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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방사겸] 에 대한 전체 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방사겸 평생일기 1권

    나는 신사년 윤七月 二十五日 즉 서력 一千八百八十一年 평양성 방정우 가정에 七兄弟 중 五次子로 났으며 위로 매씨 한 분과 아래로 매제 한 분이 있고 또 형님의 소생 자녀가 많은 복잡분주한 가정에 났었다. 부모는 어곽전과 돈변놀이(돈놀이)를 하여서 집안은 평양성에서 유명한 부호 가운데 하나 되는 집안인 고로 자친되는 이께서 자식 기르는 괴로움을 면하고 호사를 주장하기 위하여 자식들을 낳자 즉시 유모 집으로 보내어 길렀다. 나도 유모 집에서 五세까지 자라서 부모의 집으로 돌아왔다. 나의 유모의 성명은 명치정이라 하는 인데 외촌에서 들어와서 ●● 장사를 하여 생도를 하는 인데 위로 노모 한 분을 모시고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자의 명은 명봉손이라고 하는데 사람된 자격이 극히 정답고 사랑심이 많은 청년이더라. 나는 유모 집에서 五세까지 자라나며 유모 부부에게는 어머니 아버지라고 곧 친부모와 같이 믿고 불렀으며 또 유모의 노모친과는 할머니라고 하였고 자식 명봉손과는 형이라고 불렀다. 온 유모집 전 식구가 나를 친자식 손자 동생같이 사랑하고 귀히 길러준 것은 나의 친부모보다 못하지 않은 고로 나는 나의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잊지 못하고 상게까지 사모하고 기억한다.나는 五세에 유모 집을 떠나 친부모 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유모의 사랑하던 그 유모의 집만 못하게 생각한다. 부모와 또 형수들이 다 나더러 얻어다 기르는 아이라고 조롱한다. 철 모르는 나의 생각에는 정말 얻어다 기르는 줄로만 꼭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모부 명치정을 나의 친아버지로 늘 생각이 나서 유모집으로 다시 달아나려고 한 적이 여러 번이었다. 그러나 상거가 먼 때문에 달아나지 못하고 명치정 아들이라는 조롱을 참고 견뎌가며 한살 두살 자라서 온갖 눈치와 경위가 발달되어서 집안에 누가 그중 나를 귀히 하고 동정을 하는지 멀쩡히 다 알게 되었다.나의 자친은 나를 친히 길러내지 않고 남이 길러다 준 자식에게 아무 정이 없고 또 나 역시 친어머닌 줄 안다 할지라도 사랑할 생각이 도무지 나지 않아서 어머니의 말씀을 순종치 않은 것은 내가 다 기억치 못하나 그러나 자친에게 그리 정이 가지 않은 것은 내가 잘 기억한다.이런 가정에서 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부모의 따스한 사랑이라고는 일점도 받지 못하고 이 몸이 자라난 것은 다행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강보에 싸여서 유모의 젖을 빨고 아무 철모르는 때에 맏형님 한 분은 자녀 둘을 낳고 청춘에 돌아가셨다 한다. 이 형님의 자식 나의 조카되는 놈에 나이 두 살 아래가 되어서 나와 같이 자라나게 되었다. 이놈은 부모를 잃고 조모님의 손에서 길러나게 되었다. 조모님이 이것을 부모 잃은 손자라고 귀히 여기고 사랑하여 주기 때문에 집안 아이들 중에 그중 대장 노릇을 하기 때문에 삼촌도 모르고 함부로 언행을 놀리고 또 암상하고 악하여서 아자비(아저씨)한테 손질 발질 아무 것이나 닥치는 대로 집어서 던지기가 능사로 삼는데 나는 자친이 무서워서 그냥 버려두다가도 하도 견딜 수가 없어서 기회만 만나면 단단히 때려주고는 나는 자친한테 경을 치고는 울고 하였다. 이런 가정에도 나를 동정하여 주는 형수 한 분이 있었다. 이 분은 강동 땅의 주민 문술덕이란 농촌 부가의 따님으로서 우리 둘째 형님의 아내가 되었다. 맏형님 내외는 다 세상을 떠나시고 이 형님과 이 형수가 집안에 맏아들 맏며느리가 되어 집안을 주장하신다. 이 가정에서 그리 나를 사랑하여 주는 이 없고 다만 이 형수님이 나의 억울할 적마다 위로와 동정을 늘 하여주는 고로 어머님 방에서 떠나서 형수님 계신 방으로 가서 자고 몇 해를 지내었다. 이럭저럭 자라나는 동안 나는 칠, 팔세 가량이 되어 세상물정은 그리 다 알지 못하나 그러나 집에 모든 형편 되어가는 것은 대강 짐작하였었다. 학교에 갈 나이 되었다. 六세에 학교에 입학하였다. 지금 학교라고 우리가 보통 칭하지마는 이왕에는 서당 혹 서재 글방이라고 하였다. 六세에 글방에 다니기 시작하여서 갑오년 청일전쟁이 벌어져서 평양성은 전쟁 중심지가 되어서 견딜 수 없어 강동가대 있는 곳으로 피난을 가게 되어서 글을 더 배우지 못하게 되었다. 강동 고비소로 피난을 나가서 한 四年 동안 세월을 보내게 되었는데 한 곳에 이 四年 동안을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다니기 때문에 서당에를 다시 가지 못하였다. 백씨께서는 평양성으로 다시 들어와서 객주사업을 하게 되었다. 이때는 나는 十四세 가량이 되어서 세상 형편과 사업상 물정을 실제로 연습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객주사업은 물건을 사고파는 것인데 재정출납이 거대한 중심이 수입 지출이 복잡한 사업이다. 이 사업에 이것 저것 여러 가지로 형님을 도와주며 이 사업에 실제적 연단(단련)이 되어서 어떤 부분에 한 가지를 담임하여 맡아볼 만한 자격이 되었다. 이때는 十五세에 사업상의 눈이 좀 들 만한 청년이었다. 하루는 백씨께서 돈 받아들이고 내주는 직무를 나에게 맡긴다. 이 직무를 맡아 가지고는 평양성 각양 전방마다 널어 놓은 물건 값을 나의 손으로 받아들인다. 또 받아들이는 수로만치 남에게 물어줄 돈이 또 있다. 받은 돈으로 물어줄 돈을 갚고는 저녁때에 집으로 들어와서 서기와 마주 앉아서 그날 출납한 문부를 맞추는 일인데 그리 수월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하루 이틀 격력(경력)을 얻어서 상당히 감당하여 갔다. 장가를 가게 되었다. 十六세에 중화당에서 무쇠점하는 김씨의 딸한테 장가를 들었다. 처가는 무쇠점을 하여서 풍족히 산다. 그러나 시골 생활의 집이다. 이런 가정에서 자라난 딸도 시골여자일 것은 물론일 것이다. 나는 대도시 인물 풍채가 화려한 평양성 태생으로 온갖 사치하고 맵시 있는 것을 주장하는 평양성 청년 자제의 하나 될 것이다. 불행히 어찌어찌 소개가 되어 촌여자에게 장가를 들었다. 그러나 철이 채 들지 못한 十六세의 청년 나는 이 여자한테 장가든 것을 늘 불만족히 생각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므로 안채방에 들어가 자지 않고 차차 차차 사랑방 잠을 자게 되었다. 자친과 형수들은 장가든 처를 두고 사랑방잠 자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이해로서 권한다. 그러나 마음이 원치 않는 것이야 황제위라도 사양하는데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이 잘못된 생각으로 굳어졌다. 나의 처지는 이와 같이 된 고로 집에 있기 싫은 생각이 발동되었다. 그래서 외국으로 달아나버릴 생각이 종종 발한다. 그러나 집을 떠나 달아나는 일이 그리 적은 일은 아니다. 그 뒤 하루 이틀에 거부이 떠나지를 못하고 맡은 책임에 일은 여전히 잘 직무를 하여 나가면서 달아날 계획을 파하지 않고 계속 궁랑하는 중 달아나기 바로 몇 달 전은 섣달 그믐날이다. 이날을 자고 나면 정월 一日 세배 다니는 날이다. 나도 정월 一日에 웃어른들을 찾아다니면서 세배를 한다. 나보다 어린 아이들 또 연갑세라 전방 사원 아이들한테는 세배를 받는다. 세배 받는 아이들에게 돈푼씩 주려고 백통전 돈 백 냥이나 가지고 나갔다. 평양성에 관앞이라 하면 평양성 상업에 중심지이다. 세배를 다니다 관앞 어떤 전방에를 들어가니 그 전방 주인은 없고 청년 자제만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여러 상업가의 청년 자제들이 모여 풋돈푼씩 대고 눈놀이를 한다. 나도 한 몫 들어서 눈놀이를 하게 되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한 二百냥 따가지고 저녁때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을 먹고 다시 나가니 눈놀이판이 훨씬 커져서 건달꾼들이 많이 와서 등 뒤에서 구경을 하면서 돈 많이 딴 사람에게 개평을 구한다. 이곳 시로 한복판이 되어 사람이 많이 들락날락하여 번다하여서 유숙으로 옮겨 갔었다. 이 집은 평양성에서 거간하는 김 서방의 집인데 김 서방의 딸은 방금 객을 보는 기생 딸 하나 이었다. 이 기생의 명은 연홍이라 하는데 十六, 七세 된 아름다운 기생이다. 지금 기생집에서 눈놀이가 변하여서 투전 노름이 되었다. 평양성 유명한 상업가의 자제들이 모여서 이 연홍이의 집을 부자 되게 하였다. 이 집에서 두 주일 동안을 주야를 지내면서 투전을 하였다. 나는 한 三千냥을 잃고 정월 훗보름이 되자 투전판은 걷어치우고 각각 상업에 맡은 직무를 하게 되었다. 나는 한 三千냥 버리고, 속이 상하고 또 마음이 외도에 들게 되었다. 그동안 두 주일 동안에 연홍이와 친절하게 되어서 시간만 있으면 연홍이의 집을 가게 되었다. 하루는 가니 연홍이가 서울 진연에 갔다 한다. 나는 마음이 더 들떠서 집에 있을 생각이 없어 우리 집 앞에 사는 조지수 씨를 만나 미주로 달아나자고 상론을 하였다. 조지수 씨는 노비를 변통할 수 없다 한다. 그러나 나는 노비를 얼마라도 변통할 수가 있으니 돈은 염려 말고 같이 달아나자고 하였다. 하루는 달아나기로 꼭 작정을 하였다. 이날은 평양 장날이다. 상업하는 사람들이 돈을 받아서 갚는 날이다. 나는 이날에 받을 돈이 수십만 냥이다. 또 내가 남에게 갚을 돈도 여러 만 냥이다. 받고 줄 것을 적어 가지고 나와서 그중 큰 물건값 청인 東順昌(동순창)한테 지전 판 값 받을 것이 一萬여 냥 돈표를 가지고 아침 열 시 가량에 가서 달라 하였다. 그러나 너무 이르다고 五千兩만 준다. 백통전 三千兩을 세려면 여러 시간을 가져야 되겠는데 세보지 않고 그냥 가지고 오자니 의심을 주겠고 내 손으로 세자니 손이 떨려서 할 수 없기로 조지수 씨더러 대강 세보는 체하고 빨리 가지고 삼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환표를 만들어 달라 하여 가지고 대동강 사원 나드리 주막집에서 나는 먼저 나가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빨리 수습하여 가지고 나오라 하고는 나는 홀출(훌쩍) 평양성을 등지고 대동강을 순식간에 건너가서 사원나드리 주막집 토방에 앉아서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 하고 있다. 따스하던 五月달 해는 서산에 가물가물하며 내려가 없어져 버린다. 평양성을 굽어보니 집집이 저녁 짓는 연기로 아름다운 평양성을 희미하게 덮어서 해 없는 저녁이 더욱이 어두침침하여진다. 오후 두 시 가량에 이곳을 나와 조지수 나오기만 고대고대하고 기다리는 동안이 이때까지였다. 그러나 성계(아직) 나오는 기척이 없으니 무슨 변고나 없나 또 우리 집에서 사람을 보내어 돈 찾는 것을 다 빼앗지나 않았는가 별의별 생각이 다 난다. 견디다 못하여 최후에는 이같이 작정을 하여 가지고 평양성으로 밤 중 들어가서 우리 집 앞집 조지수 집이니 잘못된 연고를 알아본다 하고 다시 대동강을 건너려고 나룻배 선창으로 나간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흰 모래 강변으로 나간다. 뱃나루 턱에서 방금 건너온 배에서 내린다. 이는 분명 조지수이다. 참말 고대고대하던 조지수 씨가 분명하구나 하고 나는 반가운 중에도 맡기고 온 그 돈 수속을 어떻게 하여 가지고 나온 것부터 물었다. 조지수는 희색이 만면한 태도로 모든 일이 다 잘되었다고 하면서 가지고 갈 돈은 상시구 밖 마목사한테 가서 인천으로 가는 五千냥 환표를 만들어 가지고 왔다고 하면서 환표를 내어 보인다. 이때는 평양 지방의 五百명이 서울로 걸어 올라가고 서울에 있던 평양 지방 방의 五百명이 평양으로 내려오는 환대하는 때가 되어 서울과 평양 사이에 군사가 연락부절인 가운데 조지수와 나도 여기에 섞기어서 보황으로 걸어서 서흥골을 당도하였다. 오고가는 군대가 많아서 서흥골 주막집에는 가득가득 찬 것이 군대뿐이다. 할 수 없이 우리는 주막을 얻지 못하고 좀 유측으로 들어가서 농부의 집을 얻어서 이날 쉬고 이튿날 조포까지 걸어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행한다는 경론을 하고 일찍 간이 조반을 먹고 농부의 집에서 떠나 대로로 나섰다. 대로변 주막집 토방에 나의 사촌형님이 일찍이 토방에 나와서 우리가 그 앞으로 지나갈 것을 예상하시고 기다리던 차였다. 조지수는 나보다 몇 보나 앞서 나가다가 나의 사촌한테 붙들렸다. 나는 황급한 김에 촌길로 달아난다. 사촌되는 분은 넷 보교를 타시고 나오신 고로 보교꾼이 네 사람이 다 나를 따라와서 나도 잡혔다. 할 수 없이 사촌계신 주막으로 들어가서 사촌형님을 만나게 되었다. 조지수 봇짐 속에 장착하였던 인천 가서 찾을 환표는 벌써 사촌한테 빼앗겨서 우리 수중에는 간신히 인천까지 갈 노비밖에 없이 되었으니 달아나야 아무 소용이 없이 된 것을 우리는 알게 되는 때에 사촌형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달아나야 네가 고생을 실컷 하고는 염치없이 집으로 다시 찾아들어오는 것보다 내가 여기까지 찾아와서 가자고 할 때에 같이 집으로 가는 것이 옳다고 간곡히 권면하기로 나도 생각다 못하여 돈없이 인천이나 서울로 달아나야 별수가 없을 것을 알고 사촌과 같이 집으로 돌아왔다. 집안에 자친과 형수들과 또 금슬이 없는 아내라도 다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온 것과 같이 반가워하는도다. 그러나 객주를 주장하시는 백씨께서도 속으로야 반가워 했을 터이나 그러나 내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지라도 내가 왜 집에서 달아났던가 하는 말 한 마디와 책망 한 마디를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차라리 한 번 단단히 책망과 벌을 받고 달아났던 잘못된 행동에 용서를 받는 것이 천성에 편리한 것을 나는 잘 알고 매일 고대고대하고 기다렸을지라도 백씨께서는 한달이 지나도록 아무 책망 한 마디가 없으니 나는 자연히 사랑으로 나갈 용기와 면목이 없게 되어 살림하는 안처에서 형수들과 이럭저럭 세월을 보내게 되었었다. 하루는 객주하는 사무소에서 내가 맡아보던 돈 출납 사무를 다른 사람이 맡아보다가 그만두게 됨으로 사무소에 온갖 곤란이 있게 되는 때에 나와 친절하던 손님들이 나의 백씨에게 권고하기를 달아났던 동생을 다시 직무를 주라고 여러 손님이 말하게 되는 때에 백씨께서도 나를 다시 일을 보게 할 생각이 나서 하루는 저를 사랑으로 나오라 하기로 나는 한 달 동안이나 안방에서 형수들과 세월 보내다가 비로소 처음으로 사랑에 나와서 다년간 우리 객주에 다니던 손님들과 거간들과 총서기 金淳永(김순영)氏를 다 만나게 되는 때에 이분들은 우스개 말로 인천과 서울이 평양보다 좋더냐고 묻는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인천과 서울은 채 가지 못하였으니 좋은지 어쩐지 알 수 없으나 하늘에 꽉 닿은 듯한 동실령을 넘어서 서흥골은 잘 구경하고 왔는데 이곳은 내가 평생을 두고 기억할 만한 곳으로 생각하게 될 것은 이곳에서 나의 달아나던 계획이 실패를 당하고 붙들려 와서 지금 여러분을 다시 만나게 된 것만은 반갑습니다 하니 여러 사람이 미소함을 마지 않더라. 유수같은 세월은 쉬지 않고 주총알같이 달아나서 서흥골서 잡혀온 지도 벌써 두 해가 되었다. 지난 두 해 동안 진심으로 백씨가 주장하는 객주사업에 그중 중요한 부분인 각양 물건 판 값을 받아서 남에게 줄 돈을 갚아주는 책임을 맡은 외에 큰 대상들이 오고가는데 영접과 전송하는 것과 화륜선으로 온갖 물건 오고가는 것을 내가 부치고 찾아들이는 책임과 또 여러 거간들이 물건을 팔러 나갈 때에 간색을 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들여오는 것을 간색책에 적어 놓는 것이 나의 매일하는 책임이니 내가 몇 가지 사무를 겸하였으며 이 여러 가지 사무를 보는 시간은 매일 보통 十四, 五시간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책임인 줄로만 알고 공투세(고치사) 한번 안하고 전심전력으로 일을 잘 보아나간다. 그러나 백씨께서는 나에게 한시도 자유를 주지 않고 주야로 자기 절제 밑에 두려고 한다. 동서양을 물론하고 어떠한 일꾼이든지 저녁 먹기 전까지는 일을 하지마는 저녁을 먹은 후에는 자유를 가지고 자든지 나가 놀든지 자유회동이나 노예회동을 물론하고 밤 시간은 자유를 가지게 되는데 백씨 되는 이는 나의 밤 시간까지 자유를 주지 않고 밤에 나가 노는 것까지 금지하니 나는 이런 전제정책을 불만으로 생각하고 다시 달아나서 자유생활을 하여보자는 생각이 점점 깊어간다. 