁(안종화)
旌善守城將: 李福永(이복영)

3월 19일(음력 2. 6) 운강(이강년)은 유격장으로 6초(哨: 1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군장 홍대석과 함께 수안보의 적을 토벌하게 되었다. 새재(조령)는 천혜의 요새로서 일본 침략의 거점인 서울과 부산을 남(문경)·북(충주)으로 연결하는 내륙 교통의 요지이며 수안보는 그 북쪽 기점이다. 그러므로 호좌 의병부대는 시각을 다투어 수안보의 적을 공격하여야 했다.
호좌의병부대는 2장수가 군사를 거느리고 수안보 남산에 올라가서 일제히 함성을 올리며 적진지를 향하여 쳐들어갔다.
그런데 이 수안보는 적 일본 측에서도 일찍부터 병참을 설치하고 있었으며, 또 지난달에는 호좌의병부대의 중군장 이춘영이 충주성의 방어태세를 굳건히 하는 한 대책으로 이곳을 공격하다가 전사하기도 하였던 곳이다. 또 적측에서도 우리 의병부대의 활동이 활발하여지자 병력을 증강하여 공격과 방어의 거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적의 방어태세는 상당히 견고하였던 곳이다.
의병부대의 공격을 받게 되자 적이 맹렬한 반격의 탄환을 퍼부었기 때문에, 용감한 지휘관 운강(이강년)이 지휘하는 의병의 맹공격으로도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피아의 총격전이 계속되었지만 소득은 적병 수 명의 사살이 있었을 뿐 더 진출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의병부대에서는 산 아래 덕주 남문으로 내려가 유진하고 사방을 정찰하며 공격의 기회를 노렸지만 승첩의 계산은 서지 않고 군량의 수송 등으로 불편만 증대되기 때문에 일단 서창 방면으로 퇴군하였다.
퇴군도중 김필운이 중의 복장을 한 일본군 밀정을 붙잡아 심문하니 일본군으로 충청도·경상도 일원의 상세한 지도가 나와 현장에서 참수하였다.

○ 조령 전투에서 다량의 무기 획득

3월 26일(음력 2. 13) 운강(이강년)은 의암 류인석과 상의한 뒤 새재에 있는 적의 병참기지를 습격키로 하고 중군장 윤기영과 함께 9초(9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새재로 진군했다.
이때 경암 서상렬은 의병을 이끌고 함창 태봉에 있는 적의 병참기지를 공격하고 있었는데 문경 새재에 있는 일본군의 병참에서 계속 보급과 원군이 오고 있어 고전하는 서상렬을 돕기 위하여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아는 장수를 보내어 새재의 길목을 막아 일본군이 서로 왕래하며 구원하지 못하게 하는 측면과 지난달 고모성 전투에서 패한 분을 설욕하는 두 가지의 큰 의미가 있는 출병이었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문경 평천으로 진군, 새재에 당도하여 군기고를 부수고, 화약·탄환·유황·조총 등 62짐을 꺼내어 가지고 동원촌으로 돌아오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윤기영이 오지 않았다.
이때 윤기영은 도리어 일본군에게 포위되어 있었으므로 운강(이강년)은 곧 윤기서에게 군사 200을 주어 구출케 했다. 그러나 현장에 도착한 윤기서는 겁에 질려 공격을 못하고 있어 운강(이강년)이 적의 배후를 직접 공격하여 무사히 구출, 동원촌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윤기서로 인해 윤기영의 군사가 많이 죽거나 다쳤으므로 윤기서를 처벌하려고 하였으나 일단 용서하고 엄중 경고하여 의병의 기강을 세웠다. 이 싸움에서 원주 포수 이석길이 상처를 입고 죽으므로 덕주 사람을 시켜 매장케 하였다. 그러나 토적 임세연 등의 기습으로 황장으로 퇴군하였다.
그로부터 달포를 머물러 있는 동안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으나 떼어보지 않고 불태웠다.
그리고 군사 5백 명을 거느리고 적성에 주둔하여 있는 예천 부장(禮泉 副將) 장문근(張文根)과 연락하여 공동 작전을 펴려고 하였지만 역시 의견의 합치를 보지 못했다. 이 동안 서상렬 소모장 등이 지휘하는 영남 의병은 태봉에서 또 패전을 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나가 함께 싸울 수 없는 형편을 깊이 탄식했다.

운강(이강년) 부대의 수안보·조령 지역 활동도

여기서 운강(이강년)은 군사를 거느리고 새재 아래로 왕래하면서 출몰하는 적을 공격하여 그 도량(跳梁)을 방지하는 한편, 종군한 사람들의 가족들을 위문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사기를 고무하였다.
그 후로 군사 7백을 거느리고 영산곡·구룡소 등지로 출발, 수안보의 일본군을 방어하다가 관음원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이 영산곡과 개음 지역을 습격, 양민을 학살하고 마을에 불을 놓으매 운강(이강년)은 급히 평천으로 진군하여 적을 공격·당포까지 추격하니 적은 문경읍 일본군 병참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적을 공격할 수가 없어 뇌암점을 거쳐 제천으로 환군하였다.
그는 4월 초에는 다시 전군장 홍대석과 약속하여, 홍대석은 안보의 적을 맡아 공격하고, 운강(이강년)은 새재의 요해처를 나가 지키기로 하였는데, 홍대석이 서창의 수비를 핑계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여기서 운강(이강년)은 단독으로라도 기어이 안보의 적 병참을 함몰시키려고 하여 진군하였지만, 중군 윤기영이 문경에서 적의 급습을 만나 중과부적으로 패전하니, 운강(이강년)은 부득이 군사를 수습하여 평천을 출발하여 동창을 지나 제천읍으로 환군하였다. 제천 본진의 수비도 급한 시기였기 때문에 다시 새재 진공의 계획은 겨를이 없게 되었다.
운강(이강년)과 홍대석이 수안보로부터 돌아와 류인석 부대장에게 보고 하기를,

다만 한 떼의 적만 잡고, 적의 소굴을 소탕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죄를 내려서 군법을 엄숙히 하소서.

라고 하였다.
류인석 대장은 일찍이 말하기를 ‘유격장의 마음은 신명(神明)도 알아준다.’고 하였던 것이다.
전군장 안승우(安承禹)는 동창에서 돌아온 운강(이강년)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며 함께 말을 점고하고 또 진법을 익히며 무예를 가르쳤는데, 대열과 절차가 삼엄하여 볼만 하였다고 한다.

5. 제천 전투

제천 호좌의병부대 본진에서는 후방 대책으로 단양·청풍·원주·영월·평창·정선·지평 등지에 수성장을 임명 배치하여 해당 읍성을 장악·관리하고 군사의 소모와 군수물자의 공급을 담당하게 하였다. 또 여러 장수들을 적재적소로 각 요지에 배치하여 수비 또는 진격의 태세를 갖추기도 하였는데, 3월 중순∼4월 중순경(음 2월 상순∼3월 상순경)에 각처 파수 상황의 대략을 보면 아래와 같다.

전군장 洪大錫(홍대석): 嗚湖峙
유격장 李康䄵(이강년): 東倉
좌익장 禹弼圭(우필규): 波浪嶺
참장 韓東直(한동직): 端亭
좌군장 禹冀鼎(우기정): 朴達嶺
후군장 申芝秀(신지수): 江寧
우군장 安成海(안성해): 簇洞
소모장 李範稙(이범직): 江寧
별장 元友珪(원우규): 鳥湖
파수장 이향구: 楡峴

남한산성의 의병부대를 격파한(3. 21) 친위대와 강화 진위대로 편성된 경군(京軍)이 장기렴(張基濂) 참령(參領)의 지휘 아래 충주를 거쳐, 4월 23일(음력 3. 11) 황강에 도착하였다. 이들 경군은 남한산성에서 패퇴한 경기도 지역의 의병이 경상도 지방으로 남하하자, 이를 추격하여 충주 지역에 이르러 가흥 병참의 일본군과 합세하였다.
승전한 기세를 몰아 내려온 장기렴 관군은 충주 지방에 들어와서 우선 아래와 같은 고시문을 제천 의병부대에 전달하여 왔다.

의병의 칭호는 예로부터 수없이 많지만 오늘의 의병 같은 것은 아직 없었다. 어째서 그러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이 관장에까지 미치고 노략하는 버릇이 작은 민가에까지 이른다. 하는 일이 이러하니 의병이라는 그 이름은 어디로 간 것인가.
여기서 본 參領은 역적 토벌하라는 왕명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에 이르렀다. 저도 알고 나도 아니 百戰百勝하는 계책이 있고, 奇術로 할 수도 있고 正道로 할 수도 있으니 千變萬化하는 도를 겸하였다. 너희들 烏合之衆과 개미 떼 같은 무리들이야 원래 한 번 북쳐서 없이 할 것이지만, 조용히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람 상함을 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더구나 너희들은 모두 글을 읽는 선비로서 세상 변화하는 데에 대처하는 길이 어둡기 때문에, 이번 일이 義가 되는 줄만을 알고 이 의거가 도리어 역적이 될 줄은 생각지 못하는 것이니, 이래서 先諭라는 恩命을 군대의 征討에 앞서 하는 것이다. 지금 바로 불의에 방비 없는 것을 공격하여 옥과 돌이 함께 불타게 할 수는 없는 일이므로 강 왼편에 진을 멈추고 이렇게 고시하는 것이다. 만일 왕명에 복종하는 것이 순리가 되는 것임을 깨달아 창을 거꾸로 끌고 와서 맞이한다면 의거의 처음 마음을 표창할 것이니, 시작도 의요 나중도 의가 되는 것으로서, 혹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어리석음을 고집하여 깨닫지 못하고 王師에 항거한다면 이것은 제 스스로 의의 이름을 무너뜨리고 화의 그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조금도 용서가 없을 것이다. 順逆을 판가름 하는 곳에 바로 사람이 되고 귀신이 되고 하는 것이다. 엄하게 고시하는 바이니 잘 알아서 할 줄 안다.

건양 원년 4월 25일 舊曆 3월 13일
王師主陣所 참령 장기렴

이에 대하여 류인석 대장은 다음과 같이 회조문(回照文)을 보냈다.

아아, 이번 거의한 이유를 우리나라 신민으로서야 누가 그것을 모르겠는가. 대저 復讐雪恥하는 일과 존왕양이의 의리는 이것이 만고에 바꿀 수 없는 원칙이다. 근일 十賊의 무리는 안에서 화를 빚어내고 일본의 도적은 밖에서 트집을 만들어 내어 국모를 시해하고 군부를 욕보였으나, 그렇다면 이 천지에 사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피눈물을 머금고 복수설치하는 사업을 펴지 않을 자가 있겠는가. 선왕의 법복을 헐고 선생의 바른 길을 어지럽게 한다면 유학자의 옷을 입고 유학자의 갓을 쓴 자라면 누군들 절치부심해서 존화양이의 의를 엄격히 지킬 바를 생각지 않겠는가.
그러나 소위 喬木世家와 柱石之臣들은 한 사람도 몸을 깨끗이 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성토하는 조치를 취한 자가 있다는 것을 들은 일이 없다. 장차 무슨 말로 천하만세에 전하려고 하느냐. 우리들은 이 눈으로 천륜이 없어지고, 천지가 번복하는 큰 화를 忠憤이 격동함을 걷잡을 수가 없어서 복수 保形의 기를 세우고 장사와 군사를 모집하여 사생을 돌보지 않고 성패를 계산하지 않으며 장차 큰 의리를 천하에 피력하는 것이다. 이야말로 名正言順한 일이니 지혜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그 이유를 알 수 있는 일인데, 참령의 고시가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는가.
소위 국가의 장리(관찰사 군수)를 죽였다고 했는데 이들은 난적의 당여가 되어 다시는 국가의 관리가 될 수 없으니 이들을 죽여서 先討後聞의 의를 밝힌 것이 무엇이 잘못이며, 공화(국가의 물자)를 빼앗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왜놈의 군수품과 군량이 되어 다시는 국가의 물화가 될 수 없으니 이것을 뺏어 도적을 치는 밑천을 삼았으니 무엇의 의에 해로우냐.
또 소위 處變에 어둡다고 했는데 이것은 더욱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다. 그래 왜놈을 다 제거했으면 얽히고설킨 역적놈들을 다 없앴으며 선왕의 옳은 제도를 다 회복했으며 선 성인의 대도를 다 밝혔느냐. 심지어 성상께서는 播遷하여 아직 대궐로 還御하시지 못했으며, 국모의 因山은 달이 지나고 해가 넘도록 아직 모시지 못하였다. 백관이 보망하여 숨고 조정이 텅 비어 있으니 종묘사직의 우환이 앞으로 어디에까지 이를지 모르는 일이다.
형편이 이런 데도 오늘은 전일과 다르다고 하면서 우리들을 어리석음을 고집하고 깨닫지 못한다 하니 이것이 옳은가. 우리들의 주장하는 것은 이것이 다만 의리뿐인 것으로서 성패나 이해는 처음부터 계산한 것이 아닌즉, 사람과 귀신의 설명으로 말할 바가 아니며, 화와 복의 권유로 움직일 바가 아니다. 順理와 逆理의 분간 자연 후세에 가서 공정한 의논이 있을 것이다. 이것을 어찌 지금 입으로 말하여 정해질 것인가. 참령은 원래 대대로 將臣의 집안으로서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아 왔으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으며, 中華를 높이고 夷狄을 물리쳐서 선왕의 덕에 보답하고, 선대의 사업을 계승할 것을 생각하여야 안으로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없고 밖으로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것이다. 말은 여기에 그치니 잘 알아서 할 줄 믿는다.

병신년 3월 15일
호좌의병장 제천에서

의병과 관군 사이에 서로의 주장을 담은 서신이 1개월간 왕래하는 동안에 청풍 일대의 한강 연안에서 산발적인 충돌은 있었으나 큰 전투는 없이 대치 상태에 있었다.
5월 23일 관군이 남한강을 건너면서 총 공세를 위하여 황석촌(북창 서쪽 2.5km)으로 진격하였다. 이때 운강(이강년)이 북창 방어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나 전날(22)에 원규상 대신 새로이 우군장에 임명되어 제천 본진에 출두 중이었다. 급보를 받은 운강(이강년)은 증원군을 이끌고 이날 밤중에 북창진으로 급히 달려가 적의 진출로(황석촌-북창진 사이)에 포진하였다.
그러나 관군은 야음을 이용하여 24일 날이 밝자 대덕산을 끼고 북창진 측방에서 공격하여 허를 찔린 의병부대는 격전 끝에 당해내지 못하고 북으로 후퇴하여 고교(高橋)에 진을 쳤다.
제천 본진의 류인석은 사태의 심각함을 깨닫고, 총독[曺達承(조달승)] 등을 고교로 급파하여 운강(이강년)을 지원하도록 하고, 제천의 방어 태세를 더욱 가다듬었다. 그러나, 관군은 북창진을 돌파한 뒤로, 북창진∼제천간의 도로 차단에 주력하고 있는 운강(이강년) 부대와는 접전을 피하여, 우회하면서 제천읍성 의병 주둔처로 접근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이 정보를 즉시 제천 본진에 알리는 동시에 인근에 있는 홍대석에게 알려 병력을 즉시 서창으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부장들과 술을 마시고 있던 홍대석은 말을 듣지 않아 관군의 주력이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제천으로 진격할 수가 있었다. 홍대석이 술을 마신다는 보고를 접한 운강(이강년)은 즉시 달려가 꾸짖었으나 그때는 이미 관군이 지나간 뒤였고 동시에 북창 동쪽에 있던 운강(이강년) 부대에 관군들의 공격이 시작된 후였다.
5월 25일에 중군 안승우가 새로 쌓은 남산성에서 싸움을 독려하고 청국군사 여국안(呂國安) 등이 앞에서 적 32명을 사살 하니 고장림(古場林)으로 쳐들어오던 관군이 숲밖으로 물러가기 세 차례나 거듭하였다. 나중에는 장기렴이 자기 군사 4~5명을 베어죽이고 독려하니 관군이 다시 나오고 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의병부대 장병들이 좌우협공으로 관군이 다시 달아나니 성중에서는 환호성이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때 갑자기 바람이 크게 불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 하였다. 돌연한 일기의 변화로 의병은 행동에 제약을 받게 되었고, 의병의 주무기인 화승총을 발사하게 하는 불심지가 빗물에 젖어 사격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관군은 빗속에서도 사격이 가능한 선식 소총으로 무장되어 있었으므로, 이러한 기상 조건은 전세를 급전시키는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의병은 악천후 속에서도 백병전을 감행하는 전상을 보였으나 결국 중군장 안승우와 그 종사 홍사구가 전사하는 등 많은 희생을 내고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때 안승우가 적탄에 맞아 사로잡히자 홍사구는 혼자서 스승의 곁에 남아 호위하니 안승우는 “나는 장령으로 죽음을 면할 수 없다. 네가 나와 같이 죽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속히 달아나 후일을 기약하라.”고 권했으나 “종사가 되어서 주장이 화를 입는 것을 보고 혼자 살 수 없으며, 제자가 스승이 화를 입는 것을 어찌 혼자서 살 수 있겠습니까.” 하면서 끝까지 적과 싸우다가 관군들에게 총대로 맞아서 죽었다고 한다. 이 때에 장기렴의 관군도 500여 명의 전사자를 내는 큰 피해를 입었다.
제천에서 패전한 후 의암 류인석은 군사를 위로하여 말하기를 “모든 계획은 힘대로 다 했지만, 그래도 패하는 것은 천운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그리고 전군장 정운경, 좌군장 이희두, 우군중군 윤영훈, 별영장 이인영, 참진장 한동직이 모두 의암(류인석)을 뵈었으나, 유독 중군장 안승우와 우군장 이강년만이 오지 않았다. 의암(류인석)이 몹시 걱정하며 물으니, 옆에 있던 누군가가 “운강(이강년)이 나가 싸울 제 호령하기를 ‘오늘 싸움에 먼저 후퇴하는 자는 내 칼에 죽을 줄 알라.’ 하였으니, 안승우와 이강년은 필경 먼저 물러서지는 않았을 것이고 아마도 두 장수는 혼자 남아 적에게 해를 당했을 것이다.”고 하였다.
다음날(5. 26, 음 4. 14) 운강(이강년)의 첩보가 와서 비로소 그가 화를 면한 줄 알았다. 운강(이강년)이 기병 수십 명을 거느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길가에 서 있기로, 장졸들이 모두 달려들어 붙들고 울면서 “우리가 이제 다시 만나게 된 것은 천운이다.” 하니 운강(이강년)이 말하기를 “몸뚱이만은 다행히 화를 면했지만, 패한 장사가 산들 무슨 낯이냐.” 하였다. 또한 제천에서 패전하여 단양으로 퇴각한 의병부대는 주민들이 소를 잡아 음식을 장만하여 내놓자 운강(이강년)은 이를 물리치고 말하기를 “장수와 부하장병을 잃었는데 고기와 술이 목으로 넘어가겠는가?”고 하자 여러 군사들이 차마 먹지 못하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이상의 운강(이강년) 문경의병부대의 전기 의병항전 3회의 전투에서 다른 의병부대도 그러하듯이 큰 전과를 올리지 못하였다. 대등한 전투가 아니면 패배한 싸움이었다. 수안보와 남산 전투만 상등한 전투였고 문경 고모성 전투나 제천 전투는 패한 싸움이었다. 의병 전쟁의 전술은 대체로 기습·매복이었는데, 그것은 지형을 이용하기가 쉽고 군사들의 취사 방법이나 야영장비가 개발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근 민가에서의 지공(支供)과 추위나 우천시 분산하여 움직이기 편리한 마을 뒷산 祠堂이나 寺刹을 이용하기 편리하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의병진에서 보유하고 있는 무기는 기본 병기인 화승총(火繩銃)이었다. 화승총은 화승에 불을 붙여 들고 다른 한손으로 철환과 화약을 비벼 넣어 사격해야 했기 때문에, 비가 올 때는 쓸 수 없고 더욱이 유효 사거리는 불과 20보 정도였던 구식 화기였다. 이 무기로 유효 사거리 약 400야드(360m)에 매분 8∼10발씩 사격할 수 있는 3.8식 소총을 기본 화기로 해서 무장한 관군이나 일본군과 대항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6. 문경 의병부대의 해산

5월 27일 제천 남산 방어선이 무너진 후 각 부대는 모두 학교(鶴橋)로 집결했다가 다시 단양으로 이동하여 부대를 수습한 후 죽령∼풍기∼소백산∼영춘∼단양∼청풍∼충주, 그리고 원주 강천에 유진하였다(6. 10, 음 4. 29). 단양에 퇴진한 의병부대는 다음과 같이 부대편성을 다시 하였다.

중군장 李完夏(이완하)
별동대 徐相烈(서상렬)
전군장 鄭雲慶(정운경)
별동대 李康䄵(이강년)
좌군장 李熙斗(이희두)
별동대 李麟榮(이인영)
우군장 尹永勳(윤영훈)
별동대 朴貞洙(박정수)
후군장 申芝秀(신지수)
별동대 韓東直(한동직)

아관파천(1896) 이후 정부가 해산 선유위원을 보내어 의병부대의 해산을 여러 차례 권고하여 왔다. 그러나 류인석은 아관파천의 해제, 명성황후의 인산의 거행, 친일 간신배의 축출을 요구하며 거절하였다.
그리고 영월·정선·평창을 거쳐 7월 11일 대화(大和)에 이르러 류인석은 서상렬·운강(이강년)과 함께 평안도 방면으로 갈 것을 결정하고 관서지방 이동의 포고문을 발표하였다. 서상렬 부대를 전군, 운강(이강년) 부대를 후군으로 한 서행장정의 행렬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운강(이강년)의 후군 부대의 진군은 관군에 의해 차단되었고, 서상렬의 전군 부대는 낭천(狼川)에서 대패하여 서상렬이 전사하는 참상을 겪어야 했다.
류인석의 호좌의병부대는 8월 23일 압록 강변 초산에 도착할 때까지 곳곳에서 처절한 혈전을 겪어야 했으며 강계에서는 이범직이 전사하는 피나는 희생을 치렀다. 당시 류인석(1만 냥)과 운강(이강년) 등 의병장들에게 현상금이 붙어 있었다.

차마 끝내 여러분에게 희망을 포기할 수 없으므로 다시 한 번 피를 뿌려 글을 써서 드리는 바이니 바라건대 여러분은 지난 역사를 거울삼아 마음을 고쳐서 내 몸보다 임금을 먼저 생각하고 내 집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하라.

위의 글은 류인석이 압록강을 건너기 앞서 관리에게 보낸 글의 한 구절이다. 모든 의병장이 해산하였는데도 의암 류인석은 끝내 굴하지 않고 만주로 건너가 재기를 도모했던 것이다.
운강(이강년)은 후군 부대를 이끌고 후미에서 관군의 추격을 막게 하는 가운데 영월에 이르렀는데, 형세가 더 전진할 수 없으므로 8월(음 7월)에 다시 소백산중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해산시켰다. 그동안 봉기한 전기의병의 항쟁도 점차 누그러졌으나 그 중 어떤 부대는 9, 10월까지 항쟁을 계속하기도 하였다.

류인석·운강(이강년) 부대 이동도

7. 해병 후의 은신생활

운강(이강년)은 의병부대를 해산하고 갈 곳 없는 군사 수십 명과 가족을 데리고 깊은 산속인 소백산중 단양 금채동(金采洞)으로 들어가 은신생활을 시작하였다. 부대 해산 당시의 모습을 이조승(李肇承)의 『서행일기(西行日記)』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6월 27일(음, 양 8. 6)… 李(名 建龍(이건룡), 同鄕人으로 의병도 같이하고 또 배를 같이 타고 상경 중)의 말에 의하면 右軍將 李康䄵(이강년)은 지금 청풍 綠江 近峽에 있는데 모든 군사는 해산시켜 보냈고 갈 곳이 없는 數十餘人만 데리고 깊은 산으로 들어가 가을까지 기다리려고 하는데 먹을 것이 없어 걱정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정운경(鄭雲慶)의 ‘제운강이공강년문(祭雲崗李公康秊文)’에는,

오호통재라, 제가 공과는 비록 죽마고우는 아니지만 다행히 만나 뵈올 기회를 얻어 평소의 소원을 풀었고 한 번 뵙고도 열렬한 대장부이심을 알았습니다. 지난번 병신년(1896) 의병 때에는 芳湖와 北津에서 서로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장기렴의 무리들이 감히 가벼이 보지 못했었습니다. 얼마 후 공이 退陣하고 저도 역시 장령을 받들어 新林으로 옮겼더니 마침내 북진의 실패와 제천읍의 패배가 있었습니다. 그 후 사세가 불리하여 분산해서 떠돌아다니는 신세가 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의암(류인석)선생을 따라 요동으로 건너갔다가 그 이듬해 돌아왔고 공은 福巾道服으로써 永春 산중을 찾아 소요하며 국가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邪說이 횡행 한을 밤낮으로 개탄하여 더욱 임금을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는데 정성을 쏟았습니다. (후략).

라고 하였으니 운강(이강년)은 의병부대를 해산한 후에도 존왕양이론에 입각하여 국가의 원수를 갚고자 절치부심하고 애국애족의 정성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깊은 산속인 금채동(金采洞)에 들어온 운강(이강년)은 손수 나물을 캐고 땔나무를 해 왔으며 혹은 백리 길을 걸어서 식량을 구해 노모를 극진히 봉양하였다. 인간이 견디기 어려운 온갖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오히려 의연, 침착하였으며 오직 토왜복수와 난적을 처단하고 보국하려는 큰 뜻을 버리지 않고 재기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 서간도 의암 류인석을 찾아뵙다

1897년(고종 34) 5월에 요동 서간도에 망명한 스승 류인석을 찾아갔다. 운강(이강년)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의암(류인석)으로부터 학문적 계발을 받아 존왕양이의 위정척사 사상을 보다 심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아울러 이국땅에서 국제 관계의 견식을 높이고 의암(류인석) 문인과 교유를 확대하면서 학문적으로 성숙기를 맞이한 것이다.
동년 8월에 귀국한 후로도 의암(류인석)과의 서신을 계속하였고 『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등의 성리철학(性理哲學)은 물론 노장(老莊) 등 학문을 탐구하였다. 즉 호·영남의 선비 사우들과 성리·전고·예악 등을 논하면서 교유하였다.
1899년(고종 36) 봄 충주 병산 유림들이 화서문집을 간행할 때 이에 적극 참여하여 자기 일처럼 힘써 알선하며 호남까지 가서 출판하는 일을 의논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비록 이러한 먼 곳의 여행에도 역시 ‘창의격문(倡義檄文)’을 꾸려가지고 갔는데 무안 군수 진모가 그를 의심, 행장을 수색하여 격문이 발견되니, 그와 동행한 어숙심(魚叔心)도 함께 잡혀 갇혔다가 며칠 후에야 석방되었다. 그리고 격문도 빼앗기고 갖은 곤욕을 당한 것이었다. 운강(이강년)은 이를 희롱하여 다음의 시를 지었다.

가진 곤욕 다 보이고
글마저 불태운다.
진시황의 나쁜 버릇
오늘 다시 보겠구나

그 뒤에 관서의 태천까지 가서 발간된 『화서집』을 나누어 주고 돌아오니 이것이 모두 학문을 위하여 성심을 다한 일이었다.
정유년(1897) 11월에 류의암(의암 류인석)에게 보낸 서신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요동에서 임금님의 綸音을 받으셨고, 다시 서쪽으로 오셔서 비답을 받으셨으나 서로 상거가 만리 길이오며, 두어 달 후에야 소자가 이 소식을 전해 들었으니 우러러 탄식하고 옷깃을 여미며 통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월은 빠르고 길은 막혔는데, 어느새 돌아가신 어머님 先大夫人의 대상이 지나 갔사오니 애통하고 허전한 마음 날이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실 것입니다. 그 동안 옛댁에 돌아 오셔서 大節을 지키시며 哀體後 안녕하시온지요, 엎드려 사모하고 사모합니다.
소자는 9월 24일에 비로소 이 소식 류의암[(의암 류인석)이 고국에 돌아오는 것]을 듣고, 시월초에 서울로 가서 부지런히 申友[申芝秀(신지수)]가 있는 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사동 여관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같이 있는 여러 사람이 압록강을 건너기 전의 일을 매우 궁금히 여겼지만, 이야기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서울에 온 이후 지낸 일을 대략 말해 주었더니,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는 모두 眩亂하게 여겼습니다.
이 친구는 평소 담력이 남보다 커서 적정을 탐지하러 갔다가 도리어 적의 술책에 떨어졌습니다[신지수가 요동에서 류의암(의암 류인석)과 같이 돌아와 적정을 탐지하러 서울에 갔었는데, 적은 그를 이용하려고 충청도 어사를 시켰다. 이 소식을 듣고 운강 이강년이 서울에 간 것이다]. 첫째는 가석한 일이며, 둘째는 서울을 떠나야 하겠기에 밤새도록 함께 돌아가자고 懇勸하였습니다. 다만, 신은 조금만 기다리면 같이 가겠다고 말하였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될 것 같아 부득이 李大哉[冑承(이주승)]를 황해도로 보내어 그로 하여금 선생님을 맞이하도록 하였습니다.
소자는 오로지 신우(신지수)를 서울에서 떠나게 할 목적으로 양주에 사는 친척집에 가서 며칠 동안 묵다가 다시 나와 돌아가기를 청하였습니다만, 신우(신지수)는 세탁한 옷이 되지 않아 함께 갈 수 없다고 하여, 스스로 탄식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선생님께서 본댁에 돌아오시는 날을 헤아려 만사를 제쳐서 가서 뵙고 모든 실정을 말씀드리고 옆에서 모시고 호위해 드리기로 계획하였지만 불의에 열흘 전부터 어머니께서 편찮으시더니 지금은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러 잠시도 떠날 수가 없으니 황송한 말씀을 어떻게 아뢰겠습니까.
다시 아뢰옵건대 선생님이 고국에 돌아오신 의는 오로지 효도를 실행하시는 大節에 관계되시므로 스스로 定算이 있으실 터인즉 어리고 어리석은 소자 따위가 감히 군 말씀을 올릴 수 없사오나 나라 일이 날마다 잘못되고 인심이 점점 변함을 보니 금일 停止(釋兵한 일)한 화가 전보다 배나 되고 枯息하는 적이 한결같이 시비를 얼버무려서 거짓 충성의 말로써 모든 일을 제멋대로 결정하고 그럴싸한 방법으로 백성들이 지향하는 목표를 흐리게 함으로써 인심은 날이 갈수록 더욱 흩어져 지사로 하여금 진취하게 해도 다시는 여망이 없습니다. 이는 진실로 위급존망한 때로서 어찌 밝게 분석하여 가려내야 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한갓 답답한 근심만 더할 뿐 기막힌 탄식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두 동지들과 선후책을 의논해 본즉 선생님께서 삼년상을 마치신 후 일을 죄다 말씀드리는 것이 마땅하고 남몰래 행동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자는 홀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호좌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의 大義를 檄告文에서 밝혔고, 강원도에서 의병이 패했을 때에는 상소문에 이미 진정을 다 말씀드려서 명백히 조리를 천명하였으니 행동함에 무슨 미진함이 있어 남몰래 다녀야 하겠습니까.
대저 만고의 대변에 처해서 만고의 大權을 사용하여 온 조정의 벼슬아치들에게 勸勵하였고, 팔도의 선비들을 궐기시켜 한 가닥의 陽脈을 홀로 보전하셔 만세의 원수를 쳤으니 난적의 무리들은 점차 그 무기를 거두어들일 줄을 알았으며 개·돼지 같은 오랑캐의 무리들은 칼날을 늦추어 피할 바를 알았으니 늠름한 그 위엄은 밤중의 우뢰보다 더 엄하였고, 열렬한 그 빛은 張子房의 철퇴보다 더 빛났습니다.
그러나 前者에 하늘이 돌보지 않고 사람이 향응하지 않아 이 땅에 있어서는 妖氣와 惡焰에 가리워 막혔고, 저 땅에 있어서는 또 사람을 해치는 귀역(鬼蜮; 악귀와 불여우)과 요얼(妖蘖)에 희설(戱渫; 홀려서 망하게 하는 것)되어 요계(遼薊; 요동) 지방의 풍설에 선생님을 따라가 모시지 못하였고 압록강을 넘나드시는 뱃길에서도 서로 어긋나 좌우에서 모시지 못하였습니다. 계획은 궁하고 길은 머오나 우리 옷을 입고 우리들의 예속으로 오히려 옛 땅을 지켜 스스로 한 구역의 문명한 지역을 만들어서 길이 천하 후세에 말할 수 있으시니 어찌 쾌하지 않으며 어찌 다행하지 않겠습니까. 하늘이 주심을 기쁘게 받아들이시면 지극히 원함을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정유년(1897) 11월 小子 李康秊(이강년) 上書

운강(이강년)은 모상으로 일시 귀국한 스승 류의암(의암 류인석)을 찾아뵙지 못한 이유를 밝혔고 국가가 위급존망할 때 답답하고 근심된 탄식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다. 지난 번의 의병으로 벼슬아치들을 권려하였고 선비들을 궐기시켜 양맥(陽脉)을 보전하여 원수를 쳤다고 하였다. 더욱이 서간도 등지에 우리의 예속을 유지시켜 문명한 땅으로 만들었으니 다행하다고 상서하였다.
학문에 게을리 하지 않고 또 곤궁한 살림가운데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내 목이 떨어지는 것은 걱정할 일이 아니고 오직 유사지일(有事之日)에 혹시나 기운이 쇠하여 가히 감당하지 못할까 두려울 뿐이다.’라고 하였다.
8년을 사랑방에서 거처하고도 내실에 들어가지 아니하였으며 식량이 떨어진 때에도 의리 아니게 줌이 있는 것은 물리치고 사람으로 더불어 일을 한가지로 함에 이득이 되는 것은 남에게 돌려주니 재리(財利)에 청렴함이 이와 같은지라.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애도함이 예절에 넘치니 비록 가난한 형세라도 힘을 다하여 경영(經營)하고 갖추어 거의 유감이 없이 장례를 치렀다.
1900년부터 1907년(丁未) 2월(음)에는 그의 『운강창의일록』에 운강(이강년)의 행적이 공백으로 단절되어 있다. 최근 일본에서 발견된 37통의 서한문은 1900년부터 1903년에 걸친 것으로 이들 서한문에는 이러한 공백기에 있어서 각지의 민중들이 철·곡물·약품·우마 등을 의병장 운강(이강년)에게 바치면서 올린 편지·집안사정·사회의 사건과 정황을 알리면서 그의 도움을 청하는 편지, 상의할 일로 사람을 보낸다는 소개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발견된 서한문의 발신 주인공의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洪鍾範(홍종범)·金永玉(김영옥)·尹元旬(윤원순)·金鳳泰(김봉태)·張性鎭(장성진)·李正旭(이정욱)·金熙昌(김희창)·李泰鎭(이태진)·辛棕黙(신종묵)·族從孤(족종고)·子大用(자대용)·李康原(이강원)·李岐承(이기승)·李履厚(이리후)·韓哲敖(한철오)·宗古(종고)·吳彛鉉(오이현)·李鼎厚(이정후)·李熙明(이희명)·柳志喜(류지희)·承善(승선)·李學厚(이학후)·景老(경로)·鄭基永(정기영)·宋○純(송○순)

이들 가운데는 두세 번 편지를 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知名弟拜上」이라고 써 이름을 숨기는 사람도 있다.
다음으로는 이들 37통의 서한문 가운데 하나를 현대문으로 고쳐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전략)… 族弟 近間 寒疾數日 叫苦耳就白 春川校中에서 通文을 가지고 二人이 왔사옵기로 身柄도 있고 못가나 그 일도 校任이라도 獨히 천편하지 못 하겠다 하였사오니 들어오셔서 보내게 하옵소서. 아무리 생각하와도 홀로이 처단될 듯 하오니다. 몸이 성하면 가겠사오나 못 가옵고 앙고하오니 善爲措處하옵소서. 餘故不備數上.

