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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현순] [현순문건7] 에 대한 전체 3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현순의 초기- 3·1운동

    그는 1879년 3월 21일 한국의 서울에서 정부 관리의 자제로 태어났다.  교육: 그는 6세에서 17세까지, 옛 한국의 산수·역사·문학·중국 고전을 배우는 구식 한국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7세에서 20세까지는 서울 왕립 영어 학원에서 영어를 배우고 근대 서구 교육을 받았다.  20세에 혹은 1890년에는 당시 한국 정부에 의해 일본 도쿄(Tokio)로 파견되어 전텐큐코사(Jun  Ten Kiu Ko Sa)로 알려진 학교에서 과학과 수학을 전공했다. 1902년에 그 학교를 졸업했다.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1901년에는 피셔 (Fisher)씨로 알려진 미국 선교사에 의해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데, 피셔(Fisher) 씨에게 그는 성경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조지 허버 존스(George Heber Jones), D. A. 번커(D. A. Bunker), W. A. 노블(W. A. Noble)과 같은 초기 감리교 선교사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신학 과정을 시작하여 1911년 12월에는 서울 유니온 감리교 신학교를 졸업했다.  경험: 1903년 3월, 그는 한국 이민자들을 실은 두 번째 배를 타고 통역자로서 하와이(Hawaii)에 왔다. 처음 2년 동안에는 카후쿠(Kahuku) 설탕 농장에서 통역자로서 일했다. 1905년 1월에는 당시 호놀룰루(Honolulu)의 감리교 선교 본부의 감독관(supt. the M. E. Mission)이던 J. W. 와드만 (Rev. J. W. Wadman)목사에 의해 오하우 섬(island of Oahu)에 복음 전도자로 고용되었다. 이후 카우아이 섬(island of kauai)으로 파견되었고, 그곳에서 그는 고(故) G. H. 존스(George Heber Jones) 박사에 의해 한국에 되돌아올 때까지 하느님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하와이에서 봉사를 하는 동안, 그는 오하우-카후쿠(Oahu-Kahuku)와 웨일루아(Wailua)에 교회 두 곳을, 카우아이의 리후에(Lihue)에 교회 한 곳을 건립했는데, 리후에에서는 마지막 10년 동안 목사로 있었다. 그는 1906년 캘리포니아 연차 총회(California conference)에 참여했다. 그는 또한 1905년에 한국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울 수 있는 야간 학교를 시작했는데, 그 학교는 나중에 좀 더 규모가 큰 한인기숙학교(Korean Compound school)가 되었다.  1907년 5월,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알려진 감리교 남자 미션 스쿨에서 2년 동안 교장으로 가르쳤다. M. C. 해리스(M. C. Harris) 감독의 비서로 임명되어 1909년에서 해리스(Harris)가 은퇴한 1916년까지 그를 모셨다. 그는 해리스(Harris) 감독에 의해 1908년과 1912년에 각각 집사와 장로로 임명되었다. 