백씨께서 나에게 밤에도 나가는 자유를 주지 않는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이것을 잘 안다. 백씨의 생각에는 상업가는 외도와 멀리 해야 된다는 사상에서 비롯하여 나를 밤에도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평양성은 기생이 많기로 유명한 곳인데 상업가는 재정을 많이 출납하게 되는데 어떤 기생의 집에 내왕하다 재정에 큰 손해를 당하고 보면 상업상 신용까지 잃고 상업이 결단날까 하여 나를 밤에도 못나가게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다고 나는 주야로 자유를 조금도 가지지를 못하고 젊으나 젊은 이팔청춘에 부자유 생활은 죽기보다 더 싫은 생각이 날이 갈수록 더 굳어지게 된 이것을 누구나 좋은 말로나 권세로 고쳐줄 수 없는 형편이었다. 고로 나는 다시 달아날 생각을 가지고 기회만 엿보고 있는 차에 나의 매형되는 차종호 씨가 처가인 우리 집에 놀러와서 몇 달 있게 되었다. 차종호 씨는 한문을 많이 배운 학자요 또 영어와 일어를 배웠고 또 우리나라 무관학교까지 마치신 분이었다. 이분이 이와 같이 여러 가지 공부하기에 유여하던 집안이 간곤하게 되어서 우리나라 그때 형편으로는 아무리 재간이 많은 사람이라도 세력이 없으면 우리정부에서 써주지 않고 세력대가에서만 정부의 대소 관직을 얻게 되는 때에 하물며 서북사람으로서 우리정부에 무슨 기회가 있었으랴. 고로 서울과 평양 사이에 오고 가는데 시간만 허송하고 아무 기회가 없는 것은 사실이다.하루는 매부되는 차종호 씨를 조용히 만나서 미국으로 갈 상의를 하였다. 그러나 매부되는 이는 선뜻 대답을 안하고 있다가 미국으로 갔으면 좋지마는 나는 일푼 전이 없으니 어떻게 갈 수 있냐고 말씀하신다. 저와 같이 가실 생각만 계시면 노비 걱정은 마시오 내가 둘이 갈 노비를 변통할 터입니다 하니 반갑게 가기로 작정을 하신다. 그래서 나는 모아두었던 나의 사유자본을 예산하여 본즉 한 五千냥 가량이 잘 되니 미국으로 둘이 갈 선비가 넉넉하여 속히 떠날 준비를 하게 되었다. 준비라야 달아나는 판국에 옷이나 행장을 다 잘 수습할 수도 없고 다만 화륜선이 만경대에서 어느날 어느시간에 인천으로 떠나가는 것을 알아보고 또 내가 맡아보던 재정출납 사무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자셔(자세히) 분명히 밝혀놓고는 집안 식구나 사랑에서 일보는 사람들이 일절 모르게 감쪽같이 달아날 준비를 하여놓고는 매부되는 이는 만츰(먼저) 만경대로 나가서 기다리라 하고 나는 장날이 되어서 아직 평양성 전방마다 다니면서 돈을 받아서 사원애에게 받은 돈을 주어서 사랑으로 들여보내고는 집에도 다시 들어와 보지 못하고 돈 받으러 다니던 그 길로 나도 만경대로 내려가 버렸다. 매부되는 차종호 씨는 만경대서 나를 무한히 기다리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화륜선은 우리를 데리고 인천으로 가려고 벌써 와 기다리고 만경대 선창에 와서 있다. 매부와 같이 배에 올라가서 자리를 잡고 있는 몇 순간에 떠나려고 하는 고동을 푼다. 나는 이 고동소리를 듣고는 자연히 집에서 지내던 생각을 안할 수 없이 된다. 나에게 그리 다정한 사랑을 주지 않던 모친님과 전 가족을 위하여 주야로 사업을 하시느라고 고심초사하시는 백씨와 나에게 늘 동정하여 주시던 형수님과 누님과 또 다년간 내왕하던 손님들이 내게 작은 주인이라고 부르던 생각과 또 동네에 같이 자라나던 동무들과 시간만 있으면 만나보던 기생 연홍이와 소월이와 또 평양성에서 사업하는 사람들과 매일 상종하던 생각이 심각하게 되는 때에는 내가 왜 달아나는가 하는 후회가 나의 지금 달아나는 계획을 방해를 주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작정하고 발길을 만경대로 돌려놓았으니 이 발길을 다시 평양성으로 돌려가지고 회정할 수는 없는 사정이니 에라 청년 장부가 한번 작정한 것을 고칠 수 없다는 결심을 하는 동시에 배는 닻을 감아가지고 뚜뚜 고동을 불면서 떠났다. 지금 평양성에 전 시가에 난리가 났다. 방사겸 하나 달아나기에 우리 집안은 물론이요 전 평양 상노팔이 복잡하게 되었다. 사람 사람이 서로 만나서 지금 둑비전골에서 객주사업하는 方迺亨(방내형) 동생이 돈을 많이 받아 가지고 다시 달아났다고 곳곳이 떠들게 되었다. 그때에 평양성에서 신문이 오늘 같이 출간되고 있었다면 방사겸 달아난 이 보도가 신문 첫장 선두에 대서특서로 제목에다 방사겸이가 돈을 많이 가지고 달아났다는 광고가 되어서 전국적으로 알려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나라는 호랑이 같은 전제 압박 밑에서 출판자유 언권자유를 가지지 못하고 이런 전제정부의 명령대로만 살아가는 때에 신문 출판사업이 정부에나 일반 민중에 어떠한 큰 관계있는지 자세히 모르기 때문에 대소 성시를 물론하고 신문사업할 사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평양같은 도성에도 신문 한 장이 없은 고로 아무리 큰 사건이 발생되어도 널리 광고가 안되어 원근을 물론하고 서로 알지 못하게 되는도다. 이상에 말한바 내가 한번 평양성을 떠나게 되는 동시에 평양성과 우리 집안이 다 한번 경동하게 된 것은 내가 무슨 명예가 고상하다거나 또 무슨 유공한 사람이 되어 일판 평양성 중이 요란하게 된 것은 결코 아니었었다. 나는 十七, 八세 된 청년으로 백씨당께서 하시는 객주사업에 재정 출납하는 직무를 맡아보던 사람이어서 돈 줄 사람도 나를 찾고 돈 받을 사람도 나를 찾으려고 한다. 그리 적지않은 평양성 전 시가가 남북으로 나뉘었는데 북쪽 영문 앞에서부터 남문통까지 한 三十블럭 가량되는 전 좌우편에 형형색색한 즐비한 전방마다 우리 객주에서 여러 가지 물건들을 외상으로 사다 놓고는 매 장날마다 내가 가서 얼마씩 받아오는 고로 이 상업하는 사람들이 나를 잘 알게 되고 나도 평양성 전체 상업가들을 잘 알게 되었다. 내가 달아나던 날은 평양성 장날이었다. 이날은 평양성이 적다하리만큼 사처에서 물건을 팔고 사노라고 지레 모인 날이어서 골목마다 사람이 꽉꽉 차서 들여 덤비고(붐비고) 국수집 장국밥집 떡집 객주집 할 것 없이 팔고 사고 먹고 마시고 하는 사람이 인산인해를 만들어 가지고 박작(복잡)한 날인데 나도 이 복잡한 가운데서 사환애 둘 데리고 전방마다 들어가서 돈을 받아서 중백씨 전방에 적체하여 놓고는 또 다른 전방이나 다른 객주집에 가 돈을 받는 때에 우리가 남에게 갚아줄 것은 내가 찾아다니면서 갚아주는 것이 아니고 돈 받을 사람들은 돈을 받으려고 나를 찾으러 다니게 된다. 나는 이러한 형편에서 홀출(훌쩍) 부지거처로 달아나고 말았으니 돈을 나에게 갚을 사람들은 나의 백씨한테 돈을 받으러 오지 않으니 무슨 일이야 물어 볼 필요가 없지마는 우리한테 돈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나를 찾아다니다 만날 수 없으니 자연 백씨 사무소로 들어가서 돈을 달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백씨 사무소로 돈 달라고 하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니 자연히 내가 잘못된 것을 의심하게 되어 나를 찾으려고 사람을 많이 내세워서 나를 찾는 중이나 이미 달아난 사람을 평양성에서는 찾을 길 없어서 기생의 집을 다 뒤지고 또 뒷성너머 남자들 목욕하는 곳에 가서 장번에 벗어들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은 혹 목욕하다 깊은 물에 빠져 죽었나 하는 의심이 있어서 벗어 놓은 의복을 조사한 것이었다. 우리 집에서는 상사난 집 모양으로 통곡이 진동하고 큰 야단이 일어났다. 자친님께서는 나와 친절하게 놀던 나의 동무들을 찾아다니시며 나의 생사여부를 묻게 되었다. 우리집 옆에 사는 金在鉉(김재현)이라는 사람은 나와 아주 친절한 친구인 고로 내가 아무날 어디로 달아나니 같이 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 사람은 외아들로 사랑을 받는 사람으로서 달아날 생각이 없었다. 자친님께서 이 사람한테 가서 너는 내 자식이 어디로 간 것을 알 터이니 빨리 대달라고 하니 속일 수 없는 형편을 알고 실제대로 만경대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차종호와 같이 갔다고 말하였다. 이제는 집에서 더 찾으려고 애쓸 것도 없고 통곡할 것도 없는 것은 죽지 않고 인천으로 사위와 달아난 것이 분명히 판명되었으니 인천으로 가신을 보내어 찾기로 작정이 된 모양이다. 나는 만경대서 매부와 같이 배를 타고 올라오는데 선중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양반 한 분을 만나 며칠동안 재미나게 담화를 하였다. 이 양반은 기천 군수 이경호라 하는 옥관자를 붙인 양반이다. 이분은 서울 농동이라는 곳에 집을 두고 평양 기생들이 서울로 올라오면 진연에 참례하도록 주선하여 주고 기생들의 등을 벗겨먹는 일을 하고 있는 듯하여서 나는 평양 기생들의 이름들을 물어본즉 나는 모르나 관치 않게 많이 아는 듯 하여서 내가 좋아하는 평양 기생 연홍이를 아는가 물으니 지금 진연에 와 있다고 하면서 잘 안다고 하기로 내가 서울 가면 연홍이를 한번 만나보려고 한다 하니 자기 집으로 찾아오면 만나보게 주선하여 준다 하기를 이 이경호 씨의 문패를 적어 가졌다. 우리는 이럭저럭 하는 동안에 우리 탄 배는 벌써 인천항에 도착되어서 하륙을 하였다. 우리는 객주집에 기숙을 정하고 수일 쉬어가지고 인천시가와 항구 근처를 구경하였다. 인천도 평양보다 좀 번화하고 물산이 들고 나는 것이 과연 조선에는 큰 항구요 또 대도시 가운데 빠지지 않을 만한 인천항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미국으로 간다고 인천을 와서는 곧 미국으로 갈 준비 않고 여러 달 동안 이럭저럭 잘 놀고 흥청거리는 가운데 서울도 내왕하게 되었다. 나는 연홍을 만나려고 서울 가서 기천 군수를 지낸 이경호를 찾아갔다. 나는 이경호 집 집문 밖에서 슴겁지슴게 이리오너라 하고 한 두세 번 길게 뽑았다. 한참 있노라니 한 十四,五세 가량 된 최립중(초립동)이 나와서 문을 열어준다. 아마 하인은 없는 모양인 듯 지금 열어주는 최립중(초립동)이는 아마 이경호 아들인 듯하다. 나는 사랑으로 들어가서 이경호에게 인사를 한즉 자기도 인사를 하고는 앉으라 하면서 담뱃대에 기삼이를 담아 주면서 다정히 대접을 한다. 나는 연홍이를 만나기 위하여 왔노라 한즉 이경호 말이 참 안되었소 하면서 수일 전에 연홍이가 평양으로 내려갔다고 하는구려 하면서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본다. 할 수 없지요 하고 나는 대답을 하고는 조금 더 앉았다가 서울 구경이나 하고 인천으로 다시 가려 합니다 하고 평안히 계십시오 하고는 문 밖을 나섰다. 그러나 어디로 갈 방향은 모른다. 그래서 슬근슬근 걸어서 농동골로 나온다. 어떤 청년 둘이 앞에 오는데 한 사람은 매(매우) 낯이 익기에 자세히 보니 평양성 함일섭의 아들이었다. 어쩐 일인가 우리가 다 평양사람으로서 평양에서 만나기 드물더니 오늘 서울서 이같이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으랴. 하여간 반갑다. 나는 함씨에 묻기를 서울와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한즉 벼슬을 하나 얻을까 하고 와 있다고 한다. 대관절 자기 처소로 가자고 하기에 따라갔다. 매우 어렵게 지내는 모양같아 보인다. 그래도 나를 대접하기 위하여 둘이서 수군수군하더니 찼던 안경을 끌러 친구를 주면서 전당국에 가서 몇 원 얻어서 먹을 것을 사가지고 오라는 모양 같아 보인다 한참 있더니 두부와 콩나물과 제육을 조금씩 사가지고 와서 자기들 손으로 음식을 장만하여 놓고 먹자고 하기에 같이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더니 나라 감투를 써 볼 생각이 없나 묻기로 감투는 무슨 감투란 말인가 물었다. 함씨의 말이 참봉이나 주사가 되기를 원하면 자기가 주선하여 주겠다고 한다. 나는 이것을 모르는 것 아니다. 그러나 짐짓 참봉이라니 눈 먼 참봉이란 말인가? 또 주사라니 멀쩡히 성한 사람에게 주사가 소용있나 라고 나는 웃었다. 자기들도 웃는다. 함씨는 벌써 연전부터 참봉이 되어서 감투를 쓰고 있다. 나는 우스개 말로 함 참봉 당신은 눈을 멀쩡히 뜨고서 왜 소경으로 행세를 합니까? 한즉 함씨는 웃으면서 자 조롱의 말은 그만두고 감투를 쓰고 평양으로 가라고 하면서 자기가 주선한다면 한 一千兩이면 될 듯하다고 자꾸 졸라댄다. 함씨 생각에 우리 집이 평양에서 상당히 사업을 하니까 내가 돈 천냥이나 써도 관계가 없을 줄로 알고 자꾸 달라 붙는다. 나는 서양식의 사방모자 감투는 원하되 우리나라 매관매직의 감투는 원치 않는다고 거절하여 버리고 총총하여 인천으로 가야 되겠다고 작별하고 문 밖을 나섰다. 세월은 여루하여 벌써 인천 와 있는 지도 반년이 잘 되었다. 가지고 온 돈은 거의 다 써버리고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객주와 거래하는 서울 객주하는 이씨를 찾아가서 거짓말을 하고 몇 천냥 당겨쓸까 하고 다시 서울을 나가서 이씨한테 말을 하여 보았다. 벌써 나의 백씨께서는 원산 인천 서울 객주하는 사람들에게 내 동생이 달아났으니 만일 찾아와서 거짓말로 돈을 달라 하더라도 일푼 주지 말라고 우리와 거래하던 곳은 전보를 하여서 일푼전 돌려 쓸 수가 없이 되었고 겸하여 집에서 나를 붙들어 가려고 사람을 인천과 서울에 많이 내세워 가지고 탐문한다는 소식이 있다. 그래서 매부와 나는 걱정을 하다가 한 곳에서 기숙을 오래 못하고 자주 옮기었다. 보통 낮에는 안 나가고 밤에만 나가 다녔다. 하루는 매부께서 어디 나갔다 오셔서 지금 인천항에 개발회사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나는 개발회사가 무엇이요? 매부한테 물었다. 개발회사라는 것은 별것이 아니고 미국영지 하와이 군도에 동양인 이민을 주선하는 회사인데 미국 사람이 주장하는 밑에 일인들이 많이 사무를 본다고 하시면서 매부께서 이 이민에 통변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나는 영어를 모르니 통변이 될 수 없고 보통 노동 이민으로 가게 될 수밖에 없다마는 매부 한 분만이라도 통변으로 가게 된 것만은 다행이다. 우리는 하와이 이민으로 가게 되어서 눈 검사를 하게 되었다. 매부의 눈은 좋아서 눈 검사를 잘 치렀으나 나는 눈이 부족하여 여러 날 눈을 고쳐가지고야 일본 신호(고베)를 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하와이 가는데저 눈 검사가 더 심하여 나는 오래 눈을 고치느라고 있는 동안에 벌써 매부께서는 이민동포 七, 八十명을 대동하고 하와이로 가는 배를 타고 나를 일본에 떨어뜨리고 혼자 가신다. 나는 이곳에서 매부를 잃고 섭섭한 것보다 외로워서 슬픈 생각이 일어나서 견디기 어려웠다. 이렇게 한 달 동안을 혼자서 지내며 눈병을 매일 일본 의사에게 가서 고쳐가지고 나도 하와이로 가는 이민배를 타게 되었다. 이번 나와 같이 가는 이민동포는 한 五, 六十명인데 통변으로 같이 가는 이는 이노익이라는 분인데 영어의 에이 비 씨 디 겨우 배워가지고 통변이라고 따라왔다. 일본에서 세 주일 동안이나 망망한 태평양을 건너서 하와이 진주만으로 들어와서 호놀룰루항에 도착되자 이곳서 이민 동포를 각섬으로 분배하여 보내는 직무를 맡은 안정수 씨가 선상에 올라와서 우리더러 하와이 섬으로 오늘밤에 다른 배를 타고 간다고 통기를 하여주고는 가버리고 말았다. 나는 매부께서 어느 섬에 가 계신지 물어볼 기회도 없었다. 하와이 군도는 여러 섬으로 성립되었지마는 사람이 사는 섬은 하와이섬과 마우이섬과 카우아이섬과 오아후섬 이 넷이 사람 사는 섬들인데 진주만과 호놀룰루항이 오아후섬에 붙었다. 이 오아후섬 진주만은 미국 태평양 함대가 활동 공작을 여기서 하게 되므로 이곳에 태평양 함대 대부분이 이곳에 집중하고 있는 第一 군항이다. 이번 제이차 세계전쟁에 일본이 이 군항을 파괴하면 미국 해군이 멸망하여 태평양전쟁을 꼭 이길 줄 믿고 일본이 암수적 행동으로 진주만에 폭탄을 던져서 이 유력한 군항에 집중되어 있던 군함 수십 척이 침몰 혹 파괴되어 여러 千萬元 손해를 당하고 분이 바짝 난 미국 국민이 이 원수를 갚아야 된다는 사상으로 주야로 상하국민이 일체 합심하여 두드려 만든 군기가 단기간에 태산과 같이 쌓이게 된 고로 자기가 쓰고 남는 군기 군물을 연합국에 공급하여 이번 전쟁을 이기었다. 나는 하와이섬 길노이라는 농장을 가서 자리를 정하고 일을 나가 시험하여 보았다. 사탕대는 우리네 수수밭 같은 가득 들어선 그 틈에서 사탕대를 꺽어서 놓는 일인데 비를 맞으면서 하는 일이요 구두에 감탕 흙이 잔뜩 달라 붙어서 무게가 수십 근이니 발을 옮겨 놓기가 힘드는 고로 나는 할 수 없다 하고 반일만 하고 처(處)로 들어와서는 매부 계신 곳을 찾아 가려고 이 농장에서 떠나 호놀룰루를 다시 나가서 안정수를 찾아서 물어보아야 찾겠다는 생각을 가지고는 이럭저럭하여 두어 주일을 이 농장에서 지내었다.

