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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유자명] 에 대한 전체 10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유자명수기

    나는 1894년 1월 13일 갑오년(甲午年) 중일전쟁(中日戰爭) 시대에 조선 충청북도 충주군(忠州郡) 이안면(利安面) 삼주리(三洲里)에서 태어났다. 나의 성은 류씨(柳氏)이고 어릴 때 이름은 흥갑(興甲)이라고 하며 학생 때 이름은 흥식(興湜)이라고 하였다.나의 아버지는 4형제 중 셋째인데 큰아버지의 이름은 인근(仁根), 둘째아버지는 의근(義根), 아버지는 종근(鍾根), 넷째아버지는 완근(完根)이라고 하였다. 아버지의 4형제가 각각 집을 나누어서 살림을 하게 되었다.나는 3남매 중의 셋째인데 큰형은 흥수(興洙)라고 하고 누이는 흥순(興順)이라고 한다. 그 시대에 조선에서 학문을 배운다면 주로 한문을 배우는 것이다. 아버지는 젊었을 때부터 큰아버지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서 힘써 한문을 배워서 4형제 중에서 오직 한 명의 지식인을 된 것이다. 그래서 평양감사(平壤監司)인 정경원(鄭慶源)을 따라서 평안도청의 주임비서가 되어 3년 동안 일하다가 돌아왔다. 그 때 아버지는 월급 중에서 쓰고 남은 돈 200원을 큰아버지에게 드렸는데, 큰아버지가 그 돈으로 30마지기의 논과 밭을 사서 우리 집에 주었다. 그로부터 우리 집에는 머슴 한 사람과 소 한 마리로써 자기의 토지를 가지고 농업생산을 하게 되었다. 이러한 농가를 ‘자경농(自耕農)’이라 한 것이다. 나는 7세부터 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다. 천자문(千字文), 동몽선습(童蒙先習), 소학(小學), 대학(大學), 맹자(孟子), 통감(通鑑) 등을 배웠다. 그러고 또 당시에 현실적으로 일어나는 조선 인민이 일본의 침략에 대한 투쟁의 사실과 역사도 아버지 어머니와 형의 교육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날마다 생기는 생동한 사실은 사람마다 알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시에 도처에서 일어나는 의병투쟁은 나는 귀로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눈으로도 보았다. 내가 14세 때에 의병대장 유인석(柳麟錫)이 거느린 의병이 제천으로부터 충주로 쳐들어갔다가 물러가는 광경을 나의 눈으로 보았으며 의병이 물러간 뒤에 일본군대가 그 부근 마을에서 저지른 야만적 폭행도 나의 귀로 들었다.내가 어렸을 때 우리 조국의 비통한 역사에 대하여 역사가들이 써 놓은 문헌에 근거하면 대체로 아래와 같다. 동학당의 혁명운동은 1894년 1월에 전봉준(全琫準)을 우두머리로 한 수천 명의 농민이 전라북도 고부에서 양식 창고를 열어 놓고 양식을 농민들에게 나눠주는 동시에 병기 창고 속에 있는 무기를 뺏어 가지고 대규모적인 혁명운동을 발동시켰다. 이것을 역사적으로 동학당 혁명운동이라고 한다. 이른바 ‘동학(東學)’이라고 하는 것은 ‘서학(西學)’을 반대하는 의사인데 서학이라는 것은 천주교, 예수교를 말하는 것이다. 동학당이 불러낸 구호는 “왜놈들을 쫒아내자!”, “서학을 반대하자!”, “부패한 귀족의 통치를 소멸시키자!”고 하였다.동학당이 고부에서 일어난 뒤에 전라도와 충청도의 인민 군중이 그에 향응하여 성세가 매우 긴장하게 되어서 남쪽으로부터 서울 쪽으로 향하고 빨리 전진하였다. 그래서 정부의 통치자들은 경황실조(驚惶失措) 하게 되어서 중국 정부에 향하여 구원을 요구한 결과 중국 정부는 그해 6월에 2천여 명의 군대를 우리나라에 보냈다. 그것이 곧 갑오중일전쟁(甲午中日戰爭)의 시작으로 된다. 중일전쟁의 경과를 말하면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침략을 벌써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데, 동학당 혁명운동을 기회로 하고 일본 정부는 비밀리에 군대를 조선 남쪽에 보내서 비밀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 군대가 조선에 오게 될 때에 일본은 1만 2천명의 군대를 조선에 보내서 아산, 평택일대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 군대가 아산, 평택에 상륙하게 될 때에 역사적인 중일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곧 늙은 봉건주의 대국[老大的封建主義大國]이 새로 일어난 자본주의 국가[新興的資本主義國家]에게 전패된 전쟁이며 또한 중국, 조선, 일본의 삼국간 역사적 변화의 관건으로 되는 것이다. 1895년 4월에 일본 시모노세키[馬關]에서 체결된 시모노세키조약[馬關條約]은 중국은 조선이 완전한 독립자주의 국가인 것을 승인하며, 요동반도(遼東半島)와 대만(臺灣)과 팽호열도(澎湖列島)를 일본에 주기로 승인하였다. 일본은 갑오전쟁이 지난 뒤에 조선에 대하여 압력을 크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조선 인민은 모두 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가장 큰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때에 러시아[俄國]에서는 조선과 일본 사이의 모순 되는 관계에 대하여 조선 편에 동정을 표시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후 민후(閔后)는 러시아의 세력을 빌어 가지고 일본을 배척하려고 생각하고 러시아 공사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대원군과 왕후 사이에 모순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 때는 일본 공사인 미우라[三浦梧樓]는 이러한 관계를 알게 되어 1895년 10월 8일 밤에 일본 군대 400명을 이끌고 대원군을 강박하여 앞잡이로 삼고 조선 왕궁으로 몰려 들어가서 왕후를 끌어내며 자도(刺刀)로써 찔러 죽이고 그 시체를 화원(花園) 속으로 끌어다 놓고 석유를 그 시체 위에 뿌려 놓고 불살랐다. 이것은 얼마나 간악하고 흉악하고 야만스러운 폭행인가! 인류의 역사에서 다시 볼 수 없는 야만적 폭행은 조선 전국 인민의 극단적인 분노를 이끌어 냈으며 국제적으로도 의론이 분분하였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부득불 미우라[三浦] 등 40여명의 일본 공사관의 인원을 불러다가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것을 구실로 하고 그들을 석방하였다. 이것은 일본 정부의 외교정책이 얼마나 교활하고 기만적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그 때에 조선의 애국지사인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신채호(申采浩)·조성환(曺成煥)·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이종호(李鍾浩) 등은 독립협회를 조직하여 가지고 나라를 구원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촉진하고 있었다. 1905년에 일본 정부는 이또오 히로부미[伊藤博文]을 조선에 보내서 조선의 매국적인 이완용(李完用)과 송병준(宋秉畯) 등을 꼬여 가지고 ‘보호조약(保護條約)’을 강제적으로 체결하였다.이로부터 조선 각지에서 의병의 무장투쟁이 일어났다. 일본 방면의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1907년으로부터 1911년까지 5년 동안의 의병 인수는 14만 3천 6백인이나 되는 것이다. 유명한 의병대장은 유인석(柳麟錫)·최익현(崔益鉉)·민긍호(閔肯浩)·홍범도(洪範圖)·안중근(安重根) 들인데 그 중에서 유인석, 홍범도와 안중근은 나중에 중국의 동북 방면으로 가서 활동을 계속하였다. 여기에서 특별히 주의되는 역사적인 대사건은 1909년 10월에 안중근 대장이 이또오를 쏴 죽인 사건이다. 그 때에 이또오가 러시아를 방문한다는 소식이 신문에 발표된 것이다. 안중근 대장은 이 소식을 알고 장춘(長春)으로부터 하얼빈까지의 철도 연선의 중요한 정거장에 자기의 동지들을 배치하여 놓고 안중근 자기는 하얼빈 정거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에 이또오가 기차로부터 내려왔다. 그 경각 사이에 안중근은 권총을 빼어 들고 이또오를 쏘았다. 첫째 탄환은 이또오의 가슴을 맞추고 둘째 탄환은 이또오의 갈비대를 맞추고 셋째 탄환은 이또오의 배를 맞췄다. 이또오는 마지막으로 거꾸러지면서 “조센진 바가야로(朝鮮人 馬鹿野郞)”라고 하였다. 속담에 이르기를 “새가 죽을 적에 그 소리가 슬프고 사람이 죽을 적에 그 말이 착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또오는 죽을 때에 그 말까지도 추악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에 하얼빈 정거장은 일시에 혼란상태로 되었다. 이또오를 환영하기 위한 러시아의 외교관들이 정거장에 있었으며 러시아와 일본의 군대와 경찰들이 떼를 지어 있었다. 그러한 국제적 현장에서 안중근 대장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조선독립만세”를 거듭해 부르면서 의기당당하고 용감하게 왜적의 포로가 되었다. 그래서 대련(大連)으로 끌려가서 일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 뒤에 일본 법관은 법정을 열어 놓고 안중근 의사에 대한 심문을 시작할 때 안중근 의사는 왜적의 법정을 전투의 장소로 하고 이또오의 우리나라에 대한 죄악적인 행동을 하나하나씩 역술한 뒤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나는 조선의 의병대장이다. 일본 침략자들과 싸우다가 포로가 된 것이고 죄인이 아니다. 정의가 나의 편에 있으며 이또오와 너희들이야말로 진정한 죄인이다.” 안중근 의사는 이렇게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하여 장엄한 역사의 편장(篇章)을 써놓고 최후로 일본 제국주의가 가장 많은 죄악을 범한 대련감옥의 교수대에서 전투의 일생을 끝낸 것이다. 그 때로부터 안중근 의사는 조선 혁명인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며 또는 중국 인민에게도 숭고한 존경을 받게 된 것이다. 1909년 10월에 이또오가 죽은 뒤에 일본 정부는 육군대장 데라우치(寺內正毅)를 조선 통감으로 하고 육군소장 아카시(明石元二郞)를 경무총감으로 하였다. 아까이시는 조선에 오는 첫날부터 많은 정탐을 조선 민간에 보내서 조선의 애국지사들의 행동을 감시하는 동시에 그들을 친일패와 반일패로 갈라서 명부를 만들어 놓고 1910년 7월부터 우리의 애국지사들을 일본 헌병대에 가두었다. 그래서 안창호는 개성헌병대에 갇혔었고 이동녕·이갑·유동열은 용산 헌병대에 갇혔으며, 그 밖에도 100여명 이상의 애국지사들이 전국 각처 일본 헌병대에 갇혔던 것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병탄하는 준비적 소동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1910년 8월 22일에는 우리나라 인민이 영원하도록 잊을 수 없는 망국의 날로 된다. 이날에 ‘일한합병조약(日韓合倂條約)’이 공포된 것이다. 그 조약의 전문을 성시의 큰 거리에 붙여 놓고 일본 경찰의 정탐이 그 곁에 숨어서 군중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다. 이 망국의 조약은 우리나라의 사람마다 자기가 일본 놈의 노예로 되는 운명을 결정하는 침통하고 치욕스런 기록으로 되는 것이다. 사람마다 울고 싶어도 울 수도 없고 말하고 싶어도 말할 수도 없었다. 나는 그 때 충주공립보통학교(忠州公立普通學校) 3학년 학생이었다. 그 때 이 학교에는 교장이 없고 일본 사람인 교감 시카다(鹿田)가 교장 대신으로 되었으며 조선 사람인 교사는 심상덕(沈相德)·서극순(徐極淳)·신석균(申錫均)·홍몽화(洪夢華) 등 4인이었다. 심 선생은 3학년 반의 주임이었고, 홍 선생은 구시대의 한문학자로서 사범학교의 졸업생은 아니며 일본말을 배우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학교에서 나이 젊은 교사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학교에서는 한문과 조선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홍 선생 밖에 다른 선생들은 모두 다 사범학교의 졸업생으로 일본말을 일본 사람과 같이 할 수 있었다. 조국이 망하게 된 이 때에 조선 사람은 누구나 다 비통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으나 마음 놓고 말할 수도 없고 소리쳐서 울 수도 없었던 것이다. 3학년 주임인 심상덕 선생은 그 때에 우리 3학년 학생들에 대해 이렇게 말하였다. “이렇게 어렵게 된 때에 우리는 오직 힘써서 공부하는 것 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이렇게 간단한 말속에는 여러 가지 의사가 담겨 있는 것을 나는 즉각적으로 느낀 것이다.나는 그 때에 17세였으며 3학년의 부급장이고 학과 성적은 우등이었다. 그래서 조국의 곤란한 지경과 자기의 장래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우리 집은 학교와 30리나 떨어져 있어서 나는 충주성 부근에 있는 친척의 집에서 숙식하면서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날에 학교에서 친척의 집으로 돌아갔을 때에 나의 맏형도 거기에 와있었다. 그 날 저녁에 우리 세 사람은 같이 앉아서 조국이 망한 데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우리 친척인 정운익(鄭云益)은 말하기를 “깊은 산 속에 가서 마음 놓고 울고 싶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나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너는 아직 망국된 슬픔을 알지 못할 것이다”라고 했다. 나는 “형님들이 소리치고 울게 된다면 나도 따라서 울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에 서울로부터 전해오는 놀랍고도 비통한 소식도 있었던 것이다. 특별히 놀라운 소식은 참정대신(參政大臣) 민영환(閔泳煥)이 지기의 손으로 배를 갈라서 자살한 뒤에 그 영당(靈堂)에서 푸른 대[綠竹] 한 포기가 생겨났다는 소식은 광대한 인민의 애도와 애국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대를 혈죽(血竹)이라고 한 것이다. 과학적으로 말한다면 피가 맺혀서 푸른 대로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민영환이 돌아간 뒤에 그의 친밀한 사람들이 푸른 대 한 포기를 옮겨다가 영당에 심어 놓고 그에 대한 애도의 뜻을 표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소식은 매국적인 이완용이가 인력거를 타고 종로거리를 지나갈 때에 애국지사 이재명(李在明)이 단도를 가지고 이완용을 찔러 죽이려고 할 때에 그의 인력거부가 이재명의 칼을 가로막다가 질려 죽었고 이완용은 그 틈을 타서 인력거로부터 뛰어 내려서 달아나고 이재명은 이완용을 좇아 가다가 경찰에게 잡혀서 사형을 희생된 것이다. 조선을 병탄하는 동시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의 모든 제도를 개변시켰다. 한국의 황제를 퇴위시키고 이왕직(李王職)으로 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귀족 중에 종작(公爵)·후작(侯爵)·백작(伯爵) 등과 같이 일본 천황의 신하로 되는 것이다. 한국통감부를 조선총독부로 고쳤다. 공립보통학교에서는 교감이 교장으로 되었으며 교과서의 이름과 내용도 변하였다. 「일본어독본(日本語讀本)」이 「국어독본(國語讀本)」으로 되었고 「이과(理科)」와 「수신(修身)」도 일본말로 썼고 가르칠 때도 일본말로 가르치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는 보통학교나 고등보통학교와 사범학교를 물론하고 근본적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조선에는 망국 이전에 조선말로 쓴 소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임진록(壬辰錄)」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7년 동안 일본이 조선에 대한 침략전쟁을 기록한 소설로서 조선에서 가장 광범하게 읽히는 역사적 문학작품인데 망국된 뒤에는 이런 소설까지 볼 수 없게 되었다. 일본 정부는 조선의 역사에 관한 서적을 모조리 몰수해서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특별히 세계 각 국에서 실례를 볼 수 없는 것은 각급 학교의 교원들까지 무장을 시켜서 날마다 칼을 차고 다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일본 본국에서나 대만에서도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것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의 군국주의적 특색을 표현한 것이다. 나는 1911년에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수원농림학교의 입학시험에 참가했는데, 합격하지 못해서 그 길로 서울에 가서 수학자인 이명칠(李命七)이 열어 논 연정학원(硏精學院)에서 일년 동안 수학을 배우고 1912년 봄에 수원농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당시 조선에는 대학교는 없고 다만 4종의 전문학교만이 있었다. 그것은 사범학교(師範學校), 농림학교(農林學校), 공업학교(工業學校), 의학교(醫學校) 등이다. 농림학교는 서울에서 멀지 않은 수원군(水原郡) 서둔촌(西屯村)에 있다. 거기에는 또 조선총독부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과 잠사시험소(蠶絲試驗所)가 있었다. 농림학교는 실제적으로는 권업모범장과 잠사시험소와 같이 한 기관으로서 권업모범장의 장장인 혼다(本田幸個)가 농림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으며 잠사시험소 소장인 미야하라(宮原)가 농림학교의 교무주임을 겸임하였다. 그리고 농림학교는 조선총독부 학무국에 속하여 학비는 공비(公費)로서 매월 평균으로 일본 돈 5원씩이고 그밖에 또 학생복과 실습복을 한 벌씩 주었고 각종의 교과서도 사서 놓고 학생들에게 빌려 주었다. 당시의 조선 농업교육은 일본 자신의 양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요한 작용이 있었다. 일본은 조선으로부터 해마다 2백만 석의 베쌀[稻米]을 수입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에는 수원농림학교 밖에도 전국 13도에 도 마다 보통농업학교와 간이농업학교가 있었다. 농림학교의 교사 수준은 상당히 높았다. 교장인 혼다는 농학박사로서 일본에서 유명한 학자이며 임학박사인 우에키(植木秀干)는 조선의 산림과 식물에 관한 조사와 연구가 깊어서 박사의 학위를 얻게 된 것이다. 그밖에도 일본 교사 중에 일본 제국대학 학사가 4인이었고 조선인 교사 4인은 모두 일본 농업대학을 졸업한 것이다. 농림학교 교학제도는 1/3 시간을 생산노동을 하게 되고 매년 봄철과 가을철에 수학여행을 하게 된다. 1학년부터 3학년까지 나는 부급장으로 되었는데 3학년 때 가을철 수학여행으로 평안도 진남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서부터 상한병에 걸려 학교에 돌아온 뒤에 수원군내 위생처 부속병원에서 한 달 동안이나 치료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수원으로부터 3백리나 되는데 나의 아버지는 내가 병들었다는 소식을 알고 병원에 와서 나를 간호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오던 그 이튿날 저녁에 아버지는 나에게 말하기를 “너는 지금 죽을 것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우 긴장한 모양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 때에 대답하기를 “아버지! 걱정 마십시오. 