한국에 있는 동안 그는 서울에서 가장 큰 교회 두 곳-창동 제일 감리교회(Chang Dong, First Methodist Church)와 상동 미드 기념 감리교 교회(Sang Dong, Mead Memorial Methodist Church)-에서 목사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일했다.  그는 1907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어린이 주일학교를 시작했고 근대적인 종교 교육 방법을 도입했다. 1916년에는 주일학교 분야 간사로 임명되었고 일리노이 주 시카고(Chicago)의 감리교 교회 주일학교 위원회(S. S. Board of the M. E. Church)의 지원을 받아 1919년까지 그 직책에서 일했다. 그가 한국에 있는 동안 했던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그가 창동 제일 감리교회의 목사로 있던 1914년 겨울 동안 참된 신앙 부흥의 불을 집힌 것이다. 그는 이것을 단식과 기도를 통해서 이루었다. 그 후 그는 4년 동안 한국 전역을 여행하면서 신앙 부흥 집회와 복음 전도 모임을 이끌었고, 수천 명의 사람들이 개종했다.  1919년에서 그가 하와이로 돌아온 1923년까지, 그는 정치 운동에 가담했고, 중국·러시아·유럽·미국을 널리 여행했으며, 각국의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조건들을 공부했다.  1923년 2월, 그는 하와이로 돌아왔다. 처음 3년 동안, 그는 호놀룰루의 한국 감리교 감독 교회(Kore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서 봉사했다. 이후 그는 카우아이의 리후에로 옮겼고, 거기에서 20곳에 흩여져 있던 4백 명의 한국인들 속에서 전도 사업을 수행했다.  문학 작품:(a) 그가 쓴 책들『나의 하와이 체류(My Sojourn in Hawaii)』『뛰어난 미국인들(Distinguished American Characters)』『영어 첫걸음(English Primer)』『설교집(A Collection of Sermons)』(b) 그가 편집하고 번역한 책들『영한사전(English and Korean Dictionary)』『존 R. 모트 박사의 중재의 기도(Intercessory Prayers by Dr. John R. Mott)』『설교와 조직 신학(Homiletic and Systemic Theology)』『방법과 어린이 심리학에 관한 주일학교 책들(S. S. Books on Method and Child’s Psychology』

    2 현순의 초기- 현순 상해 임시정부 참여

    本 軍事統一會議는 玆에 一般國人의 意思를 代表하여 中國 上海에서 不正當 不神聖하게 組織된 大韓民國臨時政府 及 臨時議政院을 一體로 不承認하고 且其 過去 及 將來의 諸般 施設을 無效로 認함과 紀元 四千二百五十二年 四月 二十三日 內地 國民大會에서 發布된 大朝鮮共和國 臨時政府의 系統을 承하여 一新히 組織할 事와 此를 組織함에는 全國民意에 副하기 위하여 國民代表會를 召集할 事를 內外에 宣言하노라.  唯컨대, 我 獨立問題는 軍事가 아니면 解決이 不能이요, 軍事運動은 統一이 아니면 成功을 難忘일세. 於是乎, 軍事統一의 絶大必要에 鑑하여 內外地 各 團體의 聯合으로 成立된 本會議는 其 目的이 實로 此에 不外하며 其 精神이 또한 此에 在할 뿐이로다.  凡 共同動作은 軍略上 不二祕訣이라. 다시 軍事統一의 必要를 贅論할 것이 없거니와, 今에 試하여 我 軍事의 狀況을 顧컨대, 甲軍과 乙團이 各各 國內에 對하여 應援을 請하며 國外에 向하여 同情을 求할새, 매양 自家의 名義만을 標榜하여 內外의 人心을 眩惑케 하며 또한 進攻과 退守에 當하여도 其 動作이 各個的인 故로 獨立宣言後 三年에 아직 敵에 對하여 一大決戰을 試하지 못함이 事實이라.   