壬人(寅) 正月 二十二日
族弟 履厚(이리후) 拜上

당시 의병을 소집하는 방법은 지방의 토족들의 동태를 잘 파악하고 있는 향교를 이용하는 수가 많다. 즉 의병장이 창의소의 이름으로 의병을 시켜 향교에 통문을 낸다. 통문을 받으면 향교의 임원이 소집의병을 안내하여 대상의 토족의 집을 찾아 통문을 보이고 해당자를 지정된 장소로 모이게 한다. 여기에 불응하면 처단을 받게 된다. 이 편지 마지막에 ‘몸이 성하면 가겠사오나 못 가옵고 앙고하오니 선위조처(善爲措處) 하옵소서.’라고 인편으로 급히 의병장 운강(이강년)에게 알리고 있는 것을 보면 편지의 주인공은 의병 해산 후 집에 머물고 있는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의병이 아닌가 생각된다.
1902년 8월 15일자 운강(이강년)의 서한문에는 비밀리에 대궐에 들어가 광무황제(고종)를 배알한 자리에서 ‘친일 무뢰가 국고 3,000냥을 낭비한 점을 들어 소관 부서인 내부로 하여금 조사·환수토록 건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 속오작대도 작성

단양 금채동 은신 기간 중에 그간의 의병작전 경험을 토대로 한 의병부대 전투 편제 및 전술을 연구하여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를 친히 작성하였는데 이는 뒷날 2차로 의병을 일으켜 적과 싸울 때 적절히 사용, 위력을 발휘한 독창적인 보병전법이다. 운강(이강년)의 친필로 남아 있는 「속오작대도」를 살펴보면 주요내용은 의병조직도·행진법·진격과 후퇴요령 등이 기록된 것으로서 가로 161.5센티 세로 16.5센티 크기의 한지를 사용했다. 주장(主將) 밑에는 5영이 있으며, 각 영의 장인 영사(營司)가 5명이 있다. 영사 밑에는 다시 5초를 거느리고 있으며 각 초의 장은 초장으로 다섯 명이 있다. 각 초장은 그 밑에 3기를 두고 각 기의 장은 기통(旗統)으로 3명이다. 또 기통 밑에는 최하위 편제단위로 3개 부대를 지휘 통솔하도록 조직되었다.
운강(이강년) 의병부대 기본편제는 병사 10명이 좌우 2열 종대로 배치하고 선두에 대장 1명 후미에 화병(火兵) 1명을 세우는 것이 기본대형으로 이것이 1개 최소단위의 1대(12명)이다. 그리고 3개 대 36명을 1기로 하여 기통 1명이 통솔하고, 또 3기 111명을 1초로 하여 초장 1명이 통솔토록 하고 있다. 1초의 총원은 112명이 된다. 이 초를 5초(前·後·中·左·右)로 묶어 1영으로 하고, 이 영 역시 5영을 두었다. 결과적으로 운강(이강년)의 의병편제는 3·3·5·5 단위의 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1개 영의 병력은 561명으로 지금 현 군대편제의 대대와 비슷한 병력규모로 되어 있었다.
이 「속오작대도」는 “兵은 隊를 위해 죽고 隊는 旗를 위해 죽으며, 旗는 哨를 위해 죽고, 哨는 營을 위해 죽는다. 營은 義를 위해 죽는데 義가 서면 막강한 군대가 된다.”며 의병항쟁에 있어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의병조직의 지도이념을 밝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행군 및 진군요령은 “북을 한 번 치면 일어나고, 두 번 치면 앞으로 나아가며, 징을 한 번 치면 중지하고 징을 두 번 치면 뒤로 물러나라.”고 규정하고 있어 전투요령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숙달하려면 수만 번의 연습을 통해 자기 몸과 팔을 다루듯 하고 손가락 움직이듯 해야 된다.”라고 되어 있다.

○행군·진군 요령

북(鼓) 징(鉦)
1伐 일어나다(起上) 중지하다(中止)
2伐 앞으로 나아가다(前進) 뒤로 물러가다(後退)

※북·징은 행진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시경(詩經)』에 북은 군사를 움직이고, 징은 군사를 정지시킴.

속오작대의 편제 主將▨ 2806명5營(司) ▨ ▨ ▨ ▨ ▨ 561명×5=2805+1(主將)5哨(長) ▨後哨 ▨左哨 ▨中哨 ▨右哨 ▨前哨 112명×5=560+1(營司)3旗(統) ▨ ▨ ▨ ▨ ▨ 561명×5=2805+1(主將)5營(司) ▨ ▨ ▨ ▨ ▨ 37명×3=111+1(哨長)3旗(長) ▨ ▨ ▨ 12×3=36+1(旗統)○각 隊 12名(隊長 1명, 火兵 1명, 義兵 10명)대의편제 隊長第1兵 第9兵 火兵 第10兵 第2兵第3兵 第7兵 第8兵 第4兵第5兵 第5兵 第6兵 第6兵第7兵 第3兵 第4兵 第8兵第9兵 第1兵 火兵 第2兵 第10兵 隊長

속오작대의 편제

제3장 1907년의 의병전쟁(중기·후기의병)

1. 재기의병의 배경

1904년(光武 9), 일제는 그동안 한국 식민지화의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가더니, 한민족의 반일운동이 고조되고 러시아제국 또한 한반도에 적극적으로 진출함으로 마침내 러일전쟁(1904. 2∼1905. 9)을 일으켰다(2월). 일제 침략군은 한국강토를 그들 군용지로 징발하고 전쟁을 이끌면서 그 여세를 몰아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까지 강제로 체결하였다. 실질상 국권이 상실된 것이다. 이 조약(을사늑약, 1905)의 소식을 전해들은 온 국민은 항일 구국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재기(再起; 乙巳·丙午: 中期) 의병의 양상은 을미의병(1895)전쟁과 방불하였고 당시 해산되었던 대부분의 의병장은 구국결사(救國決死)의 결의를 새로이 하면서 흩어졌던 의병을 규합, 전국 각처에서 항쟁을 재개했던 것이다.
1907년, 광무황제(고종)가 퇴위당하고 정미칠조약(한일신협약, 1907)이 체결되는 등 국민에게 충격적인 정변이 그 해 7월에 연이어 일어났고, 8월에는 군대해산으로 국가의 멸망을 눈앞에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재기(再起; 中期) 의병의 정신적 맥락을 계승하면서도 의병전쟁을 거족적 운동으로 더욱 발전하였고 해산 군인의 참전으로 군사적인 면에서도 한결 조직화된 전쟁 상태로 돌입하였다.
한편 의암 류인석을 사사하였던 운강(이강년)은 기병하면서 그 막하로 자원하여 들어가 문하생으로 의리를 강명하였다. 의암(류인석)이 요동에서 ‘거이수지(去而守之)’ 할 때에도 직접 요동을 왕래하였다. 이 시기가 그의 일생을 통한 학문과 사상적 성숙도가 가장 고조될 때이며, 동시에 화서학파의 춘추대의적 존화양이론이 접맥되어 항일의 정신적 맥락이 더욱 강렬해졌던 시기였던 것이다. 특히 ‘양이(洋夷)’의 대상이 일제 침략세력으로 더욱 한정되어 가면서부터는 ‘존화양이론(尊華攘夷論)’ 그 자체가 의병전쟁의 이론체계로 발전되고 토적복수(討賊復讐)의 재기 항일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2. 의병의 재기와 용소동 전투

일제가 러일전쟁(1904. 2∼1905. 9)을 도발하면서 본격적으로 식민지경영을 확대하고, 나아가 준식민(準植民)을 상징하는 국권의 박탈 즉 ‘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체결하였다(1905. 11). 이 시기에, 을미의병(1895) 당시 해산되었던 대부분의 의병장은 전국 각처에서 항쟁을 재개한 것이다.
1904년부터 농민의병이 봉기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다음의 도표 중에 원용팔(元容八)·정운경(鄭雲慶) 등 유생의 이름도 보이나 그들은 실제 전투를 편 바는 없었으니 거의 농민에 의한 의병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의 표의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의병이라고 해도 활빈당(活貧黨)의 활동과 큰 차이가 없는 것도 농민의병의 특징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러한 농민의병이 1905년부터 본격적인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1906년부터는 새로 일어난 유림의병과 합류하여 대부대의 의병진영을 형성해 갔다.

1905년(‘을사오조약(을사늑약, 1905)’ 이전)의 의병기사

월별 지역(회수 또는 의병장 활약) 근거자료
1 충주(徐相懋, 의병 4~500명 모집)
서울(한국군과 일본군 교전) 『속음청사』권11
2 신계(군수 습격·살해) 『매천야록』권4
3 전주(金漢洙 등, 창의소 설치) 『매천야록』권4
4 경기·강원·충청·경북(토왜 명분) 『매천야록』권4
5 죽산(4회)·진천(3회, 朴在萬)·청안(3회)·보은·지평(李文鎬)·경기 광주(具萬善)·원주(元容八)·충주(3회)·괴산·안성·음죽·청산·제천·청주·경기·충북 『황성신문』
6 경기·충청·경기 광주·보은·양근·지평 전국 각지 『황성신문』, 『속음청사』
7 서울·경기·충청·전국 각지 『매천야록』, 『속음청사』
8 홍천·원주(원용팔 각국 공관에 성명서 발송)·영춘 『대한매일신보』, 김정명편『조선독립운동』1
9 홍천(2회)·원주·단양(2회)·영춘(2회)·제천·영월·제천(沈相薰 피습)·횡성(원용팔 피체)·강릉·평창·정선 『대한매일신보』, 『황성신문』, 김정명편『조선독립운동』1
10 영월·청주(우체소 습격)·여춘(鄭雲慶 거사, 피체)·순흥·영천(읍·우체소 습격)·풍기(2회)·봉화·충주·서울 광화문·청산·단양·보은·청풍·회인·강원·충북 『대한매일신보』,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김정명편『조선독립운동』1
11 보은(김동주)·영천(2회)·봉화·연풍 『대한매일신보』


1905년∼1906년 2월 기간의 운강(이강년)은 강원·충북·경북·경기도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애국지사들을 방문하여 국권회복을 위한 의병운동에 참여할 것을 유설(諭說)하니 이에 많은 사람이 호응하여 재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원주에서 원용팔이 의병을 일으킬 때(1905. 8. 20), 운강(이강년)은 글을 보내어 격려, 권장하였다. 정운경의 ‘제운강이공강년문(祭雲崗 李公康秊文)’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전략) 을사년(1905) 가을에 친우 元三戒(삼계 원용팔)[元容八(원용팔)]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켰다가 속임을 당하여 체포된 것을 보고 저는 눈물을 참지 못하여 동지 몇 사람과 더불어 단양에 가서 모병할 때 李友 正心齋를 시켜 글을 닦아 공을 맞이하려 하였는데 공이 미처 오시기 전에 일이 이미 파탄되어 周年동안 감옥에 갇혔었고, 불행이 죽지 않아 지루한 일루 잔명이 서도로 귀양 갔습니다.

운강(이강년)을 의병대장으로 추대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운강(이강년)은 아직 직접 의병을 거느리고 나서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때의 의병도 전번의 을미의병(1895)과 마찬가지로 각지에서 일어나 의병의 병력은 약하지 않았으나 모두 분산적이어서 공동 전선을 펼 수 없었으며 또한 무기의 결핍이 심한데다 그나마 구식 무기와 훈련 없는 농민병인데 반하여 일본군은 정예한 장비와 역전의 경험을 가진 전투병으로, 큰 전과를 올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무기의 준비 등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우선 직접 나서는 것을 보류하였던 것이다.
1906년(光武 10, 丙午) 11월에 단양 산중에서 군사들을 휴양시키고 있을 때 판서 심상훈이 친히 몸종을 데리고 초피 갑옷과 침낭을 가지고 와서 운강(이강년)을 위로하며 말하기를 “이 물건이 보잘 것 없지만, 장군의 겨울철 소용이 된다면 조금이나마 나라를 위하는 노고에 보답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운강(이강년)이 말하기를 “대감께서 이 비천한 몸을 마다 않으시고 이렇게 후한 물건을 주시니 극히 황감하오나, 군사들이 춥고 굶주려서 거의 죽게 되었는데 강년(이강년) 혼자만이 이 물건을 사용한다면 천지 신이 어찌 나를 벌주지 않겠습니까. 감히 사퇴합니다.” 하였다. 심(심상훈) 판서는 매우 감탄하여 곧 쌀과 포목을 수레에 실어 보내고 서울로 돌아와서 임금께 그 사실을 아뢰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뒷날(1907. 7; 음력) 비밀 칙령을 내렸던 것이다.
1907년(光武, 丁未) 5월 11일(음 3. 29) 운강(이강년)은 제천에서 재차 군사 모병계획을 하던 중,

지평읍에 명포수가 많으며 또 관서(關西)에서 탄환과 총을 얻을 수 있으니, 왜 빨리 거사하여 서쪽으로 나가지 않는가.

라 하는 소식전함을 듣고 운강(이강년)은 그 소식에 동의하고 지평 상동리 안기영(安基榮) 집에 유숙하면서 안성해(安成海) 등과 포(수)군 6명을 모집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하는 한편 변동식(邊東植) 편에 춘천의 류의암(의암 류인석)에게 편지로 의병일을 보고하였다. 기병 초기의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무기와 탄약을 구하려고 지평·횡성 등지로 모병하면서 행군하였다.
그리고 횡성 경계 봉복사(鳳腹寺)에서 유숙하는 중 찾아온 24세의 청년 장교 백남규(白南奎; 안동 진위대 副尉)를 맞이했다. 그리고 강릉 봉평으로 갔다가 배양산을 향하여 오는 도중 춘천 가정으로부터 윤창호(尹昌鎬)가 류의암(의암 류인석)의 답장을 전해왔는데 그 내용은 ‘신중히 하라’는 당부였다. 5월 26일(음 4. 15), 제천 북동 오미리(五美里; 松寒面 소재)를 거쳐 석양에 오석(烏石)에 도착 강씨네 재실을 빌어 잠시 쉬면서 원형희(元亨熙)를 시켜 선비 박정수(朴貞洙)를 오라고 하여 일본군의 동향을 묻고 잠시 회포를 풀었다. 다음날 아침 갑산을 거쳐 임현(任縣; 단양북부, 松鶴面 소재)을 지나 초저녁에 영춘 용소동에 유진하였다. 지난 밤새 길을 재촉하여 행군하였으므로 장병이 모두 피곤하여 떠나려 하여도 형세가 떠날 수 없었다.
한곳에 오래 머무르면 어느새 지방에 있는 일진회 회원 등 친일 밀정들이 일본군 수비대에 밀고를 하여 숱한 의병들이 총 한번 쏘지 못하고 숨졌던 지난 일들을 생각할 때 이동을 하면서 모병을 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운강(이강년)이 안기영의 집을 떠나 횡성으로 들어가고 있을 때 이미 밀고가 들어가서 일본군 수비대의 추격을 받기 시작했다.

○ 용소동 전투 참패

5월 27일 용소동에서 유숙하다가 야밤에 적의 습격을 받아 백병전을 전개하였으나 참패하였다. 이 전투에서 운강(이강년)은 적이 휘두른 칼에 오른쪽 엉덩이와 팔이 상했고 왼쪽 뺨의 살점이 손바닥만큼이나 베어져 얼굴에 흉터가 생기게 되어 이로 인해 잘 모르던 사람도 그를 보면 단번에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이 당시의 『운강창의일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잠시 동안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영춘 순검이 왜적을 데리고 습격해 오니, 함께 자던 여러 장수들이 모두 흩어지고 포군들도 역시 그러하였다. 이강년은 적의 수가 많지 않은 것을 짐작하고 칼을 들고 뛰어나가 손을 쓰려고 하는 찰나, 적이 칼을 휘두르고 역습을 하여 공의 왼쪽 뺨과 바른 쪽 팔·손에 상처를 입히고 적도 거의 죽게 되었는데 순검은 곧 조준원이라는 자였다. 왜놈 한명도 역시 칼에 맞아 허리를 상하고 실탄을 재어 쏘려고 했으나 총이 틀어지며 나가지 않으니, 이것은 하늘이 도운 일이었다. 적은 무서워서 물러나자 공은 혼자서 천천히 걸어가니 적이 더욱 무서워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다.

중상을 당한 운강(이강년)은 그 치료와 요양 그리고 모병을 위해 두 달 동안 각지를 옮겨 다니는 등 초기의 의병부대는 악전고투였다. 흐르는 피를 싸매고 풀숲 속에서 며칠을 지나다가 성금촌(成金村)으로 들어가 사람을 시켜 보산(寶山) 원도상(元道常)에게 전하기를 “동리에서 읍에 보고하여 나를 서울로 잡아 가게 해서 원수의 오랑캐들로 하여금 내가 대의에 죽는 것을 알게 하라.” 하니 원도상은 크게 놀라 찾아와 운강(이강년)을 치료하고 위로하였다.
그리고 흩어진 동지들을 수소문하니 숨어있던 김상태(金相台)와 백남규(白南奎)가 달려와 합세하고 청풍·단양 등지에 머무르며 치료하였는데, 그 중 제일 오래 머물은 곳이 나곡(羅谷)의 정두용(鄭斗容), 억수동(億水洞)의 이진원(李進源), 한양의 신태원(申泰元), 연풍의 조동기(趙東驥) 집이었다. 낮에는 숨고 밤에 행동하여 다친 몸으로 2백여 리를 가니, 손발에 멍이 들고 얼굴이 얼어 터져 흉터가 생겼는데, 그동안의 쌓이고 쌓인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고행이 극에 달한 두달 간의 시련을 겪은 것이다.
이와 같은 국권회복을 위한 정열과 그 용맹은 사민(士民)에게 감동을 주어 곧 군세가 확장되고 많을 때에는 천여 명까지 되었다. 그 휘하 저명한 장병은 김상태·백남규·하한서·윤기영·변학기(邊學基)·주현삼(朱鉉三)·권용일 등이었다.

3. 전열의 정비와 광무황제의 밀지

일제는 헤이그특사사건을 트집하여 광무황제(고종)를 강제 퇴위시키고(7. 20), 융희황제(순종)를 즉위시켜(8. 22) 정미칠조약(新協約: 7. 24, 한일신협약, 1907)을 강요하여 일본인 차관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고문정치(1904. 8) 이래 한국군을 반감시키고, 이어 전부 해산할 시기를 노리다가 정미칠조약(한일신협약, 1907)의 부속 각서에 의하여 비밀리에 한국군 해산을 단행한 것이다(8. 1). 일제의 이와 같은 군대해산에 대하여 대대장 박성환은 자결로 대항하고 시위대가 일어나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였고(8. 1), 이를 뒤이어 원주 진위대와 강화 분견대도 봉기하여 항전을 벌이며 의병 대열에 참가하였다.
즉, 서울 시위대 병사들은 해산식장인 훈련원으로 가기를 거부하고 처절한 항전을 전개하였으며 제일 먼저 궐기한 진위대는 원주 진위대였다.
원주 진위대는 부대 전체가 무기를 든 채 대일항전(對日抗戰)에 나섰던 것이다. 8월 2일 대대장 홍유형(洪裕馨)이 소집 명령을 받고 상경한 후 대대장 대리 김덕제(金德濟)와 특무정교 민긍호(閔肯鎬)는 비밀리에 대일항전계획을 세웠다.
8월 5일 하오 원주 진위대 군사들은 일제히 무기고를 장악하고 1,200정의 소총과 4만발의 탄환을 확보하였다.
이후 각지에서는 해산군인을 맞은 조직적인 의병부대가 연이어 일어났다. 이들 의병부대는 을미의병(1895) 때보다 무기도 상당히 갖추었으며, 또한 유림 출신의 의병장이 아닌 평민 또는 군인출신 의병장도 속출하여 기세를 크게 떨쳤다. 이러한 의병부대 가운데서도 특히 운강(이강년)은 4도를 휩쓸면서 왜적 토벌에 앞장섰던 것이다.
7월 23일, 광무황제(고종)의 양위의 변고를 전해들은 운강(이강년)은 통곡하며 사당에 나가 죽음으로서 적을 치기로 맹서하고 병든 몸으로 부대를 이끌고 제천으로 행군하였다. 그는 종사 11명을 거느리고 오석에서 먼저 원주 병영의 무기를 거두려고 가다가 권용일(權用佾; 청풍인으로 서울에서 기병차 낙향중)을 만났다. 그리고 비를 무릅쓰고 밤에 대평교(大平橋)로 들어가 윤기영을 만나 원주 진위대 소식을 자세히 물어 형편을 알았다. 곧 원주읍으로 들어가서 군기고를 헤치고 한편으로 군사를 소모하니 며칠 안에 응모한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수집한 다량의 탄환과 무기는 배양산 깊숙한 동굴 속에 은닉·비축하였다. 이렇게 병기와 병력을 동시에 얻게 된 그는 이제 기병의 조건을 갖추게 된 것이다.
배양산에 유진하여 전열을 정비하는 가운데 운강(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광무황제(고종)의 간곡한 밀서를 판서 심상훈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오호라! 짐의 죄가 크게 차서 황천이 돕지 않노라. 이로 말미암아 강린(强隣)이 혼란을 일으켜 엿보고 있고 역신이 정권을 농락하여 사천년 종사와 삼천리강토가 하루아침에 견양(犬羊)의 것이 되었노라. 짐의 한 오라기 목숨은 애석할 바가 없으나 오직 종사와 생령을 생각하니 애통하여 이에 선전(宣傳) 이강년으로 하여금 도체찰사(都體察使)를 삼아 七路로 보내노라.
양가 자재로 하여금 각기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소모관으로 삼아 인부(印符)를 자각하여 종사하게 하노니 만약에 명령에 복종치 않는 자가 있으면 관찰사·수령 등을 먼저 참하고 파출(罷出)하여 처분하라. 기보(畿堡)를 보존하는 한 오라기 희망이 이도체찰사(李都體察使)가 사직에 순(殉)함에 달렸노라. 이에 새서(璽書)를 비밀히 보내니 이를 다 알아서 거행하라.

운강(이강년)은 밀교를 받들고 눈물을 흘리며 일사보국(一死報國)을 다짐하면서 장졸을 모아놓고 복독(伏讀) 해설하여 사기를 돋구었다. 이러한 밀지는 다른 의병장들도 내려졌을 것으로 믿어진다.

4. 제천 전투

8월 10일, 용기백배한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배양산을 출발하여 원성군 신림면 신목정(薪木亭)에서 군례를 받고 남진하면서 각지에서 의병들이 모여들어 그 수가 350명이 되었고, 제천군 송양면 오미 성황(五美 城隍) 숲 속에서 회식을 하였으며, 8월 13일에는 제천읍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때에 진위대 병정과 산포수로서 모집에 응하는 자들도 매우 많았으며, 조동교(趙東敎)·오경묵(吳敬黙)·정대무(丁大武) 등의 여러 의병부대가 잇따라 제천읍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운강(이강년)은 부대 편성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안성해(安成海)로 중군을 삼고, 이한응(李漢應)으로 후군을 삼고, 운강(이강년)은 대장 자리를 사양하고 군사로서 일을 보기로 했다. 이 시기에 원주와 주천에서 활약하던 민긍호(閔肯鎬) 부대도 제천 운강(이강년) 부대에 합류하였다.

○ 제천 전투 대승

8월 15일(음력 7. 7) 제천 외각 각처에 세워둔 초병이 일본병의 제천으로의 진입을 보고해 왔다. 충주 쪽에서 경성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하림 소좌[下林(시모바야시) 少佐] 지휘 하의 말안 중위[末安(스에야스) 中尉]가 인솔하는 일본군 ‘토벌대’가 박달재를 넘어 주포로 공격해 오고 있고 풍기와 영주에서는 단양의 일본군과 합세하여 청풍을 거쳐 금성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정보였다. 운강(이강년)은 남천리 주민들을 모아 놓고 자신들이 영월로 들어간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놓고 중도에 길을 바꿔 각자 적이 오는 길목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을 하기로 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주력 부대를 향교고개를 넘어 조리재까지 인솔하다가 방향을 돌려서 서울고개를 향해 매복시키고 권용일은 500명의 군사로 모산으로 향하다가 산을 넘어 서쪽에 매복하였으며 오경묵과 정대무는 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서울고개 좌우에 매복하여 단양 쪽에서 들어오는 적을 방어하도록 했다. 또한 민긍호는 천 명의 군사로 남쪽을 막아 매복했으며 윤기영은 중군과 후군을 데리고 서울 고개를 넘어 북쪽에 매복했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제천에 들어와 주민들로부터 의병들이 영월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고을 사람들이 대접하는 고기와 술을 마시며 제천관아에서 쉬고 있었다. 이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첫 전투는 초저녁에 관아 뒤로부터 역습해 쳤는데 4시간 만에 적 십수 명을 사상하고 몰아내는 전과로서 대승리였다.
이 전투 중 중군장 안성해가 칼을 풀어놓고 달아나서 더 많은 적을 섬멸할 기회를 놓쳤으며 도영장 유병선이 헛소문을 퍼뜨려 많은 수의 의병들이 도망을 갔으며 민긍호의 의병들이 용감하게 싸워 많은 적을 섬멸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날이 밝아 유병선을 문초하여 처형하려 하였으나 참모들이 의병초기에 장수를 벌하는 것은 전체 사기에 영향을 미친다고 만류하여 엄중 경고로 그쳤다.
일본군의 앞잡이가 되어 백성들을 괴롭혀 온 홍범주가 돈보따리를 들고 달아나는 것을 안기영이 잡아와서 돈 1,700냥을 빼앗아 의병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었다.

○ 제천성 폐허

한편 8월 23일 하림지대의 말안 소대가 패퇴한 보복으로 일본은 제천 지역 의병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즉 서울의 보병 제51연대 제2대대장 족달(足達; 中佐)지대가 23일 아침에 기습적으로 제천에 진격하였으나 이미 의병은 충주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에 족달지대는 ‘제천은 폭도의 근거지로서 전촌이 폭도의 편을 들어 그 북방 고지에는 산병호(散兵壕)가 구축되어 있었다. 지대장은 장래의 화근을 제거하기 위하여 촌락의 대부분을 소각해 버렸다.’라고 하였다.
영국인 친일적인 기자 F.A. 맥켄지는 그의 저술 『한국의 비극(The Tragedy of Korea)』에서 제천 지방을 답사하고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들은 전 도시를 불살랐다. 일본 군인들은 용의주도하게 불길을 조정하면서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두 불살라 버렸다. 하나의 불상과 郡의 관아를 제외하고는 모조리 태워버렸다. 마을 사람들이 도망갈 때 부상당한 5사람의 남자와 부인 1사람, 그리고 어린 아이 하나를 남겨 놓고 갔는데 이들은 모두 화염에 타 죽어 버렸다.
내가 제천에 도착한 것은 더운 초가을이었다. 제천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산등성이에는 일장기가 눈부신 햇빛으로 선명했고, 일본군 보초의 총검도 반사하여 번쩍이었다. 나는 말에서 내려 거리로 나가 잿더미 위를 걸었다. 일찍이 나는 이렇게 처참한 광경을 본적이 없었다. 한 달 전만 하더라도 분주하고 부유하던 도시가 지금은 검고 회색의 먼지와 재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제천은 지도상에서 사라지거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운강(이강년)과 민긍호 등의 의병연합부대가 제천의 일본군을 격멸한 지 8일 만인 8월 23일에 제천읍과 그 주변 부락은 일본 대부대에 의해서 초토화된 것이다.
당시 일본군은 군대해산 이후 양질의 신식무기와 잘 훈련된 군사들을 영입한 의병부대가 도처에서 일본군을 격멸하자 중부지역 일대에 긴급히 1개 연대규모의 병력을 파견 배치하였다. 그러나 의병들은 지역의 지형에 매우 익숙하여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펴니 일본군의 사상자는 계속 늘어나기만 했다.
이에 일본군 사령관 장곡천(長谷川)은 전술을 바꾸어 의병과 민간인의 연대 책임을 물어 의병의 활동지역에 대한 방화·살인·약탈 이른바 ‘삼광정책(殺光·燒光·奪光)’을 폈다. 이러한 일제의 만행으로 원주 등 중부지역에서는 3,000여 명이 학살되었고, 가옥 5,000호가 불에 타버렸다.

5. 40여 의병부대의 회맹과 충주성 진공

○ 도창의대장 추대

제천 전투 후 각 부대는 북상하여 영월 주천에 이진하였다. 40여 부대장들이 운강(이강년)을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으로 추대하였으나 운강(이강년)은 사양한 바 있었다.
제천 의림지의 영호정(映湖亭)에서 회식을 베풀 때 그 기상과 풍채가 보통사람보다 뛰어나 창의대장으로 추대했던 것인데 그는 ‘반드시 인격과 지위가 겸비된 이를 골라서 창의대장으로 추대해야 할 것이요, 구차스럽게 장시간 맡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여 사양하며 피하였던 것이다. 운강(이강년)은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참판 김학수(金鶴洙)로써 운강(이강년)과 일찍이 함께 거의하자고 약속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강(이강년)은 정술원을 시켜 편지를 보내 창의대장이 되어줄 것을 몇 번 청했으나 그는 의병의 세력이 외롭고 약한 것을 보고는 사양하고 의병에 가담하지 않았다. 이때(8. 19) 김상태가 영춘·단양·제천·청풍 4군 방향으로부터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강권하되, “공이 만일 끝내 여러 사람들의 소망을 저버린다면 모든 것을 그만 두고 가겠다.” 하니, 부득이 도창의대장의 자리를 허락하고 정식으로 장병들의 군례를 받고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광무황제(고종)의 밀지를 읽어주니 모두가 숙연해졌다. 그리고 곧 부대를 재편하였는데 『운강창의일록』의 「장임록」에 의한 그 진용은 다음과 같다.

都倡義大將 李康䄵(이강년)
中軍將 金相台(김상태) 後翼將 申泰元(신태원) 領率將 薛昌海(설창해)
都先鋒 河漢瑞(하한서) 後軍將 鄭淵錣(정연철) 副領律 金德秀(김덕수)
右先鋒 白南奎(백남규) 左翼將 千普洛(천보락) 敎鍊官 鄭在德(정재덕)
前軍將 尹基榮(윤기영) 右先鋒 許燮(허섭) 敎鍊官 安春興(안춘흥)
左軍將 李容魯(이용노) 右先鋒 朴甲胃(박갑위) 督戰將 尹容九(윤홍구)
右軍將 李重鳳(이중봉) 右軍將 邊鶴基(변학기) 召募中軍將 尹惠善(윤혜선)
監軍將 李世榮(이세영) 召募將 柳始然(류시연) 召募後軍將 李士鎭(이사진)
都體督將 李萬源(이만원) 中軍先鋒 金雲先(김운선) 召募後軍將 申泰植(신태식)
召募將 박술영 防守將 朴敬八(박경팔)
後軍先鋒將 李昌敎(이창교) 丹陽 義將 李明相(이명상)
右軍先鋒將 崔東白(최동백) 中軍陣後軍將 成秉泰(성병태)
守門將 朱鉉三(주현삼) 防守將 宋材賢(송재현)
都領裝 劉秉先(유병선) 禁亂將 沈章燮(심장섭)
右翼將 金永軾(김영식) 斥候將 趙正熙(조정희)
左翼將 崔用出(최용출) 砲將 張進聖(장진성)
參謀官總督將 申橚(신숙)

司書參謀 姜順熙(강희순)
[參謀部 李正奎(이정규) 이하 14명.
從事部 姜炳秀(강병수) 이하 68명.
坐從事部 元道常(원도상) 이하 80명]

이상 233명의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조직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대장
도총국장(1) 참모부(14)-참모총독장 소모장, 참모관 소모, 참모겸사서 소모, 사서 소모
실전부대(장임부) 중군장-좌선봉, 우선봉, 도선봉, 중군선봉, 전군장, 후군장, 좌군장, 우군장, 유격장, 척후장, 독전장, 금란장, 후익장, 좌익장, 포장 종사부(68명)
(인솔, 훈련, 군량)-영솔장, 부영솔, 교련관, 수문장, 도련장, 방수장, 감군장, 군량관 좌종사부(98명)


위의 조직표에서 운강(이강년)은 전기 의병에서 류인석 부대나 또는 다른 의병장에게서 볼 수 없었던 14명에 해당하는 많은 참모부를 부대 운영과 조직상의 체계 및 향후 이동 방향 등 작전을 계획하였고, 도총독장(都總督將)에는 이만원(李萬源)을 두어 군중의 대소사를 합심하며 함께 싸움을 독려하는 운강(이강년) 다음의 최고 지위로 예우하였다.
중군장 김상태(中軍將 金相台)는 실전부대 장임부의 최고 장수로 15여 명의 장임직들을 지휘 감독하였으며, 기타 인솔은 영솔장과 부영솔이 담당하고 훈련은 교련관과 도련장, 그리고 군량담당에는 군량관(運糧都監)을 각각 두었다. 실전에 임하는 참가층으로서는 종사부에 68여 명, 좌종사부(정보 제공, 군량지원)에는 98명의 인원을 각 지역에 두어 서로 교우하며 효과적인 전투를 실시하였던 것이다.