저는 죽지 않습니다.”라고 하면서 내가 학교에서 특별히 좋아하던 소설 한 편을 그대로 이야기해서 아버지에게 들려 드렸다. 그런 뒤에 아버지는 나의 병이 위중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안심하고 하루 밤을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튿날부터 체온이 내려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 날 저녁때에 우리 형도 병원에 와서 불안한 목소리로 아버지에게 “흥갑이의 병은 어떠합니까?”라 하였다. 아버지가 대답하기 전에 나는 “형님! 내 병은 오늘부터 체온이 내려갑니다.”라고 대답해서 형님도 안심하게 되었다. 그 때에 어머니 한 분이 집에 있어서 매우 걱정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다음날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의 몸이 차차 회복된 뒤에 음식을 먹게 될 때에 우리 형님은 신문을 사다가 높은 소리로 나에게 들려주었다. 간호부는 신문 읽는 소리를 듣고서 나에게 일본말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몸이 아직도 완전히 회복되지 못하였는데 밥을 먹은 뒤에 한 시간 동안은 완전히 쉬어야 하고 만일 신문 같은 것을 본다면 열병이 다시 생길 수 있고 만일 병이 재발하게 된다면 그것은 매우 위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것은 생리적으로 해석한다면 음식을 먹을 때에 혈액이 위(胃)를 향하여 집중되는 것인데 만일 그 때에 신문이나 책 같은 것을 읽는다면 혈액이 눈과 머리로 집중되어서 위의 활동을 방해하게 되어 음식물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면 저항력이 약하게 되어서 신체 건강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나는 간호부의 말대로 음식물을 먹은 뒤에는 반드시 한 시간 내에는 신문과 책 같은 것을 보지 않게 되어 그것이 습관으로 된 것이다. 나는 병이 나은 뒤에 학교에 돌아가서 휴양실에서 한 달 동안 휴양한 뒤에 학습활동을 다시 회복하게 되었다. 그 해 겨울 휴가에 내가 집에 돌아갔을 때에 나의 어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소리치며 울었다. 어머니의 울음 속에는 슬픔과 기쁨이 섞여 있는 것이다. 어머니는 40살이 넘은 뒤에 나를 낳았으며 내 위의 누이는 이때로부터 몇 해 전에 병으로 인해서 젊은 시절에 이 세상을 떠나서 우리 일가는 몹시 슬퍼하였으며 또 언제까지나 그를 잊어버릴 수 없었다. 내가 어머니를 멀리 떠나서 4년이나 되는 시간에 홀연히 뜻밖에 위중한 상한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침식이 불안하였던 것이며 내가 죽지 않고 다시 어머니 품속에 돌아오게 된 때에 어머니의 기쁨은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었으며 그 동시에 자기를 떠난 딸도 생각났던 것이다. 1916년 봄에 나는 수원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에 있는 간이농업학교의 교원이 되었다. 이 학교는 내가 공부하던 충주공립보통학교 곁에 건립된 것으로서 보통학교의 교장(일본 사람)이 농업학교의 교장을 겸임하였고 또 조선 사람 교원도 한사람이 있었다. 나는 간이농업학교의 교무주임이 되었으며 보통학교 4학년의 농업과정을 담당하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에는 조선의 독립운동이 폭발하였다. 이 운동의 경과를 간단하게 말하면 아래와 같다. 1919년 2월에 한국의 광무황제(光武皇帝)가 세상을 떠났는데, 그의 장삿날[送葬日]을 3월 1일로 결정한 것이다. 이런 소식이 전국적으로 알려진 뒤에 전국 13도의 인민은 자동적으로 송장단(送葬團)을 조직해 가지고 서울에 집중한 것이다. 그래서 3월 1일에 서울에 집중된 사람은 20여만 명이나 되었다. 그 때에 천도교 수령인 손병희(孫秉熙)와 최린(崔麟)을 중심으로 하는 33인의 대표는 비밀 속에서 조선 독립운동을 준비하여서 유명한 애국 문학자인 최남선(崔南善)이 「독립선언서」를 썼으며 그밖에 모든 준비를 주밀하게 하여 가지고 3월 1일 오전에 한성 중심에 있는 탑골공원에는 수십만 군중을 모아 놓고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그 뒤에 군중은 “만세! 만세!”를 소리 크게 불렀다. 그 만세소리는 서울 전체를 진동시켰다. 그 뒤에 33인은 군중을 지휘하여 한성의 거리를 통하여 “만세!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행진을 하였다.3·1운동의 특징은 무장투쟁이 아니고 수십만 군중이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질서정연하게 시위행진을 한 것이다. 그리고 일본의 기관이나 일본인의 집과 재산에 대해서는 아무런 파괴적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다. 독립선언서 중에서 부대적으로 말하기를 “우리가 독립을 위하는 투쟁은 정의적 투쟁이다. 일본의 기관이나 일본 사람에 대해서는 파괴적이나 폭력적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객관조건이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찰과 헌병은 그러한 평화적인 조선 군중에 대하여 폭력수단을 취한 것이다. 나이 어린 여학생의 머리채를 감아쥐고 끌어다가 감옥에나 임시감옥인 학교에 가두었다. 기타 지방에서 일본의 경찰과 헌병대가 범한 폭행은 더욱 야만적이고 흉악한 것이었다. 수원과 대구와 정주의 실례를 들어보면 수원에서는 시위 행진하는 조선 인민 3백여 명을 일본 헌병대가 출동하여 모조리 체포하여 그 부근에 있는 농촌인 서둔촌(西屯村)에 끌어다놓고 헌병들은 실탄사격 연습을 하면서 3백 명의 무죄한 군중을 모조리 총살하였다. 정주와 대구에서도 이와 같은 총살사건이 생겨서 수백 명이 집체적으로 희생되었다. 3월 1일 이후에 독립운동은 각 지방에서 발전되어서 전국 각지에서 자주독립을 위해 싸우는 정치적 기분이 공전적(空前的)으로 고장되었다. 3·1운동의 중심 역량은 천도교라고 할 수 있다. 천도교는 동학당의 후신으로서 조선에서 새로 건립된 정치적 종교단체로서 3·1운동 때에 2백만 이상의 신도를 가졌다. 신도의 절대 다수가 농민인데 신도들은 날마다 세 때 밥(三炊飯)을 만들 적마다 밥쌀을 사람마다 한 숟가락씩 모아서 천도교 중앙에 드려서 단체사업의 경비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성미(誠米)라고 하는 것이다. 천도교는 이러한 광대한 교도 군중의 기초가 있음으로써 서울 중앙에 훌륭한 교당을 세워 놓고 정치적이며 교도의 사상 교육을 하여 왔던 것이다. 이러한 군중적 기초와 경제적 조건이 있었으므로 3·1운동에 대하여 큰 공훈을 할 수 있었다. 3·1운동은 조선의 역사적 대사변으로 될 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그 때의 국제환경은 우리에게 유리하였다. 1917년 10월의 ‘쏘련 사회주의혁명’의 승리는 세계의 피압박 민족과 피압박 계급의 해방투쟁의 길을 열어 논 신시대로서 조선 민족에게 대하여 해방을 위한 투쟁의 길을 가르쳐 준 것이다. 그리고 또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이 결속되어서 1919년 1월부터 영국·프랑스·미국·일본·이탈리아의 5국의 대표들이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열어 놓고 미국 대통령 윌슨은 민족자결 문제를 제출하고 “세계상의 모든 민족이 자기의 국가를 자기가 결정하여야 세계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호소한 것이다. 그래서 윌슨의 민족자결론이 조선독립운동에 대하여 적극적인 작용을 한 것이다. 그날 저녁에 학생 3인이 나의 숙소에 와서 그들의 의사를 표시하였다. 그래서 서로 상의한 결과 농업학교의 학생이 앞장을 서서 보통학교의 학생과 함께 시내 큰 거리로 나가서 “우리나라 독립 만세!”를 부르면서 운동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운동의 준비는 간단한 것이나 3일 동안 준비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그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 속에 들어가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그 때에 도처에서 “독립 만세!”의 운동이 일어났기 때문에 충주에 있는 일본 경찰기관에서는 정탐들을 파견하여 청년 학생들의 행동을 특별히 주의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운동의 준비 중에 경찰서의 정탐공작을 하고 있는 황인성(黃仁性)이 나의 숙소에 찾아왔다. 그는 나의 보통학교 시절의 같은 반 동창이었다. 그는 나에게 “자네가 하고 있는 비밀활동을 경찰서에서 알게 되어서 나더러 조사해 보라고 했네. 자네가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경찰서에서 나더러 자네를 체포하라고 할 것이니 자네는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네!”라고 했다. 나는 그 때에 학교 교장인 마에다(前田)를 찾아가 보고 “나의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것을 핑계로 휴가를 내고 학교 숙소를 떠나 큰 거리로 가는 때에 마침 보통학교 때의 동학인 권석희(權石熙)를 만났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나는 학교를 떠나서 서울로 가겠다.”라고 말했다. 권석희는 3·1운동 당시에 서울에 있다가 돌아왔다. 그래서 그는 서울에 있는 친구 한 분을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의 친구인 정락윤(鄭樂潤)이도 충주 사람이었다. 나는 그 길로부터 인력거를 불러 타고 30리나 되는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때에 나의 아버지와 형들도 3·1운동을 알고 있었다. 나는 하룻밤을 집에서 자고 이튿날 아침에 아버지께도 학교를 떠나 서울로 가겠다고 말하지 않고 집을 떠나서 큰 길로 나가서 서울 방향으로 향하고 걸어 나섰다. 그 때에 마침 자동차 하나가 내 뒤로 달려왔다. 나는 손을 들어서 자동차를 머무르게 하고 자동차를 타게 되었다. 서울은 우리 집으로부터 3백리나 떨어져 있어서 보행으로 걸어간다면 3일이나 걸리게 되는데 나는 그날 오후 5시에 서울에 이르렀던 것이다. 나는 바로 인력거를 타고 정락윤의 주소로 찾아가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정락윤은 그 전에 만나 본 적은 없었으나 그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도 충주 사람으로서 그의 조카인 정태희(鄭泰熙)와 정석희(鄭碩熙)가 나의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그의 집에서 숙식하게 되었다. 그 이튿날 나는 이병철(李秉澈)을 찾아가 보았다. 그도 고향이 충주이고 내가 정운익의 집에서 기숙하고 있을 때부터 그와 친하게 된 것이다. 그 때 이병철은 상해방면과 연락이 있었다. 당시 서울에서의 혁명운동은 비밀한 조직 운동과 선전활동의 두 방면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비밀한 조직은 외교청년단(外交靑年團)과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가 있었는데 이 두 단체는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고 있었다. 외교청년단은 당시 프랑스 파리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부장 김규식(金奎植)이 조선의 정식 대표로 되었고 조용은(趙鏞殷)이 부대표로 되어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청년외교단은 우리의 외교대표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조직된 것인데 이병철과 김태규(金泰奎)와 나와 조용주 등으로 조직된 것이다. 애국부인회는 최숙자(崔淑子), 김원경(金元卿), 백신영(白信永), 김마리아(金瑪琍亞)들로 조직되었다. 그 해 5월에 나는 상해에서 돌아 온 임득산(林得山)을 애국부인회의 최숙자의 집에서 만나 보았다. 그는 평양을 거쳐서 서울로 왔는데 평양에서 조직된 애국부녀회에서 모집하여 임득산에게 준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식품을 한 가방이나 가지고 와서 애국 부인들에게 보여 주면서 평양의 부인들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열성적으로 활동하는 정황을 말하였다. 그래서 서울의 애국부인회에서도 그와 같은 귀중한 물품을 모집하여 임득산에게 주는 동시에 김원경을 애국부인회의 대표로 하여 임득산과 함께 상해로 보냈다. 6월에는 조용주(趙鏞周)가 상해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이병철과 나는 그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둘째 형인 조용은이 파리에서 활동하는 여비를 위하여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조용주의 의견에 따라서 파리에서 열린 평화회의에 대한 우리 외교대표를 지원하기 위하여 외교청년단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외교청년단에서도 약간의 금액을 모집하여 조용주에게 주었다. 다른 편으로 공개된 군중적 운동은 기독교 청년회관과 예배당을 중심으로 하여 군중적 활동이 전개되었다. 군중적인 회의는 대개 청년회관에서 진행되고 기독교 신도들의 예배일마다 밤에 예배당에서 진행되었다. 나는 기독교 신도는 아니었지만 청년회관에서 하는 군중대회에도 참가해 보고 예배당에서 하는 기도회[禱告會]에도 참가해 보았다.어떤 날에 청년회에서 여자 웅변가 권애라(權愛娜)가 연설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그 모임에 참가하여 매우 흥미를 느끼면서 그의 웅변적인 연설을 들었다. 그의 연설 내용은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부녀가 해방되어야 한다는 것을 웅변으로 설명하였다. 전체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의 노예로 되었을 때에 부녀해방을 주장하는 것은 전 민족의 해방을 요구하는 것으로 되고 전국의 애국 인민이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투쟁할 때에 “남녀평등을 위하여 노력하자!”는 것은 “우리의 부녀도 남자와 같이 일어나서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자!”는 것이다. 당시에 공개된 집회를 한다면 일본 경찰의 허가를 받아야 되고, 일본 경찰은 공개된 집회에 정탐을 보내서 회의에서 진행되는 언론을 감사함으로써 우리의 공개되는 연설이나 토론을 할 때에는 말 쓰기에 주의하여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위에서 말한 바 권애라의 연설 속에는 ‘나라의 독립이나 민족의 해방’ 같은 말이 없어서 이본 정탐은 아무런 트집도 할 수 없었으나 권애라의 연설 속에는 “조국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는 뜻이 포함된 것이다. 이러한 말 쓰기나 글쓰기를 당시 일본 경찰들은 ‘은어(隱語) 반어(反語)’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글을 써서 신문에 발표하거나 공개된 회의에서 무슨 문제를 토론하게 된다면 ‘은어와 반어’를 능숙하게 쓸 줄 알아야 되는 것이다. 이에 예를 들어 본다면 조선 글의 전문가의 하나인 권덕규(權悳奎)가 ‘가짜 명나라 사람의 머리에 한 방망이를 가한다(假明人頭上加一棒)’는 글 한편을 조선 신문에 발표하였는데, 그 중에 이른바 가짜 명나라 사람은 조선의 친일파와 매국적들의 대명사였다. 그리고 또 안확(安廓)은 민족개조론(民族改造論)을 청년회관에서 공개된 회의에서 발표하였는데, 그의 이른바 민족개조는 조선의 친일파와 매국적을 개조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나는 예배당에서 예배일마다 진행되는 예배회에도 참가해 보았다. 교회의 목사는 강단에 올라앉아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소상(塑像) 앞에서 정중하게 기도하는 말 속에는 “우리나라의 독립과 우리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도와 달라”는 말이 포함된 것이며 신도들의 기도 속에도 “우리의 독립과 자유를 위하여 싸우다가 일본 감옥에 갇힌 동포를 구원해 달라”는 말이 중요한 내용으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예배당은 조선 인민의 애국사상을 고양하고 조선 인민을 곧게 단결시키는 학교로 된 것이다. 이것은 또 당시에 언론의 자유가 없는 조선에서 기독교가 중국과 일본 보다 더욱 발전하게 되어서 서양 사람들이 “조선은 기독교의 나라”라고 하게 된 것이다. 이에 간단하게 말하면 3·1운동을 지난 뒤에 조선 인민의 독립운동은 공개한 표면적 운동으로부터 비밀스러운 땅 밑의 운동(地下運動)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었다.또 한 가지 기록할 것은 동년 5월 4일에 중국에서도 청년 학생을 주체로 하고 일본 제국주의 침략 행동과 중국의 반동적 관료를 반대하는 5·4운동이 폭발되어서 조선의 3·1운동과 서로 국제적 연대성을 이룩하게 된 것이다. 1919년 6월에 나는 상해로부터 서울에 와서 활동하고 있는 조용주와 함께 상해로 가게 되었다. 나의 여비는 나의 학생이었던 정석희가 자기 집에서 200원을 가져다가 나에게 준 것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주와 함께 어느 날 저녁에 경성정거장에서 신의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그 이튿날 저녁때에 신의주에 도착하여 시내에 있는 의성여관(義城旅館)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다. 조용주는 상해로부터 돌아올 때에 의성여관의 주인과 암호로써 약속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의성여관에 가서 주인에게 암호를 써서 주었는데 여관 주인은 우리에게 특별한 대접을 하였다. 우리는 비밀한 방 한 칸에서 자게 되어 숙박부[旅客登記]도 쓰지 않았으며 여고한 주인은 또 우리에게 대하여 “기차를 타지 말고 여기부터 압록강 변으로 5리 정도 걸어가면 거기에 구의주(舊義州)로부터 단동(丹東)으로 건너가는 뱃길이 있는데 그 길로 건너가면 안전하다”고 말했다. 당시에 서울에서 단동이나 심양으로 가는 기차 안에는 일본 경찰이 조선 사람에 대하여 특별히 주의하고 엄밀한 조사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심양까지 가는 차표를 사지 않고 신의주에서 내렸던 것이다. 우리는 여관에서 불안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아침에 여관 주인의 말대로 압록강 변으로 올라가서 목선을 타고 단동으로 건너가서 중국 여관에서 쉬었다. 조용주는 중국말을 할 줄 알았다. 그래서 나와 함께 단동 거리에 나가서 나의 중국 옷 한 벌을 사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와서 나는 중국옷을 입고 그날 저녁에 기차를 타고 심양에 도착하였다. 조용주는 심양에 중국 친구 한 분이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관을 정해 놓은 뒤에 중국 친구를 찾아가 보고 그와 함께 심양성 안에 있는 고적도 참관하고 또 여러 곳을 돌아보았다. 우리는 심양에서 하룻밤을 쉬고 그 이튿날 심양으로부터 영구(營口)로 가는 기차를 타고 영구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영구 중국 여관에서 하룻밤을 쉬고 그 이튿날 윤선(輪船)을 타고 바다 위에서 3일을 지내고 상해에 도착하였다.

