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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최재형] [최재형관계자료] 에 대한 전체 20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슬라뱐카만 일대 최재형 가족 거주지 약도

    번호 대상물 번호 대상물 번호 대상물 1 중국인 상점 7(Ⅱ)/8 김 페.엔.(П.Н.Ким) 집 (성명) 15 우체국 1917년 이전까지 거주 2 상업 점포들 9 퍈코프 상점 16 학교 3 마가이(Магай) 집(성-마가이) 10 마르코프 상점 17 최 페.에스.(П.С.Цой) 의 목욕탕 4(Ⅰ) 최 엔.(Н.Цой) 집(성명-최 엔) 11 쿤스트와 알베르스 상점 18 박 아.이.(А.И.Пак)의 집 1914년 이전까지 거주 5 상인 한(Хан)의 2층집 12(Ⅲ) 한 예.엘.(Е.Л.Хан) 집     1917년 이전까지 거주 6 황 페.엔.(П.Н.Хван) 집(성명) 13/14 상인 한(Хан)의 건물들(주거물) 거주지 약도

    2 최재형 가계도 1

    (러시아에서는 사람의 이름은 세 부분(성, 이름, 부칭)으로 되어 있다. 특히 ‘이름’의 경우, 성장단계, 상호관계 등에 따라 정식이름 보다는 애칭이 주로 사용된다. 가령, 표트르-페챠, 니제쥐다-나쟈, 올가-올랴, 파벨-파샤.) 번호\자손 자녀(1세대) 손자/손녀(2세대) 증손자/증손녀(3세대) 1 최 표트르 페트로비치(ЦойПётр Петрович) 1남/애칭:Петя 최 지나이다 페트로브나(ЦойЗинаида Петровна)   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Цой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최 리디야 니콜라예브나(ЦойЛидия Николаевна) 최 인노켄티 페트로비치(Цой Иннокентий Петрович) 최 알렉산드르 인노켄티에비치(ЦойАлександр Иннокентьевич)최 예브게니 인노켄티에비치(ЦойЕвгенийИннокентьевич) 최 율리야 페트로브나(ЦойЮлия Петровна) 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Цой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최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ЦойГеоргийАлександрович)최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Цой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2 최(김) 베라 페트로브나(Цой(Ким) Вера Петровна) 1녀/Вера 텐 나제쥐다 야코블레브나(Тен Надежда Яковлевна) 텐 이고르 게오르기에비치(Тен Игорь Георгиевич) 안 니나 야코블레브나(Ан Нина Яковлевна) 안 게르만 니콜라에비치(Ан Герман Николаевич)안 마이야 니콜라에브나(Ан Майя Николаевна) 김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Ким НиколайЯковлевич)   박 엘리자베타 야코블레브나(Пак Елизавета Яковлевна) 아들과 딸 김 류보프 야코블레브나(Ким Любовь Яковлевна) 김 보리스 마카레비치(Ким Борис Макарьевич) 3 최 나제쥐다 페트로브나(ЦойНадежда Петровна) 2녀/Надя 김 보리스 이바노비치(Ким Борис Иванович) 아들과 딸 한 마리야 이바노브나(Хан Мария Ивановна) 한 발렌틴 코노노비치(Хан Валентин Кононович)한 블라디미르 코노노비치(Хан Владимир Кононович)한 알라 코노노브나(Хан Алла Кононовна) 라리사 이바노브나(Лариса Ивановна) 비탈리(Виталий), 발렌틴(Валентин), 아들, 엘라(Эла) 박 올가 이바노브나(Пак Ольга Ивановна) 박 보리스 티모페예비치(Пак Борис Тимофеевич)데카(Дека), 타냐(Таня), 류다(Люда) 김 레오니드 이바노비치(Ким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강 이고르 니콜라에비치(Кан Игорь Николаевич) 강 올가 이고례브나(Кан Ольга Игорьевна)강 올레그 이고례비치(Кан Олег Игорьевич) 강 율리야 니콜라에브나(Кан Юлия Николаевна)   4 최(니) 류보프 페트로브나(Цой(Ни) Любовь Петровна)3녀/Люба 니 리디야 알렉세예브나(Ни Лидия Алексеевна) 코르슈노프 표트르 페트로비치(Коршунов Пётр Петрович) 니 유리 알렉세예비치(Ни ЮрийАлексеевич) 니 류드밀라 유례브나(Ни Людмила Юрьевна) 5 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2남(Цой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аша) 최 네온 파블로비치(ЦойНеон Павлович)   6 최 소피야 페트로브나(ЦойСофия Петровна)4녀/Соня 쇼루코프 알레고 호드줴하노비치(Шоруков Алего Ходжеханович) 쇼루코바 이리나 알레고브나(Шорукова Ирина Алеговна)쇼루코프 알렉산드르 알레고비치(Шоруков Александр Алегович) 7 최 올가 페트로브나(ЦойОльга Петровна)5녀/Оля 심 엘비타 세르게예브나(Шим Эльвита Сергеевна) 마가이 리타 표도로브나(МагайРита Фёдоровна)마가이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Магай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심 나탈리야 겐세코브나(Шим Наталья Генсековна)심 레오니드 겐세코비치(Шим Леонид Генсекович) 8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Цой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3남/Валя 최 발렌틴 발렌티노비치(ЦойВалентин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발레리야 발렌티노브나(ЦойВалерия Валентиновна)최 표트르 발렌티노비치(ЦойПётр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파벨 발렌티노비치(ЦойПавел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올레그 파블로비치(ЦойОлег Павлович) 9 최 류드밀라 페트로브나(ЦойЛюдмила Петровна)6녀/밀라     10 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Цой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7녀/Лиза 텐 릴랴 콘스탄티노브나(Тен Риля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11 최 비켄티 페트로비치(ЦойВикентийПетрович)4남/Вика 최 류드밀라 비켄티에브나(ЦойЛюдмила Викентьевна) 최 데니스 드미트리에비치(ЦойДенис Дмитриевич)최 콘스탄틴 드미트리에비치(Цой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1990년 12월 15일 작성, 알마타시, 최종본123페챠Петя(1남)지나Зина콜랴Коля리다Лида코샤Коша줴냐,사샤Женя,Саша율랴Юля보바,조라,코스챠,Вова,Жора,Костя123베라Вера(1녀)나쟈Надя이고르Игорь니나Нина마냐,게르만Маня,Герман콜랴Коля리자Лиза아들,딸류바Люба보랴Боря1리자Лиза(7녀)2릴랴Риля1비카Вика(4남)2밀라Мила3데니스Денис코스챠Костя 최재형 가계도 (최재형 가계도 2)에서는 증손자의 성(姓)이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대신 자료 (최재형 가계도 1)과 동일하게 ‘아들’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뒤에 나오는 자료 ‘최재형 가계도 3’에서는 아들이 아닌 딸(타티아나,타냐)로 표기되고 있다.