○ 충주성 진공

부대 진용을 정비한 운강(이강년)은 민긍호 원주 부대와 조동교 청풍 부대와 함께 충주성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관동 및 4군 의병부대에 격문을 보내어 충주 공격에 대한 협격을 요청하였다.
당시 충주는 중부지역의 요충으로 일본군 제13사단 51연대 제4중대가 지키고 있었는데 중화기를 많이 보유하고 있고 대포를 요소요소에 배치해 놓고 있어서 다른 의병부대가 단독으로 공격하기에는 힘에 겨운 곳이었다.
8월 21일, 제천 백묘(百畝)를 지나 관전(館前)을 거쳐 기곡(基谷)에 집결하여 유숙하였다. 이튿날 청풍을 지나 서운(瑞雲; 충주 동쪽 30리)에 이르러, 이장진(李長津)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장진의 집에서 막걸리를 두 잔씩 얻어 마셨는데 저녁 식사가 늦어져 의병 모두가 배고프다고 아우성이니 보기에 매우 민망하였으므로 각 진에 알려 자제할 것을 지시했다.
중군의 진영에서 병사 하나가 잠을 자다가 꿈결에 일본군을 보고 엉겁결에 총을 쏘아 각 진이 소란하다가 곧 진정이 되었는데 모두가 한바탕 크게 웃었다.
8월 23일, 이른 아침길을 재촉하여 황강을 건너 충주땅 문지동(文池洞; 사미면 문화동)에 이르자 동네 사람들이 3동이의 술을 가지고 와서 군사들을 먹였다. 민심이 아직도 예전과 비슷한 점이 있어 매우 흐뭇했다. 마수막(馬首幕; 충주시 동 10리) 고개아래에 이르러, 정탐꾼을 충주성으로 보내어 그곳 사정을 알아보게 하였다. 약속시간이 다 되어서도 조동교와 민긍호가 나타나지 않자 초조해진 운강(이강년)은 중군·전군·좌우군 장수들을 보내어 함께 적을 치기로 약속하고 충주성으로 진군하였으나, 모두 모이기로 한 기일에 오지 않았다. 운강(이강년)은 충주성 우측 동문을 공격, 성을 무너뜨렸으나 서북문은 협공되지 않았으며 4시간의 완강한 적의 저항으로 부득이 군사들을 거두어 양막현으로 철수하여 유숙하였다.
충주 진공 작전에서 운강(이강년)은 충주성의 우측을 맡고, 민긍호는 좌측을 맡아 포위 공격하기로 하였는데 민긍호 부대가 충주로 가는 도중 박달재에서 적을 만나 패함으로 약속된 시간에 이르지 못했다. 이 싸움에서 군사를 잃지는 않았으나 도중에 도망병이 발생하였다.
제천성과 충주성 공격에 관련된 일본 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제천에 있던 폭도는 8월 15일 下林支隊에서 내어 보낸 末安小隊를 곤경에 빠뜨린 이래 점차 증가하여 그 수 6백에 달하고 충주를 점령하겠다고 호언하였다. 22일 오전 9시경 2부로 나뉘어, 그 하나는 제천·청풍 가도를, 주력은 제천·周浦 가도를 잡아 충주를 향하여 출발하고, 또 그날, 오후 강릉에서 왔다고 칭하는 폭도 약 2백은 오후 6시 충주를 향해 전진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足達支隊가 제천으로 전진 중 극히 소수의 폭도와 조우하였을 뿐이었던 것은 폭도의 경계가 교묘하여 우리 예봉을 피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이들 폭도는 수괴 민긍호의 부하들로, 23일 오전 11시 30분경부터 과연 충주를 습격하였으나 동지 수비대장의 적당한 配備로 인하여 격퇴당하고, 사상 20여를 내고 대부분은 충주·청풍 가도 방향으로, 일부는 장호원 방향으로 퇴각하였다

이상의 충주성 진공 전투상황을 『운강창의일록』과 일본 측 기록을 대비하면 운강(이강년)·민긍호 의병부대가 충주성 공격 계획과 추진과정 및 일자는 부합하나 『운강창의일록』에는 민긍호의 주력부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음을 보아 운강(이강년)의 착오이며 일본 측 기록에 공격 시·분까지 기록함을 보아 비교적 패전했던 제천 전투와 달리 상세하다. 그리고 아군의 사상자 수는 과장 기록이거나 착오일 것이다.
8월 23일 저녁 때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태장동(台長洞)에 이르러 성암 박주순으로부터 융숭한 대접을 받았고 불당곡 이주승(李冑承)의 집에서 유숙하였다. 이때 『국수원류(國讐源流)』 1편과 『군계(軍戒)』 12귀 그리고 『통고문(通告文)』 1장을 지었는데 글이 엄하고 의리가 정연하였다.
증산(甑山)·월악리(月岳里)·억수동(億水洞)·제억령(第億嶺)·단양 궁동·상선암 등을 거쳐 풍기 도촌(道村)에 이진하였다. 월약에 당도하여 왜적에 붙어 협작한 홍경기의 죄를 다스렸고, 남면 신구동에서는 원용정 의병을 기만한 김교형의 죄를 다스렸으며 도촌에서는 일진회원 김상호(金商虎)와 민간에 폐단을 끼친 김기찬(金基燦)을 죄를 들어 선포하고 처형하였다. 여기에서 면장은 찬조금 2백 10냥을 내었고 은풍에서는 참봉 남영석이 찬조금 30냥을 내었고 명봉사(鳴鳳寺)에서는 식사를 정성껏 냈다. 은풍에 이르러 읍의 적의 동태를 탐지시킨바 왜적이 영주로 철수했으므로 추격을 단념하고 문경 지역으로 진격하였다.

제천·충주 지역 운강(이강년) 부대 활동도

6. 문경 지역의 전투

○ 조령 일대 장악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문경 지역 적성을 지나 평촌에 이르러 선봉장 백남규를 시켜 집강 김동태를 소모장으로 임명하여 그곳 포수 5명을 모집해 오게 하고 김상지를 파수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중군장 김상태를 시켜 전기의병 패잔병들이 평천사에 맡겨두고 간 화약과 화승총 10자루를 가져오게 하였다.
평촌에서 이정으로 귀환하여 유진했을 때 상주 현촌 채홍한·채홍영 형제가 소총 4정과 화약 4근·자기황 1봉을 바치니 달리 후의에 보답할 길이 없어 운강(이강년)이 손수 적은 격문 한 장을 선물로 주었다. 이때에 달아났던 조동교가 군사를 이끌고 찾아와 합세하기를 간청해서 그 간사한 행동을 의심하면서도 승낙했다. 조동교는 영주 봉현에서 적의 기습을 받아 많은 수의 군사를 잃고 흩어져 이제는 그 수가 약 60여 명 정도로 줄어들어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운강(이강년)의 친구 예천의 선비 이규홍(李圭洪)이 먼 길을 찾아 왔으나 보초를 서던 군사들이 까닭도 모른 체 들여보내지 않았는데 얼마 후 운강(이강년)이 이를 알고 달려 나가 반가이 맞아들여 오랜만에 은근하게 회포를 풀며 함께 적을 치고 원수 갚는 일을 의논하였다.
9월 6일 산북 금용사(金龍寺)로 들어가 더위를 식히고 다시 운달산을 넘어 용연에 도착했다가 어두워질 때 당포에 유진하였다.

○ 조령 일대 장악

9월 7일 조령 제1관문(주흘루)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새벽에 당포를 떠나 행군을 하여 해가 뜰 무렵 주흘루 입구에 도착해보니 적은 이미 달아나고 없어 다시 군사를 문경 읍내 장터에 주둔시켰다. 이때에 조동교의 군사도 뒤따라 왔다.
이때에 탄환이 부족하여, 독전장 이만원이 권용일과 함께 지난 7월에 배양산에 탄환을 묻어 두었으므로, 두 사람을 시켜 운반하여 오게 하였다. 그들은 제천 송수곡(松首谷)에서 한 부대의 적병을 만났으나 용감하게 피하였고, 또 청풍 후평(後坪)에서 순검 3명을 만났으나 잘 피하였다. 낮에는 잠복하고 밤에 길을 떠나서 드디어 무사히 본진에 도착하니 온 진중의 장병들이 모두 그들의 수고와 지략을 칭찬하고 그 공으로 이만원을 도총독장(都總督將)에 임명하고 권용일을 우군선봉장(右軍先鋒將)으로 삼아 군중에 알려 주었다. 운강(이강년)은 문경새재 부근의 일본군을 격파한 다음 여세를 몰아 수안보를 거쳐 충주와 제천의 일본군수비대를 섬멸하기로 계획하고 작전을 세웠던 것이다.
한편 여주 의병장 김현규(金賢圭)가 군사를 거느리고 왔는데 군사들 중에는 해산된 병정이 많이 섞여 있었다. 이들과 함께 노고성에 이르러 후군장 신태원(申泰元)에게 군사 6초를 주어 지키게 하고, 좌익장 김영식(金永軾)과 참모 이정래(李淨來)에게 정병 20명을 뽑아 주어 이화령(梨花嶺)을 파수케 하고, 천보락(千普洛)에게 포수 30명을 주어 관음원(觀音院)을 파수하게 한 다음, 운강(이강년)은 중군과 함께 진군하여 신원(新院)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이때에 거창의 선비 차은표(車隱豹)의 방문을 받았다. 운강(이강년)은 지략이 있다는 소문이 있으므로 예의로써 초청하여 계책을 자문하였는데, 9월 전북 순창에서 기의한 김동신(金東臣) 의병장의 비장으로 성주지방에서 활약하다가 1908년 6월 전사 순국하였다.
9월 8일, 군사들을 잠시 쉬게 하고 점호를 실시하고 있는데 여주 의병장 김현규(金賢圭)가 와서 군사를 합치자고 제안하여 이를 승낙했으나 김현규가 거느린 서울지방 군사들과 선봉장 사광천(史廣川)이 따르지 않아 잠시 소란이 있었지만 운강(이강년)이 직접 이들을 타이르니 소란이 그쳤다. 그리고 김현규 의병부대에 실탄 100발을 지급하여 부족한 화력을 보충시켰다.
오후에 문경읍에 진주할 때 각처의 의병이 다 와서 모였으며, 이때에 이 참봉이 황소 3마리를 가져와 각부대의 모든 군사들이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모인 사졸들에게 다음과 같은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우리 동지들이여! 오늘이 어느 때이며 이 일이 어떤 일인가! 2백 년간의 종사와 예악이 모두 진토에 묻혀 버리고 3천리 강토와 인민이 魚肉이 되었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짐승이나 오랑캐로 자처하고 그저 앉아 있어야만 옳단 말인가! 장차 위로는 국가를 보존하고 아래로는 가정을 보전하며 기어이 우리 임금의 큰 욕을 씻고 우리 국모의 깊은 원수를 갚으며 우리 동방예의지국의 제도를 회복하고 우리 신하된 자의 직분을 다하여야 한다. 그래서 먼저 날뛰는 외적을 없애고 내적의 무리를 목 베어 다시금 밝고 깨끗한 천지를 보아야만 우리의 임무가 끝나는 것이다. 책임이 지극히 중요하니 혹시라도 사사로운 일로 큰일을 그르치지 말 것이며 재물로 인해 의리를 손상하지 말 것이며, 장수로서 계획을 느리게 하지 말 것이며 군사로서 영을 어기지 말라. 오늘 날 간난고초를 같이하는 일은 바로 앞날의 환락을 같이할 큰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 동지들은 제각기 마음속에 깊이 새길 지어다.

9월 9일 3군이 모항령위를 지켰는데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적이 이미 초곡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좌·우선봉장으로 하여금 정병을 거느리고 가서 토벌케하여 무사히 조령 관문을 점령했다.
이때 정두모(鄭斗模)가 의병장을 자처하며 군사 100명을 이끌고 모항령위에 와서 운강(이강년)을 찾아 뵈온 후 좀 있다가 어디론가 말없이 가버려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리고 김현규·조동교 두 부대에서 분란을 일으키며 원주 이인영 부대의 좋은 무기를 빼앗아 달아났다.
조동교는 일찍이 충주의 적을 함께 토벌하기로 약속하고 그 약속을 어기더니 오늘은 이인영의 원주부대와 조령을 지키자고 했다가 먼저 조령의 파수병을 철수한 것을 비롯하여, 김현규가 탄환을 청구하면서 함께 문경을 지키자고 약속한 것은 모두 사람을 속이는 간계였다. 그 때문에 이인영의 조령 파수병이 성문루에 있다가 많은 장병이 탄환에 맞아 죽었다. 처음에 조동교의 군사 30명이 먼저 조령을 지키다가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도망해 갔는데, 동교(조동교)가 그 사실을 숨기고 다른 군사를 유인하여 자기 군사를 대신하게 하였다가 마침내 이 지경에 이르니, 그 적을 피하고 화를 전가한 죄는 베어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이때 김현규 원주의병부대는 멀리 가버렸으니, 조령 파수병의 죽은 자를 의리상 남의 일로만 보고 있을 수 없었으므로 도총독장 이만원과 우선봉 백남규, 좌익장 최용출에게 군사 50명을 짜내어 조령으로 가서 시체를 거두어 매장하게 하였는데, 이인영의 원주 부대가 일본군과의 야간전투에서 희생당한 전사자가 32명이었다. 한동안 행동을 같이 했던 여주·청풍 부대가 떠나자 운강(이강년)의 연합부대는 그 형세가 크게 약화되기도 하였다.
문경 지역 전황에 대한 9월 초순의 일본군 측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강원도에 있는 폭도는 9월 그 주력을 경상북도 북부로 이동한 듯 3일 이강년이 인솔하는 폭도 약 6백은 문경을 습격 전선을 파괴하고 횡포 약탈을 극해, 재류 일본인 경무분견소 및 우편국원 등 난을 成昌으로 피하였다. 5일 이 보고에 접한 군사령은 남부 수비관구 사령관에 명하여 국지대좌(菊池大佐)에게 보병 제14연대 및 보병 제47연대의 대부분, 그리고 기병 반 소대, 산포병 1대, 공병 약간을 주어 문경 부근 토벌을 명하였다. 동시에 족달지대에 훈령을 내려 이에 책응케 했다.
제3종대는 보병 제14여대장 국지대좌가 이를 인솔하고 海平·洛東·臺封을 경유, 12일에 문경을 찔렀다. 제4종대는 보병 제14연대 중대장 水野大尉가 이를 인솔하고 奉化에서 玉山 및 尙州를 경유, 함창 북방에서 소수의 적을 구축한 다음 문경 부근을 정찰하고, 10일 다시 상주로 돌아와 11일 태봉에서 국지 연대와 합세하였다. (중략) 수안보에 있는 소대는 폭도 약간이 문경에 머물러 있고, 일부는 조령관에 있다는 정보를 듣고 9일 오전 2시 야밤을 무릅쓰고 폭도를 급습하여 거의 그것을 격멸시켰다.

이상에서 『운강창의일록』과 일본군 기록 등을 대비한 전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운강(이강년) 부대는 경북 문경 지역으로 진출, 조령을 장악하고 일본군 공격을 대비하였다. 주흘루 전투에서는 적을 패주시켰으나, 조령에서는 조동교 등 경계부대가 수안보의 일본군(제51연대 1개 소대)의 야간기습으로 패전(戰死 32)하였다.
둘째, 일본군은 전력으로 조령의 남북에서 운강(이강년) 부대를 압박해 옴을 알 수 있다.

운강(이강년)은 중군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조령의 진목교 부근으로 옮겨 주둔하려 했으나 선봉이 와서 말하기를 “적이 이미 온 마을을 불태워서 들어갈 집이 없다.”고 하므로 그대로 군사를 상초곡에 머물게 했는데 백성들이 전투가 있을 것을 겁내 많이 도망하므로 운강(이강년)이 의리를 들어 타이르자 하초곡 주민들이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와서 의병들을 대접하였다.
일본군들은 의병이 숨을만한 곳이나 이들을 협조했다고 판단되는 마을은 모조리 불태우고 양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러 왔던 것이다.

1907년∼1908년 운강(이강년) 부대 문경 지역 전투도

○ 갈평대첩

9월 10일 혜국사(惠國寺)에서 환대를 받고 하초곡에서 이화령의 파수군을 불렀으나 각 부대가 모두 달아났으므로 수비키 어려워 요성(堯城)으로 이진(移陣)하였다. 이때 갈평(葛坪)에서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연기와 불길이 하늘을 덮었다고 보고하는 이가 있었다. 운강(이강년)은 이미 김현규·조동교의 부대가 중도에서 적을 만난 줄 짐작하고, “남은 나를 저버릴지언정 나는 남을 저버릴 수 없다.” 고 하면서 군사들을 재촉하여 구원차 길을 떠났다. 도중에서 탐지한바 적이 김·조(김현규·조동교) 2진을 습격하여 깨뜨리고 민가에 불을 놓는다 하므로, 빨리 달려 용연에 이르니 불빛이 하늘에 닿았다.
군사를 급히 지휘하여 우선봉 백남규는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갈평 남산에 올라가게 하고, 좌선봉 하한서는 4백 명을 거느리고 갈평 북산으로 올라가게 하며, 우군선봉 권용일은 수백 명을 거느리고 동산으로 올라가게 하고, 총독장 이만원은 보수병(報讎兵)을 거느리고 바로 중앙으로 쳐들어가게 하였다. 이렇게 나누어 벌여 놓았는데, 적은 다만 김·조(김현규·조동교)가 패하여 달아난 것만을 알고 운강(이강년)의 대군이 와서 습격하는 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들은 마음 놓고 군사들을 휴식시키고 있었는데, 우리 군사들이 불의에 습격하여 들어가니 적이 어찌할 줄을 모르고 무기를 버리고 달아나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 달아나는 적을 주민들도 맨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주민들은 감격하여 밥과 술을 마련해 와 의병들을 위문하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 갔다. 총검과 탄환 투구·양식·기구들을 수색하여 얻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밤이 깊어서야 용연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인 9월 11일에 운강(이강년)은 일본군의 만행으로 갈평의 위아래 동네 집들이 온통 잿더미가 되었으며 또한 갓 시집온 며느리를 돌아가면서 폭행하고 항거하는 신랑을 총살하여 며느리가 목을 매 숨지는 등 일본군의 극악무도한 행위를 분노하고 울부짖는 주민들을 위로하고 타일렀다.
그리고 당포에 이르러 당포 백성이 와서 달아나는 일본군 13명이 자기 동리에서 밥을 구걸한다 하므로, 군사를 정돈하여 급히 전진하였다. 갈평시장 밑에 이르러 순검 한 명을 잡아 곧 총살하고 당포로 향하였다. 우리 군사들이 고함치며 달아나는 적을 추격하여 괴성까지 나갔는데, 적이 모두 풀숲 속에 잠복하여 수색하여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서양총을 가진 군사들도 셋씩 다섯씩 떼를 지어 다니며 꿩이나 토끼 사냥하듯 하는데, 산판 위에서 문득 적을 잡았다고 알리므로 곧 목을 베어 바치게 한 바, 이자가 바로 적의 장수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이었다. 그래서 그 목을 장대 끝에 매달고 동리 백성들에게 돌려가며 보였다. 후군장 신태원도 일본군 1명을 대사촌(大士村) 앞에서 베고 총과 환도도 노획하였다.
노목(老牧)에 나갔던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도망치는 왜의 머리 4개를 베어 가지고 온다 하므로, 중군장 김상태로 하여금 적을 추격하여 연작시(燕雀矢)에 이르니, 적은 이미 석현관(石峴關)으로 달아났다. 점심때가 지나서 다시 괴성으로 향하여 노목 뒷골에 이르니, 대진의 군사들이 적의 머리를 장대에 매달고 부상한 우리 군사 3명과 함께 옹기점 골에서 나오므로 놀라서 물으니, 적이 풀숲 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총을 쏘아, 이에 3명이 부상한 것이라고 한다. 적의 목을 인수하고 진을 합친 다음 야분령(野分嶺)을 넘어 저녁에 마곡(麻谷)에 이르니, 의원 조성언(趙聖彦)이 음식을 많이 차려 후하게 대접하며 약물을 선사했다.
9월 13일, 마곡을 떠나 대승사(大乘寺)에 유진 때 용연의 집강 김홍규(金鴻圭)가 보고하기를 일본군 하나가 벼락에 추락해 죽고, 한 명을 잡아두었다 하므로 곧 권성삼(權性三)·이원규(李源圭)·엄충원(嚴忠源)·김덕수(金德壽) 등에게 달려가서 그 목을 베고 칼을 풀어 바치게 하는 한편, 상금 1백 냥을 김홍규에게 주었다. 한편 천보락(千普洛)을 보내어 근처에서 군사를 모집케 하고, 후군장에게 전령하여 빨리 진중으로 나오게 하였다.
9월 14일, 적장 과전(戈田)을 잡은 총군 김유경(金有慶) 등에게 공로로 상금 2백 냥을 주었다. 대승사를 떠나서 명봉사(鳴鳳寺)에 이르니 여러 중들이 나와서 맞이하였다. 좌선봉 하한서가 군사를 거느리고 합류하여 왔다.
9월 15일, 행군하여 월감·상백에 도착했을 때 후군장 신태원이 적성에서 싸우다 패전,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만원에게 명하여, 천보락 이하 7명을 거느리고 적성으로 가서 적에게 죽은 사람 36명의 시체를 거두어 장사지내게 했다. 운강(이강년) 본진은 배음치(背陰峙)를 넘어 단양 가리점(加里店)을 지나 성금령(星金嶺)을 넘어 동면 가리점에 이르니 우군장 이중봉이 적의 탄환을 맞고 들채에 매어 왔으며 포수 김홍룡 등도 상처를 입어 역시 들것에 실리어 동가리점에 도착했는데 관동의 병장 이인영도 따라 왔다. 보산 원도상의 집에 이르러 적을 공방하는 비계를 의논하고 야간 행군으로 상보산(上寶山)에 이르러 유진하였다.
9월 13일∼14일의 일본군 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菊池(키쿠치) 縱隊는 함창에서 水野(미즈노) 縱隊와 합세하여 13일 문경 부근에서 숙영하고 폭도가 大成寺 및 金龍寺 부근에 집합한 것을 알고 不破(후와) 小佐에게 보병 1중대, 기관총 2를 주어 그것을 소탕시키게 하였다. 불파소좌의 일대는 대성사와 금룡사 부근의 폭도 약간을 소탕하였으나 그 대부분은 이미 榮川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태봉에 있던 松野(야츠노) 中隊는 三害里를 경유 大成寺 부근을 정찰 중 적성 부근에 폭도가 집합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고 14일 적성 시장의 동서남 3방면에서 촌락을 포위하고 돌격을 하자 폭도는 당황하여 시장 동북방 고지로 퇴각, 약간 저항을 하였으나 우리의 맹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15를 유기하고 드디어 榮川 방면으로 궤주하였다. 이 폭도는 李康秊(이강년)이 인솔하는 것으로 반란병이 다수 섞여 있었다. 제1종대는 15일 英陽을 떠나 영양 동북 20리 지점에서 賊魁 申乭石(신돌석)이 인솔하는 폭도 약 150을 엄습하였다.

이상 9월 중순의 『운강창의일록』과 일본군 측은 기록을 대비한 문경 갈평과 적성에서의 전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운강(이강년) 부대는 갈평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으나,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적성 전투에서는 후군장인 신태원 부대가 참패를 당하였다(9. 15). 둘째, 일본군은 갈평리 전투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성과를 거둔 적성 전투에서의 기록은 상세하다. 단 일자에는 차이가 있다.

7. 단양·영월·제천·원주 지역 전투

9월 18일,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단양 의병장 이명상의 부대와 연합하의 영춘읍에 도착, 성 밑에 이르러 적이 지나간 곳을 두루 살펴보니, 모두가 빈 터만 남아있어 도저히 머무를 수가 없었으므로 향교로 들어가서 잤다. 그리고 명륜당에 머물러, 각 면의 집강을 부르고 급히 격문을 보내어 3재임(齋任)과 6집강이 와서 만났다. 운강(이강년)이 군사들의 주리고 추운 형편을 말하고 부유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옷을 짓고 쌀을 가져오게 하니 모두들 명령대로 하였다. 그리고 소모장 원건상이 삼척 고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중으로 왔다.
9월 20일 청풍 의병장 조동교가 전일의 과오를 뉘우치고 “단양 묵석동(墨石洞)에서 패전한 후로 힘에 부족하고 형세가 약하니, 대진에 붙기를 원하오며 죽고 사는 것을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고 하면서 합진하기를 애원하여 운강(이강년)이 그의 위인을 비루하게 여겼지만 궁한 처지에 동정을 구하는데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마지못해 허락하고, 식사나 의복을 본진과 같이 대접하였다. 그리고 단양의 장병들도 똑같이 먹여 괴진(槐津)의 진지를 지키게 하였는데, 조동교만은 빈 읍내에 길게 누워 있으면서 피난민의 양식이나 약품·의복을 가로채기를 자기 물건처럼 하며, 포학한 짓을 하도 많이 하니, 어린애들도 무서워서 울며 피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다만 깊이 책망만 하고 당분간 두고 보기로 하였다.
9월 21일(음력 8월 14일), 추석 전날 신대(新垈) 가까이 주둔하면서 집이 가까운 총군들에게 휴가를 주어 ‘명일은 추석이니 가서 부모와 처자들을 위로하라.’하며 돈 1백문씩 주었다. 이날 보산의 원도상을 비롯 주민들이 식사와 소주·떡·고기를 공급해 주어 장병들이 취하고 배부르게 먹었고 한곡(閑谷)에서는 군량을 공급하여 왔으므로 세 의병부대에 고루 나누어 주었다.
9월 24일 새로 들어온 삼척 군사에게 율치(栗峙)의 좁은 목을 지키게 하고 좌선봉 하한서에게 군사 2백여 명과 종사 3명을 주어 원주 배양산으로 가서 탄환을 운반하여 오게 하였는데, 원주에 다 못 가고 도중에서 적을 만나 본진으로 돌아왔다.

○ 영춘 유치 전투, 적 패배

9월 25일 적이 근처로 침범하여 온다는 보고가 있었으므로 운강(이강년) 자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즉시 유치(楡峙)로 나가며 조동교로 하여금 뒤따라오게 하였는데, 몇 리를 못가서 적이 이미 골짜기 어귀에 와 우리 군사를 포격하였다. 우리 군사가 고개 위에서 총을 쏘았으나 거리가 멀어서 총알이 적에게 미치지 못하고, 겸하여 날은 캄캄하게 어두워졌다. 그래서 퇴각하여 성곡(城谷)에 두둔하였는데, 적이 읍의 관사나 가옥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치솟았다. 성곡으로부터 다시 단양·청풍의 별초군 및 우선봉군을 거느리고 적을 추격하여 읍 밑에 이르니, 적이 납태촌(納苔村)에 불을 놓고 영월로 달아났으므로 추격하였으나 미치지 못하였다.
주민들이 적을 무서워하여 움직이지 못하다가, 우리 군사가 이르는 것을 보고 서로 부르며 좋아하는데 그 정상이 매우 측은하였다. 운강(이강년)이 주민들을 불러 순순히 타이르고 물러나 최가동(最佳洞)에 머물렀다가 남진(南津)을 건너 비마(飛馬)의 천국환(千國桓)의 집에 유진하였다. 일찍이 사지원(斜只院)에 있을 때에 군중(軍中)이 갑자기 놀랐다가 잠시 후에 진정되었는데, 이는 하선봉(河先鋒)의 군사가 오는 것을 보고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적으로 오인한 때문이었다.
탄환이 부족할 염려가 있으므로 운강(이강년)이 장수와 참모들을 불러 의논하였는데, 한 사람도 용감하게 탄환을 운반하러 가겠다는 자가 없었다. 도총독 이만원이 큰소리를 치며 “우리들은 생명을 내놓고 의리를 따를 따름인데 무엇이 무서워서 가지 못하겠는가. 만일 탄환이 떨어졌는데 적이 쳐들어오면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내가 즉시 길을 떠나야 하겠다.” 하고 단신으로 배양산에 가서 탄환을 운반하여 오는데, 도중에서 3번이나 적을 만났으나 그때마다 잘 처리하여 뺏기지 않고 오니, 진중의 장병들이 그의 의기와 용맹에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단양 영춘 지역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菊池(키쿠치) 大佐는 그 제3대대장 江澤(에자와) 少佐가 인솔하는 제11중대(1소대 欠) 및 제12중대에게 명하여 24일 영천을 떠나 영춘·영월 방면을 소탕시켰다. 25일 저녁 영주를 수비하고 있던 西岡(니시오카) 中隊는 죽령을 넘어 永春으로 진출하여 그곳에서 약 3백 명의 폭도와 충돌, 교전 약 1시간 후 그것을 궤주시켰다.
이 폭도는 李康秊(이강년)이 지휘하는 집단으로 원주·안동 진위대의 해산병을 가담시키고 있는 폭도로 우리의 맹렬한 추격에 의하여 지리멸렬, 사상 약 50을 유기하고 산간으로 도주하였다.

이상의 『운강창의일록』과 일본 측 기록을 대비하여 보면 일자나 장소는 대체로 부합하나 일본 측 기록의 전과는 과장된 것으로 판단된다.
9월 28일, 날이 밝자 또 감천(甘泉)의 파수처(把守處)로부터 “적이 남진(南津)을 건넜다.” 는 급보가 왔으므로 곧 군사를 지휘하여 산 밑에 은신하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적은 보이지 않았다. 비로소 어리석은 백성들이 적이 불 놓은 것을 미리 겁내어 서로 전하며 소동을 부린 것임을 알게 되었다.

○ 조동교 의병장 처단

단양·청풍의 2진과 함께 떠나 영월 조전(助田)을 거쳐 다음 날인 29일 장릉동에 주둔하고 있는데 종사 김진홍(金振弘)이 와서 호소하기를 “청풍진(淸風陣)의 총군(銃軍) 한용진(韓用振)이 본진의 총군 김용출(金龍出)과 사이가 좋지 못하여 군기를 유실했다는 것으로 트집을 잡으며 술을 마시고 욕설을 하였다.” 하므로 운강(이강년)은 한용진을 불러 타이르고 약간의 벌을 주었다. 잠시 후에 동교(조동교)가 군사들을 데리고 갑자기 달려드는데, 그 군사들이 모두 탄환을 입에 물고 총을 들고 곧장 장막 앞에 와서 본진의 장병들을 들어서지 못하게 하니, 화가 당장 일어나게 되었다. 운강(이강년)이 말하되, “너희들이 무엇 때문에 난을 일으키는 것이냐. 입에 탄환을 물었으니 이것은 길에서 주은 것이냐.” 하였다.
대개 운강(이강년)이 꾹 참고 일이 없게 하려 한 것인데, 조동교가 원래 행실이 좋지 못하고 생각이 극히 망측하기 때문에, 부득이 부장(副將)을 시켜 당장 결박해 오게 하여 그 죄를 들어 논고하고 드디어 목 베어 본을 보였다. 그 죄목을 적어 능촌(陵村) 벽 위에 걸고 바로 영월읍으로 가서 주둔하였다.
10월 1일(음력 8. 24) 녹번리(綠藩里)로 이진하여 성황 숲에서 잠시 쉬는데 단양 군사가 달려와서 “적이 온다.”고 알려오므로 운강(이강년)은 소모장 남필원(南泌元)과 함께 산에 올라 따로따로 복병하였다가, 잠시 후 그것이 허망한 말임을 알고 포수 이상옥(李相玉)을 시켜서 각 진에 알리게 했다. 어두울 무렵에 동내리(洞內里)로 내려 왔는데, 청주 병정 김종옥(金鍾玉)이 오발로 다쳐서 죽었다.
10월 3일 험한 곳을 의지하여 적을 치려다가 중지하고 회군하여 거석리로 이진하였다. 단양 부대도 합세하여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10월 4일에 정탐꾼이 보고 하기를, 적병이 제천읍으로부터 들어와 영월읍을 차지하고 병참을 설치하는데, 간악한 이속들이 적에게 붙어서 백성들을 토색질한다고 하므로, 각 부대에 분부하여 내일 일찍이 영월 적 병참을 공격케 하였다. 그리하여 진평(津坪)·보양(普陽)에 진주하여 유숙하고, 6일 오전 4시 경에 새벽밥을 먹고 10리를 행군하여 덕포 독산(德浦 獨山)에 진을 쳤다가, 날이 밝자 먼저 공격하였는데 적이 움직이지 않았다. 우선봉 백남규가 단신으로 적의 병참 앞에 뛰어 들어가서 초가에 불을 지르니, 적이 창절사(彰節祠) 뒤 산기슭 구덩이에 들어가서 몸을 감추고 응전하였다. 앞서 좌군장 이용로(李容魯)와 좌선봉 하한서가 곧장 앞으로 나가 무찌르지 못해서, 적이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오전 8시부터 정오까지 격전을 벌였으나 적은 끝내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중군장 김상태가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가 칼을 휘두르며 돌입하였으나, 적이 공청 안에 숨어서 탄환을 퍼부으니, 화약과 탄환은 다하게 되었으므로 각동(角洞)으로 퇴군하였다. 다음날(10. 7) 나루를 건너 두음산(斗音山)에 주둔하였다.
10월 8일 송학서(宋學瑞)를 시켜 화약을 다지게 하였는데, 불행히도 불을 내어 자신은 온 몸에 상처를 입고 김씨·고씨 두 사람의 집이 연소되었다. 불이 나자 급히 군사들을 명령하여 끄게 하였으나, 가뭄이 심하여 산마루의 샘이 말랐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임시 조처로 각동(角洞) 백성들을 시켜 이 참판의 집에서 사둔 서까래 1백 개와, 조종옥(趙鍾玉)이 사둔 체목(體木) 1백 개를 운반하여 집을 만들어 풍우를 피하게 하였다.
10월 9일 행군하여 병두(屛杜)에 당도했다. 충주 순검 1명이 영월읍으로부터 진중으로 들어왔는데, 행색이 매우 수상하므로 좌선봉을 시켜 엄하게 심문하여 불칙한 흉계를 자백 받고 즉시 총살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강을 건너 오호(梧湖)에 주둔하였다가 설아(雪阿)에 머물렀는데 윤사혁(尹師赫)·이정래(李淨來)가 와서 합류했다. 동아(東阿)에서 『군문서계(軍門誓戒)』 10여 조를 지어 기율을 분명히 하니 모두들 잘한다고 하였다. 행군을 계속하여 납태(納苔)를 지나 밤에 북진(北津)을 건너 최개울(催改鬱)에 당도 했는데,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여의천(如意川)을 지나 원곡(遠谷) 홍연안(洪延安) 집에 가서 멈추었다. 주인이 벼 10섬을 쌀로 찌어 운반하여 왔는데, 장차 군사들을 먹이기 위함이었다.
9월 6일 총독장 이만원과 우군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을 시켜 괴산군 연풍에 있는 일본군을 공격 4명을 사살하고 조선인 순검 3명을 생포하였다가 현장에서 총살했다. 운강(이강년)은 이들의 공로와 용감성에 대하여 치하하였다.
10월 15일 운강(이강년)의 장자 이승재가 전 정언 김상한(金商翰)과 의병 40명을 데리고 와 즉석에서 김상한이 운강(이강년)의 지휘를 받고저 하므로 운강(이강년)이 사양하였다. 여러 참모들도 간청하여 의논한 끝에 김상한을 별진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상산진(商山津)을 건너 심곡·임현을 거쳐 밤중에 사기막에 도착 황영수(黃英秀)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였다.
다음날 일찍이 원주 신평(新坪)에 도착했는데 근처 마을에 불이 나서 군사들을 동원해 소화 작업을 폈다. 집을 잃은 주민을 위로하고 행군을 하여 제천 송한에 주둔하였다.
10월 20일 원주 도룡동(道龍洞)에 도착했을 때 전군장 윤기영이 군사를 데리고 와서 선유사 홍우석(洪祐晳)이 의병장 민긍호에게 보내는 글을 내놓았다. 이것은 길에 매복한 군사가 얻은 것으로서, 그 사연을 보니, 모두가 군사를 해산하고 화친하는 데 따르라는 내용이었다. 이 때 주민들이 왜적의 명령에 몰려서 한창 전선주(電線柱)를 세우고 있으므로 운강(이강년)이 그들에게 불가하다는 뜻으로써 타일렀다.
도천(桃川)에서 소모장 주광식(朱光植)이 군사 90명을 거느리고 합류하므로 후군장으로 임명하였다.