然則 現役兵이나 豫備兵을 勿論하고 總히 獨立軍의 職責이 有한 我 二千萬 民衆은 마땅히 其 精神이 一 旗幟下에 集中되며 其 動作이 一號令下에 支配되어 同心同德으로써 敵을 對하지 아니하지 못할지니, 故로 政治問題는 今日 吾人의 取論할 바가 아니라 하여 單純히 軍事問題를 解決함에 當한 本會議로도 亦是 最高機關 問題를 先決치 아니하지 못하게 되었도다.軍事로 唯一主義를 作한 本會議는 過去 半年 有餘의 支障과 險關을 突破하여 苦心慘憺의 努力으로써 多數한 團體代表의 會集下에서 本年 四月 十七日에 開議되매 從此로 前途大業에 一進機를 展開하리라 함은 本會議도 自信하는 바이거니와 日로 誓死一戰을 熱望하는 一般 國民의 企待도 亦不無하리로다.  嗚呼라, 國亡十年에 우리는 光復을 是圖하여 滿洲의 荒野와 西比里(시베리아)의 險地에 轉輾流離하면서 何時에든지 統一的 共同動作下에서 倭敵과 一死를 겨루어 보자던 우리가 아닌가. 그러나 過去에도 決裂과 齟齬의 点이 不無하였거니와 現今에 在하여는 分裂의 危機가 더욱 切迫한지라, 然則 團結의 絶代 必要는 一般이 同感하는 바이거니와, 더구나 劍을 執하여 國民의 先導로 犧牲을 作하려하는 우리 軍界에 在하여는 此가 最急의 先決問題가 아닌가. 故로 本會議는 我 軍界의 統一的 共同 動作으로 血戰의 開始를 是謀할 뿐이요, 空言空談으로 暗鬪에 汨沒하는 所謂 政界의 是非得失을 干預코자 아니하였노라. 그러나 現今 政界의 毒害는 時局으로 하여금 漸漸 紛糾 錯雜을 加하여 軍人은 進路를 失하며 民心은 向方을 不辨일 새, 大局의 危險이 실로 眉睫에 在한지라. 於是乎, 大局 安危에 責任이 있는 本會議는 軍事統一의 方針과 軍事行動의 計劃을 議定한 餘에 不得已 時局問題를 討議할 새 急先務로 最高機關 問題에 根本的 解決을 加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도다.  今에 最高機關 問題를 解決코자 할 세, 所謂 上海臨時政府와 臨時議政院이 有하여 敢히 最高機關으로 自處하나 그러나 此는 我 二千萬 國民이 決코 信賴하여 承認한 바가 아니오. 軍民統一의 一大 障碍物인 該機關은 一日이라도 其 存在를 不許함이 獨立運動의 捷徑이라 하노니 請컨대 其 理由를 下에 臚列하리라.甲, 上海臨時政府 不承認에 關한 理由  一. 上海臨時政府는 元來 上海 一隅에 在한 極少數人의 私心으로써 萬歲聲中 內地 國民大會에서 組織 發布된 政府를 無視하며 兼하여 內外地 同胞의 意思를 博採하지 아니하고 局部的으로 組織되었으며 且其 新造織의 劈頭에 當하여 對美委任統治 請願事件이 發露됨을 不拘하고 李承晩(이승만)이 其 首領의 任에 當하였으니, 其 組織이 根本的으로 不正當 不神聖한 바이오.  二 . 上海臨時政府는 成立이래 獨立運動에 對하여 可擧할 成績이 無할 뿐 아니라, 反히 俄領(러시아)에 在한 大韓國民議會에 對하여 無誠意한 妥協을 開始한 當時에 詐欺的 手段으로써 內地政府 奉戴의 條件을 上海政府 改造의 形式으로 幻作하여 大局의 紛糾를 惹起하였으며,  三. 上海臨時政府는 其當局의 三年間 施政이 各各 自家의 私黨을 植하며 門戶를 立함의 野鄙的 行爲뿐으로써 其 影響은 漸次 一般社會에 波及되어 獨立宣言 當時에 擧國一致로 統一 되었던 民心을 分裂 狀態에 陷케하였으며,   四. 上海臨時政府는 國家의 無上한 羞恥요, 民族의 莫大한 汚辱인 對美委任統治請願事件에 關하여 對方으로 美國에 向하여서나, 內로 國人에게 向하여서나, 外로 列邦에 向하여 一言의 辨明이 無할 뿐 아니라, 反히 其 閣員은 賣國賣族의 行爲를 敢行한 李承晩(이승만)을 絶對로 擁戴하여, 外로 國家의 體面을 不顧하고, 內로 民族의 精神을 眩惑케 하니, 對美委任統治에 對하여 黙認 或 雷同의 責任을 不免할 바이라.乙 . 上海臨時議政院 不承認에 關한 理由  一 . 