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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박은식] [백암박은식전집6권] 에 대한 전체 12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 1. 호적표(1906)

    호적표  

    2 2. 대한학회찬성회취지서

      特別謄報  本會에서 內地 各 先進社會의 有志 諸氏에게 聯絡하기 爲하여 摠代二人을 派送하여 往返한 事는 別項과 如하거니와 自政府로 各 社會와 有志 諸君子의 優越한 歡迎의 榮을 蒙할 뿐 不啻라. 財政上에도 多數한 贊成을 受함은 感謝하거니와 今에 本國 報紙를 接見한즉 有志 諸氏가 本會를 助長하기 爲하여 贊成會를 組織하고 趣旨書를 發布하였는데 事實에 過度한 讚譽는 且愧且感 함을 不勝이오며 其全文과 氏名이 如左함.大韓學會(대한학회)贊成會趣旨書  國家의 前途는 學生靑年의 責任에 專在함이요 學生靑年 中에는 海外 留學生으로서 其前驅를 作하리로다. 故로 在外學生界에 美事가 發하면 全國이 喜而贊之하고 或不備가 有하면 憂而救之하여 一動一靜에 無不注目하여 全然히 在外學生界의 成績을 國家盛衰의 龜鑑으로 視하는도다. 近年에 日本 東京에 留學하는 我國 靑年이 其數 近千인데 科學을 勤修하여 成績이 優越하며 衆力을 結合하여 會體를 組成하여 月報를 刊行하여 同胞를 勸勵하며 其他 種種 美事가 我 一般同胞의 慰悅을 致하였도다. 然이나 社交의 能力이 多數人의 團合을 成함에 未及하여 南北道가 相別하고 官私費가 相分하여 多數 會名이 各起 紛紛하여 完合한 國民的 團合을 未成한지라. 此를 觀하고 或黨派之弊가 生할까 或猜疑之端이 起할까 在內人士의 疑懼와 憂慮가 頗深하더니 近日에 一片 喜音信이 春風에 伴度하여 耳膜에 播動하니 卽 日本國 東京에 在한 大韓留學生이 大團合의 必要를 自覺하여 總團體를 組織하고 大韓學會(대한학회)라 命名한 事를 報함이라. 宜哉宜哉로다. 同一한 國籍을 有한 者가 異邦에 留在하여 會集을 各別히 할 必要가 寧有하리오. 國民的 精神으로 團合하여 一體를 作함이 得其宜哉로다. 此를 聞함에 凡大韓國의 幸福을 希望하는 人이 誰가 讚賀之聲을 不發하리오. 於是에 皇太子殿下께서 睿眞을 下賜하사 褒賞을 示하시고 政府大臣이 金額을 收合 寄附하여 勸勉을 加하고 各處 報筆이 趣旨書를 揭載하여 讚揚을 佈하였고 今에 一般社會의 同情을 表하기 爲하여 大韓學會(대한학회) 贊成會를 發起하오니 勉哉어다.  有志同胞여! 棟梁之材가 生長함을 見하고 其培養의 勞를 豈惜하리오. 在外學生이 精神的 團合의 必要를 自覺함에 際하여 在內人士는 其團合을 永久히 鞏固케 하기를 自任할지로다. 奮發哉어다. 愛國同胞여!發起人姜寅熙(강인희)·姜華錫(강화석)·金奎植(김규식)·金光濟(김광제)·金達河(김달하)·金東完(김동완)·金落憲(김낙헌)·金明濬(김명준)·金祥演(김상연)·權東鎭(권동진)·權鳳●(권봉●)·南宮檍(남궁억)·張吉相(장길상)·張燾(장도)·張憲植(장헌식)·全永憲(전영헌)·鄭永澤(정영택)·鄭雲復(정운복)·鄭鎭弘(정진홍)·趙秉澤(조병택)·趙齊桓(조제환)·趙昌漢(조창한)·羅壽淵(나수연)·呂圭亨(여규형)·呂柄鉉(여병현)·廉仲模(염중모)·盧伯麟(노백린)·柳瑾(류근)·柳東說(류동설)·柳東作(류동작)·劉文煥(유문환)·劉秉泌(유병필)·柳一宣(류일선)·李甲(이갑)·李東暉(이동휘)·李冕宇(이면우)·李敏卿(이민경)·李範來(이범래)·李商在(이상재)·李相弼(이상필)·李時榮(이시영)·李容九(이용구)·李容漢(이용한)·李人植(이인식)·李鍾一(이종일)·李鍾浩(이종호)·李珍雨(이진우)·李軫鎬(이진호)·閔衡植(민형식)·朴斗榮(박두영)·朴晩緖(박만서)·朴星煥(박성환)·朴勝彬(박승빈)·朴承章(박승장)·朴承爀(박승혁)·朴璿台(박선태)·朴殷植(박은식)·朴晶東(박정동)·朴重華(박중화)·朴熙陽(박희양)·白寅基(백인기)·白完赫(백완혁)·邊永鎭(변영진)·尙灝(상호)·徐丙珪(서병규)·石鎭衡(석진형)·孫之鉉(손지현)·宋之憲(송지헌)·申光熙(신광희)·申佑善(신우선)·申應熙(신응희)·沈宜性(심의성)·安國善(안국선)·安昌浩(안창호)·魚瑢善(어용선)·嚴柱益(엄주익)·吳世昌(오세창)·兪星濬(유성준)·兪承兼(유승겸)·兪致衡(유치형)·尹益善(윤익선)·尹晶錫(윤정석)·尹致晟(윤치성)·尹致旰(윤치간)·尹致昊(윤치호)·尹孝定(윤효정)·元應常(원응상)·崔敬淳(최경순)·崔廷德(최정덕)·崔相敦(최상돈)·崔錫敏(최석민)·崔鎭(최진)·太明軾(태명식)·韓相龍(한상룡)·韓錫振(한석진)·韓致愈(한치유)·玄暎運(현영운)·洪肯燮(홍긍섭)·洪忠鉉(홍충현)

    3 3. 京城 정계의 現情

      목하 정계는 정온(靜穩)하다. 그 정온함의 이유는 민간 각파에서는 현 이완용(李完用)내각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통감부(統監府)가 후계 내각원 선정을 숙고 중이기 때문이라고 예상하였고, 이에 송병준(宋秉峻)은 사직퇴관(辭職退官)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완용(李完用)과 그 동지들이 의리상 인퇴(引退)할 것을 기대하였다. 다만 통감부에 인류(引留)되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정숙하게 그 상황을 관망하고 있기에 정온한 것이다. 그런데도 이완용(李完用)일파는 사직할 생각이 없고 반대로 장박(張博),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 등의 망명파에게 접근, 점차 중용하여 그 지위를 공고히 하려고 모의하였다. 조중응(趙重應)은 이 설을 주장하고 이완용(李完用)을 보좌하였다. 그리고 이하영(李夏榮) 등은 박제순(朴齊純)을 통하여 전(前) 내각원을 이완용(李完用)에게 접근시켜 망명파를 배척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박제순(朴齊純)이 스스로 이 책동에 나오지 않게 되자 망명파는 점차 세력을 얻게되어 장박(張博)을 감사원경에 임명하고 유길준(兪吉濬), 조희연(趙羲淵)에게도 상당한 지위를 줄 것을 교섭 중이라고 한다.대한협회(大韓協會)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이를 촉구하여 민심수렴에 노력하며 교묘하게 일진회(一進會)를 공격하며 기반 확장에 부심하였다. 원로 내각을 조직하고 동 회장 김가진(金嘉鎭)의 입각을 기대하고 있다. 일진회(一進會)는 회장 이용구(李容九)의 귀국을 기대하며 발전 방법을 강구하는 것 외에 현재 하등의 운동을 하는 바가 없다.

    4 4. 서북학회원 명부제출

    서북학회(西北學會) 현재 인원 명부는 별지와 같음.이상 1908년 11월 11일○ 別紙서북학회(西北學會) 임원명부회장  오상규(吳相奎) 본적: 회령 53세 人學 가정    현거주지: 중부 합동(蛤洞) 12통가 1호    무과 지방국장 시종부경(侍從副卿)부회장 정진홍(鄭鎭弘) 일어 함흥 현직 농부해산국장·국사범 현주소 유동(鍮洞)총무  이갑(李甲)   일어·숙천·진사 일본자비유학 무관 졸업부총무 김원극(金源極) 영흥 가정입학(가정에서 공부한 것)회계  박경선(朴景善) 의주·가정입학평의원 강화석(姜華錫) 중국어·강서 외아문(外衙門)주사·일본 중국 왕복·인천부윤    조정윤(趙鼎允) 덕원·가정입학·전 군수    정진홍(鄭鎭弘)    박은식(朴殷植) 삼등·가정입학·전 교관·현재 경성신문 주필    김주병(金柱炳) 명천·가정입학·전 과장·현재 보성(普成)사장    현승규(玄昇奎) 길주·가정입학·전 군수·현재 보성(普成)관장    이갑(李甲)    김종호(金鍾浩) 명천·진사·전 시종    김달하(金達河) 의주·가정입학·전 교관·현재 중추원참의    유동열(柳東說) 일어·박천·일본유학·무관 졸업    유동작(柳東作) 일어·박천·일본유학·법진(法津) 졸업·현재 판사평의원 김윤오(金允五) 장연·가정입학·전 의관(議官)    윤익선(尹益善) 장연·가정입학·법진(法津)전문졸업 전 이사(理事)    태명재(太明載) 가정입학·현재 변호사    강윤희(姜玧熙) 북청·가정입학·전 령(令)    최재학(崔在學) 용강·가정입학·현재 교사    김희선(金羲善) 일어·평양·일본무관 졸업    김형섭(金亨燮) 일어·영유·일본무관·현재 시종무관    김기동(金基東) 가산·가정입학·내시    김석태(金錫泰) 강서·가정입학·전 교리    김석권(金錫權) 의주·가정입학·전 참봉    오상익(吳相翊)    장봉주(張鳳周) 영흥·가정입학    김명준(金明濬) 일어·삼등·가정입학·전 군수    오규은(吳奎殷) 철산·가정입학·전 의관(議官)    김재익(金在益) 길주·한북학교(漢北學校)졸업·현재 교사    여창규(呂昌奎) 명천·가정입학    김병희(金秉熹) 곽산·가정입학·전 문과정언서기  이달원(李達元) 신계·가정입학경향(京鄕)회원 합계 2,700명각 군 지회평양·가산·성진·명천·평산·박천·철산·함흥·북청·김천·의주·개천·길주·덕원·백천·정주·태천·정평·단천·장연·영변·귀성·고원·영흥·이원·숙천·운산·문천·재령