    3 산자와 죽은 자

    노인세대를 만날 수 록 나는 더욱 자주 그런 생각에 잠기게 된다. 백발이 하얗게 된 노인세대들은 때때로 활용되지 못한 기억의 비밀스런 구석 속에서 문자 그대로 우리의 눈앞에서 지난 시대의 영혼과 호흡, 대기, 냄새를 다 가져가고 있다(죽어가고 있다). 지난 시대를 우리는 단지 역사적인 연구를 통해서만 알 수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 매번 그러한 만남은 아마도 먼 과거의 상황을 형상화시켜주기 위한 시도이거나 현재와 미래를 연결시켜주는 다리를 놓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한 가교를 건너 자녀와 손자들은 마침내 시대에 대한 자신들의 진정한 연속성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계속 진행 중인 우리의 추모활동으로 만들어지고 있는 일련의 초상화들 속에서 여전히 새로운 영웅들이 등장하고 있다. 신문장르의 차원에서 이 영웅들에 대해서 기술하는 것은 실제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들의 삶은 무한하고 깊고, 그리고 우리들과는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기술한다면, 그것은 다만 한 가지 목적을 위해서, 즉 비록 순간일지라도 해마다 우리에게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과거의 황혼들이 이러한 타오름 속에서 빛으로 빛날 수 있도록 인간의 운명의 결정체를 비추어내기 위함이다. 아마도 진정한 시대의 패러독스가 아닌가! 대담자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3남, Цой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В.П.Цой)는 1908년생으로 그의 가족사는 의심의 여지없이 독특했고, 또 비극적이었다. 이는 본질적으로 나의 잦은 질문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독백이 주를 이루었던 그와의 초반 대화에서 곧 바로 드러났다. 그에게는 아직 말하지 않은, 그리고 못 다한 이야기가 많이 쌓여있었다.저의 아버지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드렸으면 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고 모든 역사가 그로부터 시작되었으니까요. 저의 아버지 최재형(Цой Зя Хен-이외에도 원문에서 최재형은 필자마다 러시아어로 다양하게 표기하고 있다(Цой Зя Хен, Чхве Чже Хён). 역자는 기본적으로 한국명(최재형)과 러시아명(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의 구분 없이 러시아명의 전체성명(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 혹은 약식형태(П.С.Цой)로 표기할 것이고, 필요한 경우 한국명을 살려서 표기)은 1860년 (한반도) 이북지역의 농노농민 가정에서 출생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자녀들-나의 아버지와 자신의 큰형(큰아버지)-과 함께 국경을 건너 러시아로 도망치다시피 들어갔습니다. 이는 1869년에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는 그대로 고향에 남아계셨는데, 할아버지께서 할머니를 데려가시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를 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차분하지 않고 생각이 많은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아버지께서는 큰형(큰아버지) 내외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고, 11세 때에 집을 떠나버린 것에서도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가출한 아버지께서는 해안가에서 며칠을 노숙하셨고, 이후 그곳에서 러시아인 무역상선의 선원들에 의해 거둬들여 졌습니다. 단 한마디의 러시아어를 몰랐던 검은 머리와 좁은 눈매의 소년은 아마도 이국적인 모습의 신기한 사람으로 여겨졌고, 무역상선 선장의 아내는 소년의 모습을 마음에 들어 했습니다. 선장의 아내는 소년을 양육했습니다. 소년은 11세부터 17세까지 상선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이 동안에 이름을 알 수는 없지만 (선장의 아내인) 러시아 여인이 공부를 가르쳤고, 모든 학교(школа)생활의 규율들을 가르쳤습니다. 따라서 17세 무렵에 저의 아버지는 완전히 교육받은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 생각을 하노라면, 저의 아버지를 거두어주고 양육해 준 알지 못하는 이 여인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또한 이러한 만남이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다르게 되었을 것이라 생각을 하곤 합니다.  선장의 아내는 소년에게 세례를 주고 이름을 페치카(Петька)(페챠, 표트르/Петя,Пётр)라고 명명해 주었습니다. 1878년 최재형(П.С.Цой)은 육지로 나갔고,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에 있는 상업회사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무역과 수공업을 배웠습니다. 얼마 후 그는 아버지(할아버지)가 계신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곳에서 오랫동안 견뎌내지는 못했습니다. 땅에서 하는 단조로운 힘든 노동은 그에게 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버지를 돕는 것은 계속해 나갔지만, 한편으로는 노보키예프스크(Новокиевск)에서 독립적으로 통역으로 일을 해나갔습니다. 그에게 러시아어는 유용하게 사용되었습니다. 러시아인 사업가들은 도로건설과 같은 힘든 육체노동에 한인들을 고용하곤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한인 노동자들과 고용자 간의 가교역할을 했으며, 그런 한편으로 자신의 동족들의 하루살이 식 삶의 무게를 아울러 같이 느껴야 했습니다. 저는 아마도 바로 그 당시에 최재형(П.С.Цой)이 자신의 동족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진정한 사명을 발견했다고 생각합니다.  1889년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 읍(邑)의 지역대표 회의에서 아버지는 얀치헤 읍장(邑長)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해 나가셨습니다. : 아버지의 노력으로 1896년부터는 공부를 위해 한인 젊은이들을 상대로 한 러시아 각지로의 정기적인 파견이 시작되었습니다. 교육기관은 신학교에서 농업학교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지역 또한 옴스크(г.Омск, 옴스크주 수도), 카잔(г.Казань, 카잔주 수도), 이르쿠츠크(г.Иркутск, 이르쿠츠크주 수도), 심지어 심페로폴(г.Симферополь, 우크라이나 크르임 자치공화국 수도)에 이르기까지 퍼져있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잠시 중단하고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공부를 위해 젊은이들을 파견하는 일은 어떻게 실행이 되었고, 누가 한인 젊은이들의 사회-문화 프로그램 관련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주었습니까? 그러니까 민족문화 부흥의 시기에 대중적인 요구에 따른 그런 부흥은 없었습니까?  당시 극동에는 부유한 한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상업거리와 상업구역들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러시아에서 한인들은 농업이나 상업 활동에 종사했습니다. 당시에 한인사회에서는 부유한 사람들이나 한인 상인들로 구성된 다양한 친선도모단체들이 조직이 되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러한 단체들 내에서는 진정한 기부행위들이 행해졌고, 공동의 일을 놓고 서로서로에게 맹세가 행해지곤 했다고 합니다. 해야 할 일은 한 가지였습니다. : 자신들의 동족을 돕고, 발전시키고, 그리고 교육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마침 그러한 단체의 수장으로 선출이 되셨고, 아버지의 모든 교육-사회사업 프로그램들은 이러한 친선도모단체들에 의해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습니다.  오늘날의 기업가들을 바라볼 때 믿어지지 않을 뿐입니다. 한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사업 프로그램들을 수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외부로부터의 어떤 방해나 압력을 받기도 했습니까?  차르(제정러시아 황제) 체제로부터는 어떠한 압력도 가해지지 않았습니다. 가령 한인 상인들은 매우 잘 화합했고, 그리고 실제적으로 입는 것을 포함해서 물품과 식료품을 제공받았던 러시아 군대는 말할 것도 없이 당국과도 사업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저는 본질적으로 러시아 한인은 공존할 수 있는 유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우리의 역사를 통해서 항상 나타나고 있습니다. 압제에 대해서 언급을 한다면, 이 문제는 무엇보다 먼저 일본인들에게서 비롯되어왔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패한 후 러시아는 일본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시다시피 19세기 말-20세기 초에 일본은 한국을 점령했습니다. 러시아에 있던 한인들은 어떻게든지 국경너머 자신의 동족들을 돕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빨치산(партизан) 부대를 결성했고, 국경너머 일본군 수비대에 타격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권업회’(‘노동발전’)와 같은 다양한 단체들이 조직되기도 했습니다. 단체의 목적 중의 하나는 새로운 조국, 러시아에 대해 애국주의 정신으로 한인들을 교육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당시의 분위기는 친일적인 단체들과는 반대로 진행되었습니다. 단체(권업회)는 10월 혁명 직전까지 존재를 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가장 적극적으로 권업회의 활동에 참여를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권업회의 대표로 선출되었고), 유명 인사였던 홍범도(Хон Бом До)가 부대표로 선출되었습니다.그러니까 전통적으로 복잡한 한일관계가 러시아 토양에서도 확산이 된 것이군요.물론입니다. 제가 일본문제와 관련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것은 다 이유가 있습니다. 아버지에 대해 몇 가지 언급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는 항일빨치산 운동 조직자 중의 한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을 아는 일본인들을 피해서 항상 이리 저리 옮겨 다니셔야 했습니다. 그는 얀치헤에서 노보키예프스크로 이사를 하셨고, 다시 그곳에서 가족과 함께 슬라뱐카(Славянка)로 이사를 하셨습니다. 이후 일본인들이 슬라뱐카 해안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현재 연해주의 제2도시인 우수리스크는 с.Никольское(1866), г.Никольск(1898), г.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1926), г.Ворошилов(1935), г.Уссурийск(1957) 순으로 시기를 두고 명칭이 변경되어 왔다.)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서 아버지께서는 군 자치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으로 활동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근본적인 사업을 계속해 나가셨습니다. : 1911년에는 노보키예프스크에, 1917년에는 슬라뱐카에 초등학교가 세워졌고, 1918년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 한인교사학교가 세워졌습니다. 이제는 보다 중요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지금까지도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만, 1920년 4월 5일 새벽,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일본인들이 아버지를 찾아내고는 체포해갔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마침 나가시려고 마당으로 나가셨는데 그곳에서 아버지의 팔을 결박하고서 데려갔습니다. 이후로 아버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듣지를 못했습니다.여기에서부터 가족의 비극이 시작된 것입니까?그렇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겨우 아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체포되었을 당시, 그에게는 그다지 어리지 않은 자녀들이 있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대 가족이었습니다. : 정교회 세례자인 어머니 엘레나 페트로브나(Цой Елена Петровна/Е.П.Цой)와 11명의 형제자매들(아들-4명, 딸-7명)이 있었습니다. 큰형님 표트르(1남, Цой Пётр Петрович/П.П.Цой)는 차르 군대의 육군중위로 근무했는데, 군복무를 잘 수행하여 ‘게오르기’ 훈장을 받기도 했으며, 또한 다른 동료 러시아인 장교들과 2월 혁명과 10월 혁명을 경험했고, 볼쉐비키편을 지지했습니다. 그는 1919년 내전기(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1918-22) 때에 전사를 했는데, 1년 후에 그의 전우들이 와서 전사소식을 전한 후에서야 우리는 큰형의 죽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큰형의 유품과 많은 시베리아 돈을 전해주었습니다. 이것이 큰형에 대한 기억입니다.  둘째 형 파벨(2남, Цой 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П.Цой) 또한 군인이었는데, 20세부터 극동지역의 빨치산들과 활동을 했습니다. 어머니께서 여러 차례 그를 집에 붙어있게 하려고 시도를 해보았지만 허사였습니다. 당시 우리는 아버지 없이 살고 있었는데, 너무 힘든 시기였고, 끔찍할 정도로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이후에 파벨(Павел)은 레닌그라드(페트로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있는 프룬제 명칭 해군군사학교(Военно-морское училище им.Фрунзе)를 졸업하고, 주력함(линейный корабль) 마라트호를 타고 해군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파벨 또한 1938년 탄압으로 희생되었고, 그가 어디에 묻혀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지금 말씀하신 형제들은 군에 징집된 것입니까, 아니면 어쩔 수 없이 입대한 것입니까?아마도 어쩔 수 없이 입대한 것일 겁니다. 그런 시대였으니까요. 예로 파벨(Павел)에 이어서 저도 입대를 했습니다. 저의 직업은 평범한 농업기사(агроном)였는데, 1938년부터 1940년까지 약 2년 동안 알마타에서 옥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남동생 비켄티(4남, Цой Викентий Петрович/В.П.Цой)도 평범한 사람으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했는데, 학교 물건을 절도했다는 거짓혐의를 받고 아랄스크에서 옥살이를 했고, 결국 24세에 총살을 당했습니다. 나중에 제가 아랄스크 검사국에 문의를 했는데, 아시다시피 그들은 사안에 따라 불명확한 사건으로 종결시키는 일을 잘하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당시 내무인민위원들은 우리 친척들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탄압형을 받았다면, 나머지 친척들도 적으로 간주되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이 문제에 관해서는 적지 않게 기술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모든 것에 대해서 언론매체를 통해 읽게 되거나, 자신이 직접 그러한 상황에 부딪히게 된다면, 이는 문자 그대로 경악할 일이지요. 딸 형제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7명의 여자 형제들이 있었는데, 큰누나는 노보시비르스크 은행에서 경리원으로 근무를 했습니다. 큰누나도 같은 운명을 맞이했는데, 1938년 탄압 희생되었습니다. 큰누나의 시신도 어디에 묻혀있는지 우리는 모르고 있습니다. 다행히도 올가(5녀, Цой Ольга Петровна/О.П.Цой)는 생존해서 모스크바에 살고 있는데, 건강이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올가의 남편도 탄압을 받아 1938년 총살되었습니다. 올가의 남편만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현재 고인이 된 나쟈(2녀, Цой Надежда Петровна/Н.П.Цой)와 현재 알마타에 거주하고 있는 리자(7녀, Цой 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Е.П.Цой)의 남편도 탄압받아 희생되었습니다. 베라(1녀, Цой(Ким) Вера Петровна/В.П.Цой(Ким))는 내내 중국에서 남편과 함께 거주해오다가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또 누가 남았나요? 류드밀라(6녀, Цой Людмила Петровна/Л.П.Цой)는 프르줴발스크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는데 다행히 아직 생존해 있습니다. 그리고 소피야(4녀, Цой София Петровна/С.П.Цой)가 있는데, 그녀는 아들과 함께 모스크바에서 거주하고 있습니다. 소피야도 불행한데, 그녀의 남편도 다른 사위들처럼 탄압받고 희생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당신의 증언을 듣고 나니 오랫동안 침묵하고 싶습니다. 열거되고 있는 당신 가족의 아픈 이야기 너머에는 완전히 상상할 수 없는 무언가가 서있는 것 같습니다. 가능하다면 여기에서 벗어나 생각해 볼 때, 당신은 가족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독특하고 특색 있는 운명으로 받아들이십니까?  이러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은 저에게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을 말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잔인했지요. 아마도 시대가 그랬으니까요. 모든 것을 제거해버렸으니까요. 물론 저의 식구들 중에서 단지 올랴(Оля), 리자(Лиза), 밀라(Мила), 소피야(Соня, София), 그리고 내가 남아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이는 그다지 적은 숫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의 어머니, 엘레나 페트로브나(Елена Петровна)는 많은 경험을 하셨고, 1953년까지 사시다 돌아가셨습니다. 이는 아마도 당시를 비추어 볼 때 의미심장하고 독특한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의 아내에 대해서는 아직 말씀을 드리지 않았는데요, 첫째 아내는 1945년 병으로 죽었는데, 현재 아들이 모스크바에서 살고 있습니다.  알마타 감옥에서 2년 동안 옥살이를 하셨다고 하셨는데요, 당신의 개인적 사례를 겪으며 가족들의 운명 속에 있는 어떤 숙명적인 적법성을 느끼지는 않으셨나요?  때로는 그렇게 여겨졌습니다. 마치 ‘다모클레스의 칼’처럼 말입니다. 식구들의 죽음과의 어떤 관계가 물론 느껴졌습니다. 심지어 심문과정에서 조차 늘 나에게 이에 대해 상기를 시켰습니다. 이것이 운명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직접 한번 판단해 보세요. ‘컨베이어’(전송장치) 방식으로 저를 심문했습니다. 즉 9시부터 18시까지, 그리고 21시부터 아침 7시까지 끊임없이 심문을 했습니다. 18시에서 21시 사이에는 잠자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벽에 붙어있는 감방에 수감되어 있었습니다. 이웃인 우크라이나인 블라센코(Власенко)는 착하고 밝은 사람으로 내가 견뎌내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책을 편 채로 내 앞에 앉아서는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고, 저는 비록 사실은 자고 있었지만 듣고 있는 것처럼 앉아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문틈으로 우리를 항상 감시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무 것도, 조국에 대한 어떠한 배신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았고, 어떠한 서류에도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고문으로 깨지고 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이지요. 아마도 무죄에 대한 저의 확고한 믿음이 저를 구한 것 같습니다. 사실상 58조 1항에 따라 저는 총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현재 당신은 은퇴하고 연금생활자이시고, 전반적인 상황 때문에 나라가 그다지 조용하지 못한 상태 속에서 살고 계십니다. 하지만 당신이 예전에 경험했던 것보다는 그다지 무섭다고 할 수는 없겠습니다. 요즘은 어떻게, 무엇을 하시며 지내십니까?  때로는 감금상태에서 벗어나 다른 큰 감옥에 갇힌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매우 힘들게 연금생활자 자격을 취득했고, 복권 서류들을 준비했습니다. 과거의 ‘감옥살이’ 경력은 항상 저의 직장생활에서 반영되었고, 농업관리국(управление земледелия)의 간부이면서도 제일 마지막으로 아파트(квартира)를 분양받았습니다. 이 모든 상황은 나에게 불공정하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곤 합니다. 예. 오늘날 시대가 이제는 완전히 다르지요. 비록 지금 저의 형제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지만, 소비에트시기에 발생했던 모든 일은 큰 비극이었습니다. 편안하게 형제들에게 왕래를 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까요. 알마타에 저의 직계가족들-아내와 아들 부부-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저에게 따뜻함과 기쁨을 주고 있습니다. 현재 저는 억울한 죽음을 당한 가족들의 상황을 복권시키는 일을 하고, 또 관련기관으로부터 복권관련 서류들을 받고 있습니다. 이미 잘 해결된 부분도 있고, 아직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저에게 이 일은 가장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그들을 위해서 이 일을 해야만 하는 것 아닐까요? 역사가 사람들에게 아무리 가혹했다 할지라도, 산 자이든 죽은 자이든 모든 사람은 각각의 존재의 의미와 진실에 대한 완전한 권리를 갖고 있으니까요. 인터뷰 진행-강경일(Кан Кен Иль).