    2 방사겸 평생일기 2권

    대동교육회 조직한 지도 벌써 반년이 잘 되었다. 지난 반년 동안에 회무는 날로 확장되어 가는 우리의 대동교육회를 이 외따롭고 작은 패서디나에서만 있을 수 없는 것이 마치 작은 생선이 얕은 물에서 지낼 수 있으나 큰 생선은 얕은 물에선 살 수 없으니 불가불 깊고 너른 큰 강을 찾아가야 잘 살게 되는 것과 같이 우리 대동교육회도 창립할 그때에는 불과 십여 인에 지나지 않던 이 회가 오,륙삭 동안에 자라서 사, 오십명 회원이 되어 회무가 차차 발전이 되므로 따라서 한인이 거주하는 지방마다 지방회를 두기로 우리 교육회에서 작정하고 우선 순찰위원 한 사람을 뽑아서 상항(샌프란시스코)과 새크라멘토와 프레스노와 나성(로스앤젤레스)을 한 번 순찰하면서 회원을 모집하기로 동의 가결로 작정을 하고 순찰위원에 중대한 임무를 나에게 맡긴다. 나는 사회 방면에 아무 경험과 연단(단련)이 없이 이런 중대책임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대동교육회 창립자로 오, 륙삭 동안 사회에 행사하는 것을 대강 훈련을 받은 이것이 도움되어서 순찰위원으로 파송하는 것을 겁내지 않고 이 사명을 받아가지고 오, 륙삭 동안 한집에서 동고동락하던 형제자매에게 섭섭한 상별을 하게 되는 때에 김밀니사 부인께서 자필로 일심단결 영원불망이라는 맹약서를 써서 주면서 사겸 씨 이번 각처 동포순찰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또 의회의 영수 장경 선생께서는 사겸 씨는 나의 오른팔과 같이 믿으니 나는 아무 염려치 않고 사겸 씨를 보내오 하시면서 회무가 진행되는대로 자주 통신하라 부탁하는 이분들의 섭섭한 표정을 나타내는 보는 나도 섭섭한 감을 금치 못하고 이분들과 작별을 하고 떠났다. 내가 지금 떠나가는 곳은 어딘가. 또 누가 나를 오라고 청함을 받고 가는가? 아니다. 내가 지금 가는 곳은 아무 데나 동포만 있다면 가려고 하는데 금문공원이 있는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발길을 돌려놓았다. 상항(샌프란시스코)은 우리 동포가 그중 많이 거주하며 또 안창호 선생이 창설한 친목회가 번성하여 공립협회로 변경하였을 때이며 이곳 동포 전체의 90%가 공립협회 회원이요 이 회 회원 가운데서 교회와 여관도 설립하고 공립신문도 발행하는 때이었다. 이곳은 공립협회의 중심지가 될 만한 모든 설비와 세력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우리 대동교육회 회원은 아직 한 사람도 없고 문경호 목사가 달아난 그 까닭은 그때에 상항(샌프란시스코) 지진 후에 일본 영사가 한인에게 구제금을 준다는 것을 공립협회에서는 반대하고 받지 않아(않은) 돈을 받아가지고 동포가 무서웠었다 하는 것 오직 나 한 사람만이 말을 붙이게 되었다. 때마침 문경호 목사가, 주장하던 미미교 목사로 있다가 처자를 두고 달아나서 미미교당은 주장무인하게 되어서 예배일에도 문을 닫고 있는 때에 나는 이 교당의 간사가 되어서 예배당을 목사 책임 외에는 다 하게 되는데 수십 명 교인을 기숙시키는 등사를 하게 되는 때에 이 교인들 가운데도 공립협회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만나는 사람마다 대동교육회원이 되라고 열심으로 권면하여 수십 명 회원을 얻어가지고 교육회 第一地方會를 이 교회 속에서 조직하였는데 이때에 회장은 김찬일 씨로 추천이 되었으며 이곳 회원 가운데 장인환 의사가 있었다. 나는 이곳 와서 지방회를 조직하고 파사데나에 있는 총회에 보고를 하면서 신설한 지방회 인준장을 청구하였더니 수일 후에 인준장이 내도하여 완전한 지방회 자격을 가지게 되었고 회원은 나날이 늘어서 벌써 삼, 사십 명의 유력한 회원이 집중되는 때에 하와이 동포가 선편마다 수십 명씩 건너오는 고로 사무가 복잡하여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없는 고로 장경 선생을 빨리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오시라고 하였다. 수일 후에 장 선생께서 나오셨다. 나는 모든 중대 사무는 다 장 선생에게 맡기고 나는 하와이에서 오는 선편마다 나가서 동포를 맞아들이는 책임을 맡게 되었다. 하와이에서 배가 오면 나뿐 아니라 공립협회에서도 사람 나가서 새로 오는 동포를 서로 많이 데리고 가려고 어떤 때는 승강이 된다. 하와이로 오는 동포는 다 짐짝이 있다. 고로 우리 회관 번지를 적은 카드를 많이 가지고 나가서 배에 만츰(미리) 올라가서 동포의 짐짝마다 카드를 달면 이 짐짝 주인은 다 내가 모시고 우리 회관에 와서 기숙을 우선 공급하며 원하는 대로 각양 일자리를 주선하여 주는 동시에 이분들을 다 회원을 만들기에 전심전력하는 것이 그때에 교육·공립 두 회의 활동이었다. 우리 교육회 발전이 속도로 내닫는 이런 때에 미미교회 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 하고 회관 하나 새로 잡고 파사데나에 있던 총회를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옮겨왔다. 이때에 우리 회의 영수 장경 선생이 중국 보황당 강유위와 양계초와 서신을 교환하는 때에 교육을 고쳐 보국이라고 회명을 대동보국이라 한 것은 제국을 혁명하는 때에 제국을 보호한다는 것은 좀 잘못된 듯하다. 그러나 강유위 양계초를 이용하려는 장경 선생은 짐짓 강유위 주장과 같이하여야 도움을 받게 될 줄 안 것인 줄 나는 안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대동보국회 중앙회를 조직하고 중앙회장은 문양목 씨가 추천되었고 중앙회에 거관보 대동공보에 주필은 백일구 씨였다. 나는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보던 일을 다 이분들께 맡기고 새크라멘토로 나왔다. 이곳에도 하와이로 건너온 동포가 많이 나와서 여기저기 있는 농장에서 들일하는 분들 있다. 그러나 다 만나볼 수는 없다. 이곳에서 처음 만난 좋은 동지 몇 분은 내가 잊지 않고 늘 기억한다. 김홍균 양주은 하상옥 박영식 이희대 김치환 한의선 강홍범 김계선 윤흥호 고응도 정장손 정국현 정국서 송사원 김필권 김수권 장인명 이분들을 다 이곳에서 만나 대동보국회 회원이 되어서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고 지방회장은 이희대 씨가 추천이 되었었다. 회관 내에 기숙사를 설치하고 수십 명이 한 데서 재미있게 지내는 동시에 청년들과 나는 학교를 가서 공부도 좀 하며 회무도 보며 얼마 지내다가 삭도(새크라멘토) 회무는 장인명 김홍균 황주은 이희대 이 몇 분에게 맡기고 나는 프레스노라는 곳으로 나갔다. 이곳은 공립협회 사람이 많이 와 있는 곳이며 이곳 소산은 포도와 온갖 실과 농사하는 중심이 되어 일이 많은 곳이다. 이곳에는 나의 친교 김원택이라는 분이 계시고 또 다른 좋은 사람들이 많다. 이분들의 조력으로 이곳에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조직하고 경찰당장은 김원택 씨로 추천이 되어 시무하게 되었다. 오늘 중앙회에 공함을 받아보니 하와이로 동포가 연속하여 많이 건너오는데 이분들이 일을 구하지 못하여 이분들이 곤란한 편이 많고 회금을 거둘 수 없어(서) 중앙회관 유지가 문제니 사겸 씨는 프레스노에서 노동을 주선하여 이곳서 일 못하는 회원들을 데려다 일을 하게 하여야 회관에 곤란을 면하겠다 하기로 나는 지금부터 노동 주선하는 책임을 맡아가지고 오마일, 십마일 바깥 농장으로 다니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그러나 아직 포도 딸 때는 안 되었다. 지금은 四月 중순이니 아직도 넉 달 동안을 기다려서 八月 중순이 와야 포도를 따게 되겠다. 그러나 지금부터 농주와 일꾼을 얼마나 원하는(지) 약조를 하여 두어야 되는고로 나는 세 곳에 포도 딸 일에 일꾼을 한 九十名 대어주기로 하고 약조기를 만들려는 때에 농주가 약조금 五十元이나 一百元을 나더러 걸라고 한다. 이 약조금은 내가 이십 명이나 三十名을 대마하고 약조하였다 못 대면 이 약조금을 농주가 먹는 것이 당연한 사업상 경위인줄 알고 나는 세 곳 농주에게 一百五十元을 갖다 걸어놓고는 상항(샌프란시스코) 우리 중앙회에 편지를 하였더니 동포가 나를 찾아 많이 나온다. 이 곳에 우리 경찰소 회관에 기숙사를 준비하여 놓고 이분들을 우선 일을 얻어 보낼 때까지 식사와 잔용채를 외상으로 공급한다. 아직은 실과밭에 일이 흔치 못하여 한 농장에 여러 사람을 요구하지 않는 때에 이 모인 사람들을 내가 지금 무슨 큰 일자리를 주선치 못하면 이분들은 이곳 저곳으로 다 헤어져서 이미 포도농장에 근 百명 사람을 대어 주기로 一百五十元 약조금을 걸어 논 이 일이 다 실패될까 염려하고 나는 큰 일자리를 구하느라고 자전거를 타고 사처로 내왕한다. 나는 이러는 동시에 이왕 알던 어떤 백인 친구를 만나서 일자리를 구하는 형편을 말하니 이 친구 나더러 왜 철로 회사에 가서 도십장을 찾아보지 않는가? 한다. 나는 철로일은 생각치 않고 농장일만 구하다가 이 친구의 일러주는 철로일이 구미가 바싹 나서 나는 다시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도십장을 찾아갔다. 이 도십장의 사무소는 사람이 들락날락 분주하여 도십장과 말할 기회가 없어 오래 기다려서야 말할 기회를 얻어가지고 철도일에 동양인을 안쓰겠나 물었다.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묻는다. 나는 튼튼한 청년이 한 백 명 가량이 일을 구한다고 하였다. 도십장은 만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당신네 나라 사람들이 철로일을 할 줄 아는가? 한다. 나는 서슴치 않고 우리나라 사람은 근실히 일 잘하는 사람들이니 물어볼 것 없이 한번 시범하여 보면 알 것이 아닌가 하였다. 도십장은 히죽이 웃으면서 마침 이곳에서 二, 三 마일 밖에 새로 갱을 신설하니 명일로 八十名을 데리고 나의 사무소로 오면 보낼 주선을 하여 준다고 하기로 나는 반갑고 즐거운 마음으로 회관에 와서 여러 동포에게 철로일 얻어 놓은 말을 하니 다 반갑게 알고 명일에 철로역장으로 나갈 준비들을 한다. 지금 얻어가지고 가는 철로일은 이 타운에서 삼 마일 밖인데 짐차에서 먹고 자고 철로 노선을 고칠 것은 고치고, 새로 놓을 것은 새로 놓는 일인데 우리를 관할하는 백인 십장 한 사람이 있고 나는 통변 겸 우리 동포의 일한 시간과 날을 적는 타임 키퍼가 되어서 삽자루 들고 일은 아니하나 그러나 어떤 때에는 우리 동포들이 일하는 시간에 일은 아니하고 삽을 땅에 박고 서서 십장이 오고가는 것도 상관치 않고 나태하게 이야기할 때와 객차가 지나갈 때는 일을 하는 척 해야 되는데 우두커니 서서 객차 지나가는 것을 볼 때에 우리 십장은 나에게 일을 시키라고 몰아대는 것은 지나가는 객차 속에 철도회사에 큰 사무원이나 도십장(이) 있어서 우리 갱 일꾼들이 일을 안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우리 십장에게 실책 혹 일자리를 잃게 될까 겁이 나서 나에게 누누이 부탁하는 것이 객차 지날 때에는 일을 부지런히 시키라 하여 나는 어디로 객차가 오는 고동이나 연기가 보이면 객차 옵니다 일들 좀 부지런히 하시오 한다고 어떤 동포는 일을 하는데도 내가 일을 재촉한다고 나를 시비하는 분들도 있고 십장은 내가 일을 시키지 않아서 저같이 객차가 지나갈 때도 삽을 짚고 서서 이야기만 하니 나의 잘못이라고 나를 몰아댄다. 고로 나는 어떤 때는 차라리 삽자루를 들고 일을 하는 것이 편하게 생각한 때가 여러번이 었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내가 이것을 참고 견딘 것은 다름 아니라 약조한 포도일과 대동보국회의 맡은 사명을 달성하여 보려는 희망과 책임을 가지고 십장과 일꾼 둘 사이에서 이 곤란한 것을 참고 견디어서 포도 딸 때까지 지내왔다.우리는 철로일을 그만두고 프레스노 회관으로 들어와서 수일 쉬어 가지고 세 곳 포도농장으로 갈라 나가서 포도 따기를 시작하였는데 어떤 이는 七, 八元 어떤 이는 十元 이상 번다고 다 만족히 생각한다. 나는 이 포도밭에서도 통변 겸 시간을 적는 책임을 맡은 외에 여러분의 소용되는 것을 타운에 들락날락하며 사다주면서 포도밭일을 보살핀다. 이 포도 따는 일은 일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도급으로 매 목판에 얼마씩 정하여 가지고 빨리 따는 사람은 많이 벌고 적게 따는 사람은 적게 버니 내가 빨리하라고 채근할 필요가 없고 나는 다만 매일 몇 목판씩 누가 딴 것만 책에 적었다. 농주한테 돈을 찾아서 내가 가질 10%를 제하고 내어주며 또 포도를 다 따주면 농주가 나에게 一百元이나 二百元을 주고 또 맡겼던 약조금도 찾게 된다. 이상에 말한 철로일과 포도일은 대개 이러한 것이니 이런 일을 하여보지 못한 동포에게 이런 것을 알리기 위하여 여기 적어 두노라. 이상에 말한 철로일과 포도농장일을 나와 같이 한 이분들은 하와이에 이민으로 와서 근검절종하여 간신히 미주 대륙으로 간신히 선비만 장만하여 가지고 오신 분들이라 우리 대동보국회 중앙회관에서 외상으로 기숙을 하였고 입회금과 대동공보 대금 혹은 특별 의연한 이것들 다 적어만 놓고 나오신 분들이었다. 그동안 철로일 三삭 반과 포도일 한달 반 동안 이 두 가지 일을 필하니 어떤 이는 사, 오백원 어떤 이는 三, 四百元씩 벌었으므로 대동보국회에 적어 놓은 각양 의무금과 기숙비 등을 다 나에게 다 주므로 나는 이 돈을 다 중앙회관으로 들여보내니 중앙회 형편이 훨씬 펴게 되었고 이분들도 수백원씩 수중에 있으니 다른 좋은 일 얻을 때까지 아무 걱정 없이 된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긴다. 이곳 경찰장은 송사원 씨인데 이곳의 모든 회무는 송사원 씨에게 다 맡기고 나는 상항(샌프란시스코) 중앙회관으로 들어왔다. 장경 씨와 여러 회원들을 여러 달 만에 다시 만나니 서로 반갑기 한량없었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몇 주일 지내는 동안에 중앙회에서 나에게 또 순찰원의 중임을 맡기면서 솔트레이크시티 유타주로 가라고 한다. 이곳은 우리 동포가 수삼백 명이 있어 철도일을 하는데 이 철도일을 주선하는 사람은 공립협회의 안창호 선생 대임 제二六 인물 金成武(김성무) 氏인데 이곳 있는 동포 반수 이상이 공립협회 회원들이 있는 곳이었다. 불행히 이때 미국에 경제공황이 일어나서 각양 사업은 저락되고 노동은 극히 귀하여 실업자가 처처이 많아서 정부나 민중이 곤란을 당하게 되는 그 원인이 우리 동포에게도 미쳐서 철로역장에서 일하던 동포 수백 명이 솔트레이크시티로 모여 가지고 한인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 때였다. 그러나 나는 이곳에 일을 하러 오지 않고 대동보국회에 사명을 가지고 와서 이곳 동포를 대동보국회 회원을 만들어 가지고 이곳에 지방회를 조직하자는 목적으로 왔으니 공황 중에 있는 동포라도 회원이 되라고 권면을 안 할 수 없었다. 며칠동안에 수십 명 동포가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고 이곳에 경찰소를 조직하였다. 마침 이곳에서 여관하는 사람은 나와 친분이 있는 강정근 씨와 김순호 양씨인데 이 여관이 즉 우리 경찰소가 되었다. 그러나 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일푼 거두지 못하고 책에 적어만 두었다. 이곳에 마침 세력을 잡고 있는 공립협회 사람들은 이곳에서 혼자 공립협회를 확장하려고 하는 때에 대동보국회 사람 내가 홀출(훌쩍) 와서 활동하는 것이 응당 밉고 또 시기할 것은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 말 없이 나 할 일만 하기로 주장하였다. 이곳에 있는 다수 공립협회 회원의 영수되는 김성무 이치겸 양씨는 장차 독립전쟁을 하기로 준비해야 되겠다고 총포탄을 다량으로 사서 원동으로 보내야 되겠다고 하고 철도역장에서 일하는 동포에게 수삼천 원을 걷어가지고 이치겸이가 원동으로 나가서 종무소식이라고 이곳 동포들이 떠들어대는 바람에 공립협회는 좀 타격을 받게 되는 동시에 우리 대동보국회에는 활동할 기회가 더욱이 좋아져서 회원을 많이 얻게 되었다. 그러나 회금은 한 푼 걷을 수 없는 형편에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이 없는 줄로 깨닫고 있는 중에 김창화라는 동포가 콜로라도 푸에블로 석탄광에서 솔트레이크시티 지방에 일 못하는 동포가 많다는 말을 듣고 이분들을 석탄광으로 이민하여 가려고 이곳에 내도하였다. 나는 이 김창화 씨를 만나(서) 탄광 형편을 물었다. 이분의 말이 탄광일이 좀 위험하여 보이나 그러나 월급은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보는 사람마다 가자고 권한다. 그러나 땅 속으로 수십리씩 내려가서 하는 일을 누가 원하느냐고 하면서 다 거절한다. 이 김창화 씨는 실패이다. 