上海臨時議政院은 元來 上海 一隅에 在한 極少數人 卽 自稱 某某 道代表로써 內外地 同胞의 意思를 可及的 博採하지 아니하고, 局部的으로 組織되었으니, 其成立이 根本的으로 不正當한 바이오.  二. 上海臨時議政院은 對美委任統治請願의 罪를 査劾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反히 上海臨時政府 組織 當時에 委任統治請願事件의 傳播됨을 不拘하고 其 請願者 李承晩(이승만)을 國務總理로 其 連累者 安昌浩(안창호)를 內務總長으로 推選하고 且 上海臨時政府 改組 當時에는 美國에 在하여 大統領이라 自稱한 李承晩(이승만)의 意志를 迎合하여 國賊인 李承晩(이승만)을 大統領으로 安昌浩(안창호)를 勞動局 總辦으로 推選하였으니, 亦是 委任統治에 對하여 黙認 或 贊同의 責任이 自在한 바이오.  三. 上海臨時議政院은 上海 一隅 極少數人의 意思로써 內地 國民大會에서 組織 發布된 政府를 無視하고 또 上海臨時政府에서 俄領(러시아)에 在한 大韓國民議會에 對하여 詐欺的 交涉을 行한 事에 協同하여 上海政府 改組의 形式을 取하였으니 亦是 大局 分裂의 責任을 不免할 바이라.  以上 理由에 依하여 上海臨時政府와 臨時議政院은 當然히 不承認할 바이오. 我 最高機關 問題에 當하여는 마땅히 紀元 四千二百五十二年 四月 二十三日 內地國民大會에서 組織된 臨時政府를 奉戴할지니, 何故오. 此는 卽 我 朝鮮이 獨立國임을 世界萬邦에 宣言한 當時 自由의 血과 萬歲의 聲中 國都 漢城에서 犧牲國會로부터 正當하고 神聖하게 産出된 者인 故라. 或 法理에 蒙昧한 者가 該政府의 正當하고 神聖함은 是認하면서 三年間이나 其 職員이 就任하지 아니하였다 하여 政府까지 따라 消滅된 줄로 看做하겠으나, 此는 法人과 自然人의 境界를 區別하지 못함이니, 假使 某政府의 職員이 總辭職된다 하면 同時에 其 政府가 따라 消滅될 것이뇨. 若或 果然이라 하면 國家 構成의 一要素인 主權이 消滅되는 時, 其 國家는 卽 國家의 資格을 喪失하나니. 然則 自然人인 政府 職員의 進退를 國家의 存亡으로 同視하겠나뇨. 此는 多言을 不俟하고 其理가 自明한 바라. 故로 大朝鮮共和國臨時政府의 法體는 取消의 一形式이 有하기 前까지 依然히 存在할 것이 無疑하도다.  然이나, 大朝鮮共和國 臨時政府의 人物은 對美委任統治 請願事件이 傳播되기 前에 組織된 故로 委任統治請願者 李承晩(이승만)이 執政官 總裁의 任에 當選되었고 其他 人物도 亦是 三年을 經한 今日까지 其 職權을 抛棄할 뿐 아니라 도리어 不適法 不合理한 上海政府에 入閣하였으니, 自然의 勢로 執政官總裁 以下 諸閣員은 旣히 無效되었으며 且 其制度도 時宜에 依하여 變更할 必要가 有한지라. 故로 但其 政府의 系統만 承하고 其 人物 及 制度는 一新히 組織함이 可하며, 且 我 二千萬 民衆의 精神을 集中하고 動作을 支配할 最高機關의 人物과 制度를 組織함에는 마땅히 二千萬 民衆의 公決에 依할것이요, 決코 局部的으로 偏僻되히 할 바가 아닌 故로 可及的 國民代表를 圓滿히 召集하여 此를 解決함이 可하다 하노라.  故로 本軍事統一會議는 以上과 如히 決議하고 仍이 本年 四月 二十七日에 上海臨時政府와 臨時議政院에 代表를 派遣하여 通牒을 發送하여 本會議의 意思를 通告한 同時에 該 政府 當局者의 引責 自退와 議政院의 取消를 要求하고 幸히 彼邊으로부터 誠意의 答覆이 有하여 此 難局을 和衷共濟할 途가 有할가 企待하였더니, 所要의 答覆 期間이 已過하되, 畢竟 如何한 回報가 無할뿐아니라, 現今 亥 政府員中 總理 以下 總·次長은 거의 全部가 國民의 輿論에 응하여 退職 下野함을 不拘하고 國賊 李承晩(이승만)은 依然히 大統領의 虛位를 戀戀不捨하며 此 其 黨與인 某某 數三 閣員은 李承晩(이승만) 一人을 二千萬 國民보다 더 敬愛함인지, 李承晩(이승만) 個人을 半萬年 社稷보다 더 尊重이 여김인지, 不然則 對美委任統治를 無上한 榮光으로 思함인지, 彼 李承晩(이승만)을 擁護함에 汲汲하여 本會議의 牒文이 傳達된 後에 遽然히 數三 閣員의 詭謀와 李承晩(이승만)의 妄斷으로써  某某를 總理·總長으로 某某를 次長·局長으로 任命하여 그 黨與인 十數 名 所謂 議政院의 同意로써 內閣의 局部 改組를 敢行하였다 하니, 渠等의 前過改悛은 且置하고, 國民의 輿論을 無視하며 國家의 榮辱을 不願하는 等 沒廉無恥의 行爲는 去去益甚이라.   