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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안규홍] 에 대한 전체 2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담산실기

      충(忠)과 의(義)는 하늘과 땅의 원기요, 생민(生民)의 명맥(命脈)이다. 그러므로 제왕과 성현들이 북돋아 심고 찬양하여 영세토록 삼강오륜이 실추되지 않게 했던 것이다.  죽산(竹山) 安(안규홍)公의 휘는 규홍(圭洪)이요, 호는 담산(澹山)이며, 문강공(文康公) 은봉 안방준(隱峯 安邦俊) 선생의 후손이다. 공(公)은 천품이 준걸(俊傑)하였으며, 특히 담력과 지략이 출중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글을 배우지 못하고 어부나 초부(樵夫)들과 어울려 지냈으며, 놀이할 적에는 전쟁놀이를 좋아했다.  섬 왜놈들의 침입으로 나라의 형세가 뒤집히는 상황에 이르자, 팔방에서 의병이 잇따라 일어났다. 공은 울분이 흉중에 가득하였으나, 나이가 어리고 덕망이 적어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무신(戊申)년(서기 一九〇八년)에 이르러 왜적의 횡포가 있자, 마을의 장정 수백 명이 모여 방어책을 의논하는데, 공이 본래의 뜻한 바로써 군중을 깨우치니, 군중이 모두 기꺼이 따르며 공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고, 염재보(廉在輔)를 부장으로 이관회(李貫會)를 선봉으로 삼았으며, 임병국(任秉國)·손덕호(孫德浩)·정기찬(鄭基贊)·장재모(張載瑁)·송경회(宋敬會)로 좌·우익을 삼고, 안택환(安宅煥)·소휘천(蘇輝千)·송기휴(宋基休)를 후군으로 삼아, 석호산(石虎山)에서 군사들에게 음식을 주어 위로하고, 보성(寶城)의 파청촌(巴靑村, 지금의 得粮面 禮堂里)에 이르러 왜적을 만나 싸워 이기고 두 우두머리를 죽여 없앴다. 또 대원사(大原寺)와 상진산(上眞山)에서 순천(順天)·흥양(興陽) 등지의 모든 적을 격파하여 그 무기를 빼앗음으로써 몇 년 사이에 의성(義聲)을 크게 떨쳤다.  그 뒤 적이 대거 산야를 포위하니 강약이 현격하게 달라 공은 마침내 붙잡히게 되었으나, 적을 꾸짖고 굴하지 않다가 결국 죽임을 당하였으니, 신해(辛亥)년(서기 一九一一년) 오월 오일로서 공의 나이 三十三세였다. 거사를 같이한 분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하였으나, 죽음에 임하여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장렬하였으니, 이는 다 공에게 감복되어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그 얼마나 한결같으며 그 얼마나 장한 일인가!  혹자는 공효(功效)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겨 왕촉(王蠋) 같은 이가 절의에 죽으니 제(齊)나라 선비들이 일제히 그를 따라 일어나 칠십여 개의 성을 회복하였고, 안진경(顔眞卿)이 충의를 수창(首倡)하니 여러 군(郡)에서 호응하여 당(唐)나라 종실을 중흥케 하였다고 말하나, 나는 모두가 다 운수라 하겠노라. 왕촉(王蠋)·안진경(顔眞卿) 두 분은 그 국운이 다하지 않았을 때였으므로 그렇게 될 수 있었고, 안(안규홍)공은 그 하해(河海)가 다 기우는 쇠잔한 세상을 당하여 그러했던 것이니 다만 그 대의(大義)를 세웠음을 볼 따름이지, 어찌 그 성패나 이둔(利鈍)을 논하겠는가?  또 군자가 명예를 위하여 착한 일을 한다면 그것은 기필코 진실 되지 못한 것이요, 신하가 명리와 봉록을 위하여 충성에 힘쓴다면 그러한 충성은 기필코 극진한 것이 아니다.  경술(庚戌)년(서기 一九一〇년)·신해(辛亥)년(서기 一九一一년)의 무렵에 당하여 종묘사직은 이미 폐한 바 되어 의지할 데가 없고 부귀도 누릴 수 없는 때였으나 공은 오직 죽음을 무릅쓰고 절의를 따랐으니 참다운 의사인 것이다. 그러므로 한고을 사림(士林)들이 한결같이 절의에 감복하여 이미 승첩지(勝捷地)에 비를 세워 찬송하고, 또 그 묘표(墓表)와 서문·순의사실(殉義事實)·가장(家狀)·전기(傳記)·만시(挽詩)·제문(祭文) 등의 글을 주워 모아 『실기』(實記)라 이름 짓고 장차 인쇄하여 후세에 명성을 전하고자 하여 임낙기(任洛圻) 군이 나에게 서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바야흐로 삼강오륜이 땅에 떨어져 없어질 것을 근심하고 탄식하면서도 구제할 힘이 없던 중 공의 충의사실을 듣고 간담이 깨어난 듯 하여 붓을 들어 이를 쓰노라.  대한 융희기원(大韓 隆熙紀元) 후 임진(壬辰)년(서기 一九五二년) 四월 상순 유민(遺民) 창산 성기운(昌山 成璣運)이 서(序)하다.