이분이 본시 탄광 주인의 경비를 가지고 사람을 데리러 왔다가 따라갈 사람이 없으니 걱정 중에 있다가 나를 보자고 한다. 이 김창화께서 사겸 씨가 사람을 좀 주선하여 줄 수가 없나요 하면서 내가 탄광으로 갈 사람을 몇 십 명만 주선하여 주면 나의 덴버까지 가는 차비를 탄광 주인이 판비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솔트레이크시티 박용만 박재형 계신 덴버로 가려고 하던 차 김에게 이 말을 듣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탄광으로 갈 사람을 주선하여 보마 하고 여러 사람 있는데 찾아가서 석탄광일이 이곳에서 철도일 하는 것보다 갑절 벌 수가 있고 또 이곳에는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일이 아직 없으니 탄광 일을 가는 것이 이곳에서 외상 밥 먹고 노는 것보다 낫다고 우선 신입한 우리 회원에게 권고하면서 나도 같이 간다고 하니 가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수십이 된다. 나는 김창화를 찾아가서 한 三十명 가량 주선하여 놓았으니 언제쯤 떠나려 하오 물으니 수일 후에 떠나자고 한다. 나는 덴버 박용만 씨 계신 덴버로 가지마는 이 탄광이 덴버 근방이므로 이분들과 같이 탄광까지 가서 평생에 구경도 못한 석탄광도 한 번 구경할 겸 또 신입 회원들의 자리 잡는 것도 보고 아직 회원 되지 않은 분들을 우리 회에 입회도 시킬 겸 하여 근 五十명 되는 동포 대중과 같이 떠났다. 우리를 실은 화차는 우렁찬 기적소리를 힘있게 한 번 불고는 움직이기 시작하여 슬근슬근 성 밖에 나와서는 잦은 걸음으로 극저거려서 벌써 망망한 벌판을 지나서 오불고불한 산협으로 들어가서는 화통을 하나 더 달고 산중으로 자꾸 들어가는 노선에 좀 번주군한 곳에 여기저기 집들이 있다. 이것이 아마 석탄 광부들이 사는 마을인가 보다 하였더니 과연 우리가 내릴 석탄광이라고 차부가 고함을 지르고 내려가자 김창화 씨도 우리와 내리자 하여 내려갔다. 때는 오, 육시 가량 되었으니 저녁 먹을 준비를 해야 되겠다. 김창화 씨는 탄광 회사로 가서 광부가 몇 십 명이 왔으니 기숙할 처소를 잡아 달라고 하는 모양인 듯한데 일할 한인들은 벌써 석탄 캐내는 지하 속을 내려들 가보고 와서는 모두 다 겁이나 한다. 그래서 왜들 그러시오 하니 잘못 왔다고들 한다. 지하로 수백 수천 척을 내려가서야 일을 한다니 돈에 아무리 게걸이 들었어도 이런 일을 할 수 없다고 가지고 왔던 짐짝들을 다시 다 싸가지고 김창화 주선자도 오기 전에 한 사람 두 사람씩 다 슬그머니 다 달아났다. 어떤 사람은 궤짝은 무거워서 버리고 간 사람도 있다. 그러나 나는 달아날 필요도 없고 이곳에서 끝장을 보고 가려고 이틀 동안을 남아있는 두 사람과 있었다. 탄광 회사의 차비로 근 오십 명 사람이 왔다가 하루도 일을 안 하여 주고 다 달아났으니 탄광 회사에서 한 一千元 잘 손해가 났었다. 물론 김창화 씨에게 실책을 돌렸을 것은 사실이다. 우리 남아있던 세 사람도 떠나서 덴버로 갔다. 덴버에 박용만 박재형 두 분이 여관을 하는데 이곳 한인들도 일을 못하고 三, 四十명이 여관에서 외상 밥을 먹고들 있는데 이곳에서 몇 십리 밖에 있던 촌에서 장작일 하는 동포가 수십 명 있다고 하여 나는 이곳을 찾아갔다. 이곳은 삼림이 무성한 곳에 집도 없고 다만 군막을 치고 군막 속에서 기숙하고 지내는 캠프이다. 나 간 날 저녁에 군막 앞에 무덩불(모닥불)을 피우고 수십 명이 모여 앉은 좌석을 향하여 나는 여러분께 드릴 말이 있노라 선언하고는 저는 대동보국회의 사명을 가지고 여러 곳에 계신 동포를 찾아다니면서 우리 대동보국회를 찬성하여 달라는 것이 저의 유일한 목적입니다. 찬성이라는 것은 즉 여러분께서 대동보국회원이 되어 달라는 것이외다. 여러분이 다 대동보국회원이 되신다면 우리의 보국회가 일층 더 커지고 유력하게 될 것입니다. 보국회가 크고 유력할수록 우리의 기울어져가는 국가를 바로잡을 날이 점점 더 가깝게 오는 줄 알고 여러분께서는 우리 보국회에 지금 입회하시는 것이 즉 보국회를 크고 유력하게 하여 망하여 가는 국가를 바로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고 말을 마치고는 나는 지필을 가지고 여러분께 보국회원 되시기 원하시는 이는 성명과 연령 본국 주소를 적어달라고 하였다. 이곳에 三十명 동포 계신 데서 二十명이 대동보국회에 입회하기로 허락을 한다. 나는 반가운 중에서 감사한 예를 드리고 그날 밤차를 타고 다시 덴버로 왔었다. 박용만 씨는 이왕에 상면이 없고 이번에 와서 처음 상종하나 별로 다정히 군다. 저는 처음 만나보나 우리 보국회 영수 장경 씨와는 서로 친분이 있는 고로 나에게 이같이 동정을 하는 듯하다. 박용만 씨는 어떤 사람인가 하면 우리나라 유신운동 때에 유명한 삼만이라는 가운데 한 사람인데 학식과 국가운동에 수완이 상당히 있으므로 우리의 영수 자격을 가지신 분이다. 이상 말한 삼만이라는 뜻은 이승만 박용만 정순만 이 세 분을 가리켜 가로대 삼만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 세 분이 일찍이 동지가 되어서 유신운동을 유력하게 하다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씨는 미국으로 오고 정순만 씨는 아령(러시아령)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혁명운동을 하다 한인한테 맞아 죽고 그 몇 해 후에 三一운동의 결과로 상해에 망명정부가 조직된 수년 후 박용만 씨도 원동으로 나가서 군사운동으로 아령(러시아령)과 남북 만주로 다니다가 한인한테 맞아 죽었다. 이 유명하던 삼만 가운데서 한 분이 남아 있다가 최후에 독립 성공하신 이승만 박사 한 분이 남아있어 이 삼만이 같이 하자던 이 독립운동의 결속을 하였다고 할 만하게 되었다. 내가 나의 평생 지내온 역사를 적는 가운데 이 삼만의 과거사를 장황이 적어 놓는 것은 이승만 박사와 박용만 씨 이 두 분이 우리 대동보국회를 열정으로 찬성하심으로써 대동보국회에서 주장하던 대동교의원 기관보에 이 두분의 간곡한 서문을 보내주신 것을 늘 감사히 생각하고 이 두 분을 늘 경외하는 마음이 있었다. 덴버 박용만 씨 여관에서 한 달여 동안 유하였다. 이 동안에 박용만 씨의 찬성으로 대동보국회 경찰소를 이 여관 내에 설립하였으나 경제공황으로 인하여 회금은 한 푼 거두지 못하게 되니 이곳에 오래 있어야 소용 없기로 나는 중앙회에 모든 형편을 보고하는 때에 여기서 떠나 시카고로 가서 공부를 하겠으니 이미 맡아 가지고 여기까지 온 순찰원을 사면하기로 청원하였다. 그러나 중앙회에서 나의 사면청원서를 접수치 않고 퇴각하면서 아직 순찰원을 사면 말고 그냥 가지고 있으라는 공함이 내도하였다. 나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기로 작정을 하고 있는 때에 조지수라는 사람을 우연히 만났다. 조지수는 어떤 사람인가? 이 사람은 우리 집 옆에 사는 사람인데 一千九百年에 나와 같이 미국으로 달아났던 동무로 서흥골까지 가서 나의 사촌형님한테 잡혀갔던 좋은 친구를 이와 같이 천만 뜻밖에 만나게 되었으니 피차의 즐거운 것은 말할 수 없다. 나는 수일 후에 시카고로 떠나가 공부를 하겠다고 하니 돈 五十元 하나를 주면서 노비하라 한다. 이분은 그동안 철공장에서 일을 근실히 오래하여 여러 백 돈 벌어가지고 와서 나에게 적지않은 五十元을 주는 것이다. 나는 이 돈으로 상항(샌프란시스코) 중국인의 약국집 란당에게 길림삼을 五十元어치 부치라고 하였더니 며칠 후에 五十元어치 홍삼이 왔다. 이것을 가지고 타운타운(마을 마을) 들려서 팔아가지고 시카고를 오고도 남은 돈이 한 一百五十元 가량이 잘되니 공부할 때에 요긴하니 잘 쓰게 되겠다. 나는 시카고에 와 김진사 승제 씨를 만났다. 이분은 식자로 유여하고 글씨를 잘 쓰는 고로 청인들한테 위대(우대)를 받는 분인데 청인의 집에서 숙식을 무료로 하고 지내는 이요 청인을 많이 아는 고로 나를 위하여 청인의 찹수이집 일을 하나 얻어서 준다. 지금 방학때 불원하여 학교는 갈 수 없으니 일이라도 오는 개학 때까지 하여 몇 백元 벌어가지고 가는 것이 필요하기로 청인 찬관일을 얻어갔다. 이곳은 지금 세계적으로 자동차 공창이 많기로 유명한 세인트루이스라는 곳이다. 나는 찬관 일이 처음이 되어 어떤 부분에나 다 서투르다. 그래서 종일 고기 써는 일을 두어 달 하면서 온갖 찹수이와 온갖 양찬 만드는 것을 유심히 보았다. 내 생각에 온갖 것을 할 듯하게 생각을 가지고 두어 달 더 일을 하고는 학교 개학 때 되기로 시카고로 와서는 휘튼칼리지에 B반 중학반에 입학하여 한 일년 잘 공부하였다. 나의 항상 소원이 웅변가이었기 때문에 중학과정 가운데 앨로큐션(elocution:웅변술) 과정을 특별히 좋아하였다. 여하간 하기방학이 되어 집 있는 학생은 집으로 가고 친척 있는 학생은 친척을 찾아가지마는 집도 친척도 없는 나는 갈 곳이 특별히 없어 시카고로 와서 우트밍하우스에 방을 하나 잡고 가방 두 개를 방안에 갖다놓고는 우선 시원히 목욕을 하려고 목욕탕에 갔다 오니 가방 두 짝을 무엇이 목욕할 동안에 가져갔다. 이 가방 두 짝에는 나의 온갖 살림이 다 든 것인데 졸지에 누가 가져갔으니 이것이 이른바 피게죽에 탕도라는 말과 같이 나는 어려운 학생인데 변변치 않은 것이나마 내 살림 전부를 다 가져갔으니 나는 거지가 당장에 되었다. 아무리 도적놈이기로 이와 같이 고학하는 학생의 살림 전부를 다 들어갔으니 네가 잘 살 듯하냐 하는 저주를 하는 이것이 도적놈과 인사불상이라는 말과 같으니 이놈을 저주한들 무슨 용처가 있나 아! 잊어버리고 말자는 결단을 하고 방에서 나와서 김진사 승제 선생 계신 청인의 전방을 찾아갔다. 김진사는 나를 보고 매우 반가워 한다. 나도 반가웠다. 이 크나큰 시카고에 한인이라고는 사오 인에 불과한데 다 일을 못하고 어렵게 지내는도다. 나는 작년에 가서 하던 청인의 찬관의 일을 얻었다. 작년에는 고기써는 일을 하였고 금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나갔다. 다행히 찬관에서 매니저로 있는 사람의 성이 方氏여서 나와 커즌 사촌이라고 하며 친절히 군다. 하여간 이 세컨드 쿡이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고 어떤 것은 어떻게 해야 될 문세속을 몰라서 곤란히 지내는 가운데서 차차 경력과 수단이 생겨서 용이하게 견뎌나가게 되는 것을 나는 다행히 여기고 갈리기 전에는 가지 않기로 작정하고 근 삼개월 동안을 지내었다. 추기 개학 때가 왔다. 그러나 나는 학교로 갈 형편이 못된 것은 전체 살림을 도적맞았기 때문에 옷도 신발도 장만을 다시 하여야 학교로 가게 될 형편이므로 한 일년 이곳에서 일 하기로 하였다. 세월은 유수같이 쉼 없이 흘러서 삼백육십오일이라는 긴 끝을 찾아 나왔다. 이것이 즉 내가 작정하고 시작한 일 년된 만기이다. 나는 작정한대로 학교로 다시 가기로 하고 시카고로 와서 수일 유하고 있는 때에 하와이 이민시대에 총무로 있던 안정수 씨를 만나게 되어서 입학할 사를 말하게 되는 때에 안정수 씨께서 자기 공부하는 서북대학에 같이 공부하는 것이 좋다고 권면한다. 자기는 핵홀에서 목사 공부를 하고 나는 아직 중학 二年 급이 대학에 입학할 수 없고 아카데미 대학에 B반 즉 중학과에 입학하였다. 나는 학비를 一百五十元 주고야 공부을 시작하였다. 나는 이 학교에 있을 동안에 매일 안정수 씨한테 가서 나의 공과에 모르는 것을 물어보니 나의 공부에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안정수 씨는 목사 공부를 그만두고 시카고에 큰 음식점에 스튜어드로 고빙이 되어 가고 나 혼자 이 학교에서 있게 되었다. 안정수 씨는 미미교인으로 미미교에 부속한 이 서북대학에서 목사 공부를 하다가 그만둔 이유는 에디 부인이 보스턴에서 창설한 크리스찬사이언스라는 신교의 전도를 받고 감화가 되었는데 이 교회에 유력한 교도 에버핫이라는 부인이 경영하는 음식점에 일을 얻어 간것이었다. 나도 이 학교에서 반 학기 동안을 지나서 성탄절 방학 때에 시카고로 들어와서 안정수 씨 있는 곳을 찾아가 만나보는 때에 일을 하라 한다. 그러나 나는 이왕 하던 청인의 찬관 일을 원하므로 안씨가 주선하여 주는 일은 착수치 않고 청인 일을 얻어가지고 갔다. 작년에는 세컨드 쿡으로 갔었고 이번에 퍼스트 쿡으로 갔다. 주방에 일하는 청인들이 나를 보고 희롱하는 청언으로 거년 시에는 세컨드 쿡으로 왔다 금에는 퍼스트 쿡으로 왔으니 이 다음에는 매니저가 된다고 힙스맛시라고 한다. 월급 때가 왔다. 빨간 봉투에 一百五十元 지전을 넣고 방선생이라고 봉투에 쓴 것을 매니저가 갖다 준다. 나에게 뿐 아니라 모든 일꾼에게 다 이같이 하는 것인데 서로 얼마씩 받는 것을 모르게 되는데 청인 쿡이 여섯이요 양찬하는 쿡 셋인데 청인 쿡들은 영어를 몰라서 저희 쓸 물건을 저희가 주문을 못하고 내가 청찬 만드는 물건까지 주문하게 되므로 청찬 쿡보다 二十五元씩을 더 받는 이것을 청인들이 알고 시기가 여간이 아니고 나를 이왕보다 미워한다. 그러나 이 찬관원 주인이 나를 여기 보내었으니 나의 일을 빼앗을 사람은 없으리라는 자신을 가지고 한동안 잘 지내었다. 불행히 나는 병이 나서 일을 더 할 수 없이 되었다. 병인즉 이질병을 만나서 무한히 고통을 하다가 버팔로로 가서 병원으로 가서 한 달여간 치료하였으나 병을 거근치 못하고 시카고로 와서 장인명 씨가 하는 여관에서 치료하고 있는 때에 장건상 이희경 두 사람이 와서 이 여관을 없이 하기를 주장한다. 그 무슨 이유를 가지고 이 집을 없이 하려느냐고 나는 물었다. 장, 이 양인의 대답은 이 집이 있기 때문에 시카고 한인이 일도 안가고 외상 밥과 잠을 자고는 청인의 잡기판과 기생의 집에만 다니게 되니 이 집을 없이 하여 이런 사람들을 부지할 곳을 없이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 집 창립한 역사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일찍 이곳에 와서 내가 五十元을 만츰(먼저) 내놓고 한인들한테 공정연조를 거둬 가지고 가구를 장만하여 놓고 상당한 사람을 맡기어 기숙 범절을 주장하게 하던 것인데 외상으로 자고 먹는 사람이 많아서 부지하기 곤란하여 시카고 전체 한인이 모이어 회의한 결과 이 집을 장인명 씨에게 전권을 주어서 확장하여 가지고 벌어먹으라고 내어맡긴 것이다. 장건상 이희경은 국민회 사람으로 이 집을 세울 그때에는 이 지방에 오지도 않았고 또 이 집에 돈 한 푼 낸 일도 없고 성외에 나가 공부하는 학생들인데 이 집을 없이 하고 안하는 것을 말할 아무 관계가 없는 이 사람들이 이 집을 없이 한다는 주장을 유독 내가 많이 강경히 반대하였다. 이 집을 주장하는 장인명 씨는 대동보국회원이요 또 나의 친구인 까닭에 나는 이 일에 극히 반대하기를 주장하고 나가 이 집 없이 한다는 장, 이 두 사람은 나를 원수같이 볼 것은 사실이다. 집 없이 한다는 것이 한 문제가 되어서 시카고 한인 전체 공정회를 열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고 전체 한인이 모인 공동회에서 오늘 모인 것은 이 집 없이 한다는 사건으로 모였다는 취지를 나는 설명을 하고 앉은 뒤에 장건상이가 일어나서 이 집은 잡기와 기생집에만 다니는 사람들의 구혈이니 없이 하여야 된다는 말을 하는데 대하여 모인 청중들은 거의 다 불만불평을 가지고 이 사람 저 사람 일어나서 장건상의 주장을 공격한다. 이 모인 공정회는 잠시 동안 수라장이 되었다가 최후에는 이 집을 그냥 두든지 없이 한다든지 거수로 가부를 결정하기로 하여서 집을 그냥 두자는 거수가 많아서 장건상의 주장이 실패를 당하고 나서도 일행 집을 없이 한다고 야단을 부리면서 미국 법정에 가서 재판을 하자고 한다. 장건상과 이희경은 자기 편을 돕는 사람이 없으므로 시카고 한인 가운데 불량한 한인 몇을 데리고 다니면서 술과 찹수를 사주면서 이 사람들을 은근 끌었다. 김관칠 김용오 권시중 김창오 이 네 사람은 주색잡기나 하고 우리 사회나 국가운동에 돈 한 푼 내지 않고 난봉이나 부리는 이 사람들을 사귀어 가지고 자기의 불철저한 주장을 이겨보려고 수차 공정회를 열어가지고 회의할 때에 이 불량한 네 사람은 육혈포를 가지고 왔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한 번은 공정회 석상에서 내가 오늘 다시 모인 취지를 설명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나에게 대하여 네가 무엇이기에 번번이 나서서 우리의 주장을 반대하는가 하기로 나는 회장 규칙이요 말하는 때에 이희경이가 규칙은 무슨 규칙하기로 옳다 규칙이 없다고 한즉 나도 나의 혈기를 안 쓸 수 없다 하고 주먹으로 이희경의 볼편을 한 번 본때 있게 냅다 질러서 당장에 꺼꾸러진다. 좌중은 다 (와스스) 일어나서 싸움을 말리느라고 야단법석이 일어나니 모이었던 공정회는 아무 결과 없이 파회하고 말았다. 수일 후에 장건상 이희경이가 미국 법정에 재판을 걸어서 우리 편에서 피고자 몇 사람이 와야 된다 하기로 나는 불가불 가야만 될 것은 장건상 주장에 처음부터 이것을 반대하는 사람의 대변자가 되기 때문에 이일과 장인명과 같이 재판정에 가서 우리는 이 재판을 이기고 나왔으나 율사비를 一百元 주었으니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이 미친놈 장건상 이희경 이 두 놈 때문에 돈 없애고 외국인에게 망신만 하고 말았다.