    2 유자명수기

    나는 어느 날 임시 의회에서 강태동(姜泰東)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내가 수원농림학교에서 학습하고 있을 때 동학인 강석린(姜錫麟)의 형이다. 그는 1910년 7월에 일본의 육군대장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한국 통감으로 되면서부터 안창호·이동녕·유동열 등과 같이 일본 헌병대에 잡혀 갇혔다가 8월 29일에 ‘일한합병조약’이 공포된 뒤에 헌병대에서 석방되었다.그는 석방된 뒤에 그의 아우를 찾아서 수원농림학교에 왔었다. 그 때에 나도 그와 같이 앉아서 그가 일본 헌병대에 잡혀가서 고생하였던 경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대하여 가장 경모하는 감정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는 조국이 망하게 됨에 중국의 동북으로 가서 10년 동안이나 유망생활을 하다가 3·1운동이 일어난 뒤에 상해로 와서 독립운동에 참가한 것이다. 그는 나를 자기의 동생과 같이 사랑했고 나도 그를 친형과 같이 존경했다.그는 나에게 김한(金翰)을 소개해 주었다. 김한은 당시에 프랑스 조계에 있는 중국 여관에서 전심전력으로 글을 쓰고 있으면서 보통 회의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그가 쓰는 글은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문제였다. 이 문제의 중심내용은 당시 우리 조선혁명의 방향에 대한 연구이다. 그런데 그는 일본말로 이 글을 썼다. 그래서 나는 조선말로 그 글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자기의 선생으로 존경하고 그도 나를 자기의 학생과 같이 생각하였다.김한의 글에는 공산주의적 사상이 포함되었던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도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생겨서 「개조(改造)」, 「해방(解放)」, 「비평(批評)」 등의 잡지가 출판되고 있었다. 그 때에는 중국의 동삼성(東三省) 철도는 일본 제국주의가 남만철도공사(南滿鐵道公司)를 세워 가지고 그것을 관리하고 있었으며 남만 철도의 연선에 있는 대련·심양·단동·장춘·하얼빈 등의 도시에는 일본 조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남만 철도 연선 각지에서 일본의 신문과 서적을 사 볼 수 있었던 것이다.김한은 오랫동안 하얼빈과 장춘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일본의 서적과 잡지를 통하여 공산주의를 연구했던 것이다. 그때에 블라디보스톡과 시베리아에도 조선 혁명자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동휘와 김립을 중심으로 하고 조선공산당이 조직되어서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3국제(第三國際) 회의에 조선 대표가 참가하게 되었다. 그래서 레닌(Lenin)은 조선의 혁명운동을 위하여 20만루 불을 조선 대표에게 주었다. 조선 대표는 그것을 김립에게 주는 동시에 소련 원동지구에 있는 이르쿠츠크에서 조선공산주의자 단체를 조직하였다. 이것을 ‘조선공산당 이르쿠츠크패’라고 한 것이다.그 때 상해 북사천로(北四川路)에 있는 일본 서점 내산서점(內山書店)에서도 「개조」, 「해방」 등을 살 수 있어서 나는 그 잡지를 사가지고 김한과 같이 보았다. 그러나 김한과 강태동과 이원훈(李元勛)들은 “상해에서는 아무런 실천공작을 할 수 없어서 서울이나 또는 동삼성으로 가서 일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이원훈은 먼저 상해를 떠나서 길림으로 갔으며 김한과 강태동과 나는 서울로 가게 결정된 것이다.그래서 김한과 강태동은 그 해 10월에 서울로 가고 나는 12월에 서울로 가게 되었다. 나는 상해를 떠나기 전에 이시영 선생과 안창호 산생을 찾아뵈었는데 이시영 선생은 서울에 있는 자기의 친척인 박남표(朴南票)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으며 안창호 선생은 10원 돈을 여비로 보태 준 것이다. 중국 돈 10원은 두 달 동안의 생활비용으로 되는 것이며 상해로부터 천진까지의 여비로도 되는 것이다. 나는 그 때 도산 선생이 혁명 청년을 이렇게 관심하는데 대하여 충심으로 감격하였던 것이다.나는 그 해 12월에 상해에서 윤선(輪船)을 타고 천진에 도착하여 프랑스 조계에 있는 중국여관에서 하룻밤 쉬고 천진 북차참(北車站)에서 기차를 타고 심양에 도착하여 조선여관에서 하룻밤 쉬고 심양에서 단동까지 가는 일본 기차를 타고 단동정거장에서 내려서 도보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서 신의주 의성여관(내가 조용주와 함께 상해로 갈 적에 하룻밤 쉬었던 여관)에서 하룻밤 쉬고서 그 이튿날 아침 차로 서울에 도착한 것이다.당시에 우리가 비밀한 행동을 할 때에는 조선으로부터 중국으로 갈 때에는 서울이나 평양에서 중국까지 가는 차표를 사지 말고 신의주까지 가는 차표를 사가지고 신의주에서 내려서 보행으로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거나 혹은 목선을 타고 단동으로 건너가서 기차를 타는 것이 위험성이 적게 되며 중국에서 조선으로 올 때에는 단동정거장에서 내려서 보행으로 철교를 건너가거나 또는 목선으로 압록강을 건너가서 신의주 정거장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것이 비교적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또 중국 방면에서 남만 철도의 기차를 탈 때에도 중국옷을 입고서 중국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가는 것이 안전하다. 그 때에 남만 철도에는 일본 사람 타는 기차 칸과 중국사람 타는 기차 칸을 분별해 놓고 중국 사람은 일본 사람과 한 자리에 앉지 못하였다.이러한 현상은 세계적으로 다시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일본 군국주의 통치계급이 얼마나 중국 인민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본 경찰의 조사를 면하기 위하여 중국옷을 입고 중국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단동정거장에서 내려서 조선 사람이 열어 논 여관에 가서 조선 옷으로 갈아입고 압록강의 국경선을 안전하게 건넜다.나는 서울 남대문 정거장에서 내려서 전차를 타고 내 아버지의 동창 친구인 김노석(金老石) 노인이 있는 집으로 갔다. 노석 노인은 그의 친척인 김병룡(金秉龍)의 집에 있었다. 노석 노인과 김병룡은 나를 특별히 환영하였다. 나는 거기서 하룻밤을 쉬고서 내 동창인 강석린의 집으로 기사 강태동과 김한의 주소를 알게 되었으며 그들이 있는 주소로 가서 그들을 만났다. 그 때에 이병철과 김태규(金泰奎)는 외교청년단의 사건으로 인하여 대구 일본법정에서 유기징역[徒刑]을 받고 대구 일본감옥에 갇혔으며 애국부인회의 김마리아와 백신영도 유기징역으로 대구감옥에 갇혔던 것이다. 외교청년단과 애국부인회는 자매적(姉妹的) 조직으로서 서로 친밀하게 단결되었던 것이다.그 다음날 나는 김태규의 집에 가서 그의 아버지 김응룡(金應龍)과 어머니 신정균(申貞均)을 만났다. 그래서 그 분들은 나를 자기의 아들이 돌아온 것 같이 반가워하였으며 나를 자기의 집에 있게 한 것이다. 내가 김태규의 집에 있게 됨에 김한도 그 집에 와서 나와 샅이 생활하면서 같이 활동하게 되었다.그 때 조선에서 3·1운동이 발생한 뒤에 일본 정부는 ‘조선에 대하여 통치정책을 개선한다.’고 선포하고 1919년 9월에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면직시키고 사이또(齋藤室)를 조선 총독으로 하면서 ‘조선에서 군도정치(軍刀政治)를 폐지하고 문화정치(文化政治)를 실행하겠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다.그런데 사이또가 서울에 도착하여 남대문 정거장에서 기차로부터 내려 올 때 칠십세의 노인 강우규(姜宇奎) 열사는 중국의 하얼빈으로부터 작탄(炸彈) 한 개를 가지고 서울로 돌아와서 사이또를 향하여 그 작탄을 던졌다. 작탄은 폭발되지 않았으나 사이또를 놀라게 하였으며 정거장은 일시에 전장과 같이 혼란하게 되었던 것이다. 강우규 열사의 이 작탄은 우리 조선 인민의 애국심을 대표하여 일본 정부의 이른바 ‘문화정책’에 대한 태도를 표시한 것이다.사이또가 총독으로 된 뒤에 조선의 모든 학교의 교원들이 군도를 차지 않게 되었으며 조선 사람으로서 조직된 두 가지 신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출판되었다. 3·1운동 이전에는 조선말로 출판하는 신문은 오직 「매일신보(每日申報)」 한 가지 밖에 없었던 것인데 그것은 조선총독부의 기관보(機關報)였다. 사이또를 우두머리로 하는 일본의 식민지 통치자들은 ‘조선 인민에게 언론 자유와 결사 집회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신문과 잡지 등에 대한 검열제도와 결사 집회에 대한 감시제도를 법령으로 발표하고 출판물에 대하여 가혹한 검열을 하였으며 결사 집회에 대하여 엄밀한 감시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기재되는 신문 소식과 각종 문장은 반드시 일본 경찰의 검열을 통과하여야만 발표할 수 있고 학술회의 같은 것을 진행할 때에도 경찰의 허가를 얻어야 되고 경찰은 그것을 하가한 뒤에 반드시 특무(特務)를 보내서 회의에서 발표되는 언론을 감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특무정책이 일본 정부의 소위 ‘언론자유’라는 것이다.당시의 조선 혁명투쟁은 매국주의(賣國主義)에 대한 애국주의(愛國主義)의 투쟁으로 일관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과거의 일체 사회의 역사는 모두 다 계급투쟁의 역사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에 김한은 맑스주의를 선전하고 있었다. 그래서 김한을 중심으로 하는 통일전선(統一戰線)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단결된 중심 역량은 애국주의라고 할 수 있었다. 애국주의를 중심 역량으로 하고 단결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김한, 강태동, 강석린, 김응룡, 신정균(여), 백신영(여, 기독교), 김달현(金達顯, 천도교), 원정룡(元貞龍, 천도교), 김성환(金誠煥), 이재성(李載誠), 홍명희(洪命熹), 이종욱(李鍾旭, 불교), 장락윤(鄭樂潤), 이을규(李乙奎), 이정규(李丁奎), 최숙자(崔淑子, 여), 유인욱(柳寅旭), 유자명 등이다.그 때에 일본에서는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가 공개하고 선전되고 있었다. 산천균(山川均), 계리언(界利彦), 하상조(河上肇) 등은 유명한 공산주의자이고 대삼영(大杉榮)은 유명한 무정부주의자였다. 그들은 새로 출판되는 「개조」 잡지와 「해방」 잡지에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에 대한 문장을 항상 발표해 왔다. 또 「비평」 잡지에는 장곡천여시한(長谷川如是閑)과 대산욱부(大山郁夫)가 서양 각국의 사회주의 발전에 관한 문장을 발표하고 있었다. 위에서 말한 3종의 잡지는 서울에 있는 일본서점에서도 살 수 있어서 우리는 달마다 그 잡지들을 사가지고 사회주의를 연구하였다.그 때에 동경제국대학 부교수 삼호진남(森戶辰男)이 무정부주의 경제 학설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일본 사법기관에서는 삼호진남을 체포하여서 법정을 공개해 놓고 삼호진남을 유기징역으로 판결하였다. 그 때에 무정부주의자 대삼영이 무정부주의에 관한 문장을 잡지에 발표함으로써 여러 번 감옥에 갇혔었다. 그래서 대삼영은 법정을 무정부주의를 선전하는 장소로 하였으며 감옥을 자기의 집으로 하고 옥중에서 「옥중기」를 쓰고 러시아의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크로포트킨[克魯泡特金]의 저작도 번역한 것이다.삼호진남의 사건이 발생한 뒤로부터 나는 무정부주의에 관하여 흥미를 갖게 되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보게 되었다. 크로포트킨의 저작은 철학, 생물학, 경제학, 문학, 예술 등의 광범한 영역에 미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가 쓴 「윤리학(倫理學)」은 인생철학의 내용을 가진 것이고, 「호상부조론(互相扶助論)」은 다아윈의 「진화론(進化論)」에서 주장한바 ‘생존 투쟁이 생물 진화의 원인’이라는데 대하여 그는 ‘호상부조가 생물 진화의 주요 인소(因素)’라고 주장한 것이다.당시 구주 각국의 제국주의자들은 다아윈의 ‘생존경쟁’의 학설을 그들의 침략전쟁을 변호하는데 이용했던 것이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의 ‘호상부조론’은 전쟁을 반대하는 근거로도 된다고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저작 「전원 수공작업소의 공장」은 근대의 농업과 공업의 발전과정에 대한 조사 연구의 결론으로 된 것인데, 일본의 삼호진남이 발표한 논문 「무정부주의 경제 학설의 연구」는 크로포트킨의 이 논문에 대하여 연구한 결과로 된 것이다.크로포트킨이 연구한 결과는 영국의 말사쓰의 「인구론(人口論)」에서 주장한 것과 반대되는 결론으로 된 것이다. 말사쓰의 「인구론」에 의하면 ‘생활재료는 산술급수로 증가되고 인구는 기하급수로 증가됨으로써 생활재료의 증가가 인구의 증가에 떨어지게 되는 것은 자연적 법칙이며 또는 영향적 규율’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크로포트킨의 연구에 의하면 ‘생산 재료의 증가는 인구의 증가보다 빠르게 된다.’는 것이다. 맑스주의에 근거하면 ‘생산력의 발전은 사회발전의 기본조건으로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맑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에서 자산계급이 1백년도 못되는 계급 통치 중에서 창조한 생산력은 과거 일체 세대의 창조한 전부 생산력보다도 더 많고 더 크다‘고 하였다. 그래서 크로포트킨의 경제학에 대한 관점은 맑스주의 경제 학설과 일치한 점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크로포트킨의 저작 「러시아 문학의 현실과 이상」에는 러시아 문학가인 꼬고리(高古里), 푸쓰낀(普斯金), 두우게녜프(屠格揑夫), 톨스토이(托你斯托伊) 등 문학가의 작품을 비판적으로 소개한 것인데 당시에 그들의 작품이 일본말로 번역되어서 나는 두우계녜프의 소설 「처녀지(處女地)」, 「아버지와 아들」, 「새 풍조」와 톨스토이의 소설 「부활」, 「전쟁과 평화」 등을 읽었었다. 그리고 또 크로포트킨의 자서전인 「한 혁명자의 회고」도 읽었었다. 이런 것은 나의 사상 전변과정(轉變過程)을 설명하는 것이다.당시에 임시정부는 상해와 서울 사이에 연락 통신기관을 세웠는데, 이것을 연통제(聯通制)라고 했다. 연통제는 단동시에 있는 미국 사람의 상점 이융양행(怡隆洋行)을 연락거점으로 하고 이유필(李裕弼)이 책임자로 되었으며 서울의 책임자는 이종욱(李鍾旭)이었다.그런데 어느 날 이종욱이 와서 “단동 연락거점에 가서 임시정부에서 보낸 비밀 문건을 가져다 달라”고 하였다. 나는 이종욱과 함께 남대문 기차 정거장으로 갔었다. 그래서 이종욱은 기차 위에서 일하는 승무원 한 사람을 나에게 소개하였다. 그 승무원은 나를 그의 공작실로 데리고 가서 승무원이 입는 복장으로써 나는 기차 승무원으로 변장하였다. 그 이튿날 오전 나는 단동 정거장에서 내려서 기차 승무원과 함께 정거장 부근에 있는 공원으로 가서 변장한 복장을 벗어버리고 기차 승무원과 서로 서울로 돌아갈 시간을 약속하고 단동에 있는 조선여관으로 갔다. 그 날 오후에 나는 이융양행으로 가서 이유필과 만났다. 그래서 상해로부터 보내 온 비밀 문건을 받아 가지고 기차 승무원과 약속한 시간에 단동 정거장으로 가서 나는 서울에서 떠날 때와 같이 기차 승무원으로 변장하고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3·1운동 이전에 조선에서는 공업이 발달되지 못해서 공업노동자의 조직이 없었는데 1921년부터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가 서울에서 성립되었고 「공제(共濟)」 잡지도 발행되었다. 그래서 김한과 나는 「공제」에 글을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 때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도 우리는 글을 발표하였다.기독교청년회에서 이따금 열리는 군중대회에 우리도 참가하였었다. 안확이 「민족개조론」을 발표할 때에 나도 김한과 함께 그 회의에 참가했었다. 나는 안확의 강연을 듣고 돌아와서 그의 「민족개조론」을 반대하는 글을 써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었다. 내가 쓴 글의 내용은 대개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자기의 민족을 개조하자는 주장은 역사적으로 본다면 옛적으로부터 볼 수도 없는 것이며, 과학적으로 본다면 불가능 한 것이다. 우리 조선 민족은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명한 민족이며 외국 사람들도 조선은 예의의 나라라고 칭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비록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되었으나 나라가 망한 뒤 10년도 못되는 때에 전국 인민이 일어서서 국가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하여 투쟁하고 있으며 멀지 않은 장래에 우리는 반드시 승리를 이룩할 것이다.”안확은 김한과도 서로 친근하였다. 그래서 그는 내가 발표한 글을 본 뒤에 김한과 내가 있는 주소로 왔었다. 그래서 김한은 나를 안확에게 소개해 주면서 “민족개조에 대한 문제를 충분하게 토론하자”고 하였었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토론한 결과 우리의 의견은 일치하게 된 것이다. 안확의 「민족개조론」은 실제는 민족해방을 주장한 것이었다. 내가 발표한 「민족개조론」을 반대하는 의견은 착오로 된 것이다. 실제 인류 발전의 역사는 인류 개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엥겔스의 논단에 의하면 “노동은 인류를 창조하였다”고 말하였다. 인류가 창조된 뒤로부터 지금까지 1백 7십만 년이나 되는 역사 과정에서 부단한 ‘개조’를 거쳐서 현재와 같은 문명한 인류와 문명한 사회를 이룩한 것이다.△ 주해(註解)최근에 중국 운남성(云南省) 원모현(元謀縣)에서 1백 7십만 년전의 인류 화석이 발견되었다. 이것을 ‘원모사람’이라고 한다.