    4 최재형 관련 참고문헌 목록들

    -아. 파데예프(А.Фадеев), 『우리 젊은 날의 이야기』-서신과 회상기 중에서, 소련방 교육부 국립아동문학출판사, 모스크바, 1961. (308쪽-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П.П.Цой)/1900-1937/극동의 저명한 혁명가이며, 1920년 외국간섭군(интервент)들에 의해 고문당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 П.С.Цой)의 아들).-엠. 구벨만(М.Губельман), 『라조』, 청년근위대, 1956. (258쪽-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한인민족혁명운동가 중의 한 명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죽음을 당했다).-엔. 일류호프(Н.Ильюхов), 이. 사무센코(И.Самусенко), 『연해주에서의 빨치산 투쟁』, 소련방 국방부 군출판사, 모스크바, 1962. (131쪽-한인혁명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최 표트르(Цой Пётр)는 그러한 빨치산 부대의 조직에 적극 참여했다. 간섭군들이 그를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총살했다).-엠. 이. 구벨만(М.И.Губельман), 『소비에트 극동해방을 위한 투쟁』, 소련방 국방부 군출판사, 모스크바, 1958. (186쪽-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г.Хабаровск)와 그 밖의 지역에서 자행된 1920년 4월 4-5일의 일본군들의 유혈학살만행으로 많은 한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중에는 한인민족해방운동 및 혁명운동의 노투사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일본 간섭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했다).-베. 데. 박(Б.Д.Пак), 『1차 세계대전 직전의 한민족의 해방투쟁』, 출판사 과학, 동방문학편집부, 모스크바, 1967.(108쪽-1911년 초 일본은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Чхве Чже Хён, П.С.Цой)으로부터 손을 떼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첩보원들을 통해 최재형은 일본당국과 비밀관계를 맺었다는 소식을 날조하여 퍼뜨렸다. 이 날조된 ‘첩보’를 접한 프리아무르 군관구(현재 극동) 사령부는 최재형을 러시아에서 추방하라는 청원을 제기했다. 하지만 최재형을 한국에서 일본 지배체제의 적으로 알고 있던 지역당국은 최재형의 추방을 반대했다. 지역당국은 항일적인 목적에서 최재형을 이용하기 위해서 그를 러시아에 남겨두기로 결정했다).(109쪽-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 Начальник жандармско-полицейского управления Уссурийской железной дороги)는 연해주 군무지사 스볘친(И.Н.Свечин, 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Приморской области)에게 다음과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 “나는 한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애국자이자 러시아에도 두말할 필요 없는 충성스런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지역당국자들을 상대로 그를 중상하고자 하는 일본의 바람은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전적으로 이해는 갑니다. 날씨가 따뜻해지면 한인들의 빨치산 활동이 시작될 것이니까요.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들을 러시아 지역당국이나 한인들을 상대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수법은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전술인데, 작년의 경우에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바 있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이번에도 러시아인들의 손을 빌어 자신들의 타협하기 힘든 적들을 제거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경우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경계대상의 인물인데, 이는 그가 많은 자금을 소유하고 있고,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러시아 정부에 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가 비밀리에 빨치산 활동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매수하고자 시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그에 대한 소식은 근거 없는 소리이고, 소식을 전한 자들 스스로가 일본인들의 교묘한 음모에 빠진 것입니다.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 작년에 일본인들은 같은 방법을 통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불온한 자들이라는 점을 (연해주)지사에게 확신시켜주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54쪽-러시아 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로 구성된 ‘의병’부대의 조직이 1906년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의병부대 조직에 최재형은 적극적으로 참여를 했다).(121쪽-러시아 극동의 한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한 교육 계몽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저명한 교육 계몽가들인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등에 의해 전개되어 나갔다).(143쪽-적극적인 해방운동 참여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 중에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있었다).

    5 최재형의 생애 연표(1860-1920)

    연도 활동/경력사항 1860 8월 15일, 조선(이북지역) 경원군에서 출생. 1869 러시아 연해주 남부 티진헤 마을로 이주. 1871 집에서 가출하여 포시에트(Посьет)항 무역상선의 견습선원이 됨. 1871-77 2회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그) 구간을 항해. 1878 선장의 추천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직. 1881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에서 큰 아들 부부와 거주하고 있는 아버지 최흥백(Цой Хын Бек-원문에서는 세 가지 형태(Цой Хын Бяк, Цой Хын Бек, Цой Хен Бяк)로 표기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역자는 이 중에서 한국식 표기에 가장 가까운 Цой Хын Бек으로 통일해서 표기)에게 돌아옴. 한인들 사이에서 문화-교육계몽 및 농업정착 사업 활동을 시작. 1882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하마탕)-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 구간 고속도로 건설국과 지구경찰서장의 통역으로 일을 시작. 1886 한인 젊은이 첫 번째 그룹을 상대로 러시아 유학 파견 사업을 조직. 1888 고속도로 건설관련 공로로 첫 은메달을 받음. 1890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발의로 노보키예프스크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1916년에는 슬라뱐카(Славянка)의 학교 내에 공원이 조성됨.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지원 자금 마련을 위해 산업체 인사들과의 사업적인 네트워크를 조직함. 1893 스타니슬라프 금장으로 된 두 번째 은메달을 수여받음. 얀치헤 볼로스치(Янчихинская волость, 얀치헤 읍,邑)의 책임자(старшина)으로 선출됨. 1894 제1차 전러시아 읍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1895 얀치헤에 최초의 정교 교회와 교사 및 사제를 위한 학교와 주택들이 건립됨. 1896.5.13 수도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황제 니콜라이 2세(Н.А.Романов Ⅱ)의 즉위식에 참석함. 1898 친선-형제관계에 의거해 상업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를 통해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교육계몽, 건설, 농업관련 비용들을 조달함. 1904 항일운동 조성을 위해 연해주 한인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함. 최고영예의 금메달을 수여받음. 1905 한국과 관련한 국가정책을 알기위해서 일본의 수도 도쿄에 다녀옴. 가족과 함께 노보키예프스크(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해옴. 1906 최초의 한인 빨치산 부대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수비대에 대해 기습을 감행함. 1910 가족과 함께 슬라뱐카로 이사해옴. 1911 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비밀회의에서 전 극동지역 57명의 대표위원 입회하에 새로운 단체 ‘권업회’가 조직되고,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권업회 회장으로 선출됨. 11월에 권업회의 합법적인 활동권을 보장받았으며, 12월에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권업회의 지도부가 선출됨. 1913 로마노프(Романов) 왕조 제위 300주년 기념식에 한인단체(7명)의 일원으로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권업회의 지도자들(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박 에스. 베.(С.В.Пак), 채 아.(А.Цхай)이 곤닫티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Н.Л.Гондатти, Приамурский генерал-губернатор)에게 한인의 러시아이주 50주년 기념행사 조직위원회의 조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으며, 동년 10월에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로부터 허가를 받음. 1915 슬라뱐카에서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됨. 1917 얀치헤 읍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1918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동해 옴.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자치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군자치단체 감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일본군에 대항해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1919 상해임시정부 위원으로 선출됨. 1920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함. 1953 7월 13일 부인 엘레나 페트로브나(Елена Петровна)가 사망했으며, 7월 16일 (키르기즈스탄) 비쉬케크시 (프룬제) 공동묘지에 안장됨. 1992년 3월. 서명.