이러한 이 미친놈들이 상해에 임시정부가 조직된 뒤에 원동으로들 게나가서는 외무차장으로 있어서 미주 동포가 보내주는 그 돈으로 뱃지들을 붙이고 있다가 이번 해방된 기회를 이용하여 가지고 본국에게 들어가서는 또 이 박사의 모든 정략을 반대하다가 민주공화정부가 수립된 뒤에는 공산당 철벽 뒤에 숨어 있는지 근일에는 이 장건상이 찍소리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대동보국회 형편이 어찌된 모양인가? 나는 三年前에 상항(샌프란시스코) 중앙회관을 떠나 솔트레이크씨티로 석탄광으로 덴버 이 세 곳을 거쳐서 회원도 三, 四十名을 얻고 두 곳에 경찰소도 세웠다. 그러나 경제공황으로 회금 일 푼을 거두지 못하고 시간만 허비하고 사회에 도움을 주지 못할바에는 차라리 영어자라도 배우는 것이 옳다는 생각으로 시카고를 온 것이다. 그동안 하와이에서도 동포가 안 오고 불과 한 一千 명쯤 되는 한인 가운데 두 단체가 일어나서 우리의 실력과 인력이 미약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연고로 이 두 단체 당국자들은 대동보국회와 국민회를 합하자고 말이 오고 가는 때이었다. 마침내 장, 전 양 의사가 스티븐스를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총살한 사건이 일어나서 두 회를 합하자는 운동이 일어나서 두 회 당국이 합하기로 상약된 모양인지 장경 씨와 백일구 문양목 이 중앙회 간부 세 분이 나에게 이 두 회가 합동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물었기로 나는 여기 대하여 찬성도 반대도 안하고 다만 바라는 것은 두 회가 공정한 마음으로 두 회에 이왕 회명을 없이하고 새로 회명을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공정히 지어가지고 합하기만 바란다고 이 세 분에게 답장하고 며칠 있노라니 합동되었다는 기별이 다시 왔다. 나는 대동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다는데 대하여 반대치 않고 공정히 합한다면 어느 때던지 찬성한다고 우리 중앙회 당국에게 이미 선언한 것인데 오늘 합동하였다는 공함을 볼 것 같으면 내가 원하던 바와는 대상부동하게 틀릴 뿐만 아니라 대동보국회에 대치욕을 당하게 되는 합동이라고 할 것은 이 두 회가 합한 새 회명만 보더라도 누구나 다 알 것이다. 합동된 새 회명은 大韓人國民會라 하였으니 합하였으나 안 합하였으나 국민회라는 그 명사는 그대로 있고 大同保國會는 은연히 없어지고 말았으니 이런 합동에 대하여 국민회 회원들이야 응당 만족하였을 것이나 보국회 회원들은 불평을 가지게 될 것은 사실인즉 이런 불공평한 합이 미주 우리사회에 무슨 유익을 주겠는가? 이것은 장래에 반동력의 씨를 심어 놓은 것이라고 여기 말하여 두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사회를 정말로 진흥시키자고 할 것 같으면 사회의 당사자들이 공평과 정직을 주장해야 되겠는데 여기에서 반하여 간교한 수단으로 남의 것을 정복하여 내 것을 만들려는 이런 불공정을 주장하는 사회는 가장 영리하고 수단이 능한 듯하나 이런 영리와 수단은 오래지 않아서 세상에 드러나서 이런 사회에 큰 영향을 줄 것은 사실이다. 국민회는 자래로 미주 한인사회를 혼자서 세력을 장악하기 위하여 덮어놓고 반대이다. 대동보국회는 간교한 수단으로 합병을 하여 치우고 상해 신정부 때에 이 정부를 개조를 해야 된다고 떠들었고 또 구미위원부에 세력을 잡으려다가 되지 않으니 위원부를 개조해야 된다고 재미 전체 한인의 대회를 불렀다. 그러나 동지회에서는 참석치도 않고 여기 대하여 불간섭하게 되니 위원부 개조 경영도 아주 실패하고 말았다. 또 해방될 임시하여 국민회는 미·포(미국·하와이) 한인연합회를 불렀으나 동지회와 부인회에서는 응치 않는고로 국민회 소속 단체 몇이 모여가지고 연합회라 지칭하고 대표자를 국민회 가운데서 김호 김원용 김병연 제씨를 뽑아서 해방된 대한에 파송하였다. 이 사람들은 내지에 가서 무엇을 하고들 있었는가? 다른 것이 아니고 이 박사가 하는 운동을 방해시켜 가지고 국민회에서 신대한의 권리와 세력을 잡으려다가 다 실패하고 미주로 돌아오고 말았다. 지금은 이 박사의 정부가 연합국의 정식 승인을 얻어 완전한 민주공화국 정부가 수립된 오늘날에 와서는 이것이 남북통일 정부가 아니고 다만 남방 단독정부인즉 우리 국민회에서는 이 단독정부와는 아무 관계를 안 한다고 공개 선언하고는 지금 영공사가 미국에 와서 미·포(미국·하와이) 동포를 보호하는 이것도 받기를 원치 않으니 장차 국민회가 어찌 되려는가? 이것은 자기들의 고려할 문제인즉 내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대동보국회 영수 장경 선생은 보국회와 국민회가 합한 후에 나를 만나려고 시카고로 오셨다. 나는 참 반가웠다. 장 선생은 나를 참으로 사랑하시고 또 자기의 오른팔과 같다고 서신 상에 누누이 말씀하신 것을 나는 믿고 이분을 사회방면에서는 영수로 숭배하고 사삿 교제로는 친형님 같이 대접하였다. 장 선생께서 지금 시카고에 오신 것은 수년 동안 온갖 정력을 들이던 사회운동은 하와이에서 건너오던 동포들이 오지 않고 재정상 곤란으로 회무를 발전시킬 수 없는 중에서 장인환 전명운 양 의사의 사건이 발생되어 서로 합동하자는 교섭이 빈번하게 되는 때에 합동한 회명이 좀 불만하나 장, 전 양 의사의 대사건을 순조로이 치러 나가자면 두 회가 합하는 것이 옳다 하시고 합하신 것이 살신성인과 방불하였도다. 오늘날 행세하는 大韓人國民會라고 하는 것은 大字는 大同保國會을 대표한 大字라고 하고 國民會라는 것은 그냥 둔 것을 불공정하게 되었다고 나는 불평을 가지고 이 두 회가 합한 후에는 이 회에 대한 모든 관계를 끊고 시카고에서 후일을 예비하기위하여 유학을 경영하던 때에 장 선생을 다시 만나서 이곳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장 선생께서 시카고에 주택을 하나 얻어놓고 부인과 상항(샌프란시스코) 교의원에서 길러낸 딸 코라를 데려다 살림을 하신다. 나와 유홍도 두 사람은 장 선생 댁에 같이 있어 한 집안 같이 지내게 되었다. 따님 코라는 그때 十四세 가량 되어 중학교를 시작하고 나는 아직 학교를 못가고 있는데 장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지금 우리가 돈을 좀 벌어야 장래에 국가운동을 실제로 할 기회를 만들 터이니 우선 몇 해 동안 돈 벌기로 주의하자고 자기는 삼을 몇 백원어치 사가지고 남양군도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다 하기로 나는 중미 쿠바로 삼을 사가지고 가겠다고 서로 언약을 하고 내가 만츰(먼저) 쿠바로 떠나갔다. 그 후에 장 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로 가신 뒤에 유홍도는 장 선생 댁을 보살피고 있다.나는 쿠바국 도성 하바나에 내렸다. 하바나 도성은 그리 크지는 못하나 화려하게 설비하여 놓은 것이 서반아(스페인)의 제도와 풍속 습관이 아직 있고 서반아(스페인) 언어를 사용한다. 이 쿠바국은 수백년 전에 서반아(스페인)에게 정복을 당하여 동화가 된 나라로서 五十年 前에 미·서(미국·스페인)전쟁에 미국이 승전한 결과로서 자주 독립한 나라이요 이 나라 인종은 세 가지 인종이 있는데 본토종은 인디언 홍인이요 또 혼합 인종이 있는데 서반아(스페인) 인종과 흑인과 혼합한 것이며 이외에 순전한 서반아(스페인) 인종이 있는데 이 서반아(스페인) 사람들이 정부에 모든 권리와 또 민간에도 중요기관은 다 서반아(스페인) 사람이 잡고 앉아서 지배한다. 이 나라에 이민으로 온 청인이 여러 만 명 되어 어디를 가든지 청인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청인이 이같이 많기 때문에 너도나도 삼을 청인한테 팔려고 온 것이다. 하여간 나는 쿠바에 온 것은 큰 운수가 열리었다고 혼자 생각하였다. 삼을 가지고 가는 곳마다 청인들이 환영하고 다투어 사니 벌써 수천원 어치를 팔았다. 하바나에서 떠나서 타운 타운에 들러서 샌디에고라는 항구까지 가서는 배를 타고 영국 속지 제미가(자메이카)라는 나라 도성 킹스턴에 가 내렸다. 이곳 토인은 전부가 다 흑인이요 생활은 극히 빈궁하여 발에 신 신은 사람을 볼 수 없고 다 맨발로 다니는 것뿐이요 토종 흑인들은 무엇을 하여 생활을 하는지 일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없고 사업하는 흑인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데 이곳에 이민으로 온 청인들의 조그만큼씩한 장사바치가 사처에 있어가지고 토인의 식용품 일용품을 파는 것을 나는 가는 곳마다 찾아볼 수 있다 들은즉 이같이 빈궁한 나라에 와서 푼 전 장사를 하여 큰 자본가 된 사람이 여기도 여럿이라고 하니 대체 청인은 어디를 가든지 근실 근검하여 생활이 유족하여 잘 지내는 이것 한 가지는 우리도 청인한테 배우는 것이 옳다고 나는 스스로 자인함을 마지않았다. 이곳에 수삭 유하면서 삼을 좀 팔려고 주선하여 보았으나 별로 재미를 보지 못하고 간신이 내왕경비나 얻어가지고 다시 쿠바국으로 와 수삭 동안 삼을 팔다가 하바나 도성에서 배를 타고 뉴욕항에 와 내렸다. 이번 쿠바 와서 삼을 판 도합이 한 六千元 가량이 잘 되었으나 일 년 동안 돌아다닌 경비가 二千元이 잘 된 고로 뉴욕까지 가지고 온 돈이 한 四千元에서 더 되지 않고 삼은 아직 수백원 어치가 남아있다. 뉴욕 있을 동안에 전명운 씨 댁에서 한 주일 동안 유하는 때 방화중 목사를 만났는데 이 방화중 목사는 뉴욕에 와서 수중에 무일푼하여 고생이 막심하다고 하면서 나에게 남아있는 삼을 다 외상으로 주면 한 주일 내에 팔아서 삼 값을 갚겠다고 하기로 나는 방목사의 말을 믿고 수백원 어치가 잘 되는 것을 전부 다 주고 一百元만 달라고 주었는데 이 삼을 가지고 보스턴에 가서 여러 백원 어치를 팔았다는 소식이 오나 방 목사는 나에게 삼 값을 갚지 않는다. 나는 이 사건으로 수차 편지하였으나 회답도 없으니 나는 더 기달리지 않고 시카고로 오고 말았으니 이 돈 百元은 아무 생광없이 방화중 목사의 잡기와 외도에 쓰게 도와주고 말았다. 방화중이 목사라기에 보통 사람보다 신용이 있을까하고 이 삼을 외상으로 준 것인데 이 목사님의 속은 음탕하고 부잡하여서 한인의 눈앞에서는 목사인제 우리 사회에 주장자같이 행동을 하다가 한인 없는 외딴 곳에 가서는 청인의 잡기판에서 노름하기와 기생집에 다니기와 또 하와이 한인 목사로 고빙되어 나가서는 예배 보러오는 얌전한 부녀를 예배당 뒤에서 음란한 행동을 하다가 교인들한테 쫓겨나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는 사교회에 얼씬 못하고 죽은 목숨으로 지내다 늙어서 일도 할 수 없이 되니 한인 양로원에 가서 구구이 여년을 마치었으니 이것은 자기의 온갖 죄의 값이라고 안할 수 없다. 뉴욕에서 시카고로 오는 길에 에핑햄에 있는 비셀칼리지를 한 번 심방하고 싶어서 내렸다. 이곳은 조그마한 타운인데 이 학교가 있다. 미스터 비셀은 즉 이 학교 설립자요 또 교장으로 있다. 나는 이 분을 찾아가서 면회하기를 청하고 한참 있노라니 자기 사무실로 들어오라고 하기에 들어갔다. 미국 사람이 찾아간 사람에게 점잖은 태도로 하는 말이 What can I do for you? 라 한다. 이 말은 즉 내가 당신을 위하여 무엇을 도와드리리까라 한다. 예 저는 당신의 미술학교가 유명하다기로 이리로 지나가는 길에 한번 구경하고 가려고 일부러 내려서 찾아왔습니다. 예 아직까지는 미국에 이런 미술학교로는 이 학교 하나밖에 없지요 하면서 나를 데리고 모든 부분을 실제로 보게 구경시켜 준다. 이 미술학교는 포토앤그래픽을 가르치는데 이 미술이 상공업을 발달시키는 능력과 미술적 방법을 가졌다 할 것은 이 세상 인류사회에서 먹고 입고 신고 온갖 쓰는 작은 장기로부터 큰 기계와 집이고 공원이고 산하의 경치를 다 본질대로 만들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상에서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은 꼭 그대로 만들어 내어 신문 잡지에 천만장이라도 박아내서 광고를 널리 하여 사람이 모르는 물건을 팔 수도 있게 한다. 한가지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미국의 유명한 통신 매매상회 씨어쓰오토벅 회사 카탈로그를 볼 것 같으면 천만종류의 물건을 진경으로 사진을 박아놓고 전국적 세계적으로 이 책에 있는 물건을 살 수 있고 팔 수도 있는 것이 즉 이 미술이 만들어 쓴 것이요 또 신문 잡지에서의 세계에 유명한 사람의 언어 동작의 보도를 받고는 즉각으로 이런 사람의 사진을 신문 잡지에 판각하여 공중에 나오는 것이 다 이 미술의 능력과 방법으로 된다. 이 미술은 무엇이고 눈으로 보는 것을 사진을 먼저 박아가지고 이것을 화학으로 새겨 내는 것인데 신기한 방법과 기기묘묘한 생각에서 이 미술이 발명되어 농상공업을 환연하게 발전시키는 미술인 줄 알고 태서각국에서 출판하는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이 미술로 박아낸 사진판이 매장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없는 데가 없다. 그러나 이런 신발명 미술을 아직 믿지 못한 동양의 신문 잡지를 볼 것 같으면 사진판을 박아낸 것을 찾아보기가 힘이 들 뿐 아니라 무슨 시체 옷 광고 같은 것을 할 때에 이 미술이 아니고는 그 옷의 맵시있는 모양 그 천의 호불호혹 색깔을 모르고 살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을 이 미술을 이용하여 판을 박은 광고는 분명히 그 본질을 박았기 때문에 모양과 색깔과 무슨 시체인지 그 박아 논 그림을 친히 보기 때문에 사서 입을 구미가 바싹나게 만드는 것을 바로 말하자면 좋은 음식을 소반에 담아놓아 여기에서 김이 문문(풀풀) 나고 호(희)미한 냄새가 코를 지리게 되면 누구나 이 음식에 구미가 동하여 한 번 맛을 보았으면 하는 생각이 사람 사람에게 있으리라고 믿는 것과 같이 무슨 물건이든지 아름답게 판을 박아 낼 것 같으면 이것을 보는 사람에게 살 의사와 취미를 주게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나는 이 학교를 심방하고 시카고로 오려하는 때에 이 학교장 비셀 씨가 나를 대하여 이 미술공부를 하라고 권고하면서 이 학교 마치면 곧 일을 얻어 보낸다 하며 월급은 매일 八시간(時) 동안이요 한 주일에 五日만 하고 七十五元을 받는다 하며 공부 마치기가 바빠서 큰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데려간다 하면서 꼭 자기 학교에서 공부하도록 권고를 한다. 나의 생각에도 월급과 시간도 길지 않으니 공부할 의사가 슬그머니 나서 시카고를 갔다가 다시 와서 작정하겠다고 말을 하고는 떠났다. 장경 선생은 오스트레일리아에 가서 삼을 잘 파신다는 편지는 두어 번 받았으나 아직 오시지 않았고 장부인과 딸 코라만 계신 곳으로 짐짝을 가지고 내 집 찾아들어 가듯 하였다. 장 부인과 코라는 퍽 반가와 한다. 유홍도는 일도 안가고 아직 장 부인 댁에서 지내고 있다가 나를 보고 반가운 중에 저는 일 년 동안 지내온 경과사항을 말하고 나도 삼상으로 돌아다니던 모든 격력담(경력담)을 기울여 놓았다. 나는 에핑햄 미술학교로 갈까 말까하고 있는 것은 나의 목적이 대학교를 마쳐 가지고 동포 사회에서 근실한 일꾼이 되자던 것을 그만두고 미술학교로 가서 개인 생활에 유족한 공부를 한다는 것은 잘못이라고 혼자 말하고는 아직 작정을 못하고 있다. 하루는 이 학교 교장의 편지가 왔다. 읽어본즉 나를 입학하라고 간곡히 권면한 사연이 아주 점잖고도 정답다. 나는 지금 수중에 있는 돈을 여기저기 쓰게 되니 무엇이든지 속히 작정을 해야만 이 수중에 남아 있는 한 三千元 잘 되는 것을 나의 장래를 위하여 잘 써야 되겠다. 고로 생각다 못하여 이 미술학교로 가기로 작정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가지고 에핑햄으로 떠나갔다. 교장의 사무실로 찾아가서 입학할 것을 다 수속하여 가지고는 교장이 주선하여 주는 방으로 가서 자리를 잡고 이튿날 개학 시에 학교 들어가서 미술에 대한 랙추어 하는 말을 듣고는 공부하는 반에 들어가서 선생이 가르치는 대로 하면서 하루를 지내었다. 이 학교의 학생은 한 삼백 명 잘 되는데 기숙사에서 먹고 자는 경비가 매 주일 十元이요 학비가 일 년 二百元이요 또 연습하는 동판과 연판 또 여러 가지 케미컬 화학에 관한 모든 것과 종이와 온갖 것을 다 가지고야 이 공부를 하게 되는 고로 입학하는 날 근 일백원 어치 물건을 샀었다. 이 공부는 물재를 많이 사서 연습을 많이 하여야 이 미술에 성적이 양호하다고 하기로 나는 다른 학생들 보다 물재를 많이 가지고 연습을 많이 한 고로 이태 동안에 졸업장을 맡아 가지고 나왔으나 어떤 학생들은 연습을 많이 못하고 三, 四년에도 못 마치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하여간 나는 이태 동안에 이것을 마쳐가지고 시카고로 들어올 때에 마음이 무한이 즐거웠었다. 