    3 유자명수기

    1923년 겨울에 나는 고광인과 함께 천진에 와서 영어를 배웠었다. 그 때에 고광인은 영어전문학교에서 영어를 배우고 김상훈과 김병옥은 미국 여사가 열어 놓은 영어학습반에서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그 학습반에서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천진은 중국 수도의 대문이며 주요한 상업도시의 하나로서, 1900년에 영국·러시아·일본·프랑스·독일·미국·이탈리아·호주 등 8국 연합 군대가 천진을 점령한 뒤에 영국·러시아·일본·독일·이탈리아 등 6국 조계가 있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때에 독일이 패전한 결과 독일 조계는 중국 정부가 회수하였고 러시아 조계는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승리한 뒤에 소련 자신이 천진의 조계를 취소했다. 그래서 프랑스·일본·영국·이탈리아의 4개국 조계지만 있었다.나는 고광인, 김상훈, 김병옥 등과 같이 프랑스 조계에 있었다. 그밖에도 김정(金政), 남정각(南廷珏) 등 10여인이 프랑스 조계에 있었고 천진 남개대학(南開大學)에도 조선 유학생이 있었으며 일본 조계에는 상업에 종사하는 조선 사람이 있었다.내가 천진에 가기 전에 천진에 있는 조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조직이 없었고 정치적 회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천진에 간 뒤에 김정과 상의한 결과 조선인거류민단(朝鮮人居留民團)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김정을 민단장으로 선거하고 내가 이사회의 주석이 되었다. 민단이 조직된 뒤에 3·1운동을 기념하는 회의도 열었으며 정치운동에 관한 회의도 열어서 민단의 단결과 애국사상을 촉진시키게 되었었다.그 때에 안창호 선생이 상해부터 동북으로 갈 때에 천진을 거치게 될 적에 우리는 그를 환영하는 대회를 열어 놓고 안 선생을 청하여 연설을 들었다. 안 선생은 유명한 애국지사이며 또한 탁월한 웅변가였다. 그래서 안 선생의 연설은 군중을 특별하게 감동시켰었다.1924년 봄에 유인욱(柳寅旭)이 서울로부터 천진으로 와서 나와 같이 있게 되었다. 그는 조국이 망하게 될 때에 미국 하와이에 가서 있다가 3·1운동 후에 상해에 와서 독립운동에 참가하게 되었었다. 나는 상해에서 유인욱과 친하게 되었고, 서울에서도 한 집에서 같이 살았었다. 그와 나는 성이 같고 고향도 같아서 우리는 특별히 친근하게 된 것이다.유인욱이 나와 같이 있게 된 뒤에 고광인과 김상훈은 그에게서 영어를 배웠고, 조선 사람이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형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김상훈은 미국에 유학할 준비를 하기 위하여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김상훈이 귀국한 뒤에 남정각이 나 있는 데로 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서울로부터 온 사람이 나를 만나 보려고 한다.”고 해서 나는 그와 같이 중화여관(中和旅館)으로 갔다. 내가 만나 본 사람은 김약산(金若山)과 양근호(梁根浩)였다. 김약산은 의열단(義烈團)의 책임자이고 양근호와 남정각은 의열단의 단원이었다.양근호가 서울에서 김한을 만났을 때에 김한은 양근호에게 나를 소개해 주고 나의 주소도 그에게 알려주었던 것이다. 양근호는 상해로 가서 김약산과 상의한 결과 또 다시 김한과 연락할 필요가 있게 되어서 두 사람이 함께 천진으로 와서 나를 만나보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를 남정각과 같이 서울로 가서 김한에게 연락하여 달라고 하였던 것이다.그래서 나는 남정각과 같이 천진동참(天津東站)에서 기차를 타고 심양을 거쳐서 단동 정거장에서 내렸다. 그 때에 단동에는 남정각의 친구인 양씨(梁氏)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에서 내린 뒤에 양씨의 집으로 가서 하룻밤을 쉰 뒤에 남정각은 먼저 서울로 가고 나 혼자 양씨 집에서 머물러서 남정각의 소식을 기다리게 되었다.남정각은 단동을 떠날 때에 10일 안으로 단동으로 돌아오기로 약속했었다. 만일 그가 10일 안에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면 내가 또 서울로 가서 김한과 연락하기로 된 것이다. 남정각은 약속한대로 10일 전에 단동으로 돌아오게 되어 우리는 단동에서 기차를 타고 천진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나는 그 때부터 의열단에 참가하게 되었다.그 때에 김상훈은 자기의 집에 돌아가서 그의 형이 김상훈에게 김상훈과 유인욱과 나 3인이 미국으로 갈 수 있는 여비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그래서 김상훈과 유인욱은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면서 나에게 같이 가자고 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의열단에 참가하였기 때문에 미국으로 갈 수 없다고 하였다.그런 뒤에 유인욱과 김상훈은 미국으로 가는 여행권을 얻기 위하여 홍콩으로 가고 나는 남정각과 함께 상해로 가서 의열단 동지들과 공동생활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의열단에서 통신과 문자 선전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4 유자명수기

    1924년 5월에 중국 혁명의 선구자인 손중산은 중국공산당과 연합하여 황포군관학교를 건립하고 장개석을 교장으로 하고 주은래 동지가 정치부 주임으로 되어서 혁명 군사 간부를 배양하게 되었다.그 때에 200명의 조선 청년이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우게 되었다. 그래서 광동은 중국 혁명의 발원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 혁명 청년의 교양지로도 된 것이다. 1926년 7월 1일에 중국 국민정부는 ‘북벌선언(北伐宣言)’을 발표했다. 북벌의 대상은 오패부(吳佩孚), 손전방(孫傳芳), 장작림(張作林) 등 3패 북방 군벌이었다. 오패부는 호남·호북을 근거지로 하고 10여만 군대가 있었고, 손전방은 강소·안휘·절강·복건·강서 등 5성을 근거지로 하고 10여만의 군대가 있었으며, 장작림은 동북 3성과 북경·천진과 진포선 철도의 북부를 근거지로 하고 군대 35만이 있었다.1926년 5월에 공산당원과 공청단원(共靑團員)을 골간으로 하는 협정독립단(叶挺獨立團)이 북벌 선봉이 되어 호남전선으로 갔고, 7월 9일에는 10만의 국민혁명군이 정식으로 북벌을 개시했다. 그 때에 황포군관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조선 청년들도 대부분 북벌전쟁에 참가했다. 북벌군은 도처에서 인민 군중의 환영과 협조를 받아서 신속하게 장사를 점령하고 호북으로 쳐들어갔으며, 10월에는 무한 삼진을 점령하였다. 북벌군은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호남·호북·복건·절강·강서·안휘 등 각 성을 점령하게 되어 혁명의 세력은 주강(珠江) 유역으로부터 장강(長江) 유역까지 발전되었다. 북벌군의 성세는 전 중국을 진동시켰으며 영·미·일 등 제국주의자들을 놀라게 하였다.1927년 1월에 중국 국민정부는 광주로부터 무한으로 옮겨갔다. 그리하여 혁명의 중심이 주강유역으로부터 장강유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 해 1월 3일에 무한시의 인민이 북벌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는 대회를 열고 시위대 행렬이 영국 조계 근방을 지나갈 때에 영국 해군이 총칼로 수십 명의 군중을 살상하였다. 1월 4일에 국민정부는 영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출하였으며 공산당의 영도 하에서 군중대회를 열고 군중의 시위 대열이 중국 조계로 들어가서 조계를 회수하였다. 구강(丘岡)의 영국 조계도 같은 방법으로 회수하였다.호남과 호복에서 전쟁이 치열하게 진행될 때에 장개석은 북벌군 총사령으로서 자기의 군대 제1사 교도대를 거느리고 남창전선에서 손 전방 군대와 싸워서 거의 전멸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제2군 협정부대와 제6군 정잠부대가 손전방의 주력부대를 소멸하고 장개석을 구원해냈다. 그 때에 조선 청년 강파(姜波)는 제2군 포병의 연장(聯長)으로 기관총을 가지고 손전방의 1사 병력을 맞아 싸우다가 남창 정가교(丁家橋)에서 희생되었다. 제6군 포병 연장 이검운(李劍云)은 구강포대에서 손전방 부대를 소멸하고 포병영의 영장(營長)으로 승급하였다.북벌군은 구강을 점령한 뒤에 남경으로 쳐내려가서 1927년 3월 24일에 남경을 점령하였는데 영국·미국·일본 등 제국주의자들은 해군 군함을 남경 항구에 보내서 남경성을 포격하여 중국의 군대와 인민 2,000여명을 살상하였다. 이번의 ‘남경사건’은 장개석과 밀절한 관계가 있던 것이다.1926년 겨울에 장개석은 대계도(戴季陶)를 일본으로 보내어 일본 정부에 대하여 그의 반혁명 정변을 원조해 달라고 요구하였으며, 1927년 2월 4일에는 미국의 대표가 남창으로 가서 장개석과 회담하였다. 이런 사실에 근거하면 장개석의 반혁명 음모 계획은 황포군관학교 교장이 될 때부터 준비했던 것이다.1927년 4월 12일에 장개석은 반혁명 ‘청당운동(淸黨運動)’을 개시하였다. 나는 그 때 김약산과 함께 광주에서 국민당 군대가 공산당원들과 노동자들을 학살하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광주경비사령부(廣州警備司令部)는 북벌군 총사령 장개석의 ‘청당’에 관한 명령을 공개하고 공산당원들을 잡아다가 당장에 총살한 사실을 공포하였다. 당시 광주의 큰 거리에는 “공산당을 타도하자”는 표어가 도처에 나붙어 있었다. 공산당원 소초녀(肖楚女)는 황포군관학교에서 공작하고 있었는데 4월 14일에 경비사령부는 소초녀를 잡아다가 당일에 총살하였다.이렇게 청천의 붉은 햇빛 아래에서 돌연히 어두운 밤으로 변하는 것을 나는 말할 수 없는 감정을 안고 글 한편을 썼다. 그 글에서 나는 “어제 날의 동지가 오늘 날은 원수로 변하고 어제 날의 혁명자가 오늘 날은 반혁명자로 되었다”라고 쓰고 국세가 돌변하게 된 경과를 써서 서울의 조선일보사로 부쳐 보냈다, 「조선일보」에는 「적색의 비애」라는 제목으로 내 글을 발표했었다.이 해 5월 4일에 나는 김약산과 함께 광주에서 윤선을 타고 상해로 떠났다. 그 이튿날 배가 산두(汕頭) 부근에 이르렀을 때 해도(海盜)들이 윤선으로 뛰어 올라와 권총으로 선장을 강박하여 배를 해변으로 끌고 갔다. 배가 해변에 다다르자 거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도들이 윤선으로 올라와 금전과 귀중한 물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때 중국 사람과 같은 선창에 들어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선창 문이 열리면서 해도 한 놈이 뛰어 들어와 권총을 손에 들고 “꼼짝 마라”라고 소리쳤다. 그 때 내 곁에 누워 있던 중국사람 하나가 놀라서 일어나 앉았다. 문턱에 서 있던 해도 놈이 사람이 일어나는 것을 보고 총을 쏘았다. 그 탄환이 나의 왼쪽다리 무릎 밑에 맞았다. 그 때에 솜이불을 덮고 누워 있던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왼손을 일불 속에 넣어 상처를 만져보니 피가 흘렀다.해도들은 금전과 물품을 다 약탈한 뒤에 호각을 불고 배에서 내려 해변으로 돌아갔다. 김약산은 다른 선창에 탔었는데 해도들이 물러간 뒤에 내가 부상한 것을 알고 달려왔다. 그리고 그 배에는 광주에서 혁명운동에 참가했다가 무한으로 가는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해도들이 물러간 뒤에 내가 있는 선실로 모여와 나를 위문하였다. 그들은 내가 조선 사람인 것을 알고 선장을 찾아 가서 이렇게 말했다. “이 사람은 조선 청년으로서 자기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다가 우리나라에서 해도를 만나서 부상당하였습니다. 하문(厦門)에 병원이 있으니 이 사람을 병원으로 보내서 치료를 해주어야 하겠습니다.”그래서 우리가 탄 배가 하문에 도착하였을 때에 선장은 중국 청년들과 김약산과 함께 나를 고랑서(鼓浪嶼)에 있는 미국 교회가 설립한 구세병원(救世病院)으로 갔다. 그 병원의 외과 의사는 나의 상처를 진찰한 뒤에 2주일 안으로 완치하겠으니 치료비 30원을 내라고 했다. 선장은 치료비 30원을 의사에게 주었고 김약산은 나를 의사에게 부탁하고 선장과 중국 청년들을 따라서 상해로 갔다.나는 선장이 물고 간 반달 동안 치료비 30원 덕분에 구세병원 단독 병실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구세병원은 의료설비가 간단하고 의사들의 의술도 높지 못하였다. 의사는 탄환을 뽑아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상처가 아무는 약을 발랐다. 남자 간호부가 날마다 한 번씩 와서 상처의 피고름을 짜냈다. 그러나 15일이 지나도록 상처는 아물지 않고 피고름이 계속 흘러 나왔다. 나는 보다 못해 간호부에게 이렇게 말했다. “15일이 넘었는데도 상처는 낫지 않고 치료비는 다 썼으니 어떻게 할 예산이요?”그 이튿날 간호부는 나를 공동 병실로 옮기게 했다. 공동 병실로 옮긴 뒤에 간호부가 와서 상처의 피고름을 짜낼 때에 상처에서 솜덩이가 나왔다. 간호부가 그 솜덩이를 집개로 뽑아내니 탄환이 솜에 싸여서 나왔다. 내가 맞았을 때 솜이불을 덮고 누워 있어서 탄환이 이불을 뚫고 들어가면서 솜에 싸여서 다리로 들어갔던 모양이다. 이 탄환이 나오자 3일 만에 상처는 완전히 낫게 되었다. 당시에 하문대학(厦門大學)에 조선 유학생 하나가 있었고 하문시가에 장사를 하는 조선 사람이 한집 있었다. 그들은 상해로 가는 배표를 사가지고 나를 찾아와 배위까지 바라다 주었다.나는 안전하게 상해로 가서 이동녕 선생의 거처로 찾아갔다. 당시에 김약산은 이미 상해를 거쳐 무한으로 가고 없었다. 나는 상해에서 한 달 동안 지난 뒤에 6월 중순에 무한으로 갔다. 당시에 무한에 있는 조선민족혁명당 동지는 김약산·이검운·권준·안동만·최원·최승년·양금 등이었다. 이검운은 제6군 포병 영장, 권준은 부영장이고, 안동만은 부관이었다. 당시 무한의 정치적 공기는 몹시 긴장하였다. 7월 15일에 왕정위(汪精衛)는 ‘국민정부 주석’의 신분으로 공산당과 분열하는 회의[分共會議]를 열어 놓고 공산당원을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잡아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리고 경비사령부와 공안국을 총동원하여 공산당원 뿐 아니라 일반 청년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함부로 도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북벌전쟁에 참가했던 조선 청년들도 제2군 협정부대(叶挺部隊)를 따라서 남창에 집중하여 8월 1일에 남창기의(南昌起義)에 참가했다.어느 날 저녁 김약산이 무한을 떠나 구강을 거쳐서 남창으로 갈 때 나도 강변 부두로 가서 그를 전송하였다. 북벌전쟁이 승리적으로 진행될 때에 무한에서 동방피압박연합회가 성립되어 중국·인도·조선의 대표가 이 연합회에 참가했는데 조선 대표로 김규식, 이검운과 내가 참가하고, 인도 대표로는 샤두신[沙渡辛], 간타신[甘大辛], 비샨신[備善辛] 등이 참가하고, 중국의 대표로는 왕척진(王滌塵). 휴광록(畦光錄), 노관일(盧貫一) 등이 참가하였다.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인도 대표들은 한국 영국 조계를 회수하기 전에는 영국 조계에서 순포(巡捕)를 직업으로 하고 있던 사람들로서 영국 조계를 회수하자 실업자가 되었었다. 북벌시기의 국민정부는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경비로 매월 2,000원씩 원조해 주었으므로 이 돈을 인도 대표들의 생활비로 썼다. 장개석과 왕정위가 혁명을 배반하고 북벌정책이 실패하게 되자 1927년 8월 1일 새벽에 ‘남창기의’를 일으켰다. 주은래(周恩來)·주덕(朱德)·하룡(賀龍)·협정(叶挺)·유백승(劉伯承) 등은 북벌군 3만 여명을 거느리고 강서 남창에서 적들을 향하여 진공을 발동했다. 다섯 시간의 격전을 거쳐 1만 여명의 적군을 전멸시켰다. ‘남창기의’가 승리한 후 중국공산당을 핵심으로 하는 혁명위원회를 성립하고 혁명 정강을 발표했다. 그래서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첫 혁명부대가 건립되었다. 김약산, 성준용 등 조선혁명자가 ‘남창기의’에 참가했다. 그래서 1927년 12월 11일에 있은 ‘광주기의’에도 최용건(崔鏞健)·김규광(金奎光)·박건웅(朴建雄)·장지락(張志樂) 등 200명의 조선 사람들이 참가했었다. ‘남창기의’와 ‘광주지의’가 발생되고 있을 때 무한에서는 제6군 포병영 영장 이검운을 제6군 사령부에서 잡아다가 무창감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제6군 포병영은 부영장 권준이 부대를 거느리고 호남으로 갔다. 그 때에 나는 포병영장 이검운이 있는 숙사에서 있으면서 음식과 의복을 가지고 이검운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가서 그를 만나보았다.1928년 2월에 상해 강만(江灣)에 있던 김빈(金斌)이가 호남에 있는 중국 친구를 찾아가는 길에 나를 찾아 왔었다. 김빈은 강만에 있는 중국사람 조의사(曹醫師)의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다. 조의사 부부는 김빈을 자기의 아들처럼 사랑했고, 김빈도 그들을 자기의 부모와 같이 섬겨왔었다. 김빈은 상해에 있을 때 의열단에 참가한 사람이다.1928년 2월 27일에 나는 김빈과 같이 한구로 건너가서 안동만·최원·최승년을 만나보았다. 3·1 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하여 우리는 거기에서 하룻밤을 쉬고 2월 28일에 아침식사를 방금 끝냈는데 방문이 펄쩍 열리면서 무한공안국 경찰 두 사람과 일본영사관 특무 두 놈이 방안으로 들어왔다. 일본 특무는 우리에게 한사람씩 국적과 성명을 조사했다. 일본 특무가 나에게 일본말로 “너는 어디 사람인가?”라고 물었으나, 나는 “당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소”라고 대답했다. 그 뒤에 중국 경찰원이 “당신은 어디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복건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그리고 우리가 무한 공안국에 잡혀 갔을 때에 이지선(李智善)·이지선의 부인 손성례(孫聖禮)·한창렬(韓昌烈)·이관해(李觀海)·송욱동(宋旭東) 등 5인도 공안국으로 잡혀 왔었다. 그래서 우리 10인은 공안국 법정에서 법관의 심문을 받았다. 일본 특무 두 명도 법정에 있었다. 법관의 심문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 특무는 우리를 보고 가장 친절한 듯 한 태도를 보이면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만일 중국 사람이라고 한다면 중국에서는 지금 공산당을 다 죽이니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요.” 특무 놈은 또 나를 보고 “그래도 당신은 중국 사람이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때 나는 중국말로 “뭐라고요? 난 당신의 말을 통 알아들을 수 없군요.”라고 했다.당시에 무한에 있는 일본 영사관에서는 무한정부가 공산당원을 모조리 잡아 죽이는 기회를 이용해서 우리가 공산당원이니 잡아달라고 무한공안국에 요구하였던 것이다. 일본 영사관 특무는 공안국에 우리를 당장에 그네들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으나 우리가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를 내놓지 못했다. 그래서 중국 측에서는 우리가 공산당원이라는 증거를 내놓으면 우리를 넘겨주겠다고 대답한 것이다. 공안국에서는 우리를 간수소에 가두었다.일본 특무가 돌아간 뒤에 간수소장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당신들을 즉시로 넘겨달라고 요구하였으나 우리 공안국장이 그 요구를 거절하였소. 당신들은 안심하고 오늘 밤을 여기에서 쉬시오. 내일 경비사령부로 넘기겠으니 그렇게 되면 일본 영사관에서도 경비사령부에 향하여 당신들을 넘겨달라고 요구하지 못할 것이요”. 공안국의 간수소는 변소를 고쳐서 감방으로 만들었는데 네 개의 침상에는 이미 네 사람이 누워 있었으므로 우리는 벽돌을 깔아놓은 방바닥 위에 앉아서 밤을 새우게 되었다. 그 때에 먼저 갇혀있던 중국 사람이 우리에게 “간수에게 돈을 주면 담요를 빌려주고 술도 사다 준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는 간수를 불러서 돈을 주고 담요 하나를 세내고 술 한 병을 사다가 담요를 방바닥에 깔아 놓고 그 위에 둘러 앉아 술을 먹었다. 간수가 우리에게 돈을 받고 빌려 주는 담요는 이 간수소에 갇혀 있다가 총살을 당한 혁명자들이 남겨 놓은 것인데 간수들이 가져다가 하루 밤에 60전씩 받고 죄수들에게 빌려주었다. 무한공안국 대문 위에는 손중산이 친필로 쓴 ‘천하위공(天下爲公)’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으나 공공연하게 이 현판 아래에서 무수한 혁명자들을 상해하였던 것이다. 우리는 무한공안국 간수소에서 하루 밤을 앉아서 새우고 그 이튿날인 3월 1일에 경비사령부로 넘겨졌다. 경비사령부에서 심문을 박을 때 법관은 나에게 “당신은 어디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라고 대답했다. 법관은 “당신은 공안국에서 심문할 때 중국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그 때에 일본 특무가 공안국 법정에서 법관과 같이 우리를 심문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라고 대답했다.심문을 마친 후 법관은 “우리 경비사령부는 당신들을 보호하고 우대하겠다.”라고 하며 우리를 경비사령부 간수소로 보냈다. 우리가 간수소로 가니 간수소 소장 한련화(韓聯和)는 우리에게 “당신들을 우대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큰 방 한간을 우리에게 내 주어서 우리 열 사람은 한 방 안에 같이 있게 되었다.한련화는 남경 금릉대학(金陵大學)을 졸업하고 북벌혁명군 제7군 리종인 부대에 참가하여 무한에까지 왔을 때 왕정위가 무한에서 ‘청당운동’을 시작하였는데 리종인은 무한경비사령부의 사령으로 되고 한련화는 경비사령부 간수소의 소장으로 된 것이다. 간수소의 부관 하나가 나에게 한련화의 경력을 이야기 해 주었다. 간수소의 직원들은 우리를 특별히 우대하였다.한창렬의 부인은 의사였는데 한구에서 박애의원(博愛醫院)을 꾸리고 있었는데 우리는 그를 김 의사라고 불렀다. 손성례가 앓았을 때에 간수소장이 김 의사를 청해 다가 병을 치료해 주었으며 소장의 부인이 앓았을 때에도 김 의사를 청해 다가 치료해 주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박애의원을 통신처로 삼고 각 처에 있는 친구들과 연락하게 되고 조선의 신문도 받아보게 되었다.한편 일본 영사관에서는 우리를 넘겨받기 위하여 갖은 음모를 다하였다. 예를 들어 일본 영사관은 일본통신사를 통하여 3월 1일 무한에서 조선공산당원을 체포했다는 신문을 위조하여 각처에 있는 중국 신문사로 보냈는데, 「호남일보」가 이 소식을 발표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영사관 인원은 이 신문을 가지고 무한경비사령부에 찾아가서 이 기사를 증거로 내밀며 우리가 공산당원이라고 하였다. 경비사령부에서는 “그 소식은 일본통신사가 위조한 것이다”라고 하면서 일본 영사관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그 뿐만 아니라 일본 영사관의 특무는 각 방면으로 비밀 연락선을 벌려놓고 우리의 동정을 감시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의 인도 회원인 나란신(那蘭辛)은 한구 일본 조계에서 살면서 일본 영사관의 비밀 정탐이 되어 조선 사람의 활동을 전문으로 정찰하고 있었다. 내가 체포되기 전에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에서 그는 나를 만나 가장 친절한 체하며 중국 요리 집으로 나를 청하여 음식을 나눈 뒤에 나를 숙소까지 데려다 주고 나의 숙소를 알아가지고는 일본 영사관에 밀고하였다. 그리하여 영사관의 특무는 무한공안국의 인원과 같이 나의 숙소로 찾아와서 우리를 체포하였던 것이다.그 뿐만 아니라 일본 조계에 있는 조선 사람들 중에도 비밀 정탐이 있었고 무한공안국 인원 중에도 일본 정탐이 섞여 있었다. 그리하여 일본 영사관에서는 우리가 경비사령부 간수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정형을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경비사령부 간수소로부터 석방된 뒤에야 비로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나의 일생에 영원히 잊지 못할 일은 이 6개월 동안에 300명의 공산당원들이 비장하게 희생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본 것이다. 그들은 모두 나이 젊고 뜻있는 혁명 청년인데 무엇 때문에 그렇듯 무참하게 살해당하여야만 하였을까? 일본 제국주의자들에 의하여 망국노가 된 우리는 중국의 혁명 청년들이 인민을 위하여, 정의를 위하여, 진리를 위하여 희생되는 것을 보고 누구보다 더 심각한 교육을 받았다.공산당원들은 간수소로부터 나와 두 팔을 결박당하고 형장으로 걸어가며 “장개석을 타도하자!”, “공산당 만세!”를 높이 부르면서 한구 후성마로(后城馬路)에 가서 총살되었다. 간수소에서 그 총소리를 듣는 우리는 의분에 치를 떨었다.또 한 가지 나를 비통하게 한 것은 나의 가장 경애하는 신채호 선생이 이지영(李志永), 임병문(林炳文)과 같이 일본 경찰에게 잡혀서 대련 일본 감옥에 갇혀 있다는 소식이 조선일보에 발표된 것이다. 나는 1924년에 대만 사람인 범본량(范本樑)을 알게 되었으며 그들과 나는 무정부주의의 동지로 되어 서로 친밀하게 지냈었다. 임병문은 그 때 북평 우정국에서 일하고 있었고 전문외(前門外) 천주회관(泉州會館)에 기숙하고 있었다. 그 때 생활이 곤란하여 임병문과의 관계로 나도 천주회관에서 한동안 같이 있었기 때문에 단재 선생과 임병문도 서로 친하게 되었던 것이다.이지영은 그 때 서울에서 같이 북평으로 온 청년이었는데 나는 북평에서 그를 만나보았고 나를 통하여 신 선생과 임병문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천진에서 활동하다가 천진 일본 조계에 있는 일본 영사관 경찰에게 잡혀서 대련 일본 감옥으로 압송되었던 것이다.그 후 우리는 박건웅(朴建雄)이 우리를 석방해 달라는 상해임시정부의 공함을 가지고 무한 경비사령부에 와서 교섭한 결과 8월 28일에 간수소로부터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관해는 간수소에서 병에 걸려 박애병원에서 치료하다가 세상을 뜨고 이지선은 특별한 사고로 인하여 우리와 함께 석방되지 못하였다.일본 영사관은 정탐들의 보고를 듣고 우리가 석방된 것을 그날로 알았다. 우리가 석방된 그 이튿날 일본 조계에서 살고 있는 조선 사람 하나가 우리를 찾아와서 위문의 뜻을 표시하고 “당신들에게 곤란이 있으면 내가 도와주겠노라”고 했다. 최원과 최승년은 그에게 두 사람이 상해로 갈 여비를 부조해 달라고 했다.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두 사람이 상해로 갈 여비를 가지고 와서 상해로 떠나는 윤선의 이름과 떠나는 시간을 알아가지고 돌아갔다. 그리고 최원과 최승년이 한구를 떠날 때 그 사람은 부두까지 나가 그 두 사람을 바래다주었다.그런데 그 조선 사람은 일본 영사관의 정탐이었다. 그가 가져온 두 사람의 여비는 일본 영사관에서 내 준 것이었다. 한구 일본 영사관은 상해 일본 영사관에 전보를 쳐서 최원과 최승년이 상해 황포탄에 내리자마자 체포하게 하였다. 우리는 6개월 동안의 철창생활에서 손실도 많이 보았으며 경험과 교훈도 적지 않았다. 우리는 자기의 눈으로 300명의 공산당원이 총살되는 광경을 직접 보았다. 그들이 두 손을 등 뒤로 묶이고도 고개를 높이 들고 큰 거리로 태연히 걸어 나가면서 “공산당 만세!”, “장개석을 타도하자!”, “국민당 반동패를 타도하자!”라는 혁명 구호를 높이 부를 때 거리 양쪽에 늘어선 군중들이 크나큰 교육을 받았을 뿐 아니라 우리도 심각한 사상교육을 받았다. 다음으로 우리는 국민당 반동패의 통치 아래에서의 구 중국의 어두운 면을 보게 되었다. 예를 들어 공안국 간수소나 경비사령부 간수소를 물론하고 공산당원과 혁명 청년들이 총살당하게 되면 그들이 가지고 온 이불과 담요 같은 물건은 간수들의 사유재산으로 되었다. 그들은 이런 담요를 간수소에 갇힌 사람들에게 하룻밤에 60전씩 세를 받고 빌려주거나 혹은 시장에 내다가 팔아 버리는 것이다.그리고 또 공산당원이나 혁명 청년들이 총살당한 뒤 그 부근에 있는 시민들이 그들의 의복을 벗겨가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과 중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특무망을 외국 사람에게까지 뻗히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일본 영사관에서는 우리 열 사람을 체포하기 위하여 인도 사람, 조선 사람, 중국 사람을 망라하여 국제적 특무조직을 벌여놓고 통신사 기자와 신문기자까지 동원하여 날마다 우리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었던 것이다.최원과 최승년이 상해에서 체포된 소식을 알게 된 우리는 행동할 때면 각별히 주의하였는데 나는 안동만과 같이 무창의 중국 여관에 있다가 남경으로 가게 되고 김빈과 송욱동은 호남으로 갔다.