    2 담산실기 중간사

      근래에 와서 湖南義烈의 行蹟을 그리며, 그들의 英靈을 추모하는 기념사업들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는 차제에 寶城 출신 義兵將 澹山(담산 안규홍)公의 實記가 우리말로 번역되고, 거기에 누락되었던 義將 尹榮采(윤영채)公 외 여덟 분 義烈將士의 實記도 함께 追錄하여 간행되기에 이르렀다는 소식은, 실로 時宜에 적절한 快事가 아닐 수 없다.  澹山公 安圭洪(담산 안규홍) 義兵將은 外勢의 侵奪이 한참 亂調를 이루던 十九世紀末 一八七九年 四月 十日에 태어나 庚戌國恥 이듬해인 一九一一년 五月 五日에 大邱 刑場의 이슬로 사라지니 痛恨의 나이 三三세의 꽃다운 靑春이었다.  그의 家統과 殉義事實은 本文에 昭然하므로 여기서 되풀이 하지 않거니와 특히 後生들의 心琴을 울려주는 대목이 있다면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家貧無學의 一介 樵童으로서(三〇세) 殉國의 決意를 가다듬고 勇躍 捨生取義의 길에 뛰어 들었다는 사실이다. 學識이란 오히려 愛國의 길에 있어서는 거추장스러운 방해물일 수도 있고, 富란 도리어 安逸을 貪내게 함으로써 捨生의 殉國을 위해서는 아무런 보탬도 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대충으로나마 그의 殉國實記를 읽고 그의 神出鬼沒한 智略과 膽力에 새삼 깊은 感銘에 젖지 않을 수 없다. 公의 二年 奮戰은 실로 不徹晝夜 東奔西走한 實戰으로 아로새겨져 있으며 이는 凄切한 血鬪의 기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그의 戰功은 비록 散發的인 것이었기 때문에 赫赫한 大會戰의 勝戰鼓는 울리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公의 義烈은 결코 하얼빈驛頭의 一聲에 敵魁가 꺼꾸러진 그 戰功에 결코 不下하리라고 본다.  公의 殉義記錄을 통하여 우리는 또 한 번 殺身成仁의 길이 얼마나 險難한 길인가를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며 그것만이 救國의 마지막 길이었음을 일깨워 준다.  우리는 歷史의 기록에서 다시금 義烈의 기록이 나오지 않도록 國基를 튼튼히 함으로써 外勢의 受侮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기록은 萬古의 敎訓으로서 길이 남겨야 할 줄 안다.  澹山(담산 송규홍)公 및 그를 따르던 많은 義烈들의 英靈들 앞에 옷깃을 여미며 이 기록이 出版되기까지 수고하신 분들의 勞苦를 致賀하면서 序에 가름한다.一九八三年 四月國立光州博物館長哲學博士 李乙浩(이을호) 謹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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