이에 本會議는 이미 決議한 대로 積極 進行하여 써 我國家의 光復을 早速히 實現하기로 企圖하고 玆에 此를 宣言하여 內外에 周知케 하노라.紀元 四千二百五十四年 五月 日軍事統一會議 內地 國民公會(국민공회) 代表 朴容萬(박용만)布哇(하와이) 國民軍 代表 金天浩(김천호)布哇(하와이) 國民軍 代表 朴承善(박승선)布哇(하와이) 國民軍 代表 金世晙(김세준)北間島 國民會(국민회) 代表 姜九禹(강구우)西間島 軍政署(군정서) 代表 宋虎(송호)內地 光復團 代表 權敬止(권경지)布哇(하와이) 獨立團 代表 權承根(권승근)布哇(하와이) 獨立團 代表 金鉉九(김현구)布哇(하와이) 獨立團 代表 朴健秉(박건병)內地 朝鮮靑年團(조선청년단) 代表 李光東(이광동)內地 朝鮮靑年團(조선청년단) 代表 李章浩(이장호)俄(러시아)領 大韓國民議會(대한국민의회) 代表 南公善(남공선)內地 勞動黨(노동당) 代表 金甲(김갑)內地 統一黨(통일당) 代表 申肅(신숙)內地 統一黨(통일당) 代表 黃學秀(황학수)內地 統一黨(통일당) 代表 申達模(신달모)

    3 현순의 초기- 워싱턴시기(1920~1921)

    唯我 大韓民族이 世界 列邦에 獨立을 宣言한지 於今에 三年이 되었다. 北美合衆國에서 우리의 宣傳事業이 進就되어 大韓獨立 問題를 兒童·走卒이 다 알게 됨에 各種 社會에서 大韓 問題에 對하여 硏究하려는 人士도 많이 일어난지라. 此를 機하여 本人이 正式 外交를 設施하였다. 그러한데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에서는 此를 反對하고 더욱 謠言妄辭를 造作하여 內外同胞를 煽動하며 個人의 身分까지 毁傷함이 岡攸 其極하고 終에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에서 臨時大統領의 指令을 받아 美國國務院에 謝過書를 보냈는데 其 全文에 云하였되,  “弊國人 玄楯(현순)이 貴國 政府에 보낸 글은 弊國政府의 許諾없이 한 일이라. 弊國 大統領과 政府는 何時든지 貴國政府로서 公式 承認할 뜻이 있을 時에 비로소 承認을 請할 것이거늘 玄楯(현순)이 이와 같이 無禮妄動하였으니 弊國政府는 이로써 貴國 政府에 向하여 謝過하노라. 이제 玄楯(현순)이 行한 일은 모두 罷免된 후에 한 일이라. 다른 날 弊國이 貴國과 公式으로 獨立 承認을 交涉할 時에 이날 影響이 도무지 없기를 믿고 바라나이다.”  良心으로 公正한 判斷을 줄 만한 同胞들이야 누가 이 글을 보고 發憤 罵討치 아니하랴! 吾族이 獨立을 宣言할 時에 美國의 許諾을 받고 宣言하였더냐. 우리 二千萬 檀聖의 血族이 天賦의 自由를 찾고 絶對 獨立을 完成하려면 內로는 倭賊이 退出하든지 不退出하든지 倭賊의 統治를 脫去키를 奮鬪할 것이요, 外로는 列邦에서 承認하든지 不承認하던지 우리의 獨立을 承認하라고 叫號함이 獨立運動의 正路가 아닌가?  그러한데 李承晩(이승만)은 外交를 憑藉하여 巨額의 財政과 長久한 歲月과 無數한 努力을 浪用·浪費하고 一次도 正式으로 列邦에 獨立 承認을 要求치 아니함은 무슨 緣由인고?  所謂 謝過書의 要領을 票하건대 美國 政府에서 韓國의 獨立을 公式으로 承認할 뜻이 있을 時에 비로소 美國政府에 獨立 承認을 要求할 것이라 하였으니 이는 李承晩(이승만)의 內心에 韓國은 美國의 委任統治國임을 自認함이니 그 글대로 解釋하면 우리는 아직까지 獨立 資格이 없고 다만 美國에서 우리의 獨立 資格을 公認할 때에 비로소 우리가 獨立 資格이 있는 줄 알게 됨이니 슬프고 아프다.  이것이 우리 二千萬의 通的 意思인가? 