○ 원주 추치 전투 대승

10월 21일 전군장 윤기영이 역촌에서 보고하기를 선유위원 권태준(權泰俊)이 말을 달려 지나간다는 말을 듣고 곧 잡아오게 하여 적의 정세를 캐어물은 즉, “선유사 홍우석이 왜병 2백 명을 데리고 신림(神林)에서 자고 있는데 내일 추치(杻峙)를 넘을 것이다.”고 하므로 운강(이강년)은 그를 “시각을 지체 말고 베어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22일 닭이 울 무렵에 우선봉 백남규, 좌선봉 하한서, 우군 선봉 권용일을 명하여 상추치로 가서 나누어 복병하게 하였다. 산이 깊고 골짜기가 좁은데 겸하여, 안개와 비가 뿌려 지척을 분별할 수 없었다. 적의 선봉 부대가 먼저 복병 초소를 지나가자 선봉이 먼저 발포하고, 이어 좌우편에서 일제히 발사하였다.
운강(이강년)이 포성을 듣고 중군·총독과 함께 본진의 군사를 거느리고 크게 호령하며 독전하였다. 또 별진의 정병에게 명령하여 응원하게 하고, 다시 전군을 급히 나오게 하여 사면에서 포위하고 일제히 공격하니, 적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고 200여 명이 전멸하였고 많은 군수품을 노획하였다.
오후 4시경에 30리를 퇴각하여 선평에 주둔하고 우변면장(右邊面長)을 불러, 백성들을 시켜 전선주를 세우게 한 죄를 문책하였다.
이 추치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 기록은 다음과 같다.

강원도 선유사 일행을 호위하기 위하여 來春하였던 志賀육군소위 이하 20명은 선유사와 共히 過般 當地로부터… 本月 21日… 상추치라고 하는 곳에서 폭도 300여 명과 出會, 전투를 개시하여 적은 완강히 저항하였으나 아군은 맹렬히 사격을 가하여 드디어 오후 6시경에 이르러 此를 격퇴하였다. 이 전투에서 적은 사체 30을 유기하고 當春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한다. 그리고 아군에는 死者 2명, 傷者 2명을 出하였을 뿐이다.

이상의 『운강창의일록』과 일본군 측 기록을 대비한 전과와 전황은 대체로 부합하나 전사자 등의 기록은 상반된다. 『운강유고』의 기록으로 보아 적 전사자는 5명으로 판단된다.
10월 24일 사기막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후군이 적 병참을 공격할 때 좌·우선봉에게 출동케 하였으나 좌선봉 하한서는 전일 추치 전투에 자기의 공로를 인정 못 받은 불만으로 명령을 어겼으므로 운강(이강년)은 곧 군법을 시행하였는데 장병들이 용서하여 주기를 애걸하므로 용서하여 주었다. 이날 임현으로 회군하였다.
10월 25일 가야리에 주둔하면서 각 진의 장병들이 너무도 싸움에 지쳤고, 또 후군 진중의 사병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생각이 있을까 염려되어, 후군장 주광식으로 하여금 영서(嶺西)로 돌아가서 다시 더 군사를 소모(召募)하게 하였다. 진군하여 단양 도담(丹陽 島潭)에 주둔하고 이규현(李奎顯)을 참모겸사서(司書)로 임명하였다. 심곡(深谷)에 이르러 적의 정세를 탐지하였다.
10월 26일 군사들이 몹시 피곤한 것 같아서 수일간 휴식시켰다. 이로 인해 규율이 해이하여 상벌이 엄하지 못하면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풀어지기 쉬울까 염려되므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하여 거느린 군사들을 엄중히 단속하여 비록 밥 먹고 쉬는 시간에라도 대오(隊伍)가 흩어지지 않게 하였다.

8. 소백산 죽령 지역 전투

10월 31일 장림역으로 옮겨 주둔했을 때 정탐꾼이 보고하기를 응암(鷹岩)에 적 수십 명이 와서 엿본다 하므로, 곧 요긴한 목에 복병하게 하였는데, 적이 먼저 달아났다. 이튿날(11. 1) 응암으로 진군하고 또 좌·우 선봉장을 시켜 태봉 동구 위아래 좁은 목을 파수하게 하였다.

○ 죽령 1차 전투 대승

11월 2일 정탐꾼의 보고에 ‘풍기·예천으로부터 적병이 죽령을 넘는다.’하므로, 운강(이강년)이 선봉장을 시켜 영 아래에서 교전하여 적 20명을 죽였다. 우리 군사 박흥록(朴興菉)이 탄환에 맞았으므로 들것에 메어 장항(獐項)으로 돌아가 치료하게 하였다. 밤에 적병이 와서 엿보는 것을 파수병이 못 잡아서 군중(軍中)이 모두 분히 여겼다.
10월 3일 순흥 사람 금달연이 중군장 김상태의 서신을 들고 찾아왔는데 포수 수십 명을 인솔하고 와서 의병에 합류하기를 원하여 별초종사에 임명했다.
9월 29일 순흥 의병부대 소모장 김영시의 외동아들이 찾아와 의병이 되겠다고 하였으나 신체가 매우 허약할 뿐 아니라 독자인 점을 감안하여 집으로 돌려보냈다.
11월 5일 적이 밤중에 와서 침범하니, 우리 군사들이 놀라 흩어져 대오를 이루지 못하므로, 각 초에 호령하여 총격을 매우 맹렬히 하게 하였더니, 잠시 후에 적이 물러갔다.
총독장 이만원, 우군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을 보내어 흩어진 군사들을 소모하였다. 장차 충주·괴산·연풍·청주 등지로 가려는 것이었다.

○ 죽령 2차 전투 대승

11월 6일 적이 또 죽령에 와서 침범하므로 오전 10시로부터 오후 4시까지 적과 교전하여 4백 명을 무찌르니, 적이 그제야 물러갔다. 다시 좌·우 선봉장을 시켜서 응암 뒷산 기슭에 복병하고, 대장진은 기를 날리며 고함치면서 내려가 유도하니, 적이 다시 왔다.
장차 습격하려 하는데 마침 비바람이 갑자기 일어나서 그만 장림(長林)으로 회군하였다.
11월 7일 적이 응암으로 와서 민가에 불을 놓으므로, 명령하여 중군장은 왼쪽 산으로 올라가고, 우선봉은 오른쪽 산으로 올라가 도전하게 하고, 별초 박갑수로 총군 몇 명을 거느리고 바로 앞으로 돌격하게 하였다. 적이 달아나서 죽령으로 들어가므로, 군사를 지휘하여 고리평(故里坪)으로 나와 주둔하였다.
연일 고전으로 사졸들이 모두 피곤해 하므로, 하루 동안 군사들을 쉬게 하고, 소를 잡아 잘 먹였다. 또 적이 온다는 말을 듣고, 좌·우 선봉장을 명령하여 사인암(舍人岩) 뒷 고개에 복병하게 하였다.

○ 죽령 3차 전투 대승(고리평)

11월 10일 동틀 무렵에 적 200여 명이 세 부대로 나누어 사인암으로 접근해 들어오므로, 운강(이강년)이 나가 싸워 적 80명을 잡고 말 1필을 비롯해 많은 군수물자를 얻었다. 적이 달아났는데 우리 군사도 수십 명이 부상하였다.
이 전투에서 크게 분하게 여긴 적장은 병력을 크게 증원해 가지고 와서 통역관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기를 “피차가 몰래 숨어 다니니 다만 병력만 손실될 뿐 승부가 결판되지 않노라. 장수들끼리 칼로 무예를 겨루어 자웅을 겨루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즉시 “좋다.” 하고 말을 타고 나가 싸우려 하였다. 좌우의 측근들은 “적장은 청국과 러시아의 두 전투에 참전하여 검술과 무예가 뛰어난 백전노장입니다. 운강(이강년)께서는 평소에 일찍이 말을 달리고 칼을 써 본 일이 없으니, 어떻게 적을 대항하시렵니까?” 하고 만류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적이 무예를 겨루자고 하는데 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약함을 보이는 것이다.󰡓하고는 기상이 당당하게 말을 달려 나가자, 적장도 이것을 보고는 말을 달려 나왔다. 그리하여 상거가 멀지 않았는데, 이곳에 서너 개의 바윗돌이 무성한 풀 속에 솟아 있었으므로 운강(이강년)은 돌에 채여 갑자기 말에서 떨어져 무성한 풀 속으로 나뒹굴었다. 적장이 급히 와서 돌아보는 즈음에 운강(이강년)은 한번 고함치고 칼을 뽑아 솟구쳐 오르니, 적장은 그만 말 앞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운강(이강년)은 그의 머리를 베어 돌아오니, 적병들은 모두 벌벌 떨었다. 백남규가 크게 함성을 지르며 독전하자,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혈전을 벌여 적병을 태반이나 죽였다.
다음 11일에도 적은 남면 방향에서 40여 명, 장림에서 25명이 응암 쪽으로 크게 협공해 옴에 우리 군사는 소백산 마루로 달아나는데, 운강(이강년)이 뒤를 막고 바위 아래 앉아 각 군에 엄한 호령을 내리니, 두 선봉장이 포군들을 독려하여 바위 사이에 잠복하고 협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므로, 간신히 고개 마루에 닿아 위기를 모면하였다. 첫 겨울에 눈보라는 사람의 살과 뼈를 찌르고, 더구나 종일토록 주리고 목이 말라서 사졸들이 엎어지고 쓰러지는 것이었다. 단양읍 박포수가 새로 군대에 편입되어 군중 제도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뒤떨어져 고개 위에 남아 있다가 밤이 되니 얼어 죽었다.
청풍 선비 임석준(任奭準)이 갑자기 적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영천(榮川) 병참소로 끌려갔는데, 소리를 높여 크게 꾸짖으며 굽히지 않고 대항하다가 죽었다.
12일에 영춘읍으로 퇴군하였다가 며칠 후 수하리(藪下里)·의풍(義豊)을 거쳐 고치(高峙)를 넘어 순흥으로 진출하였다.
신태식(申泰植)의 「정미년 창의가」의 죽령 전투 가사는 다음과 같다.

토벌대 오백 명은 예천으로 넘어오고
수비대 사백 명은 원주·제천 덮어오고
마병대 백여 명은 충주·청풍 들어온다
매바우 유진하고 철통같이 단속할 제
기호를 높이달고 헌화를 일금하라
각 장관 취립하고 군령을 전포할 제
본진선봉 전세영은 죽령을 방어하고
호좌선봉 하한서는 장임을 수습하고
좌익·우익 돌격장은 서령을 견수하고
전군·후군 좌군장은 남태에 칩복하고
사령 유격 중군장은 중앙에 유진하되
적병이 승세하니 일시에 포방이라
군령을 어긴 자는 사정없이 참하리라
미시 말 신시 초에 천지가 뒤눈난다
속사포 기관포는 탄알이 빗발이요
천보대 거래대는 소리가 벽력이라
화약연기 안개되어 동서를 난분일네
사오일 지내도록 승패를 불분터니
칠십여 전 싸운 후에 적병이 퇴진하네
군사를 수습하니 총맞인 자 칠팔이라
적병을 수렴해서 수백 명 사망일세

죽령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 기록으로 『독립운동사 의병자료집』3, 『조선폭도토벌지』p.720의 ‘경상북도 및 부근에 있어서의 폭도 토벌개항표’에 영천 수비대가 11월 3일 죽령 북록(北麓)에서 폭도 약 400과 싸워 8명을 사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이상의 여러 기록으로 보아 의병 측이 대체로 기선을 잡고 죽령 지역을 장악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11월 11일에는 대적과 싸워 종일 불리하여 다음 날 영춘으로 퇴군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두 차례의 죽령 싸움과 사인암 등지에서 대병력의 일본군과 여러 차례 싸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일본군이 여러 차례에 걸쳐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에게 참패를 당한 보복으로 언제 어떠한 형태로 습격을 해올지 모르는 일이고 또 전투란 선제공격에서 승률이 높은 것이지 적의 공격에 저항하는 싸움은 항상 불리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순흥에는 일본군이 머물러 있고 또 앞서 10월 28일 영남지방에 흩어진 의병들이 풍기·순흥 등지에서 노략질하여 주민들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종사 이천일(李千一)을 보내어 사실 여부를 알아보고 모두 소집하여 오게 하였던 바도 있었기 때문이다.
11월 15일, 순흥을 습격하였는데 적이 기미를 알고 벌써 달아났다. 그래서 순검의 집 3채를 불태우고 군사를 정돈하여 물러나려 하는데, 고을 안 백성들이 앞을 다투어 술과 밥을 가지고 나와 노상에서 위로하며 말하기를, “적당(賊黨) 김창수(金昌壽)의 독한 학정은 원수인 왜놈보다도 더하여, 온 고을이 보전하기 어려우니 머물러서 진압하여 주시옵소서.” 하는 것이었다. 운강(이강년)은 “형편이 오래 머물기 어렵다.” 하고 의풍(義豊)으로 회군하였다.
11월 16일, 거석리에 유진하면서 다음과 같이 부대편성을 일부 보충하였다.
도창의대장: 李康秊 임명일 추후로 임명된 장임자 임명일
중군장: 金相台
좌선봉장: 河漢瑞
우선봉장: 白南奎
전군장: 尹基榮
좌군장: 李容魯
우군장: 李重鳳
감군장: 李世英
좌감군장: 李世英
총독장: 李萬源
사서(참모): 姜順熙 8. 19
8. 19
8. 19
8. 19
8. 19
8. 19
8. 19
(11. 22)
8. 19
8. 19 우군선봉장: 權用佾
후군장: 申泰元
좌익장: 金永軾
병진장: 金商翰
우익장: 鄭淵錣
우군장: 邊鶴基
독전장: 尹容九
소모장: 朴右泳
장의장: 李明相
방수장: 宋在賢 9. 7
9. 7
9. 7
10. 15
11. 6
11. 6
11. 6
11. 22
11.
11. 22


우선봉장 백남규(白南奎)가 그 부친이 적에게 사로잡히므로 해임하고 허섭(許燮)으로 대신하였다. 나중에 허섭이 패전하여 적에게 항복하게 되자 의병이 적에게 많이 희생되었다. 그리하여 참모와 여러 군사들의 청원에 의하여 백남규를 도로 우선봉에 임명하고 정연철(鄭淵錣)로 우익장(右翊將), 윤용구(尹容九)로 독전장(督戰將)을 삼았다. 그리고 영좌도총(嶺左都摠) 변학기(邊鶴基)가 군사 40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류하므로, 그대로 우군장(右軍將)에 임명하여 관동(關東) 지방의 여러 진을 연합하여 오게 하였다.
순흥에 잠복해 있던 수십 명이 소천(韶川)으로부터 남대동(南大洞)에 침범한다는 말을 듣고 좌·우 선봉장으로 골짜기 어구를 굳게 지키게 하였다.
11월 17일, 적이 장항으로 온다는 정보를 듣고 출전하였으나 오지 않으므로 탐지하여 보니 헛소문인 것을 알고 영월 직곡(直谷)에 주둔했다가 다음 날(18일) 원직상(元稷常)에게 편지를 보내어 속히 진중으로 나오게 하고 응현에 주둔하였다. 밤에 적 20여 명이 황정동(黃汀洞)에 머물러 있다는 말을 듣고, 좌·우 선봉장에게 명하여 응현에 복병하게 하였다. 우군이 먼저 삼양리(三良里)에 주둔하는데, ‘적 30여 명이 금천(今川)에 있다.’고 보고하므로, 경솔히 싸우지 말도록 주의시켰다.
11월 19일, 차병률(車炳律) 편에 의암 류인석 선생에게 글을 올렸다. 장의장(仗義將) 이명상(李明相)이 글을 보내어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므로 빨리 오라고 하였다.
11월 20일, 좌·우 선봉장이 회군하여 순흥 싸움에 적이 이미 도망갔으므로 운강(이강년)은 대략 시위만 하고, 또 주민들을 타일러서 안심하고 일하게 하였다. 이현범(李鉉範)이라는 자가 있어 호진(湖陣: 호남의 의병부대)이라고 자칭하며 마구 불장난을 하여 공청이나 민가가 모두 잿더미가 되었으며, 여기저기서 백성의 농사짓는 소 12마리를 빼앗았다. 운강(이강년)이 이 말을 듣고 글을 띄워 영남 백성들에게 알려 주고, 또 영을 내려 빼앗겼던 소를 낱낱이 찾아 주게 하였다. 영천(榮川) 선비 김경락(金敬洛)·김원낙(金元洛)이 와서 인사드리고 곧 갔다.
11월 22일, 남필원 장군이 도총(都摠) 이중희(李中熙)와 함께 정족(鼎足)의 형세를 만들어 영월·평창·정선 3고을의 적을 소탕하라고 하므로 운강(이강년)은 허락하였다. 박우영(朴右永)으로 소모장을 삼았다. 좌감군(左監軍) 이세영(李世永)이 군사 90명을 거느라고 와서 합류하므로 녹번리(綠藩里)에 주둔하게 하였다가 다시 좌군장(左軍將)의 직위로 덕천리(德川里)에 옮겨 주둔하게 하였다. 삼양리(三良里) 송재현(宋在賢)으로 그 지방 방수장(防守將)을 임명하여 군사와 백성들을 엄밀히 단속하게 하였다.
11월 25일, 행군하여 영춘 각동(角洞)에 주둔 중에 정탐꾼의 보고에 ‘적 30명이 옥동(玉洞)에 왔는데, 그곳 지형이 험하여 적을 소탕할 수 있다.’고 하므로, 연구하고 있는 중에 문득 회곡(檜谷)에서 김현준(金鉉濬)·원직상(元稷常)으로부터 비밀 보고가 왔다. 그 보고에 ‘적 1대가 동면 점촌(東面 店村)으로부터 의풍(義豊)에 이르렀다.’ 하고 의풍에서의 보고도 역시 그러하였다. 또 장의장 이명상의 급보에 ‘적이 동쪽에서 오는 것을 파수병이 급히 치니, 적은 계곡(溪谷) 속에 숨었는데 본진은 이미 오사진(梧沙津)을 건넜으니 서로 미칠 수 없다.’ 하며 동북쪽에서 급보가 있는데, ‘형세가 대적할 수 없다.’고 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부득이 본진·별진·좌군 도합 3백 명을 거느리고 괴진(槐津)을 건너는데 군사가 절반도 못 건너서 보니 적이 지척(咫尺)에 있었다. 운강(이강년)이 배를 재촉하여 먼저 상륙하며 좌·우 선봉장을 지휘하여 정예군 80명을 거느리고 율치(栗峙)에 매복하게 하였다. 이윽고 구역리(九歷里) 정탐꾼의 보고에 ‘적 18명이 노동(盧洞)을 지나 영춘읍으로 가려 한다.’고 하므로 중군장 김상태에게 군사 5초를 주어 백자동(栢子洞)에 매복하게 하고, 좌군장 이세영에게 군사 6초를 주어 남북진(南北津)을 파수하여 서북쪽의 적을 방비하게 하였다.
처음 이명상이 민영팔(閔泳八)과 친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맹서하였는데, 의병이 일어나게 되자 영팔(민영팔)은 도망가니 명상(이명상)이 혼자서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운강(이강년)의 지휘를 받다가 후에 적에게 패하여 죽었다.
11월 26일, 해 뜰 무렵에 1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단양 유치(楡峙)에서 싸웠는데, 바라다보니 기치(機峙)에 연기와 불길이 하늘에 닿았고, 또 수하리(藪下里)에는 적진이 비어 있으므로, 적이 우리 편에서 복병한 것을 알고 어두운 밤에 달아난 것으로 생각하였다. 얼마 후에 흰 옷 입은 적 셋이 기치로 향해 오고, 적 둘은 시냇가에 엎드렸고, 또 10여 명의 적이 대치하여 왔다. 운강(이강년)이 시험 삼아 공격하게 하였으나 적이 응전하지 않더니, 이윽고 적 수백이 도창곡(道昌谷) 상봉으로부터 총을 쏘는데, 우리 진은 험한 곳을 상실하여 감당할 수 없으므로 그만 부대가 무너졌다.
운강(이강년)의 맏아들 승재(이승재)가 운강(이강년)을 보호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물러나서 마대(馬垈)로 퇴각하여 머물렀는데, 따라온 군사가 겨우 수십 명이었다. 이튿날 회곡에 당도하니 이윤순(李潤淳)이 군사를 대접하였다.

○ 백자동 전투 대승

28일에 중군 김상태가 남천에 와서 보고하기를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죽이고 전리품을 많이 노획하였으며 전사한 주범순(朱範淳)·정겸동(鄭傔童)과 포군 한 명의 시신을 수하리 주민들에게 매장을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재촉하여 도창령을 넘어 지세가 험한 사동(寺洞)에 유진한 것이다. 이튿날 ‘적병이 다시 수하리에 왔다.’고 하매 운강(이강년)이 생각하기를 ‘이 곳이 사면으로 막히기는 하였지만, 만약 적이 요긴한 목을 막는다면 아무리 험한들 믿을 수 있느냐?’ 하고, 밤 자정에 군사를 재촉하여 20리를 더 가서 보산 원도상의 집에 이르니 동녘이 밝으려 하였다. 상산진(商山津)을 건너려 하였는데 중군장이 고집하며 “적이 벌써 중요한 나루터와 좁은 목을 다 지키고 있은즉 경솔히 나갈 수 없다.”고 하고 군사들도 역시 무서워하고 겁내므로 그만 머물러 주둔하였다.
11월 30일, 해 뜰 무렵에 피화리(避禍里)로 올라갔는데, 오전 때에 적 수백이 영춘에서 바로 궁동으로 쳐들어오니, 그 곳에 별진 소모장 윤성구(尹成九)가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가 지자, 최덕장(崔德章) 등을 보내어 상산 나루터를 정찰하게 하고 겨우 동리를 떠났는데, 문득 와서 보고하기를, ‘적이 斜只院과 佳野 두 곳을 단단히 지키고 있어 전진할 수가 없다.’하자 모두들 실색하고 중군도 두려워하였다.
운강(이강년)이 부득이 하여 고음사동(古音寺洞)으로 향하는데 어귀를 못가서 문득 적의 총포소리가 뇌성같이 들리니 모두들 사방으로 흩어져서 호령하여도 막을 수가 없었다. 싸워 보지도 못하고 대참패를 당하였다. 다시 덕장(최덕장)을 불러 정탐을 시켜 적이 이미 보산으로 들어간 것을 알고, 성황(城隍) 숲을 파수하게 하였으나 중군 이하가 모두 달아났다. 큰 아들 승재(이승재)가 부상한 군사 이도악(李道岳)을 데리고 뒤에 있으므로 운강(이강년)이 염려하니, 덕장(최덕장)이 “염려 없습니다.” 하고 장담하였다. 운강(이강년)은 강병수(姜秉秀)·최덕장과 함께 추위를 무릅쓰고 눈을 맞으며 절벽을 기어올라 고개를 넘었는데, 어디서 은은히 부르는 소리가 들리므로 운강(이강년)은 기쁘기도 하고 의심도 나서 종사를 시켜 탐지해 본즉, 포수 변만성(卞萬成)이었다. 함께 산을 내려오는데 두어 칸 초가가 숲 속에 있으니 이것은 보산의 박 참봉(朴參奉)이 피난하기 위해 지어 둔 것이었다. 밥을 지어 요기하고 서로들 가로 세로 누워 잤는데 어느 사이에 동쪽이 밝았다.
영춘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26일 오전 鳥飼(도리카이) 中隊는 永春 동남 약 30리 지점인 山嶺에 도달하였을 때 이강년이 지휘하는 약 5백의 폭도와 遭遇하여 이것을 공격하여 그 60을 사살하고 북방으로 궤주시켰다.
河野(코노) 중위가 인솔하는 1소대는 동일 오후 영춘 남방 약 10리 지점인 산곡에서 폭도 약 2백과 충돌, 그 35를 사살하고 그를 궤란시켰다.
26일 이래 이강년이 인솔하고 있는 폭도는 영월 동방에 집합하고, 그 일부는 영춘 부근에서 출몰하고 있다는 것을 정찰한 鳥飼(도리카이) 中隊를 영월방향에서 전진 시키고, 矢野(야노) 中隊는 古直嶺 방향에서 영월 동방 谷地를 향하여 행동을 개시 시키고, 또 영월·삼척 수비대를 시켜 이에 책응케 하였다.

이 기사의 일자 및 병력 규모와 줄거리가 『운강창의일록』의 기묘, 계미일조와 거의 부합한다. 일본 측 기록은 패전과는 달리 성공한 예일 경우 비교적 자세한 것이다.
저녁에 재를 넘어 상보산(上寶山)에 당도하니, 마을 안의 옛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이었다. 이경칠(李景七)이 닭을 굽고 술을 부어가며 위로하였다. 큰아들 승재(이승재) 역시 성금(成金)에서 와서 뵈며 “중군이 덕가라(德加羅)에 머물러 있다.”고 하였다. 그대로 고음사동으로 가서, 흩어진 군사 수십 명과 여러 종사들을 불러 합쳤다. 삼경에 행현(杏峴)을 넘어서 해일(海日)에 이르자 좌선봉으로 하여금 삼척(三陟)·황지(黃池) 등지로 가서 군사들을 소모하게 하였다.

○ 험로 개척, 부대 이동

12월 2일∼12일까지의 운강(이강년) 부대의 이동과 그 참상은 다음과 같다.
2일 고음사를 떠남, 응의곡에서 저녁을 먹고 주민의 안내로(적의 작전을 피함) 다리안산(多利安山)을 넘어 잔도(棧道)를 타고 나와, 눈 쌓인 고개와 얼음 덮인 절벽에 자빠지며 엎어지며 육태령(六泰嶺)을 넘어 50여 리를 가서 두음동(斗音洞)에 이르고, 3일 새벽 4시에 밥을 재촉하여 먹고, 또 가서 해뜰 무렵에 황장우(黃膓隅)와 사인암(舍人岩)을 지나 성교영(成敎永)을 시켜 앞길을 탐지하게 하고 가차산(加次山)·예천을 거쳐 명전에 당도하였다. 먼저 번에 여러 장수와 참모들이 각처에 흩어져 있어, 군중의 형편이 부진(不振)하였으므로 편지를 보내어 도총독 이만원, 소모장 이중봉, 선봉장 권용일을 불러 함께 군사를 소모하여 명전에 머물러 주둔하고, 권용일을 좌·우선봉장에 임명하였다. 1백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단양 궁동(宮洞)에 이르렀다.
7일에 그간 춥고 굶주려서 행군하기 어려웠으나 운강(이강년)은 ‘반드시 배양산으로 가야만 죽음을 면하게 된다.’고 하며 군사를 독려하여 넘어져 가면서 올산(兀山)에 왔고, 8일 밤에(적병 접근 소식을 받음) 뒷산 고개에 올라 산등성을 돌고 돌아서 도솔봉에 이르렀다. 오후 6시경에 풍기 땅으로 넘어왔는데, 비바람이 크게 들이치니 군사들이 나아갈 수가 없었다.
운강(이강년)의 생각에 적의 병참이 이곳에서 20리 밖에 되지 않는데, 만일 큰 길로 가다가는 어떤 변이 생길지 모르겠으므로, 독촉하여 묘적령(妙積嶺)을 넘게 하였다.
캄캄한 밤에 바람은 세게 부니, 의관을 정돈하기 어려우며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단양 사동으로 향해 가는데 군사들이 모두 길을 잃어 가시밭을 헤치기도 하고, 깊은 골짜기로 굴러 떨어지기도 했다. 먼동이 틀 무렵에야 동구에 이르렀는데, 몇 가구의 민가가 매우 초라하였다. 거기 들어가 지나온 경로를 이야기하고 새벽밥을 짓게 하였다(9일).
정오에 떠나서 산행하여 성금으로 향하였는데, 몇 리를 못 가서 절벽을 만나 새벽 2시경에야 도착하니(10일) 군사들이 모두 지쳤다. 하루를 머무는데 동리 백성들이 좁쌀로 만든 떡과 밥을 먹고 떠나서(11일) 미륵리를 지나 수내촌(水內村)에 닿았다. 단양 도영장(都領長) 차대성(車大成)이 와서 ‘양식이 없다.’고 하므로, 그 면의 보류미 1섬을 나누어 주었다. 중군장이 왔기로 함께 맹이현(孟伊峴)을 넘어 김병식(金炳式)의 집에 닿았는데, 병식(김병식)이 더운 국물과 술을 받아와 한잔 마시게 하였다. 계속 군사들을 재촉하여 행현(杏峴)을 넘어 다시 12일에 고음사에 이르렀는데, 운강(이강년)이 너무 지쳐서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이튿날은 운강(이강년)의 병이 심하여 그대로 머물렀으며, 파수를 잘 보도록 하고 널리 적정을 탐지하였다. 적이 금곡(金谷)에서 상산진을 건넜다는 말을 듣고 부대를 궁곡으로 옮겼다.

○ 복상동 전투 대패

12월 16일, 배양산으로 가려고 장항령(獐項嶺)을 넘는데 정탐꾼의 보고에 “4군의 적이 영(嶺) 부근에 가득 찼다.”고 하니, 군사들이 모두 기운이 꺾여서 전진할 생각이 없었다.
운강(이강년)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의논한바, 도총독 이만원과 도선봉 권용일이 앞장서서 “영을 넘어 사실 여부를 탐지해 보자.” 하고, 급히 군사들을 몰아 영을 넘어 보산 원도상의 집에 이르렀다. 주인이 장병들이 굶주리고 추워하는 것을 보고 재촉하여 밥을 지어 먹는데 어느덧 닭이 울었다.
적이 장차 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도총독 이만원, 우군장 이중봉으로 하여금 수십 명을 거느리고 나가서 정탐 보고하게 하고, 운강(이강년)은 중군장 김상태, 선봉장 권용일과 함께 군사를 독려하여 추위를 무릅쓰고 행진하여 복상동(復上洞)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잠시 후에 한 동자가 방안으로 뛰어 들어와서, “적이 왔다.”고 하므로, 공이 나가 본즉, 이미 포위망을 벌이고 탄환을 비 쏟듯 하므로, 선봉은 맞불질을 했으나, 군사는 약하고 탄환은 모자라니 어찌 저항할 수 있으랴. 급히 별포장(別砲將) 이문경(李聞慶)에게 명령하여 총을 쏘게 하니,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였다. 갈팡질팡하며 임현 서쪽 작은 산기슭의 수림이 울창한 곳에 이르니 날이 벌써 밝았다.
산 아래 작은 집을 찾아 내려가서 잠시 쉬는데, 주인이 조밥을 바쳐서 주리고 추운 것을 조금 면하고 곧 떠났는데, 그 동안에 몇 사람이 죽고 몇 사람이 생포된 지를 몰랐다.
12월 17일, 방두사(旁杜寺)에 이르러서 정확한 전황을 최덕장의 아버지에게 물어서 싸움에 패한 형편을 알았다. 그리고 최(최덕장)씨 아버지가 “지체하지 말고 떠나라.”고 권하므로, 운강(이강년)이 부득이 산에 올라가서 동정을 살피노라니, 홍안동(洪安東)이라는 장사군이 곧 와서 엎드려 한참 동안 울고 대략 형편을 말하는데, “중군장은 죽음을 모면한 것 같으나 참모 원하정(元荷汀)·신숙(申橚)·신명희(申明熙)와 소모장 이중봉(李重鳳), 총군 이달(李達) 등 10여 명이 모두 생포되었으며, 탄환에 맞아 죽은 이도 7명입니다.” 하였다. 운강(이강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거의(擧義)한 지 12년에 이와 같이 패배한 때는 없었다.”

하였다. 이내 집강을 찾아 죽은 이들을 후히 매장해 달라 부탁하고, 곧 돌아오는데, “적이 다시 복상곡(復上谷)에 왔다.”고 보고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리하여 운강(이강년)은 초저녁에 5, 6명의 장병을 거느리고 영을 넘어 갈팡질팡하며, 삽둔의 진사 이택선의 집에 이르러서는 분이 나서 병을 더쳐 밤새도록 신음하였다.