    5 5.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검거의 건

    保安法 違反 事件 檢擧의 顚末제1. 피검거자의 이름경기도 파주부 파평면 눌노리(訥老里) 행촌(杏村)성낙형(成樂馨) 34세경기도 용인군 원삼면 문촌리김주원(金冑元) 44세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능내(陵內) 당시 경성부 화동 28번지변석붕(邊錫鵬) 64세경기도 경성부 재동 9번지김승현(金勝鉉) 65세경기도 용인군 모현면 능원동당시 경성부 관훈동 56번지정일영(鄭馹永) 43세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 금고리당시 경성부 간동 83번지심인택(沈仁澤) 57세충청북도 청주군 남차이면 석판리 1통 7호당시 경성부 권농동 184번지박봉래(朴鳳來) 44세경기도 장단군 강상면 마성리 만적동 9통 7호당시 경성부 체부동 18번지김사홍(金思洪) 49세경기도 경성부 내자동 129번지 염덕신(廉德臣) 47세경기도 경성부 내자동 173번지이경창(李慶昌) 47세제2. 조선 내에서 불온 언동 사실  성낙형(成樂馨)은 1915년 4월경 북경에서 봉천(奉天)으로 왔다. 당시 일본·중국(日·支) 교섭문제로 물론 이전부터 형세를 두루 살펴보기 위해 각지에서 모인 불령 조선인 다수와 회합하여 서로 즐기는 바 있었다. 또 그 불평조선인으로부터, 평안북도 철산군(鐵山郡) 부서면(扶西面) 안평리(安平里)에 거주하는 정항준(鄭恒俊)은 유지로써 함께 대사를 도모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을 듣고 그와의 주선을 위해 봉천에서 지기(知己)인 김주원(金冑元)과 동반할 것을 약속하였다. 7월 2일경 그와 더불어 조선으로 잠입하여 정항준(鄭恒俊)을 방문하여 재외 불평조선인의 운동 취지를 알리고 찬동을 얻고 동반하여 평양에서 7월 7일 경성에 도착하여 성낙형(成樂馨)은 성우선(成友善), 김주원(金冑元)은 김동만(金東萬)이라 위칭(僞稱)하고 김주원(金冑元)의 동생, 경성부 화동 130번지 김승원(金昇元)의 집에 머물렀다. 전부터 동지로써 문서를 왕복한 적이 있는 변석붕(邊錫鵬)에게 만나 줄 것을 요구 하였다.  이보다 앞서 변석붕(邊錫鵬)은 상해에 거주하는 불평동지인 유홍열(劉鴻烈-본년 6월 상해에서 병사)에게서 소개를 받아 성낙형(成樂馨)을 맞이하여 중국 내 불평동지의 운동을 청취하고 서로 함께 행동할 것을 약속하고 동지로써 심인택(沈仁澤)을 권유하였고, 심인택(沈仁澤)은 또 봉래(鳳來), 김승현(金勝鉉), 정일영(鄭馹永)을 권유하였고, 김승현(金勝鉉)은 염덕신(廉德臣), 이경창(李慶昌)을 권유하였고, 정일영(鄭馹永)은 김사홍(金思洪)을 권유하였다.  성낙형(成樂馨)은 변석붕(邊錫鵬) 집에서 앞서 밝힌 동지에게, 재 중국 불평조선인의 운동방침으로서 중국은 원세개(袁世凱)가 제위(帝位)에 오르는 것은 기정사실인데 다만 그 발표 일을 조정[遲速]할 뿐이다. 또 독일은 황제에 의해 지배받는 나라이어서 제1차 세계대전(1914)은 결국 독일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며, 일본은 영국의 선동에 편승할 이유가 없으며 독일에게 개전하고 한편으로는 중국을 향하여 무법 요구를 하여 중국 상하의 원한을 샀기에 풀려고 할 것이다. 이 형세라면 제1차 세계대전(1914) 종국 후 일본은 동양에서 고립되어 점점 퇴세(頹勢)를 나타내어 중국, 독일의 연합군대와 대전할 수밖에 없는 곤경에 빠질 것이다. 조선의 독립회복은 지금부터 중국 및 독일과의 조약을 통하여 준비를 하여야 할 것이나, 두 나라는 군주정치로서 종래와 같이 조선이 공화정치를 주장한다면 불리할 뿐만 아니라 이를 명분으로 하여 결국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이 씨 왕가의 1인을 이 운동의 맹주로 결정하였다는 뜻을 알렸다. 변석붕(邊錫鵬), 심인택(沈仁澤), 정일영(鄭馹永) 등은 이왕(李王)은 어리석지 않고 왕세자는 일본에 의지하지 않으며 현재 가장 불평(不平) 중에 있는 자가 있다면 이태왕(李太王)과 이강공(李堈公)이 될 것이다, 이태왕(李太王)은 양위에 즈음하여 이강공(李堈公)을 황태자로 할 뜻이 있었으나 권세의 무리가 이를 배척하여 왕세자를 후사로 정하자 이에 이강공(李堈公)의 한만 아직도 풀리지 않았다, 특히 이태왕(李太王)과 원세개(袁世凱)는 절친한 사이이고, 또 궁궐의 간수는 견고하여 일상소식을 통하는데 장애가 많아서 마땅히 이강공(李堈公)을 통하여 이 운동을 하여야 할 것 같다고 말하고 결정하였다. 심인택(沈仁澤)은 이태왕(李太王)에게, 정일영(鄭馹永)은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을, 봉래(鳳來)는 양반 사이에 동지를 구하는 운동을 담당하고 7월 7일부터 7월 15일까지 이후 동일부터 27일 본 건으로 검거되기에 이르기까지 다음의 행동을 하였다.1. 이태왕(李太王)에게 접근운동  심인택(沈仁澤)은 7월 17일경 김승현(金勝鉉)을 방문하고 낙형이 재외동지의 사명을 띠고 운동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고 이태왕(李太王)에게 접근의 방법을 자문하자 김승현(金勝鉉)은 바로 동의하고 전부터 서로 알던 이경창(李慶昌)으로 하여금 덕수궁 내승(內丞-이태왕(李太王)의 신변잡역에 복무하는 것) 염덕신(廉德臣)에게 사정을 알려 김승현(金勝鉉) 집에서 만나 서로 그 방법을 모의하여 심인택(沈仁澤)에게 통지하여서 동인은 성낙형(成樂馨)이 작성한 경각서안(警覺書案)(별지 제1호)을 김승현(金勝鉉)에게 보이고 동의를 얻어 ‘중국·독일·영국·러시아(中·獨·英·露)가 일본을 연공(聯攻)하는 것은 대세’라고 표제(表題)하고 김주원(金冑元)이 이를 정서하고 김승현(金勝鉉)을 거쳐 염덕신(廉德臣)에게 건네주었다. 염덕신(廉德臣)은 7월 26일 오후 12경 덕수궁(德壽宮) 함녕전(咸寧殿) 남측 이태왕(李太王)의 거실에서 재외(在外) 이상설(李相卨), 성낙형(成樂馨)의 무리가 국권회복운동을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음을 알리고 휴대한 서면을 정출(呈出)하고 또 폐하의 만족하는 바가 없다면 다시 제2의 방책 서신을 봉정(奉呈)할 것이라 부언하자, 동왕은 해당 서면을 보고 만족의 뜻을 표하고 성낙형(成樂馨)에게 직접 면담하거나 또 제2의 서신을 지참할 것을 명하고 옛날 정종(正宗) 대왕이 사용하였다고 한 전자(篆字)로 조각한 인영(印影)을 당지(唐紙)에 찍어서 하부(下付)하였다. 2.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운동  정일영(鄭馹永)은 남작 김사준(金思濬)의 종제(從弟)이며 옛날부터 알던 김사홍(金思洪)을 동지로 삼고 동인과 함께 김(金思濬) 남작을 면회하고 성낙형(成樂馨)의 운동을 알리고 또 이강공(李堈公)을 취한 이후의 일들을 말하니, 동 남작도 이에 동의하고 이강공(李堈公)에게 자문하여 완전히 동의하여도 신변에 일본순사가 있으므로 서로 만나는 것은 위험하니 외아부(外阿父)인 자신에게 협의하라고 대답하였다고 알리고, 성낙형(成樂馨)에게 면회를 요구하자 성낙형(成樂馨), 김사홍(金思洪) 등이 함께 방문하였다. 남작의 집에서 회견하고 성낙형(成樂馨)에게 재외동지운동의 전말로부터 국권을 회복하는 날에는 이(李) 왕가를 제왕으로서 우러러야 할 것이며, 이태왕(李太王) 혹은 동왕의 뜻을 이은 이강공(李堈公)이 서명한 중국 및 독일과 장래 제휴할 것을 밀약하는 전권을 부여한 위임장을 하부해 줄 것을 말하고 휴대한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별지 제2호)을 건네자 김(金思濬) 남작은 이를 받고 동의를 표하였다. (이로 인하여 김(金思濬) 남작은 유작자(有爵者)로써 검사국에 피고로 구류되었음)3. 구(舊)양반 사이에서 동지를 구한 운동  박봉래(朴鳳來)는 본 운동을 담당하고 별지 첨부 제1호 즉 경각서사(警覺書寫)를 작성하고 윤용구(尹用求-남작(男爵)을 작위도 사양한 자) 및 오정근(吳正根-양반으로 자산이 있고 신용이 있는 자)에게 보이고 동지가 될 것을 요구하고 한편 성낙형(成樂馨)으로 하여금 민영원(閔泳遠-남작의 작위를 받았으나 사양한 자)에게도 서면을 보내게 하였는데 이때 사용된 경각서 및 민영원(閔泳遠)에게 보냈던 신서(信書)를 발견 압수하였다.제3. 본건 운동의 원인  성낙형(成樂馨), 류동열[柳東說-이성복(李聖復)이라는 중국 이름으로 위칭(僞稱)을 하고 있음] 등은 지난 1914년 청도(靑島)에 모여 신문 혹은 잡지를 간행하며 계속해서 불평자의 규합을 기도할 무렵 우연히 제국과 독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자 퇴거하여 북경으로 나왔고 류동열(柳東說)은 상해로 떠났다. 본년 3월경 류동열(柳東說)로부터 상해에서 동지회합이 기획되고 있으니 오라는 통지서를 받고 건너왔다. 영국 조계(租界) 보창로 박은식(朴殷植-『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기자로 배일기사를 게재한 자), 신규식(申圭植-육군부위를 한 적이 있음. 원래 대한협회(大韓協會) 유력자로 중국 제1차 혁명전쟁이 일어나자 약 2천원을 휴대하고 조성환(曺成煥)과 남경(南京)에 이르러 손일선(孫逸仙)에게 면회를 요구하고 송교인(宋敎仁) 등에게 조선이 망한 것을 호소한 자)의 집 및 2인이 경영하는 상해 영국조계 북서천로 학원(현재 학생 108명이 있고 주로 군대적 교육을 하며 미국 본토 및 하와이 불평조선인과 기맥을 통하여 청년의 도미(渡美)를 주선함)에서 동인 등은 말할 것도 없이 이상설(李相卨-의정부 참찬을 지냈고 明治 40년 이태왕(李太王)의 밀사로 헤이그평화회의에 참석했던 자), 류동열(柳東說-육군기병 참령을 지냈고 불평의 결과 중국에 망명하였다가 돌아와 총독암살미수 사건에 피고가 되어 제2심에서 무죄가 되었다. 그 후 소재를 감춘 자), 이춘일(李春日), 유홍렬(劉鴻烈) 기타 몇 명과 회합하여 제1차 세계대전(1914)은 독일의 승전으로 돌아갈 것이 명백함으로 종국 후에는 칼끝을 동양을 향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리고 중국은 일본에게 원망(積怨)이 있음으로 독일과 연합하여 일본을 고립에 빠트릴 것이니 이때가 바로 조선독립회복의 시기가 됨으로 독일 및 중국을 향해 지금부터 연락 준비를 할 필요가 있는데 이 두 나라는 제정(帝政)이어서 공화정치를 표방해서는 목적을 이루기 어려우니 차라리 이(李) 왕가를 이용하는 것이 득책이 되기 위해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의 조직을 협의하고 본부를 북경에, 지부는 우선 중국에는 상해, 한구, 봉천, 장춘, 안동현, 연길부에 조선에서는 경성, 원산, 평양, 회령, 나남에 설치하고 재정, 통신연락, 단원 모집을 개시할 것을 협의하고 본부장에 이상설(李相卨)을 추대하고 그 아래에 재정, 교통, 외교부를 두고 외교부장은 성낙형(成樂馨), 교통부장은 류동열(柳東說), 재정부장은 이춘일(李春日)이 담당하는 것으로 하고 상해지부장은 신규식(申圭植), 감독은 박은식(朴殷植)으로 하고 장춘지부장에는 이동휘(李東輝), 연길지부장에는 이동춘(李同春), 회령지부장에는 박정래(朴定來-북경에 있는 자라고 함), 나남지부장에는 강재후(姜載厚)를 추대하기로 정하였다. 그리고 본 운동개시와 함께 필요한 비용은 중국혁명당(中國革命黨)을 모방하여 기부 및 기타의 징모(徵募)방법에 따라서는 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해상에서는 해적, 육상에서는 강탈을 하여도 무방하다했는데, 가장 필요한 것은 당수(黨首)를 정하는 것으로써 동지 중 조선에 잠입하여 이태왕(李太王)에게 연락하는 것이 급무라고 결정하였다. 성낙형(成樂馨)이 이를 담당하고 변석붕(邊錫鵬)을 통해 계획했으나 성낙형(成樂馨)과 변석붕(邊錫鵬) 사이에 서신 왕복한 것 뿐이고 아직 면식이 없어서 유홍렬(劉鴻烈)에게 소개장을 우송하였던 것이다. 또 혁명단규칙 및 취지서는 박은식(朴殷植)이 기초하는 것으로 협의 성립하였다.  성낙형(成樂馨)은 전술한 바대로 조선 잠입의 임무를 담당한 결과 선발로 북경을 떠나 조성환(曺成煥-曺煜이라 변명함. 1912년 계공(桂公)이 유럽으로 건너갈 즈음에 천진주재 제국영사로부터 퇴청(退淸) 처분을 받고 귀환 후 주거를 제한받았던 자), 김효명(金孝明) 등과 모의 중 우연히 일본·중국(日·支) 교섭문제가 발생하여 민심이 흔들리자 이에 이상설(李相卨), 류동열(柳東說) 등의 북경 도착과 함께 유의 숙소(북경 前門 밖 西河●天成店)에 서 서로 회합하여 혁명단(革命團) 본부를 북경 서단패루(西單牌樓) 93호 김자순(金子順-중국에 귀화한 불평조선인은 동인 집에서 신화민단(新華民團)이라는 것을 설치하고 있다고 함)의 집에 설치하기로 하고 만일 일본·중국(日·支)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여 위급하게 된다면 동지를 모아 안봉(安奉)철도를 파괴하고 중국을 응원하자고 하였다. 5월초 류동열(柳東說)과 함께 봉천으로 가서 서간도 각지를 편력유세(遍歷遊說)하였는데 교섭문제도 무사히 해결을 하고 이에 상해 모의에 기초한 담당사무 수행을 목적으로 봉천에서 류동열(柳東說)과 작별하고 친구가 된 김주원(金冑元)과 동반하여 경성으로 왔던 것이다.