    6 최재형의 짧은 전기

    19세기 후반 조선은 낙후된 봉건국가였다. 국유 토지 대신에 봉건영주(지주)들의 사유 토지가 증가했으며, 봉건지주들은 농민들의 토지를 착복하고,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몰아내었다. 그런 상황에서 토지를 잃고 파산한 농민가정의 수는 증가했다. 1868-1871년 시기에 토지를 잃은 빈곤 농민들은 강한 가뭄 기에 특별한 어려움을 견뎌야 했다. 일부 지방에서는 굶주리고 격앙된 농민무리들이 봉건지주들의 곡식창고에서 무단으로 곡식을 탈취하기도 했다. 봉기를 일으켰던 많은 수의 농민들은 러시아나 중국으로 가기 위해 국경을 넘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봉건지주들을 습격한 죄목으로 조선정부의 경찰이나 헌병당국의 추적을 받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피난농민 이주자들은 연해주의 포시에트 지구(Посьетский район, 현재 하산 지구)에 새로운 삶의 토대를 놓기 시작했다.  당시 피난농민 이주자들 중에는 두 명의 아들과 함께 온 가난한 농노농민 최흥백(Цой Хын Бек)도 끼어있었다. 둘째 아들 최재형(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П.С.Цой)은 당시 9세였다. 그들은 새로운 마을의 초기 정착민 무리 중에 있었는데, 이후 이 마을은 티진헤(지신허)라는 마을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새로운 한인 정착민들은 새로운 땅에서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자유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은 매우 어렵게 펼쳐졌고, 그럼에도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도 인내할 준비가 되어있었으며, 그렇게 자유로운 토지를 일구어 나갔다.  아버지와 함께 큰 형 집에서 살았던 소년 최재형(П.С.Цой)은 특별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어려운 삶 속에서도 소년은 개구쟁이스럽고 지식욕이 많은 소년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런 소년 최재형의 성격은 형수의 마음에 들지 않았었고, 형수는 매번 최재형에게 압박을 가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2년여를 지낸 최재형은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소년 최재형은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2명의 다른 소년들에게 함께 집을 가출할 동무가 되어 줄 것을 설득했다. 하지만 가출이 예정된 시간에 다른 2명의 소년들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잠시 기다린 최재형은 바닷가 쪽으로 방향을 잡고 홀로 길을 떠나기로 결정했다.  얼마간의 여정 끝에 소년 최재형은 당시 포시에트(Посьет)라는 작은 부둣가에 도착했다. 그곳의 동일한 명칭의 포시에트만에는 군함이나 상선이 정박해 있었다. 미지의 세계에서 소년 최재형의 독립적인 삶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1860년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조선(이북지역) 경원군에서 출생했다. 긴 여정 끝에 굶주리고 피로에 지친 재형(최재형)은 해안가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는 알 수 없다. 낯선 사람들이 최재형을 깨웠는데, 그들은 무역상선에서 내려온 러시아인 선원들이었다. 선원들은 최재형을 무역상선 선장에게 데려갔고, 선장은 최재형이 배에서 생활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소년 최재형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선장의 훌륭한 러시아인 아내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녀와 그녀 남편의 이름도, 부칭도, 성도 모르고 있다.  선장의 아내가 처음으로 지저분하고 누더기가 된 옷을 입고 있는 소년을 보았을 때, 도대체 어떤 운명이 인간을 저런 상황에까지 이르게 할 수 있는지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처음으로 거울을 통해 자신의 전신을 바라본 최재형(П.С.Цой)은 자신의 외모에 크게 놀랐다. 소년의 등 뒤로는 댕기머리가 솟아나 있었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만든 털모자처럼 덮여 있었다. 아마도 조선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은 모양이었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지저분했고, 단지 검은 눈만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당황해 하지 않았다. 그는 거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쾌활하게 웃음을 지었다. 선장 아내의 지시로 소년의 머리는 잘려지고 몸은 씻겨 졌다. 그리고 견습선원의 복장을 입히고 먹을 것을 제공한 후 선실로 소년을 데려갔다. 그곳에서 소년은 거울 속에서 자신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낯선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선장 부부는 소년의 세례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최재형에게 이름과 부칭-표트르 세묘노비치(Пётр Семёнович)-를 주었다. 선장의 아내는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최재형에게 읽고쓰기와 기타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나중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러시아 문학작품의 큰 애독자가 되었으며, 이는 자연스레 한 인간의 인격체 형성에 크게 반영되어 나타났다. 소년은 배에서 거의 6년의 시간을 보냈으며, 이 동안에 그는 지구의 절반인 블라디보스토크-페트로그라드 구간을 두 번이나 항해했다. 항해는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남쪽 해안을 따라 몇 달씩 진행되곤 했다. 두 번째 항해는 그의 나이 16-17세 무렵에 이루어졌는데, 이때는 인생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는 연령기였다. 정박하는 곳마다 소년 최재형은 선원들과 함께 항구를 돌아보며 세상의 많은 민족들의 삶을 체험하고 이해했다. 견습선원으로 일하는 동안 좋은 선장 부인덕분에 그는 좋은 지식을 얻었고,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으며, 많은 시간을 독학하는 데에 보낼 수 있었다.  1877년 정기항해에서 귀항한 직후 선장은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믿을만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영세 받은 아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친구에게 추천해 주었다. 17세가 되던 해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독자적인 삶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새로운 사람으로서 일을 해나가며 그는 풍부한 인생경험을 쌓았으며, 러시아인들 사이에서 사업상의 발을 넓혀놓을 수 있게 되었다. 선장 친구의 사업체에서 여러 해를 근무하면서 그는 능력 있는 직원으로서 인정도 받게 되었다. 소년 최재형은 직장인으로서의 안정된 삶을 살아가면서도 자신의 혈육에 대해서 잊지 않고 있었으며, 그들의 생사를 모른 채 크게 염려하며 지내왔다. 그는 직장생활 동안에 크지 않은 규모의 재산을 모았고, 아버지와 형을 찾아 포시에트 지구로 가기로 결심했다. 그는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에서 혈육을 찾아보았다. 얀치헤는 조선에서 건너 온 이주자들이 정착한 곳이다. 이곳에서 그는 한인 이주자들의 힘든 삶을 알게 되었다. 한인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필요한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어렵게 자신들의 삶을 개척해 나가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하마탕)-자나드보로프카-바라바쉬(Барабаш, 몽구가이)-슬라뱐카(Славянка)-노보키예프스크-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조선 국경과 가까운) 구간을 잇는 기획적인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완벽한 러시아어 구사능력은 그로 하여금 통역 자격으로 건설관리국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건설되고 있는 라즈돌노예-크라스노예 셀로 구간 고속도로 주변에 위치하고 있던 마을의 한인 이주자들이 노동자-토역꾼으로 건설장에서 일을 했다. 도로건설은 어렵게 진행되었는데, 삽이나 곡괭이, 들것이 도로건설의 주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일상생활의 조건은 매우 볼품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건설노동자들과 행정당국 간에는 심심찮게 오해 상황이 발생하곤 했다. 그곳에서 청년 통역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자신의 눈으로 한인-건설노동자가 법적인 보호를 받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노동고용업자들은 한인 노동자들이 대부분 배우지 못했고, 러시아어를 구사하지 못한다는 점을 임금계산 시에 작업량을 속이는 방식으로 악용했다.  동족들의 그러한 법적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을 보면서 청년 통역(최 표트르 세묘노비치, 최재형)은 노동자들의 법적인 이익을 보호해주며 항상 노동자들의 입장을 대변해주고자 노력했다. 건설 참가 농민들은 집으로 돌아 온 후 선하고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통역에 대해서 따뜻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고속도로 건설 기간 동안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라즈돌노예-크라스노예 셀로 구간의 건설장 주변 마을의 많은 한인 이주자들과 알게 되었다.  19세기 말에 조선에서 프리아무르(현재 극동)로 넘어 오는 한인 피난민들의 규모가 커지자 차르(царь, 제정러시아 황제) 정부는 한인들의 국경지역 정착과 관련 다른 대안을 찾고자 했다. 새로운 규정에 따라 정교신앙을 받아들인 한인들만 토지를 받게 되었다. 동시에 한인들의 국적문제도 긍정적으로 해결되어 나갔다. 새로운 한인정착촌들이 생겨나면서 러시아 정부는 얀치헤를 행정중심으로 노보키예프스크(현재 크라스키노)에서 3-4km 떨어진 곳에 새로운 행정구역-볼로스치(волость/읍,邑)-을 편성했다. 새로운 볼로스치의 첫 행정책임자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가 선출되었다. 그는 진보적인 사람들의 지지 하에서 한인들 사이에서 문화-교육 계몽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애국계몽운동은 극동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갔다. 이러한 가치 있는 애국 계몽사업은 저명한 계몽가들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이준(중)호(Ли Чжун Хо), 최 엔.엘.(Н.Л.Цой), 김 엔.이.(Н.И.Ким) 등에 의해서 주도되어 나갔다. 이준(중)호는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청년협회(Общество молодых корейцев) 조직의 발의자였다. 이 협회는 민족한인학교 설립자금 모금에 종사했다. 모금된 자금으로 극동지역에서 182개의 한인학교가 운영되었고, 그 곳에서 약 6,000명의 학생과 260명의 교사가 활동을 했다.  한국이 병합(강제병탄)된 이후 초기에 미국 선교사들은 연해주 한인들 사이에서 기독교 신앙을 전하며 큰 적극성을 보여주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일본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한민족의 열망을 이용, 미국은 한민족의 친구라고 사칭하며 항일선전을 전개해 나갔다. 하지만 이러한 거짓선전은 폭로되었고, 많은 무리의 한인들은 혁명투쟁의 캠프로 넘어갔다. 혁명투쟁에 큰 도움을 준 것은 차르 당국의 허락 하에 설립된 새로운 한인단체인 권업회(노동발전협회)였다. 1911년 12월 6일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첫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정관이 채택되고, 지도부와 임원이 선출되었다: 회장-이인석(Ли Ин Сок), 부회장-이범윤(Ли Бом Юн),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김만학(Ким Ман Хак), 협회상설위원회 위원장-이상설(Ли Сан Соль), 협회상설위원회 부위원장-이준(중)호(Ли Чжун Хо), 규율감독-홍범도(Хон Бом До), 자료담당-이남기(Ли Нам Ги), 언론담당-김치보(Ким Чхи Бо), 구제담당-고상주(Ко Сан Чжу). 권업회 지도부의 구성원의 거의 절반이 해방운동의 열성적인 참가자들로 구성이 되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합법적인 조직을 일본 제국주의와의 투쟁수단으로서 활용하였다. 채택된 권업회의 정관에 따라 한인사회에서는 노동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육성시킬 것이 호소되었다. 또한 절약하고 교육을 보급시키며, 대러시아 시민에게 부여된 개념과 감정들을 양육시켜야 함이 호소되었다(‘권업회’ 정관에서). 또한 권업회는 이주자들에 대한 계몽활동이나 이들에 대한 정착지원으로만 활동이 제한되지 않았다. (박 베.데.(Б.Д.Пак), 『1차 세계대전 직전의 한민족의 해방투쟁』, 출판사과학, 모스크바, 1967).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그는 봉건농노제 하에 있던 조선출신의 이주자로서 유년 및 청년시절의 어려움을 견뎌내었다. 그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러시아로 들어 온 빈곤한 농민들이 어떠한 힘든 운명을 참아내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분명하게 목도했던 인물이다. 권업회의 열성 회원이면서, 그리고 행정당국의 옷을 입은 한 지역의 책임자로서 그는 상시거주를 위해 정착을 하고 있는 한인 이주자들에 대한 물질적 지원과 상호원조를 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공공자금으로 구입된 원동기 탈곡기는 그 사용이 자리를 잡게 되었고, 공공 이용을 목적으로 우량종의 가축과 병아리가 구입되기도 했다. 또한 러시아 남부에서 들여 온 가장 우수한 품종의 유실수와 딸기 작물이 적극적으로 심겨지고 재배되었다. 일반적으로 주택을 건립하는 경우에는 각 가정의 마당에 반드시 유실수와 관상수 묘목을 이식하게 했다. 학교 내에는 큰 공원과 정원이 만들어 졌다. 뿐만 아니라 슬라뱐카 마을처럼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는 마을들은 공공 어구(漁具)-어업용 어망과 배-를 갖추게 되었다. 마을은 10-15가구씩 조를 이루었으며, 어기(漁期)가 도래하면 마을 사람들은 조별 순서대로 어망을 이용했으며, 이용 후에는 건조용 장대에 어망을 걸어두거나 수선을 했다. 