○ 운강(이강년) 의병부대 경기 지역 진주

12월 18일, 덕우산촌(德友山村)에 주둔하였다. 이 날 선봉 하한서가 10여 명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만나고, 총독 이만원은 종사 2명, 군사 4명과 함께 와서 만났으며, 좌군장 이세영이 역시 와서 각 장병들이 패하여 흩어지고 진중으로 나오지 않는 죄를 따졌다. 강수명(姜秀明)이 배금용(裴今用)과 함께 눈을 맞으며 찾아왔고, 정선 사람 김성칙(金聖則)이 강림(康林)에서 와서, “후군장 주광식이 적을 만나 패하였다.” 하였다.
박회당(朴悔堂, 貞洙, 박정수)에게 회답하는 편지를 써서 강수명에게 주어 돌아가게 하였다. 청풍 사는 이진원(李進源)은 그 아우 만원(이만원)이 복상동에서 죽었다는 말을 듣고, 눈길에 와서 형제가 서로 부여잡고 위로하였다. 우군장 이세영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지소덕리(紙所德里)에서 모이기로 하고, 행군하여 월계(月桂)에 이르렀다.
12월 24일, 좌군 중군 정해창(鄭海昌)이 군사를 거느리고 소오리(巢梧里)에서 월계로 와 합세하였다. 민가가 매우 적어서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없는 형편이므로, 부대를 나누어서, 한 부대는 전동(錢洞)에 주둔하고, 한 부대는 본촌에 주둔하게 하였다.
12월 25일, 행군하여 전동에 이르렀는데, 동구의 산 위에서 한 사람이 크게 외치기를 “적이 옹산(甕山) 뒷고개로부터 온다.”고 하므로 군사들을 재촉하여 동리를 나가니, 적이 소오에서 들락날락하는 것이 멀리 보였다. 그래서 각 군사들이 다 물러나는데, 별초군(別抄軍) 박갑주(朴甲冑)만이 부하 10명을 거느리고 강변에 매복하였다가 정면으로 적을 쏘니, 적 3명이 죽고 2명이 부상하였다. 적이 마침내 산으로 올라갔는데 날아드는 탄환을 비 쏟듯 퍼부으니, 운강(이강년)이 군사를 지휘하여 월계봉(月桂峰)으로 올라가서 한참 동안을 지휘하고 싸우는데 총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운강(이강년)이 한편으로 요긴목을 엄밀히 지키면서 차츰 군사를 정돈하여 퇴각하였는데, 상판운(上板雲)에 이르기까지 10여 리에 혹은 고개 마루에서 식사를 하고, 혹은 마을 아래에서 식사를 하였다. 오전 2시에 삼가산(三街山) 아래에 이르러 주둔하였다.
12월 27일, 후군 선봉 이창교(李昌敎)와 온양 의병장 서병림(徐丙林)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함께 행동하기를 청하였는데, 운강(이강년)이 다만 후군에게만 함께 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행군하여 한 고개를 넘어 신기(新基)에 이르니, 좌군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는데 후군과 온양진은 이미 와 있었다. 밤이 자정이 가까워 오므로, 각 군에 명령하여 그대로 주둔하게 하였다.
12월 28일, 행군하여 산마루를 넘어 무교동(武膠洞)에 이르니, 평창의 적 병참이 멀지 않고, 또 토왜들이 우리를 가만히 엿보고 있어 더 전진할 수가 없었다. 영을 내려 회군하여 삼령(三嶺)을 넘어서 대화산(大化山) 골짜기에 이르렀는데, 포군 조만돌·박순명(朴舜明) 등 7명이 도망하여 민가에 숨어 있으므로, 정재덕(鄭在德)에게 명령하여 잡아 오게 하였다. 그리고 군중에 영을 내리기를, “적이 따라올까 염려되니, 오늘은 점심을 먹지 말고, 빨리 재를 넘어야 한다. 영을 어기는 자는 군법을 시행하겠다.”고 하였다. 그런데 몇 마장을 못 가서 조만돌이 또 달아나 숨으니, 도망치려 한 것이었다. 운강(이강년)이 곧 칼을 빼어 목베었다. 그리고 20리를 가서 봉평 추항(蓬坪 杻項)에 주둔하였는데, 너무 피곤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튿날 녹산대(鹿山臺)에 이르러 중참을 먹고 또 행군하여 흥정리(興鼎里)에 이르렀다. 조집강(趙執綱)이라는 영원 사람 조중익(趙重益)의 종제가 매우 성의있게 대했다.
12월 30일, 편강렬(片康烈)에게 명하여 충재 오인영(忠齋 吳寅泳)과 태은 추성구(泰隱 秋性求)의 안부를 물은즉, 정병화(鄭炳和)라는 자가 의병이라 자칭하고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오·추(오인영·추성구) 2사람도 매를 맞고 상처를 입어 아직도 병석에 누웠다고 하므로, 운강(이강년)이 크게 노하여 글을 지어 면내에 게시하였다. 그리고 정해창을 임명하여 중군으로 삼고, 하한서로 도선봉, 박갑주로 좌선봉을 삼아서 노면지(盧勉墀)·서병림과 함께 일을 의논하게 하였는데, 문득 보고가 오기를 “이현(梨峴)의 적이, 흩어져 도망간 총군 5명을 습격하여 죽였다.”고 하였다. 운강(이강년)이 형편상 대적하기 어려움을 알고 퇴각하여 오위장 유경원(五衛將 兪慶源)의 집에 주둔하고, 글을 지어 주인을 시켜 화남 박장호(華南 朴長浩)에게 전하고, 겸하여 적의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는데, 이튿날 화남(박장호)이 종사 두어 명을 거느리고 와서 만났다. 영 밑 강씨(姜氏) 집에 군사를 머물렀다.

원주·단양 지역 운강(이강년) 부대 활동도

제4장 1908년의 의병전쟁(후기의병)

1. 서울진공 연합작전

1907년 하반기에 편성되어 1908년 전반기에 서울진공작전을 전개한 13도창의대진 연합의병부대의 국권회복을 위한, 연합부대 편성의 경위를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기록은 오늘날 찾아 볼 수 없다. 『운강창의일록』에도 중남 이인영과의 만남은 있으나 작전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자료가 운강(이강년)의 서울진공작전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이인영 문답조서」에 의하면 이인영은 각 의병부대를 다음 과 같이 도별로 진영을 편성하였다.

① 제2회 이인영 문답조서(음력 11월경)의 진용
十三道倡義總大將 李麟榮(이인영)
鎭東倡義大將(경기도·황해도) 許蔿(허위)·[亞將 朴正斌(박정빈)]
湖西倡義大將(충청도) 李康䄵(이강년)
全羅倡義大將(전라도) 李泰守(이태수)
嶠南倡義大將(경상도) 申乭石(신돌석)
關東倡義大將(강원도) 閔肯鎬(민긍호)
關西倡義大將(평안도) 方仁寬(방인관)
關北倡義大將(함경도) 鄭鳳俊(정봉준)
② 일본 헌병대 보고서의 진용
十三道倡義大將 李麟榮(이인영)
軍師長 許蔿(허위)
湖西將 李康䄵(이강년)
鎭東將 李泰榮(이태영)
安撫將 金俊洙(김준수)
大隊長 延基羽(연기우)
③『대한매일신보』 1909년 9월 21일자 ‘이인영씨 약사’와『기려수필』의 이인영조의 진용
十三道倡義大陣所 總大將 李麟榮(이인영)
軍師長 許蔿(허위)
關東倡義大將 閔肯鎬(민긍호)
湖西倡義大將 李康䄵(이강년)
嶠南倡義大將 朴正斌(박정빈)
鎭東倡義大將 權重熙(권중희)
關西倡義大將 方仁寬(방인관)
關北倡義大將 鄭鳳俊(정봉준)

이상 각 진용에 호서대장으로 운강(이강년)이 편성되어 있으며, ‘동문답조서’ 중에,

丁未 11월 양주에 집합하였을 때 각 주창자들로부터 누가 조정자가 없으면 안된다고 하여 대장들이 협의한 결과 나를 13도창의대장에 추대한 것.

이라 하고 또 헌병대 동 보고서에는,

11월에 이르러 홍천·춘천을 거쳐 양주에 이르자 이때 허위·이강년이 와서 합하여 범48진 약 1만에 달하였다. 허위로서 군사로 삼고 이강년을 호서장으로….

라 한 기록이 있다.
그리고 1908년 4월 21일, 군사장 허위는 전사한 민긍호를 제외한 각도 창의대장의 동의를 얻어 전국 13도의 의병의 재거(再擧)를 요청하는 통문을 전국에 발송하였다라는 기사가 『대한매일신보』에 실렸다. 즉

의병장 허위·이강년·이인영·류인석·박정빈 제씨가 본월 21일에 속히 기병하라고 통문을 13도에 발송하였더라.

허위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 발송한 것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은 자료와 연구 내용을 미루어 보아 운강(이강년) 부대가 소백산을 넘나들면서 활약하던 경북 서북부와 충북 동남일대를 떠난 일로 북진한 이유의 하나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판단된다.
그리하여 1907년 12월 이후 운강(이강년) 부대는 곧바로 경기 지역으로의 이진이 어려워 강원 지역으로 우회하여 경기 동북지방으로 진격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2. 경기 북부지역 전투

1908년 1월 1일(음력 11. 28) 화남(박장호)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부항(缶項)을 넘었는데, 눈 쌓인 고개, 얼음바닥에 넘어지고 엎어지며 내려와서 생곡(笙谷)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저녁에 행군하여 도찬주점(道贊酒店)에 이르러, 화남(박장호)과 작별하고 너댓 걸음을 못가서 갈림길이 나오는데 밤이 어두워 앞 부대에서 갈 길을 잃고 잘못 검산(黔山)에 이르렀으니, 길을 알 던 사람도 어디로 갈 지를 몰라서였다. 종사 최준기(崔俊基)로 하여금 앞을 서게 하고, 오던 길을 도로 가서 비로소 길을 찾아 한 큰 내를 건너 효곡(孝谷)에 당도하니, 홍천(洪川) 의병부대의 종사 이상신(李象信)이 앞길을 인도하여 홍천 동창(東倉)을 지나 여창(筎倉)에서 유숙했다. 이튿날은 괘석리(掛石里)·내동(內洞)을 지나 삼가(三街)에 유숙하고 4일에 삽교·졸운(卒雲)을 지나 인제강을 간신히 건넜다. 다시 산으로 가서 다라항(多羅項)을 지나 낭천 간척리(狼川 看尺里: 화천) 에 주둔하였다.
1월 6일 새벽 적이 기습하므로 군사들을 재촉하여 마을 뒤 송림 사이로 올라가니, 적이 먼저 사격하여 왔다. 우리 군사들이 산에 의지하여 싸우는데 적의 탄환이 화남[華南(박장호)]의 오른쪽 볼기에 맞고, 또 운강(이강년)의 오른쪽 볼기에도 맞았다. 운강(이강년)이 부대를 나누어 반격하게 하자, 좌선봉과 별포 한병선(韓秉善)·임차손(林次孫)이 앞장서 나가며 힘써 싸우고, 양총을 가진 군사 수십 명이 일제히 둘러싸며 공격하니, 적의 네 놈이 탄환에 맞아 죽고 나머지는 모두 달아나 낭천읍(狼川邑)으로 돌아갔다. 좌선봉은 ‘집강과 마을 사람들이 적의 소식을 알려 주지 않고, 도리어 적을 위해 우리의 동태를 알려 준 것이 빤히 보인다.’고 하면서 민가 5채를 불태우는 것을 운강(이강년)이 사람을 달려 보내어 급히 제지시켰다.
군사들을 지휘하여 마을 앞 작은 산기슭에 이르렀는데, 도선봉의 총포군이 전사하였으므로, 마을 사람들을 불러다 잘 묻어 주게 하였다. 앞의 적이 겨우 물러갔는데, 또 적 수십 명이 영(嶺) 위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장병들은 주리고 춥고, 화약과 탄환도 다되어 다시 싸우기 어려우므로, 그대로 군사들을 산마루에 집합시켰다가, 밤에 양통령(陽通嶺)을 넘어 고탄성(古灘城) 밑에 당도하였다.
1월 7일 새벽 2시경에 골운 일남현(骨雲 一南峴)을 지나 가현(可峴)을 넘는데 갈림길이 있어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박화남(화남 박장호)은 아직 오지 않으므로, 척후장 조정희(趙正熙)를 시켜 가서 맞아오게 하고 또 양양(襄陽)의 김종사(金從事)로 하여금 갈림길에 서서 기다리게 하였다. 그런데 화남(박장호)은 군사들이 일남에 주둔한 것을 알고 일남강을 얼음 위로 건넜다. 지겸(止謙)을 지나 홍적령(洪逖嶺)을 넘어 가평 광악리(加平 光岳里)에 닿았다. 이튿날 건천(乾川)에서 적군 3명을 총살하고 광악령(光岳嶺)에 오르니, 깎아지른듯한 벼랑에 눈이 쌓이고, 수목은 하늘을 덮도록 우거졌는데, 새로 난 한 가닥 길이 미끄러워 발을 붙일 수가 없어, 십전구도(十顚九倒)하며 간신이 대청동(待淸洞)에 이르렀다.
1월 10일 화남(박장호)은 일남에서 작별 후로 곡운(谷雲)을 지나, 갖은 고생을 다하고 와서 만났다. 그래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는 계획을 결정하였는데, 지형이 비록 경기에서 가깝다 하지만 험하고 튼튼하여 근거를 삼을 만하였다. 그러나, 군사들이 감자밥 밖에는 먹을 것이 없어 주림을 면치 못할 것 같으니 역시 근심스러운 일이었다.
1월 17일 좌선봉 박갑주(朴甲冑)가 와서 고하기를 “선봉 소속의 조억선이 포수 10여 명을 유인하여 함께 도망가려 한다.” 하므로, 곧 종사 최준기를 시켜 잡아다 별포청(別砲廳)에 가두었다가 목베어 매달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본을 보였다. 척후장 조정희를 시켜, 가까운 동리에 서울로 갈 양곡을 저장하여 있는 것을 탐지하여 군량에 대비하게 하고, 또 적의 형편도 알아오게 하였다. 한편 홍봉곡(洪鳳谷)을 보내어 격문을 서울에 전달하였다. 용소동의 박경팔(朴敬八)을 방수장(防守將)으로 삼았다.
1월 27일 운강(이강년)은 광악리에서 군량을 계속 조달하기 어려우므로 도성령을 넘어 영평 백일평에 주둔하고 판서 조동면(判書 趙東冕)의 사음(舍音) 황금복(黃今福), 동장 심정섭(沈貞燮) 을 불러 벼 1백 20석을 쌀로 찧어다 바치게 하였다. 동민들이 돼지·술을 가지고 와서 대접하였다. 오후에 행군하여 영선동(永仙洞)에 당도했다. 이튿날 회군하여 가평 행랑촌(加平 行廊村)에 이르러 점심을 먹고, 귀목령(貴木嶺)을 넘어 논남기로 돌아왔다.
1월 30일에는 진동진(鎭東陣)의 중군 이세창(李世昌)을 만나보고 대청동 주둔지로 돌아왔다.
2월 2일(음력 1. 1) 설날. 각 부대 장병들의 신년하례를 받고 이어 적의 정세를 탐지하였다. 적은 계속적으로 광악산의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를 정탐하고는 물러가곤 하였다. 의병부대의 방비 태세가 확고하고 기율이 엄정하였기 때문이다.

광악산 부대 접근 일본병 현황

월·일 적의출현현황 보고처(문서 보고 포함)
2. 2 20여 명, 논남기 침범 논남기
2 10여 명, 곡운 침범 곡운
12 수밀리에 병참 설치기도 반암
18 37명, 반암침범 수밀리
19 37명, 도마치 넘음 도대리
19 10명, 용소동 머뭄 관청리
20 10명, 출몰 도대리
20 적 홍적령 넘다 용소동
27 적, 도마치 침범 도대리
3. 3 30명, 도대리 숙박 수밀리
10 7명, 반암 병참에 증원 수밀리
10 적, 도마치 침범 논남기
10 55명, 논남기 숙박 계림동
11 16명, 거림천 숙박


1908년 1월 22일과 23일자 『대한매일신보』 보도에

22일: 양주군 왕만산 하산안림에 의병 1,800여 명이 7~8일전 춘천으로부터 가평 등지로 옮겨가 유진했다가 일본병 100여 명과 교전하여 일본군이 패하는 것을 보았다는 설.
23일: 어제의 의병장은 이강년인데 강원도 의병장 민긍호 씨도 장차 향응하여 그곳으로 같이 모인다는 설이 있다.

이 보도는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이동 경로와는 『운강창의일록』과 일치하나 부대와 군사 수에는 격차가 있다.
3월 5일에 심장섭(沈章燮)을 임명하여 금란장(禁亂將)을 삼았다. 그것은 영평 배일리(排日里) 사람 심장섭은 일찍부터 군량에 관한 임무를 맡았는데, 그 소임을 갈고 다시 금란장으로 임명하여 군사들이 함부로 거두어 들이는 폐해를 엄중 단속하게 하였다.
3월 14일, 의암 류인석이 아들 제함[濟咸(류제함)]과 김낙원(金洛元)을 시켜 서신과 친히 지은 격문을 보내 왔기로 그 은혜와 의리에 감동하여 두 친구와 함께 박화남(화남 박장호) 부대로 가서 사문(師門)의 의리를 말하고 답서와 함께 최준기를 동행하여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지평 금리(錦里)의 이병대(李秉大)가 그 할아버지 금계 이근원(錦溪 李根元) 선생과 외할아버지 항와 류중악(恒窩 柳重岳) 선생의 명으로 와서 위문하고 가정의 류제승(柳濟昇)이 재차 와서 위문하고, 류제윤(柳濟允)·정태규(鄭泰奎)·정철규(鄭喆奎)도 와서 위문하였다.
의암(류인석) 선생의 서신은 다음과 같다.

듣건대, 그대가 거사하여 신의가 밝게 드러나서 온 나라 사람이 두려워하고 사모한다니 삼가 감복한다. 오늘의 擧措는 홀로 天下萬古의 대의일 뿐만 아니라, 그 큰 功效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것이 있다. 그동안에 이미 어떤 境地에 이르렀는지? 오직 局面을 완결하기를 바랄 뿐이다. 인석(류인석)의 情境은 드린바 「온 나라 창의소(一國義所)의 글에 대략 서술하였으니 다시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는다. 만약 병이 조금 낫는다면 원컨대, 장차 여러분의 휘하로 달려가 從事하려 한다. 華南 朴友長浩(화남 박장호)와 원주의 李友麟榮(이인영)과는 서로 通問할 줄도 아니, 빌건대 이 뜻을 전하여 주오. 이번에 간 사람들이 말하지 못한 것이 있거든 알려 주고, 다시 計策의 있는 바를 모두 듣기를 원하오.

의암(류인석)의 서신을 받은 운강(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답서를 의암(류인석) 선생께 올렸다.

이제 국변이 망극한 날을 당하여 슬픔이 절박함을 스스로 견디지 못하와 두, 세 사람의 동지와 더불어 감히 원주와 제천의 경계에서 의로운 깃발을 올려 맹세코 먼저 난적을 토벌하고 또 원수 오랑캐를 멸하여서 祖宗의 구장(舊章; 옛법도)을 광복코자 합니다. 삼가 성현의 대도를 지킴은 바로 평일에 문하에서 강론하여 가르침을 받아 하늘과 땅 사이에 「義」의 한 글자가 있음을 알아 굳게 가슴속에 간직하여서 한 몸이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한스러운 것은, 길이 매우 멀어 능히 어려움에 임하여 질의하지 못하고 밤낮으로 답답함이 중류의 풍즙(風楫; 바람을 만난 배의 노) 같을 뿐만 아닌 것입니다. 윤우(胤友; 상대방의 맏아들이 벗이 됨을 뜻함)와 金喪人이 문든 華岳(光岳)에 이르러 소매 속에서 내리신 글월을 전하여 주어서 깜짝 놀래어 拜讀하옵고 體候가 和氣를 잃어 起居에 사람의 도움을 받으심을 엎드려 살피오니, 下誠에 놀랍고 염려스러워 몸 둘 바를 일지 못하겠습니다.
神明이 도우시어 며칠 아니 되어 原狀을 회복하실 줄로 압니다. 강년(이강년)은 군대를 거느린 이래로, 영남·호서·관동의 2백 리 지경 안에서 도적의 장수와 졸개 53명을 죽이고 나아가 싸우다가 물러나 영춘·단양·영월의 세 고을의 사이를 지켰는데, 한 사람의 동지도 와서 구원하는 자가 없어 홀로 그 예봉에 당하고 또 깊은 겨울을 만나 저항하여 싸우기 어려워서 이에 백여 명의 군사를 뽑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가 朴養直(박양직)과 함께 聯兵하여 일제히 평산에 진주하여 삼가 지휘를 기다리면서 兩西의 많은 인사들을 격려하여 일으켜 합쳐서 한 군데 의병의 근거지를 마련하여 오래 遷延할 계책을 세우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도적을 만나 교전하고 겨우 가평의 광악산에 이르러 장수와 군사가 모두 피곤하고 눈보라가 점점 심하여지며 또 서쪽의 군대가 떨치지 못함을 듣고 잠시 이곳에서 머뭇거리고 있사온대, 재력이 궁핍하고 기계가 미비하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특별히 처분을 내리시어 末梢의 대의를 도모케 하심이 어떻겠습니까? 근일에 일을 논하는 자가 입을 열면 문득 청나라에 구원을 청할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크게 이루지 못할 이치가 있으니, 갑오년(1894)의 기성(箕城; 평양의 딴 이름)의 패전에 광서의 군신이 모두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습니다.
朝家에서 幣帛을 갖추어서 슬프게 호소하고 우리 신민의 하늘을 받치고 해를 반드시 충성이 있는 자가 비록 이레의 哭秦을 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가령 구원을 얻어 힘을 합쳐 공격하여서 저 도적을 剿滅한다 하더라도 討復한 뒤에 문득 永曆帝의 緬甸의 禍를 당한다면 천하 만세의 갈기지 비방을 무엇으로 防塞한단 말입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이 의논에 흔들리는바 되지 마시고 외로운 義旅로 하여금 곧 호령을 정하게 하소서. 이것이 誠心으로 비는 바입니다.

3월 중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대표적 승첩은 다음과 같다.

○ 용소동 전투

용소동 전투는 19일 새벽부터 전개되었다. 관청리 파수병의 가평 일본군 수비대 출동의 보고에 따라 도선봉 하한서군을 용소동 동남 관청리에 배치하고 운강(이강년)은 종사 강병수·김성칙과 별포 설창해 등 수십 명을 거느리고 산마루로 올라가며, 후군의 한 부대도 관청리 뒷산에 매복시켜 험한 곳을 점령하게 하였다. 잠시 후, 갑자기 도선봉이 복병한 곳에서 총성이 뇌성처럼 일어나므로 곧 별포와 후군을 거느리고 외복호산(外伏虎山) 위로 쫓아 고함치며 내려가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장차 군사들을 독려하여 산을 내려가려 하는데, 마침 안개가 끼고 풍설이 뒤따라 일어나서 진격할 수가 없었다. 좀 있다가 적이 군수품을 다 버리고 달아나므로 해질 무렵에 대청리로 회군하였다. 적의 전사자만 100여 명이었다.
이날 광(화)악산에 제사하고 사유를 고하였다.

○ 대청리 전투

대청리 전투는 22일에 있었다. 날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적이 대대적으로 총성을 뇌성처럼 울리며 남쪽으로부터 달려들어 왔다. 온 장졸이 나가 싸우게 되었는데, 문득 부대 뒤에서도 적이 산으로 쳐들어오므로 군사를 나누어 힘껏 싸웠다. 하루 종일 싸우다가 석양이 되어서는 우리 편 군사들의 기갈이 너무 심하여 더 싸울 용기가 없었고, 적도 두려워서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23일 새벽에 적은 물러가고 우리 군사들도 모두 본진으로 돌아왔는데, 운강(이강년)만이 보이지 않으므로 군중이 크게 놀랐다. 장병들이 지성으로 찾으니 과연 절벽 아래서 만났는데, 의관엔 서리가 덮이고 수염에 얼음이 달렸지만 신색(神色)이 평시와 다름없었다. 전과로는 우리 편 군사는 하나도 부상한 사람이 없는데 적의 시체는 골짜기를 메워서 그 수효를 알 수 없는 대승이었다.
이 전투 후 운강(이강년) 부대는 곧 포천군으로 이동하였다가 청계산 전투에서 다시 승리한 후 광악리로 회군하였다(28일).
지난 22일 전투에서 적이 민가 18채를 불태워 버렸다. 이에 운강(이강년)은 그 피해자들을 불러 위로하고 안주시키며 돈 10냥을 주니, 여러 사람들이 모두 울며 감히 받지를 못하였다. 운강(이강년)이 말하기를 ‘원수를 갚고 백성을 위문하는 것이 우리 의병들의 의무이니 사양하지 말라.’ 하니, 여러 사람들이 부득이 감사하여 받았다.
가평 지역에 진주한 운강(이강년) 부대에 대한 『대한매일신보』의 보도는 다음과 같다.

가평 등지에 의병이 時加日增하야 근 2천 명에 달하였는데 장차 포천 백운산 내에 있는 의병과 合隊하여 楊州 의병의 후군이 된다 하고,

라는 보도가 1월 25일자에 실렸다. 이 기록으로 가평의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양주에 집결하여 서울 진공작전에 참여하려고 활동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포천 청계산 전투

23일, 대청리 전투에서 승리한 운강(이강년) 부대는 영평 연곡(燕谷; 二東里面)에 이진하였다가 24일에는 송우(松隅)를 거쳐 갈기동(葛基洞; 一東面)에 유진하여 휴식을 취하였다. 25일에는 청계산 기슭의 청계 험한 곳을 찾아 매복하였는데 적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28일 밝을 무렵에 적의 총성이 요란하였다. 운강(이강년)이 군중에 명령하기를, “우리가 짐짓 후퇴하여 적을 교만하게 만들어야 쳐부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적이 과연 우리 군사의 뒤를 추격하여 깊이 들어오므로, 좌우 협격해서 적을 남기지 않고 다 무찔렀다. 날이 저무니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며 운강(이강년)도 기운이 떨어졌다. 다시 영을 넘어 가평군 노기(魯基)에 이르러 저녁을 먹은 것이다.
이와 같이 운강(이강년) 부대는 가평 뿐 아니라 포천군 청계산 지역에서도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매일신보』의 4월 9일자 보도에는

겨울을 지난 李康秊(이강년)이 영솔한 의병 100여 명이 가평 등지에서 겨울을 逗留하다가 본월 3일에 영평 嘉溪 등에 있음을 듣고 일본병 10여 명이 4일 습격하여 반나절 상전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일본병이 퇴각한 후에 의병은 가평으로 갔다.

라고 하였는데 『운강창의일록』의 줄거리와는 부합하나 일자는 앞뒤가 어긋난다.
가평 광악산 용소와 대청리 그리고 포천 전투 상황을 신태식의 「정미년 창의가」는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餘卒을 收拾하여 廣嶽山 들어가니
장곡도 심수할 뿐 인심도 순박하다
춘천으로 울향하야 數朔을 유숙하니
加平 있는 수비대가 물골로 올라온다
삼일을 접전해도 승패를 未分트니
좌선봉 姜昌根이 왜복장 꾸며입고
총바리고 말을 타고 뒤로 달려가서
嚴殺하고 달려들어 대장을 殺害하고
좌우충돌 들어오니 쾌활하기 측량없다
적병의 거동보소 거꾸로 총대 메고
퇴진하여 물러갈 제 곡성이 진동하네
사졸을 수습하여 번호시켜 취립하니
군졸 망자는 칠팔이요 거민 망자는 오륙이라
베 끓어 영장하고 그 길로 행진하야
청계동 들어가서 김정승집 경통하니
무른담이 적치한 베 팔백여석 錄紙왔네
익일에 작미하여 사졸에게 상급할 제
떡 시키고 술을 걸러 含飽鼓腹 놀고 나니
포천 있는 수비대가 이를 갈고 달려든다
죽기를 무릅쓰고 주야불분 접전할세
말굽은 紛紛하고 霜雪은 孱孱한대
우뢰 같은 鼓角喊聲 좌우산천 녹여낸다
陣勢를 살펴보니 적병이 勝勝하다
旗를 둘러 收軍하여 桃城嶺 넘어오니
雲崗이 손을 잡고 落淚하고 하는 말이
天運이 이 같으니 人力으로 못 할지라
東峽으로 행군하여 後軍 中軍 만난 후에
다시 솔군하고 와서 이 雪冤하여 보세

이 가사는 ‘진중일기’성격의 창의가로서 『운강창의일록』의 내용과 거의 일치하나 일자가 없다. 이와 같은 악전고투의 산악전을 전개한 운강(이강년) 부대는 서울·양주 지역 진출을 포기하고 강원도 지역으로 부대를 이동해 간 것이다.
운강(이강년) 부대의 소모후군장인 신태식은 운강(이강년) 부대와 헤어진 후 평북 강계 지역과 서울 근교 태릉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이 작전의 구체적인 계획과 전모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운강(이강년) 대장의 작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미년 창의가」의 가사를 보면 신태식 부대는 박화남(화남 박장호)와 부진(付陣)하여 작전하는 가운데 강계에 가서 류의암(의암 류인석)을 만났고, 그리고 소모하여 적군과 접전하였다. 그 후 박화남(화남 박장호) 부대와 작별하고 돌아와서 이언찬[李彦贊; 殷瓚(이은찬)] 부대와 부진하고 태릉 기습작전을 성공시켰다. 「丁未年 倡義歌」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遂安땅에 숙식하고 肅川邑 들어가니
헌병하나 순교 너히 사산분주 달아난다
객사에 유진하고 일야를 지낸 후에
熙川으로 척후 놓고 積義嶺 당두하니
안밧재 사십 리에 인가가 바이 없다
원집에 잠을 자고 익일에 넘어가니
六房이 다 나와서 흠연이 영접한다
소를 잡고 호군하며 우해가라 남접하네
이틀을 행진하여 江界 땅 들어서서
의암장석 봐온 후에 그곳서 소모하니
일등포군 구백여 명 담총하고 오는구나
큰 소 잡아 호군한 후 차례로 장관내니
군례도 온전할 뿐 군령이 엄숙하다
육칠일 지낸 후에 적병 온다 報發왔네
이삼일 접전하니 피차사망 많은지라
각기 퇴진 돌아서서 산곡에 留陣하니

春日이 화창한데 꽃도 피고 잎도 피네
杜鵑鳥는 슬피 울어 손의 마음 撓動한다
心思를 抑制하고 月餘를 지내더니
朴華南이 영을 내되 영솔 불러 취립하라
형편을 들어보니 성사할 길 망연하다
西間島 건너가서 上馬賊과 合陣하여
왜적을 소멸하고 국권을 회복하면
국가에 충신이요 만민에 영광이라
令대로 行陣하되 二心을 먹지마라.
천여 리 同往同來 동시 死生하잤더니
의표가 각각이라 분리가 적당하오
晏然히 작별하고 회군하여 돌아서서
永平 東面 들어가니 좌우에 친구로다
오륙일 쉬고 나니 李彦贊의 警通이라
抱川에서 付陣한 후 광릉 내로 회진하여
泰陵에 복병하고 이틀을 기다리니
서울로 오는 적병 報發이 정녕이라
마병이 사십이요 기병이 삼십이라
탄환 사탕 실은 유마 오륙 필이 넘는구나
상하로 매복하고 약속을 정할 적에
적병이 들어와서 후진이 끊지거든
일시에 호군하고 엄살하고 몰방하라
卯時末 辰時初에 능안이 녹는구나
무심이 가다가서 제 어이 방어하리
엎어지고 절각된 놈 팔 접치고 총 맞은 놈
가다죽고 오다죽고 오십여 명 다 잡았다
오붓하고 쾌활함은 어떻다 말할쏘냐.

3. 강원 지역 전투

3월 29일 강원도 춘천 증운(甑雲)에 진주했을 때 ‘의병이나 친일 토적이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잡아오라.’는 방을 걸어 주민을 위호하며 선무하였다. 인제 서면에 이르러서는 토왜(土倭; 附倭) 정탐꾼을 잡아 목베어 매달았다(4. 6).
영동 지방 양양·강릉에 이르러서는 가는 곳마다 모두들 나와서 환영하며 위로하였다. 한편 정현동(鄭顯東)이라는 자가 있어, 몸에는 소매 넓은 옷을 입고 겉으로는 점잖다는 이름을 얻었으나, 안으로는 적에게 붙어서 의병을 해롭게 한 자이며, 또 말할 때마다 화서·중암·성재(이항로·김평묵·류중교) 선생을 훼방하였다 하여 크게 노하여 그 죄상을 들어 목 베려 하였는데 구원하는 사람이 있어 부득이 중지하였다.

○ 인제 백담사 전투

4월 10일 행군하여 백담사(百潭寺)에 이르렀는데, 우군 선봉 최동백이 군사 수십 명을 모집해 왔기로 좌익장(左翼將)을 임명하고, 군중에 명령하여 교련(敎鍊)을 시행하게 하였다.
박화남(화남 박장호)의 선봉 이춘화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막하(幕下)에 의지하기를 원하므로 드디어 우익장을 삼았다. 이튿날인 12일 새벽에 500여 적군이 북으로부터 진격해 왔다. 군중이 모두 나가 좌우로 독려하며 반날을 격전하니, 적이 크게 무너지므로 추격하여 무찔렀는데, 적의 죽은 자가 수백여 명이며 우리 군사의 사상자도 수십여 명이었다.
오후에 간성 신흥사(新興寺)로 이진하여 군사들을 교련시키고, 다음날 오세암(五歲菴)으로 옮겨 주둔하였다.
백담사 부근의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은현출몰이 지극히 교묘한 이강년은 금강산 부근 혹은 인제 부근에 근거지를 두고 그 부근을 약탈하였다. 김화·금성 부근은 경기도에서 압박당한 폭도들의 도피처가 되고, 동해안선의 삼척·울진 부근에는 초적 중 비교적 세력이 우세한 자가 횡행하여, 全道에 걸쳐 폭도의 기세가 아직 완전히 꺾이지는 않고 있었다.
금성수비대는 4월 14일부터 24일에 걸쳐 통구 현리·화천·북창·금강산 남부 부근을 토벌하여 이강년이 인솔하는 폭도 약 1백을 구축하고 그 수 10을 사살하였다. 인제 수비대는 4월 30일 인제를 떠나 엄밀히 수색 검거를 한 결과 5월 4일 李康秊(이강년)·李準明(이준명)·鄭元八(정원팔) 등 이하 2백 60명이 窓岩店 남방 오세암에 있는 것을 탐문하고 기습, 그 50을 사살하고 기타는 궤주시켰다.

라 하였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위의 기록과 같이 교전하고, 또 훈련하며 험한 설악산 부근을 넘나들었다. 이 일대는 관동 의병부대의 민긍호가 활약하던 지역으로서 그가 체포·순국한 후(2. 29), 곧 운강(이강년) 부대가 장악한 것이며 이준명·정원팔 등 260여 명의 대부대로 다시 발전하여 활동한 것이다.

○ 강릉 하사동 전투

강릉 하사동(下寺洞) 전투는 4월 29일에 있었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험한 지대에 의지하고 적은 평야에 있으면서 종일토록 지구전을 하였다. 적이 사방사(四方寺)로 들어가고 나머지는 모두 산에 올라가 포위하므로, 의병부대가 맹렬하게 공격하였지만 적이 움직이지 않았다.
다음날인 30일 오전까지 밤낮 춥고 굶주림을 참아가면서 계속 싸우다가 적이 정오에 물러갔는데, 우리 군사들도 부상한 자가 수 명이었다. 군사를 정돈하여 사동(寺洞)으로 내려가 밤을 지냈다. 또 적이 갑자기 와서 습격하므로 마주 싸워 사상자가 많이 났다.
5월 1일에, 괴산 연풍사람 김흥배(金興培)가 왔으므로, 집안 서신과 가묘의 고유문(告由文)을 지어 보냈다. 그날로 행군하여 봉정암(鳳亭庵)을 거쳐 다시 양양 서면에 유진하였다.
홍천 북면 전투는 5월 2일에 있었다.
운강(이강년) 부대가 양양 서면에서 홍천 북면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부대가 양양 쪽에서 와서 습격하므로 이쪽에서 역습하니 적이 군수품들을 버리고 달아났다.

