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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이자해] 에 대한 전체 2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자해자전

      조선은 4천여 년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오랜 국가이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조(李朝) 500년 동안은 국명을 조선(朝鮮)이라 하였고, 그전에는 고려국이라 불렀다. 이보다 더 오래 전 조선은 신라·백제·고구려 등 3국으로 나뉘었으며, 또 진한(辰韓)·변한(弁韓)·마한(馬韓) 등의 국명도 있었다. 이를 3한이라 칭했다. 그 후 갑오년 완전 독립시 부터 조선의 국명을 한국이라 호칭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이라는 이름은 삼한(三韓)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다.  갑오년(1894년)에 독립한 대한제국은 중·일(중국·일본) 양국의 마관조약[馬關條約(시모노세키조약), 1895]을 통해 그 이름만 있고, 실체가 없는 독립국으로 사실상 일본의 보호국이 되어버렸다. 정치부패·내정불수·국력미약의 대한제국은 경술년(1910년)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이후부터 또 다시 국명을 조선이라 불렀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비록 일본이 무력으로 국내를 장악한 것 같았지만, 실제로는 이완용(李完用) 등 매국노들의 계략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다. 한일합병조약(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은 조선 역사상 영원히 씻어버릴 수 없는 가장 치욕적인 오점일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망국노의 신분으로 전락된 3천만 조선 인민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잔혹한 통치하에 착취와 고된 노역으로 참혹한 생활을 하며 살아갔다. 더욱이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날이 갈수록 침략야심과 확장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오늘, 그들이 높이 외치고 있는 만주와 몽골정책의 문제는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과 갈라놓을 수 없는 침략적 음모이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이 공포된 이후, 전국 각지에서 무장기의(起義)를 일으켜 적극적인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나, 불과 몇 년이 안 되어 결국 실력부족으로 실패의 고배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조선 인민들의 항일투쟁은 중단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제l차 세계대전 종전 후인 1919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 당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의 조관에는 조선인민은 우리가 반드시 원조해야 할 약소민족이라는 정의를 내걸었다. 그뿐만 아니라 비밀리에 대표를 프랑스 파리에 파견하여 조선을 통치하는 일제의 죄행을 선포했고 아울러 독립자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일본이 5대 강국 중 하나인데다 또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와 여타 제국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세만장(氣勢萬丈)한 시기였으니 누가 감히 정의를 지지하고, 누가 감히 약소민족인 조선 대표의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겠는가? 이때 조선 인민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최대한 일본의 선심정책을 선전했고, 또한 일본의 조선 통치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을 찾는데 급급했다. 이 기간 국내에서 활동한 조선인들은 대부분 일찍 해외에서 유랑한 항일운동가들 이었다. 그들의 활발한 항일투쟁으로 인해 조선의 분위기는 긴장이 더 없이 고조되었고, 그 영향으로 인해 다양한 형태의 항일운동세력들이 발생했다. 이때부터 조선 인민들의 항일행동에 대한 일본군, 경찰의 단속은 더 한층 강화되었다.  또 하나 조선인의 분노를 금할 수 없게 하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이태왕(광무황제)의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원래 ‘친화배일(親華排日)’로 저명한 광무황제 이태왕(李太王)은 일본의 침한정책(侵韓政策)에 불만을 갖고 비밀리에 대표를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여 일본의 죄행을 호소했다. 때문에 조선 통감 이등박문(伊藤博文)은 직접 궁궐로 들어가 핍박으로 황제를 퇴위시켰으며, 경술년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실현 이후 융희황제를 이왕(李王)으로 하고, 전 광무황제를 이태왕으로 했다.  이번에 프랑스 파리에 비밀리에 파견된 대표가 평화회의에서 독립을 요구한 것은 틀림없이 이태왕(광무황제)이 계획하여 도모한 일이다. 그래서 시독암해(施毒暗害)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진위여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로 인해 각계의 조선인들은 일본에 대해 분노했으며, 일본에 대한 조선인들의 사무친 원한을 진정할 방법이 없었다. 이때 조선의 많은 전국적 대표 인물들, 예를 들면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 등 33인은 명월관(明月館)에 모여 연명으로 독립선언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1919년 3월 1일에 발생한 독립운동이며, 간칭은 3·1운동이다.  ‘3·1운동’은 우선 서울과 평양 등의 독립선언으로부터 시작하여 대대적인 시위운동으로 이어졌다. 전국 각지, 즉 작은 성시로부터 향(鄕)·진(鎭)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끊임없이 계속하여 시위가 일어났다. 이때 잔인무도한 일본군과 경찰은 군중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인 실탄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사무치는 원한을 가슴에 품은 시위대들은 이러한 비인도적인 왜놈들의 실탄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생사의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시위대에 참가하여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계속하여 항일시위를 이어나갔다. 이 과정에서 체포된 사람들 중·경(輕)한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혹독한 구타와 고문을 당했고, 중(重)한 자로 분류되는 사람들은 현장에서 바로 살해되었다. 당시 그 유혈참극을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은 또 수원군(水原郡) 제암리(堤岩里)에 있는 백여 호의 남녀노소 모두를 집안에 가둔 후 밖으로 출입문을 잠그고 아주 잔인하게 살인방화하는 끔찍한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일제의 잔혹한 행위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런 명백한 사실 앞에서 그 어느 누가 인성(人性)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일본 경찰의 야만적인 죄행에 대해 증오하고 치를 떨지 않겠는가? 이렇듯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죄악을 조선 인민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이때 조선의 애국지식청년들은 국내에서 발을 붙이고 생존하기가 어려웠다. 더욱이 일본 통치 집단들이 국내외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조선인들의 통로를 완전히 봉쇄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독립운동에 관련된 그 어떠한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다.  ‘한일합병(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당시 해외로 망명한 애국인사들과 일본 통치에 불만을 품고 중국의 동북 각지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농사를 지으며 농부로 사는 듯했지만, 사실 그들은 일찍부터 그 지역에서 항일구국의 조직을 결성했다. 이렇게 그들은 국내외에서 정열적인 독립운동의 기회를 가졌으며, 암암리에 사람을 파견하여 국내의 애국청년들에게 항일구국을 호소하였다. 이것이 바로 우리 청년들이 조선을 떠난 유일한 동기이다.

    2 범례

    1. 이 자료집은 내몽골에서 수집한 『李慈海自傳』을 번역한 것이다. 2.『이자해자전』은 중국식 순한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를 번역하여 수록하였는데, 번역과정에서 일부 문맥이 통하지 않는 경우와 중국식 용어는 우리 표현대로 고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가급적 원문에 충실하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용어나 표현이 어색한 경우도 없지 않다. 3. 원본에서 명백하게 한자를 잘못 사용한 것이나 인명의 한자를 잘못 쓴 경우에는 이를 바로 잡았다. 예를 들면 文炳岳(문병악)이라 쓴 것은 門炳岳(문병악)으로 고쳤다. 4. 원본에서 인명을 표기할 때 姓만 적은 경우가 많다. 이로 인해 독자들의 이해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부분에서는 원이름 전체를 써 주었다. 예를 들면 傅(부작의) 사령관이라고 한 경우, 傅作義(부작의) 사령관이라고 하였다. 5. 원본에서 판독이 어려워 글자를 확인하지 못한 경우에는 □로 처리하였다. 6. 원본에는 뒷부분에 부록으로 여러 가지 사항들이 첨부되어 있었지만, 단순히 메모해 놓은 것으로 自傳의 내용과 관계없어 포함시키지 않았다. 다만 ‘추억의 맺음말’ 은 수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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