포획된 생선은 참가자들 사이에서 공평하게 배분해 가졌다.  연어의 어획기에는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이 시기는 보통 10-12일정도 지속되었으며, 마을의 모든 주민들이 참가를 했다. 당일 날에 세미크레스트노예로 가는 길에는 2개의 큰 통과 아이들이 탄 마차가 길을 가득 메웠다. 어망은 24시간 내내 던져졌고, 이는 각 참가자들이 순서대로 진행했다. 참가자들 간에는 어획구역을 1톤 미터씩 배분했다. 포획된 연어는 부두에서 즉시 처리가 되었는데, 연어는 절이기 위해 큰 통에 넣어졌고, 알(이크라)은 작은 통에 넣었다. 어획기가 지나면 산란기로 접어들기 때문에 연어잡이는 금지되었다. 이러한 작은 소동은 당시의 그러한 생활조건 속에서도 농업적 협동이 조직적이고 효과적인 행사로 나타났음을 보여주고 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자신의 계몽활동에서 한인들의 문화수준을 높이는데 큰 관심을 쏟았다. 그는 학교의 교육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모든 거주지역마다 공공의 노력으로 3학급 규모의 초등교육을 위한 교회교구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노보키예프스크의 아이들은 6년제 중등학교(средняя школа)에서 공부를 했다. 성공적으로 초등학교를 마친 학생들로 이루어진 민족 지식인 계층을 배출해 내기위한 큰 사업 또한 수행되었다. 선발된 한인 학생들을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г.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1926), 현재 우수리스크), 블라고베쉔스크(г.Благовещенск, 아무르주 수도), 이르쿠츠크(г.Иркутск, 이르쿠츠크주 수도), 톰스크(г.Томск, 톰스크주 수도), 그리고 카프카즈(Кавказ)나 크르임(Крым) 등지의 대도시로 유학을 보냈다. 이에 필요한 비용은 공공 자금으로 충당이 되었다.  이미 금세기의 초에 연해주에는 작은 규모의 전문가 그룹이 형성되었었다: 교사, 원예가, 양봉가, 의사, 기타 직업군의 전문가들. 그들은 한인단체인 권업회에 의해 수행되는 문화-교육계몽 및 농업사업의 중요한 선도자들이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새로운 터전을 찾아 점점 더 많이 한반도에서 러시아로 이주해 들어오는 한인 농민들의 정착과 관련한 큰 조직사업을 수행해 나가며, 이러한 현상의 제일 요인이 무엇인지를 종종 생각에 잠겨 자신에게 자문하곤 했다. 러시아 지식인층 사이에는 진보적인 시각을 가진 선구적인 인사들이 있었다. 그들과의 만남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로 하여금 당연한 결과들을 수반하고 있는 부르주아지 체제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주었으며, 그리고 한민족의 민족해방을 위한 열렬한 투사의 길 뿐만 아니라, 10월 혁명 이후에 연해주에서 혁명운동 참가자의 길을 걷도록 이끌었다.  20세기 초에 증가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정책과 한국(대한제국) 정부의 고립무원의 저항은 한민족의 자주성에 큰 위협을 예고하고 있었다. 1904-1905년 시기에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차르 정부의 군사적, 정치적 패배로 종료가 되었다. 전쟁의 시작을 이용하여 일본은 신속하게 군대를 상륙시켰으며, 짧은 시간 안에 한반도를 점령했다. 1905년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체제(을사늑약)가 수립되었다. 그와 같이 대한제국 정부는 군사-정치적, 경제적 패배를 맛보아야 했고, 그런 한편으로 지역의 봉건지주들과 생겨나고 있는 상층부 부르주아지들은 이러한 상황을 촉진시켜놓았다. 러시아 혁명의 영향 하에 있는 러시아에서 한인 망명애국지사들의 한국해방 투쟁이 적극화되기 시작했다. 진보적인 한국인 망명가들의 활동 중심은 연해주의 항구도시-블라디보스토크이었다. 그곳에서 선구적인 한인(한국인)들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지도하에 혁명이론을 배웠다. 이 동안에 이전에 존재해 왔던 문화-계몽운동 한인단체들은 활동을 본격화해 나가기 시작했고, 일본과의 투쟁을 위해 빨치산 연합을 구성하고 있었다.  연해주에서 최초의 빨치산 부대들-의병-은 1906년에 조직되었다. 전투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키는 일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 이범윤(Ли Бом Юн), 이상설(Ли Сан Соль)이 적극 참여를 했다. 무장한 빨치산 부대들은 한반도 이북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상대로 기습을 감행하기도 했다. 이런 빨치산 부대들은 러시아 연해주의 한인마을들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지휘 하에 있던 한인 빨치산 부대는 지금의 하산 지구에 있는 얀치헤 볼로스치(Янчихинская волость, 얀치헤 읍,邑)에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일본군 수비대를 제거하기 위한 마지막 신중한 작전은 1909년 7월에 수행되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지휘를 받은 의병부대는 두만강을 건너 경원군에 주둔 중이던 일본군 수비대에 큰 타격을 주었고, 계속해서 회령시 지구에서 기습을 감행하고 연해주로 귀환했다. 이 작전은, 당초 일본군 지휘부가 의병부대의 움직임을 알아낸 후 의병부대를 포위망에 유인하고, 일본군과 헌병대를 집결시킨 후 의병들을 궤멸시키고,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사로잡으려 했었다는 점에서 더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교활한 계략은 발각이 되었고, 일본의 간교한 작전은 실패로 끝이 났다.  1910년 7월 4일에 러일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에는 한국의 병합(강제병탄)이 인정이 되고 있다. 차르리 정부는 일본이 (한반도에서) 이익을 추구해 나가는데 반대할 수 없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차르 체제의 러시아는 포츠머스 조약 이후에는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의 항일운동을 사전에 예방할 의무까지 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러-한 국경에는 카자크군 부대가 배치되었다. 차르 정부의 그러한 조치의 결과 한인정착촌들에 주둔 중이던 의병들의 작전은 매우 제한되었고, 이로 인해 일부는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러한 결말은 일본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그들은 연해주에서 한인의 항일운동을 완전히 진압하고, 항일운동의 주모자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를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일본은 비밀첩자들을 통해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일본과 비밀협정을 체결했다는 거짓정보를 날조해 흘렸다. 일본 첩보기관에 의해 기만당한 프리아무르 군관구 사령부(Штаб Приамурского военного округа)는 이러한 거짓선전에 근거를 두고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를 러시아에서 추방하라는 청원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한국에서 일본 지배체제의 적으로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를 알고 있던 지역 차르 당국은 그의 추방에 대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보호와 문제의 긍정적인 해결에 크게 기여한 것은 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 Начальник жандармско-полицейского управления Уссурийской железной дороги)가 연해주 군무지사(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Приморской области) 앞으로 보낸 서신이었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한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를 애국자이자 러시아에도 두말할 필요 없는 충성스런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러시아 지역당국자들을 상대로 그를 중상하고자 하는 일본의 바람은 날씨가 따뜻해지면 한인들의 빨치산 활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현재의 시점에서 볼 때 전적으로 이해는 갑니다. 작년에 일본인들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불온한 이범윤(Ли Бом Юн) 외 몇 명에게 탄압을 가하는데 성공한 바 있는데, 그로 인해 6명의 의병들이 이르쿠츠크로 유배되기도 했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인사들을 러시아 지역당국이나 한인들을 상대로 명예를 손상시키는 수법은 일본인들의 일반적인 전술인데, 작년의 경우에는 성공적인 결과를 얻은 바 있습니다. 작년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은 이번에도 러시아인들의 손을 빌어 자신들의 타협하기 힘든 적들을 제거하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경우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경계대상의 인물인데, 이는 그가 많은 자금을 소유하고 있고, 그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러시아 정부에 제출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가 비밀리에 빨치산 활동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인들은 그를 매수하고자 시도했지만 허사였습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에 대한 소식은 근거 없는 소리이고, 소식을 전한 자들 스스로가 일본인들의 교묘한 말장난에 빠진 것입니다. 이는 놀랄만한 일이 아닌데, 작년에 일본인들은 같은 방법을 통해 위에 언급된 인물들이 불온한 자들이라는 점을 연해주 군무지사에게 확신시켜주는데 성공했기 때문입니다.” (출처: 러시아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РСФСР, Российская Советская Федеративн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 Республика), 극동국립중앙기록보존소(ЦГАДВ), 기록군(폰드,фонд).1, 목록(오피스,опись).11, 사건(델로,дело).106, 쪽수(리스트,лист).4.「우수리철도 헌병경찰국장 쉐르바코프(Р.П.Щербаков)가 연해주 군무지사 스볘친(И.Н.Свечин, военный губернатор Приморской области)에게 보낸 서신, 블라디보스토크, 1911년 3월 15일」).  연해주 한인들로 구성된 빨치산 부대들의 조직과 활동은 정착촌 한인들의 지원덕분이었다. 의병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에 특별히 만들어진 투쟁위원회는 자금, 식량, 물질자원 모금을 위해 큰 활동을 추진해 나갔다. 이러한 지원물들은 극동의 한인거주구역에 퍼져있는 지역투쟁위원회로부터 입수가 되었다. 직접적인 지원세력은 농민에서 노동자-부두노동자, 광부, 금광노동자, 어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러시아 주재 이범진(Ли Бом Чин-Ли Бян Чин) 공사의 개인재산을 통한 지원은 민족해방운동에 큰 물질적 힘이 되었다. 이범진 공사는 일본 점령군들과의 투쟁을 위해 사용하도록 자신의 모든 재산을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에게 유언으로 남기고 1906년에 상트-페테르부르그(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에서 자결순국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젊고 과감한 인물이었던 소대장 안중근(Ан Тюн Гун-Ан Чжун Гын)이 있었다. 그는 이북지역 출신으로 190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왔다. 그곳에서 안중근은 연해주 빨치산 운동의 지도자들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와 부대장이었던 이범윤(Ли Бом Юн) 등과 만나게 되었다. 이범윤은 러일전쟁 당시에 러시아로 위치를 옮겨와 일본군들과 투쟁한 인물이다. 1909년 조선 이북지방들에 대한 7월 기습전 이후 의병지도자들은 가까운 시기에 일본 제국주의 정책의 주도자 중의 한 명인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Ито Хиробуми)공작이 러시아 재무대신 코코프초프(Коковцов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министр финансов)와의 만남을 위해 하얼빈에 도착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이토(이등박문)의 척살은 10월 13일(26일)에 행해졌다. 영접인사들과 역에 머물고 있었던 북경 주재 러시아 공사 코로스토베츠(Коростовец Иван Яковлевич)는, “....일본인 대열에서 한 젊은이가 뛰쳐나왔으며, 그는 이토(이등박문)를 향해 리볼버 권총 3발을 발사했다. 젊은이는 가까이에 서있던 경비장교들에 의해 제지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그는 3발을 더 발사하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황실 내각 서기(세크테리) 모리(Мори)와 남만주철도(ЮМЖД, Южно-Маньчжурская Железная Дорога) 국장 타나카(Танака), 하얼빈 주재 일본총영사 카와카미(Каваками)가 부상을 입었다”고 전하고 있다.  안중근(Ан Тюн Гун)의 이토(이등박문) 척살계획 작성과 저격연습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와 이범윤(Ли Бом Юн)의 입회 하에 수행되었다. 1922년 안중근의 미망인이 어머니(최재형의 아내)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Е.П.Цой)에게 왔다. 영웅의 아내에게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주면서, 어머니는 사건의 준비자들이 마을에서 벗어나 사격훈련을 했으며, 얼마나 준비가 잘 되었었는지는 결과가 보여주었다고 사건준비상황에 대해 확인시켜주었다. 1910년 3월 26일, 영웅 안중근은 여순 감옥에서 일본인들의 손에 사형되었다. 이토(이등박문) 공작의 죽음은 국제사회에서, 특히 한반도와 극동지역 한인사회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빨치산 투쟁 활동이나 한반도에서의 농민소요가 더 적극성을 띠고 증가하기 시작했다.  (1917년 10월)혁명이 시작되며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얀치헤 볼로스치집행위원회(волост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Российская социал-демократическая рабочая партия, 1898.3월 창당, 소련방공산당 ‘КПСС’의 전신)의 지휘 하에 소비에트 권력을 확립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이 극동지역 전역에 걸쳐 전개되어 나갔으며, 이에 한인들도 적극 참여를 했다. 1917년 11월에 블라디보스토크와 프롤레타리아 지구인 수찬(г.