○ 양양 백사장 전투

5월 3일 운강(이강년) 부대가 양양 남면에서 양양성 밖으로 옮겨 백사장에 진을 쳤는데 적이 습격하여오므로 의병부대는 바다를 등에 지고 힘써 싸워 적을 베고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즉 거짓 패하는 척하고 달아나니, 적이 추격하여 깊이 들어온 다음 회군하여 공격하였다. 도선봉 하한서가 정예병을 거느리고 바로 출동하여 들어가서 거의 무찌르고 남은 적은 달아나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양양 전투에 대한 「정미년 창의가」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공신원서 밤 지내고 배향산 들어가니
인가는 희소한데 처처에 의진이라
칠진이 부합하야 양양읍 엄살하니
병참의 수비대들 총들고 내 닫는다
수 삼천 명 장관 군졸 겹겹이 에워싸고
일시에 몰방하며 고함하고 달려드니
자운동 안개 속에 천지를 미분하고
천둥 같은 총소리에 산천이 뒤 눕는다
일합이 채 못 되어 적병이 소멸이라.

운강(이강년) 부대는 이 전투 후 남면으로 퇴군하여 유진하고, 다음날(5. 4) 강릉·영곡(江陵·靈谷)을 끝으로 다시 태백산맥을 따라 경상도로 남하하였다.

4. 경북 북부지역 전투

영월 상동 운기리(上東 雲基里)로 남하하여 주둔한 운강(이강년) 부대는 이곳에 찾아온 우선봉 백남규와 우군 선봉장 권용일을 만났다. 이 두 의병장은 지난해 영춘 전투에서 패한 뒤 영·호남 지역의 소모를 명한 바 있어, 모병한 4천 군사로 안동 서벽에 유진하고 있다가 운강(이강년)이 상동에 주둔했음을 듣고 찾아온 것이다. 그리하여 서벽에는 운강(이강년)의 대부대가 주둔하였는데 삼척의 성익현(成益鉉)·박흥록(朴興錄) 부대도 합류하였으므로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 북부지역의 의병의 기세가 다시 크게 떨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일본군 영주 수비대가 서벽으로 접근하여 왔다(5. 17.).

○ 안동 서벽 복병전 대승

5월 17일 운강(이강년)은 삼척 부대의 선봉장 김상인(金相寅)·박흥록으로 하여금 뒤에 있어 후원하게 하고 도선봉 백남규, 선봉 권용일, 우군장 변학기로 하여금 좁은 목에 매복하게 한 다음, 도총독 이만원과 함께 3백 명을 거느리고 직접 중군이 되어 세 길로 나뉘어서 대기하였다. 적이 과연 쳐들어오므로 적을 포위하고 사격하여 20여 명을 목 베었다.
서벽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5월 16일 榮川 수비대장은 정찰을 위하여 하사 4명과 순사 6명을 서벽리로 파견하였다. 이 정찰대는 17일 오전 4시 서벽리 동방 약 10리 지점인 谷地에서 우세한 폭도의 일단과 조우하여 거의 포위되어 탄약이 떨어지자 하사 이하 3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잔여는 가까스로 퇴각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비상한 복병술로 일본군의 정찰대를 압도하여 포위 섬멸한 것이다.

○ 봉화 내성 전투 대승

전날 일본군이 내성쪽으로 쫓겨갈 때 의병부대도 역시 내성 쪽으로 행군하여 내성에서 유진하였다.
5월 18일 새벽에 파수병이 급보하기를, ‘적 수백 명이 영천(榮川)에서 온다.’고 하였다. 운강(이강년)이 먼저 한 부대를 복병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여 반나절에 적을 무수히 죽이니 남은 적이 모두 달아났다. 운강(이강년)은 원래 산악전에 익숙하여 그 복병을 설치하는 비계는 남들이 헤아릴 수 없었다.
내성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 폭도는 수괴 변학기가 지휘하는 집단으로 그 수천이라 호언하며 18일 대거 내성으로 습격하여 왔다. 내성 헌병 분견소장인 田島(다지마) 憲兵少尉는 헌병·경관을 독려, 防戰 6시간에 걸쳐 그 20을 사살하고 겨우 내성 서북 1천 5백m 지점으로 격퇴시켰다. 그러나 폭도는 의연 그곳에 머물러 대오를 정돈하고 재차 내습하려는 기세가 보였다.

라고 기술한 것이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일본 헌병대 및 경찰병력을 격전 끝에 몰아내고 내성을 장악한 것이다. 이날 일본 헌병대장은 병력의 부족으로 출격을 못하고 오후 10시에야 응원군을 내성으로 집중시켰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다시 야음을 이용하여 이들 적을 기습하고는 새벽(19일)에 서벽으로 재빨리 철수한 것이다.

○ 안동 재산 전투 대승

6월 4일 운강(이강년) 부대는 내성 전투 이후 그 동쪽의 재산 지역으로 이진하여 전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적의 한 부대가 대구에서 습격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운강(이강년)은 각 부대장을 불러 방법과 계략을 지시하였다. 이만원·권용일은 동구에 매복하고, 하한서는 왼쪽에 매복하고, 성익현은 오른쪽에 매복하며, 백남규는 군사를 나누어 길을 끼고 양편으로 매복하게 한 다음, 운강(이강년)은 친히 우군을 거느리고 남산에 올라가서 기다렸다. 적이 의병의 복장으로 가장하고 ‘의병대진(義兵大陣)’이라는 기까지 날리며 달려들어 오는데 운강(이강년)이 웃으며 말하기를,

이것은 적이 우리를 속이려는 짓이다.

고 하면서 거짓 환영하는 의사를 보였다. 적이 빨리 몰아들어 오는데, 깊숙히 끌어드려 사정거리에 들어온 다음에 복병이 일제히 사격하고 운강(이강년)은 산 위에서 싸움을 독려하니 탄환이 비 쏟아지듯 하였다. 적이 놀라서 서로 짓밟혀 죽는 자가 절반이 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사방으로 달아났다. 우리 군사도 부상 8명, 전사 10여 명이었다.
재산 전투에 대한 일본군 측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6월 4일 禮安 수비대장 河野(코노) 中尉 이하 20명은 재산 서방 약 20리 거리에 있는 中新洞에서 수괴 이강년이 인솔하는 폭도 약 7백과 조우, 그를 공격 중 폭도는 일부 진지를 점령한 다음 포격을 가장한 폭성을 내어 토벌대의 사기저하를 꾀하고, 대부분은 兩翼에서 포위하려는 형세를 보여 그 태도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토벌대의 명렬한 사격에 의하여 사상 70여를 유기하고 英陽 방향으로 이동하였다.

이와 같이 운강(이강년)은 능숙하고 대담한 유도작전으로 또 한 차례 적들에게 큰 타격을 가했다. 그러나 의병부대도 또한 적지 않는 손실을 입게 되었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재산 대첩 후 황지로 북상하여 화랑치(花郞峙)를 넘어 상동을 경유, 광탄·송한 그리고 오미 소암곡에 유진하였다.
6월 21일 새벽에 적이 쳐들어오므로, 마주 나가 싸우다가 정오가 지난 다음에 군사를 거두어 퇴각하였다. 이 싸움에서는 별로 소득이 없었고, 주민 2명(이춘보 외 1)이 총상을 당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이 전투에 앞서 전날 송한에서 이장을 시켜 제천 적에게 일러 그들을 유인하였던 것이다.

주요 운강(이강년) 부대 활동도(1907.8∼1908.7)

제5장 운강의 순국

1. 제천 작성 전투와 부대 해체

6월 이후부터는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활동이 여의치 않았다. 태백산 지역 등에 대한 일본군의 수색이 강화되고 병력이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부대를 정비하고 무장을 보강하기 위해서 배양산으로 진주한 것이다(6. 22). 그러나 은닉하여 둔 무기와 탄약을 찾지 못한 채 사자산(평창 서쪽)으로 북상하였다.
6월 28일 대화면 계동에서 원주 일본군 수비대 좌등[佐藤(사토)] 대위 부대와 접전하여 패퇴하고 주천·무동곡을 지나 영춘 석교로 퇴각해 유진하였다(6. 30). 주천에서 중군장 김상태와 회동하기로 누차 연통했으나 미쳐 오지 아니하였다. 일이 안될 것을 알고 군중의 문서를 거두어서 종사 주현삼에게 주어 박정수에게로 보내고 나중 일을 부탁하였다[朱(주현삼)는 귀대중 전사].
운강(이강년)은 측근 참모 몇몇과 부대의 전열을 수습·보강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70여 병력 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는 호남지방으로 이동하며 새로운 활동기지를 확보한 다음에 재기를 도모하기로 단안을 내리고 부대를 이끌고 청풍 지역으로 남하하였다.
6월 하순 일본군 수비대장 석등 소좌[石藤(이시도우) 少佐]는 운강(이강년) 부대가 제천·영춘·영월 부근에서 배회하고 있음을 탐지하고 충주·제천의 수비대로 하여금 ‘토벌’을 시켰다. 그 결과 제천 수비대장 귀도 소위[貴島(키지마) 少尉] 이하 29명은 7월 1일 운강(이강년)이 부하 약 70을 인솔하고 청풍 금수산(錦繡山) 부근에 있음을 탐지하고 다음 2일 새벽 작전에 나섰다. 이상은 일본군 측의 기록이다.
7월 1일 운강(이강년) 부대는 영월에서 청풍 북쪽 남한강에 도착했을 때 도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적이 운강(이강년)의 부대를 뒤쫓으면서 미리 나룻배를 끊은데다가 때마침 장마철이어서 큰비로 강물이 불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영춘의 산길을 경유하여 능강동(綾江洞)으로 향하려 하다가 소금 장사의 배를 만나 겨우 건너서 금수산 기슭 작성(鵲城) 사기막재에 주둔하였다. 마침 장맛비가 내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적이 갑자기 들이닥쳤다.
일본군은 1908년 6월 25일부터 수비대·헌병대·토벌대·경찰대 등 전 병력을 동원하여 의병대 토벌작전을 실시하여 물샐 틈 없는 작전계획 아래 가공할 의병 학살과 초토화 작전을 감행하고 있었다. 특히 운강(이강년) 대장을 대상으로 혈안이 되어 포위망을 압축하고 있었다.
한강선을 차단하고 압박하며 수색하던 일본군 토벌대의 한 부대[귀도(키지마) 소위]가 단양(기각)에서 청풍(고교)으로 오던 중 금수산 소야동(所也洞) 민가(2·3호)에 들러 주민을 심문하였다. 심문 결과 어제 아침(7. 1) 의병 25명이 부락을 통과하여 금수산으로 향하였다는 정보를 얻게 되어 곧 본대에 급보하는 한편 이 의병을 추격하여 운강(이강년) 부대 척후병 3명을 발견하고 사살(2명)하였다.
7월 2일 일본군은 아침 10시경 청풍 포연리(浦烟里)로 통하는 도로 서쪽 금수산 기슭에서 운강(이강년) 부대 70여 명이 올라오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운강(이강년) 부대는 척후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으므로 안심하고 산기슭을 오르던 중에, 유리한 지점을 지키고 있던 일본군으로부터 뒤에서 일제사격을 받은 것이다. 급습당한 운강(이강년) 부대는 두 시간 가량 결사적인 반격을 계속하였으나 적의 탄환이 왼쪽 복사뼈에 맞아서 적에게 포로가 되었다. 서류와 인판(印判) 상자를 든 종사와 도선봉 하한서 및 군사 7명도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운강(이강년)은 전세가 불리함을 알고 부하를 산 뒤로 무사히 후퇴 시키고 격전지에서 멀지 않은 곳(15정보 가량)에 혼자 남게 되었으니 그것은 왼발의 상처로 보행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운강(이강년) 부대가 후퇴하자 일본군은 현장에서 무기(모젤총 4, 화승총 2)와 서류 그리고 인판 상자를 노획하였는데 여기서 피 흘린 자국을 발견하고 부상자가 근처에 있음을 추측하고 수색에 나섰다.
운강(이강년)은 먼저 그를 발견한 왜순사(모리, 森)를 보자 칼을 뽑았으나 상처가 심하여 실패하였다. 이에 왜순사가 그를 살해하려고 했으나 그의 거동과 인상이 보통 의병과 다름을 보고 달려들어 포박하였다. 왼쪽 볼에 칼자국이 있고 가슴에 쌍안경을 찼으며 부자유함에도 최후의 순간까지 칼을 뺀 것으로 보아 의병부대장 운강(이강년)임을 알았던 것이다. 이때 운강(이강년)은 다음과 같은 ‘순국의 시’를 읊었다.

탄환이 너무 무정함이여
발목이 상하여 더 이상 나갈 수가 없구나
차라리 심장이나 맞았더라면
욕보지 않고 요경(瑤京)에 갈 것을

포박된 뒤에도 굴하지 않고 많은 사람들에게 “내가 잡힌 몸이 되었으니 별 수 없다. 전사한 사람들을 잘 매장하여 주기 바란다.” 하고 의연히 포박되었다.
이로써 태백·소백산맥을 중심으로 경상·충청·강원 및 경기도 일원에서 의병전쟁으로 명성을 드높인 운강(이강년) 의병부대는 무너지고 13년 전장의 삶도 최후를 맞은 것이다.

2. 옥중 항전

피금된 운강(이강년)은 일본군에 의해 제천에서 충주로 압송되었는데, 지나는 곳마다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잡힌 직후 상처를 치료하려하자 단호히 거절할 뿐만 아니라 군수가 성찬을 가져오면 물리치며 말하기를 “적의 음식이 어찌 목에 넘어 가겠느냐.” 하고 적의 음식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충주에 감금되었을 때에는 주민과 이속에게, “그대들은 날 아는가? 내가 거의한 이유는 토적복수(討賊復讐)코자 함에 있었다. 지금 불행히도 포로가 되었으니 반드시 죽게 될 것이나, 이후 나보다 더욱 유위(有爲)한 인물들이 반드시 등장하리라. 성인의 이른바 ‘인생직 망생행색(人生直 罔生幸色)’을 어찌 의심하리오.” 하고 말해 자신의 사후에도 항일전이 부단히 이어질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계자로 지목된 의병장은 중군장 김상태였던 것이다.
충주 일본군 수비대 대장 이하 여럿이 심문할 때 “너도 한 사람의 위인(偉人)이나 지금은 붙들린 이상 심문에 대하여 어떠한 일이라도 속임 없이 진술하라.”고 말하니 그는 이에,

나는 38세로부터 의병으로서 국가를 위하여 너희들과 싸워 왔는데 이제 51세다. 13년 동안 시종 국가를 위하여 신력(身力)을 다하였으나 지금 불행히 체포되었다. 후사를 조금도 바랄 것이 없다. 무엇이든 물어봐라.

라고 응답하니 일본군 대장은 “너는 의병으로 행동하는 것이 곧 국가를 위하는 것이라 하니, 그것은 대세를 달관하지 못하고 미오(迷誤)에서 나온 것인데 지금 생각은 어떠한가?” 이에 운강(이강년)은 을미사변(1895) 이후 황제 양위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침략을 조리 있게 수죄(數罪)하며 반박하였다. 이에 답변을 잃고 다른 심문으로 옮겨가니 운강(이강년)은,

나는 의병장으로 금일에 이르러 너희에게 붙들렸는데 만약 부하들이 알면 크게 낙담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간에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진의를 네가 말하여 보라.

고 하자, 일본군 수비대장은 “그것은 앞으로 너를 수원과 경성(서울)으로 호송할 터이니 그곳에서 일·한(일본·한국)의 대신들의 설명을 듣게 될 것이고 또한 나도 너의 뜻을 보고하겠다.” 하면서 회피하였다. 그 후 계속 그의 근래의 행동 및 부하의 배치 등을 심문하였지만 그러한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일본군 수비 대장이 또 다시 “만약 차후에 의병을 다시 모을 때에는 어떠한 방법으로 하겠는가.” 그리고 처자에 대하여도 물었을 때,

내가 한번 격문을 보내면 일시에 모두 운집한다. 내가 죽기를 결심하고 일해 왔거늘 어찌 처자를 돌볼 겨를이 있으며 또한 그간 바를 알 수 있겠느냐.

고 대답했다. 심문에 대한 응답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그들이 보낸 보고서에는 “그는 자못 오연(傲然)하여 조금도 진실을 들을 수 없고 심문의 결과도 요령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운강(이강년)이 포박된 채로 교가에 실려 서울의 일본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어 오는 연도에는 농부들이 삽이나 호미를 놓고 탄식하기를 “공이 이렇게 되셨으니 국가는 영 망했구나. 누구를 위해 살 것인가.” 눈물로 숙연히 영송하였으며 서울에서는 철시를 하였고 심지어 탕아·기녀까지도 잔을 던지고 통곡하였다(7. 8).
압송될 때의 모습을 당시의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일본병 수십 명이 의병장 한 사람을 포박하여 인력거에 탑재(搭載) 입성하였는데 이 의병장의 용모는 홍안에 표불(飇拂)하여 좌고우면(左顧右眄)하며 의기가 자약하다.’
10여 일 동안 일본 헌병사령부에 갇히어 취조를 받았는데, 운강(이강년)이 묻기를 “괴수놈의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 어디 있느냐, 한 번 만나 죄를 성토하고 죽겠다.”고 하였다. 이튿날 평리원으로 옮기어 재판하는데 운강(이강년)이 꾸짖어 묻고 요구하기를,

소위 관원들이 모두 왜놈이냐. 너희 醜類와는 말을 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어찌 대대로 원수인 적에게 붙어서 우리 종묘사직을 엎지르고 우리 동포를 해치느냐, 빨리 이등(이토 히로부미, 이등박문)을 보게 하라, 담판하고 죽겠다.

라고 일갈하였다.
평리원 원장 박제선(朴濟璿)이 “어째서 의병을 일으켰는가?” 하자, 그는 꾸짖어 말하고 종이와 붓을 들어,

너도 또한 조선 사람이니 어찌해서 擧義를 모르느냐?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이 부끄럽다. 내가 거의한 것은 五賊·七賊들을 先斬하고, 왜적을 追滅하여 위로는 국가의 深讐를 갚고, 아래로는 생민의 도탄을 건지려 함인데 불행히 붙잡힌 몸이 되었으니 빨리 죽여 주기를 바란다. 선비에게는 죽음을 줄지언정 욕을 보여서는 안 되는 법이다.

고 하며 어물어물하는 그들을 보고 개·돼지만도 못하다고 호통하였다. 박제선이 다시 5적·7적이 누구냐고 한즉 그는 큰 소리로 “네가 정말 5적·7적을 모르느냐?” 하니, 박제선은 그의 위풍에 눌려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9월 23일 처교형(處絞刑)을 선고받고 옥에 갇히었다.

3. 운강의 순국

운강(이강년)은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반드시 죽을 것을 알고, 동지들과 영 이별하는 유서 및 종제 강수(이강수)와 장자 승재(이승재)에게 주는 유서를 기초하여 옥졸에게 주었다. 급보를 듣고 올라온 장자 승재(이승재)에게

내가 고심 노력하여 토벌한 지 13년에 원수의 적을 섬멸하지 못하고 도리어 살해를 당하게 되었으니 천운을 어찌하랴. 너는 지나치게 슬퍼하지 말라. 집안일에 대한 것은 대략 유서에 있으니 다시 말하지 않겠다. 네가 나를 살리려고 하여 적당에게 애걸한다면 이것은 자식이 아니니 아예 말라.

하였다. 승재(이승재)와 종제 강수(이강수)에게 죽음에 앞서 써 놓은 유서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王事에 죽는 것이 나의 소원이니 어찌 한을 하랴마는 志事를 이루지 못하였으니 힘이 있더라도 禮制를 갖추지 말 것이며, 집은 가난하고 길은 멀어서 故山에 返葬함이 어려우니 선조인 대군묘소(효령대군) 局內에 죄수 때 입던 옷 이대로 3일 만에 薄葬하라.

하였다. 운강(이강년)은 그해 10월 13일 오전 10시에 경성옥에서 피형되어 14분만에 순국하였다. 피형에 왜승이 설재(設齋)하니 그는 이를 꾸짖어 물리쳤으며, 또 전옥 신호미지(神毫尾之)가 술을 권하자 ‘내가 술을 좋아 하나 어찌 왜의 술을 먹겠느냐. 속히 죽이라. 내가 죽는 것은 원통하지 않으나 우리 2천만이 장차 다 나와 같이 죽을 터이니 그것이 슬프다.’라고 하며 형에 임하였다. 드디어 옥리가 어깨를 결박하고 목을 매어 달았는데, 바지가 허리로 미끄러지니 운강(이강년)은 결박된 손으로 잡아서 벗어지지 않았다.
운구는 유명대로 과천 효령대군묘(현 서울 서초구 방배동) 아래 가매장을 하였다가 합당치 않아 제천 동면 장침리로 반장(返葬)하였다. 강가에서 가장(假葬)을 지낸 혼거(魂車; 생시 모습같이 꾸밈)는 유림의 손으로 체송(遞送)되어 만여 군중의 애도리에 안장되고, 유림들이 융의계(隆義契)를 만들어 제답(祭畓) 15두락으로 매년 춘추에 제사한다.
정부는 1962년 3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운강(이강년)은 부인 안동 김씨와의 1남 승재(이승재)와 2녀를 낳아 딸들은 각기 김의호(金義浩)와 정동직(鄭東稷)에게 출가하였고 재취하여 안동 권씨와의 2남 긍재[兢宰(이긍재)]·명재[明宰(이명재)] 그리고 1녀를 낳았고 김종석(金鍾奭)에게 출가하였다.

운강(이강년)의 옥중시에

한평생 이 목숨을
아껴본 배 없거늘
죽음을 앞둔 지금에사
삶을 어찌 구하랴만
오랑캐 쳐부실 길
다시 찾기 어렵구나
이 몸 비록 간다해도
넋마저 사라지리

이라 하였으니 언언구구(言言句句) 왜적토멸의 의기가 충일되었다 할 수 있다.

결론

이상에서 구한말 의병장 운강(이강년)의 생애와 그 사상 그리고 13년 간에 걸친 의병 활동을 살펴보았다. 그는 태종의 차자인 효령대군의 후예로 그 선조가 낙향함으로써 전형적인 지방 유생으로 성장하였다. 세유가 미치지 못할 만큼 학문적으로 성숙되면서 한편 병법에도 조예가 있었다.
약관에 등과하여 용양위 선전관을 역임하였으나 남달리 정의감과 충군애국심이 투철하였던 그는 갑신정변(1884)을 계기로 혼탁한 정국을 떠나 향리로 돌아왔고, 학문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는 갑오·을미년의 국가적 위기를 즉 망국으로 인식하여 을미의병(1895)을 일으켰다. 향리인 문경에서 일어나 토적·국수에 나섰다가 세불리·고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평소에 사사하던 류인석 의병부대에 합진하였다. 그는 유격장으로 문경 조령 일대를 장악하고 이어 제천 회전 등 작전을 수행하는 데 한몫을 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전의 논리는 반개화, 보수·근왕적인 위정척사론이었다. 환언하면 정의에 입각한 자주적 국가 수호의식인 것이다. 학(유)자의 현실 참여로서 보다는 오히려 학문의 진리·정의의 본질인 실천에 옮겨 행동한 데 보다 더 적극적인 자주적 운동의 표현인 것이다. 이 을미의병(1895)전은 아관파천(1896) 이후 정부의 회유 등으로 그해 가을경에는 해병한 셈이다. 그러나 그 역사적 의의는 컸다.
그것은 이후 항일민족운동의 방략이, 이 의병항전에 원류를 둔 독립전쟁론이 보다 정립되어 민족자력에 의한 한민족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이 근 반세기 동안 줄기차게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운강(이강년)은 해병 후 의암(류인석)의 문하생으로서 더욱 학문에 정진, 그의 학통이나 사상체계가 보다 성숙한 것이다. 그러나 재기까지의 10여 년은 고난의 은신생활이었으나 전통적 화서(이항로)·의암(류인석)을 잇는 그 문인으로서 존왕양이의 척사사상을 심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국권의 훼손을 의미하는 1905년의 을사조약(을사늑약, 1905)과 그를 이은 1907년에 광무황제(고종)의 퇴위와 군대해산을 맞이하고는 결연히 재기 항전을 벌였다.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도 의병전이 전개되어 지방의 모든 통치기구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되어 무정부 상태에 들어갔던 것이다. 이때에 운강(이강년)에게도 광무황제(고종)의 비밀칙령이 전해져 그 사기가 충천하였던 것이다. 자신의 「고결팔역동지」에 스스로 ‘30여 차 큰 싸움에서 적의 추장 백여 개를 목베였는데’라고 밝혔듯이 그의 역전의 전투를 대별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미년 의병전쟁(1907)에서는 제천 전투를 비롯한 3면복병술로 문경 갈평리 그리고 영춘 백자리 전투 등 승첩이 많았으나 패전도 적지 않았다. 일제침략군도 결사적 ‘토벌’로 완전 식민지화의 목적을 늦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신년 의병전쟁(1908)에서 우선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서울 진공 연합작전이다. 충청·경상 지역에서 일로 서울 지역 방향으로 진격한 것이다. 우회작전일 수밖에 없었고, 그 고전은 막심하였다. 집결지 양주 가까이 가평(광악산)에의 진출은 성공하였으나 결국은 3개여 월 만에 후퇴·회군하여 강원·경상 태백산 지역으로 이진한 것이다.
비록 서울진공작전은 소기의 목적 달성에는 실패하였으나 적극 작전에 호응함으로써 그 결과가 국민에게 애국심(계몽운동 포함)을 고양하고, 각국 영사관에 알리므로 의병전쟁이 전 세계에 알려지는 정치적·선전적 효과를 산출한 것이다.
이와 전후하여 운강(이강년) 부대는 다시 산악전을 전개하여 연전 승전하였다. 예컨대 인제 백담사 전투, 안동 서벽 전투, 봉화 내성 전투 그리고 재산 전투 등 대승은 모두 그의 특유의 복병술로 적을 격퇴한 것이다.
정미·무신년(1907. 8)을 중심으로 충청·강원·경상 3도에서 40여 대소전황의 승패를 대체적으로 분석해 보면 승전 20여 회(대승 9회), 패전 10여 회(대패 5회), 그리고 상등한 전과가 10여 회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운강(이강년)의 의병활동은 ‘의병전’이라는 불리한 조건속에서 구한말 많은 다른 의병전과 달리 유림 의병장으로서 비교적 많은 전투와 또는 승전을 거둔 유일한 의병장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그는 구한말 13년의 긴 기간 오로지 애국과 구국전쟁에만 헌신하다가 세궁역진하여 포로가 되어 순국하였다.
문무를 겸한 운강(이강년)은 화서(이항로)·의암(류인석)계 위정척사학파로 학통을 세웠으며 을미·정미의병(1907) 전쟁을 존왕양이론적 토왜국수의 성격으로 철저하게 주도하였다.
그러나 정미·무신(1907·1908년) 의병전쟁은, 합진·부진 그리고 연합부대의 현상 등은 민족 대표성을 보여주는 예로서, 또 산악 중심의 유격전을 전개해야 하는 당위성과 국권회복 차원의 국민적 참여로 자연히 거족적 민족주의 성격의 의병전쟁으로 전환을 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운강(이강년) 의병부대의 성격은 을미의병(1895) 때와는 달리 척사론적 한계성을 극복하여 국민적 공감대를 이룬 국권회복의 광복전쟁으로 승화하였다고 생각된다.

부록

1. 운강의병부대의 전투 요약
연대·월·일 장소: 적요(기타)
1896.2.23 문경왕릉: 문경부대 창설(약 300명).
2. 25 문경농암: 김석중(안동관찰사)·김홍윤(순검)·김인감(순검) 효수.
2. 25 안동 방문: 안동의병부대(대장 權世淵)에 가서 거사 논의.
2. 26 모곡 進駐: 충주 류인석 부대와 연락, 적 공격 계획.
2. 26 석현성 留陣: 충주부대 피공으로 약속(연락)이 어긋나 옮겨 진을 침.
2. 27 마성면 고모성전투: 일군의 기습으로 종일(8시~오후 2시) 전투. 신병의 미숙과 탄환 부족 등 중과부적으로 패퇴. 심거벽(포수) 전사.
3. 초 안동방문: 재차 안동 의병장 권세연과 거사 논의(3일간).
3. 12 제천 進駐: 제천부대(대장 류인석)에 들어가 合陣.
3. 14 운강을 유격장으로 임명: 별동부대 지휘.
3. 19 수안보 전투: 적진에 포격, 2명 사살(오후 4시 퇴군).
3. 26 조령 進駐: 조령의 세 관문 요로 차단. 문경 평촌 진군
(서상렬의 안동 태봉 공격을 간접 지원).
3. ? 동원촌 주둔.
4. 초 조령 군기고를 부수고 무기, 탄약 노획, 동원촌 주둔.
4. ? 동원촌 전투: 적 林世淵 등 야습 격퇴.
4. ? 수안보 북방 연산곡 구용소 주둔.
4. ? 문경 평천전투: 일본군을 추격, 당포까지 진격.
4. 중 뇌암점 주둔.
4. 20 제천 본진 복귀: 右軍將이 됨.
4. 2 북창 자장리 방호목 수비: 관군 장기렴부대의 접근(西倉).
5.23~25 제천 대회전: 관군(장기렴)과 3일간 접전, 폭우 속에서 백병전 전개, 의병부대 패퇴.
5. 26 단양 移陣: 류인석 부대, 관군(장기렴)에게 제천 방어전 실패.
6. ? 단양-풍기-정선-영월 移陣. 운강은 다시 별동부대 지휘.
6. 10 원주 진군.
7. 11 평창 대화 進軍. 원주에서 영월, 정선을 거침.
류인석은 운강, 서상렬과 함께 ‘거수지계’를 정하고 평안도 방면으로 갈 것을 추진. 서상렬을 전군, 운강을 후군으로 한 西行長征의 행렬이 태백산맥을 따라 북으로 移陣.
8. 23 우강 부대 해산: 관구에 의해 후군부대는 西行 차단되어 소백산으로 후퇴한 후 부대를 해산.
(류인석 부대는 압록강변 초산에 도착, 요동으로 건너감.)
1907.5.11 제천, 부대편성: 지평·횡성·봉복사·봉평→배양산 留陣.
5. 26 용소동 전투: 야습당해 패전, 운강 중상→배양산 등 요양
7. 23 제천 재기: 광무황제 양위 자극 등
8. 5 원주 진격: 병기고 수색(무기 수집), 병력 확보, 부대 재편성
8. ? 광무황제밀칙 전수(배양산 留陣 중): 운강, 都體察使 임명.
8. 13 제천 무혈 입성(←배양산, 8. 10).
8. 15 제천 대회전: 민긍호 부대와 연합작전, 적 사상(500).
8. 19 주천 의림지(영호정) 軍禮式: 湖西都倡義大將 취임.
8. 23 중추성 점령 실패, 단양 移陣.
8. 27 풍기 進駐: 도촌에서 민폐자 처형(2), 분파소 파괴.
9. 7 문경 주흘루 포위 공격: 적 퇴각(前夜).
9. 9 문경 모항령(조령)守備: 좌·우선봉장, 적 토벌.
9. 10 문경 갈평 전투: 적시체 산야 가득.
9. 11 문경 갈평(괴성): 적 처형(3).
9. 13 문경 대승사 留陣: 적 처형(5).
9. 15 문경 적성 전투 대패: 후군장 신태원 부대-아군 36명 전사.
9. 21 단양 영춘 留陣: 중추절, 휴가(근교 거주병).
9. 25 단양 영춘(유치) 전투: 적 패퇴(영월).
9. 29 영월 장릉동 駐屯: 조동교(청풍의병장, 부조리) 등 처형(4).
10. 6 영월 진격(창절사 뒤): 불리하여 후퇴(각동).
10. 9 영월 병두 進駐: 정탐 순검 처형.
10. 12 괴산 연풍 적토벌: 총독장 이만원 등, 적 사살(4), 생포(3).
10. 22 원주 추치 전투: 복병 생포(200).
11. 2 죽령 전투: 적 패사(30).
11. 5 죽령 전투: 적 야반 내습, 격퇴.
11. 6 죽령 전투: 적 400 격퇴.
11. 7 죽령 응암전투: 격퇴.
11. 10 단양 고리평 전투: 적 사살(80), 말 노획(1).
11. 11 소백산정(頂) 전투: 종일 불리(→영춘 退陣).
11. 15 순흥읍 공격: 적 이미 퇴각.
11. 17 영월 직곡 駐屯: 응현→순흥(시위)→율치·백자동→영천 駐屯.
11. 26 단양 유치전 참패.
11. 28 백자동 전투 대승: 적 사살(100), 아군전사(2)
11. 30 단양 영춘 궁동 전투 참패: 부패괴멸→보산, 고음사 移陣.
12. 4 단양 당동 出陣: 예천(12. 7)→풍기 묘적령→단양 사동 移陣.
12. 16 단양 복상동 전투 패퇴: 피체(10), 전사(7), 임현 후퇴.
12. 25 단양 전동(월계동) 전투: 적 사살(30), 생포(2)
12. 28 북진: 대화산→봉평 유황→부항(夜行軍)→삽교→낭천 간척리.
1908.1.6 낭천 전투: 적 사살(4).
1. 7 가평 광악리 도착 留陣. 군사휴식(광악산 일대), 防備대처.
1. 8 가평 건천 전투: 적 사살(3).
1. 10 포천 영평 留陣.
2. 1 가평 대청동 留陣: 新年 설 賀禮.
3. 19 가평 용소동 전투 대성: 적 사상(100).
3. 22 가평 대청동 전투: 종일 교전, 적 시체 골짜기를 메움.
3. 28 포천 청계 전투: 적을 유인, 격퇴.
4. 6 인제 서면 進駐: 토적 정탐자 처형(1).
4. 12 인제 백담사 전투: 적 살상(수백), 아군 사상(수십).
4. 29 강릉 지구전: 적 不動, 아군불리.
4. 30 강릉 하사동 전투: 주야 격전, 피아 사상자 다수.
5. 2 홍천 북면 전투 승리: 적 습격, 역습격퇴.
5. 3 양양성 백사장 전투: 대승→영월 상동 移陣.
5. 16 안동 서벽 전투: 적 포위 사살(20).
6. 4 봉화 내성 전투: 복병 격퇴, 적 사상(다수).
6. 10 안동 재산 전투: 복병 격퇴, 적 압사자 과반수, 아군 사상(18).
6. 21 제천 오미리 전투: 유인 격퇴(주민희생-2).
7. 2
(양력) 제천 청풍 鵲城전투 참패: 운강 포로(부상), 전사(7).