제4. 불평자 종래의 운동  본건은 전술한 바와 같이 작년 1914년 12월 상해회의에 기초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심인택(沈仁澤), 정일영(鄭馹永) 등의 자백에 기초해 다시 조사를 진행하여 변석붕(邊錫鵬)의 집 베개 속에 들어있던 서류를 발견하였다. 발견된 서류에 의하면 변석붕(邊錫鵬) 등의 불평자는 종래부터 유홍렬(劉鴻烈)을 통하여 재 상해 불평자와 계속 연락을 통하고 있던 사실이 뚜렷하다.  이제 그 2, 3의 증거를 거용(擧用)하면 지난 1914년 음력 5월 변석붕(邊錫鵬)은 재외 조선인에게 준 격문(별지 제3호)을 작성하여 유홍렬(劉鴻烈)에게 보내 상해에서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였다. 또 그 무렵 유홍렬(劉鴻烈)로부터 러시아 재류 동지 수 및 총기탄약수(별지 제4호)를 통보하여 올 때 이미 부호(별지 제5호)를 만들어 서로 통신한 사실이 있고 또 변석붕(邊錫鵬)과 성낙형(成樂馨) 사이는 면식이 없음에도 유홍렬(劉鴻烈)을 매개로 하여 성우선(成友善)이라 칭하고 서신(별지 제6호 작년 12월 1일부)의 왕복을 계속 하였던 것으로 전부터 이런 행동을 계속 기획한 불령의 무리로 하여 본건이 아무 이유 없이 돌연히 발생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제5. 각 불평자의 경력○ 김사준(金思濬)은 병합(강제병탄)에 즈음하여 남작을 하사받았다. 또 그 딸이 이강공(李堈公)비로써 가문은 명문에 속한다. 구한국 때에는 거듭 중요 관직을 역임하고 큰아들은 현재 이왕직사무관으로서 이강공가(李堈公家)에 근무 중이다.○ 김승현(金勝鉉)도 역시 명문으로서 관직에 임용된 적은 없지만 그 딸은 민비(명성황후) 사망 후 이태왕(李太王)의 비(당시 황후)가 되기로 약정되었으나 정변 등으로 연기되어 지금 36세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생활을 계속 하고 있으며 자작 조중응(趙重應)이 이를 가련히 여겨 주선하여 이(李) 왕가에서 3천원을 증여하여 위로한 적이 있다.  ○ 성낙형(成樂馨)은 양반 중의 명문으로 조부는 예조판서(학부대신) 기타 조상 중에도 의정부대신 등에 임용된 자가 있다.○ 김사홍(金思洪)은 김 남작의 일문으로 일찍이 정사에 분주하여 19년 전 친일당(親日黨)의 일원으로 러시아정부(露國政府)의 전복을 기도하여 15년 유형에 처해져 1908년 양위할 즈음에 대사면된 이래 불평을 품고 제국의 시정에 반대하여 병합(강제병탄)에 즈음해 은사금 1천원을 하사받아야 할 1인이었으나 이로 인해 삭제된 자이다.  ○ 변석붕(邊錫鵬)은 대원군의 신망을 얻어 대원군집정 당시는 세력가로서 동학당(동학농민혁명)에는 육군참위에 임용되어 토적에 종사하여 정3품에 서임되었다. 1898년에는 친일당 구사범(대원군파)으로써 15년의 유형에 처해졌다. 1908년 양위에 즈음해 대사면을 받고 병합(강제병탄) 즈음에는 1천원을 은사금으로 받은 자이다.○ 김주원(金冑元)도 양반으로 군부경리국 제1과장 3등 감독(참령 상당) 황해도 연안군 및 전라남도 옥과 군수를 역임하고 정3품이었는데 병합(강제병탄)을 분하게 여겨 서간도로 이주한 이래 만주 방면을 배회하고 있는 자이다. ○ 심인택(沈仁澤)은 양반으로 중추원의관 정3품인 자이다.○ 정일영(鄭馹永)은 잡배로서 이태왕(李太王)의 신용을 받아 궁내부 전화과기수 및 기사에 임용되어 정3품인 자이다. ○ 박봉래(朴鳳來)는 양반이나 궁내부 주사를 한 적이 있을 뿐으로 잡배이다.○ 염덕신(廉德臣)은 미천한 자로 일찍이 육군정교(특무조장)였는데 1908년 해산에 즈음해 면직 당하였다. 숙모인 백씨 성의 여인이 이(李) 왕가의 사용인으로 백 상궁이라 칭하여 그 연고로 해서 이(李) 왕가에 채용되어 이(李) 왕가 신변 잡무에 복무하였다. 일본어를 조금 할 수 있어서 동왕의 뜻을 받들어 형세 밀정에 종사한 형적이 있는 자이다.○ 이경창(李慶昌)은 신분 없는 소위 신농유업(神農遺業)을 칭하고 의업에 종사하여 현재 의생(醫生)으로 김승현(金勝鉉) 집에 출입하면서 대우를 받아서 이에 가담하고 김승현(金勝鉉), 염덕신(廉德臣) 간의 사역을 한 자이다.제6. 조사 진행으로 알게 된 사실 중 주의를 요한다고 인정된 사항1. 성낙형(成樂馨)의 진술  본 사실은 성낙형(成樂馨)이 말한 바로서 외국의 사정에 관계하여 반증(反證)이 없어 모두 믿을 수는 없어도 주의를 요한다고 인정되어 하나하나 열거한다.(1) 재(在) 중국불평조선인의 정황  재중국 불평조선인은 서로 문호를 넓히고 다른 자를 심어서 파벌을 만들어 상하로 나뉘어 항상 이합(離合)하여 통일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국권회복 후에도 공화정치파(共和政治派)와 제정파(帝政派)가 주의를 달리하여 몇 해 전부터 지금까지의 형세에 의해 중국(支那) 및 독일에 의지하여 제정(帝政)체재가 되지 않으면 동정을 얻지 못한다는 이유로 일어나 제정주의를 주창하는 자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류동열(柳東說)과 같이 공화정치를 주장하는 사람 중에 쟁쟁한 자는 그 뿐이어서 형세가 불리하게 되자 제정파에 가맹하게 되었다고 한다.  성낙형(成樂馨)은 1911년 9월 간도로 도망하여 이어 러시아령(露領) 및 만주(滿洲)를 배회하다가 1912년 봄 북경으로 나와 원세개(袁世凱)가 세력을 차차 회복하자 조부(祖父)의 연고(緣故)에 의해 망국을 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해 왔다는 것을 통신함으로써 당시 내무부총장인 조병균(趙秉均)을 소개받아 그 집에서 기식(寄食)하였고 그 사이 장훈(張勳), 장작림(張作霖), 단지귀(段芝貴) 등과 지기(知己)가 되어 제2차 혁명 무렵에는 하남, 강서에 나가 장훈(張勳)과도 면회하고 남경, 상해 방면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지난 1914년 12월 상해 모의에 기초해 북경을 나오는데 일본·중국(日·支) 교섭문제가 발생하여 여론(世論)이 분분할 무렵 전능훈(錢能訓), 양사기(楊士奇)의 허가로 출입하여 형세를 살폈는데 중국은 전의가 없고 단지 유리한 조건으로 종국을 맺으려고 하여 만일 담판이 순조롭지 않아 일본이 대병을 보내지 않는다면 조선인 동지를 모아서 만주에서 일본의 철도를 파괴하고 중국(支那)을 응원할 목적으로 전능훈(錢能訓)에게 장작림(張作霖) 앞으로의 소개장을 부탁, 휴대하고 봉천에 도착하여 서간도 각 지방을 유세했다고 한다.(2) 경성의 불평단체  본 건에 의해서 본다면 변석붕(邊錫鵬) 등은 일찍이 이미 재상해 불평조선인과 연락을 통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낙형(成樂馨)의 조선 행으로 이에 가맹(加盟)하고 혹은 편의를 준 사실에 귀착, 종합하면 일찍부터 모두가 동지인 자들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김승현(金勝鉉)의 집을 사무소로 정하고 또 천회(闡會)인 시회(詩會)를 작년 1월에 조직한 것으로서 남작 김사준(金思濬)이 회장이고 회원의 이름을 보면 전술한 무리[이경창(李慶昌), 염덕신(廉德臣)을 제외함]는 물론 기타의 무리를 보면 이용구(李龍九)·이승욱(李承旭) 등 불평의 무리들만이 아니었고 대개 이름을 시회로 빙자하고 일찍이 이미 재외 불평조선인과 연락을 통하거나 또는 불평의 모의를 한 기관인 것이다.(별지 제1호)경각서(警覺書)  [이태왕(李太王)에게는 제목을 ‘중국·독일·영국·러시아(中·獨·英·露)가 일본을 연공(聯攻)하려는 대세’라 하였음]  오오 통재라! 대하(大廈)가 장차 넘어질 때에는 일목(一木)이 극복하여 이를 지탱하기가 어렵고, 대(大河)가 장차 넘쳐날 때에는 일위(一葦)가 극복하여 이를 막기가 어려운 것은 시세의 자연스러운 것으로 목(木)과 위(葦)로써 이를 막음은 곧 분의(分義)인 것이다. 우리 동포로서 모두가 목위(木葦)의 의(義)를 본받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우선재핍(友善才乏)이라도 적은 사상을 가지고 몸을 해외에 투신하여 동분서주하고 사방에 체결하여 피로 울고 원망으로 절규한 것이 이에 8년으로 하여 재내(在內) 동포가 갈망하였으나 목적을 성취하지 않은 것을 우내(宇內)에 교섭하고 기회를 틈타서 대세를 만회하려 시도하였다. 교섭운동에 성의를 다한 것은 대세를 짐작하여 동포가 양찰(諒察)하는 것을 신뢰하여 췌언(贅言)을 기다리지 않는 바가 되었다. 그래서 중국·일본(中·日)교섭 무렵에는 동포 중 사려(思慮) 있는 자는 적어도 호기(好機)의 시기가 되었다고 망동의 폐단이 없었다. 지금 음력 3월 우선(友善)이 중국 북경에 있어 시국에 관한 중국·일본(中·日)교섭이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장차 또 개전 후에 조국만회의 방법에 대해 기회를 이용할 것을 강구하고 해내(海內) 해외(海外)에서 동포를 향하여 의사를 표시할 목적으로써 중국 정국(政局)의 화전(和戰) 두 모양에서 계획을 탐지하고 드디어 국제 화약 일체를 인식하였다. 의외의 경우를 위한 준비로서 북경에서 동지를 대동하여 봉천에 이르러 임시통신기관을 설치하고, 남경(南京), 북경, 상해, 서북간도(西北間島), 러시아(露領) 등과 미국 각 지역에 연락하고 기회를 기다려 거사하는 방략(方略)을 밀약하였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세는 먼 장래가 아니니 완전무결한 대 희망이 존재함을 알아 결코 낙담하지 않고 지금 우리 동포는 해외시국(海外時局)의 변전(變轉)을 짐작할 수 없고 중국·일본(中·日)교섭 전후에 사상계 변화의 형세는 마치 하늘이 무너질 리 없는 것과 같다. 우리 동포로써 지기(志氣)가 저상(沮喪)하거나 혹은 오해의 염려가 있지는 않을까를 우려하여 경각(警覺)을 촉구할 것으로 이에 세계의 시세를 나열하고 동지의 비감(秘鑑)에 제공하고자 하니 무릇 자침(磁針)이 상응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전일(前日)의 낙담을 버리고 장래에 대 희망을 품음으로써 크게 계획하는 것이 있다면 천만다행인 것이다.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 주중총기관(駐中總機關) 부장 성우선(成友善) 아룀1. 중국·일본(中·日)교섭 전의 대세  우리 한국혁명의 무형적(無形的) 활동시대란 무언인가. 최초 일본은 갑오(1894)년 전후 사할린(樺太), 대만(臺灣)을 점령하고 거액의 배상을 강요, 취득하여서 육해군의 세력을 확장하고 강한 러시아의 원동(遠東)세력을 몰아내어서 대한(大韓)을 합병(강제병탄)하고 세계에 외면적 강위(强威)를 표시함으로써 중국 동삼성(東三省)에 근거지를 만들려고 하였으나 강한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여유가 없어 야심을 감히 들어내지 못하였다. 다행히 중국 제1차 혁명이 일어나자 감언(甘言)으로써 러시아를 유혹하고 중국 당시의 이폐(利弊)를 설명하는 데에 동아시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대러시아와 대일본 뿐이라 칭하고 중국의 속지(屬地) 몽고를 독립시킴으로써 일러밀약(日露密約)을 체결하였다. 이후 러시아령(露領)에 우거(寓居)하는 한인을 밀약국인(密約國人)으로서 대우하니, 유형적(有形的) 활동이 방해를 받아 작년 계축(癸丑) 8월 9일 이위종(李瑋鍾), 이상설(李相卨) 등을 모스크바(露京)에 3개월간 금고(禁錮)한 것이 이와 같으니 이로써 무형적 활동의 조직이 필요한 바가 되었다.1. 중일(中日)교섭 후의 대세   중국정부의 화약(和約)은 깊게 시세를 살피고 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인민의 배일행동, 배화열(排貨熱)은 더욱더 창궐하고, 그래서 각국이 일본에 대하여 악감(惡感)을 생기게 이른 이유 및 장래의 관계는 아래와 같다.(1) 일러밀약(日露密約)이 무형(無形) 중 효력 취소  일본의 흥망에 중대한 관계가 있는 것 중, 러시아협약이 성립되어 다시 울란바토르(庫倫) 독립이 취소된 이유   러시아는 일본의 감언에 빠져 밀약을 체결하고 울란바토르(庫倫)를 선동하여 중국을 배척하고 독립을 주창하여 이를 대러시아보호국(大露國保護國)으로서 세계에 공포하고 경비 1천만 파운드를 지불하여 세력의 근거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제1차 세계대전(1914)에 참전하게 되어 영국·프랑스(英·佛)와 함께 연합군에 참가함으로써 울란바토르를 보호하지 못하게 되자, 이를 우려하여 일본과의 밀약에 기대하고 울란바토르의 모든 보호권을 일본에게 밀탁(密托)하였으나, 일본은 울란바토르를 일본의 의무적 보호국이 되게 하였고 이로써 러시아는 농락당하였다. 그래서 지난 번 중일교섭 21조 중에는 내외몽고의 세력을 포함시킴으로써 러시아는 이에 통분하고 일러밀약(日露密約)을 취소하고 중국의 후일 처분하려는 영토로써 이와 바꾸려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보건대 일본·러시아(日·露)간의 국제 불선(不善)으로 러시아가 일본에 대하여 후일 무리불신(無理不信)의 죄를 물으려 것은 명확하다. 