장 선생께서는 남양에서 삼상에 재미를 많이 보시고 미주로 오신 때이다. 피차에 반갑게 다시 상봉하여 장래 경영을 하고 있는 때인데 장 선생께서는 가족을 데리고 상해로 나가신다고 하면서 나도 장차 나오라 하신다. 정말로 장 선생은 떠나가신다. 나와 유홍도는 이 좋은 동지요 친구인 장 선생을 이별하고 얼마 동안은 심히 섭섭하였다. 장 선생은 상해로 나가서 그곳에 식구를 정돈하여 놓고는 중미성쇠 출판사에 나를 위하여 일을 얻어놓고 나오라 하신다. 그러나 나는 동양으로 아직 나갈 생각이 없고 이곳에 좀 더 있을 생각으로 장 선생의 주선하여 주시는 것을 듣지 않고 미국에 있기로 하였다. 나는 에핑햄 재학 때에 가주(캘리포니아) 삭도(새크라멘토)에 있는 동지 김홍균 씨가 나를 장가를 가라고 누차 권하는 편지가 연속 내도한다. 그러나 나는 이미 시작한 공부를 마치기 전에는 장가갈 생각이 없어 지금은 장가갈 문제는 생각할 여력과 여가도 없으니 나를 권하지 말고 김형이나 좋은 혼처가 있다면 먼저 장가를 가라고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三十六年 前에 하와이 이민으로 온 동포 가운데서 소위 사진결혼이라는 풍기가 하와이에서 일어나서 미주 대륙에게까지 이 풍기가 성행되어 홀아비로 십여 년간 고적한 생활로 지내던 동포들은 사진혼이라는 소문을 듣고 가정생활에 뜻이 있는 동포들은 이럭저럭 주선할 길을 얻어서 벌써 몇 분 여자가 사진결혼하여 가지고 내지로부터 미주에 왔다. 이 선참으로 온 여자는 양주은 씨 부인과 김병규 씨 부인 김홍균 씨 부인 이분들인데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와서 남편 될 사람을 만나 볼 때에 만족한 여자도 있고 불만한 여자도 있었다. 만족한 여자는 다행히 사진만 보고 찾아온 사람이 보기에 괜찮고 나이도 많지 않게 보이니 만족하였을 것이나 불만을 가진 여자는 사진만 보고 찾아 온 남편 될 사람을 대할 때에 나이도 많아 보이고 얼굴도 사진과는 단단히 틀리니 잘못 찾아왔다는 후회로 불만이 생각하고 혼례를 하느니 안하느니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러나 최후에는 다 혼례를 하고 아들 딸 낳고 잘들 사니 다행이라고 하겠다. 하와이 동포 사진혼인의 대하여 별의별 말이 돈다. 어떤 사람은 나이 많으니 나이를 줄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얼굴 못나서 남의 사진을 빌려서 자기 사진이라고 여자한테 보낸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양서부지하여 결혼하려는 여자에게 친필로 쓸 수 없는 고로 유식한 동포의 손을 빌려서 연애적 편지를 여자가 결혼하기를 허락할 때까지 여자를 속여서 데려온 것들이다. 이러한 형편을 알지 못하고 찾아온 여자들은 다 우리나라 교회방면 학교방면에서 소학 중학을 다 마치고 온 여자들인데 결혼하려고 막상 찾아와 본즉 나이도 틀리고 얼굴도 사진보다 다르고 학식도 자본도 있는 줄 알고 불원철리에 태평양을 건너와 본즉 상상하고 온 희망이 절망되어 낙심 기절한 여자도 있고 결혼을 안 한다고 떠들어댄 여자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종말에는 다 화합하여 성혼하여 자녀를 생산하면서 잘들 사니 우리 외양에 나온 한인전도에 다행이라고 안할 수 없다. 이같이 사진혼인의 풍기가 미·포(미국·하와이) 동포사회에 성행되는 때에 유홍도 씨에게 편지 한 장이 왔다. 이 편지는 북간도 용정에 있는 장로교 목사 김내범 씨의 편지인데 그곳에 李萬玉(이만옥)氏의 딸 이살로매 양을 미국에 있는 좋은 청년에게 소개하여 보라고 유홍도 씨한테 편지가 왔었다고 하면서 나를 권고한다. 유홍도 씨는 이살로매 양을 어렸을 때에 원산교회에서 잘 알게 되었고 李萬玉(이만옥) 씨는 물론 친하게 알고 또 이 여자를 소개하는 김내범 목사는 년전에 유홍도 씨와 같이 한 이민 배를 타고 하와이 사탕농장에 같이 있다가 김 목사는 북간도 장로교 목사가 되었고 유홍도 씨는 大同敎育會 때부터 오늘까지 한 동지 친구로 보통하게 지내게 되는 때에 나를 이살로매 양에게 약혼하라고 여러 번 권면한다. 그러나 나는 미국에서 장가가는 것을 그리 촉망을 가지지 않은 고로 선뜻 작정을 안하고 있었다. 며칠 후에는 김내범 목사가 이살로매 양의 사진을 유홍도 씨에게 보내었다. 유씨는 사진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라고 하기에 받아들고 보았다. 피차의 연분인지 이왕에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한 여자의 사진을 처음으로 대할 때에 어쩐지 이왕 알던 사람과 같이 나의 전신에 실려있던 사랑 진정에 사랑이 이 여자에게 쏠린다. 이것을 영어로 로맨스라고 할런지 나는 이런 여성에 대한 로맨스를 이왕에 자아내본 적이 없었으니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을 알았든 몰랐든 간에 이것은 인성의 자연적 동기이므로 나에게 적합한 여성을 대할 때에 이 로맨스 즉 연애가 생기는 것은 천연적에서 일어나는 것이 누가 막을 수도 없는 것으로 깨달았다. 이러한 정세를 가진 나는 이살로매 양과 약혼하기로 작정하고 유홍도 씨한테 허락을 하였다. 유홍도 씨는 즉시 김내범 목사에게 편지를 써놓고 나의 사진 한 장을 동봉하여 부쳤다. 나는 혼자 생각하기를 나의 사진을 이 여자가 받아보고 만족하여 나와 약혼을 하겠는지 이런 권력은 나에게 있지 않고 오직 이 여자에게만 있다고 상상되니 이 사진 혼인이 꼭 되리라고 믿을 수 없다. 하여간 나는 편지 한 장을 감히 써서 이살로매 양에게 부치고 나의 희망하는 대로 회답이 오기를 고대하고 있다. 세월은 여루하여 하루 이틀 한 달 두 달 지나가서 편지 올 기한이 되었다. 지금 같으면 비행 우편으로 일주일이면 편지가 북간도에 넉넉히 갈 수가 있지마는 그때는 비행 우편이 아직 발달이 못 되어서 다만 화륜선으로 우체수(우편물)를 실어다 분전하게 되는 시일이 근 일삭 가량이 잘 되는 고로 본국에 편지를 하고 이 답장을 보려면 두 달 동안을 잘 기다려야 되는 때이어서 이살로매 양의 회답을 두 달을 잘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동양으로부터 편지 한 장이 왔는데 이것을 개봉하기 전에 이 편지는 분명히 이살로매 양에게서 온 것이 분명하구나 하고 개봉하여 사연을 읽어보니 꿈에도 보지 못한 나의 사진과 나의 편지 한 장을 보고 나와 약혼할 것을 흔연히 허락하였다. 나는 이러한 편지를 받고 반갑고 즐거운 것을 다 형언하여 말할 수 없이 기뻤다. 지금은 이 여자를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오게 하여 가지고 미주로 데려오는 것이 나의 책임이므로 나는 북간도에서 상해로 나올 노비를 부치고 상해에 계신 장 선생 댁으로 인도하였다. 나와 약혼한 이살로매 양은 혼자서 길을 떠날 수 없어서 자기 오라버니 준필 씨와 같이 청차를 타고 위험한 길을 무한한 고생을 하면서 상해 장경 씨 댁을 찾아와서 여기까지 무사히 왔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반가운 중에라도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젊은 여자가 머나먼 험한 길에 여러 날 청차를 타고 상해까지 찾아오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하였을까 또 이것이 오직 나 때문이다 하고 나는 더욱이 애처로운 정세가 일어나서 견딜 수 없었다. 이곳까지 무사히 온 것만은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신 은혜라고 하나님에게 감사를 올리었다. 장경 선생과 장 부인 또 코라, 헬렌 두 따님과 피터와 애거 두 아들이 다 나와 약혼하고 온 여자와 처남될 사람에게 다정히 대접하는 것은 옛날 동지요 친구가 되어서 고락을 같이 한 그 의분으로라도 안할 수 없었다. 그동안 나는 시카고에 있는데 오마하에서 찬관업 하는 고성태라는 동포가 그 찬관을 부지하여 나가기 불능한즉 유홍도 씨가 와서 도와주기를 구청하였다. 그러나 유홍도 씨는 나더러 가보라고 한다. 그래서 나는 오마하로 가서 그분들 하는 사업을 수일 구경하였는데 사업은 잘되는 자리를 가지고 할 줄들 몰라서 빚을 잔뜩 걸머지고 빚단련에 견딜 수 없이 된 형편인 것이 사실이다. 이 찬관은 고성태의 찬관만이 아니요 학생 사, 오인이 합자하여 차려놓은 찬관인데 고성태 씨는 매니저였었다. 이분들이 나와 동사를 하자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자본이 없으니 동사를 할 수 없다고 하니 자본이 없어도 동사를 하여 달라고 간청하기로 허락을 하고 나의 의견대로 좀 개량하여야 되겠다 하니 마음대로 개량하라고 허락한다. 이 찬관 전방은 크고 좋은 집인데 윗층은 방이 없고 다드 평창한 통방이다. 이 사업에 첫 정책은 경비를 줄여야 부지하여 가지 지금 경비를 그냥 두고는 누구든지 부지하여 가기가 힘들다고 하겠다. 이 사업의 동사인이 四人이요 또 나까지 하면 五人이다. 이 五人이 여관에서 방을 매일 매인 이 一元씩을 주고 자니 매일 五元이요 한달 一百五十元이다. 이것을 무슨 모양으로든지 없이 해야만 될 줄로 나는 알고 목수를 불러다 빈 윗층에 우리가 잘 방 다섯 칸을 초사로 꾸며 놓고 우리 다섯 사람이 자게 만들어 놓았다. 둘째로 할 정책은 이 집세가 매월 一百五十元이 많아 보이니 집주인을 잘 교섭하면 五十元 하나를 감함직 하기로 집주인을 찾아가서 五十元만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하나 안 된다고 내버틴다. 나는 다시 감하여 달라고 사정을 이렇게 하였다. 이 찬을 시작한 사람들은 공부하는 외국 학생들인데 학비나 조금씩 벌어가지고 대학교에 임하여 보려고 푼푼이 모아 가지고 이 찬관 시작한 것인데 경비가 많아서 돈을 남길 수 없는 것보다도 이 사업을 부지하여 가기가 곤란한즉 五十元만 감하여 주면 큰 도움이 되겠다고 사정에 우(又) 사정하였다. 집주인은 한참 생각하더니 허락을 한다. 나는 감사한 예를 하고 와서 동사인들한테 집세 五十元 감한 것을 말하니 일반이 다 대희한다. 아직도 한 가지 정책 있는데 이것은 일꾼 상 심부름하는 여자가 밤낮 여섯을 넷으로 줄일 수 있어 보인다. 이 여자들의 월급은 매 주일 十五元 씩인즉 여자 둘을 줄인다면 매주일 三十元이요 한달에 一百三十元이다. 이상에 말한 방세 一百五十元 집세 감한 것 五十元 일꾼 둘 줄이는데 一百三十元 이 삼종에 대하여 경제적으로 얻는 이익이 매월 三百三十元이 즉 매달 지출하는 경비 총액에서 줄었으므로 이것을 이익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워낙 빚을 많이 걸머지고 여러 달 내려온 까닭에 한두 달에는 다 갚을 수 없고 한 일 년 곤욕을 하여야 빚을 다 청당하게 되는 형편인 고로 동업인 가운데서 세 사람은 그냥 내던지고 나가서 일을 하고 오직 남아 있는 사람은 고성태와 나뿐이다. 그래 이 일을 감당하기 힘이 들어서 시카고에 있는 유홍도 정이용 양씨를 빨리 오라고 편지하였다. 수일 후에 이 두 분이 왔다. 이 두 분이 오자 고성태 씨까지 나가고 만다. 이것을 최초에 차려놓았던 사람은 다 나가고 우리 세 사람이 하게 된 것은 이 시작한 사람들 생각에 수태(여러 해) 진 빚을 다 갚고 돈맛을 보려면 한 일 년 동안 일을 죽도록 하여도 돈 한 푼 가지지 못하고 일만 하는 것보다 이것을 내리고 나가서 일을 하면 매일 사, 오원으로 五, 六元 벌 수가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다 나간 것이다. 나는 이 사업에 주장자가 되어 보는 일이 여러 가지다. 물건 사는 것 돈 받는 것 문서 하는 것 분주한 때에는 상 심부름을 하여 가면서 매니저 노릇까지 하니 시간이 참 없었다.상해에서 편지가 왔다. 뜯어보니 한 일삭 후에는 상해서 배를 타고 미국으로 온다고 약혼한 이살로매 양이 편지를 하였다. 나는 반갑고도 기뻤다. 이 편지를 유홍도 씨를 보라고 주었다. 나는 이 편지를 받고 오래지 않아서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가 이살로매 양을 만나야 되겠는데 이 빚을 담박(단박) 지고 간신이 지탱하여 가는 찬관 돈을 가지고 노비를 할 수가 없다. 나는 부득이 린콘에 계신 안재창 씨를 찾아가서 一百元 하나를 취하여 주어야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나가서 약혼한 여자를 만나 데리고 오겠다고 한즉 두말 않고 一百元을 준다. 이 돈을 가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나와서 윤혁 씨 여관에서 유숙하면서 아무 날 아무 배에 이살로매 양이 실려서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하였기로 이날을 고대 고대하여 기다려서 이날 아침에 상항(샌프란시스코) 부두에 이대위 목사와 같이 나가 기다리는 중 큰 배 한 척이 선창에 들어서니 선객들이 와스스하니 다 하륙하는데 상해로 오는 한인 오인이 내리는데 나와 약혼한 여자는 없다.

    3 방사겸 평생일기 3권

    이 배에 온다던 사람이 아니 왔으니 무슨 일일까. 상해에서 배 떠나는 시간을 몰라서 배를 타지 못하고 놓치었나. 배 떠나올 때에 둘 가운데 누가 하나 병이 나서 이 배에는 못 오고 이 다음 배를 타고 오려고 작정이 되었는지 무슨 까닭이 있을 것이다 하고 별의별 생각을 다하여 보았다마는 무슨 사정과 사고가 있어서 온다고 이미 통기한 이 배에 왜 아니 왔는지 이번 상해에서 이 배를 타고 온 한인이 몇 분이 지금 천사도에 갇혀 있으니 수일간 이분들이 나오면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할 줄 알고 나는 여관으로 돌아왔다. 여관에 있는 여러 친구들은 나와 약혼한 부인께서 이 배에 안 오셨나요 묻는다. 나는 어쩐 일인지 이 배에 안 왔어요 하였다. 지금 나는 이대위 목사를 찾아가서 이민국에 갇혀 있는 한인들이 언제 나오는가를 알아보려고 갔다. 이 목사를 만나서 물어보니 명일 오전 좀 되어 나오리라고 말씀하여 준다. 나는 명일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하고 여관으로 다시 와서 이럭저럭 밤에 잠도 잘 못자고 일찍이 일어나서 여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다가 윤혁 씨 내외분이 주방에서 조반을 장만하느라고 분주히 지내는 주방으로 들락날락 마음을 정돈치 못하고 있는 이것이 나의 성질이 너무나 예민한 까닭인가 자상자판을 안할 수 없었다. 이민국에 갇혀 있던 몇 분 한인은 지금 이민국 관리한테 여러 가지 문답을 치른 후에야 자유를 얻어가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에 와 하륙할 시간은 다 되었다. 아니나 달라 천사도에서 조그마한 종선을 타고 상항(샌프란시스코)으로 와서 내리는 일행을 보고 나는 찾아가서 이살로매 양과 이준필 일행이 이 배로 온다고 하고 안 왔으니 이분들을 아는가 물어보았다. 이런 가운데 한 분이 나서서 말하기를 상해서 같이 탄 청년 남녀가 일본까지 와서는 잡혀 내려갔다고 한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분기가 발하여 국민회관으로 달려가서 일본 영사가 어디 있나 물어보니 이대위 목사가 왜 일노 영사관을 묻는가 하기로 나는 일 영사를 찾아가서 미국으로 오는 일행을 왜 일본서 잡아 내렸는가? 하는 질문을 한번 강경히 하여보려고 한다 하였다. 이대위 목사는 나와 한 고향 지인이요 겸하여 사회상 관계로 친분이 이왕부터 있는 고로 나의 사건에 동정이 있으므로 이번 상해로 온 한인들한테 이살로매 양과 이준필 이 두 사람이 왜 이 배로 오지 못한 것을 자세히 물어본 결과로 이 두 사람이 상해서 이번 오는 몽골니아 배를 탔다가 다시 상해로 내려갔다 한다. 그 이유는 이준필 씨가 일인 선객하고 자리를 다투다가 조선 사람으로 드러나서 일본 지나다 잡힐까 겁이 나서 다시 상해로 내려갔다고 판명되었으니 일 영사를 찾아가서 질문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여 준다. 나는 이 말씀을 듣고 나의 열렬하던 분기는 식어지고 이 다음 배로 오겠거니 하는 희망을 가지고 여관으로 돌아왔었다. 며칠 후에 이살로매 양의 편지를 받아보니 참말 몽골니아 배를 탔다가 다시 내렸다고 하였고 샀던 선표는 이 배 함장한테 찾지 못하였으니 미국에서 교섭하여 찾으라고 하여서 나는 이 배 회사에 가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고 그 선표 두 장을 상해에서 몽골니아호를 탔다 내려간 그 사람에게 다시 주어 달라고 간청하니 걱정 말라고 하면서 허락을 한다.