2. 운강의병부대의 의병과 일본군 사상 유별(類別)
回數 戰鬪
(地名) 義兵側 記錄『창의일록』 日本側 記錄『독운자료』3.기타 기타
月·日 義兵 被害 日本兵 被害 月·日 義兵 被害 日本兵 被害
1 聞慶 姑城 1896
2. 27 死 1 敗戰
2 水安堡 南山 3. 19 死 數名 相等
3 堤川 大會戰 5. 23 死 32. 多數 大敗
4 丹陽 龍沼洞 1907
5. 27 傷 1 傷1 敗戰
5 堤川邑 8. 15 死 500(數10) 8. 15 死傷20 大勝
6 忠州 進攻戰 8. 23 8. 23 失敗
7 聞慶 主屹里 9. 7 逸走 戰勝
8 聞慶 鳥嶺 9. 9 死 32 9. 9 擊滅 敗戰
9 聞慶 萬坪里 9. 10 尸滿山野 大勝
10 聞慶 其他 9.11-3 傷 3 死 7 勝戰
11 聞慶 赤城 9. 15 死 36 9. 14 死15 大敗
12 丹陽 永春(1차) 9. 25 逸走 死傷50 相等
13 槐山 延豊 10. 12 傷 1 死 7, 捕 3 勝戰
14 原州 新林 杻峙 10. 22 死 200(5) 10.21 死30 死2,傷2 相等
15 竹嶺 1次, 鷹岩 11. 2 死 30(6) 勝戰
16 竹嶺 2次, 鷹岩 11. 6 擊 400(8) 勝戰
17 竹嶺3次,故里坪 11. 10 傷數 10 死 80(4) 勝戰
18 竹嶺3次,小白山頂 11. 11 凍死 1捕1 敗退
19 丹陽 永春 楡峙 11. 26 敗退 11.26 死60,35 敗退
20 丹陽 永春 栢子洞 11. 28 死 2 死100(7) 勝戰
21 丹陽 永春 宮洞 11. 30 大敗
22 丹陽 復上洞 12. 16 捕 10, 死 7 大敗
23 寧越 西面 錢洞 12. 25 死 3, 傷 2 勝戰
24 華川 狼川 1908
1. 6 死 1, 傷 2 死 4 相等
25 加平 龍沼洞 3. 19 死 100 大勝
26 加平 待淸洞 3. 22 家●● 18 死傷不知數 大勝
27 抱川 淸溪 3. 28 擊退 勝戰
28 麟蹄 百潭寺 4. 12 死傷 數 10 死數 100 4.14-24 死10 大勝
29 江陵 下寺洞 4.29-30 死傷 多數 不利
30 洪川 北面 5. 2 擊退 相等
31 襄陽 白沙場 5. 3 斬獲甚多(80) 大勝
32 安東 西壁里 5. 17 死 20餘 5. 17 行方不明4 大勝
33 峯化 乃城 5. 18 死 無數 5. 18 死20 大勝
34 安東 才山 6. 4 死 10, 傷 8 死 10(半) 6. 4 死傷70 大勝
35 堤川 五美里 6. 21 住民銃傷 2 相等
36 堤川 鵲城 7. 2 捕 1(李康䄵) 死 7 7. 2 捕(李康䄵) 大敗
(5회의 ()는 『운강유고』1, 「행장」. 이하『운강유고』2. 「창의사실기」의 死者數임.)

3. 격문·서신·시

(1) 각 도 열읍에 고하는 격문(檄告各道列邑文)

아! 슬프구나 어찌 차마 다 말하랴.
역적 놈들이 나라 일을 제 마음대로하여 비밀리에 왕위를 내 놓게 하는 계획을 꾸몄고, 흉한 칼날이 임금을 협박하여 갖은 모욕을 주려고 했다. 조약(을사늑약, 1905)을 강제로 맺어 우리 국권을 빼앗고, 사문(赦文)을 반포하여 우리 인민에 재갈을 물리며 시랑(豺狼)이 밥을 다투니, 백만의 생령(生靈)은 목숨이 물새는 배를 탄듯하고 밑 없는 항아리 같은 욕심을 채우기 어려우매, 8도의 산천은 형세가 가을철 나뭇잎 떨어지기보다 쉽게 되었도다. 사당의 신위(神位)가 크게 놀라고 궁궐 안이 처량하도다.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제 것처럼 여기고 재정과 백성을 제 물건 보듯 하며, 머리를 깎고 복색을 변하니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나위 없고, 국모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고 임금을 욕뵈니 원수를 어찌 남겨둘쏘냐. 더구나 해외로 이민하려는 흉계는 저 점한철목(粘罕鐵木; 징기스칸)[원나라 임금]도 그런 일이 없었다.
하늘이 노하시고 사람마다 죽이려 드는지라, 한 번 죽을 결심을 하고 성토하니 누가 이 나라에 사람이 없다 하랴. 한밤중에 울리는 대포소리, 군대들의 순절(殉節)이 더욱 기특하구나. 진정 제 몸을 돌이켜 반성해 보라. 아마도 입장을 바꾸면 다 그러리라 할 것이다.
마침내 갈수록 더욱 포악하여 무엄하게도 하늘을 쏘려 대드니, 나중에는 반드시 패하여 땅에 떨어지고 말리라. 아아, 노예의 근성은 저 한 나라 공경에게도 있었지만, 간악한 심정은 모두 여진(女眞)의 참군(參軍)만 같으냐. 앞잡이가 많이 어찌 생기고 연맥이 멀리 뻗쳐, 제 주인을 적에게 주어 사나운 범의 창귀(倀鬼; 범을 인도하여 먹을 것을 찾아 주는 귀신) 노릇을 하고 왜에 결탁하여 영화를 도모하는 것은 마치 교활한 토끼가 굴을 만드는 것 같도다.
우리나라는 소중화(小中華)의 문명과 열성조(列聖朝)의 배양(培養)으로서 아름다운 정치는 저 중국 한(漢)·당(唐)·송(宋)·명(明)의 뒤를 따랐을 뿐만 아니라 참 선비들이 많이 나서 수(洙)·사(泗)·낙(洛)·민(閩)의 근원을 입증할 만하였다. 때문에 신주(神州; 중원을 말함)가 몰락한 후로도 예의의 명맥이 이 땅에 붙었던 것이다.
슬프다! 죄없는 우리 만백성이 마침내 모두 죽게 된 참변을 만났도다.
천리가 엄연한데 누가 죄를 짓고 도망할 것이며, 인정이 분노하니 한번 굴하면 반드시 펴지기 마련이라. 여기서 소매를 걷고 깃대를 드니, 한 부대 군사로 옛 땅을 회복할 수 있고, 옷자락을 찢어 발을 감으니, 약한 힘으로 강한 적을 물리칠 날이 있다.
염파(簾頗)와 이목(李牧;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장군들)이 초야에서 일어나니 찬 바람이 엄습하고 한세충(韓世忠)과 악비(岳飛)가 유림에서 나오니 칼빛이 하늘을 솟구친다. 오랑캐의 머리로 술잔을 만드니 원수 갚을 날이 멀지 않았고 동탁(蕫卓)의 배꼽을 불태우니 광복하기 무엇이 어려우랴. 서울 안의 부로(父老)들은 예전 관원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고, 개선가를 부르는 군사들은 왕실의 기업(基業)을 중흥하였도다.
무릇 모집에 응한 우리 충의의 군사들은 누구나 나라에 보답할 강개한 마음이 없겠는가. 고래와 새우를 합하여 함께 수용하니 계책이 빠짐없고, 의리를 위하여 죽음을 택했으니 사삿 생각 모두 버렸도다.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좌임(左袵; 오랑캐의 옷)을 변하기 어려웠을 뻔했는데, 요치(淖齒; 중국 초나라 장수)를 베자는 데 누가 우단(右袒)을 아니하랴. 산천초목도 적개심을 머금은 듯한데 천지신명인들 어찌 순리(順理)를 도우지 않으리오. 이 어찌 일시의 전공만이랴. 실로 만고에 중화 명맥을 붙든 것이다. 제각기 노력하여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모두 상과 벌은 산하를 두고 다짐한다.
이렇게 충성을 다하여 포고한데 불구하고, 만일 영을 어기고 도망하거나 태만하는 자가 있으면 이것은 곧 적당으로 몰수밖에 없으니, 단연코 먼저 군사를 옮겨 토벌할 것이다. 이미 선에 어두우면 뉘우친들 소용 있으랴. 말은 여기에 그치는 것이니 잘 생각하기 바란다.

(2) 8도 동지에게 영결하는 글(告訣八域同志)

국운이 불행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자들이 권세를 잡자 원수의 오랑캐와 결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임금님을 팔고 나라를 팔며, 임금님을 욕뵈이고 국모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더니, 이제는 조정에 가득한 역적들이 모두 왜적에게 붙어, 지존(至尊)을 협박하여 국권을 위임하게 하여 종사(宗社)를 뒤엎고 인륜을 없애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아 아! 저 궁흉 악극한 원수놈들이 정부를 차지하고 앉아, 전곡(錢穀)과 무기를 임의로 사용하고 있으니, 이것은 본시 도적의 상투라서 오히려 분통할 것뿐이지만, 저놈들의 이른바 소위 교형법(絞刑法)에 처한다는 것은, 인명을 많이 죽이고 백성의 재물을 강탈했다는 이유인데, 이는 더구나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놈들을 많이 베인 것을 저들은 “인명을 많이 죽였다.”고 하며 왜놈의 군기·전국 등을 빼앗은 것을 저놈들은 “백성의 재물을 강탈하였다.”고 하니, 간악한 무리들의 사람을 모함하는 수법이 옛부터 그러한데 굳이 변명해서 무얼 합니까.
그러나 지금 나라에는 무고한 백성들이 날마다 형장터로 끌려가니, 아! 어찌 차마 볼 수 있습니까.
강년(이강년)은 양심이 격동하여 더 참을 수 없어서, 병신년 이래로 13년간에 두 번 의기(義旗)를 들고 일어나, 피를 뿌리며 토벌하여 30여차 큰 싸움에서 적의 추장 백여 개를 목 베었는데, 불행하게도 금년 6월 4일에 힘은 다 되고 갈 길은 막혀 탄환에 맞아 사로잡혔으며, 오랫동안 옥중에서 욕보다가 이제는 죽게 되었습니다. 이 몸이 중화를 높이고 오랑캐를 물리치는 큰 의리에 죽는 것이니, 하루를 더 살더라도 그만 두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던 것도 이제는 다 그만입니다. 나는 장차 어찌하오리까. 여러분들에게 바라는 것은 적의 세력이 성대하다 하여 본뜻을 어기지 마시고, 더욱 큰 의리에 돈독하며, 피를 뿌리고 한 곳으로 매진하시와, 운수가 와서 회복되기를 기다리옵소서. 강년(이강년)은 잡혀서 죽게 되매 통분한 마음 금할 수 없어, 충정(衷情)을 글로 적어 보이는 것입니다. 사면을 바라보며 재배합니다.

(3) 이등박문에게 보내는 격문(檄 伊藤博文)

너희들이 아무리 오랑캐라지만 역시 추장과 졸개가 있고, 백성과 나라가 있고, 만국과 조약을 맺지 않느냐.
한 하늘 아래서 진실로 나라가 없다면 말할 것이 없지만, 나라가 있다면 임금과 신하가 있으며, 임금과 신하가 있다면 의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니, 의가 존재하는 곳에는 죽기 한하고 힘을 쓰는 것을 너는 모르느냐.
우리나라는 너희 나라와 국토가 가장 가까우니 서로 교제 하는 일이 없을 수 없고, 통상과 교역으로써 족한 것이거늘, 어찌하여 무기를 들고 군사를 거느리고 군중을 모아서 남의 국모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고 남의 임금을 욕보이고, 남의 정부를 핍박하고, 남의 재물과 권리를 빼앗고, 남의 전해오는 풍속을 바꾸고, 남의 옛 법을 어지럽히고, 남의 강토를 차지하고, 남의 백성을 살해하느냐.
또 이것만으로도 부족하여 읍·촌에 불을 지르며 사람 죽이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이것이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 1895) 십육 개 항목 중에 이런 일이 있었느냐. 너희 나라 임금이 시켜서 그러는 것이냐, 우리나라에서 속국이 되기를 원해서 하는 짓이냐.
만일 만국 조약(시모노세키조약, 1895)에 의해 하는 일이라면, 다른 각국 공사관에는 이런 악한 일이 없는데 너희만 이 혼자서 날뛰는 것은 웬일이며, 우리 정부에서 인장 찍어 허락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두세 명의 대신이 칼에 엎드려 목숨을 바치며 이역에 나가 죽은 이가 있겠으며, 너희 군장이 시켜서 하는 짓이라면 어찌하여 십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 번 결사전을 하지 않는 것은 웬일이냐.
이따위 짓은 너희 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제 임금을 속인 형벌을 받아야 할 것이요, 세계만국에 있어서는 반드시 조약(시모노세키조약, 1895)을 어긴 성토를 받아야 할 것이요,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반드시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가 될 것이다.
너는 반드시 저 오적(五賊)·칠적(七賊) 이완용(李完用)·송병준(宋秉畯) 같은 놈이 한 짓을 구실로 삼을 것이나, 이것은 또 그렇지 않다. 남의 나라 역적을 두호(斗護)하는 자는 원래 죄책이 있는 것이거늘, 더구나 남의 신하를 유인하고 남의 조정을 어지럽히고 남의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있어서랴.
한나라의 왕망(王莽)·조조(曺操)나 송(宋)나라의 진회(秦檜)·왕륜(王倫)이 역적이 아닌바 아니지만, 금(金)나라 오랑캐가 송나라를 우롱(愚弄)한 죄는 그보다 더욱 심한 것이다. 우리들은 군신간의 큰 의리로나 충성과 반역의 큰 한계로 보아 적개심을 참을 수가 없어 한마디로 불러일으키매 팔도가 모두 호응하니, 공으로나 사로나 백전백승의 계책이 서 있고, 화가 되건 복이 되건 한결같이 지키고 한결같이 죽음이 있을 뿐이다.
바다를 두르고 산을 연결하여 총과 칼이 유달리 날카로워서 너와 나의 싸우는 곳에는 비린 피가 내를 이룬다. 만일 시일이 더 지나간다면 한 놈도 돌아가지 못할 것이니 너희는 잘 생각하여 후회가 없게 하라.

(4) 군계(軍戒)

준엄과 정직은 장수의 체통이고, 일정하여 변함없음은 장수의 법령이고, 간중(簡重)·관용은 장수의 사기(辭氣)이고, 아무리 흔들어도 움직이지 않음은 장수의 덕기(德器)이고, 정신을 가다듬고 사려(思慮)를 한결같이 함은 장수의 사업이고, 천리를 밝히고 인심을 바로잡음은 장수의 준적(準的)이다. 홀로 서서 뜻을 빼앗기지 않음은 의리의 본령(本領)이고 위무(威武)에 굽히지 않음은 기절(氣節)의 큰 쓰임이니, 염결(廉潔)로써 위엄을 베풀고 정찰(精察)로써 예를 먼저하고 꾀하기를 좋아하여 이루고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고 상(賞)을 무겁게 하고 벌(罰)을 가벼이 하며, 괴로움을 먼저하고 즐거움을 나중하여서 마음을 열어 성의(誠意)를 보인다면 하늘과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

(5) 각국 영사관에 통고함(通告各國領事館)

그윽이 생각건대, 천지(天地)가 조판(肇判)한 뒤로, 천하의 많은 나라들은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직분을 다하여서 안녕을 보전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방도로 하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정의(情誼)는 약(約)·신(信)·법(法)·의(義)의 네 큰 글자에 있었을 따름입니다. 서로 지킴을 약이라 이르고, 속이지 않음을 신이라 이르고, 행할 수 있는 것을 법이라 이르고, 바르게 하는 것을 의라고 이르니, 이는 고금 천하에 바뀔 수 없는 공안(公案)입니다. 우리나라는 궁벽한 바다 구석에 위치하여 땅이 편소(褊小)하고 인물이 잔약하고 졸렬하여서 비록 기예(技藝)는 능히 여러 나라와 겨루지 못하나 의관문물(衣冠文物)과 예의강기(禮義綱紀)는 선왕의 도(道)에 따르고 선왕의 법전을 지켜 천하에서 소중화로 일컬어짐이 이제 여러 백 년입니다. 여러 나라와 약조를 세우는 처음에 배와 수레로 서로 통하고 물화(物貨)로 서로 점하여서 이웃 나라와 사귀는 두터운 정의를 닦음이 또한 10여 년인데, 홀로 일본이 겉으로 교린을 빙자하여 안으로 간적(奸賊)을 불러 온갖 흉모로 화란을 불러 일으켜 처음에 남의 의복을 허물고 남의 머리털을 깎고, 남의 옛 법도를 어지럽히고, 남의 유속(遺俗)을 변하여 고치니, 이것이 어찌 만국의 약신(約信)의 법의(法義)이며 교린의 정의가 진실로 마땅히 이와 같습니까? 외보(外補)의 신하를 유인하여 손잡고 내반(內叛)의 도적과 맺어서 남의 군부를 욕하고 남의 국모를 시해(을미사변, 1895)하고 남의 강토를 삼키고 남의 재산권을 빼앗고, 남의 관부(官府)를 농락하고, 남의 신민을 핍박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약신의 법의란 말입니까? 교린의 정의가 진실로 어디에 있습니까? 마침내 남의 나라 임금을 위협하여 보위(寶位)를 옮기고 핍박하여 남의 조정을 차지하고, 군병을 거두어서 말하기를 「인허(印許)를 받음이 있다」느니 「청하여 속국이 되었다」느니 하니, 이것이 교린의 약신의 본 뜻이며, 이것이 바로 임금은 임금의 도리를 다하고 신하는 신하의 직분을 다하는 자의 마땅히 할 것입니까? 의병을 막는 것을 핑계로 촌동네에 불지르고 어린 아이와 부녀자를 따라서 죽이는 것 이것이 하나라도 마관조약(시모노세키조약, 1895) 안에 있단 말입니까? 그가 약조를 저버리고 믿음을 버리고 법을 무시하고 의리를 잃으며 임금도 없고 신하도 없는 난적의 가장 심한 자이니, 우리나라 신민된 자의 만세에 함께 한 하늘을 이지 못할 원수이고, 천하만국의 사람이 저마다 죽임을 얻는 원악대대(元惡大懟)가 됩니다. 우리나라의 신자에 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일이 없다면 이는 군신의 큰 윤상(倫常)이 없는 하나의 금수일 뿐이며 만국에 있어, 군신이 있는 자가 분개하고 미워하여 토벌할 마음이 없다면 또한 하나의 일본 사람입니다. 천하를 들어서 일본으로 만든다면 그뿐이지만 진실로 일본을 위하지 않는 자가 어찌 이 의리를 알지 못하겠습니까? 우리들은 오백 년을 내려오면서 역대 임금의 북돋아 기르심을 입은 인물로 삼천리 예의의 나라에 살아서 충분(忠憤)의 격발(激發)을 억제함을 얻지 못하여 바야흐로 일을 벌리어 저 만고에 군신이 없는 짐승 도적 및 본국 신민의 심성을 바꾸어 도적에 붙어 공모하는 자를 시살(廝殺)하면서 천하만국으로 하여금 약·신·법·의의 지극히 귀중한 도리가 됨을 알게 하고자 하오니, 우방의 여러분께서는 모두 밝게 살피소서.

(6) 선유위원에게 깨우쳐 알리는 글(曉告宣諭委員)

군신의 대의는 천지의 상경(常經)이니, 임금의 명령이 있는데도 따르지 않음은 반역이고, 임금의 명령이 아닌 것을 임금의 명령으로 인정하는 것도 또한 반역입니다. 오백 년의 예악과 3천리의 강토가 저 왜놈의 삼키어 더럽히는바 된 것이 우리 임금의 명령인가? 모후의 시해(을미사변, 1895)를 당하고 군부의 머리털을 깎이우는 재앙이 우리 임금의 명령인가? 정부의 세납(稅納)이 저 도적의 저울질하는 바 됨이 우리 임금의 명령인가? 이것이 우리 임금의 명령이 아님을 안다면 우리나라를 위하여 복구하는 것, 우리 임금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을 우리 임금께서 이를 금하여서 하고자 하지 않겠는가? 선유(宣諭)의 옴은 홀로 교조만 아니라, 이는 위조이니, 위조에 좇아서 임금의 마음을 몸 받지 아니하여 신하의 의리를 잃는 자는 실로 이적(夷狄)의 당여(黨與)이니 무릇 우리 조선의 신민된 자가 어찌 감히 미혹하고 흔들리어 상경(常經)이 없는 무리로 돌아간단 말인가? 이와 같이 깨우쳐 고한 뒤에도 불의의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마땅히 군대를 옮겨 먼저 토벌할 것이니, 각각 마땅히 명심하여서 후회하는 일이 없게 하라.

(7) 일진회에 효유하는 글(曉唯一進會)

예로부터 사의(私意)를 고집하여 미혹하여 깨닫지 못하여서 몸을 망치고 종족(宗族)을 멸하는 재앙을 부른 자가 한이 있으랴만 어찌 오늘의 모임 같은 것이 있었으리오? 이 모임은 우리 조선의 신민이 아니고, 그 할아버지, 아버지의 아들과 손자가 아니며, 오백 년 우로(雨露)의 은택(恩澤)에 젖은 자가 아닌가? 어찌 왜놈의 옷을 입고 왜놈의 행동을 하여 왜놈의 머리, 왜놈의 창자의 이름을 얻어서 법 앞의 창귀(倀鬼)가 된단 말인가? 처음에는 구복(口腹)에 핍박당하거나 사세에 구애받거나 아니면 배우지 못함의 유혹당한 것일 뿐이니, 한때의 낭패는 이미 전의 허물에 속하므로 번연(幡然)히 길을 고쳐 공으로써 죄를 속(贖)하면 되는데도, 어찌 그렇지 아니하여 못 속의 물고기 되기를 달갑게 여기니, 생각하면 통한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을 머금게 한다. 임진의 난리(임진왜란, 1592)에는 모화당(慕華堂)註3)이 왜나라의 선봉장으로서 오히려 우리나라의 의로운 사람이 되었거든, 하물며 본회(本會)는 바로 예의의 나라에서 난 자들이랴? 얼핏 풍문에 듣건대 본회로부터 말이 있기를 「곧 왜적을 토벌하여 의군에 붙이려 하였으나 의군이 받아들이지 않을까 두려워서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헤아리지 못함의 심한 것이다.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향함은 마땅히 죄가 있으나 밝음을 향하여 어둠을 등짐이 무슨 의심하고 두려워할 것이 있으랴? 각부의 순검도 또한 그러하니 그 각각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서로 이끌어 죄에 빠지지 말지어다.」

(8) 통고(通告)

아! 슬프도다. 오늘의 국변을 어찌 차마 말하랴. 흉악한 칼날로 지존(至尊)을 협박하고 궁궐의 문을 닫아 격리하여서 안부를 통치 못하여 하늘과 땅이 그 기운을 손상하고 해와 달이 그 빛을 잃으니 지나간 먼 세월에 어찌 혹시 이것이 있었으며, 먼 뒷날에 어찌 다시 이것이 있으랴! 저 녹을 먹고 지위에 있는 자가 창자를 맞대어 시랑의 앞잡이 되기를 달갑게 여기는 것은 진실로 족히 논할 것 없지만 무릇 선비가 되어 토복(討復)의 의리에 어둡다면 사람이 아니고, 백성이 되어 분발의 의기를 늦추는 것도 사람이 아니니, 사람으로서 사람이 아니면 하나의 금수일 뿐이다. 우리 당당히 오백 년을 내려오면서 북돋아 길러진 인물로서 어찌 차마 마침내 금수가 되는데 그친단 말인가? 아! 그윽이 생각건대, 우리 주상의 오늘의 위박(危迫)의 정상(情狀)이 어찌 당 현종의 이른바 「스물 네 고을에 일찍이 한두 사람의 의사도 없으니 깊이 팔역의 사민에게 바람이 있다」는 것이 아니랴. 생각이 이에 미치면 간담(肝膽)이 서늘하고 마음이 떨리어 몸둘 곳을 알지 못하겠다. 아! 슬프도다. 나라가 갑오년(1894) 이후로 문득 왜적의 협박하는 바 되었으나 치욕을 씻지 못하고 오늘에 미쳐 신자로서 차마 듣지 못하고 감히 말하지 못할 변이 있기에 이르렀으니 변의 망극함이 이 보다도 더한 것은 없다. 무릇 혈기있는 무리가 누가 피로 낯을 바르고 울음을 삼켜 이 도적과 함께 살지 않을 것을 맹세하지 않으랴? 이에 서울에 있어서는 사람을 모아 죽기를 결단하고, 시골에 있어서는 저자의 백성이 전(廛)을 거두어서 혹은 몸이 국난에 달려가고 혹은 상업(常業)을 일삼지 아니하여서 의기(意氣)와 영명(英名)이 사람으로 하여금 용동(聳動)케 하니, 이것으로 병이(秉彝)의 성품의 같음과 깊은 인애와 두터운 은택이 사람의 기부(肌膚)에 스며 있음이 종시 속일 수 없음을 본다. 무릇 우리 충분(忠憤)의 의리를 품은 인사여! 구차하게 삶을 도모하기를 생각지 말라. 엎어진 새집 밑에 어찌 온전한 알이 있으랴? 마땅히 힘을 다하여 직책을 다하기를 생각하라. 가죽이 없는 곳에 털이 어찌 전함을 얻으랴? 군사를 통솔한 자는 이회광(李懷光)의 봉천(奉天)을 구함을 본받고, 싸움에 종사하기를 원하는 무리는 당나라 위사의 기와와 돌로 도적을 친 것을 본받아 우리의 음(瘖)·농(聾)·파(跛)·벽(躄)의 사람으로 하여금 오히려 백배의 기운을 더하게 하여서 윗사람과 아랫사람, 귀한 이와 천한 이가 뭉쳐 한 덩어리가 된다면 처지의 감림(鑑臨)하는 바와 백령(百靈)의 부지(扶持)하는 바에 어찌 조금인들 좌절(挫折)할 리 있으랴? 비록 그 전에 지위를 탐하고 녹을 탐하여 의리에 어두워 도적에게 붙였던 자라도 진실로 혹시 마음을 고치고 자세를 고쳐 토복의 의로써 맹세한다면 또한 용서할 수 있는 범주에 든다. 충분의 격발하는 바를 억제함을 얻지 못하여 이에 감히 피를 뿌려 깨우쳐 고하여서 먼저 창도하는 거조(擧措)를 하노니, 이와 같이 통유(通喩)한 뒤에도 혹시 명령을 어겨 일을 회피하고 게을리하여서 태연하여 고칠 줄 모르는 자가 있다면 당여(黨與)의 주륙(誅戮)을 면키 어려우니 오히려 누구를 원망하고 탓하랴. 말이 여기에 그치니, 각각 폐간에 새겨 함께 대의를 천하에 편다면 매우 다행스럽겠다.

(9) 광(화)악산 신령에 제사하는 글(祭華嶽山神文)

이 나라 왕기(王畿)의 땅 도솔(兜率)의 거령(巨靈)이시여! 높이 솟은 외가 번병(藩屛)을 이뤄 빛과 아름다움이 나란히 일컬어지고 해와 달이 거듭 밝았네. 신령의 공덕(功德)이 오랜 세월을 두고 이 땅의 군생(群生)을 붙들어 보호하셨는데,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여 이 동쪽 나라가 편안치 못하여서 이에 의기(義旗)를 정돈하여 이 의로운 군대를 힘입으려 하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묵우(默祐)를 내리사 강역(彊域) 안의 화란(禍亂)을 깨끗이 쓸어버리게 하신다면 이 세상이 다하도록 노래하여 기리어 보새(報賽)가 끝없을 것입니다. 깨끗한 희생(犧牲)과 형작(泂酌)으로 감히 작은 정성을 바치오니, 엎드려 빌건대, 존령(尊靈)은 속히 위력(威力)을 발동(發動)하소서.

(10) 좌우명(座右銘)

동자(董子)註4)가 말하기를 「도(道)의 큰 근원이 하늘에서 나왔으니 하늘이 변치 않으면 도 또한 변치 않는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그 의리를 바르게 하여 그 이(利)를 꾀하지 않고, 그 도(道)를 밝혀서 그 공(功)을 헤아리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만세(萬世)의 격언(格言)이다. 반드시 그 덕(德)을 닦아서 사악(邪惡)한 세상에서 어지럽지 않게 하고, 반드시 일을 바르게 하여서 공의(公議)에 어긋남을 보지 않고, 대인(大人)의 행실을 본받고, 필부(匹夫)의 용기를 경계하여서 예의(禮義)의 나라를 회복할 수 있다면 회복하고, 화하(華夏)의 제도를 지킬 수 있다면 이를 지켜서, 두 가지에서 반드시 일이 있은 뒤에야 그만두어서 이와 같이 할 따름이다. 삼가 선유(先儒)의 정론(正論)을 인용하고 다음에 스승의 교훈을 써서 아침·저녁으로 외워서 어리석음을 바로잡게 한다.
뜻을 가다듬되 바른 도리로써 하고 몸을 신칙(申飭)하되 근신으로써 하며 사욕을 씻어 버리고 전인(前人)의 가르침을 공경하여 받들어서 동정에 반드시 본받고 오매(寤寐)에도 깊이 믿어야 한다. 민이(民彝)를 감히 어기랴. 상제가 위에 임(臨) 하셨다. 옥루(屋漏)에서도 부끄럽지 않아 내가 내 마음을 살피네. 혹시 스스로 가벼이 말며, 혹시 스스로 믿지 말라. 도리어 그 덕을 손상하고 도리어 그 의를 해친다. 어두움은 자기를 용서하는 데 있고 밝음은 남을 책하는 데서 잃는다. 생각이 늘 여기에 있으면 덕성을 훈도(薰陶)함을 얻고 홀로 벽루(僻陋)에 처하면 지기(志氣)가 흐려진다. 고질적인 버릇을 고치고자 한다면 위와 같이 써서 경계하라.

(11) 의암 류인석 스승에게 올리는 글

영춘의 두메에서 하직을 고하고 물러난 지 어느덧 세 해가 되오니 서쪽으로 關塞을 바라보며 자나 깨나 그리운 회포 간절합니다. 지난 봄에 事勢의 궁박을 인하여 家眷을 이끌고 冠山의 옛 시골로 돌아가서, 번번이 서로 멀리 떨어져 가르침을 받을 기약이 없어서 드디어 노망멸렬(鹵莽蔑劣; 노둔하고 남만 못한 것)의 자질로 하여금 마침내 소인의 科品으로 돌아가게 하니, 하늘을 우러르고 땅을 굽어서 두렵고 한스러움이 더욱 깊습니다.
처음에는 수신(晬辰; 回甲)의 헌시(獻兕; 축복하는 술잔을 드림)의 列에 나아가 참례코자 하였으나 마침 慈親의 병환으로 형세가 어렵고, 멀리 떨어져 이 달 초승에야 겨우 출발하여 17일에 간신히 서울 집에 다다랐습니다. 다행스럽게도 李致心(이치심)과 車生을 만나서 선생님의 保衛하시는 기후(氣候; 기력과 체후)가 안녕하심을 들었으니 기쁨을 어찌 견디겠습니까. 엎드려 이(이치심)생의 말을 들은즉, 『昭義親編』개간의 일로 서울에 머무르고 있으며 장차 이것을 온 나라에 두루 펴서 사람들로 하여금 느껴 발분하여 일어남이 있게 하여야겠기 때문에 마땅히 서둘러 속히 이루어야지 늦출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乙未年과 丙申年 사이에 變故가 크고 의리가 바르니 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는 자가 누가 공경하여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만, 국외의 사람으로서 우리의 義諦를 논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어쩔 수 없는 것이다.(不得已)」라고 하였는지? 「條理를 마치는 것이다(終條理)」라고 하였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凶逆이 우리 宗社를 뒤엎음이 오랠수록 더욱 심하고, 원수 도적이 우리 겨레를 죽임이 나날이 심하여 누선(漏鮮; 배를 뒤엎기 위해 배에 물이 새게 만듦)은 오히려 헐후(歇后; 대수롭지 않은 것)에 속하고 途炭은 이미 정도를 지나치는 데 속하니, 이때에 미쳐 거의하는 자가 만약 재거의 檄書를 돌린다면 비록 강약의 懸殊함은 있으나 의리의 바름을 잃지 않지만, 인쇄에 붙이어 격고하여서 서울과 나라 안에 돌려 보인다면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좋아하는 자가 그 조명(助名; 명예를 낚음)을 이르지 않겠습니까. 신진의 蒙學에게 상담(嘗膽; 나라의 원수를 갚을 뜻을 굳게 하기 위해 쓸개를 맛봄)의 뜻을 열어주어 직접 스승의 자리 밑에서 薰陶를 받고 날로 聖賢의 글의 깊은 뜻을 읽고 尊王攘夷(임금을 노이고 오랑캐를 물리침)의 講說을 들어 덕성을 함양하여서 제 때에 대의를 발동하여 용감하게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면 이것을 흥동(興動; 대의를 느껴 발동함)이라고 이를 수 있는 것이니, 어찌 이단의 말이 들리는 마당에 문자의 판각을 기다려서 猝燃히 절의에 죽어 공을 세우는 사람이 된단 말입니까? 오늘날 門生의 列에 있는 자가 구차하게 이것을 한다면 또한 師門에 累를 끼침을 면치 못하오니 엎드려 빌건대, 엄격한 말씀으로 이를 금하신다면 매우 다행스럽겠습니다. 영남사람 權在重(권재중)이 바야흐로 곁에 있어 언론에 峻截하여 마땅함을 얻으니, 모두 깊이 받아들이심이 어떻겠습니까? 강년(이강년)은 나아가 뵈올 생각으로 간신히 서울에 왔는데, 果川에 이르러 형세가 불편함이 많아서 중도에 정지하오니 매우 황송합니다. 엎드려 빌건대, 斯文을 위하여 導體를 보중하소서.

임인(1902)
소자 이강년 상서

(12) 종제 강수에게 주는 글

그대와 헤어진 지 이미 한 돌이 되었으니 꿈 속의 넋인들 어찌 남쪽으로 달리지 않으랴? 가을의 서늘한 기운이 나무에 있는데, 이 때에 백모님 기력이 혹시 절도를 손상함이 없으신지? 종형은 덕이 박하여 뜻을 펴지 못하고 마침내 사로잡힘을 당하여 이제 장차 죽음을 받으려 하니 속된 정리를 가지고 말할 것 같으면 슬픈 것이나, 내 마음에 있어서는 탄탄하여서 마치 돌아가는 것 같다. 인생 백 년에 누가 한 번 죽음이 없으랴. 그 이욕(利欲)의 마당에서 서로 섞이어 다투어서 몸이 죽은 뒤에 세상에 알려짐이 없느니보다는 어찌 나라를 위하여 원수를 갚다가 봉적(鋒鏑)에 죽은 것만 같으랴. 이제 천자가 혼란의 때를 당하여 스스로 힘써서 집을 보전하는 계책은 또한 자제를 가르쳐 부지런히 글 읽는 것으로 지남이 없으며 글 읽는 속에는 반드시 묘리가 있으니, 남쪽으로 도망하고 북쪽으로 달리는 이의 사자(士子)로 이름하는 자는 비록 온갖 고난을 겪어 앞에는 나루가 놓이고 뒤에는 산으로 막히는 지경을 당하더라도 법도를 잃지 않고, 아내를 잊어 광분 질주하여서 복철(覆轍)을 서로 찾으니, 그대는 홀로 듣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가? 또 이굴(利窟)의 근원인 사점(沙店)은 걷어치우는 것이 좋을 듯하다. 말이 여기에 그치니 힘쓸지어다.