일본은 이에 고려(顧慮)하고 성명하기를, 제1차 세계대전(1914) 종결 후 호의를 표한 것으로 동맹운동을 시도하더라도 러시아는 강해 질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는 결국 듣지 않았다.(2) 영일동맹(英日同盟)이 위험한 예정인 이유  최초 영일동맹(英日同盟) 제7조, 제9조, 제11조 중 한국영토, 중국의 이익을 공점(共點)의무로 약속하고 서로 침범하지 않을 것, 동맹 이전에 점령한 이익은 각자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고 세계에 선언한 것이라도 또한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의 주동(主動)이고 일본은 영국과의 동맹을 지킨다고 하면서 영국군과 연합하여 독일의 청도(靑島)를 공격하였다. 이때 영국은 일본에 대하여 만약 청도를 공략하면 부근 이가둔(李家屯)을 영국에 귀속(歸屬)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그 후 청도를 함락하였으나 야심이 생겨서 조약을 이행하지 않고 영국군의 무능함을 이유로 중일교섭 조건 중 대부분이 영국의 이익을 포함한 것이라고 말하며 영국을 기만하였다. 영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으로 여유가 없다지만 후일 반드시 문제가 발생할 것은 필연이라고 하며 조전병(助戰兵) 20만의 청원을 들어주지 않고, 각 신문에 영국에 관한 터무니없는 기사를 게재하고 자주 농락하는 처지이다.(3) 중국·독일(中·獨)이 연합하여 일본을 공격할 예정인 이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를 장악한다면 이수(理數)의 움직임이 있어야 한다. 전쟁 1년에 이르면 영국·프랑스·러시아(英·佛·露)의 연합군은 현재의 기세를 보면 3개월을 지탱하기 어렵다는 것은 예측하기 어렵지 않다. 독일은 3년간의 군자(軍資)를 지탱하고도 오히려 여유가 있을 뿐만 아니라 육해군의 병력으로 논한다 해도 아직 출정시킬 병사 3백만이 있고, 병기(兵器)의 예리함은 천하에 비교할 바가 없다. 전후(戰後) 행동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의 시베리아(西伯利亞) 철도 권리는 모두 독일에게 돌아가고 동서(東西)의 대사(大事)는 모두 예정된 것이다. 그리고 청도 문제에 대해 개전(開戰)은 기정사실로 가령 강화를 맺어도 일본의 이익과 권리는 강탈 침해당하여 화(和)를 전(轉)하여 전쟁을 하는 것 역시 이세(理勢)로 당연한 것이다. 공격의 전지(戰地)는 동삼성(東三省) 혹는 산동(山東) 지역은 지세상(地勢上) 일본이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중립을 엄수(嚴守)한 중국을 멸시하고 중립지대에 침입하는 것은 공법(公法)을 문란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이 독일과 연합 공격한다면 미국이 중국에 대한 문호 개방주의를 잃지 않으려고 중국·독일의 원조국이 되고 영국·러시아(英·露)를 종족관계로써 연합하여 일본의 배후에서 돌입하면 이때 우리 대한의 혁명은 애원적(哀寃的) 외교수단으로도 독립회복을 청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혁명 주동자는 모국(某國)에서 명조(明助) 혹은 암조(暗助)를 받아 일본군(日軍) 운반의 요새지를 방어한다면 상하(上下)가 혼란 분열되어 승리하기 어렵게 된다. 최후의 수단적 외교의 요점은 이에 있으므로 즉, 재외운동은 배가하고 주의를 요하는 기회인 현재 중국·독일의 내응(內應)은 이미 오래되어 교제기관은 급박할 때이다.(4) 중국·독일·일본(中·獨·日) 국제 결렬 후 우리 동포활동에 관한 대사건  무릇 재내재외(在內在外) 동포가 원수의 잔화(殘禍)를 우려한다는 일반적인 이유로 '우마(牛馬)의 노예'란 이름에서 탈피하여 자유국민의 자격을 만들고자 한다면 외원내응(外援內應)의 힘 없이는 결코 할 수 없는 것이 즉 정리(定理)이다. 그렇다면 이 기회를 이용하여 재내자(在內者)의 선동(先動)에 재외자(在外者)가 이를 돕지 않는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고, 동시에 재외자의 선동에 재내자가 이에 응하지 않으면 이 또한 불가능하다. 따라서 재외자는 외세에 의하여 움직이고 재내자는 실력에 의하여 이에 응해야 하고, 이것은 곧 시기를 이용하는 수단이라 말할 수 있다. 소위 재내자의 실력은 즉 동지(同志)의 단체이다. 단체란 즉 비밀 무형이면서 견고한 정부인 것이고, 그 정부조직 방법은 재외 운동자의 책임이 되고 이것은 곧 대세를 관찰하여 인망(人望)을 규합하는 조직의 요건이 된다.(별지 제2호)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제1조 중국과 한국은 유구한 사천년 역사상의 정의(情誼)와 지리상 순치적(唇齒的) 관계를 가진 고로 양국의 원수(元首)인 자는 동서(東西)의 대세(大勢)를 관찰하여 안녕을 유지하기 위해 이에 본 조약을 체결함제2조 대중화민국대총통은 의방국(誼邦國) 대총통으로 정할 것제3조 한국○○○는 의방국○○○로 정할 것제4조 대독일대황제는 중한의방의 연대보증국 대황제로써 정할 것제5조 중국은 한국혁명에 대해 일체의 사건에 대해 정의로써 방조(幇助)할 것제6조 대독일의 중한의방에 대하여 보증한 이유로써 중국과 한국 양국이 조약을 위반할 경우에도 그 보증한 의무와 권리를 확수(確守)하여 잃지 않을 것제7조 중국은 한국혁명이 일어난 즈음에 군기(軍機) 혹은 재력(財力)을 방조하고 중급군관을 파견하여 전력을 원조할 것제8조 한국혁명이 일어났을 때 재정, 군기가 부족할 우려가 있거나 또는 보증한 독일에게 방조를 청구할 경우에 중국은 의방한 자격으로써 독일에 대하여 혹은 권고 혹은 담보를 할 것제9조 독일은 한국혁명을 방조하여야 하며 의방인 중국에게 권고 혹은 보증을 받는 경우에는 이에 상당하게 원조해야 할 것이고 그 방조를 받아서 한국혁명이 성공 할 무렵에는 독일은 방조한 재정 및 군기를 계산하여 정식 국채(國債)로써 계속한다. 단 이자는 계산하지 않고 상환기한은 30년을 넘지 않을 것제10조 중국과 한국 양국은 독일의 보증에 대하여 감사의 뜻을 표하기 위해 동서(東西)에서 우등권(優等權)을 양도(讓渡)할 것제11조 한국혁명의 성공 후 중국은 한국의 내정(內政)을 간섭하지 않는 것으로 하고 단, 의방인 의무로써 세관 혹은 철도 등의 사업에 관하여 기수(技手) 혹은 통역원을 고용할 것제12조 한국혁명 성공 후 중국의 영토에 식민(殖民)하거나 혹은 해군 근거지를 청구한 경우는 강제로써 하지 않고 정의(情誼)로써 해야 하며, 조차(租借) 기한은 50년을 넘지 않을 것 중국도 역시 한국에 대하여 동연(同然)할 것제13조 중국과 한국 양국은 각 조약을 지키고 영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제14조 독일은 중국과 한국 양국에 대해 보증한 구실로 중국과 한국 양국의 영토를 이유 없이 침해하지 않을 것제15조 중국과 한국 양국은 국가의 편리를 위해 각각 공사를 파견하고 명칭을 의방대사(誼邦大使)로 정할 것제16조 중국과 한국 양국은 영사를 두어 각 인민을 보호할 것제17조 한국혁명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경우에는 중국은 그 혁명에서 중요한 인물에게 상당한 지위를 주어 보호할 것제18조 본 조약은 한국혁명사업 착수 전에는 이를 비밀에 부치고 성공 후 정식으로 세계에 공포할 것제19조 본 조약은 한국혁명사업 착수 전에는 중국·한국·독일의 중요한 인물 간에만 사결(私結)하고 성공 후 각 정부의 원수가 이를 계승하여 공포할 것(별지 제3호)  오호라, 나라가 망하니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슬프다, 민족이 멸하니 무엇을 어찌해야 할까. 나라가 이미 망했다는 것은 옛날 사람의 비참한 바요, 민족이 멸하고 인종과 함께 다 죽어 새소리 공허하니, 슬프다, 제군(諸君)은 깊고 오래 생각하지 마라. 이때를 당하여 지방 만리에 자재천억(資財千億) 있다 하여도 이미 동포는 없고 누구와 함께 살 것이며 누구와 더불어 즐거울 것인 가. 만약 친구가 잠시 떨어져 있어도 또한 석별을 오래도록 서로 기억하는데, 하물며 부모형제가 노예가 되고 몸은 다른 지역으로 떨어져 국난(國難)에 분주하고 가난(家難)에 빠지니 그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우리 제군을 위하여 슬픔이 될 것이니, 오호, 나라는 빈터가 되고 이류(異類)가 충만하여 참학(慘虐)을 멋대로 하니 우리는 구천(九天)을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며 분묘(墳墓)를 바라보고 원혼(冤魂)을 문안하는구나. 이제 일인(日人)이 우리를 참혹하게 한 바를 말하면, 이미 우리 수십만의 의병을 살육하고 우리 적신(賊臣)을 이용하여 조국을 빼앗고 다시 그 심염(心厭)한 바가 없고 법령우하(法令雨下)로서 적종(適從)할 바 없고 부역은 날로 가중하고 민명(民命)으로 감당하기 어렵고 게다가 사사백단(欺邪百端) 조령모개(朝令暮改)하여 정탐 자가 산야에 가득 차 간흉을 작상(爵賞)하고 양선(良善)을 잔해(殘害)하였다. 민업(民業)을 강탈하고 농상(農商)을 억압하고 관리를 몰아내고 형교(刑敎)를 남용하여 그 악정(惡政)과 음미(淫靡)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니, 우리 양속(良俗)을 파괴하고 부자(父子)가 서로 소송으로 다투며 인륜의 도가 타락하여 부부가 이별하고 은혜는 잊어버려 형제 친족은 없고 참인(慘忍) 각박하여 다만 이익으로써 바라보니, 우리 인의예양(仁義禮讓)을 버리고 사람을 몰아내 금수의 지역에 이르게 된 것은 곧 이 일인(日人)의 국성(國性)으로서 한국을 모방하여 이와 같이 된 것이다. 또 일인 대중으로 하여금 우리 지위를 빼앗고 주객전도하여 13도의 토지 산업을 들어서 그 반을 거두어 길들이기를 하는 것이 마치 수십 년과 같아서 우리는 어디에 거처 할 것이며 무엇을 경작해야 하는 가. 슬프다, 저들이 이와 같이 하여 그 죄는 천지에 가득 차고 신인(神人) 모두가 분노하고 만국에서도 또한 이를 성토하는 것이다. 이때를 당하여 반드시 우리 병(兵) 우리 재(財)를 써서 동포의 혈육으로써 산야를 물들이고 자산을 기울여 다 없애니 슬프고 슬프다. 우리가 무엇으로 이를 감당할 수 있는가에 생각이 이르면 머리칼이 거꾸로 서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슬프다,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계획하겠는가. 신라(新羅) 고려(高麗) 이래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우리를 해한 것이 무릇 56회에 이르니 만약 저들이 우리에게 해함이 적음으로 바라만 보고 죽음을 면하여, 일인의 잔해시역(殘害殺逆)에 임하게 되면 도리어 죽음 중에서 생을 구하는 통왕직진(通往直進)함으로써 우리 구물(舊物)을 토색하여 그 후 아무것도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우리에게 세 치의 혀가 있다 하고 제군이 수청(垂聽)을 청하고자 하면 지금 일인(日人)의 웅사견함(雄師堅艦)을 우리가 진실로 보지 못한 것과 같으니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대개 일인이 러시아와 전쟁한 이래 군비가 곤비(困憊)하여 미봉책으로 거칠고 사납게 악(惡)을 이루게 되고 날마다 힘써 백성에게 부과하고 마을은 지탱하기 어려워 힘을 다함이 화중(火中)에서 먹을 것을 얻는 것 같아서 조급하고 게다가 광폭하여 미국에게 일을 꾸며 부채를 받기위해 전쟁을 하니, 즉 은혜 갚는 것을 원수로 하는 것이 저들이다. 또한 멕시코·미국 양국이 인호(隣好)를 반간(反間)하고 중국혁명을 선동하여 능멸을 막기 어렵게 되고 게다가 독일을 기피하여서 그 군사가 배반하여 만주와 필리핀(比律賓)을 차지하고 인도연방을 암암리에 사주 선동하는 일이 생겨 거의 천하무적이라 칭하고 방자와 교만이 안하무인 같아서 저들이 어찌 능히 시비덕의(是非德義)가 무엇인가를 알겠는가. 백주(白晝)에 금곡(金穀)을 움켜쥐고 혼신(渾身)의 등극(謄克)한 지 10년 이래 일선(一善)도 없이 백악(百惡)을 모두 갖춘 소인(小人) 일본(日本)에 도달한 바, 독(毒)을 받아 다만 오로지 사람을 해하는 것으로써 능사를 삼는 것이 마치 병자(病者)의 종기를 제거하지 않으면 편안하지 않는 것과 같이, 그 악덕비행이 하늘에 역행하고 의리를 배반하는 백계(百計) 모두 그렇지 않음이 없다. 슬프다, 저들이 드디어 고독하여 기댈 것이 없게 되는 처사(處事)로써 열중에 하나라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헛된 수고가 될 것이 분명하다. 