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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행물 / 발간자료총서 [독립운동가 서한집]에 대한 전체 14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제목 이름 내용
1 강필(姜泌) 간찰(모년 3월 16일)

강필(姜泌)

1878~1942. 진주인(晉州人). 자는 달원(達源), 호는 의재(宜齋), 봉화(奉化) 법전(法田)에서 살았다. 강각(姜恪)의 후손, 강용(姜鎔)의 아들이다. 1925년 김창숙(金昌淑)이 만주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하여 모금할 때 거금 2000원을 군자금으로 기부하였다. 이 일이 일경(日警)에 발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 대통령 표창에 추서되었다.

2 곽수빈(郭守斌) 간찰(모년 4월 23일)

곽수빈(郭守斌)

1882~1951. 포산인(苞山人). 자는 사언(士彦), 호는 몽와(夢窩), 고령 월막리(月幕里)에 살았다. 곽율(郭율)의 후손, 곽치안(郭致安)의 아들로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1919년 파리장서 서명인의 한 사람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서간도로 망명하여 2년 동안 항일운동을 하다 질병으로 귀국한 뒤 은거생활을 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1995년 건국포장에 추서되었다.

3 곽종석(郭鍾錫) 간찰(1901년 5월 27일)

곽종석(郭鍾錫)

1846~1919. 포산인(苞山人) 자는 명원(鳴遠), 호는 면우(?宇), 산청(山淸) 사월리(沙月里)에 살았다. 곽겸(郭?)의 후손, 곽원조(郭源兆)의 아들이며, 이진상(李震相)의 문인이다. 음보(蔭補)로 여러 벼슬을 역임 도중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매국노 처단을 상소하였다. 1919년 유림 137명의 서명을 받아 파리평화회의에 보낼 독립청원서(파리장서)를 작성하고, 그 대표로 김창숙을 상하이로 보내는데 기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4 권경섭(權景燮) 간찰(모년 3월 3일)

권경섭(權景燮)

1890~1944. 안동인(安東人). 권벌(權?)의 후손으로 봉화(奉化) 유곡(酉谷)에 살았다. 1927년 봉화군 신간회(新幹會)의 간사가 된 후, 신간회 대의원으로 1929년 중앙본부 봉화대표로 활동하였다. 『조선일보』지국기자로 언론에 종사하면서 청년반제동맹(靑年反帝同盟)에 가입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규합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1년 6개월 옥고를 겪었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5 권명섭(權命燮) 간찰(1915년 8월 23일)

권명섭(權命燮)

1885~1949 안동인(安東人). 자는 성후(性厚), 호는 춘번(春樊), 봉화 유곡(酉谷)에 살았다. 권벌(權?)의 후손, 족숙 권상익(勸相翊)에게 학문과 충절을 배웠다. 1919년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참여하다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6 권상익(勸相翊) 간찰(1921년 4월 7일)

권상익(勸相翊)

1863~1934. 안동인(安東人). 자는 찬수(贊粹), 호는 성재(省齋)·청산(晴山), 봉화 유곡(酉谷)에 살았다. 권벌(權?)의 후손, 권기연(權祺淵)의 아들이며,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집안 족숙 권세연(權世淵)이 의병장에 추대되자 격문(檄文)을 지어 청장년의 참여를 호소하였다. 1919년 김홍기(金鴻基)의 자택에서 파리장서 독립청원서 초안을 작성하였고, 독립군 자금모금에 참여하였다. 두 차례나 옥고를 겪었고, 만년에는 유곡(酉谷)에 덕곡(德谷)서당을 열고, 많은 제자를 양성하며 저술을 남겼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7 권석호(權錫虎) 간찰(1921년 3월 11일)

권석호(權錫虎)

1879~1961. 예천인(醴泉人). 권문해(權文海)의 후손으로 예천 죽림리(竹林里)에 살았다. 1919년 권석인(權錫寅)과 함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고, 4월 3일 장날에 수백 명의 군중과 함께 예천 용문면사무소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열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일로 일경에 주동자로 체포되어 옥고를 겪었다. 1992년 대통령표창에 추서되었다.

8 권세연(權世淵) 간찰(모년 모월 11일)

권세연(權世淵)

1836~1899. 안동인(安東人). 자는 조원(祖源), 호는 담와(澹窩)·성대(星臺), 봉화 유곡(酉谷)에 살았다. 권벌(權?)의 후손,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봉정사(鳳停寺)에서 거의(擧義)를 결정한 안동 유림들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안동향교의소에서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발표하고, 안동부를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연합의병 4만 명과 일대 봉기의 기틀을 잡았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9 권세연(權世淵) 격문(1895년 12월)

권세연(權世淵)

1836~1899. 안동인(安東人). 자는 조원(祖源), 호는 담와(澹窩)·성대(星臺), 봉화 유곡(酉谷)에 살았다. 권벌(權?)의 후손, 김흥락(金興洛)의 문인이다. 을미사변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봉정사(鳳停寺)에서 거의(擧義)를 결정한 안동 유림들에 의해 의병장에 추대되었다. 안동향교의소에서 창의격문(倡義檄文)을 발표하고, 안동부를 장악하였으며, 경상도 연합의병 4만 명과 일대 봉기의 기틀을 잡았으나 관군의 공격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1983년 건국포장,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0 권응정(權應靖) 간찰(1919년 6월 25일)

권응정(權應靖)

1863~1937. 안동인(安東人). 자는 희약(喜若), 호는 백굴(百掘), 예천(醴泉) 근암리(近?里)에 살았다. 권상일(權相一)의 후손, 권한모(權翰模)의 아들이다. 이강년(李康秊) 진의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충북과 강원도, 경북 북부 등지에서 일군과 교전을 벌였다. 1908년 이강년 의병장이 체포된 뒤에는 이상태(李相台), 민순호(閔舜鎬) 등과 재기하여 이천, 양근, 진천, 충주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형 권응희(權應僖)는 동생의 의병활동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전라도 목포에 은거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