    4 방사겸 평생일기 4권

    스탁 형편이 이 모양되니 하는 찬관사업도 잘 안된다. 그래 집세를 六삭 동안 매월 四千元씩을 못 물고졌다. 집 주인은 집세를 내라고 자주 와서 채근하기로 나의 스탁을 팔면 한 번에 다 물것이니 아무 염려 말라 만일 내말을 믿지 않거든 나하고 지금 은행에 가서 나의 八千여 元어치 스탁을 보여줄 터이니 가자하고 데리고 가 보이었다. 수일 동안은 잠잠하더니 다시 와서 채근한다. 그러나 스탁에서 돈이 나오지 않으면 지금 ●● 없으니 스탁 팔 때까지 참아 달라고 사정을 하나 듣지 않고 칸스테블을 불러서 나를 내보내기로 작정을 하고 나에게 아무 날은 옮겨가야 된다는 통지서가 왔다. 그러나 설마 내쫓기야 하랴 하고 여전히 사업을 하고 있었다. 벌써 집 주인은 나의 스탁 전부를 법률로 관할하였으니 내가 마음대로 팔수도 없이 되었다. 이런 중에서 스탁은 매일 떨어져서 나의 자본은 얼마 남지 않고 은행에서 쓴 돈이나 가리게 되니 은행에서는 스탁을 빨리 팔아서 이 돈을 받으려고 성화같이 몰아대는 동시에 칸스테블은 트럭과 사람을 데리고 와서 찬관에 차려놓은 온갖 물건을 내다 트럭에 싣는 때에 순경도 같이 와서 그러나 나 보기에는 차이나타운이 우리 인류문명과 도덕에 적지 않은 방해를 안준다고 안할 수 없고 이것은 참 음부에 구혈이다. 남의 문명한 나라에 와서 껴서 살게 되는 것을 고맙게 생각지 않고 소재국 그 나라에 금법을 일부러 범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고 이런 비법으로 돈을 번다야 오래가지 못할 줄 알고 우리는 차이나타운에서 하는 이런 종류에 끌리지 말고 정당한 사업을 경영할 것이요 일꾼은 노동력자의 생활을 만족히 여기자. 나는 한 노동자다. 노동은 나의 자본이다. 내가 노동력작 하면 여기서 사업을 할만한 자본이 생겨서 무슨 사업이나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차이나타운을 구경하고 와서 왜 이런 말을 하랴. 우리 동포도 적지 않게 이 음부와 같은 곳에 와서 힘들여 번 돈을 청인의 노름판에 갖다 주는 것을 이곳서만이 아니고 각처 차이나타운 있는 곳에서는 찾아볼 수 있는 고로 연전에 내가 재미한인 경제상 곤란이라는 문제로 기사 한 장을 써서 신한민보에 기재한 가운데 우리 한인이 매회에 청인 노름판에 갖다 주는 돈이 수천원씩 되니 이것이 재미한인 경제 곤란에 한 부분을 주었다고 장황이 설명한 일도 있었다. 나는 이곳 타운 형편을 한 번 돌아보고 김승길 씨 찬관에 다시 찾아와서 김승길 씨와 같이 김씨 댁을 심방하는 때에 김 부인을 처음으로 상봉하게 되는 때에 김 부인은 퍽 반가워 한다. 이것은 내가 자기를 김씨한테 소개하여 준 중매인으로 아는 까닭이다. 김씨는 사업을 근실히 잘하여 살림도 풍족하게 잘 사는 모양 같고 부부간에 금슬도 있어 보이니 기쁘기 한량없다. 나를 위하여 준비한 만찬을 김씨 내외와 같이 앉아서 재미있게 나누고 나는 호텔로 와서 자고 이튿날 일녀를 만나서 호텔값 一千元을 마저 주고는 내가 관할하였다. 이 호텔에 일꾼 둘 있는데 쳄버 메이드 한 사람 또 밤에 방 팔고 집 보는 늙은 남자 한 사람인 이 일꾼들을 내가 다 그냥 쓰기로 하였다. 八十三방이나 되는 방이 매일 부족하여 방 원하는 사람을 다 받지 못하게 되니 사업은 잘되는 모양이기로 방값을 올리기로 작정하고 밤에 일하는 클럭한테 방 호수를 적어다 주면서 이 방에는 얼마를 받고 저 방에는 얼마를 받으라고 하니 이 클럭은 펄쩍 놀라면서 하는 말이 지금 새 주인이 와서 방세를 갑자기 올리면 손님이 다 떨어져 나가면 당신에게 큰 실패가 되겠으니 방세를 올리지 말고 그냥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나의 주견대로 방세를 올리라고 하여서 올렸다. 五十錢 받던 방은 七十五錢으로 一元 받던 방은 一元 五十錢으로 다 고쳐 가지고 이같이 받으라고 하니 클럭은 응낙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며칠 안되어 망하여 호텔 문을 닫는다고 예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이 클럭의 주견을 별로 신통하게 알지 않고 방방이 값을 올렸다. 이 八十三방에 새로 올린 것이 매일 二十元 하나씩이 더 들어온다. 새로 방세를 올려서도 방은 매일 부족하니 무슨 실패니 망하느니 할 염려가 조금도 없는 것은 이 사람들은 농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인데 한곳서 일한 자리를 마치면 사오십원 혹 수백원 벌어가지고 타운에 들어와서 마침 잘 방부터 얻어놓고는 나가서 우선 술집에 들어가서 얼근히 취하여서 오는 길로 잡아놓은 방을 찾지 못하여 그 방이 비어있는 것을 나는 종종 발견하게 되는 이런 형편인즉 방세를 좀 올렸어도 알 까닭도 없고 알더라도 술집에 갖다 주는 처지에서 방세 몇 각 더 주고 자는 것을 상관할 필요가 없는 줄로 나는 확실 알고 방세를 올린 것이 아무 영향을 주지 않고 여전히 잘 되니 다행인 줄 안다. 우리 호텔 밤 클럭은 이곳 순경으로 늙은인데 이집에 여러 해를 있었다. 오늘부터는 새 주인 나의 말을 잘 순종하는 것은 나의 주대로 방세를 올린데 대하여 아무 영향이 없고 여전히 사업이 잘되니 나를 한 사업가라고 보게 되는 연고이다. 나는 이 호텔을 한 일년하여 몇 천원 잡았다. 이 근경 한인들은 나를 한 자본가라고 지목하게 된다. 나는 실상 이런 말을 듣기 원치 않는 것은 친구라는 친구들은 자꾸 찾아와서 돈을 취하여 달라는 것 성가셔서 견딜 수 없다. 하루는 평양 사람 변창수라는 친구 찾아왔다. 이 사람은 어려서부터 중마부로 자라서 동문수학도 하였고 내가 집에서 달아나 미국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하와이 이민배를 타고 와서 하와이에서 만났었고 또 하와이에서 내가 마침 미국으로 건너와서 내가 선비를 보내어 미국으로 온 친구인데 이 사람은 친구 간에 앉아서 우스운 말하기는 좋은 사람이나 그러나 무주의 무사상하여 공부할 생각도 없고 일하여 돈 벌 생각이 없다. 그러나 어떤 친구가 술이나 찹수이를 사준다면 따라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한인들이 변창수를 변문이라고 별명을 주었다. 문이라는 문자는 모기 문자로 모기는 어디 붙든지 빨아먹는다는 뜻이니 이 변씨도 어떤 친구에 붙든지 얻어먹고야 만다는 의미로 변문이라는 별호를 얻게 되었다. 이곳에 최창진이라는 사람 있는데 변창수와 본국서부터 친하게 지내었다 하면서 나와도 친절히 군다. 그러나 이 사람도 일하기 싫어하고 친구 간에 한잔 마시고 놀기 좋아하고 우스운 소리 잘하는 사람으로 성성한 눈을 일부러 감고 금일 경을 니리는 형용을 곧잘 하여 사람을 웃기기에 과히 용렬치 않고 신수도 잘 생긴 한량적 인물이라고 누가 보든지 할 만한 사람이 되어 이따위 친구는 많다. 내가 하는 호텔 밑층에서 양찬관하는 김승길 씨는 자기가 하는 찬관을 나더러 사서 하라고 한다. 그러나 나는 호텔 때문에 이것까지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살 생각을 안 하고 있었는데 이 최장진이라는 사람이 와서 김승길 찬관이 큰 이익이 있으니 이것을 사서 같이 동사를 하자고 하면서 일은 자기가 다하고 나에게는 자본만 다 담당하라고 한다. 또 정동호라는 사람과 같이 삼인 동사를 하자고 이 찬관을 사라고 며칠 와서 조른다. 내 생각에 괜찮을 것 같아서 김승길 씨의 찬관을 사서 이 두 사람에 맡기고는 매일 내려가서 문서와 물건 사는 것이나 보살피고 올라온다. 이럭저럭하여 한달이 되어서 나는 문서책을 내어 놓고 월종셈을 보게 되었다. 이 두 사람의 월급 매인이 一百五十元씩 내어주고도 남는 이익이 한 五百元 된다. 이 五百元은 三分파하여 셋이 나눠 먹을 것이니 내게 一百七, 八十元이 온다. 사업이 이만하면 괜찮다는 소문이 한인 가운데 전파되어 변창수가 찾아왔다. 당장에 하는 말이 사겸아 나도 벌어먹게 찬관 하나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창진은 누구며 변창수는 네게 어떠한 친구이기에 최는 도와주고 나는 안도와줄 수 있나 하며 미녀풀 같이 바짝 달러 붙으니 떼어내기 힘들었다. 그러나 나는 허락을 안 한다. 이것은 이 사람의 자격이 무슨 사업에 적당치 않으니 내가 이 친구를 벌어먹으라고 수천원 자본을 주는 것이 실상 이 사람을 도와주는 효력이 없고 내 자본만 버릴 것을 나는 아는 연고로 선뜻 대답을 안하니 이 사람은 염치도 모르고 자꾸 툰다. 그래서 내가 만일 찬관을 사주면 네가 음식도 할 줄 모르고 또 무슨 사업을 하여보지 못하고 어떻게 하겠는가? 변의 대답은 이삼룡이라는 한인이 양찬을 잘 하니 이 사람과 같이 동사를 하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허락을 하였다. 우리 호텔에서 두 블럭 상거되는데 청인하던 찬관을 판다고 얻어듣고 와서 二千元에 사겠다고 하기로 사라고 하였더니 청인과 같이 나한테 와서 문서와 돈 받을 것을 서로 말하여 가지고 법률사한테 가서 법적으로 다 만들어놓고 나는 二千元을 주었다.찬다람의에 물건을 사야 되겠고 또 수중 돈 백원이나 가지고야 사업을 하여 나가겠기로 또 二百元을 주었다. 이 두 사람은 가게 열어가지고 사업이 괜찮았다. 그러나 돈푼 수중에 들락날락하니 술잔 먹어도 자리가 안날 줄 알고 둘이 다 술이 얼근히 취하여 가지고 사업을 하니 자연히 일도 잘 못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 사업을 제대로 못하여 손님은 하나 둘 떨어져 나가니 수입은 매일 줄어들어나서 집세를 주지 못하게 형편이 되고 보니 자연 동사인 끼리 티격태격하다가 최후에 싸우고 쿡은 갔으니 문을 닫고 변가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가 수주일 후에 설종석이라는 동포를 만나서 같이 동사한다고 와서 찬관 문을 열었다. 이 타운에 내 오기 전에는 동포가 수삼 인에 불과하더니 지금은 오고가는 이가 많다. 그래서 우리 호텔 맞은편에 일인이 조그맣게 차려놓은 호텔을 사서 우리 식구도 살림하고 내왕하는 동포도 기숙하게 하였다. 지금은 유럽에 제일차세계전쟁이 한창 열리어서 미국까지 참전하게 되는 때에 각양은 올라가서 집세가 삼, 사 갑절이 되었다. 내가 지금 하는 호텔을 매월 七十五元씩 주기로 하고 五年 계약한 이집이 지금 시세로 말하면 매월 三百元 짜리가 잘된다고 사업가들이 말을 한다. 지금 나는 이 호텔을 이 기회에 팔아가지고 다른 사업을 할까하는 생각이 있어서 팔 의향을 돌리었다. 하루는 어떤 일인이 와서 호텔을 팔겠나 묻기로 판다고 하였다. 값이 얼마인가 묻기로 八千元 현금을 주는 사람이 있으면 판다고 하니 이 일인이 일년 전에 네가 一千五百元 준 것을 지금 八千元을 달라고 하니 값이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일년 전 집세와 오늘 집세가 얼마나 올라갔으며 노동자의 일공은 일년 전 보다 갑절, 삼절이 되었은즉 나의 사업에 가격도 물가폭등을 따라서 올라가야 되지 않겠는가. 이 호텔 집세 五年 계약한 것 이 七十五元이 지금 시세로 얻으려면 매월 三百元을 주고야 얻을 것을 七十五元에 이 사업자리를 얻으면 매달 二百二十五元씩이니 이익이 되는 이것을 五年으로 승을 하여 보면 이것이 一萬三千五百元이니 지금 내가 八千元 달라는 것이 실상 집세에서 얻는 이익도 못되는 것이니 어찌 많다고 할 수 있는가 라고 상업상 경위로 설명한즉 명일에 다시 와서 사고 안살 것을 알게 하여주겠다고 하고 갔다. 이튿날 이 일인이 다시 와서 五百元만 낙가하여 달라고 하기로 내가 一萬元을 달라고 할 것을 八千元만 부른 것을 여기서 또 감하여 달라고 하니 지금 나는 八千元에도 팔 생각 없으니 다시는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아주 잘라서 말을 하고 말았다. 일인이 당신 너무 빡빡하구려● 하기로 나는 파는 것은 꼭 정가를 부르고 사는 물건은 내가 원하면 값을 깎으려고 하지 않고 달라는 값을 다 주고 사서도 돈을 남기는 사람인 줄 알고 사려고 할 것 같으면 내가 부르는 八千元을 주고 살 줄 알라고 하니 할 수 없이 八千元에 사기로 허락한다. 이 일인은 속히 이 사업을 제회를 만들려고 즉시 법률사한테 가서 법적으로 서약서를 만들자고 하여 같이 가서 다 만들어가지고 八千元은행표를 받아가지고 와서 우리 개인의 소유물을 다 싸가지고 사무실에 나와서는 전부 열쇠를 다 주고 지금부터는 이 호텔이 당신의 것이라고 하고 우리는 나왔다. 지금은 조그만 호텔을 팔려고 주선 중인데 이집 아래층에서 식물상점 하는 일인이 자기가 사겠다고 하여 五百元에 팔았다. 최장진과 동사하는 찬관은 나의 자본 들어간 것 二千五百元만 갚아주면 나는 이익분배에 간섭치 않겠으니 할 수 있으면 나의 자본 들어간 것을 변통하여 달라하였더니 이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수일내로 二千五百元을 변통하여 준다. 이것은 나에게 매월 수백원씩 나눠주던 것을 안주고 자기가 혼자 먹게 될 것을 알고 이같이 빨리 변통하여다 준 것인 줄 알게 되었다. 변창수를 벌어먹으라고 차려준 찬관은 이 사람이 할 줄도 모르고 술 마시기에 이 사업을 유지하기 어려우니 나만 二千六, 七百元이 손해가 났다. 그러나 이곳 와서 一年 반 동안에 이럭저럭하여 한 천만원이나 잡았으니 아직 운수가 나와 동심동력 동행하는 줄로 나는 확실히 믿고 이곳보다 좀 큰 타운 스탁톤으로 이거하여 갔다. 이곳은 청인 일인이 매리스별 보다 더 많아서 동양인 거주지가 적지 않게 크다. 한인도 수백 명이 농장에 나가 일하고 한인 여관 이발소가 두 곳이 있고 이곳 소산은 각종 채소요 감자가 유명하게 잘 되는 곳이요 이곳서 감자 농사하는 일인 한 사람은 감자 농사에 큰 돈을 잡았다고 백인들이 감자왕이라는 별호를 주었다. 나는 지금 이곳서 무슨 사업을 시작하여 보려고 동양인 거주지에 사업할 처소를 구하러 다니는 중에 일인이 하는 큰 풀방을 팔겠다고 하는데 일인의 거주지에 있는데 다른 일인의 풀방들은 사람이 꽉 들어차서 복작하는데 이 집만 사람이 몇이 없어서 쓸쓸하여 보인다. 이 풀방은 남자가 없고 일녀가 주장하는데 집은 크고 좋으나 테이블도 몇 개 안되고 한쪽에는 이발소를 차려 놓고 세를 주는 모양인 듯하다. 이 풀방사업이 잘 안되어 팔려는 줄 알고도 이 사업을 一千五百元 현금을 주고 사서는 테이블도 몇 개 더 들여놓고 전방 앞을 보기좋게 고치고 하는데 한 천여 원 들여서 확장하여 놓고 한쪽에 놓고 티 파는 데를 만들어 가지고 사업을 개시하였다. 내왕하는 손님들은 반수 이상이 묵국(멕시코) 노동자들인 이 사람들은 보통 무식하여 어린애 달래듯하면 좋아하는 고로 무엇을 잘못할지라도 나무라지 말고 내버려두면 다른 풀방에 가래도 안가고 자꾸 찾아오는도다. 또 이 사람들은 잡기와 풀장난 하기를 좋아하여 농장에서 수십원씩 벌어가지고 들어오면 풀방과 잡기집에 다 갖다 주고 부족이 되어 음식 사 먹을 돈도 없어서 배를 곯고 지나는 때가 많은 것을 나는 안다. 이 사람들이 정 배가 고프면 나한테 와서 커피와 우톨 한 十錢어치 외상으로 먹자고 한다. 나는 거절치 않고 외상으로 먹이고 또 방을 얻어야 되겠는데 방세가 없다고 사정하면 한 五十錢씩 취하여 주었다. 내가 이와같이 먹이고 취하여 주는 것을 받자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함으로 해 이 나라사람 다 끌어 들이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소문이 묵국(멕시코) 사람들에게 전파 잘된 모양인지 이 사람들이 많이 오기 시작하여 사업이 발전된다. 그러나 풀 테이블에서는 큰 이익이 없다. 담배와 소다와 수박 이런 것을 많이 팔아야 이가 있는데 이같이 하자면 우선 사람을 무슨 모양으로든지 많이 몰아내야 된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외상을 주는 것인데 이 사람들은 이와 같이 하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같은 값이면 우리 집으로 저희의 동무도 보내고 저도 줄곧 찾아와서 다소간 돈을 쓰고 가니 우리 집이 다른 집보다 사람이 더 많이 와서 흥성하게 잘 된다. 이런 것을 보는 우리 한인들은 방사겸 지금 수가 는다고들 하는 말을 듣고 나성(로스앤젤레스)에서 박동규라는 한인이 찾아와서 사업을 한참 보다가 팔지않겠나 묻는다. 나는 누구든지 내가 달라는 값을 주면 팔지요 하였더니 얼마를 원하오. 七千五百元을 주면 팔겠다고 하였다. 박씨는 동사할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시 말하자고 하고는 간다. 