李承晩(이승만)이 虛位 資格이라도 臨時 大統領의 名義로 如斯한 汚書를 敢히 發하여 外國政府에 보냈으니 이는 日本의 統治를 脫去하기 爲하여 피 흘리는 無罪한 同胞의 목을 매어 美國에 轉賣코자 하는 心事로다. 虛榮에 浮하며 虛名에 醉하고 公을 憑하여 私를 營하며 淳良한 同胞를 죽이며 明哲한 志士를 누르고 內로는 委任統治를 主張하며 外로는 獨立을 假飾하여 우리 神聖한 民族과 華麗한 江山으로 第二 하와이나 第二 필리핀을 만들고자 함이 李承晩(이승만)의 大政略이로다.  本人은 비록 李承晩(이승만)의 任命을 받아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에서 八朔間 視務하고 公使의 名義로 行公까지 하였으나 本人의 精神과 目的은 絶對 獨立이다. 그럼으로 正式 外交를 設施하여 美國政府에 大韓民國의 完全 獨立承認要求書까지 提出하였더니 李承晩(이승만)이 此를 外交의 過失이라 하고 美 政府에 謝過書를 보내며 取消하였는지라. 此 事實을 枚擧하여 內外同胞 二千萬의 公心에 呼訴하노니 明確한 判斷으로 누가 絶對 獨立에 公敵이되는지 判明하여 주기를 바라노라.  本人이 三十三賢의 代表로 上海에 나와 活動한 事實은 更論할 것 없고 以上에 陳述함과 如히 우리 獨立運動의 正路는 血戰과 外交인대 血戰에 對하여는 其 使命을 맡아 活動하는 志士가 많음으로 本人에게 卽接 關係가 없고 外交에 對하여는 三十三賢에게 받은 使命이 있음으로 本人은 政府 內에서 事役하든지 政府 外에서 事役하든지 卽接·間接으로 外交를 힘써오던 바 昨年 五月分에 忽然히 李承晩(이승만)이 本人으로 歐美委員을 任命하였으니 速히 到任하라 하고 旅費로 美金 五百元을 電送하였는지라. 其時에 上海 政局에서는 本人과 李承晩(이승만) 間에 무슨 密約이 있는 줄 疑하고 其 任命이 不正當하다 하여 一時는 紛擾한 姿態를 顯出하였으나 本人은 此를 憚치 않고 卽時 束裝 發程하였으니 이는 두 가지 目的을 가지고 斷行함이라. 李承晩(이승만)을 上海에 渡來케 하여 政局을 整頓하며 民心을 團結케 하자 함이 一이요, 美國 外交를 熟察하여 完實히 進行코자 함이라. 그리하여 六月 二十五日에 上海에서 出帆하여 歐羅巴(유럽)를 돌아 大西洋을 건너 八月 二十三日에 紐育(뉴욕)港에 到泊하여 二十四日에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 所在地 華盛頓(워싱턴)에 到着한즉 其時에 委員 安憲⊙(氵+樹)[안헌수]는 罷免되고 委員長 金奎植(김규식)은 辭職하였다는 委員部 情形도 매우 錯亂하여 頭序를 料得키 難하더라. 그리하여 本人은 卽時 李承晩(이승만)에게 書信을 보내어 말하기를 金奎植(김규식)의 辭職을 封還하고 本人과 作伴하여 上海로 渡去하자 하였더니 李承晩(이승만)의 答書에 말하기를 그대는 旣爲 委員部에 왔으니 委員部 事務를 보고 나는 上海로 渡去키를 敵定하였오. 즉 上海로 發程함이 事體에 合當하다 하였더라.  그리한 후 昨年 九月分에 李承晩(이승만)이 鄭漢景(정한경)으로 委員을 任命하여 九月末境[頃]에 鄭漢景(정한경)이 華盛頓(워싱턴)에 到任함에 委員會를 開하고 金奎植(김규식)은 辭職을 還收하고 三朔 間 受由를 得하여 李承晩(이승만)과 同伴하여 上海에 渡去하여 大局 收拾과 政緖 整理에 幇助하기로 하고 鄭漢景(정한경)은 書記가 되며 本人은 委員長 代理 兼 掌財가 되어 十月·十一月 兩朔은 美洲(미국)에 散在한 同胞를 歷訪하고 十一月 二十일로부터 今年 五月 十三日까지 歐美委員部(구미위원부)에서 視務함과 正式 外交를 設施함을 次序로 記錄하여 同胞의 公眼에 陳呈하여 外交의 眞髓를 曉得케 하여 우리는 外力에 맞추지 말고 內力을 一層 充分히 養하여 自家의 運命을 自手로 開拓하기를 바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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