Сучан, 수청, 水淸, 소성, 현재 파르티잔스크 지역) 지역의 탄광촌에, 그리고 그해 말에는 다른 도시와 지역들에도 소비에트 권력이 선포되었다. 1917년 12월 제3회 극동소비에트대회가 개최되었고, 이 대회에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하바로프스크(г.Хабаровск), 노보키예프스크, 수찬 및 기타 지역의 84명의 소비에트 대표자들이 참석을 했다.  1918년 2월에는 블리스(Блисс, 미국), 헨리 빌손(Генри Бильсон, 영국), 벤찬(Бенчан, 프랑스), 카돈(Кардон, 이탈리아) 장군 등을 구성원으로 하는 안탄타 최고협의회는 미국 대표의 발의에 따라 러시아 극동과 철도, 시베리아에 대한 점령을 일본군대에 맡긴다는 결정을 채택했다. 그러한 결정을 예견하며 1919년 1월에 이미 이방 제국주의자들은 신생 소비에트 공화국의 어려운 상황을 이용하여 블라디보스토크 해안에 자신들의 군함을 정박시켰다. 얼마 안 있어 일본 순양함(крейсер) 이바미와 아사히, 영국 순양함 수포롤크, 그리고 미국 순양함 브루클린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상륙했다. 이어 외국간섭군들의 비호 하에 백위파(белогвардеец) 군대가 구성되고, 이전의 전쟁포로였던 체코와 슬로바키아 군대의 무장연합이 이루어졌다.  1919년은 반동상황에 대항해 진보적인 혁명세력의 격렬한 투쟁이 시작된 해이다. 빨치산 활동은 증가했고, 이는 타이가 지대로까지 확대되었다. 그해 봄에 극동지역 빨치산 부대들로 한 그룹의 당일꾼들이 합류했는데, 그 무리 내에는 자바이칼에서 빨치산 전쟁의 훌륭한 조직자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라조 세르게이(Лазо Сергей)도 포함되어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그는 연해주 올가군 지역의 통합 빨치산부대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여름에 연해주지역의 수 백 개의 마을주민들은 빨치산 운동에 가담 상태에 있었다. 1920년 1월에 접어들어 백위파 군대들을 상대로 한 성공적으로 수행된 공격전투의 결과,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그리고 연해주 기타지역들이 빨치산 부대들과 혁명군 부대들에 의해 점령되었다. 하지만 해방된 연해주의 도시와 지역들에서 진정한 소비에트 권력을 부활시키기는 데에는 여전히 어려움이 수반되었다. 이는 여전히 외국간섭군들이 남아있었고, 붉은군대(Красная Армия, 정식명칭은 ‘노농붉은군대’, 1946년 ‘Советская Армия’로 개칭됨)는 바이칼 너머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임시권력인 연해주 지방행정자치정부가 수립되었고, 이 임시자치정부는 선언문에서 연해주지역에 제기된 지하 당 조직을 결성하는 것을 중요한 상황으로 보았다. 사안에 대한 판단을 따르면서 당은 ‘권력은 젬스트보에게로’라는 구호 하에 수행되고 있는 투쟁을 인정할 것을 결의했다. 당시 모든 주와 군의 행정자치단체들은 혁명적인 성향의 인사들이나, 때로는 지하당기관들에 의해 지도를 받고 있던 볼쉐비키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18년 연해주가 일본 간섭군들에 의해서 점령되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는 가족이 살고 있던 슬라뱐카에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계속된 시간 동안에도 가족들은 그의 소재지를 모르고 살았다. 과거에도 빨치산 부대와 작전수행을 떠나는 때에는 가족으로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있곤 했다. 우리의 어머니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Е.П.Цой)는 아버지의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당시 어린 나이의 우리들은 어머니의 무거운 근심걱정을 모른 채 태평한 삶을 살았다. 늦은 가을에 마을에서 처음으로 일본군들을 보고나서 불안한 날들이 도래했음을 느끼게 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어머니의 남동생 김 콘스탄틴 페트로비치(Ким Константин Петрович)가 살고 있던 블라디보스토크로 즉시 옮겨가기로 결정했다. 그는 시내 남자 김나지야(мужская гимназия)의 최초의 한인교사들 중의 한 명이었다. 우리 다섯 명의 식구는 겨울 내내 외삼촌 집에서 보냈다.  1919년 이른 봄에 우리 가족은 아버지께서 열성적으로 혁명운동에 관여하고 있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께서는 당시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자치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이자 군 자치단체 감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 중에 있었다. 군 자치단체에서 사회-정치활동을 해나가면서, 그는 일본 점령군들에 대항한 자신의 과거 활동을 재개해나갔다. 과거에 일본인들에 대항한 빨치산 투쟁경험도 갖고 있고, 또 항일투쟁을 했던 빨치산 부대들의 한인 부대장들과 한인 애국지사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로 하여금 한인 빨치산 부대의 조직과 무기 공급 활동을 불법적으로(러시아 정부 측에서 볼 때) 수행해 나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중앙아시아에서 유명한 콜호즈 지도자이자 ‘북극성 콜호즈’ 대표였고, 사회주의 이중노력영웅이었던 김병화(Ким Пен Хва)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1920년 4월에 일본 원정군부대들은 배신적으로 니콜스크-우수리스크시를 기습 점령했다. 이 무렵에 시내에는 이준(중)집(Ли Дюн Дип) 지휘 하에 있는 한인부대를 위한 탄약이 보관되어 있었다. 마침 이 탄약들은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에게 보관되어 있었는데, 그는 체포되어 일본군들에 의해 총살을 당했다.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스파스크, 블라디보스토크와 그 밖의 지역에서 자행된 1920년 4월 4-5일에 일본군들의 유혈 학살만행으로 많은 한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그 중에는 한인민족해방운동 및 혁명운동의 노투사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일본 간섭군에 의해 모진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엠.이. 구벨만(М.И.Губельман),『소비에트 극동해방을 위한 투쟁』, 모스크바, 1958).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60세 노인,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 자치단체 의원. 1920년 일본군들의 극동지역에 대한 기습과정에서 많은 러시아인 주민들이 죽음을 당했다. 농민들 중의 많은 이들이 폭행과 야만적인 행위의 희생자가 되었다. 특히 러시아국적의 한인들이 고통을 당했다. 일본군들은 한인들의 볼쉐비즘에 혐의를 두고, 한인들을 어두운 장소에 몰아넣고는 손을 묶은 후에 새벽에 학살을 자행했다. 노인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도 일본군들에 의해 그렇게 총살을 당했다. (『1917-1921년 시기에 사망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전사 기념비』, 국립출판사, 모스크바, 1925.)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11명의 자녀들(아들-4명, 딸-7명)로 구성된 대가족을 두었다. 대부분의 가족 구성원들은 힘든 삶을 영위해야 했다. 자녀들 중 7명은 소비에트시기에 대학교육을 받았고 출가하여 가정을 꾸렸다. 그들은 1927-1935년 시기에 행복한 가정생활을 맛보았다. 1935년이 시작되고, 모두가 성년이 되어 소비에트 정부 덕분에 직업을 얻게 되었으며, 멋진 미래가 그들 앞에 있었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스탈린주의의 검은 힘이 우리 가정에 침투해 들어왔다.  혁명기에 아버지 외에 큰형 최 표트르 페트로비치(1남, Цой Пётр Петрович/П.П.Цой)가 죽음을 당했고, 둘째 형 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 2남, Цой 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П.Цой)는 살아 돌아왔다. 큰형 최 표트르는 자유사상을 지녔고, 1905년의 혁명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마지막 학년에 신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그는 1915년에 니콜라예프스크-나-아무레(г.Николаевск-на-Амуре)에서 초등교육 감독관이라는 평범한 직업을 갖은 채 차르 군대에 입대했다. 1916년 단기장교양성과정을 마친 그는 독일과 전선이 대치중인 서부전선으로 파견되었다. 1917년 1월에 최 표트르 페트로비치가 근무하는 연대는 계속된 전투 이후의 전력보충을 위하여 후방으로 이동했다. 1917년 2월 혁명 이후 육군중위로 근무하며 그는 연대병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었고, 10월 혁명 이후에는 연대장으로 승진되었다. 얼마 후 최 표트르 페트로비치(1남, П.П.Цой)는 로슬라블(г.Рославль) 노동자, 농민, 병사 대의원 소비에트의 대표위원으로 선출되었고, 볼쉐비키 당원이 된 후 소비에트에서 군사분과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4월 최 표트르가 속한 연대는 동부전선으로 이동 배치되었으며, 이듬해인 1919년 내전기(гражданская война, 1918-22)에 그는 서시베리아에서 치러진 전투에서 사망했다.  둘째 형 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П.П.Цой, Цой Шен Хак)는 1918-1920년 시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청년지하조직의 열성참가자로 활동했다. 그는 1920년 4월 참변 이후 아누치노(Анучино, 아르세녜프강 우안에 위치. 우수리스크에서 약 100km 정도 떨어진 연해주 남부의 산악지대) 지역의 빨치산 부대로 들어갔다. 내전기 이후 그는 1923년 상트-페테르부르그에 있는 프룬제 명칭 해군군사학교(Военно-морское училище им.Фрунзе)에 등록하고 1927년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그는 아무르함대와 카스피함대에서 근무했으며, 마지막 근무는 발틱해에 있는 주력함(линейный корабль) 마라트호에서 했다. 하지만 그는 1935년 2등 대위 계급을 달고 내무인민위원부(НКВД,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 Внутренних Дел, ‘Народный Комиссариат’는 현재의 ‘министерство/부’에 해당) 소속 기관에 체포되어 1938년 총살을 당했다.  누나 최 올가 페트로브나(5녀, Цой Ольга Петровна/О.П.Цой)는 로슬라블 수력발전소 건설장에서 수석기술자로 근무했다. 그녀는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 교정노동수용소(Карлаг, Карагандинский исправительно-трудовой лагерь)와 노릴스크(г.Норильск) 수용소에서 형을 살고 만기출소했다. 현재 연금(年金)생활자이다. 누나 최(니) 류보프 페트로브나(3녀, Цой(Ни) Любовь Петровна/Л.П.Цой(Ни)-최 류보프 페트로브나의 성은 남편의 성 ‘니’를 따라서 사용되고 있다)는 국립은행 산악분과 경리로 근무하다가 1937년 노보시비르스크에서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이 전기의 작성자인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3남, Цой 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В.П.Цой)는 카자흐스탄(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КССР, Казахская Советская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ая Республика) 국민경제등록소 농업분과 수석 농업기사(старший агроном)로 근무했으며, 1938년 알마타에서 체포되었다. 1940년 4월까지 심리조사를 받았으며, 이후 소련방 내무인민위원부 특별협의회 결정에 따라 석방되었다. 심리조사는 끔찍하게 진행되었다. 자신들의 목적달성을 위해서 조사관들은 갖가지의 조롱수단을 동원했다. 다섯 명의 누이들은 모두가 자신들의 배우자를 잃었고, 단 한 사람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총살을 당했다. 다음은 총살을 당한 여자형제 배우자들의 명단이다: 총살당한 여자형제 배우자들의 명단 성명 직위 및 활동사항 강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Кан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대위, 내전기 참전자, 119보병연대 기관총대대 대대장 니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Ни Алекс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모스크바 소재 발라키례프 명칭 단추공장 기술자 텐 콘스탄틴 안토노비치(Тен Константин Антонович) 『스몰렌스카야 프라브다』신문 사진기자 쇼루코프 호드줴한 쇼루코비치(Шоруков Ходжехан Шорукович) 키르기즈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보건인민위원부 남가이 옐리세이 파블로비치(Намгай Елисей Павлович) 내전기 참전자, 예비군 여단장, 서시베리아 열매채소판매 트러스트 분과장 내무인민위원부의 피 묻은 손으로 탄압당한 9명의 사람들의 상태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에서 7명은 총살을 당했다. 총살당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어린 사람은 27세였고, 가장 연장자는 40세였다. 현재 총살당한 사람들은 명예회복이 되었으며, 범죄 구성요소가 부재한 이유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본 전기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아내 최 엘레나 페트로브나(Е.П.Цой)와 딸들인 최 소피야 페트로브나(4녀, Цой София Петровна/С.П.Цой), 최 올가 페트로브나(5녀, О.П.Цой)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리고 텍스트에 언급된 저자들의 저술물들을 근거로 작성되었다. 이들에게 큰 감사를 표하는 바이다. 자료는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자녀들에 의해 준비가 되었다: 아들-최 발렌틴 페트로비치(3남, В.П.Цой), 딸-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7녀, Цой 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Е.П.Цой). 480051, 알마타시, 레닌 대로, d.89/2, kv.4, 전화(64-27-31), 1990년 2월.