    5 유자명수기

    나는 무창에서 추석을 쇠고 안동만과 같이 남경으로 갔다. 그 때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는 우리가 무한경비사령부 간수소에 갇혀 있는 기간 남경으로 옮겨 갔었다. 그래서 나는 안동만과 같이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찾아갔다.그 때 중국 대표 시광록, 왕척진과 인도 대표 사두신, 간다신, 삐선신 등이 연합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나와 안동만도 그들과 함께 연합회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당시에 권준(權俊)과 이춘암(李春岩)은 헌병사령부에서 일하고 있었고 연병호(延秉浩)는 고루여관(鼓樓旅館)에 있었다.당시에 남경은 중국의 수도로서 상해와 가까워서 조선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되었으며 중국의 명사들도 많았다. 그리하여 나는 박남파(朴南坡), 조소앙(趙素昻), 이관용(李寬容), 이성용(李星容), 주요한(朱耀翰) 등을 만나 보았으며 광호생 등 중국의 명사들도 만나보았다.이 시기는 나의 생의 갈림길이었다. 나는 생계를 위하여 여기저기 다니며 이일 저일 다 하였으며 점차 교육계로 발을 들여 놓기 시작하였다. 1929년에 조소앙과 이관용은 상해로부터 남경으로 와서 나를 찾았다. 그들은 중국 여관에 있으면서 중국 국민정부와 국민당 중앙 당부를 방문했었다.이관용은 독일에 가서 유학할 때 맑스주의를 배웠고 귀국한 후 조선일보의 신문 기자로 일하면서 1927년 조선에서 성립된 신간회에 참가했었다. 그는 나에게 신간회가 성립된 경과와 목표, 임무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의 해석에 의하면 ‘신간’은 고목에서 생기는 새 가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고목은 유구한 역사를 가진 조선 민족을 가리키며, ‘신간’은 조선 민족의 신생역량(新生力量)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당시에 서울에 있는 선진적 지식인들은 모두 다 신간회에 참가했던 것이다.그리고 이관용은 맑스-레닌주의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깊었다. 그는 맑스-레닌주의를 조선말로 ‘메리즘(MELISM)’이라고 하자고 주장하였다. M은 맑스를 대표하고, E는 엥겔스를 대표하고, L은 레닌을 대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의 이름의 첫 음을 따서 조선말로 ‘메리즘’이라고 하면 조선 인민에게 혁명사상을 선전하는데 유리하다고 하였다.이관용은 신문 기자의 신분으로 중국의 정치 중심인 남경을 방문한 것인데 당시에 남경 국민당 정부는 아직 안정되지 못했고 국민당 내부에서는 개조파가 나와 광동에서 장개석을 반대하는 운동을 일으켰으며 광서파 이종인(李宗仁)과 백숭희(白崇禧)는 장개석을 반대하는 전쟁을 일으켰었다.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정강산(井岡山)을 근거지로 하고 강서성과 복건성에서 혁명전쟁을 승리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 외국 신문 기자의 한 사람인 이관용은 이렇게 복잡한 국면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나에게 북벌전쟁의 경과와 조선 청년이 전쟁에 참가했던 정형과 중국 각 당, 각 파의 관계에 대해 글 한편을 써 달라고 했다. 나는 그의 요구에 의하여 내가 본 대로 글 한편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그는 내가 쓴 그을 보고 나서 “이러한 신문 자료는 얻기 어려운 것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관용은 조선으로 돌아가 원산에 가서 해수욕을 하다가 불행하게 바닷물에 빠져 죽었다는 소식을 나는 조선 신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유명한 교육가인 도지행(陶知行)은 남경으로부터 멀지 않은 농촌인 효장(曉莊)에 농촌사범학교를 세워 놓고 농촌 청년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학교를 효장농촌사범학교라고 불렀다. 나는 1929년 여름에 안동만과 함께 효장농촌사범학교를 참관하였다. 도지행이 채용한 교육 방법은 다음과 같다.학교의 문을 열어 놓고 농민 군중들이 마음대로 들어와서 배우게 하였다. 농사철에는 농민들과 같이 농사를 하고 농사가 끝난 뒤에는 공부를 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교원도 학생과 함께 노동을 하였으며 저급 학년 학생들은 고급 학년 학생에게 배우게 하였다.이 학교에서는 교학과 노동을 결합시키고 이론과 실천을 결합시키는 방법을 채용하였다. 도지행은 학생에게 여섯 가지를 해방할 것을 주장했다. 즉, 학생의 두뇌, 두 손, 눈, 입, 공간, 시간의 여석 가지로부터 해방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해석하면 (제1)은 학생이 자기의 머리로 생각하게 하자는 것이다. (제2)는 학생이 두 손을 자기의 생각대로 활동하게 하는 것이다. (제3)은 학생이 자기의 두 눈으로 마음대로 관찰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4)는 학생이 자기의 입으로 생각하는 대로 말하도록 하자는 것이다. (제5)는 학생이 자기의 마음대로 도처로 돌아다니게 하자는 것이다. (제6)은 학생에게 자기 마음대로 활동할 시간을 주자는 것이다.다시 말하면 주입식 교학방법을 쓰지 말고 계발식 교학방법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나는 효장농촌사범학교를 참관하고 글 한편을 써서 조선일보에 발표하였다. 그 후 조선의 신문 기자 주요한이 서울로부터 남경으로 와서 내가 쓴 글을 보고 내가 남경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1919년에 상해에서 이광수와 함께 신한독립신문을 꾸릴 때 나는 그와 서로 알게 되었던 것이다.1928년 겨울이었다. 하루는 박남파가 연합회로 찾아와서 나를 보고 손중산의 저작인 손문학설(孫文學說)을 조선말로 번역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손문학설을 번역하면서 손중산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알게 되었다. 삼민주의는 민족주의·민권주의·민생주의의 3대 주의를 포괄한 것인데 민족주의는 이민족의 침략을 반대하고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하는 것이고, 민권주의는 봉건주의적 독재정치를 반대하고 인민의 평등 권리를 보장하는 현대적 국가를 이룩하자는 것이며, 민생주의는 정치와 경제 방면에서 전체 인민이 다 평등한 권리를 가진 국가 사회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삼민주의는 손중산의 시대에 중국의 실지 조건을 기초로 하고 계속적으로 투쟁해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국가 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다.내가 손문학설의 번역을 마치자 박남파는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선전부장인 협초창(叶楚傖)에게 나를 소개하는 편지를 써서 주었다. 나는 그 편지와 손문학설의 번역 원고를 가지고 국민당 중앙당부로 가서 협초창을 만나보고 손문학설 번역 원고를 그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는 번역료 150원을 주었다. 나는 그 중에서 50원을 안동만에게 주었다. 안동만은 그 돈을 여비로 삼아 한구로 갔다.나는 남경에서 원소선(袁紹先), 협정숙(叶正叔), 장경추(章警秋), 진광국(陳光國) 등 중국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원소선은 그의 아우 원정의(袁正義)와 함께 중앙통신사(中央通訊社)를 경영하였고, 협정숙은 을사구락부(乙巳俱樂部)의 주임이었으며 진광국은 화패루서점(花牌樓書店)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무정부주의자 전화민(田和民)은 남경빈아원(南京貧兒院)에서 일본말을 가르치고 있었다. 남경빈아원에서는 황흥(黃興)의 부인 황종한(黃宗漢)이 원장으로 있었고 채악(蔡鄂)의 아들 채건구(蔡乾九)가 교무주임으로 있었다. 빈아원은 신해혁명 시기에 희생된 혁명자들의 자녀들을 교양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빈아원과 을사구락부는 다 같이 신해혁명을 기념하는 조직이었으므로 서로 연락이 있었다. 나는 협정숙과 친하게 되어서 을사구락부에서 전화민과 한동안 같이 지내면서 황종한과 채건구를 만나 보았다.1928년 겨울, 원소선은 상해에 있는 친구와 합작해서 신해혁명 시기에 희생된 한복염(韓复炎) 열사를 기념하는 농장을 세우고 나에게 그 농장에 가서 농업생산을 지도해 달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1929년 봄에 그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 농장은 남경 중산문 밖 효릉위(孝陵圍) 남쪽에 있었다.농장의 면적은 1헥타르 15무이고 초가 3간이 있었다. 15무 가운데에서 5무에는 복숭아나무를 심어서 수확하게 되었고, 10무는 한전(旱田)으로 수박을 심기로 했다. 남경은 유명한 수박 산지로서 농민들은 수박을 심는 기술이 뛰어났다. 그래서 나는 당지에서 경험이 있는 농민 3명을 청하여 수박을 심어 그 해 수박 풍년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들로부터 수박을 심는 기술을 배웠다.그 해 내가 농장에 갔을 때 상해 입달학원(立達學園)에서 그의 아우 원지이(袁志伊)에게 부탁하여 입달학원 농장으로부터 꿀벌 2통을 사오게 되었다. 입달학원의 창시자인 광호생(匡互生)은 남경으로 오는 길에 강만(江灣)으로부터 꿀벌 두 통을 가지고 남경 정거장에 내려서 인력거를 불러 타고 중산문 밖에까지 왔었다.그는 꿀벌 치는 방법을 나에게 가르쳐 주었으며 또 조선 사람으로서 3칸 초옥에서 농민들과 같이 생활하면서 농사를 하고 있는 것을 진정으로 동정하였다. 그 때 농장에서 일하는 곽병경(郭秉慶)은 원소선과 함께 입달학원에서 일할 때 광선생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광선생은 진실로 수수한 농민 차림새를 하고 다녔으니 위대한 사상을 지니고 있었다.