저들의 국성(國性), 저들의 국상(國狀) 무릇 이미 이와 같으니 이 기회를 잃고 만약 이와 같이 우리가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은 어부지리(漁夫之利)를 취하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도리어 천하의 악명을 한 몸에 받는 것에 이르는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대성불평(大聲不平)을 절규하고 배꼽을 씹는 것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된다. 하물며 저들이 장차 누란(累卵)과 같이 천인(千人)이 가리키지 않는바 병으로도 역시 죽는 것이다. 장차 또한 저들이 산적(山積)의 부채는 이자라도 보답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하물며 원금은 어떻겠는가. 또 채주질물(債主質物)을 가지고 있어 이를 상환하지 않거나 세(勢)가 부득(不得)하여 상환하지 않고자 하면 즉, 일국(一國)의 토지재산을 준다 해도 역시 정산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저들이 전전(戰前)에 늘어놓은 배는 곧 노후하고 양식의 반은 고갈되어 보충하는 바 없어 어찌 근심하는 사정이 없겠는가. 이것은 곧 저들이 자업자득(自業自得)한 것으로 다시 누구를 원망하겠는가. 이미 또한 저들 노성(老成)한 무리는 조락(凋落)하여 군중 불령(不逞)함이 극에 달하고, 의원(議院)은 변하여 전장(戰場)과 같이 정당(政黨)이 각자 기치를 세우고 정치는 문란하여 백성 아래 두렁에 있다. 그런 즉 지난날, 청(淸)을 토벌하고 러시아를 격파하여 우주(宇宙)를 진동시킨 백만의 병사와 일천 척의 배일지라도 이로 인하여 곤비(困憊)하게 되었다. 이에 지금은 오히려 1마리 병아리라도 극복하여 이길 수 없고 강노(强弩)의 끝으로써 노호(魯縞)를 뚫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라 말하기를, 일본은 러시아·미국·독일(露·米·獨) 누구를 불문하고 그 사이에 하나의 화살도 남지 않아서 그들이 적약다사(積弱多事)한 중국(支那)에 만약 거듭하여 구맹(舊盟)을 찾음을 문죄(問罪)하지 않는다면 일본은 반드시 머리를 조아리고 청명(聽命)하여 겨우 지탱하여 분재(粉齏)할 것이라고 말함이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또 미국·독일·중국(米·獨·支)이 일시에 더불어 일어나 병사를 일으키면 멸망하기가 아침 먹을 시간 만큼일 것이다. 그들이 지금 장차 내홍(內訌)이 안으로 퍼지고 외우(外憂)가 오니 즉 불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타버려 없어질 것이다. 망할 것을 기대하고 기다려서 일본이 망하면 돌아보고 가여움에 족하지 않더라도 홀로 우리가 크게 두려워하는 바는 득난(得難)한 것은 때가 있고 잃기 쉬운 것도 역시 때가 있나니, 일본은 이 간난(艱難)의 때에 즈음하여 이미 천하에 어려움이 많음을 보고자 하여도 헤아려 알 수 없음을 기억하지 않으리. 곤수(困獸)가 도리어 우리를 상하게 하고 우리가 당하여 해를 입는 것을 제군은 어찌 계획하지 않는가. 옛적에 을지문덕(乙支文德)은 수양제(隋煬)를 격파하고 양만춘(楊萬春)은 당나라를 물리치고 강감찬(姜邯贊)은 소손녕(蕭遜寧)을 쫓아내고 정세운(鄭世雲)은 홍건적을 섬멸하고 이순신(李舜臣)은 왜적을 격파하고 제압했다. 이 여러 사람들은 모두 일시의 호걸이 되었다. 그렇지만 고각(高閣)에 앉아서 난세(亂世)의 어지러움을 만났다면 이기(利器)도 마련하기 어려운데 자갈로써 초목과 함께 썩게 되는 어찌 훈명(勳名)을 일월(日月)과 함께 빛을 다투고 천년에 빛나는 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제군(諸君)은 불세출의 재주를 품고도 이 기회에 어떤 뜻도 없겠는가. 또 제군은 수십만의 웅지를 품고 요동(遼東)에 걸터앉아 또 천하의 여망을 지고 각국과 연락하여 미독(米獨)의 목을 움켜쥐고 러시아·중국(露·支) 등을 두둘겨 우리와 그 사이를 종횡하여 왜놈에 대항하면 이는 진실로 항아리 안의 자라를 잡는 것과 같은 것이니 무엇이 어렵겠는가. 또 의성(義聲)이 이르는 곳 동양일국(東洋一局)에 격문을 전함에 있어 곧 국취(國恥)를 복수하고 국광(國光)을 베풀어 국위(國威)을 세우고 국민(國民)를 보호하며 이렇게 하여 당당히 구미(歐美)와 함께 올라서 여열(餘烈)이 있고 고무(鼓舞)되어 담소(談笑)하고 이르러 천하를 위해 잔적(殘賊)을 제거하면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제군의 훈업(勳業)이 어찌 앞의 여러사람에게 그치겠는가. 그런데 만약 외축(畏縮)하여 기회를 잃으면 이는 제군의 초지가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옛날 애친각라(愛親覺羅)는 2만의 병사로 천하의 대부분을 평정하였다. 즉 병사를 어떻게 쓰는 가에 달려있는 것이다. 또 만국은 우리와 함께 원수에 대한 적개심이 있으니 어찌 이를 멸하는 데에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아, 때는 가면 다시 오지 않으니 제군은 어찌 도모하지 않는가. 또 우리 대한 국민은 밤마다 북쪽을 바라보며 하늘에 축원하기를, “바라건대 우리 동포를 수화(水火) 중에 건져내길 만국(萬國)에 시수(翅首)하고 하늘을 바랍봅니다.” 저것에 당하여 만국이 이것을 도우는 것으로서 백성이 저것으로 돌아가고 우리가 곧고 저것이 구부러지고 우리가 강하여 저것이 약한 즉 이 하늘이 우리 때를 도와 천하의 무거움으로써 제군을 밀음으로 정하는 것이 되어도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지금 우리들은 과연 군을 도울 힘이 없겠는가 라고 들을 것 같으면 군사를 내어 반드시 기대하면 군중은 일어나 향응(響應)하고 왜놈을 싫어하는 자는 모두 힘을 다하여 그것을 위해 장대를 세워 깃발로 삼고 나무를 베어 병기로 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여 병기로 따르다면 설령 우리 대한자가 대훈(大勳)을 세우는 것이 불가능하고 기공(奇功)을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하더라도 기각(掎角)의 세(勢)로써 하면 왜놈도 수수방관만은 못할 것이고, 또한 국내 요란하여 이것과 함께 싸우면 오래가지 못하여 패주(敗走)하게 될 것이니 때를 기다려 군중에 미치는 바로 만국의 마제차철(馬蹄車轍)은 반드시 일본을 평정하고 이후에 이르러 제군은 천하를 향하여 감사하고 또 말하길, 우리는 나라를 잃은지 5년에 비로소 국권을 회복한다고 칭하고 그 공렬(功烈)를 어떻게 갚겠는가 할 것이다. 곧 이에 민영환(閔泳煥), 이준(李儁), 안중근(安重根) 제공(諸公)의 하늘에 있는 영혼이 감격하고 기뻐하여 반드시 우리들 중에 밤마다 춤을 추고 멀리서 제군을 위해 축원할 것이다. 만약 그것이 이상과 같이 안되면 백년하청(百年河淸)을 기다리는 것과 유사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한(限)하여 언제인가하니 때는 가고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니, 우리들은 포로가 서로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이 날마다 먼 하늘을 향하여 머리를 조아려 다만 이 명(命)을 기다릴 뿐이다.갑인(甲寅, 1914) 5월 일대한인사(大韓人士) 재외동포 제군 각하 근봉(謹奉).(별지 제4호)  흑룡강변(黑龍江邊)에 있는 하얼빈(哈爾賓)과 블라디보스토크(浦潮)는 러시아의 영지로써 흑룡강, 길림과 봉천 3곳은 동삼성(東三省)이고, 신의주·봉천 간 670리의 기차와 장춘(長春) 830리는 일본의 영지이고, 봉천 안동현(安東縣) 대련만(大連灣)은 일본의 영지이다. 동삼성 내 길림의 주무기관은 성우선(成友善)이 되어 26만 여명 창탄(槍彈)을 가지고 28년 이래 농사를 지으며 밤중에 교련한 병사가 되고, 조선 경성에서 신의주, 평양(平壤), 강계(江界), 회령(會寧), 블라디보스토크에 가고, 조선 경성에서 원산항(元山港), 함흥(咸興), 성진항(城津港), 회령, 블라디보스토크로도 가며 미국 하와이(布哇島), 샌프란시스코(桑港), 뉴욕(紐育)은 세계의 대도처(大道處)가 되니 내지인 등은 1월 1회 회동 상의할 것.각처(各處) 군용정형(軍容情形) 상세(詳細)  무송현(撫松縣) 5천 3백 명 내 강계(江界)사냥꾼 4천6백7명 나머지 해산병(解散兵) 6백9십3명, 신식 쾌창(快槍) 6천8백 근(筋), 탄자(彈子) 9만7천과(顆), 쾌창 명목 러시아제 서기1810년 조성.  왕청현(汪淸縣) 1만9천5백7 명 내 사냥꾼 1만9천명 나머지 해산병 3백2십 명 또 나머지 학생 신식 창(槍) 및 탄자를 모두 가짐.  통화현(通化縣), 회인현(懷仁縣), 집안현(輯安縣) 3군(郡) 25세 이상 30세 이내 39만 73명 현재 야반집대(夜半集隊), 교련군식(敎練軍式) 신식(新式), 창탄(槍彈)을 함께 가짐.  하얼빈(哈爾賓)주무기관은 김철성(金喆聲)에 의해 연락함.  블라디보스토크(浦潮)주무기관은 이상열(李相說)  창탄 1만3천병(柄) 러시아 호조탄자(護照彈子) 5십만과(顆)를 가짐.  블라디보스토크 2만9천3백6십5인 모두 창탄자를 가짐.  현재 러시아사범학교 공지를 빌어 밤마다 군식(軍式)을 교련함.  미국에서 주무기관은 박용만(朴容萬)  학생 무관 교련 8백5십5명  재정 2천9백 여 만원  군함 5척 현재 있음.  군병 출구(出口)시, 통화현, 회인현, 집안현 3군의 군병을 합동하여 초산군(楚山郡) 앞을 건너서 습격하여 신의주(新義州)에 유진(留陣)할 것.  왕청현(汪淸縣)에 있는 군병은 계현(系縣) 등지에 출몰하여 일본병을 유인하여 장마촌(長馬村) 뒤를 습격할 것.  무송현에 있는 군사는 연락하여 연길부(延吉府), 블라디보스토크와 구원병을 합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거슬러 회령(會寧)과 나남(羅南) 방면에 유진하여 돌격할 것.  여순(旅順), 대련(大連)의 원조병과 봉천 군대를 합하여 영구(營口)의 기차를 습속하게 차단할 것.  군량 탄약은 풍부하고 재정은 동삼성(東三省)에서 취수(取收)한 2천 만 원 러시아군함 10척 미국군함 5척 있음(별지 제5호)  지일헌(指日憲-헌병을 가리킴) 목관사(木貫紗)  지일사(指日査-순사를 가리킴) 주관사(珠貫紗)  지한헌(指韓憲-헌병보조원을 가리킴) 향계(向繼)  지한사(指韓査-순사보를 가리킴) 창호계(窓戶繼)  지창(指槍-총기를 가리킴) 우피(牛皮)  지심(指心-주의를 요함) 백미(白米)  심복(心服-지휘에 따름) 백미 시세 높음  심불복(心不服-지휘에 따르지 않음) 백미 시세 저락(白米時勢低落)  심상반(心相半-중간)  백미 세고 고무비(白米勢高高無比)(별지 제6호) 전보 건  변석붕(邊錫鵬) 대 선생(先生) 보십시오.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시절은 어떤 시절입니까. 이 날은 어떤 날입니까. 동구(東歐)와 서구(西歐)의 수륙(水陸)이 개통되고 평생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각국 인종들이 서로 섞여서 왔다 갔다 함에는 각기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대개 그 사람의 이름을 듣고 목적을 알면 그 지기(知己)를 맺어주려 합니다. 이렇게 20세기 영웅열사(英雄烈士)의 사업을 이루고 있는 오늘날, 어찌 전날에 안면이 없는 이보다 지기를 멀리하여 사업을 실패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현(現) 세계 영웅열사의 교결지기(交結知己)함에 대해 그 전날의 안면이 없음을 한탄할 뿐이며, 단지 성기(聲氣)로만 연락하려 노력하지는 않습니다. 아, 이 소생 우선(友善)은 고국과 떨어져 동포와 헤어져 해외에 머문 지 7~8년이 지났습니다. 일찍이 각하와 직접 뵌 적은 없어도 평소의 높으신 풍격을 흠모하고 의형(議荊)을 원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 우선(友善)의 불민(不敏)함을 한탄하며 지기를 잃을까 두려워하던 즈음에 ●…● 작년의 일로 인해 상해를 거쳐 광동(廣東) 및 남양군도(南洋群島)로 향했습니다. 우연히 각하의 동지 유군(劉君)을 만나 담소를 나누다가 각하가 열심이라는 것을 듣고, 그때 글을 보내 내 속뜻을 표명했습니다. 각하의 고명하신 식견을 얻고서야 제 마음이 갑자기 탁 트인 듯해졌습니다. 때마침 갑자기 급한 일이 있어서 유군(劉君)과 헤어져 광동지방으로 가서 잠시 머물다가, 작년에 다시 북경(北京)으로 가서 벗들과 만나고, 청도(靑島)로 가서 몸을 의탁하니 사방의 동지와 연락이 되었습니다. 아하, 우리 조국의 속어(俗語)에 이르기를, ●…● 이 말이 저 우선(友善)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저는 원래 재주가 없고 학문이 천박하며 지식이 짧음은 오늘날 내외(內外)에 서로 교류하는 벗들이 다 아는 바입니다. 다만 중국(支那) 남·북부 및 미국 모처(某處)와 러시아(露國) 모처(某處)는 아침저녁으로 왕래하며 동지들을 만났는데, 이를 저들 포로가 정탐하여 알게 된 후로는 주목받는 객(客)이 되어서, 그 국권의 강한 보호를 받으려고 청도(靑島)에 머물고 있습니다. 