    7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가족의 생일자 명단

    이름 생일 이름 생일 아버지 1860.8.15 소냐(소피야-Соня(София) 1902 어머니 1880 올랴(올가-Оля(Ольга) 1905.5.8 페챠(표트르-Петя(Пётр) 1883 발랴(발렌틴-Валя(валентин) 1908.5.2 베라(Вера) 1885 밀라(류드밀라-Мила(Людмила) 1910.5.14 나쟈(나제쥐다-Надя(Надежда) 1888 리자(엘리자베타-Лиза(Елизавета) 1912.6.6 류바(Люба) 1898 비카(비켄티-Вика(Викентий) 1914 파샤(파벨-Паша(Павел) 1900.11.25    

    8 최재형 가계도 3

    번호\자손 자녀(1세대) 손자/손녀(2세대) 증손자/증손녀(3세대) 1 최 표트르 페트로비치(ЦойПётр Петрович) 1남/애칭:Петя 최 지나이다 페트로브나(ЦойЗинаида Петровна)   최 니콜라이 페트로비치(ЦойНиколай Петрович) 최 리디야 니콜라예브나(ЦойЛидия Николаевна) 최 인노켄티 페트로비치(Цой Иннокентий Петрович) 최 알렉산드르 인노켄티에비치(ЦойАлександр Иннокентьевич)최 예브게니 인노켄티에비치(ЦойЕвгенийИннокентьевич) 최 율리야 페트로브나(ЦойЮлия Петровна) 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Цой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최 게오르기 알렉산드로비치(ЦойГеоргийАлександрович)최 콘스탄틴 알렉산드로비치(Цой Константи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2 최(김) 베라 페트로브나(Цой(Ким) Вера Петровна) 1녀/Вера 텐 나제쥐다 야코블레브나(Тен Надежда Яковлевна) 텐 이고르 게오르기에비치(Тен Игорь Георгиевич) 안 니나 야코블레브나(Ан Нина Яковлевна) 안 게르만 니콜라에비치(Ан Герман Николаевич)안 마이야 니콜라에브나(Ан Майя Николаевна) 2   김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Ким НиколайЯковлевич)   박 엘리자베타 야코블레브나(Пак Елизавета Яковлевна) 아들과 딸 김 류보프 야코블레브나(Ким Любовь Яковлевна) 김 보리스 마카레비치(Ким Борис Макарьевич) 3 최 나제쥐다 페트로브나(ЦойНадежда Петровна) 2녀/Надя 김 보리스 이바노비치(Ким Борис Иванович) 아들과 딸 한 마리야 이바노브나(Хан Мария Ивановна) 한 발렌틴 코노노비치(Хан Валентин Кононович)한 블라디미르 코노노비치(Хан Владимир Кононович)한 알라 코노노브나(Хан Алла Кононовна) 라리사 이바노브나(Лариса Ивановна) 비탈리(Виталий), 발렌틴(Валентин), 엘라(Эла), 타티아나(Татьяна-(1),(2)에서는 딸 ‘타티아나(타냐)’ 대신에 이름이 제시되지 않은 채 ‘아들’로 표기되어 있다.) 박 올가 이바노브나(Пак Ольга Ивановна) 박 보리스 티모페예비치(Пак Борис Тимофеевич)박 데카브리나 티모페예브나(Пак Декабрина Тимофеевна)박 타티아나 티모페예브나(Пак Татьяна Тимофеевна)박 류드밀라 티모페예브나(Пак Людмила Тимофеевна) 김 레오니드 이바노비치(Ким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강 이고르 니콜라에비치(Кан Игорь Николаевич) 강 올가 이고례브나(Кан Ольга Игорьевна)강 올레그 이고례비치(Кан Олег Игорьевич) 강 율리야 니콜라에브나(Кан Юлия Николаевна)   4 최(니) 류보프 페트로브나(Цой(Ни) Любовь Петровна) 3녀/Люба 니 리디야 알렉세예브나(Ни Лидия Алексеевна) 코르슈노프 표트르 페트로비치(Коршунов Пётр Петрович) 니 유리 알렉세예비치(Ни ЮрийАлексеевич) 니 류드밀라 유례브나(Ни Людмила Юрьевна) 5 최 파벨 페트로비치(최선학, 2남)(ЦойПавел Петрович(Паша) 최 네온 파블로비치(ЦойНеон Павлович)   6 최 소피야 페트로브나(ЦойСофия Петровна)4녀/Соня 쇼루코프 알레고 호드줴하노비치(Шоруков Алего Ходжеханович) 쇼루코바 이리나 알레고브나(Шорукова Ирина Алеговна)쇼루코프 알렉산드르 알레고비치(Шоруков Александр Алегович) 7 최 올가 페트로브나(ЦойОльга Петровна)5녀/Оля 심 엘비타 세르게예브나(Шим Эльвита Сергеевна) 마가이 리타 표도로브나(МагайРита Фёдоровна)마가이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Магай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심 나탈리야 겐세코브나(Шим Наталья Генсековна)심 레오니드 겐세코비치(Шим Леонид Генсекович) 8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Цой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3남/Валя 최 발렌틴 발렌티노비치(ЦойВалентин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발레리야 발렌티노브나(ЦойВалерия Валентиновна)최 표트르 발렌티노비치(ЦойПётр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파벨 발렌티노비치(ЦойПавел Валентинович) 최 올레그 파블로비치(ЦойОлег Павлович) 9 최 류드밀라 페트로브나(ЦойЛюдмила Петровна)6녀/Мила     10 최 엘리자베타 페트로브나(ЦойЕлизавета Петровна)7녀/Лиза 텐 릴랴 콘스탄티노브나(Тен Риля Константиновна)   11 최 비켄티 페트로비치(ЦойВикентийПетрович)4남/Вика 최 류드밀라 비켄티에브나(ЦойЛюдмила Викентьевна) 최 데니스 드미트리에비치(ЦойДенис Дмитриевич)최 콘스탄틴 드미트리에비치(ЦойКонстантин Дмитриевич) 1990년 12월 15일 작성. 알마타(알마트이).

    9 최재형의 생애 연표

    연도 활동/경력사항 1860 8월 15일, 이북지역 경원군에서 출생. 1869 러시아 연해주 남부 티진헤 마을로 이주. 1871 집에서 가출하여 포시에트항(п.Посьет) 무역상선의 견습선원이 됨. 1871-1877 2회에 걸쳐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상트-페테르부르그) 구간을 항해. 1878 선장의 추천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무역회사에 취직. 1881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에서 큰 아들 부부와 거주하고 있는 아버지 최흥백(Цой Хын Бек)에게 돌아옴. 한인들 사이에서 문화-교육계몽 및 농업정착 사업 활동을 시작. 1882 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하마탕)-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 구간 고속도로 건설국과 지구경찰서장의 통역으로 일을 시작. 1886 한인 젊은이 첫 번째 그룹을 상대로 러시아 유학 파견 사업을 조직. 1888 고속도로 건설관련 공로로 첫 은메달을 받음. 1890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발의로 노보키예프스크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1916년에는 슬라뱐카(Славянка)의 학교 내에 공원이 조성됨.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지원 자금 마련을 위해 산업체 인사들과의 사업적인 네트워크를 조직(친선-형제단 조직, 이 단체에 가입하며 회원들은 자신의 민족에 대한 봉사에 충실할 것을 맹세했다-주, 최 베. 베.(В.В.Цой)). 1893 스타니슬라프 금장으로 된 두 번째 은메달을 수여받음. 세 번째 은메달에 대한 자료는 없음. 얀치헤 볼로스치(Янчихинская волость, 얀치헤 읍,邑)의 책임자(старшина)로 선출됨. 1894 제1차 전 러시아 읍장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1895 얀치헤에 최초의 정교 교회와 교사 및 사제를 위한 학교와 주택들이 건립됨. 1896 수도와 모스크바에서 있었던 황제 니콜라이 2세(Н.А.Романов Ⅱ)의 즉위식에 참석함. 1898 친선-형제관계에 의거해 상업회사를 설립하고, 회사를 통해 한인들의 생활정착 및 복지에 필요한 교육계몽, 건설, 농업관련 비용들을 조달함. 1904 항일운동 조성을 위해 연해주 한인들 사이에서 조직적인 활동을 시작함. 최고영예의 금메달을 수여받음. 1905 한국과 관련한 국가정책을 알기위해서 일본의 수도 도쿄에 다녀옴. 가족과 함께 노보키에프스크(현재 크라스키노)로 이사해옴. 1906 최초의 한인 빨치산 부대 ‘의병’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의병부대를 지휘하며 일본군 수비대에 대해 기습을 감행함. 1910 가족과 함께 슬라뱐카로 이사해옴. 1911 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개최된 비밀회의에서 전 극동지역 57명의 대표위원 입회하에 새로운 단체 ‘권업회’가 조직되고, 최재형(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이 권업회 회장으로 선출됨. 11월에 권업회의 합법적인 활동권을 보장받았으며, 12월에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권업회의 지도부가 선출됨(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재무책임자로 선출됨). 1913 로마노프(Романов) 왕조 제위 300주년 기념식에 한인단체(7명)의 일원으로 페트로그라드에 다녀옴. 권업회의 지도자들(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 박 에스. 베.(С.В.Пак), 채 아.(А.Цхай)이 곤닫티(Н.Л.Гондатти)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에게 한인의 러시아이주 50주년 기념행사 조직위원회의 조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원했으며, 동년 10월에 프리아무르 군사령관지사로부터 허가를 받음. 1915 슬라뱐카에서 헌병대에 의해 체포되었으며, 3일 후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송되었다가 11일째 되는 날 석방됨. 1917 얀치헤 읍 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1918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이동해 옴. 니콜스크-우수리스크 군 자치단체(군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으로 선출되었고, 군 자치단체 감사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됨. 연해주 주둔 일본군에 대항해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고 무장시킴. 1919 상해임시정부 위원으로 선출됨(재무총장으로 선출, 주-최 베.베.). 1920 4월 5일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총살당함(니콜스크-우수리스에서, 주-최 베.베.). 1953 7월 13일 부인 엘레나 페트로브나(Елена Петровна)가 사망했으며, 7월 16일 (키르기즈스탄) 비쉬케크시 (프룬제) 공동묘지에 안장됨. 1992년 3월. 서명. 생애연표 작성자-아들, 최 발렌틴 페트로비치(3남, В.П.Цой).