    6 유자명수기

    1940년 3월에 나는 아내 칙충(則忠)과 함께 다섯 살 나는 아들애 소명과 낳은 지 100일 밖에 안 되는 딸애를 데리고 중경을 떠나 복건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중경에서 살고 있던 100여명의 조선 사람들은 중국 정부에서 한 달에 1천 원씩 도와주는 경비를 가지고 살아갔기 때문에 생활이 곤란했으며 물가도 날이 갈수록 높아갔기 때문에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갔다. 항일전쟁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다.당시 심중구는 복건성 정부 고문으로 있었고 진범여와 속동(粟同)도 복건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속동은 나에게 복건으로 와서 같이 일하기를 바란다는 편지를 보내왔다. 그 때 마침 복건군구 사장(師長) 이양영(李良榮)이 공무로 전용차를 타고 중경으로 왔었다.이양영 사장의 아내 이애련(李愛蓮)은 내가 천주 여명중학에 있을 때의 학생이었는데 그도 중경 오극강(吳克剛)의 숙사에 와 있었으므로 나는 그를 통해 연락하여 이사장이 타고 온 자동차를 타고 복건으로 가게 되었다.중경과 복건 사이에는 직접 통하는 도로가 없었고 사천, 귀주, 호남 사이에는 험산준령이 가로 막혀 있어 우리는 험한 산길을 달려야 했다. 첫째 날 우리는 중경을 떠나 사천과 귀주 사이에 가로 놓인 대루산령(大婁山岺) 아흔 두 구비와 귀주의 오강(烏江)을 밤중에 지나서 동재(桐梓)에서 하룻밤을 쉬고, 이튿날은 누산관(婁山關)을 넘어 준의를 거쳐 호남 지강(芷江)에서 하룻밤 쉬고, 셋째 날은 검양(黔陽)의 안강(安江)과 설봉산을 거쳐 동구에서 하룻밤을 쉬고 그 이튿날은 소양에 도착하여 하루를 쉬었다.소양에는 입달학원에서 광호생과 함께 일하던 소포초(蘇抱樵)와 종도룡(鍾濤龍)이 같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소양 북쪽에다 자생농장(自生農場)을 꾸리고 감귤재배 시험을 하고 있었다. 종도룡은 내가 남경 동류농장에 있을 때에 나에게 부탁해서 일본으로부터 5종의 감귤 묘목을 사들여다가 자생농장에 심었었는데 감귤 생장 정황이 매우 좋았다.4년 전 상해전쟁이 시작될 때 나의 아내 칙충은 어린애들을 데리고 종도룡의 집에 와서 오랫동안 종도룡의 부인과 친자매처럼 친밀하게 지냈던 탓으로 그들은 나를 친절히 맞아 주었다. 그 이튿날 나는 소양을 떠나서 형양을 거쳐 내양(來陽)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차릉(茶陵)과 강서 연화(蓮花)를 거쳐서 복건 광택(光澤)에서 하룻밤 자고 그 이튿날 남평(南平)을 거쳐서 사현(沙縣)에 도착하여 심중구 고문을 찾아가 그의 숙사에서 하룻밤 쉬게 되었다.당시 복건성 간부훈련반이 사현에 있었는데 심고문의 부인 호완여(胡琬如) 선생이 훈련반의 주임으로 있었기에 심고문도 호주임과 함께 거기에 가 있었다. 이밖에 입달학원 농촌교육과 졸업생인 이덕홍(李德洪)도 그 때 사현에 있는 복건의 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으며 무한경비사령부의 간수소장으로 있던 한련화도 간부 훈련반에서 일하고 있었다.오래간만에 만난 우리는 사현에서 유쾌한 하룻밤을 지내고 그 이튿날 오전에 복건성의 전시 성소재지인 영안에 도착했다. 나는 복건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시험장 원예계의 주임으로 들어갔다. 농업시험장은 영안시 부근 서양판(西洋坂)에 있었다. 이 시험장에는 농예학부와 원예학부가 있었는데 농예학부의 주임은 왕중언(王仲彦)이었고 시험장의 책임자는 곽씨였다.원예학부에서는 속동과 이육화가 나와 함께 일하였다. 내가 농업시험장에 가서 일하게 되면서부터 농업개진처 처장 송증거(宋增渠)는 나의 사업을 크게 지지하였는데 원예학부를 원예시험장으로 확대시키고 농업시험장은 대호(大湖)지구로 옮겨다가 새로 세운 복건농학원과 병립시켰다.나는 원예시험장의 책임자로 되어 시험장의 설비를 보충하고 시험항목을 늘렸다. 우리는 수전을 과수원으로 만들고 온실도 세웠다. 복건은 아열대지구로서 해안선이 길기에 원예식물이 아주 풍부하였다. 그러나 원예시험장이 건립되기 전에는 원예식물에 대하여 조사 연구를 한 적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원예식물을 조사 연구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삼았다.장주(漳州)는 감귤류의 유명한 우량 품종인 병감(栟柑), 문단유(文旦柚) 등의 원산지였고 바나나, 파인애플, 용안(龙眼), 여지(荔枝) 등 열대 과수가 많이 생산되었다. 그리고 장주의 특산인 수선(水仙)은 국제적으로 유명하여 매년 외국으로 수출했는데 외국의 원예가들도 수선 재배기술에 흥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속동을 장주로 보내어 수선 재배를 전문으로 하는 농민들로부터 전문기술을 배워 오게 하였으며 그것을 「복건 농업」 잡지에 발표했었다.또 덕화(德化)의 산차화(山茶花)의 품종인 십팔학사(十八學士), 육각쟁춘(六角爭春), 녹목단(綠牧丹) 등은 일본으로 수출되었는데 일본의 원예가들은 이것을 동백나무의 특이한 품종이라고 하였다. 우리 복건원예시험장에서는 장주로부터 병감, 애기문단, 바나나, 파인애플 품종을 가져오고 덕화의 동백꽃을 가져다 재배시험을 하였다.당시 외국의 원예학자들은 “중국은 원예의 조국이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농업과학은 2천 년 전 서한시대의 농학자인 범승지(范勝之)의 저작 「범승지서(范勝之書)」로부터 최실(崔實)의 「사민월령(四民月令)」(기원 2세기), 왕정(王楨)의 「농서(農書)」(1313년), 가사협(賈思勰)의 「제민요술(齊民要術)」(기원 6세기),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1638년), 왕상진(王象晋)의 「군방보(群芳譜)」(1640년) 등 고대 농업 저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였다. 나는 이런 고대 농업 저서와 원예 저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복건에서 생활하는 기간 나에게 큰 타격을 준 것은 1939년 가을 중경에서 세 살 난 딸애가 토사병(吐瀉病)으로 인하여 죽은 뒤를 이어 1940년 여름에 또 다섯 살 된 아들애 소명이가 악성학질로 죽은 것이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이 가져다 준 피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항일전쟁 시기 실로 무수한 아동들이 일제 놈들에게 학살당했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도처에 병원이 파괴당하고 의약품도 결핍했기 때문에 보통 질병도 치료하기가 곤란하게 되었던 것이다.그리고 또 입달학원 농촌교육과에서 나와 함께 일하던 진범여는 폐병에 걸려 나의 숙사에서 한동안 치료하다가 무이산(武夷山) 요양원에 가서 휴양했는데 1941년 여름에 그도 세상을 떠났다.1941년 여름에 복주를 점령하고 있던 일본 군대는 고전(古田)을 진공하는 동시에 비행기로 영안에 폭탄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원예시험장에서도 방공호를 파고 적기가 올 때에는 방공호로 피신하였다. 그런데 고전을 보위하고 있던 이양영(李良榮) 사장이 일본 군대의 진공에 호된 반박을 가하자 적들은 참패를 당하고 복주로 물러갔다. 승리의 소식은 복건성 전체 인민을 크게 고무하였다.당시에 복주가 일본 침략군에게 점령되어 복건 전선의 중심이 민강(閔江) 이북에 있었다. 그래서 복건의 전시성회(戰時省會)는 영안으로 옮겨왔고 군사지휘부는 남평에 있었으므로 복건성 부주석 진의(陳儀)는 남평에서 군사를 지휘하고 있었으며 군구참모장 진유신(陳裕新)도 남평에 있었다. 진 참모장의 아들 진학지(陳學知)는 장사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복건원예시험장에서 나와 함께 일하고 있었다. 진 참모장은 호남 사람으로서 광호생 선생이 호남 제1사범학교와 상해 입달학원에서 사업하던 역사도 잘 알고 있었으며 심중구 고문과도 친한 사이였으므로 그는 내가 조선 사람으로서 심중구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을 알고 아들 진학지에게 나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말하였다.나는 진학지의 말을 듣고 1942년 여름 이양영 사장이 고전에서 일제 침략군을 격패시킨 후 진학지와 함께 남평으로 가서 진유신 참모장을 만나 보았다. 진유신 참모장은 나를 데리고 성정부 주석의 사무실로 가서 진의 주석도 만나 보았다.진의 주석은 젊었을 때 일본에 가서 군사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으므로 복건성 정부 주석인 동시에 군대도 지휘하고 있었다. 나는 남평에서 하룻밤을 자고 진학지와 함께 고전으로 가서 이양영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 이튿날 아침 나는 진학지와 함께 목선을 타고 민강으로 내려가서 수구진(水口鎭)에서 내려 육로로 보행하여 당일 오후에 고전에 도달하여 이사장의 숙사로 찾아가서 그를 만나 보았다. 이양영과 그의 아내 이애련은 복건 천주사람으로서 이양영은 광주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한 후 상해 강만 노동대학에서 공부할 때에 심중구와 이우관(李又觀)의 학생이었고, 이애련은 내가 천주 여명중학에 있을 때에 나의 학생이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감정이 깊었다. 더욱이 이번에 이양영은 흉악한 적들의 야만적 침공에 호된 반격을 가하여 많은 적군을 소멸하고 빛나는 승리를 이룩함으로써 복건의 정세가 안정되었으므로 그는 신기가 좋았다.그래서 이사장 부부는 나를 열정적으로 맞아 주었으며 전쟁의 경과도 자세하게 이야기해주고 조국을 위하여 결사적으로 투쟁할 결심도 말했다. 그들은 자기의 숙사에서 나와 진학지를 관대하고 거기에서 자게 했다. 고전은 1929년 12월 중국공산당이 고전회의(古田會議)를 연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우리는 고전에서 명승고적과 거리를 구경하면서 이틀 동안 쉰 후에 영안으로 돌아왔다.1941년 가을 복건성 정부 주석 진의는 중화민국 중앙 정부 행정원 비서장으로 임명되어 중경으로 가게 되었고 심 고문도 복건을 떠나게 되었는데, 심 고문은 복건을 떠나기 전에 한동안 내가 있는 숙사에서 우리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얼마 후 복건성 정부 신임 조석인 유건서(劉建緖)와 비서장 정성령(程星齡)이 영안에 도착했다. 정성령은 심중구를 찾아 내가 있는 숙사로 와서 교대사업에 관하여 토의했었다. 그래서 나도 정 비서장을 알게 되었다.