이번에 오스트리아(墺塞)에 충돌이 있어서 저 놈들이 독일세력과의 전쟁으로 청도를 돌볼 수 없게 되었음을 알고 독일이 청도를 빼앗았습니다. 소도(小島)의 야만행위를 대륙(大陸)에서는 시도해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병(兵)이라는 것은 그 상당한 명목을 얻어 세계에서 듣고 알게 되어 열국(列國)의 승인을 얻은 후에야 비로소 공법(公法) 상 무명의 출사(出師)라는 이름을 면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유럽전쟁에 저 놈들이 참가할 명목 및 목적은 결코 없습니다. 단지 영국과 동맹한다는 미명(美名)의 서(書)를 내려, 동아시아의 평화를 유지하고 중국(支那)의 토지를 보호해야 한다면서 갑자기 8만의 대병(大兵)을 일으켰습니다. 3천의 영국군과 동맹 연군(聯軍)하여 해상(海上)을 봉쇄하고 수전(水雷)을 제거했으며, 대련(大連)에서 연태(煙臺) 및 용구(龍口) 등으로 상륙하여 수륙(水陸)을 공위(攻圍)했습니다. 이 때 청도에 있던 독일병사는 육해군 및 잡병(雜兵)을 포함해서 5,473명이고 오스트리아병사(墺兵) 연군(聯軍)은 겨우 640명입니다. 이로써 8만 6천의 적에 대항하므로 독일이 패하고 적이 승리할 것임은 삼척동자도 자연히 아는 바입니다. 아, 저는 청도에 들어온 후 여러 번 독일 제독(提督)의 보호를 받아 위험을 피하고 안락(安樂)을 구하였습니다. 평생 독일 제독의 지기(知己)로서 보답해야 할 은혜를 저버리고 또 한 점 소회(所懷)가 있어 이 도(島)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창림탄우(槍林彈雨)에 몸을 희생함은 실로 독일 제독의 은혜에 보답하는 한편, 기회를 엿보아 동삼성(東三省)의 동지를 지휘하여 의기(義旗)를 들어 독일의 내응군(內應軍, 몰래 돕는 군대)이 되어, 7~8년간 해외에 있으면서 처량하게 울면서 뛰어다닌 목적을 이루려고 기대했습니다. 저 놈들이 청도에 급히 군대를 일으켜 수륙(水陸)의 전운(戰雲)이 매섭고 급히 전선(電線)을 단절하고 교통을 두절시켰습니다. 이러한 때에 독일 제독이 저에게 권하여 전쟁터를 피해 훗날 목적을 이루라고 네다섯 차례나 권고했습니다. 실로 호구(虎口)를 벗어날 계책이 없으니 독일 제독과 함께 죽어 전날의 각별한 보호의 은혜에 십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독일 제독은 대세를 설명하고 서로 권하여 훗날을 기약하라 했으므로, 연기하여 10월 초까지는 청도에 있었습니다. 일본·독일(日·獨)이 병사를 주고받은 일이 5차례 있었습니다. 당시 혈우육풍(血雨肉風)이 몰아치는 위험이 아침저녁으로 있었습니다. 아, 이른바 일(事)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몸(身)이 먼저 죽는 시절입니다. 미국이 독일과는 서로 배신할 수 없는 의무가 있었으므로, 미국영사관이 독일 제독을 사지(死地)에 내버려두고 헤어지면 국제 상 친밀한 우의를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에 대해서는 불인(不忍)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10월 3일이 되어 미국정부의 훈시(訓示)에 의해 비로소 청도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는 미국영사와 함께 갈 것을 요구했고, 미국 영사 사무원 가운데 섞여서 이 호구(虎口, 매우 위험한 상황)를 벗어나 교주(膠州)에 도착했습니다. 교주에서 미국 영사와 헤어져 도보로 연태(煙臺)로 갔습니다. 교주와 연태 간 780리(里)를 단신으로 여행했습니다. 산과 들에 두루 가득 찬 것이 저 놈들이었습니다. 당시 헤매고 다니던 상황을 상세히 말하면 각하의 마음을 우울하게 할까 염려되므로 감히 자세히 말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연태에서 차를 타고 북경으로 가서 잠시 친구를 만나고 다시 상해로 가서 유군(劉君)과 상봉하여 아침저녁이 멀다 하고 서로 심정을 토로하였습니다. 각하께서 보내신 서신도 접견하였습니다. 본국(本國) 인사(人士)의 유지(有志)를 감당할 수 없음을 추측하고, 게다가 논의가 종종 오해받고 있다는 것을 듣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한편, 동삼성(東三省) 동지들에게 포고할 글을 보냈습니다. 또 한편으로 자금을 아끼지 않고, 세계 장래의 형세 및 유럽(歐洲)전쟁 이후 열국(列國)의 정략(政略)이 어떠하며 여러 망국(亡國) 민족의 응변(應變)이 어떠한지를 일일이 기술하여 인쇄국으로 보내 현재 인쇄 중입니다. 이 인쇄서(印刷書)는 곧 우리 국내 민족이 각종 오해로 인해 저 놈들을 두려워하여 감히 어찌하겠다는 마음을 감출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이를 송부할 방법이 없으므로, 원컨대 각하께서 조선(內地)에 계시니 이 책을 송부하면 동지(同志), 유지(有志) 동포들에게 전해주셨으면 합니다. 요금은 필요 없습니다. 오늘날 유럽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 각각 그 나라의 권리를 보존하고 세계의 경쟁을 필요로 하며 수억의 돈을 강역(疆埸, 戰地의 경계)에서 소진하고 수천만의 생명을 창탄(槍彈)으로 내몰아, 노약한 백성은 가세를 기울여 군수(軍需)를 돕고 건장한 사람은 몸을 바쳐 병역에 종사합니다. 아, 전날에 스스로 문명을 허용했던 유럽(歐洲)이 하나의 전쟁터로 변하고, 스스로 신성(神聖)함을 허용했던 민족이 강역(疆埸)의 전귀(戰鬼)로 변하는데, 이 조금도 사양하는 바 없음은 각기 나라를 위해 자신과 집안을 돌보지 않아서입니까. 하물며 망국의 고통을 안고 있는 우리 동포는... 제가 조선(內地)에 있을 때와 해외에 있을 때 종종 동포들이 ‘기회가 없다’라고 항상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원래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인데, 기회의 적용 준비는 매우 적고 드뭅니다. 검(劍)이 안지(按地)를 공격하여 피를 토하며 자진(自盡)에 이르지 않습니까. 아! 각하께서는 잠시 이 글을 동지 및 동포에게 연대(聯帒)하여 각자의 꿈을 깨우고 싶습니다. 대개 사람이 옷을 입으려면 누에를 먼저 길러 실을 얻어 포(布)를 짠 후에야 입을 수 있고, 밥을 먹으려면 파종을 하고 추수를 하여 곡식을 얻은 연후에야 먹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옷을 입으려는 자는 누에를 길러야 하고 밥을 먹으려는 자는 씨를 뿌려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지금 도탄(塗炭)의 한(恨)이 있고 우리 조국은 윤망(淪亡)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도탄을 달가워하고 윤망을 한스러워 하지 않는다면, 곧 기회 적용의 이기(利器)를 준비해야 합니다. 원래 우리가 기회의 이기(利器)라 하는 것은 단지 단결에 있습니다. 재정이라는 건은 기회를 탑니다. 의기(義旗)를 들어야 할 때, 저는 가령 미미하다 할지라도 책임을 질 것입니다. 고로 오랜만에 다가온 우리의 기회라고 삼가 아뢰옵니다.  각하께서 흔쾌히 받아들여주셨으면 합니다. 이제 우리가 멸망한 조국을 회복하고 도탄에 빠진 동포를 구제하려면 3년 내에 해야 합니다. 3년 이내에 반드시 기회가 올 것입니다. 현재 유럽전쟁이 한창입니다. 일본·독일(日·獨)이 교전할 금일이 우리의 기회라고 동포에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기회가 온다 해도, 오늘의 기회는 우리의 빈 그릇 같은 기회입니다. 2,3년 지나서의 기회는 우리의 실력의 기회입니다. 무엇을 빈 그릇 같은 기회라 하고, 무엇을 실력의 기회라 합니까. 아, 국망(國亡)이 되기 5년 전날에 우리나라 민족은 전제정치(專制政治) 하에 엎드려서 관리와 세력가들의 학대를 받아 서로 원수의 지경에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고통으로 인민(人民)의 손이 강제로 유린당하고 계속해서 반역의 무리들이 조정에서 종횡(縱橫)하고 밀정노릇이 산야(山野)에 가득 찼습니다. 진실로 군중의 말은 반드시 저버리고 지사(志士)를 원통하게 옥죄니, 누가 감히 죽음을 원하여 목숨을 버리고자 하겠습니까. 또 당시에는 열국(列國)이 암인(暗認)할 기회를 탈 수도 없었고, 또 경제상의 이용 방법을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금일에야 독일·러시아(獨·露)가 전쟁을 하니 우리 동포야말로 어찌 일어나지 않겠습니까. 금일 우리의 기회라 함은 이른바 빈 그릇 같은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독일이 청도를 빼앗은 이익은 사실상 피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독일이 전쟁에서 얻는 이득은 세계가 인정하는 바입니다. 유럽전쟁의 종결은 내년 3, 4월경이 될 것입니다. 전쟁의 종결에 즈음하여 미국·독일(米·獨) 양국이 맺는 협약은 반드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킬 것입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주(加州) 문제, 독일의 청도 문제가 한꺼번에 발생하고 전쟁은 극동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러시아는 원래 대련(大連)에서 치욕을 당한 후 밤낮으로 경영하여 시베리아(西伯利亞) 철도 복선(複線)이 이미 완성되어 제반 운송의 이익이 있고, 또 중국은 내몽고를 독립시켜 지리상 점령하려는 것이 극동의 정책이므로 안으로는 미국·독일(米·獨)을 따르고 밖으로는 일본 놈들을 꾀어내어 극동의 주인으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그 때는 중국의 중립을 바래도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국·미국(中·米)동맹을 맺어 공수(攻守)의 이익으로 서로 도와야 합니다. 이 때 독일은 중국과 간접동맹이라는 우의를 만들고 미국·독일(米·獨)은 연합군을 형성해 동해(東海)를 봉쇄한 후 러시아를 원동(遠東)의 주인으로 만들면, 이때에는 원동의 영토의 주인공은 중국이 되고 세력상의 주인공은 러시아가 될 것입니다. 이 때문에 중국·러시아(中·露) 간에 반드시 하나의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내몽고의 독립을 취소하고 러시아와 연방조약을 체결할 것입니다. 이리하여 중국·러시아(中·露)는 이익협약 및 영토상 협약을 맺어, 러시아는 북으로 연길(延吉)로부터 한국의 회령(會寧)을 침략하여 저 놈들의 세력을 나누게 될 것이고, 중국은 먼저 영구(營口)를 막아 철도 상으로 산해관(山海關) 지선(支線) 및 봉천(奉天) 지선(支線)을 끊은 후 바다 방면으로는 미국·독일(米獨) 연합군이 진입할 것입니다. 이 때 영국은 예컨대 저 놈들과 동맹을 맺고 있다 할지라도 종족 관계상 반드시 중립을 엄수할 것입니다. 흡사 적벽(赤壁)에서 저고리 소매를 늘어뜨리는 모양이 되어 명료해집니다. 이때야말로 곧 우리가 실력을 쓸 기회가 아니겠는가라고 저는 감히 묻습니다. 각하께서는 동지 동포의 단결에 힘써서, 러시아가 회령을 침범하고 중국이 봉천의 철로를 단절하면 마땅히 지방에서 운동을 일으켜 함북 평북의 요지(要地)가 정리되면, 저 우선(友善)이 불초(不肖)하나마 서북간도(西北間島) 170만의 부로형제(父老兄弟)를 지휘하여 함북 평북으로 몰래 들어가 병기(兵器) 재력(財力)을 입수할 것입니다. 그리고 재력이 이루어지면 반드시 군표(軍票)를 발행할 것인데, 그 때는 중국의 모(某) 은행에서 움직일 것입니다. 이는 제가 7~8년간 중국에서 분주하게 뛰어다닌 효과로서, 결단코 책임질 것입니다. 어쨌든 항상 성기(聲氣)로 연락드리니, 우리의 사업을 도모함에 힘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현재 저 우선(友善)의 주소는 여관인데, 이목(耳目)이 번거로우니 간단히 말씀드립니다. 동포 중 시세(時勢)를 오해하는 이가 있으면 망동하지 말도록 조치해주시기 바랍니다. 이밖에 상세한 것은 현재 인쇄 중인 책도 있으니 이를 참고해주십시오. 조만간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제 옛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으려 하니 감개가 무량할 뿐입니다.12월 25일 성우선(成友善) 재배  러·일동맹설은 전혀 무근의 설이고 또 중국 제3차 혁명설도 말이 안 됨.  이상1915년 9월 21일보고 통보처 총독·정무총감·총무국장·주차군사령관·사단장·육군대신·내각 서기관장·내무·외무차관(3) 조선보안법위반사건판결의 건사비(司秘)제273호