    10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짧은 전기

    1860년 8월 15일 출생, 1920년 4월 5일 사망,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Цой Пётр Семёнович/П.С.Цой)는 러시아와 가장 가까운 북한지역 경원군에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최흥백(Цой Хын Бек)은 영주(지주)의 농노농민 출신이었다. 1869-1871년 시기에 북한지역에는 기근이 돌았다. 이때 최흥백은 농노농민들의 곡물시위를 주도했다. 시위자들은 지주들의 곡물을 탈취했고, 굶주린 농민들끼리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굶주림에도 불구하고 종자는 남겨두었다. 농민들은 새로운 땅에서 파종할 곡식종자를 들고 러시아로 넘어갔다. 많은 농민들은 자신들의 지주를 떠나 국경을 넘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다. 최흥백은 아들들과 그 가족과 함께 나중에 티진헤(Тизинхе, 지신허)라고 불리는 곳에 터전을 잡았다. 이때 러시아로 당시 9세의 소년이었던 막내아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도 함께 들어왔다. 하지만 어머니는 조선에 남아있었다. 소년은 큰형의 집에서 힘들게 살아갔다. 당시 아버지 최흥백은 큰 아들의 집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형수는 소년을 좋아하지 않았고, 불필요한 입(존재)으로 여겼다. 형수는 소년에게 먹다 남은 것을 주었고, 그래서 종종 소년은 굶기도 했다. 어느 여름날, 형수는 얇은 접시에 타서 눌러 붙은 모습의 ‘점심’을 소년에게 던져주었다. 이때 소년은 접시를 형수의 머리에 덮어씌우고는 집을 도망쳐 나갔다. 당시 그의 나이 11세였다. 마을을 떠나올 때 소년과 함께 2명의 친구가 함께했다. 그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는 도중에 집으로 돌아갔다. 고개에 올라갔을 때 날은 이미 어두워졌고, 두 번째 친구 또한 더 이상 가기를 거부했다. 2명의 친구에게는 마을에 부모님이 계셨지만, 소년 최(최재형)에게는 돌아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형수는 어차피 ‘접시사건’을 용서해 주지 않았을 것이다. 고개부터 소년은 이제 혼자 길을 가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모른다. 단지 바닷가에서 잠이 들었다가 누군가가 깨워서 눈을 떴을 때, 소년은 낯선 사람들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무역상선의 러시아인 선원들이었다.  선원들은 소년을 선장의 선실로 데리고 갔다. 선장의 아내는 ‘원시인’ 모습의 소년을 보고 처음에는 놀랐다. 그녀는 소년을 큰 거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는 하하 웃기 시작했다. 소년의 등 뒤에서는 댕기머리가 솟아나 있었고, 머리는 곱슬머리로 만든 털모자처럼 덮여 있었다. 아마도 조선에서 도망쳐 나온 이후 머리를 빗지 않은 모양이었다. 댕기머리는 제대로 땋여있지 않았다. 얼굴은 검게 그을리고 지저분했고, 단지 검은 눈만 장난스럽게 빛나고 있었다. 소년은 거울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쾌활하게 웃음을 지었다. 선장 아내의 지시로 소년의 머리카락은 잘려지고 몸은 씻겨 졌다. 그리고 견습선원의 복장을 입히고 먹을 것을 제공한 후 선실로 소년을 데려갔다. 소년은 거울 속에서 어렵게 자신을 알아보았다.  선장 부부는 소년의 세례 부모가 되었다. 그들은 소년에게 이름-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을 지어 주었다. 세례 부모인 선장부부는 총명한 소년-견습선원을 무척 사랑했다. 선장의 아내는 소년에게 읽고 쓰기와 여러 가지 공부를 가르쳐주었다. 소년은 배에서 거의 6년의 시간을 보냈으며, 이 동안에 그는 많은 바다와 나라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1877년 정기항해에서 귀항한 직후 선장은 자신의 친구가 운영하는 사업체에서 믿을만한 직원으로 일할 수 있도록 세례 받은 아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를 친구에게 추천해 주었다. 당시 최 표트르(최재형)의 나이는 17세였다. 그는 직장생활 동안에 어느 정도의 돈을 모은 후 자신의 식구들을 찾아 보기위해 고향으로 향했다.  당시 극동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한인들 사이에서 최 표트르(최재형)는 자유롭게 러시아어를 구사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얼마 안 있어 블라디보스토크(г.Владивосток, 해삼위)-라즈돌노예(Раздольное, 하마탕)-슬라뱐카(Славянка)-노보키예프스크(Новокиевск)-크라스노예 셀로(Красное Село)(조선 국경과 가까운) 구간을 잇는 기획적인 고속도로 건설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건설노동자의 대부분이 고용된 한인농민들이었기 때문에 고속도로건설 시작부터 통역으로 일을 시작했다. 건설 참가 농민-노동자들은 집으로 돌아 온 후 선하고 동정심이 많은 빈곤한 한민족의 친구라고 통역 최 표트르(최재형)에 대해서 말을 하곤 했다. 한인 노동자들은 최 표트르(최재형)를 사랑했다.  차르(царь, 제정러시아 황제) 정부는 한인들의 러시아 정착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바람으로 때로는 강제적으로 한인들의 집단세례를 주관하기도 했다. 이는 세례 한인들을 러시아 국민으로 편입시키기 위함이었다. 러시아국적의 한인들에게는 토지가 분여되었고, 분여 받은 토지에서 한인들은 맨손으로 숲을 개간하고 씨를 뿌렸다. 블라디보스토크 주변의 일련의 한인마을들은 그렇게 탄생되었다. 몇몇 마을들은 얀치헤(с.Янчихе, 연추) 마을을 중심으로 볼로스치(волость/읍, 邑)로 통합이 되었고,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1880년대 말에 얀치헤 볼로스치(Янчихинская волость, 얀치헤 읍,邑)의 책임자(старшина)로 선출이 되었다. 볼로스치의 책임자 직책은 그로 하여금 한인들이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이끄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그는 봉건농노제 하에 있던 조선출신의 이주자로서 유년시절부터 어려운 삶을 보고 견디며 살았다. 성년이 된 후에는 토지도 없고, 아무런 재산도 없고, 그리고 인간적 권리도 누리지 못한 채 힘들게 사는 한인들을 불쌍히 여겼다. 볼로스치 책임자로 일하며 그는 주로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별한 기억력을 갖고 있었던 그는 한번이라도 자신에게 부탁을 했었던 사람이라면, 심지어 몇 년 후에 만나도 기억을 했으며, 다시 만나는 경우에는 언제, 어떤 문제로, 어떤 상황 속에서 첫 만남이 있었는지를 상대방에게 상기시켜주곤 했다. 그의 큰 능력은 그로 하여금 선장의 아내가 그에게 베풀어 주었던 보잘 것 없는 교육을 받고도 완전히 유식하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고, 유창한 러시아어의 구사를 가능하게 해주었다. 이 무렵 그는 중국어도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었다. 그는 교육받은 사람으로서 1900년대 초에 한인들의 생활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한인마을들에 학교들을 세웠고, 우수한 한인 젊은이들이 중등특수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이르쿠츠크에 있는 러시아-토착민 교사양성학교나 심페로폴(г.Симферополь, 우크라이나 크르임 자치공화국 수도) 원예 및 화훼농업학교로 한인 젊은이들을 유학보내기도 했다. 또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에 의해 극동지역에서 최초의 교사들과 농업기사들이 양성이 되었다. 바로 이들에 의해 한인거주 지역들에 과수원이 조성이 되었고, 러시아의 남쪽으로부터 나무들이 주문되어 들여와지기도 했다. 그의 사업의 결과들을 한인들은 지켜보았고, 그를 사랑했다. 사람들은 그를 한인들에게 충실한 사람으로 알고 있었고, 그를 귀하게 여겼으며, 또한 그를 존경했다.  1904년 차르 러시아에 의해 조선에서 시작된 전쟁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마음에 새로운 걱정거리를 불러일으켰다. 그는 한민족의 땅(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 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의지할 데 없는 한민족의 운명을 보게 되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애정이 더 강하게 타올랐으며, 자신의 민족을 보호해야 한다는 필연적인 감정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06년 러일전쟁 이후에 일본의 조선 침탈이 가속화되었고, 이는 1910년 일본에 의한 한국의 병합(강제병탄)으로 귀결되었다. 자신의 땅인 한반도에서 처하게 된 한민족의 정치적 권리박탈과 경제적 억압 상황은 한민족을 일본에 대항한 항일투쟁을 위해 일어서게 만들었다. 보다 의식 있는 정치적 성향의 한국인 집단은 러시아와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당시 한반도에서 사람들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를 알고 있었다. 러시아 땅에 살고 있던 한민족들도 조국을 걱정했다. 그들은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정치 망명객들도 연합해 왔다. 그렇게 해서 그는 러시아의 한인들 사이에서 일기 시작한 민족운동의 조직자가 되었다. 1906년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민족해방 빨치산 운동을 이끌었으며, 이를 통해서 몇 개의 의병부대들이 조직되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조직적-정치적인 지도 외에도 연해주에서 누리고 있던 권위를 이용해서 자금을 모금하여 의병부대들에 큰 물질적 지원을 해주기도 했다. 민족해방운동을 실행해 나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물질적 기지역할을 했던 것은 러시아 주재 조선공사 이범진(Ли Бом Чин)의 재산이었다. 이범진 공사는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그(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에서 모든 재산을 일본인들과의 투쟁에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순국했던 인물이다. 1907년 의병운동은 규모가 커졌고, 의병들은 안중근(Ан Тюн Гун)과 같은 군인답고 용감한 애국지사들의 지휘 하에 함경북도와 기타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했다.  1917년 혁명이 시작되며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얀치헤 볼로스치집행위원회(волостный исполнительный комитет) 위원장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18년 가을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П.С.Цой)의 가족이 살고 있던 슬라뱐카 마을로 일본군대가 들어왔다. 그 자신은 가족들을 구하고자 들어가지 못했고, 아내가 4명의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그의 아내는 그곳에서 다시 당시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군자치단체(군 참사회, Уездная Земская Управа) 의원으로 활동하던 니콜스크-우수리스크(г.Никольск-Уссурийск(1926), 현재 우수리스크)로 옮겨왔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는 군자치단체 의원으로 일하며 한인 빨치산 운동 과정에서 러시아 측의 입장에서 볼 때 불법적인 일을 수행할 수 가능성을 갖고 있던 상황 속에 있었다. 당시 극동지역의 전역은 외국간섭군들(интервент)과 백위파(белогвардеец)에 대항한 투쟁이 격화되고 있었다. 조심했음에도 불구하고 극동지역에서는 1920년 4월참변 동안에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는 불행한 일이 발생하고 말았다. 4월 5일 이른 아침에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가 집에서 나와 마침 아이들 방의 창문의 덧문을 열었을 때, 소총을 맨 일본 군인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우리는 벌떡 일어나 정신없이 옷을 걸치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우리는 일본 군인들이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의 손을 뒤로 묶은 채 체포해 가는 모습을 목도하게 되었다. 우리는 굽고, 그리고 운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그의 등을 보았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최 표트르 세묘노비치(최재형)에 대한 간략한 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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