    7 유자명수기

    1946년 3월에 나는 강락신촌 일을 원계업(袁繼業)에게 넘기고 가족을 데리고 복주를 거쳐서 대만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에 복건성 정부는 복주로 돌아왔고 수륙교통도 회복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대만에서 온 배를 타고 기륭항(基隆港)을 거쳐 대북시(臺北市)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로 심중구 고문의 숙사로 가서 심 고문을 만나 보았다. 심 고문의 부인 호완여(胡琬如)도 심 고문과 한 숙사에 있으면서 대북여학교(臺北女學校)의 교장으로 근무하였다.입달학원 농촌교육과를 졸업한 양춘천(楊春天)은 대북여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으며 속동과 이육화는 과실 가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나는 전원(專員)의 명의로 장관 공서 농림처 기술실에서 일하게 되었다.대만은 일제가 50년을 통치하는 기간 농업·임업·제당공업·장노공업·관개공사 등 각 방면에서 상당한 성취를 거두었었다. 당시의 통계에 의하면 사탕의 산량은 매년 150만 톤으로서 세계 제2위였고 장노(樟노)의 산량은 세계 제1위였으며 삼림의 목재는 계획적으로 개발하면 100년 동안을 채벌하여도 삼림의 용재량(容材量)이 감소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장관 공서에서는 일본 기술인원 20여인을 남겨 놓고 일본 통치시대의 기술재료를 조사하게 되었는데, 내가 그 조사대의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만의 삼림자원에 대한 기술재료는 원래 대만척식회사(臺灣拓殖會社)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일본 농업기술 인원들과 함께 반년 동안이나 일제가 남겨 놓은 역사 재료를 정리했다. 그 대략적인 내용을 기록하면 다음과 같다. 대만척식회사는 일제가 대만의 토지를 약탈하고 대만의 인민을 착취하기 위하여 일본 자본가들이 조직해 놓은 연합단체이다. 예를 들어 말하면 조선에서의 조선척식회사와 동삼성에서의 남만철도회사 등이 모두 다 일본 자본가들이 집체적 기업 조직으로 된 것이다. 대만척식회사는 대만에서 20만 헥타르의 토지를 점유하고 있었고 그 토지에서 매년 150만 톤의 사탕을 생산하였던 것이다. 대만의 삼림 면적은 전 성 면적의 2분의 1을 차지하여 중국 각 성 삼림 면적의 비례가 제일 많은 곳이었다. 통계에 의하면 대만의 삼림 면적은 196만 헥타르이고 목재축적량은 1억 8천 입방미터에 달하였다. 대만산구의 최고봉은 해발 3천 미터 이상에 달하여 입체적으로 열대, 온대, 한대가 다 있었으며, 식물의 종류는 4천여 종에 달하여 세계 제1위였다. 그리하여 대만은 아시아의 천연식물원이라 불렀다. 대만의 삼림은 원시림이었는데 그 중에서 수령이 가장 오랜 수종은 한대성 침엽수 냉삼(冷杉)이었는데 대만대학 임학부 표본실에는 수령이 4천년 이상에 달하는 냉삼 표본이 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귀중한 수종은 몇 천 미터 이상의 고산에 있어서 채벌하기 곤란하여 ‘천연식물원’으로 되었으며 또 이러한 삼림이 없으면 태풍지대인 대만에서는 농업도 경영할 수 없고 사람이 살아갈 수도 없었다.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대만은 보도(寶島)라고 하였으며 화란의 침략자는 대만을 ‘미려한 섬’이라고 했다. 그러나 만일 대만에서 이러한 삼림이 없었다면 보도나 미려한 섬으로 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삼림은 대만의 생명선인 것이다. 일제는 양식이 부족해서 해마다 조선으로부터 200만 톤의 쌀을 징수해 갔으며 대만에서도 일부 양식을 징수했다. 당시 대만의 재래종 벼는 선도(秈稻)로서 일본인의 습관에 맞지 않았기에 선도를 경도(稉稻)로 개량하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대만대학 교수 기영길(畿永吉) 박사는 대만농업시험소의 소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기영길은 선도와 경도를 서로 교잡해 가지고 새 품종인 대만 벼를 육성했으며, 이 품종을 재배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지방 품종도 생겼던 것이다. 기영길도 유용 농업 기술 인원의 한명으로서 나는 그와 함께 한자리에 앉아서 그의 대만 물벼 육종의 경험을 들었다. 일제가 침략전쟁에서 실패하기 전에 일본의 양식은 조선 쌀과 대만 쌀로 유지하고 있었으며 일본의 백탕도 대만에서 공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의 농업 기술 인원들은 전쟁 후의 일본 양식문제에 대하여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백탕은 없어도 그렇게 관계가 없으나 쌀이 없어서는 인민이 살아갈 수 없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 전후 농업생산 중에서 양식생산이 중심문제로 되었던 것이다. 일본 점령시대에 대만 고산 위에 있는 천연저수지인 일월담(日月潭)에 발전소를 건립하는 동시에 주요한 하류인 담수하(淡水河), 탁수계(濁水溪)에 저수지를 수축해서 20여만 헥타르의 경지가 증가되었다. 이런 경지는 대만척식회사의 소유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장관 공서에서는 그것을 접수해서 공유지로 하였다. 이 20만 헥타르의 공유지를 합리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당시의 중요한 문제의 하나로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심중구 고문의 제의에 의하여 합작농장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는 농림처 기술실의 중요한 임무로 확정되어 내가 책임지고 합작농작에 관한 문제를 연구하게 되었다. 참고자료에 의하면 농업생산을 합작의 형식으로 경영한 실례 들면 덴마크의 농업합작, 이탈리아의 농업합작과 합작농장, 체코슬로바키아의 합작농장, 소련의 집체농장이 있었다. 나는 각 종 참고자료를 연구한 기초위에서 실지 조건에 맞게 「합작농장 실시방안」을 기초해 가지고 농림처 조련방(趙蓮芳) 국장의 동의를 얻게 되었다. 이 「합작농장 실시방안」에 의하면 1941년에 200개의 합작농장을 설립하고 그 후 5년 동안에 500개의 합작농장을 설립하며, 500개의 합작농장을 설립한 후에는 각 현에서 ‘합작농장연합회’를 조직하는 동시에 각 현 합작농장연합회에서 대표를 뽑아서 ‘전성합작농장연합회’를 조직하기로 되어 있었다. ‘합작농장연합회’를 기초로 하고 각종 농산품의 가공과 기타 농촌사업도 합작의 역량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나는 「농업건설과 합작농장의 사명」이라는 제목으로 글 한편을 써서 「대만일보」 1947년 2월 24일~25일자에 연재하였다. 그리고 또 「합작농장과 농업합작의 여러 가지 형식」이라는 제목으로 글 한편을 써서 내가 편집하던 월간 「대만농림」에 발표했다. 합작농장을 실지로 조직하고 관리하는 것은 지정국의 임무로 되었으므로 지정국의 심시가(沈時可) 국장은 지정국 간부회의를 열어 놓고 내가 기초한 방안을 토론하였다. 나도 간부회의에 참가해서 합작농장 조직 방안을 설명해 주었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지정국 아래에다 ‘합작농장 관리소’를 설립하고 내가 그 관리소의 주임을 겸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합작농장 관리소에는 부주임과 간부도 있었다. 이때로부터 합작농장 관리소 인원들은 각 지방으로 내려가서 합작농장을 조직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2·28사건이 발생하여 합작농장의 조직 공작은 잠시 정지하게 되었다. 내가 알고 있는 2·28사건의 진상은 다음과 같다. 대만에서는 일제시대부터 전매국을 설치하고 담배, 술, 장뇌의 수입, 수출을 독점적으로 경영하였다. 장관 공서에서 일본이 투항한 후 전매국을 접수하여 업무를 계속해 실시하였는데 당시 대만에서는 담배와 술을 자력으로 생산하지 못하였으므로 상해로부터 담배와 술을 사다가 대만시장에 공급하였다. 상해의 상인들은 이런 기회를 타서 상해로부터 담배를 사가지고 대만에 와서 세금을 바치지 않고 대만시장에서 팔았던 것이다.. 그래서 전매국 간부는 항상 이 대북시장(臺北市場)을 시찰하고 있었다. 1947년 2월 28일에 늙은 여성 한 명이 세금을 바치지 않고 담배를 팔고 있었다. 그래서 그 전매국 간부는 늙은 여성의 담배를 몰수했던 것이다. 담배를 몰수당한 늙은 여성은 소리치며 달려들어 전매국 간부에게 항거하였다. 그 때 주변에 있던 상인들이 전매국 간부를 에워싸고 몰수당한 담배를 빼앗아서 그 여성에게 돌려주었으며 전매국을 취소하라고 들고 일어났다. . 그 이튿날 대북시의 상인들은 떼를 지어 전매국을 에워싸고 “전매국을 취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것이 바로 2·28사건의 도화선이다. 후대의 역사가는 2·28사건을 혁명적 의거라고 하였으며 반동정치의 결과라 하였으나 그것은 당시의 실제 정형에 맞지 않는 결론이라고 할 수 있다. 2·28사건에는 농민과 공인은 참가하지 않았고 상인을 중심으로 하는 시위운동에 지나지 않았다. 50년 동안이나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오던 대만에서 친일패도 많이 있었으며 일본 경찰서의 특무인원도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2·28운동은 상인을 중심으로 하고 친일파들도 참가했던 것이다.. 이전의 복건성 정부 비서장 정성령은 일본이 투항한 후 행정원장 장개석의 명령에 의하여 중경에 구금되어 있다가 행정원 비서장이었던 진의가 대만의 행정장관으로 되면서 정성령을 데리고 대만으로 와서 그를 대만경무처에 잠시 가두어 두었다. 그래서 나는 대만경무처 간수소로 가서 정성령 비서장을 만나보고 그를 위로하였다. 사건이 있은 후에 정성령은 석방되었으며 진의 장관이 절강성 정부 주석으로 되어 대만을 떠나게 될 때 그도 대만을 떠나서 호남으로 돌아갔다.. 진의가 대만을 떠난 후 장관 공서는 대만성 정부로 고쳐놓고 진성(陳誠)이 성 정부 주석으로 되었으며 농림처를 농림청으로 고치고 대만 사람인 서경중(徐慶重)이 농림청의 청장으로 되었다.. ① 그 때 나는 농림청 기술실에서 잡지 「대만농림(臺灣農林)」을 편집하면서 「대만 농업 기계화의 시험 및 현실 제 문제」, 「농업 기계화 문제를 재차 논함」, 「대만의 향화(香花) 식물」, 「기술 생산, 농업 건설」, 「합작농장과 농업 합작의 여러 가지 형식」 등의 논문을 써서 발표하였으며 대만대학 교수 왕궐명(王厥明)·탕문통(湯文通), 남경 금릉대학 교수 호창식(胡昌植) 등과 더불어 서로 학술문제를 교류하였다.. ② 농림청 기술실 주임이었던 주강호(朱江戶)가 대만을 떠난 후에는 내가 기술실 주임으로 되었으며 또 대만농사시험소 부소장으로 되었다. 그 때 대만농사시험소 소장은 탕문통이었는데 그는 대만대학의 교수를 겸직하고 벼 재배의 방법을 가르치고 있었다. 대만대학과 대만농사시험소는 같은 지방에 있어서 농업교학과 시험연구를 서러 결합시켜 진행하였다.. ③ 당시 유명한 생물학자 주세(朱洗)는 대만대학에서 생물학을 교수하고 있었으며 광호생 선생의 딸 광달인(匡達人)은 주세의 조교로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늘 연계를 가졌다. 그 후 주세와 광달인은 나보다 먼저 대만을 떠나 상해로 가서 중국과학원 계통인 상해실험생물학연구소를 세우고 생물학을 연구하게 되었다.. ④ 1949년 4월 23일 중국인민해방군은 국민당 반동과 장개석의 통치 중심이었던 남경을 해방하고 5월 27일에는 중국의 가장 큰 도시인 상해를 점령하였다. 5월 17일 해방군이 무한, 한양과 한구를 해방하고 계속하여 호남으로 진격할 때 국민당 호남성 주석 정점(程潛)과 제1병단 사령 진명인(陳明仁)은 정성령, 하명강, 이군구 등의 건의와 주선에 의하여 8월 4일에는 장개석의 통치를 반대하는 기의를 선포함으로써 호남을 평화적으로 해방시켰다.. ⑤ 당시에 국민당 절강성 주석인 진의는 절강성을 평화적으로 해방하기 위하여 상해전구 사령 탕은백(湯恩伯)에게 서로 협력하여 상해와 절강을 평화적으로 해방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탕은백은 진의의 비밀계획을 장개석에게 고발하였다. 장개석은 위대(衛隊)를 거느리고 절강성으로 가서 진의를 체포해 위대에 가두었다가 자기가 대만으로 철수할 때에 진의를 데리고 대북으로 가서 그를 총살했다.. ⑥ 1949년 10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었다. 법을 제정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은 진정한 인민의 국가로서 중국인민협상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다. 나라의 수도를 북경으로 결정하고 중국인민협상회의는 중국의 모든 민주당파(인민단체), 인민해방군, 각 지구 각 민족, 해외 공민과 기타 애국 민주인사의 대표들을 포괄해서 전국 인민의 의지를 대표하며 전국 인민의 공전의 대단결을 표현하는 것이다.. ⑦ 중국인민협상회는 인민의 수령 모택동 주석 영도 아래 신민주주의의 원칙에 의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조직법을 제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 인민정부조직법을 제정하였다.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를 북경으로 결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국기를 오성홍기로 결정하였으며 의용대진행곡을 국가로 하였다. 그리고 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를 선거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거하였다. 중국의 역사는 이로부터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방은 동양 각국의 역사적 사변으로 되었다.. ⑧ 대륙이 해방되자 장개석은 대만으로 도망쳐가 날마다 전쟁연습을 하였으며 미 제국주의의 지도하에 남조선 대통령 이승만과 함께 경상남도 마산에 있는 유명한 군항 진해만에서 비밀회의를 열었다. 이 비밀회의에서는 미국 군대와 남조선 군대가 연합작전을 하여 북조선을 점령한 후 장개석 군대가 조선을 통과하여 압록강을 건너 동북 3성과 북경, 천진으로 진공할 음모를 꾸몄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이른바 ‘제2 전장’이라는 것이다.. ⑨ 이런 소식은 대만의 신문에는 보도되지 않았으나 그 때 장개석의 국민당 사령부에서 군사특무로 있던 조선 사람 양검(楊儉)이 나에게 알려주었다. 양검이 황포군관학교를 다닐 때 나는 그와 가깝게 지냈으므로 대만에 가서도 그는 늘 나의 숙사로 와서 조선과 중국의 정국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러한 소식도 알려주었다.. ⑩ 1949년 남조선정부는 대북에 영사관을 설립하고 민석린(閔石麟)을 영사로 파견하였다. 1919년 상해한국임시정부시대로부터 1945년 한국임시정부와 중경에서 활동하던 조선 혁명 각 당파가 남조선으로 돌아갈 때까지의 기간에 나는 민석린과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그리하여 대만성 정부 주석 진성이 대만 주재 조선 영사를 환영하는 회의에 나도 참석하였으며 민석린은 그의 부인과 나의 숙사까지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⑪ 당시 중국에 주재하던 신석우(申錫雨)는 남경이 중국인민해방군에게 해방될 때 광주에 가 있다가 국민당 정부가 대북으로 철수할 때 함께 대북으로 왔으며 상해에 주재하던 한국 영사 신국권(申國權)도 중국인민해방군이 상해를 점령할 때 대북으로 왔었다. 그 밖에도 상해에 오랫동안 살던 정화암과 허열추 등이 대북으로 와 있었다.. ⑫ 1950년 1월 1일에 남조선대사 신석우가 영사관에서 새해를 경축하는 모임을 가지고 대만에 있는 조선 공민들을 초청하였다. 그 때 조선 어민 수십 호가 기륭항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들의 대표도 이 모임에 참가하였으며 정화암과 나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⑬ 이 모임에서 신석우는 지금 대만의 형세가 아주 긴급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영국 대사관과 미국 대사관에서는 자기네 교민들에게 빨리 대만을 떠나 귀국하라고 통지하였다는 소식을 말하였다. 그는 조선 공민들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대만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 ⑭ 정화암과 나는 그 자리에서 영사관을 향하여 귀국 신청을 하였다. 기륭에 거주하는 어민들은 수십 년 이전에 조선을 떠나 대만에 와서 어업을 하다 보니 조선에는 돌아갈 집이 없었으므로 한 사람도 귀국 신청을 하지 않았다.. ⑮ 대만에서 조선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 노선이 있는데 한 노선은 기륭에서 배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조선으로 가는 것이고 다른 한 노선은 기륭에서 배를 타고 향항(홍콩)을 거쳐 조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나는 정화암과 함께 두 번째 노선을 취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향항을 경과하려면 대만 주재 영국 영사관의 허가를 얻어야 하였다. 나는 남조선 영사관에서 비준한 귀국 여행증을 가지고 영국 영사관으로 가서 향항을 경과하는 허가를 받았다.. ⑯ 국민당 정부가 대만으로 온 후에 대북시의 호구를 재등기하고 오가연보제(五家聯保制)를 실행하였는데 그 때 나는 원적을 남경이라고 썼었다. 내가 대만경무처로 가서 남조선 영사관에서 내준 귀국여행증을 보이고 대만을 떠나는 수속을 해달라고 하였을 때 경무처에서는 “당신은 법적으로 중국 공민이니 중국 국적을 취소하지 않으면 대만을 떠날 수 없다”고 하면서 국민당 정부와 외교부에 가서 중국 국적을 취소해야 한다고 하였다.. ⑰ 나는 중국 국적을 취소하기 위하여 국민당 정부의 내정부와 외교부로 여러 번 다니면서 교섭한 결과 반년 만에 중국 국적을 취소하는 수속을 마쳤다. . ⑱ 우리는 1950년 6월 14일에 기륭으로부터 향항으로 떠나는 배표를 샀다. 당시 대만과 대륙사이의 교통은 완전히 차단되었으며 일반 중국 사람으로서는 대만을 떠나겠다는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가 대만을 떠나는 수속을 하는데 반년이나 걸린 것도 대만경무처에서 고의로 내가 대만을 떠나는 것을 방해하였기 때문이었다.. ⑲ 당시 대만의 경제생활은 극히 곤란하였다. 나는 그 때 2백 원의 월급을 받았는데 1950년에 와서는 5개월분 월급을 가지고도 한 달 동안 먹을 식량을 살 수 없는 형편이었다. 친구의 도움이 없었다면 우리 네 식구는 살아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 입달학원 농촌교육과에서 공부를 한 학생인 양조휘(梁祖輝)가 대북에서 남광공사(南光公司)를 꾸리고 옷감을 팔고 있었는데 그는 달마다 우리에게 생활비를 도와주고 옷감도 많이 가져다주어 나는 생활상에서 큰 곤란을 받지 않았다. 양조휘는 내가 대만을 떠나게 될 때에도 여비로 미국 돈 1천 달러를 도와주었다. 만일 양조휘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대만을 떠날 수도 없었을 것이다. . 내가 대만을 떠날 때 농림청 청장 서경중은 나를 환송하는 연회를 차렸으며 대만에서 일하고 있던 입달학원 시기의 침구들인 속동, 속보국, 이육화, 왕학명, 영소심 등은 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8 유자명수기