한참 있다가 다른 두 한인과 같이 와서 한참 구경하고 앉았다가 셋이 다 나를 찾아와서 이 사업 매매할 말을 하다가 세 분이 다 가고 만다. 그래서 내 생각에 값이 많은 듯하여 안 사기로 하고 갔나 하였더니 한참 있다 다시 들어와서 七千五百元에 사겠다고 허락을 선선히 하면서 아는 율사가 있으면 가서 약조기를 만들고 돈을 찾으라고 한다. 우리는 율사한테 가서 사고파는 문서를 다 만들어 놓고 七千五百元 은행표을 받고는 풀방을 박동규 일행에게 내어주고는 호텔에 나와 며칠 쉬는 중이다. 우리는 지난 과거 三年 동안에 활동사진 한번 구경을 못하고 주야로 사업하느라고 종일 일을 하고는 잔 것뿐이요 자고나서는 또 일을 한 것뿐 이것을 우리 일생일대에 해야만 될 책임으로 알고 험한 일과 괴로운 일을 다 꾸준히 참고 나가서 三萬五千元이라는 소득을 지금 가지고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돈이라는 것은 사물이요 이 사물을 한 사람만이 영원히 소유할 수 없고 돈이라는 물건은 오늘 이 사람에게 있다가 내일은 저 사람에게 가고 또 저 사람에게서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이 마치 물레바퀴에 돈 한 푼을 달아 매고 바퀴를 돌린다면 이 매단 돈이 동서남북 사방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이 지금 나에게 있는 三萬五千元이 얼마 동안이나 나와 같이 있겠는지 이것은 내가 지금 판단할 수 없다.나는 一千九百十八年에 벼농장을 스탁톤에서 작하였었는데 땅 일백 에이커를 매 에이커에 十五元씩 세를 주고 얻어서 밭 가운데 울 두 개를 파고 물을 재어 올리는 기계 두 채를 사다놓고 일꾼은 한 十五人 두어 가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는데 나는 농사에 아무 경험이 없으므로 벼농사에 경험 많은 사람을 두고 밭 갈고 씨 심어서 벼가 잘되었다. 그래서 희망 많았다. 금년 봄까지 벼 一百근 한 부대에 시장 값이 十元씩 하였다. 가주(캘리포니아) 벼농사 매 에이커 소출은 一百五十석으로 三百석까지 추수한다고 하는 최하로 一百五十석을 매 에이커에 소출을 예산하고 있었다. 그러면 매 에이커에 一千五百元 가격에 벼를 추수한다면 이 일백 에이커에 총 벼값이 十五萬元이나 혹 二十五萬元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운수가 이 고개만 순순이 넘어가서 나의 예산에 들어맞게만 된다면 나도 한번 자본가가 된다는 희망을 가졌었다. 그러나 구주(유럽)전쟁에 종막 짓는 종전하였다는 소식이 각국 신문에 보도 되었다. 이러한 보도는 세계전쟁에는 다행이나 지역 이 해에 벼농사한 사람에게는 대불행한 소식이라고 안할 수 없었다. 이 정전된 소식이 나오자 각양 물화의 가격은 폭락되어 벼 한 부대에 十元 이상하던 것이 二, 三元에도 팔 수 없이 되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공가는 아직 七, 八元씩 줘야만 농군을 얻어서 벼 추수를 하게 되어 예산을 하여보니 아이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격으로 벼값보다 이 벼 추수할 일꾼에 대한 경비가 더 많게 되므로 밭에 있는 벼를 추수하지 않고 밭에 그냥 내버려두어 썩어버리고만 사람이 나 혼자뿐이 아니라 벼 심었던 사람은 다 동일하게 되었다. 이 해에 촌 타운 은행가들도 많이 결단이 났다. 이 벼농장에 나의 자본 三萬五千元을 다 들여놓고 스탁톤에 이탈리아은행에 가서 크랍모게지를 잡히고 돈 五千元을 얻어 놓고 이 五千元으로 벼 추수할 경비를 예산하여 놓았다. 그러나 은행에서 내가 다른데 쓰는 것은 허락지 않고 오직 일꾼의 월급이나 추수하는데 쓰는 것만 허락한다. 그러나 구주(유럽)전쟁이 정권조약을 하기로 양편에서 언론 할 때에 한 二千元 사유로 장차 용하려고 돌려놓았다. 아닌 게 아니라 정전조약이 성립되었다는 보도가 대서특서로 전국적 신문에 발표되어 온 천하가 다 알게 되었다. 각양 물종은 폭락되어 벼 값도 여지가 없이 떨어져서 二, 三元에도 팔수가 없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이탈리아은행에 찾아가서 지금 벼값이 폭락하여서 지금 추수를 한데도 추수할 경비가 안되겠으니 나는 추수할 생각이 없으니 당신 은행에서 다 맡아가지고 마음대로 하라고 내맡기고는 나의 자본 三萬五千元을 투자한 이 벼농장을 떠나서 맨티가로 왔었다. 이것이 나의 지난 三年 동안 노동력작으로 모아 놓았던 총자본을 여기서 최종에 실패를 당하고 나왔다. 그러나 크랍모게지로 은행에서 얻어놓았던 五千元 중에서 한 二千元 돌려놓았던 이 돈을 가지고 맨티카에 나와서 한동안 지낼만한 형편은 된다. 우리나라 옛말에 피게죽에 탕도라고 나는 벼 농장에 실패를 당하고 간신이 모가지 잡히고 얻은 돈에서 살아갈 장래를 위하여 한 二千元 돌려가지고 온 돈을 또 한인들이 무엇을 하자고 여러 사람이 내왕한다. 一千九百十八年에 이살음 김정진 김탁 임일 이 몇 사람들이 가주(캘리포니아)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대한인사회 개진당이라는 회를 조직하고 회원을 모집하는 때에 나도 개진당 회원이 되어서 중가주(중부 캘리포니아)단 유바에서 사회개진당 대표대회를 여는데 나는 스탁톤 개진당 대표원으로 출석하게 되는 때에 사회 개진당 당수 이살음 씨와 개진당 총무 김정진 씨 이 두 분께서 벼농장에 실패한 것을 위로와 동정을 하여주시면서 우리 개진당 당원끼리 자본을 모아가지고 우리들에서 실과와 채소건조회사를 세우면 이익이 있겠다고 나더러 할 수 있으면 한 五百元 내라하기로 五百元 허락하고 왔었다. 이 건조회사의 자본은 二萬元이나 그때 한인의 경제상 형편이 二萬元을 거두기에 힘이 부쳐서 간신히 五, 六千元 걷은 이 자본을 가지고 二, 三만원에 실업을 시작하였으니 자연히 만여 원 근 이만원 가량을 은행 모가지를 잡히고 이 사업을 시작하였다가 二, 三삭 내에 이 사업이 은행의 소유가 되고 말았으니 또 내 돈 五百元이 결단나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한동안 아무 사업을 경영치 않고 한동안 이 조용한 맨티가에서 좀 쉬면서 정신 수습하기를 주장하고 있는 때 이곳에서 찬관하는 김병보라는 사람이 자본이 없을지라도 동사를 같이 하자고 하며 또 스탁톤에서 큰 풀방을 새로 사놓고 김승길 씨가 같이 동사하자고 하는 것을 다 사양하고 한동안 쉬기로 작정하고 맨티카 촌에 나와 있는 때에 하루는 먹을 식물을 사려고 타운을 걸어가는데 어떤 자동차 타고 가던 사람이 나를 보고는 차를 멈추고 나와 포도 커팅자를 사람 한 십여 명 얻어줄 수 있는가 묻는다. 나는 얻을 수 있다고 하니 좋다고 하면서 커팅자를 포도밭들은 우리 한 캠프에서 머지않은 곳에 얻어놓았으니 내일부터 잘라놓으면 자기가 큰 트럭을 보내어 실어간다고 하고 이 사람은 털락이라 하는 곳에 사는 고로 이곳으로 갔었다. 나는 이 사람과 모든 약속을 하고 한인촌에 와서 강천명 내외분 이 분의 백씨 김필권 씨 염만석 변성유라는 학생 나 하여 七人이 커팅을 나가 자르기 시작하였다. 이 일은 일공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도급으로 내가 맡았는데 매 一百개 커팅을 잘라서 묶으면 七錢씩인데 부지런히 하면 매일 일백단을 용이하게 자를 수가 있는 고로 매일 七, 八元씩 용이하게 벌수가 있었다. 이 때는 겨울이 되어 농장에 일이 없는 때에 매일 七, 八元씩 벌게 되니 이것은 참 좋은 일이었다. 주인은 한 이, 삼일에 한번씩 와서 보고 갈 것 뿐이요 내가 이것을 적어두었다가 돈을 찾아 나눠주게 되니 나는 한 십장의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 겨울에 이 일을 한 달 동안 잘하여 수백 원씩 벌었으며 이 커팅 일을 우리에게 준 사람은 세리앤 사람인데 실과농장에 경력이 많은 사람으로 빈 땅을 어디서나 헐즉이 사서 포도를 심어가지고 다시 댓가를 받고 파는 중상으로 큰 자본가이며 이 사람의 집은 털락 타운에 있고 우리가 지금 자르는 커팅을 심을 땅은 털락서 한 삼십 마일 상거되는 리빙스톤이라는 곳에 八百여 에이커 모래땅이요 또 봄철에 모래땅에 바람이 불어서 보통사람은 무엇이고 심을 생각을 못하고 내버려 두었던 땅을 매 에이커에 一, 二元씩 주고 사서 포도 심으려고 벌써 캠프를 짓고 밭을 잘 만들어 놓았다. 우리는 커팅을 한달 안에 二百五十만개 가량을 잘라주었는데 이것이면 넉넉하다고 더 자르지 말라고 하여 우리는 이 일을 그만두었다. 주인이 나를 찾아와서 일을 잘 보아주었다고 二百元 하나를 나에게 준다. 또 나를 자기 농장에 와서 일꾼 한 二十명 먹이는 쿡간을 날더러 맡아하면서 또 우리나라 사람을 한 二十명 대 달라고 하기로 응낙을 하고 우리 식구가 다 이 농장으로 나왔다. 이 농장은 지금 신개척 중이니 집이나 마방이나 내왕하는 도로가 보잘 것이 없고 캠프로 돌아가며 큰나무 하나가 없으니 아무 경치가 없는 농촌이다. 그러나 일꾼들 밥 먹는 식당과 주방은 큼직하고도 편리하게 만들어 놓았고 또 우리 식구가 살림할 집도 큼직하여 우리는 만족히 생각하고 한동안 있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내가 이 농장에 와서 일꾼들을 삼시 해 먹이는 일은 월급으로 작정하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 자사업같이 매 명에 매일 一元 二十五錢씩을 주인한테 받기로 하고 나는 매일 三, 四벙씩 일하고는 오원씩 받기로 주인과 약조를 하고 나가있는 것이다. 일꾼 한 二十명 먹이는데 매월 三百元 하나가 잘 남는 것은 주인이 돼지와 닭을 많이 놓았는데 내가 건사하고 닭 알은 내가 다 무료로 쓰고 한 주일에 한 수씩 돼지를 잡으면 내가 헐가로 다 사서 쓰니 이익이 만좀 난 것이다. 세리앤 사람은 유태국 사람의 성질과 품행이 비슷하여 상종하는 사람마다 상가지 않으면 속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이 사람이 나에게는 후하고 또 인정을 많이 쓰는 고로 나는 이곳 와서 벌써 한 사천원 벌어놓았다. 나는 지금 생각하기를 나를 배반하고 떠났던 운수라는 양반이 나를 다시 찾아온다고 혼자 생각하게 되었다. 이 농장 八百여 에이커나 되는 빈 땅에 포도나무를 다 심어놓고 밭머리에는 무화과 복숭아 살구 앵두 온갖 과목을 수수 만주를 심어놓은 이 과목들 가운데 내손으로 친히 심은 것도 적지 않았었다. 내가 이곳에 二, 三年만 더 있었던들 돈도 크게 잡았을 것이요 또 내손으로 심은 실과 맛들 보았을 것을 나는 친구의 말을 믿고 이와 같은 복덕방을 떠나게 되었다. 이 문제를 마치지 않고 여기서 중지하는 것은 이 문제전에 만큼 기록해야 될 사건 하나를 비어 놓았던 이것을 지금 기록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나는 벼 농장에 실패를 당하고 맨티가에 나와 쉬는 동안에 어떤 동포의 소개로 콜닝가라 하는 곳에 기름광에 재네토 일을 얻어갔었다. 이 기름광은 남태평양 철도회사의 소유광산인데 한인들이 여러분이 와서 여러 처에서 재니토일을 하는데 나는 캠프 십일호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회사에서 집주고 땅에서 자연히 나오는 가스를 마음대로 쓰라고 거져 주고 일공은 매일 七元씩 주는데 일이 아주 수월하여 누구나 다 할 수 있고 매일 네시 동안이면 다 할 수 있는데 일이라야 일꾼들 자는 집 다섯 채 십장의 사무소 한간 이것을 비로 한 번씩 쓸고 캠프에 널린 신문 자박지나 주어서 태우고 나무에 물이나 틀어놓으면 하루 일이 다 되는 것이다. 이곳 일이 이같이 수월하고 시간이 많기로 펜실베니아 스크린톤에 있는 세계적 통신학교에 편지하여 북킴빙 과정을 시작하여서 만 二年 만에 마치었다. 이것이 이른바 꿩 먹고 알까지 먹는다는 격으로 일하여 돈벌고 또 공부까지 할 기회가 있었다는 말이다. 나는 미국 와서 노동 파공이라는 말은 신문지상으로는 자주 들었으나 이와 같이 내 몸으로 친히 당하고 내 눈으로 이와 같이 위험한 것을 친히 보게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노동자들이 파공하는 이유는 유럽전쟁이 종결된 그 원인으로 전쟁 때에 주던 월에서 매일 퍼센트로 회사에서 낮춘다는 것을 항거하기 위하여 동맹파공을 시작한 것인데 이 기름광에서 일하던 전부 노동자는 일을 중지하고 캠프를 떠나서 콜닝가 타운에 수만 명이 들어 모이어 가지고 매일 회이 돌아 사방 하이웨이에 나가서 회사 트럭이나 사무원들 타고 내왕하는 것을 파상 휴힐란하는 행동과 또 캠프 안에 여기저기 있는 기름 저장소를 폭탄으로 파고 흉측화 시켜서 수백만원의 손해를 주는 행동과 또 캠프 안에 있는 회사 사무원과 쿡과 재니토는 저희와 같이 파공을 안하고 캠프안에 그냥 있어서 월급을 받고 이것이 원수같이 미워서 깊은 밤에 숨어들어 와서 잡아다가 난타하는 고로 캠프마다 높은 곳에 활동하는 광명등을 배치하고 사방을 비추고 있다. 또 별순경도 많이 와서 수상지인을 검사 혹 조사하므로 파공자들이 별 수가 없어서 파공자들은 이와 같이 오래 계속할 수 없음을 알고 회사를 교섭하여 월급을 감하여 받고라도 다시 와 일을 하겠다고 하는고로 회사 측에서 다시 와 일 하라고 하여서 이 파공자들이 만 육삭 동안 손해 본 금액이 여백만원이라 한다. 그러나 우리 파공을 안 하고 캠프에 있던 사람은 육삭 동안 일도 안하고 월급은 그냥 받아먹고 상당한 보호 속에서 잘 지내었다. 그러나 지금부터는 매일 七元 받던 것을 六元씩 받게 되었다. 이와 같이 五, 六삭 지내서 회사 측에서 월급을 또 一元씩 감한다고 광고를 한다 하기로 이젠 이 일도 물이 낡아가는구나 하고 이 일을 설종석 이란 동포에게 소개하고 우리는 떠나서 맨티가에 와 있다가 서리앤 사람 애스터리앤 이라는 사람의 커팅을 잘라주고 포도 심는 일까지 하여주고 있다. 여기서부터는 이 좋은 농장을 떠나게 된 이유는 옛날에 대동보국회 때부터 좋은 동지로 수십년 동안 동고동락을 같이 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 나와 백년해로를 하는 아내를 나에게 소개하여 준 친구인 유홍도 씨라는 분이 싸우드 밴이라는 곳에 농장을 사놓고는 그 타운 안에 한인이 차려놓은 청찬관에 와서 일을 하는 때에 나한테 편지하기를 자기가 四十 에이커 농장을 사서놓은 가운데 닭이 있어 알을 낳아도 누가 주어다 먹을 사람이 없고 소가 있어도 소젖 짜서 먹을 사람이 없고 온갖 실과가 익어서 떨어질지라도 따 들여다 먹을 사람이 없으니 四兼(사겸)氏가 이곳 와서 농장에서 식구를 안돈시키고 타운 안에서 무슨 사업을 경영하면 가주(캘리포니아)에 있는 것보다 나을 터이니 오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며칠 두고 생각을 하여본 결과가 유홍도 씨의 말을 믿고 이 좋은 일을 그만두고 가기로 작정하고 주인한테 이 일을 그만두고 싸우드밴으로 가겠다 하니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가지 못하도록 여러 가지로 이해를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이미 가기로 작정한 나에게 이런 설명이 나를 머물러 다시 앉힐 수는 없었다. 그러나 주인은 자기의 권고를 내가 듣지 않는다고 좀 불쾌한 표정을 얼굴에 나타내면서 내가 싸우드밴에 가서는 이곳을 떠난 것을 후회하리라고 예언까지 하여 준다. 나는 이 농장에서 떠나 적지 않게 먼 사우드밴에 있는 유홍도 씨를 찾아왔다. 유홍도 씨는 이곳 한인의 주식으로 차려놓은 청찬관에서 쿡을 하고 있다. 이 찬관하는 사람들은 전부가 다 국민회 사람들인데 수천리 원정에 찾아간 나를 보고 그리 반가와 하지도 않고 보통의 동포애라는 것도 이 사람들의 교제나 언어 행동에서 찾아볼 수도 없고 아주 냉랭한 태도와 교만 방자한 거동이 첫날 이 사람의 비위를 건드리고 마음을 불안케 한다. 그러나 찬관 윗층에 빈방이 있는 여기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다. 유홍도 씨는 자기 농장 조진환이라는 국민회 사람한테 일년 계약하고 그 농장을 세를 주었다. 일이 이와 같이 되므로 나의 경영하고 찾아온 경영은 벌써 실패도지 하였은즉 내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다하고 이튿날 나 혼자서 시카고를 들어가서 사업을 차려놓을 자처를 종일 다니며 구한 결과에 일인이 하던 청찬관을 一千五百元에 사놓고 식구가 있을 처소도 찬관 옆에 얻어놓고 싸우드밴에 나가 식구를 데려오려고 하고 있는 차에 유홍도 씨가 나를 급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