    6 6.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판결서

    (1) 조선보안법 위반사건 판결서판결(判決)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訥老里) 눌노동(訥老洞) 거주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눌노리(訥老里) 눌노동(訥老洞) 출생 무직(無職)성낙형(成樂馨) 일명 성우선(成友善) 7월 25일생 34세경성부 화동 130번지 김승원(金昇元) 집 거주경성부 정동 출생 무직(無職)김주원(金冑元) 4월 3일생 44세경성부 화동 28번지 거주경기도 파주군 주내면 능내동(陵內洞) 출생 무직변석붕(邊錫鵬) 11월 15일생 63세경성부 권농동 184번지 거주충청북도 청주군 남차이면(南次二面) 석판리(石坂里) 출생 무직박봉래(朴鳳來) 6월 18일생 44세경성부 고동 83번지 거주충청북도 음성군 소이면(蘇伊面) 금고리(金古里) 출생 무직심인택(沈仁澤) 1월 3일생 57세경성부 체부동 118번지 거주충청남도 대흥군 당산리(堂山里) 출생 무직김사홍(金思洪) 4월 4일생 49세경성부 경운동 47번지 거주경성부 구 남촌 출생 조선귀족 남작 무직김사준(金思濬) 10월 26일생 61세경성부 관훈동 56번지 거주경기도 용인군 모현면(慕賢面) 능원리(陵院里) 출생 무직정일영(鄭馹永) 6월 28일생 43세경성부 재동 9번지 거주경성부 재동 9번지 출생 무직(無職)김승현(金勝鉉) 9월 1일생 65세경성부 내자동 173번지 거주경성부 남문 외 출생 침술업이경창(李慶昌) 1월 5일생 47세경성부 내자동 129번지 거주경성부 남대문 내 수각루(水閣樓) 출생 염덕신(廉德臣) 1월 20일생 47세 위 성낙형(成樂馨)에 대한 사문서위조 행사사기,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冑元)·변석붕(邊錫鵬)·박봉래(朴鳳來)·심인택(沈仁澤)·김사홍(金思洪)·김사준(金思濬)·정일영(鄭馹永)·김승현(金勝鉉)·이경창(李慶昌)·염덕신(廉德臣)에 대한 보안법위반 피고사건에 대한 조선총독부검사 경장삼랑(境長三郞) 관여로 병합심리를 마치고 판결한 것은 다음과 같다. 주문(主文) 피고 성낙형(成樂馨)을 징역 3년에 처하고, 피고 김주원(金冑元)·변석붕(邊錫鵬)·심인택(沈仁澤)·김사홍(金思洪)·김사준(金思濬)을 각각 징역 1년에 처하고, 피고 박봉래(朴鳳來)·정일영(鄭馹永)·김승현(金勝鉉)·염덕신(廉德臣)을 징역 8월에 처한다. 피고 이경창(李慶昌)은 무죄로 한다. 압수물건 중 영제 629호-1, 13 경각서(警覺書), 동호(同號)의 8 서면 각 1통은 이를 몰수한다. 그 나머지는 모두 소유자에게 환부한다.이유(理由)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일찍이 배일(排日)사상을 품고 제국(帝國)이 구한국을 병합(강제병탄)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중국(支那)으로 건너가 그곳의 동지(同志)와 서로 만나 국권을 회복하고자 이에 필요한 자금을 얻기 위해 부심하였다. 1911년 8월경 경상남도(慶尙南道) 진주군(晉州郡) 소재의 토지 약 2만 두락(斗落)을 매도하고자 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유자의 대리인 유재균(柳載均)이라는 자가 경성에 와서 피고 성낙형(成樂馨)에게 매도주선 방법을 의뢰하기에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이를 승낙하고 경성 중부 전동 4통 3호에 사는 조종서(趙鍾緖)라는 자에게 매입 방법을 교섭하여 조종서(趙鍾緖)는 실지(實地)에 나아가 조사를 마치고 이를 구입하고자 하였다. 동년 9월 날짜 미상에 그 고용인 이태연(李泰淵), 조제원(趙濟元) 및 피고 성낙형(成樂馨)을 동반하여 경상남도 진주군 읍내로 와서 이곳의 기생 계월(桂月) 집에 머물며 실지조사에 착수하였는데 그 수량이 많아서 뒷일을 이태연(李泰淵)·조제원(趙濟元)에게 일임하고 이에 필요한 금전은 그때그때 보냈겠다고 말하고 귀경하였다. 그 후 이태연(李泰淵), 조제원(趙濟元) 등은 토지조사를 위해 경상남도 의령군(宜寧郡) 지방에 나가 수십일 동안 집에 돌아오지 않자,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전시(前示)한 자금을 제공할 목적으로 금전 편취를 기도하고 동월 13일 그 주소에서 조제원(趙濟元)의 이름으로 조종서(趙鍾緖) 앞으로 토지매입대금 약 6천원을 이태연(李泰淵) 앞으로 지급환(至急換)으로 송부하라는 취지의 전보뢰신지(電報賴信紙) 1통을 위조하여 동일 이를 진주우편국에 제출, 위조 전보를 보냈다. 조종서(趙鍾緖)는 이를 믿고 그 후 3천원을 한성은행(漢城銀行)을 거쳐 경상농공은행(慶尙農工銀行) 진주지점 앞으로 전신 송금을 하였고 동 은행 지점은 통지서를 피고의 주소에 발송하였다. 이에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그 금전 송부인 것을 알고 동월 18일경 이 사실을 모르는 동군 읍내 삼동인각업(三洞印刻業) 원전종번(原田種繁)으로 하여금 이태연(李泰淵)의 인장을 위조시켜 이를 휴대하고 동월 19일 동 은행지점에 가서 멋대로 이태연(李泰淵) 명의의 3천원의 전신송금을 수령하기 위해 영수증을 작성하고 그 이름 아래 위조 인장을 찍어 위조를 완성하여, 동일 동 은행지점에 제출 행사하여 3천원을 수령하고 이를 편취하였다. 이어 범의(犯意)를 계속하여 동일 그 주소에서 조제원(趙濟元)의 이름으로 조종서(趙鍾緖) 앞으로 3천원을 영수하였으나 아직 2천 5백 원이 부족하니 지급환으로 송부하라는 뜻의 전보의뢰지 1통을 위조하여 이를 동일 동 우편국에 제출 행사하였다. 동월 20일 동 주소에서 조제원(趙濟元)의 이름으로 조종서(趙鍾緖) 앞으로 2천 5백 원을 지급 송부하라는 뜻의 전보의뢰지 1통을 위조하고 동일 동 우편국에 제출 행사하여 허위 전보를 보냈다. 조종서(趙鍾緖)는 이를 믿고 그 후 1천 5백 원을 같은 한성은행(漢城銀行)을 거쳐 경상농공은행(慶尙農工銀行) 진주지점 앞으로 전신송금을 하였고 이에 동 은행 지점은 통지서를 피고의 주소로 발송하였다.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그 금전의 송부인 것을 알고 동월 21일 인장을 휴대하고 동 은행지점에 가서 그곳에서 멋대로 이태연(李泰淵) 명의의 1천 5백 원 전신송금을 수령한다는 영수증을 만들고 그 이름 아래 위조 인장을 찍고 그 위조를 완성, 동일 동 은행지점에 제출 행사하여 1천 5백 원을 수령하여 이를 편취하였다. 그리고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4천 5백 원을 품고 부산(釜山), 청진(淸津), 회령(會寧) 등지를 거쳐 중국(支那) 북간도(北間島)로 건너가 그곳에서 학교를 세우고 그 자제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이어 북경(北京)으로 가서 그곳에 있는 동지(同志) 및 중국 관리와 서로 왕래하였고, 이어 청도(靑島)로 가서 시기를 살피고 있었다. 1914년 7월경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제국(帝國)은 독일(獨逸國)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고 청도의 공격에 착수하자 달아나서 북경으로 돌아왔다. 이어 청도가 함락되자 동년 음력 10월 중 상해(上海)에서 중국에 머물면서 그곳 및 러시아(露國)로부터 온 동지와 서로 만나 협의하여, 동양에서 청도가 함락되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승리로 돌아갈 것이고 그래서 일본은 청도함락에 편승하여 중국에 대해 과실 요구를 하게 될 때는 중국 관민은 이를 원망하여 머지않아 승리할 독일과 서로 결탁하여 일본에 적대할 것이니 그 기회를 노려 동지는 이태왕(李太王)을 옹립하고 구한국의 독립을 계획하여 신한혁명당(新韓革命黨)이라는 비밀단체를 조직하였다. 한편으로는 중국·미국·러시아 기타에 산재한 동지를 규합하고 다른 한편으로 군자(軍資)·병기(兵器) 등을 준비해야 할 것이므로 군자·병기 등의 준비를 위해 독일 보증 아래 중국과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이라 칭하는, 중국은 한국에서 혁명전쟁이 일어나면 군자 및 병기를 공급한다는 취지를 가진 밀약을 미래의 군주로써 추대할 이태왕(李太王)의 위임을 받아 체결할 것을 결정하였다.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동 단체의 외교부장이 되어 밀약체결의 임무를 맡아서 우선 이태왕(李太王)의 밀지를 받을 준비로 동년 음력 12월 중 미리 조선 내지에서 동지(同志)인 피고 변석붕(邊錫鵬) 앞으로 이 계획을 설명하고 동지를 규합할 뜻의 통신(영제629호-8)를 발송하였고 피고 변석붕(邊錫鵬)은 이를 받고 각 동지에게 보여주였다. 이어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1915년 음력 3월 중 전부터 한일병합(韓日倂合-강제병탄)에 불만을 품고 중국으로 도주하여 봉천(奉天) 부근을 방황하던 피고 김주원(金冑元)에게 상해회의(上海會議)의 계획을 설명하였고, 김주원(金冑元)은 이에 찬동하고 가맹하여 동 단체의 한구(漢口)지부장이 될 뜻을 승낙하였다. 그리고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이태왕(李太王)의 밀지를 받기 위해 피고 김주원(金冑元)과 함께 경성으로 출발하였다.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동년 7월 7일(음력 5월 25일) 경성으로 와서 동월 14일(음력 6월 3일) 피고 김주원(金冑元)이 경성에 도착하자 동월 19일(음력 6월 8일)경 피고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冑元)은 함께 피고 변석붕(邊錫鵬) 집으로 가서 그에게 계획을 설명하였다. 변석붕(邊錫鵬)은 이를 찬동하고, 또한 피고 성낙형(成樂馨)과 협의하여, 동지를 격려할 경각서(警覺書)라고 제목을 정한 문서를 만들고 이를 반포하고자 하여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청도함락 후 일본·중국 교섭 결과 세계 각국은 누구라도 일본에 대해 악감정을 품고 일영동맹(日英同盟)은 위기에 빠져 제1차 세계대전은 결국 독일의 승리로 돌아가고 중국은 독일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할 것이 분명함으로 이 기회를 노려 국권을 회복하고 구한국신민은 조선 내지에 있던 외국에 있던 불문하고 서로 호응하여 비밀단체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취지를 기재한 문서(영제629호-1)를 작성하였다. 피고 김주원(金冑元)은 이를 정서하여 피고 변석붕(邊錫鵬)에게 교부하였고 변석붕(邊錫鵬)은 다른 동지에게 보여줄 뜻을 답하며 받았다. 또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피고 변석붕(邊錫鵬)에게 밀약체결을 위해 필요한 이태왕(李太王)의 밀지를 받기 위해 이강공(李堈公) 및 기타에게 상당한 수단을 강구하라는 취지를 전하고 피고 변석붕(邊錫鵬)은 이를 승낙하였다. 피고 변석붕(邊錫鵬)은 문서(경각서)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방문한 전부터 배일사상을 가진 피고 박봉래(朴鳳來)에게 피고 성낙형(成樂馨)의 계획을 알리고 동지로써 가맹하라는 취지를 설명하였더니 경각서 등본을 요청받아 피고 변석붕(邊錫鵬)은 이에 응하여 등본 1통을 작성하여 이를 피고 박봉래(朴鳳來)에게 교부하고 박봉래(朴鳳來)는 이를 받아 동지들에게 이 등본에 기초해 다시 등본 1통을 (동호-13) 작성하여 교부하고 이를 소지하였다. 이어 피고 변석붕(邊錫鵬)은 동월 20일경 자택에서 전부터 국권회복의 의사를 가진 피고 심인택(沈仁澤)에게 피고 성낙형(成樂馨)의 계획을 설명하고,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 체결에 필요한 이태왕(李太王)의 밀지를 받기 위해 노력 중이나 이태왕(李太王)에게 접근할 수 있는 하등의 수단이 없으니 이강공(李堈公) 및 기타에게 접근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위촉하자, 피고 심인택(沈仁澤)은 이에 찬동 승낙하여 피고 성낙형(成樂馨), 변석붕(邊錫鵬)과 협의하고, 한편으로 경각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강공(李堈公)에게 개입하여 이태왕(李太王)을 설득하고자 하여 먼저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하기위해 동 공비(公妃)의 부(父)인 피고 김사준(金思濬)의 4촌 종제(從弟)인 피고 김사홍(金思洪)에게 그 계획을 설명하고, 피고 성낙형(成樂馨)을 이강공(李堈公)에게 접근시키기 위해 그 지름길로 피고 김사준(金思濬)을 면회할 기회를 달라는 뜻으로 위촉하자 피고 김사홍(金思洪)은 이에 찬동하며, 동월 22일(음력 6월 11일)경 피고 김사준(金思濬)에게 가서 그에 대해 피고 성낙형(成樂馨)의 계획을 설명하고, 김사준(金思濬)도 이를 찬동하여 피고 성낙형(成樂馨)과 면회하고자 하였다. 이에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동월 26일(음력 6월 15일) 오전 10시 피고 김사홍(金思洪)과 더불어 상해회의(上海會議)의 결과로 이루어진 피고 김주원(金冑元)이 정서한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을 휴대하고 피고 김사준(金思濬) 집에 가서 그 집의 부인이 없는 사이 거실에서 김사준(金思濬)과 회합하여 계획을 설명하고 이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전달하기 위해 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을 이강공(李堈公)에게 제공해달라는 취지를 말하고 이를 교부하니 피고 김사준(金思濬)은 그 계획을 칭찬하고 조약안은 즉시 이강공(李堈公)에게 제공할터이니 그러면 틀림없이 양호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취지로 답하고 이를 받았다. 한편 피고 심인택(沈仁澤)은 조약체결에 관한 밀지를 받기위해 경각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고자 하여 전부터 한일병합(韓日倂合-강제병탄)에 열복(悅服)하지 않던 피고 정일영(鄭馹永)에게 계획을 설명하고 좋은 수단을 강구해달라는 뜻으로 위촉하자 피고 정일영(鄭馹永)은 이를 찬동하고, 전부터 친교가 있던 덕수궁(德壽宮)에 다소 연고가 있는 피고 김승현(金勝鉉)에게 이 계획을 설명하고 상당한 수단을 강구해달라는 뜻으로 전촉(轉囑)하자 피고 김승현(金勝鉉)도 이에 찬동하고, 동월 24일(음력 6월 13일)경 이런 사실을 모르는 피고 이경창(李慶昌)으로 하여금 덕수궁 내승(內丞)인 피고 염덕신(廉德臣)을 자택으로 불러 계획을 알리고 경각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해 줄 사람을 요청하는 취지로 설명하자, 피고 염덕신(廉德臣)은 이에 찬동하고 이를 승낙하였다. 이에 피고 성낙형(成樂馨)·김주원(金冑元)·심인택(沈仁澤)·김승현(金勝鉉) 등은 협의 끝에 ‘중국·독일이 일본을 연공(聯攻)하는 것이 대세’라고 제목을 정한 경각서의 취지를 한층 단명하게 기재한 문서를 작성하고 동월 26일(음력 6월 5일) 오전 1시경 이를 피고 염덕신(廉德臣)에게 교부하고 또 그에게 위 문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고 수령징빙(受領徵憑)의 하부(下付)를 받아 오라 하고 곧 다음번에는 중한의방조약안(中韓誼邦條約案)을 제공한다는 신상(申上)이 있다는 취지로 명령하였다. 이에 피고 염덕신(廉德臣)은 이를 승낙하고 문서를 받아 동일 오후 12시경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서 이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고 신상(申上)을 위해 수령증빙을 받은 것으로써 정치에 관한 불온한 행동을 하여 치안을 방해한 것이다.(中略) 법에 비추어 피고 성낙형(成樂馨)의 각 사문서위조의 소위(所爲)는 각 형법 제159조 제1항 및 각 동조 제3항에 해당하고, 그 각 행사의 소위는 동법 제161조 제1항 제159조 제1항 및 동조 제3항에 해당하고 각 허위의 전보를 발송한 소위는 각 전신법 제33조 제1항 형법시행법 제19조 제2조 제20조에 해당하고, 각 사기의 소위는 동법 제246조 제1항에 해당하고, 각 연속범으로써 동법 제55조에 의해 각 1죄로 하여 처단해야할 이상 각 소위 간(間)에는 수단결과의 관계가 있으므로 동법 제54조 제1항 제10조 제2항에 의해 가장 무거운 사기의 죄로 과(科)해야 할 형(刑)으로서 처단해야 한다. 피고 11명 보안법 위반의 소위는 동법 제7조 조선형사령 제42조에 해당하여 2년 이하의 징역을 선택해야 함으로 인해 피고 성낙형(成樂馨) 이외의 각 피고에 대해서는 각 그 형의 범위 내에서 처단해야 한다. 피고 성낙형(成樂馨)은 형법 제45조에 의해 2죄를 병합하는 것으로 하여 동법 제47조 제2항에 의해 무거운 사기의 죄로 과(科)해야 하는 형(刑)에 따라 동법 제47조 단서의 제한 내에서 가중하여 그 형의 범위 내에서 처단해야 한다. 피고 이경창(李慶昌)이 피고 성낙형(成樂馨) 등의 전시 계획에 찬동하고 피고 김승현(金勝鉉)의 취지를 계승하여 피고 염덕신(廉德臣)을 설득하고 동인으로 하여금 전시 경각서를 이태왕(李太王)에게 제공하기에 이르렀다는 공소사실은 이를 인정할 증빙이 충분하지 않음으로 형사소송법 제224조에 의해 무죄를 언도해야 한다. 압수물건 중 영제629-8, 13 경각서 각 1통, 동호-8 서면 1통은 범죄행위에 제공되고 또한 제공받은 피고 등의 소유물이므로 형법 제19조 제1항 제2호 제2항에 의해 이를 몰수해야 한다. 나머지는 몰수에 관계되지 않으므로 형사소송법 제202조에 의해 모두 소유자에게 환부해야할 것으로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1915년 10월 30일京城地方法院조선총독부판사 총원우태랑(塚原友太郞)조선총독부재판소 서기 원부홍일(園部弘一)