    1950년 6월 24일에 나는 측충과 함께 열 살 난 딸애 득로와 여덟 살 난 아들 전휘를 데리고 정화암의 가족들과 같이 기륭항에서 영국 윤선을 타고 홍콩으로 떠났다. 배위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25일 오후 5시에 홍콩에 도착했다. 우리는 홍콩 큰 거리에 있는 동방여관에 들었다.그날 저녁 여관의 접대원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조선여권을 보고 우리에게 조선에서 전쟁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나는 그 이튿날 아침에 큰 거리로 나가서 신문을 사보았다. 그 때 홍콩의 신문은 정치 경향에 따라 세 개 진영으로 갈려 있었는데 「대공보(大公報)」와 「문회보(文匯報)」는 중국공산당을 옹호하였고 「화교일보(華僑日報)」는 중국국민당을 옹호하고 「향항만보(香港晩報)」는 중립이었다. 조선전쟁에 대한 이들의 태도는 분명하게 달랐으므로 나는 날마다 「대공보」를 사보았다.당시의 조선전쟁은 미제국주의자가 직접 일으킨 침략전쟁이며 또 국제 전쟁이었다. 일본제국주의가 무조건으로 투항한 뒤에 미국은 조선과 대만을 자기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모든 음모를 다하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미국은 군대를 출동하여 조선의 남반부를 점령하고 40년 동안 미국에 망명하였던 이승만을 남조선 대통령으로 데려다 앉히고 36년 동안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있던 조선은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하여 해방된 후 1년도 못되어 조선전쟁을 일으켰으며 조선을 통하여 대만에 있는 장개석 군대를 중국으로 진입시켜 새로 창건된 중화인민공화국을 파괴하려고 날뛰었던 것이다.당시에 측충의 둘째 언니 유상지(劉尙志)는 광주 애군반점(愛群飯店)의 전화원이었다. 그래서 측충은 우리가 있는 여관에서 광주 애군반점으로 전화를 걸어 그의 언니에게 우리가 대만으로부터 홍콩으로 왔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유상지는 그 이튿날 홍콩으로 와서 우리를 만나보고 측충과 함께 득로와 전휘를 데리고 광주로 갔으며 나는 구룡(九龍)에 있는 진광화학공장(眞光化學工場)에 기숙하고 있었다. 진광화학공장의 주임 조곡초(趙谷初)는 내가 상해 입달학원에 있을 때 입달학원의 회계주임이었으며 내가 복건원예시험장에서 일할 때 그는 복건성 간부훈련반의 회계주임이었고 내가 대만에 있을 때 그는 대만 전매국 회계주임으로 있었다. 2·28사건이 발생한 후 그는 대만을 떠나 홍콩으로 와서 구룡에서 진광화학공장을 경영하고 있었다.조곡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후 자기의 고향인 호남으로 돌아가서 이전의 친구들을 만나 보았는데 정성령은 호남성 부성장으로 있었고 하명강은 농업청 청장으로 있었으며 이군구는 재정청 청장으로 있었다.나는 정성령 부성장에게 편지를 써서 내가 대만을 떠나서 홍콩으로 왔다고 알렸다. 8월 초에 정성령 부성장은 호남대학 농학원 교수로 와달라는 초빙서와 친필 편지를 조곡초에게 부쳐왔었다.정성령 부성장의 편지를 받은 나는 광주에 있는 측충에게 이런 사연을 알려주었다. 측충은 그의 언니 유상지와 함께 구룡으로 와서 함께 홍콩에서 배를 타고 광주로 갔다. 그 때 정화암은 남조선으로 갈 수 없어서 구룡에 있는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나는 광주로 가서 애군반점에서 한 달 동안 있을 때 진홍우(陳洪友), 협비영(叶非英), 유수인(柳樹人) 등 옛날의 무정부주의자 동지들을 만나보았다. 그들은 항일전쟁의 간고한 시련을 겪고 국내 혁명투쟁의 심각한 교훈을 성취하여 사상 상에서 근본적 변화를 가져왔었다.그들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하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 분투할 결심을 포시하면서 내가 대만으로부터 신 중국으로 돌아온 것을 축하하였다. 나는 광주에서 한달 동안 있다가 이해 9월에 광주를 떠나서 호남 장사에 있는 호남대학으로 왔다.호남대학은 장사 서쪽에 악록산(岳麓山) 동편에 자리 잡고 있어서 뒤에는 산림이 우거져 있고 앞에는 상강수(湘江水)가 북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호남대학 본부는 기원 976년 북송시대에 창립한 악록학원을 기초로 하여 1924년에 새로 건립된 신형의 대학이었다. 호남대학에는 공정학원(工程學院), 농학원(農學院), 자연과학원(自然科學院) 등이 있었다.호남대학 교장은 중국공산당 창시자의 한명인 이달(李達)이었고 부교장은 이정신(而鼎新)이었으며 농학원 원장은 이봉손(李鳳蓀)이었다. 농학원은 농예학부, 농정학부, 곤충학부의 3개 학부로 나뉘어 있었는데, 곤충학부 주임은 이원장이 겸임하고 농정학부는 노애지(盧愛知)가 주임이었고 농예학부는 내가 주임으로 되었다. 이밖에도 주여항(周汝沆), 주성한(周成漢), 호독경(胡篤敬) 교수 등이 농예학부의 과목을 분담하였고 나는 과수재배학을 가르쳤다.1950년 10월 8일에 모택동 주석은 중국인민군사위원회 주석의 명의로서 중국인민지원군에 대한 명령에서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조선 인민의 해방전쟁을 원조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의 주구(走狗)들의 진공을 반대하고 그리하여 중국인과 동방 각국 인민의 이익을 보위하기 위하여 중국인민지원군은 빨리 조선경내로 출동하여 조선 동지들과 협동하여 침략자와 싸워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쟁취하자”그리고 1950년 10월 18일 중국인민지원군은 팽덕회 사령의 영도 하에 압록강을 건너 조선 경내로 출동하였다. 당시에 모택동 주석은 항미원조 전쟁을 일종의 혁명사상의 교육으로 하고 선전운동을 진행시켰던 것이다.모택동 주석은 아래와 같이 지시하였다.“항미원조 전쟁은 대학교이다. 우리는 거기에서 대연습을 실행하고 있다. 이런 연습은 군사학교를 건립하는 것보다도 좋다.”그와 동시에 인민해방군 황극성 참모장은 호남대학으로 와서 전체 교원과 학생대회를 열고 항미원조 전쟁에 관한 동원 보고를 하였다. 당시 미국 침략자는 “당년 11월 안에 압록강까지 점령할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떠들었던 것이다. 황극성 참모장은 그와 반대로 “중국인민지원군이 조선 동지들과 협력하여 투쟁하면 미국 침략군을 막아낼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보고에서 항미원조의 승리를 위하여 사람마다 군대에 참가해야 한다고 호소하였던 것이다. 이런 참군운동은 당시 전국 각 대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광범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확대회의 결의에 의하면 “반드시 전국 범위로 이 운동을 계속 추행하여야 한다. 이미 추행한 데서는 그것을 심도 있게 진행하고 아직 추행하지 못한 데서는 그것을 보급시켜서 힘써 전국 각처에서 사람마다 다 이런 교육을 받도록 해야 된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항미원조 전쟁의 교육운동은 학생의 참군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운동이 처음으로 시작될 때에는 학생들의 사상은 비상하게 긴장했었다. 밤중에도 잠자지 못하고 일부 학생들은 소리 없는 울음으로 말을 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 밖의 학생의 부모들도 자기의 자녀가 군대에 참가하는데 대하여 매우 염려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런 교육은 학교의 교육으로 될 뿐만 아니라, 사회교육과 가정교육으로도 되었었다.그 때 호남대학에는 이런 교육운동을 위하여 학교 영도와 교사를 중심으로 여러 가지 조직이 만들어졌다. 예를 들면 호남대학군사간부학교보송위원회(湖南大學軍事幹部學校保送委員會)가 1950년 12월 12일에 정식으로 성립되어 비서처·선전부·조직부를 설치하고 이달 교장이 주임위원을 겸임했다. 이 밖에 중국교육공회호남대학문교위원회(中國敎育工會湖南大學文敎委員會)는 도서주(涂西疇), 황건평(黃建平)과 주숭교(朱菘喬)가 주임위원이 되고 내가 문교위원회 위원이 되는 동시에 시사정치학연구소(時事政治學硏究所) 위원으로 되었다. 또 호남대학의 공정학원, 농학원, 자연과학원의 삼학원전간편집위원회(三學院專刊編輯委員會)가 성립되어 내가 위원의 한명이 되었다.그런데 이 같은 3개 조직의 공동 임무는 전체 학생들에게 대하여 항미원조 전쟁에 대한 교육을 보급하고 심도 있게 진행하기 위하여 영도 간부와 교사들의 사상을 제고시키기 위한 것이다. 그 때에 나는 조선 인민의 하나로서 또 교육자로서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항미원조 전쟁은 조중(朝中) 양국 인민이 생사를 같이 하고 운명을 함께 하는 전투로 되었기 때문에 나는 무한한 감격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농예학부 전체 회의에 참가할 때마다 학생들에게 참군하라고 고무하였다.그리고 내가 대만에 있을 때 장개석이 미국 침략자의 지도 밑에서 남조선으로 가서 이승만과 회담하고 조선전쟁을 일으켜서 ‘제2전장’을 열어서 중국에서 다시 전쟁을 일으키기로 음모했던 것을 설명했다. 그 때에 호남대학문교위원회 주임위원 도서주가 농예학부 회의에 참가해서 나의 ‘제2 전장’에 관한 보고를 듣고서 회의가 끝난 뒤에 도서주는 나에 대하여 ‘제2전장’에 관한 소식을 더욱 상세하게 조사했었다. 미국 침략자의 이런 침략 전쟁을 준비하는 음모는 조선전쟁이 폭발하기 전에 중국에서 구체적으로 알 수 없던 것이다.조선전쟁이 폭발하기 전에 일반 중국의 지식분자 중에는 공미(恐美), 숭미(崇美), 친미(親美)사상이 비교적 보급되었었다. 그렇게 된 원인은 (1) 중국의 항일전쟁 시기에 일본군국주의는 중국과 미국의 공통의 적이었고, (2) 미국이 1945년 8월에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한 것은 일본군국주의가 무조건 투항하게 된 직접 원인으로 된 것이며, (3) 일본이 투항한 후 평화회의가 열렸을 때에 미국 대표는 “대만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때에 미국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공헌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그러나 제국주의의 본질은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어떠한 음모 수단과 야만행위도 가리지 않고 감행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만을 중국에 돌려주자”는 구호는 대만에 대한 이익을 자기가 독점하기 위해서이며 조선에서 전쟁을 일으킨 것도 조선과 중국을 자기가 침략하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호남대학 학생들은 대회에서 보고와 소조회의 토론을 여러 번 거친 다음 모두 다 참군하기를 요구하였다. 호남대학 군사간부학교 보송위원회에서 엄격한 선발을 거쳐 농예학부 학생 100명 중에서 2명이 참군하게 되었는데, 이는 전체 호남대학 학생 중 첫 번째로 된 것이다.이 운동은 전체 학생과 교사에 대하여 애국사상과 국제주의를 제고시키는 의의가 있어서 진실로 정치학교보다도 좋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나의 옛 친구인 심중구, 파금, 주세, 광달인 등이 상해에서 일하고 있었다. 심중구와 파금은 중앙인민대표회의의 대표로 되었고, 주세는 중국과학원 실험생물연구소의 소장으로 되었으며, 광달인은 그 연구소의 연구원으로 되었다.나는 편지로 그들에게 내가 대만을 떠나 장사로 왔다고 알려주었는데, 주세는 회신에서 내가 만일 장사에서 적당한 일이 없다면 상해로 와서 과수의 교잡시험을 해달라고 하였다. 나는 호남대학 농학원에서 일하게 되어 상해로 갈 수 없다고 회답하였다.심중구 선생에게 편지할 때 진의 주석이 대만에서 장개석에게 총살된 소식을 알려주었다. 당시 대만에 있던 임복천(林复泉)은 진의가 총살된 소식을 편지로 심중구 선생에 보내왔는데 그 편지가 대만 경찰 당국에 발견되어 임목천은 대북경찰서에 잡혀갔다가 거기에서 희생된 것이다. 임복천은 내가 입달학원 농촌교육과에서 일할 때에 학생으로서 심중구가 대만 장관 공서의 고문으로 되었을 때 임복천도 대만에서 일하다가 이렇게 희생된 것이다.파금은 당시 인민대표로 북경으로 가서 인민대표회의에도 참가했고 한편으로는 문예협회를 조직하고 문예창작을 하고 있었다.1951년 1월에 조선중앙통신사 기자 김성률(金聲律)이 호남을 방문하였는데 호남성 정부에서는 전화로 호남대학에 대하여 조선중앙통신사 기자가 호남대학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알려주었다. 이달 교장은 나에게 조선중앙통신사 기자를 영접해오라고 했다. 나는 대학의 승용차를 타고 영만시 도강부두로 가서 김성률을 맞이하여 왔다.이달 교장은 학교 회의실에서 김성률은 초대하고 내가 통역을 했다. 김성률은 자기가 이번에 중국을 방문한 목적은 “해방 후에 토지개혁운동과 사회주의 건설 공작을 이해하고 학습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또 특별히 호남대학을 방문한 원인은 모택동 주석 고향의 사회주의 건설과 학교교육을 고찰하기 위하여서이다”라고 하였다.김성률은 조선전쟁에 대해서서 개괄적으로 말하였는데, “중국인민지원군과 조선인민군이 긴밀하게 협력 전투하는 형세는 우리 편에 유리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믿음과 결심이 있어서 최후의 승리는 우리에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그리고 김성률은 나 개인에 대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사관이 북경에 성립되었으니 대사관과 연락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그 때부터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중대사관과 연락하게 되었다.김성률은 좌담이 끝난 뒤에 호남대학의 도서관과 호남대학 뒤편에 있는 역사 고적인 애만정(愛晩亭) 등을 참관한 뒤에 장사로 돌아가게 되어 나는 학교의 자동차로 그를 영만시까지 보내주었다.

    9 유자명수기

    1953년 중국 고등교육부의 ‘고등학교 원계조정’ 계획에 의하여 호남농학원에서도 원계를 조정한 결과 원예학부를 화중농학원 원예학부에 합병시키고 축목학부는 강서농학원 축목학부에 합병되었다.그리하여 원래의 원예학부 교사 송번영(宋번榮)과 부왕형(傅王衡)은 화중농학원으로 가고 호남농학원에서는 원예학부 대신 농학부 안에 과수남새교연조를 성립하고 내가 그 교연실 주임으로 되었으며 심미연(沈美娟), 이관평(李冠平), 공진학(龔振鶴) 등이 과수와 남새에 관한 교학과 연구 공작을 분담하였다. 그리고 원예학부를 화중농학원에 합병할 때에 4년급 학생 중에서 나택민(羅澤民), 유학초(劉學初), 진몽룡(陳夢龍), 황천수(黃天授) 등 4명을 남겨 놓고 공진학 교원이 그들을 데리고 광동성 조주(潮州) 구내 감귤 명산지로 가서 반년간의 졸업 실습을 시켰다.그리고 졸업 실습이 끝난 뒤에 진몽룡은 안강농업학교(安江農業學校)로 배치되어서 그 학교의 교원으로 되고, 나택민은 광주 중산대학에서 식물생리학을 학습하고 돌아와 식물생리에 관한 학과를 담임하는 동시에 식물생리에 관한 시험 연구도 하였으며 황천수는 북경인민대학에서 맑스 레닌주의 철학을 연구하여 인민대학에 머물러서 유물변증법을 가르치고 있었다.그리고 호남농학원에서 원계조정을 경과한 뒤에 농학부와 임학부의 두 가지 전공만을 남겨두고 생산 실습과 과학연구를 진행하기 위하여 동당(東塘)에 실험농장이 있고 대산충(大山冲)에 실험임장이 있었다.그리하여 나는 실험농장의 주임을 겸임하였다. 호남농학원 실험농장은 원래의 호남성 농업시험소의 실험농장 기지였는데 농업시험소가 확장되어서 호남성농업과학원으로 되면서 장사시 동쪽에 있는 마파령(馬坡岺) 지구로 옮겨간 뒤에 원래의 농업시험소의 실험농장을 호남농학원의 실험농장으로 개명한 것이다.그리고 농학원의 실험농장에는 교학실습과 과학실험의 필요에 의하여 물벼·과수·남새 및 화초들을 분별해 가꾸는 터전으로 나누어 놓고 경험 있는 기술 일꾼들을 각 부분에 배치하여서 그들로 하여금 책임지고 농장을 올바로 관리하도록 하였다.과수 재배 중에서 포도 생산은 세계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문이었으며 중국의 포도 재배 역사는 2,000년 이상 되는데 호남에서는 아직까지도 포도재배를 하지 못하였다. 그렇게 된 원인은 호남의 기후가 4월부터 6월까지 비가 항상 많이 내려 포도의 병해가 심하게 되어 포도재배가 곤란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농업과학이 발달된 현대에서 자연조건을 인공으로 개조할 수 있으며 또 한편으로 본다면 일본 서남부의 기후는 중국 호남과 근사한데도 불구하고 포도재배가 상당히 발달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포도재배를 시험연구의 하나로 북경, 하남, 산동에 있는 포도시험 연구기관들로부터 포도 품종을 구해다가 시험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당시에 각처로부터 구해 온 품종 중에서 유명한 품종은 ① 홍민괴향(紅玟瑰香), ② 소백민괴향(小白玟瑰香), ③ 금황후(金黃后), ④ 백향초(白香蕉), ⑤ 벽록주(碧綠珠), ⑥ 캄벨(康拜尒) 등이었다.나는 그 중에서 홍민괴향과 소백민괴향을 온실 안에 심어 놓고 그 밖에 4품종은 온실 밖에 심었다. 그리고 나는 경험 있는 젊은 학도들을 모아서 한편으로는 포도를 정밀하게 관리하고 또 한편으로는 남새의 재배실험과 화훼의 육종번식도 진행하였다.

    10 유자명수기

    1983년 2월 25일에 나의 90탄신을 즈음하여 호남농학원 영도 동지들이 나의 생일을 위하여 성대한 연회를 차리고 중국공산당 호남성지부위원회 초림의(焦林義) 부서기, 호남성정부 정성령(程星齡) 부성장, 호남성 장사시에서 일하고 있는 신문 기자, 통신사 기자, 광파전태 기자들을 초대하였다.연회에서는 호남농학원 여철교(余鐵橋) 원장의 지휘 아래에서 초림의 부서기, 정성령 부성장과 그 밖에 호남농학원의 영도들이 축하연설을 하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장사에서 출판하는 「호남일보(湖南日報)」, 「장사만보(長沙晩報)」, 북경에서 출판하는 「광명일보(光明日報)」, 「인민일보(人民日報)」 등에 나의 90탄신을 축하한데 대한 소식이 보도되었다.그리고 또 신문의 소식이 넓게 보도된 뒤에 나는 복건성 천주 여명고중학교(黎明高中學校)의 축하 전보, 협서성 임업연구소 김충식(金忠植), 흑룡강성 하얼빈 조선민족의원 엄금화(嚴金化), 해림현 중심학교(中心學校) 이춘자(李春子),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 김학철(金學鐵) 등 조선 민족 동포들이 보내주는 축하 편지를 받았다.그 중에서 조선민족의원의 엄금화 동지는 나의 90탄신을 축하하면서 또한 조선의 무명 영웅들이 일찍이 조국을 떠나 중국으로 와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하던 역사적 사실을 소설로 쓰기 위하여 나에게 대하여 “내가 중국에 와서 활동하던 역사적 경력을 알려 달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1919년 3월 1일에 조선독립운동이 폭발할 때 운동에 참가한 뒤에 여러 가지 혁명적 활동에 참가하면서 동서남북으로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1949년에 중국공산당 영도 아래에서 전체 중국 인민이 해방되는 동시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뒤에 1950년 6월에 대만을 떠나 홍콩을 거쳐 서 그 해 8월에 호남성 장사에 와서 지금까지 33년 동안 호남농학원에서 일하게 된 역사적 경과를 간단하게 써서 엄금화 동지에게 보내 주었다.그 다음에 중국작가협회연변분회의 김학철 동지는 46년 전에 조선민족혁명당 당원의 하나로서 그 당의 수령인 김약산(金若山) 동지와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에 참가하였다가 1938년에 일본 침략군이 한구를 점령하게 될 때에 김학철은 이하유(李何有), 나월한(羅月寒)과 함께 서안에 가서 활동하다가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사회주의 혁명 근거지인 연안에 가서 중국공산당에 참가하였으며 공산당 군대인 팔로군(八路軍)에도 참가하여 투쟁하다가 중국이 해방된 뒤에 북조선 평양으로 가 있다가 김약산 동지와 김백연 선생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으며 김구 선생과 조소앙 선생도 남조선 서울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뒤에 김학철은 또 다시 중국으로 나와서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그런데 김학철 동지가 말한 바와 같이 김백연 선생과 김약산 동지가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나도 일찍이 알고 있었던 사실이며, 그리고 김구 선생이 남조선에서 참혹하게 희생된 경과에 대해서는 몇 해 전에 내가 김구 선생을 기념하는 글에서 비교적 상세하게 중국 글로 써서 발표하였다.그러나 조소앙 선생까지 남조선에서 참혹하게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나로서는 오늘날까지 알 수 없던 소식이다. 나는 일찍이 1919년 3·1운동 시기에 서울에서 조소앙 선생의 아우 조용주 동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그의 제의에 의거하여 이병철 동지 등과 함께 외교청년단을 조직하고 한국임시정부의 외교 사업을 원조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당시에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 프랑스 파리에서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는데 한국임시정부에서 외교부장 김규식 박사를 총대표로 하고 조소앙 선생을 부대표로 하는 우리나라 외교대표단을 파리에 파견하여 평화회의에 대하여 한국임시정부를 승인해 달라고 요구하였다.그러나 당시에 일본 제국의 대표도 파리평화회의에 참가해서 우리나라의 정당한 요구를 무리하게 반대하였으므로 우리의 요구는 통과되지 못하였으나, 우리 대표가 내놓은 조국독립의 요구는 우리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커다란 선동의 작용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그런데 우리나라의 대표들이 파리에서 활동하기 위한 경비를 원조하기 위하여 외교청년단의 동지들은 애국부인회와 연합하여 우리나라의 외교대표단이 파리에서 활동하는 경비를 원조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노력하였다.드리고 그 해 6월에 나는 조용주 동지를 따라서 서울을 떠나 비밀리에 압록강을 건너 상해 프랑스 조계로 가서 여러 방면에서 활동하다가 1922년에 조소앙 선생이 파리로부터 모스크바를 지나서 북경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연병호(延秉浩) 동지와 함께 조소앙 선생이 들어 있는 여관에 가서 조소앙 선생을 첫 번째로 만나 보면서 지나간 경력과 앞으로 오게 되는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그때부터 나와 조소앙 선생 사이에 맺어진 동포적 감정과 혁명적 우의는 날이 갈수록 깊고도 두껍게 되었는데, 우리가 서로 이별한 뒤 40년을 지나 온 오늘에 광명정대한 혁명가인 조소앙 선생이 흉악하고도 간사스러운 원쑤 놈들에게 야만적인 암살을 당했다는 것은 나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와 잊을 수 없는 비통을 느끼게 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이렇게 간단하나마 정사 깊은 글로써 여러분 애국지사 선배들의 혁명 정신의 영구불멸을 축원하면서 이 글을 끝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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