(13) 장자 승재에게 유언한 글

네 아비의 평생에 꿈은 단충(丹衷)은 왕가의 일에 죽고자 한 것인데, 이제 뜻을 이루니 또 무엇을 한하랴. 놀래어 두려워하기에 이르지 말고 정신을 수습하여 네 아우를 데리고 그날 옥 문밖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내가 죽은 뒤 사흘 안에 마땅히 장사지내야 하는데도 고향이 산이 길이 멀어 일과 힘이 관을 수레에 실어서 반장(返葬)하기 어려우니, 이 뜻으로 자세히 종가에 고하여 묏자리 하나를 대군(大君) 묘소의 국내에서 빌리기를 청함이 좋을 듯하다. (중략) 이 아비가 덕이 박하여 품은 뜻을 펴지 못하였으니, 비록 힘이 있다 하더라도 의금(衣衾), 관곽(棺槨)을 의리에 마땅하고 예제(禮制)에 맞게 할 수 없거든 하물며 너희 형제는 실가(室家)의 의지할 바가 없으니 졸지에 여관에서 한 자의 베와 홑옷인들 어찌 마련할 수 있으랴? 다만 갇혀 있을 때에 입던 옷가지로 선산 밑에 묻으면 내가 마음으로 달갑게 여기는 바니 유감을 가져오지 말기 바란다. (중략) 사천여 년의 화하(華夏)의 정맥(正脈)과 2천 년의 현성(賢聖)의 태도와 오백 년 예의의 전형(典型)과 삼천리 소화(小華)의 인민이 견양(犬羊)의 굴혈(掘穴)로 빠져 들고 만단 말인가? 머리를 쳐들어 하늘을 부르나 하늘 뜻이 아득하니 통곡할 뿐으로 내가 어찌하나? 이 아비가 의리의 대종사(大宗師)의 문에서 가르침을 대략 받아서 존(尊)·양(攘)·토(討)·복(復)의 네 큰 의리를 한 마음 위의 단전밀부(單傳密符)로 삼아 천하의 강적(强賊)이며 한 하늘 아래에서는 더불어 살 수 없는 원수들에게 죽음을 무릅쓰고 칼날을 겨룬 지 10여 년에, 요동과 하북에서 파분(派奔)하고 호소와 관동을 성치(星馳)하여 전도(顚倒)되고 낭패함이 그 단서가 한 가지만 아니니, 그 정리(情理)가 슬프고 그 형세가 외로웠다. 그러나 군자는 말하기를 「양(陽)은 다할 이치가 없다」고 하고, 옛 사람은 이르기를 「세월이 오래면 반드시 되돌아오는 것이 이치의 상도(常道)이다」라고 하였으니, 상제(上帝)가 이 백성에게 중정(中正)의 덕을 내렸으면 분명히 재앙을 뉘우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믿는 것은 단지 일맥(脈)의 정리일 뿐이다. 두소(斗筲)의 조그만 재질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나관의 소견을 다하여 호서와 관동의 수백 명 의사를 거느려 나아가 싸우고 물러와 지키다가 마침내 설한(雪寒)으로 싸우기 어렵기에 이르러 요해(要害)를 점거하여서 봄의 날씨가 풀리기를 기다렸다. 제로(諸路)의 의병 동지가 얼마 아니 되어 도적 피하기를 물불처럼 하고 백성 괴롭히기를 다반(茶飯)처럼 하며, 본면의 사류와 만인이 억울하게 혹독한 박해를 입어 사망이 뒤를 잇고, 상해(傷害)를 받아 일어나지 못한다고 하니, 말을 들으면 가슴이 서늘하고 담(膽)이 떨림을 깨닫지 못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한다.(하략)

(14) 붙잡히면서 쓴 시(2수)

오십 년 내려오면서 죽기를 결단한 마음
이제 와서 어찌 구차하게 삶이 있으리
군대에 맹세하고 다시 나왔건만 종시 회복키 어려워
지하에서도 오히려 싸울 뜻을 가졌네

五十年來判死心
到今寧有苟生心
盟師再出終難復
地下尊王劍心

더디고 더딘 여름날 사람 보기 드물어
교활한 오랑캐가 말마다 살아날 기회를 찾으라네
이 몸 위에 존왕양이의 대의를 짊어져
당당히 죽음에 나가리니 슬픔을 말하지 말라

遲遲夏日見人稀
猾虜隨言覓括機
身上直擔尊攘義
堂堂就死莫云悲

(15) 옥중에서 쓴 시

성패를 어찌 모름지기 말하랴
조용히 처음에 말한 것을 실천에 옮겼네
붉은 마음을 북돋아 기르신 징험이니
거룩하신 임금의 은혜에 감격해 우누나

成敗何須說
從容如踐言
丹心培養驗
感泣聖朝恩

(16) 형장에서 쓴 시

우리나라 이천만 민중이
장차 나와 같은 죽음을 당할 것이니
이것이 제일 원통하다

我國二千萬民
將次受死必如我
以是爲痛

4. 속오작대도


속오작대도

5. 운강 의병부대의 장임·참모·종사자 명단

○ 장임록(將任錄)

李康秊(이강년): 곧 운강(雲崗)이니 운강은 공의 호(號)이다. 문경 가은 에서 태어나 고종33(1896)년 11월 11일 의기(義旗)를 들었고 광무11(1907)년 7월 11일 고종황제로부터 7도도체찰사(七道都體察使)의 밀지를 전해 받았으며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되어 전후 13년간의 의병항쟁을 하다가 1908년 6월 4일(음) 적의 총탄에 맞고 잡히어 같은 해 9월 19일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金相台(김상태): 호는 백우(白愚)요, 본관은 삼척(三陟)이니 영춘 남천 사람이다. 중군장(中軍將)을 지냈고, 1910년 봄에 적에게 잡히어 혹독한 신문에도 끝내 굴복하지 않고 대구의 적의 감옥에서 자결하여 순국했다.
李萬源(이만원): 호는 산재(汕齋)요, 본관은 진성(眞城)이니 청풍사람이다. 도총독장(都總督將)을 지냈고 1909년 1월 15일 어버이를 뵈오러 갔다가 왜적에게 잡혀서 종신형을 받았다가 광무황제(고종)의 어명으로 풀려나 고향집에서 죽었다.
白南奎(백남규): 호는 운암(雲庵)이요 본관은 수원이나 충주사람이다. 우선봉(右先鋒)과 도선봉(都先鋒)을 지냈다.
河漢瑞(하한서): 본관은 진주(晋州)로 단양사람이다. 도선봉을 지냈고 청풍 작성(淸風 鵲城) 싸움에서 적탄을 맞고 순국했다.
鄭淵錣(정연철): 제천사람으로 후군장(後軍將)을 지냈다.
權用佾(권용일): 호는 청은(淸隱)이요 본관은 안동(安東)이니 청풍사람이다. 우군선봉(右軍先鋒)과 도선봉(都先鋒)을 지냈다.
尹基榮(윤기영): 본관은 파평(坡平)이니 원주사람이다. 전군장(前軍將)을 지냈고 강릉에서 전몰하였다.
申泰元(신태원): 본관은 평산(平山)이니 청풍사람이다. 후군장을 지냈고 문경에서 전몰하였다.
李重鳳(이중봉): 청풍사람이다. 우군장(右軍將)을 지냈고 적에게 잡히어 종신유배형(終身流配刑)을 받았다가 광무황제(光武皇帝, 고종)의 어명(御命)으로 풀리어 고향집에서 고종(考終)했다.
李容魯(이용로): 좌군장(左軍將)을 지냈다.
千普洛(천보락): 자(字)는 선경(善慶)이요, 본관은 영양(英陽)이니 문경 사람이다. 좌익장(左翼將)을 지냈고 만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계속하다 죽었다.
朴甲冑(박갑주): 원주사람으로 우선봉을 지냈다.
許燮(허섭): 영춘사람으로 우선봉을 지냈으나 후일 적에게 투항(投降)했다.
邊鶴基(변학기): 본관은 원주니 봉화사람이다. 우군장을 지냈다.
李世榮(이세영): 본관은 경주니 제천사람이다. 좌군장을 지냈다.
柳始然(류시연): 안동사람으로 소모장(召募將)을 지냈다.
金雲先(김운선): 원주사람으로 중군선봉(中軍先鋒)을 지냈다.
朴尤永(박우영): 정선사람으로 소모장을 지냈다.
李昌敎(이창교): 후군선봉장을 지냈다.
崔東白(최동백): 우군선봉장을 지냈다.
朱鉉三(주현삼): 원주사람으로 수문장을 지냈고 영월에서 적에게 잡히어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劉秉先(유병선): 원주사람으로 도영장(都領將)을 지냈다.
金永軾(김영식): 영월사람으로 우익장을 지냈다.
崔用出(최용출): 영월사람으로 좌익장을 지냈다.
薛昌海(설창해): 본관은 경주니 영월사람으로 영솔장(領率將)을 지냈다.
金德秀(김덕수): 강서(江西) 사람으로 부영솔(副領率)을 지냈다.
鄭在德(정재덕): 안동사람으로 교련관(敎鍊官)을 지냈다.
安春興(안춘흥): 충주사람으로 교련관을 지냈다.
尹容九(윤용구): 제천사람으로 독전장(督戰將)을 지냈다.
尹熹善(윤희선): 충주사람으로 소모중군(召募中軍)을 지냈다.
李士鎭(이사진): 충주사람이니 소모후군장(召募後軍將)을 지냈다.
朴敬八(류경팔): 방수장(防守將)을 지냈다.
李明相(이명상): 단양 의병장으로서 공의 지휘명령을 받았으며 풍기(豊基)에서 전사했다.
成秉泰(성병태): 본관은 창령이니 순흥사람으로 중군진의 후장(後將) 을 지냈다.
宋在賢(송재현): 본관은 은진이요, 삼랑(三浪)사람이니 방수장을 지냈다.
沈章燮(심장섭): 본관은 청송이요, 영천사람이니 금란장(禁亂將)을 지냈다.
趙正熙(조정희): 척후장(斥候將)을 지냈다.
張進聖(장진성): 자(字)는 덕화(德化)요, 본관은 울진(蔚珍)이니 용궁사람으로 포장(砲將)을 지냈다.

○ 참모부(參謀部)

申橚(신숙): 본관은 평산이니 문경사람으로 참모관·총독장(參謀官·總督將)을 지냈다.
申景熙(신경희): 본관은 평산이요, 문경사람으로 참모관을 지냈다.
元哲常(원철상): 본관은 원주요, 원주사람으로 참모관을 지냈다.
任奭準(임석준): 청풍사람으로 참모관을 지냈다. 영천(永川) 적의 병참에서 잡혔는데 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李正奎(이정규): 제천사람으로 참모겸 사서(司書)를 지냈다.
姜順熙(강순희): 본관은 진주요. 제천사람으로 사서를 지냈다.
韓台燮(한태섭): 호는 묵랑(墨浪)이요, 자는 응필(應弼)이니 용궁(龍宮)사람으로 참모관을 지냈다.
李伯龍(이백룡): 영춘(永春)사람으로 참모관을 지냈다.
李奎顯(이규현): 참모겸사서를 지냈다.
鄭海昌(정해창): 본관은 연일(延日)인데 제천사람으로 참모와 중군을 지냈다.
朱光植(주광식): 본관은 신안(新安)이요, 제천사람으로 소모장을 지냈다.
金弼雲(김필운): 자는 덕화(德化)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문경사람으로 소모장을 지냈다.
趙鏞弼(조용필): 참봉인데 의성사람으로 소모장을 지냈다.
張復三(장복삼): 자는 사문(士文)이요, 본관은 인동(仁同)인데 문경사람으로 소모(召募)를 지냈다.

○ 종사부(從事部)

姜炳秀(강병수): 호는 신암(信庵)이요, 본관은 진주니 문경사람이다. 싸울 때나 퇴각할 때나 잠시도 운강(이강년)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李承宰(이승재): 운강(이강년)의 맏아들이다.
李源圭(이원규): 문경사람인데 전몰하였다.
李淨來(이정래): 본관은 광주(廣州)요, 참봉을 지냈고 예천(醴泉)사람이다.
李先達(이선달): 영춘사람으로 본명은 모름.
安基永(안기영): 지평(砥平)사람이다.
琴達淵(금달연): 본관은 봉화니 순흥사람이다.
崔俊基(최준기)
金聖則(김성칙)
朴用台(박용태): 충주사람이다.
朴在翼(박재익): 호는 은초(隱樵)요 본관은 무안(務安)인데 순흥사람이다.
尹明九(윤명구): 연풍에서 살았다.
盧地師(노지사): 충주에서 살았는데 적에게 잡혀 죽었다. 본명은 모름.
元亨熙(원형희): 본관은 원주요, 청풍사람이다.
朴應善(박응선): 단양사람이다.
邊用萬(변용만): 본관은 원주요, 문경사람인데 영천(榮川)싸움에서 전사했다.
姜炳旭(강병욱): 호는 주산(住山)이요, 본관은 진주인데 문경사람이다.
裵正熙(배정희): 제천에서 살았다.
朴來翊(박래익): 단양에서 살았다.
李晩興(이만흥): 본관은 진성(眞城)인데 안동사람이다.
朴基仁(박기인): 순흥에서 살았다.
申棋(신기): 본관은 평산이요, 문경사람인데 전사하였다.
李象信(이상신): 홍천(洪川)사람이다.
宋範淳(송범순): 전사하였다.
李兢宰(이긍재): 운강(이강년)의 둘째 아들이다.
史士淵(사사연): 충주에서 살았다.
李士鉉(이사현): 문산(文山)에서 살았다.
朴圭彩(박규채): 연풍(延豐)에서 살았다.
尹在鉉(윤재현): 청풍(淸風)에서 살았다.
黃斯文(황사문): 주천(酒泉)에서 살았다. 본명은 모름.
洪範用(홍범용): 충주에서 살았다.
趙秉殷(조병은): 영월(寧越)에서 살았다.
金昌魯(김창로): 전사하였다.
柳文秊(류문년): 적에게 잡히어 강릉 고을 적의 병참에서 적을 꾸짖고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그의 부인도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물에 빠져 죽었다.
李哲來(이철래): 원주에서 살았고 전사하였다.
金禮弘(김예홍): 자는 국보(國輔)요, 본관은 정선(旌善)인데 풍기(豊基)사람이다.
張致文(장치문): 본관은 인동(仁同)이요, 문경사람인데 적성(赤城)에서 전사하였다.
張復興(장복흥): 본관은 인동이고 문경사람인데 적성에서 전사했다.
張海鎭(장해진): 본관은 인동이요, 문경사람으로 적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張景漢(장경한): 본관은 인동이요, 문경사람인데 적성에서 전사했다.
金成玉(김성옥): 본관은 경주요, 상주사람이다.
金聖云(김성운): 태천(泰川)에서 살았다.
全順和(전순화): 청풍에서 살았다.
李達(이달): 제천에서 살았다.
嚴善陽(엄선양): 본관은 영월이요, 영춘사람이다.
成星五(성성오): 본관은 창령이요, 원주에서 살았다.
陳萬協(진만협): 충주에서 살았다.
洪思昌(홍사창): 본관은 남양(南陽)이요, 충주사람이다.
權在中(권재중): 자는 군집(君執)이요, 호는 석하(石霞)요, 본관은 안동이니 안동에서 살았다.
金守濬(김수준): 본관은 김해(金海)니 감천(甘泉)사람으로 왜적에게 잡히어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金鳴玉(김명옥): 영천에서 살았는데 전사하였다.
黃富周(황부주): 본관은 평해(平海)인데 전사하였다.
李圭海(이규해): 본관은 경주요, 문경사람이다.
金德容(김덕용): 본관은 경주요, 문경사람이다.
金周相(김주상)
黃在源(황재원): 본관은 창원(昌原)이요, 백동(白洞)사람이다.
申秉善(신병선): 자는 의숙이요, 본관은 평산(平山)이요, 문경사람으로 적성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金春得(김춘득): 춘천에서 살았다.
金炯哲(김형철): 본관은 삼척이요, 예천사람이다.
申泰宗(신태종): 본관은 평산이요, 원주사람이다.
申泰寬(신태관): 본관은 평산이요, 원주사람이다.
權福述(권복술): 용궁(龍宮)에서 살았는데 충주 싸움에서 전사했다.
李康赫(이강혁): 본관은 전주요, 원주에서 살았다.
沈相善(심상선): 본관은 청송이요, 원주사람이다.
朴曒陽(박교양): 본관은 반남(潘南)이요, 원주사람이다. 갈평(葛坪) 싸움에서 적탄에 오른쪽 팔을 맞아 잘려나갔다. 별명이 외팔이라 했다.
朴鳳陽(박봉양): 자는 상경(祥慶)이요, 본관은 반남인데 교양의 아우이다.
沈文澤(심문택): 자는 성옥(成玉)이요, 본관은 청송(靑松)인데 원주사람이다.
安敎情(안교정): 본관은 순흥(順興)인데 제천사람이다.

○ 좌종사부(坐從事部)

元道常(원도상): 본관은 원주(原州)요, 원주사람이다.
梁一煥(양일환): 본관은 남원(南原)이요, 청풍사람이다.
李進源(이진원): 호는 동애(東涯)니 청풍에서 살았고 만원[萬源(이만원)]의 형이다.
安在德(안재덕): 자는 윤지(潤之)요, 호는 성재(誠齋)니 진사(進士)인데, 용궁(龍宮)에서 살았다. 나라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항상 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아야 한다는 뜻을 품고 같은 의기(義氣)의 인물을 찾아 일을 의논하였다. 승전함을 보지 못하고 운강(이강년)보다 앞서 죽었다.
金進九(김진구): 자는 성소(聖韶)요, 호는 구고(九皐)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상주(尙州)사람이다.
權應靖(권응정): 자는 희약(喜若)이요, 호는 백졸(百拙)이요, 본관은 안동인데 문경에서 살았다.
洪大厚(홍대후): 자는 명오(明五)요, 호는 사불(四不)이요, 본관은 남양이니 예천에서 살았다. 을사년(1905)에 유격장(遊擊將)을 지냈다.
金萬源(김만원): 자는 복경(復慶)이요, 호는 왕사(枉史)요, 본관이 상산(商山)이니 상주사람이다.
李喆元(이철원): 자는 희선(喜善)이요, 본관은 전주(全州)이니 예천(醴泉)사람이다.
沈洪堂(심홍당): 본관은 청송인데 예천사람이다. 이름은 모르고 홍당(洪堂)은 호이다.
李芝漢(이지한): 자는 유흥(有興)이요, 본관은 성주(星州)니 용궁(龍宮)사람이다.
高允桓(고윤환): 자는 무현(武顯)이요, 호는 쌍산(雙山)이요, 본관은 개성(開城)이니 문경사람이다.
李範容(이범용): 자는 우서(禹瑞)요, 호는 담사(潭史)요, 본관이 가평(加平)이니 용궁사람이다.
洪致裕(홍치유): 자는 응원(應元)이요, 호는 겸산(謙山)이요, 본관은 남양이니 보은(報恩)사람이다.
安斗煥(안두환): 자는 상칠(相七)이요, 본관은 순흥(順興)인데 예천사람이다.
崔瓚(권찬): 자는 진(振)이요, 호는 춘해(春海)요, 본관은 해주(海州)니 문경사람이다.
安敎亨(안교형): 호는 양재(養齋)요, 본관은 순흥(順興)인데 의관(議官)을 지냈고 영주(榮州)사람이다.
金炳東(김병동): 자는 중함(重咸)이요, 호는 백하(白下)요, 본관은 의성(義城)이니 안동에서 살았다.
姜炳裕(안병유): 자는 문약(文若)이요, 호는 금산(錦汕)이요, 본관은 진주니 전 주사(主事)를 지냈고 문경사람이다.
徐相業(서상업): 자는 복초(復初)요, 본관은 달성(達城)인데 대전에서 살았다.
李鉉宰(이현재): 자는 필문(弼文)이요, 본관은 연안(延安)인데 예천사람 이다.
金商旭(김상욱): 호는 청송(聽松)이요, 본관은 경주인데 승지(承旨) 벼슬을 지냈고 문경사람이다.
金圭鳴(김규명): 자는 순경(順慶)이요, 본관은 영양(英陽)인데 용궁사람으로 재물로 운강(이강년)을 많이 도왔다.
趙鏞九(조용구): 의관(議官)이였으며 의성(義城)에서 살았다.
丁達奎(정달규): 제천(堤川)에서 살았다.
白南珪(백남규): 자는 효원(孝源)이요, 본관은 남포(藍浦)니 용궁사람으로 재물로 운강(이강년)을 많이 도왔다.
廉重熙(염중희): 감찰(監察) 벼슬을 지냈으며 영월에서 살았다.
孟哲浩(맹철호):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살았다.
李鳳宰(이봉재): 본관은 전주요, 문경사람이다.
李正儀(이정의): 본관은 전주요, 문경사람이다.
權泰善(권태선): 자는 극여(極汝)요, 본관은 안동인데 용궁사람이다.
金容泰(김용태): 예천사람으로 왜적에게 잡혀 신문을 당할 때 스스로 혀를 깨물어 벙어리가 되었다.
李元宰(이원재): 본관은 전주요, 상주사람이다.
李健洙(이건수): 자는 선여(善汝)요, 본관은 공주(公州)니 도사(都事) 벼슬을 하였으며 용궁에서 살았다.
金喆相(김철상): 본관은 영양인데 용궁사람이다.
李康建(이강건): 자는 원경(元景)이요, 본관은 전주니 문경사람이다.
金文榮(김문영): 본관은 삼척인데 제천사람이다.
金田榮(김전영): 본관은 삼척이요, 영월사람이다.
金商說(김상열): 자는 경필(慶弼)이요, 본관은 경주니 문경사람이다.
蔡暹奐(최섬환): 자는 효진(孝進)이요, 호는 묵곡(墨谷)이요, 본관은 인천(仁川)인데 상주사람이다.
柳(류준): 본관은 진주니 문경에서 살았다.
許達(허달): 자는 사성(士盛)이요, 본관은 양천(陽川)인데 죽산(竹山)사람이다.
孫進衡(손진형): 본관은 경주(慶州)고 경주에서 살았다.
李芝璇(이지선): 자는 인보(仁甫)요, 본관은 성주(星州)인데 용궁사람이다.
朴鍾鳳(박종봉): 자는 명가(鳴可)요, 본관은 무안(務安)인데 예천사람이다.
高有勳(고유훈): 자는 상보(相保)요, 문경사람인데 윤환[允桓(고윤환)]의 아들이다.
安在極(안재극): 자는 기오(箕五)요, 호는 사암(思庵)이요, 본관은 순흥(順興)인데 용궁사람이다.
金錫奎(김석규): 자는 상오(象五)요, 본관은 선성(宣城)인데 순흥(順興) 사람이다.
周時赫(주시혁): 본관은 상주요, 문경에서 살았다.
李成宰(이성재): 자는 성삼(聖三)이요, 본관은 전주니 문경사람이다.
金鍾和(김종화): 자는 희숙(熙叔)이요, 본관은 김해니 예천사람이다
李命洙(이명수): 영월에서 살았다.
權龍泰(권용태): 자는 운여(雲如)요, 본관은 안동인데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지냈으며 용궁사람이다.
李仲鎭(이중진): 자는 중민(仲敏)이요, 본관은 공주(公州)인데 용궁사람이다.
權晢仁(권철인): 본관은 안동인데 청풍에서 살았다.
蔡亨周(채형주): 자는 통여(通汝)요, 본관은 인천인데 문경사람이다.
卞仁奎(변인규): 자는 통숙(通叔)이요, 호는 우계(愚溪)요, 본관은 초계(草溪)니 문경사람이다.
李實鎭(이실진): 자는 경숙(敬叔)이요, 본관은 공주니 용궁사람이다.
柳奎秊(류규년): 자는 경장(敬章)이요, 본관은 진주다.
權用昌(권용창): 자는 경집(敬執)이요, 본관은 안동인데 제천에서 살았다.
沈晩松(심만송): 본관은 청송인데 제천사람이다.
李冑承(이주승): 본관은 연안(延安)인데 제천에서 살았다.
沈聖模(심성모): 본관은 청송인데 제천사람이다.
鄭東煥(정동환): 본관은 경주니 괴산(槐山)사람이다.
李基鎬(이기호): 자는 무백(武白)이요, 호는 한운(漢雲)이요, 본관은 광주(廣州)니, 제천에서 살았다.
洪佑亨(홍우형): 상주에서 살았다.
姜來永(강래영): 자는 낙서(洛瑞)요, 본관은 진주니 문경사람이다.
閔舜鎬(민순호): 자는 봉래(鳳來)요, 본관은 여흥(驪興)이니 문경사람이다.
李起亮(이기량): 본관은 전주니 문경에서 살았다.
吳國煥(오국환): 본관은 해주(海州)니 문경에서 살았다.
金福哲(김복철): 본관은 김해요, 예천에서 살았다.
韓將履(한장리): 자는 덕문(德文)이요, 본관은 청주니 예천에서 살았다.
李柄大(이병대): 본관은 공주(公州)요, 용궁에서 살았다.
金泳相(김영상): 자는 경함(景涵)이요, 호는 산포(山圃)요, 본관은 영양인데 용궁사람이다.
姜炳修(강병수): 자는 영숙(泳叔)이요, 본관은 진주니 문경사람이다.
金達源(김달원): 자는 성해(聖偕)요, 본관은 김해니 예천에서 살았다.
金斗相(김두상): 자는 응칠(應七)이요, 본관은 영양인데 용궁사람이다.
李康文(이강문): 자는 문선(文善)이요, 본관은 전주니 문경사람이다.
李鎭榮(이진영): 자는 사익(四益)이요, 본관은 경주니 문경사람이다.
朱聚奎(주취규): 자는 문오(文五)요, 본관은 신안(新安)인데 예천사람이다.
吳禹善(오우선): 자는 문범(文範)이요, 본관은 해주니 상주사람이다.
李相協(이상협): 본관은 광주요, 전 참봉(參奉)인데 문경에서 살았다.
金定浚(김정준): 자는 응구(應九)요, 본관은 김해인데 예천사람이다.
張益煥(장익환): 본관은 인동(仁同)인데 전 주사(主事)요 문경사람이다.
李潤淳(이윤순): 영춘에서 살았다.
李逌相(이유상): 청풍사람이다.
李景宰(이경재): 본관은 전주니 문경에서 살았다.
申台植(신태식): 본관은 평산(平山)으로 문경사람이다. 소모, 후군장(召募, 後軍將)을 지냈다. 「장임록」에 들었어야 할 사람인데 미처 수록하지 못하여 여기에 기록한다.
韓用國(한용국): 자는 주언(周彦)이요, 본관은 청주니 문경사람이다.
辛光熏(신광훈): 제천에서 살았다.
金奎榮(김규영): 자는 성오(星五)요, 본관은 삼척이다.
鄭斗源(정두원): 성칠(星七)이요, 호는 죽사(竹史)요, 본관은 연안(延安)인데 제천사람이다.
任哲準(임철준): 호를 순초(筍樵)라 하고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柳達昇(류달승): 문경에서 살았다.
申命敎(신명교): 본관은 평산이요, 문경에 살았으며 화약도감(火藥都監)을 지냈다.
申尙熙(신상희): 본관은 평산인데 문경사람으로 운량도감(運糧都監)을 지냈다.
呂奎洛(여규락): 문경에서 살았다.
呂奎元(여규원): 문경에서 살았으며 직함은 통정(通政)이었다.
金圭韺(김규영): 문경사람으로 운량도감을 지냈다.
南魯九(남로구): 문경에서 살았다.
李鍾國(이종국): 자는 응천(應天)이요, 호는 석포(石浦)요, 본관은 경주니 충주 덕산사람이다.
朴文永(박문영): 일명 국필(國弼)이요, 호는 행산(杏山)이요, 본관은 밀양(密陽)이니 밀양 북부사람이다.

6. 운강의 약보

○ 조선조 철종 9년(1858)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에서 이기태(李起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 1880년 무과에 급제 용양위부사과(龍驤衛副司果) 및 선전관(宣傳官)을 역임.
○ 1884년 갑신정변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
○ 1896년 1월(이하음력)에 고향인 문경 가은에서 의병을 일으킴.
○ 1월 11일 친일 안동부관찰사 김석중(金奭中) 일당을 농암 장터에서 목을 벰.
○ 1월 14일 고모산성(일명 마고산성)에서 문경주둔 일본군과 접전 패퇴.
○ 29일 제천 류의암(의암 류인석) 의병진과 합류하고 유격장이 됨
○ 2월 1일 수안보 적의 병참을 공격.
○ 13일 문경 평천에 주둔하여 조령관문을 차단하고, 적의 군기고를 습격 무기 예순두 짐을 노획.
○ 류의암(의암 류인석) 제천 의병진이 적에게 패하여 의암(류인석)은 만주로 건너가고 운강(이강년)은 영월산중에 잠복.
○ 8월 요동으로 가기 위하여 일시 군사를 해산.
○ 1897년 4월 만주 통화로 건너가 의암(류인석)을 만나고 이어 장백·무송 등지에서 투쟁하다가 귀국.
○ 1907년 봄에 다시 의병을 크게 일으킴.
○ 6월에 원주 진위대장 민긍호(閔肯鎬)의 협조로 원주 무기고에서 대량의 무기를 거두어 배양산 은밀한 굴속에 숨겨놓음.
○ 7월 2일 원주 배양산에 주둔하고 있을 때 고종황제의 밀지를 심상훈 판서를 통해 받음.
○ 7월 5일 제천 전투에서 적 1개 부대를 섬멸하여 의병의 사기를 드높임.
○ 7월 제천 의림지에서 전국 40여 의병진이 모인 자리에서 도창의대장(都倡義大將)에 추대됨.
○ 7월 23일 충주 일본군 기지를 공격키로 했으나 다른 의병진의 위약으로 홀로 싸우다가 퇴진.
○ 7월 30일 조령관문 주흘루(主屹樓)에 주둔한 적을 격퇴시키고 초곡(草谷)에서도 교전.
○ 8월 3일 문경 갈평(葛坪) 전투에서 적을 섬멸(갈평대첩).
○ 4일 갈평에서 적의 패잔병을 사살하고 달아난 적의 대대장 과전삼태랑(戈田三太郞)을 잡아 괴성(槐城)에서 목을 벰.
○ 9월 16일 원주 추치(杻峙) 전투에서 적군 200여 명을 섬멸
○ 26일 죽령전투에서 적 30여 명을 사살
○ 10월 5일 단양 고리평에서 적 80명을 사살
○ 6일 소백산 마루에서 적과 교전
○ 23일 풍기 백자동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섬멸
○ 11월 서울 진공작전을 위하여 강원도 춘천 등지로 북상하면서 교전
○ 12월 4일 경기도 가평 광악산에 진주
○ 이때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에게 격문을 발송
○ 16일 포천 영평 지역으로 이진
○ 1908년 1월 17일 용소동 전투에서 적 100여 명을 섬멸하고 군수품 다량을 노획
○ 강원도 인제를 경유 3월 10일 백담사에 주둔, 11일 새벽부터 적 500명과 교전하여 적 수백 명을 사살하고 격퇴시킴
○ 3월 13일 대청봉을 넘어 간성 신흥사에 주둔
○ 4월 3일 홍천 북면에서 적과 싸워 군수품 다량 노획
○ 4일 홍천 남면에서 양양으로 옮겨 해변에서 적을 대파
○ 5월 18일 봉화 재산전투에서 적 1개 중대를 섬멸
○ 서벽에서 적 20명을 사살
○ 6월 4일 청풍 작성전투에서 적탄에 발목을 맞아 피체(被逮)
○ 9월 19일 서울 서대문 감옥에서 교수형(絞首刑)으로 순국
○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중장(重章)」을 추서

7. 운강의 유적

1. 생가지(生家址)
○ 위치: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129-6∼7 당시 생가는 일제에 의해 소실되고 우물과 향나무 한 그루가 남아있고 현재 생가 복원사업이 완성단계임.

2. 묘소
○ 위치: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산 8번지

3. 전승비(戰勝碑)
○ 비문: 창의대장도체찰사 운강이공전승기념비(倡義大將都體察使 雲崗李公戰勝記念碑)
○ 위치: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도로변

4. 기념비(記念碑)
○ 비문: 해동의사 운강 이선생 강년지비(海東義士雲崗李先生康䄵之碑).
○ 위치: 문경시 가은읍 왕릉리 역전
○ 비문: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 기념비(義兵大將雲崗李康䄵先生紀念碑).
○ 위치: 문경시 문경읍 갈평리 입구

5. 전적 추모비(戰蹟追慕碑)
○ 비문: 의병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 추모비(義兵大將雲崗李康䄵先生追慕碑)
○ 위치: 충북 제천시 의림지

6. 기적비(紀蹟碑)
○ 비문: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 선생 기적비(都倡義大將雲崗李康䄵先生紀蹟碑)
○ 위치: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 입구

7. 시비(詩碑)
○ 비문: 도창의대장 운강 이강년시비(都倡義大將雲崗李康䄵詩碑)
○ 위치: 독립기념관 야외 전시장

8. 옥봉서당(玉峰書堂)
○ 위치: 문경시 가은읍 작천리 옥녀봉 중턱
선생이 수학하던 곳이고 처음 거의(擧義)를 논의했던 곳으로 선생의 영정을 모신 영각이 있다.

9. 신도비: 도체찰사 의병대장 운강 이선생 강년신도비(都體察使 義兵大將雲崗李先生康䄵神道碑)
○ 위치: 문경시 가은읍 완장리(생가 옆)

8. 운강의 유품

○ 『운강선생창의일록(雲崗先生倡義日錄)』 1책
○ 『운강선생 문집(雲崗先生文集)』
○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중장 및 훈장증 각 1점
○ 광무황제(고종) 칙령(光武皇帝勅令)
○ 「속오작대도(束伍作隊圖)」
○ 운강(이강년) 선생이 무과에 급제한 교지 외 2점
○ 운강(이강년) 선생의 호구단자(戶口單子) 1점
○ 각도 열읍에 고하는 격문(檄文)
○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에게 보낸 격문
○ 순국 후 시신에서 발견한 친필 가승[효령대군파계·운강(이강년) 자신의 신상기록]
○ 순국 직전 팔역 동지에게 보내는 고결문(告訣文)
○ 의암 류인석 선생이 보내온 애도문(哀悼文)
○ 정운경(鄭雲慶)의 애도문
○ 운강(이강년)에게 보내온 동지 안종응의 위문문(慰問文)
○ 박정수(朴貞洙)의 애도문
○ 만장(輓章) 30여 점 등 총 1400여 점
○ 그림(매난국죽 4폭 병풍)
※ 「속오작대도」 등 40점은 독립기념관에 기증·소장.

로딩중 페이지를 불러오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