    7 7. 상해재류 배일한인의 동정

    上海在留 排日韓人의 動靜에 관해 一九一六年 九月 十八日字로 在上海 總領事가 外務大臣에 報告한 要旨上海在留 排日韓人의 動靜  當地는 아시는 바와 같이 複雜한 性質의 土地로서 韓國人으로서 當館에 屆出하는 者는 그 一部에 그치고 大多數는 洋服 또는 中國服을 입고 中國人처럼 꾸미고 訴訟 其他 一身上의 保護 等  必要가 切迫하지 않으면 韓人이라고 밝히지 않는 者로서 그들도 當地에 滯在하는 者의 人員에 이르러서는 或은 數百名에 達한다 하고 또는 百數十名에 不過하다고도 말해 正確한 數를 얻기 어려운 情況에 있어 이들 各人에 대해 詳細한 事情을 調査한다는 것은 甚히 困難한 바이나 그 大多數는 적어도 僅僅히 衣食을 얻든가 또는 日常의 資에도 窮해 있는 程度의 사람들로서 所謂 排日運動에 關係가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의 有力者라 할지라도 한 밑천이 될 만한 資力을 가진 者는 없고 渡美의 周旋 등은 또한 一種의 營業的 意味도 內包한 것 같으며 그 中에는 紙幣僞造 등에 의해 一時의 利益을 貪내는 者가 있는 등 그들 사이에는 一定한 具體的 計劃이 있는 것으로는 생각할 수 없고, 혹은 韓人間  中에는 同濟社란 것이 있어 本國과 外國의 各 要地를 通하여 秘密結社를 만들어 日本에도 그 支社가 있는데 이에 加入하는 者는 누구나 秘密을 盟約하고 各地에 各各 社長과 幹事를 두어 暗號를 써서 서로 往復하고 있어 가장 危險한 分子라는 등의 情報도 있으나 아직 그 眞相을 探得하기에 이르지 않았다. 如何間 當地에서의 그들의 行動은 他處에서 想像하는 것처럼 重大한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으나 더욱 今後 한층 注意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이며 다음 그들의 一般 動靜에 대해 探知해 얻은 바는 別紙와 같다. (一面 原本缺)記一. 桑港(샌프란시스코)·布哇(하와이) 等에서의 在留韓人團體에 對應하여 當上海에 있어서도 申圭植(신규식)을 頭領으로 하고 曺聖(成)煥(조성환)·閔忠植(민충식)·朴殷植(박은식) 등을 有力한 斡旋者로 하여 棣華同樂會(체화동락회)란 것을 組織하고 當地 在留 韓人의 團結, 在外韓人團體와의 連絡 등을 꾀하는데 힘쓰고 있는 것 같으나, 資金이 窮乏하여 그 經營은 甚히 困難하여 때때로 中國靑年會館 또는 中國學生會 등을 利用하여 集會를 開催하는 것 같으나 充分한 成績을 올릴 수 없다고 하며 아무리 設立者의 目的을 排日鼓吹에 있다고 하나 現今으로서는 單純한 社交俱樂部와 같은 것에 그치는 것 같다.二. 前記 申圭植(신규식) 등은 佛(프랑스)祖界에 博達學院이란 것을 設立하고 靑年子女의 敎育에 힘쓰며 曺聖(成)煥(조성환)은 지금 宮話의 敎師로서 其他 熱心으로 指導에 힘쓰고 있는 것 같으나, 이 또한 經營費 부족으로 微微不振하여 當初 十五·六名의 學生을 收容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겨우 二·三 名을 남긴데 不過하다.三. 當地에서 하는 渡美韓人에 관해 그 모두가 排日論者라고 卽斷하는 것은 큰 잘못이며, 그 中에는 成實히 修學할 目的으로 渡航하려고 하는 者도 있는데, 그 渡航의 手段으로서는 大槪가 美國人宣敎師의 斡旋에 의하는 것 같고 韓國에서 오는 者는 먼저 京城에 있어서는 「언더우드」, 平壤에 있어서는 「사무엘 못페」로부터 하나의 紹介狀같은 것을 받아 가지고 上海에 到着하여 舊英租界北京路十八號 在住美國人宣敎師 「조지 핏치」에게 提示하여 同人으로부터 船舶會社로 한 紹介狀을 얻어 가지고 이것을 船舶會社에 提示하면 이에 비로소 桑港(샌프란시스코)行 乘船券을 살 수 있어 渡美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船舶會社는 美國國籍을 가지고 있는 者인바 桑港(샌프란시스코) 到着後는 容易하게 이들 旅券이 없는 韓人의 入國을 許可하는 것 같다. 特히 一九○九년 즉 韓國倂合(강제병탄, 한일강제병합, 1910) 以前의 韓國을 退去한 韓人에 대하여는 至極 容易하게 上陸을 許可한다는 것이다. 또 上記 方法에 의하는 것 外에 그 중에는 在桑港(샌프란시스코) 韓人이 同地 「차이나 멜」汽船會社에 대해 上海로부터 桑港(샌프란시스코)까지의 船賃을 拂入하여 同社로하여금 乘船券을 發行케 하여 이를 在當地 渡航韓人에게 送付하는 것이다.四. 다음으로 排日韓人과 連絡을 가진 當地 在留 外人에 관해 前記 「조지 핏치」 따위는 或은 그 嫌疑者의 一人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宣敎師로서 곁들여 宗敎書 販賣에 從事하며 그 店鋪에는 韓國人도 使用하고 있으나 별로 惡性을 띤 人物도 아니며 또 外人間에 있어서의 評判도 나쁘지 않은 者라고 한다.五. 그들 同志間의 通信方法에 관하여는 特히 細心한 注意를 쏟고 있는 것 같으며 或은 來住 同志에게 托送하고 或은 美國靑年會(미국청년회)를 거쳐 傳達을 꾀하는 등 外에 當地 在留 申圭植(신규식)·曺聖煥(조성환)·閔忠植(민충식) 등에게 오는 書信·電信 으로서 美國에서 오는 것은 모두 「寰球中國學生會(환구중국학생회)」에서 받아 同某 中國人의 손을 거쳐 그들에게 手交된다고 한다. 이에 곁들여 말하면 寰球中國學生會(환구중국학생회)는 伍廷芳(오정방)을 名譽會長으로 하고 中國人에 의해 經營되는 것인바 同會와 排日韓人과의 사이에는 直接 아무런 關係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同會 在住 中國人 某가 前記 韓人에 대해 書信 등의 中間斡旋을 하는데 그치는 것으로 想像된다.

    8 8. 대동단결선언

    宣言大同團結의 宣言  夫合則立 分則倒는 天道의 原理요, 分久欲合은 人情의 律呂라. 撫念하건대 久로는 三百年 儒者의 黨論이 李朝滅亡史의 太半을 占領하였고 近에 至하여는 十三道 志士의 墻鬩이 新建設의 中心을 攪亂하는도다. 如斯한 三分五裂의 悲劇을 目睹하고 分門立戶의 苦痛을 備嘗한 吾人은 情律에 依하여 大合同을 要求함이 自然의 義務오. 또 道理에 據하여 總團結을 主張함이 當然의 權利로다. 非但 吾人의 主論이 如是라 一般同胞의 聲이요, 時代의 命이니 滿天下 傷心志士에 誰가 獨히 同感치 않으리오.  그러나 總團結의 問題는 由來가 久矣라. 聞함에 耳가 聒하고 言함에 齒가 酸하도다. 人皆曰 合同合同하여도 及其實行에 關하여는 或 力不及에 罪를 嫁하며 或 地不便에 責을 歸하며 或 競爭 無害로 題를 轉하여 左托右憑에 荏苒歲月이 亡國 滿八年에 到하도록 內外志士의 睽隔이 如前하여 一致團結의 希望이 眇然하도다. 오히려 懼然孟醒의 態가 無하고 恬然姑息의 計를 圖하면 是는 弓·甄(궁예·견훤)의 迷夢이요 華瑪의 赤誠은 아니다. 年來에 據俄(러시아)·據日(일본)·據中(중국)·據美(미국)의 士와 曰文曰武曰南曰北의 論이 紛紜錯雜하여 細로 友誼를 毋視하며 麤로는 人道를 沒却한 證實이 頻著하니, 嗚呼라 十年奮鬪에 所得이 何事오. 灌頂之水가 必流于趾니 哀我子孫에 遺習이 世傳하여 黨同伐異의 中毒이 轉深하면 吾人의 前途는 永劫의 醜態만 複演하리니 思하여 此에 及함에 五內가 裂하며 九曲이 斷하는도다.  試하여 內地現象을 顧컨대 庚戌(1910년)以后로 魔政의 肆虐이 餘算을 不遺하여 其步가 精神合倂에 到한지라. 半日半韓의 怪物이 日增하고 匪僧匪俗의 妖孼이 輩出하여 或敎를 資하여 同化先鋒을 作하며 或 政을 頌하여 自治前提를 開하더니 畢竟에 彼의 大手術이 二千萬 呼吸氣管을 破裂하며 四千年 大動脈을 斷絶하는도다. 何를 指함인고 韓語生의 苛罰과 韓史師의 黜退가 是라. 萬一 此勢로 直往하면 不幾年에 島夷文字는 父子通信에 轉用하고 韓代 衣冠은 喪婚禮式에도 罕見하리니 名義의 亡에 淚를 濺한 者가 事實의 亡에 血이 湧하리로다.  彼 菲律賓(필리핀)의 愛國歌와 安南(베트남)의 專門大學과 印度의 過半數의 軍隊와 芬蘭(핀란드)의 立法機關은 오히려 餘脈이 아닌가? 東西萬國에 比較가 無한 我 韓現象은 實로 慘酷하니 어찌 忍言하리오. 雖然이나 內地同胞는 海外同志에 對하여 一縷餘望을 繫하여 日로 復活의 福을 禱한는도다.  此에 對하여 在外同志의 覺悟가 何如한고. 果然 그 要求에 應할 準備와 그 期待에 副할 活動이 分明한가? 中宵自思의 時에 一掬熱情의 淚가 不止하리로다. 是는 無他라 支離私鬪로 國家相續의 大義를 不顧함이니 何故오. 隆熙皇帝가 三寶를 抛棄한 八月 二十九日은 卽 吾人同志가 三寶를 繼承한 八月 二十九日이니 其間에 瞬間도 停息이 無함이라. 吾人同志는 完全한 相續者니 彼 帝權消 滅의 時가 卽 民權發生의 時오. 舊韓 最終의 一日은 卽 新韓 最初의 一日이니 何以故오. 我韓은 無始以來로 韓人의 韓이요, 非韓人의 韓이 아니라, 韓人間의 主權 授受는 歷史上 不文法의 國憲이요, 非韓人에게 主權讓與는 根本的 無效요, 韓國民性의 絶對 不許하는 바이라. 故로 庚戌年(1910년) 隆熙皇帝의 主權抛棄는 卽 我 國民同志에 對한 黙示的 禪位니 我 同志는 當然히 三寶를 繼承하여 統治할 特權이 있고 또 大統을 相續할 義務가 有하도다. 故로 二千萬의 生靈과 三千里의 舊疆과 四千年의 主權은 吾人同志가 相續하였고 相續하는 中이오. 相續할터이니 吾人同志는 此에 對하여 不可分의 無限責任이 重大하도다.  如是히 無始劫來로 繼繼承承하던 三寶를 相續한 者는 完全한 統一組織을 待하여 始로 其 權利·義務의 行使가 可能할지니 小名小利에 汨沒하여 百年大計를 妨害하면 是는 孤兒가 棗栗로 喪을 忘함인저.  今玆 吾人同志는 內外情勢에 感한바가 深切하여 法理上·精神上으로 國家相續의 大義를 宣布하여 海外同志의 總團結을 主張하며 國家的 行動의 進級的 活動을 標榜하며 兼하여 內面으로 實質問題에 入하여 大同團結의 利益을 論하노니 一曰財政 二曰人物 三曰信用의 問題가 是라.  顧今疆外에 虐政을 避하여 生活根據를 立한 者가 無慮 百萬이니 貧富平均하여 一人半圓의 收徵은 絶對 無望이 아니니 萬一 總團結의 名分이 正大하고 旗幟가 鮮明하여 完全한 系統的 活動을 試하면 五十萬圓의 年年收入으로 足히 濟濟多土를 網羅하여 能히 繼續事業의 基礎를 鞏固케 하려니와 此에 反하여 東西對峙에 區區 小資로 百般 營爲를 各其 圖謀하면 譬컨대 小資의 雜貨商類라. 名目이 愈多에 品質이 愈卑하고 懸板이 愈高에 內容이 益貧하여 到底히 文明人士의 歡迎과 純良同胞의 信望을 得하기 難하리니 彼(신지케이트)(알니안스)의 流行이 合衆力의 效用을 先覺 實行함이라. 商事와 國際에 尙然하거든 何況 吾人이 敗亡餘局을 收拾하여야 宜當히 煦沫로 相滋하며 麗澤으로 相資하여 一大有機體를 造成하여 大法人의 元氣를 充實히 涵養할 것이니 此는 經濟로 同結의 要를 言함이라.   若夫人材로 論컨대 人은 萬能의 材가 少하고 事는 分職의 益이 多하거늘 現今 各處의 進行狀況은 分務의 規가 少하고 兼帶의 風이 多하니 漂流餘生이라. 何暇에 責備하리오마는 改良의 餘地가 有한 範圍는 卽 責任의 餘地가 不無하도다. 彼 鄕曲私塾을 觀컨대 村村立塾 家家獨師의 遺風이 未祛하여 統一 改良의 議가 彼의 良心을 觸하나 彼의 頑習을 破하기 難하여 誤人子弟의 古態를 反復하나니 海外現情이 亦復如是라. 人物養成의 主體가 甚多하나 人物養成의 客體가 甚少하고 兼文兼武의 着手가 極繁하나 一事一能의 成功이 極難하니 吁라 鮫龍이 各池에 大人을 難見이로다. 從今以往으로 總團體 大義下에 天下英材를 撫攬하여 無上法人의 代表를 選定하여 凡百有司를 簡賢任能하면 材가 日로 餘하고 業이 日로 進하리니 人物運用으로 合同의 要를 言함이라.  上과 如히 財를 合하고 人을 會하여 大義名分에 據하여 總機關이 成立하면 宛然 第一級의 國家的 權威가 現顯하여 規模는 尨大하고 職權은 分明하고 實力은 充足하여 對內對外의 信用이 確立하고 臨機應變의 機能이 敏活하여 足히 大法(프랑스)人의 理想的 作用을 覩하리니 宣統은 同盟會의 統一聯絡을 待하여 大淸帝國을 付與하고 露帝(러시아황제)는 波蘭(네덜란드)人의 在外同盟團과 猶太(이스라엘)人의 無土國을 待하여 自治獨立의 福音을 宣傳하였나니 合力合心의 效用이 如是하도다.  東西情形에 照하여 觀하건대 第一次의 統一機關은 第二次 統一國家의 淵源이 되고 第二次 國家的 擬制는 究竟 圓滿한 國家의 前身이라. 機會의 心地가 公平하여 準備者의 所願을 勿却하리니 今日 吾人眼前에 橫臥한 幸運의 機가 何를 待하는고 刻一刻으로 吾人의 有機的 統一을 待하는도다. 彼(슬라브)의 革命은 半韓의 福이니 芬蘭(핀란드)·猶太(이스라엘)·波蘭(네덜란드)은 其 先進이요, 聯合國의 散渙은 全世의 福이니 若愛爾蘭(아일랜드), 若特里波利, 若摩洛哥(모로코), 若印度, 若西藏(티벳), 若高麗(고려)는 其 復活의 聲이 日高하고 其 解放의 議가 日繁하도다. 此에만 止할 뿐이 아니라 民權聯合會는 强權打破와 民權伸張의 大運動에 着手하여 國界種別이 無하고 萬國社會黨은 繼絶存亡의 大義를 宣布하여 人類萬福을 裁定하는 現狀이니 是日이 福日이라. 地獄打破의 聲과 聖國建立의 運이 大局의 軌道를 乘하고 公轉함이 健하니 吾人同志가 以하여 自疆會一할 秋라 東鄰은 殺牛하나 餘日이 不多하고 密雲은 不雨하나 自我西郊라. 曠劫의 光明이 金剛舊土를 遠照하며 不世優曇이 隨緣亂壓하니 栴檀香風에 衆心이 歡悅이라. 是日은 福日이니 莊嚴神聖한 無上法人이 一大事를 爲하여 出現할 瑞徵이 아닌가.  是以로 冷血이 猶動하고 長眠이 初醒이라 一切 含靈이 活氣를 帶하며 枯苦衆生이 福音을 待하나니 此에 際하여 愛國의 誠과 合群의 願이 彼此一般이니 어찌 先後優劣이 其間에 有하리오마는 或 自重을 標榜하며 或 仇嘖을 顧忌하며 或 謙德을 尙하며 或 一部를 各謀함으로 年來에 公式的 宣言으로 大衆에 對한 情願은 相顧忘却하였도다. 嗟呼 同人이 今日에 至하여 四圍潮流의 驅衝과 一片赤衷의 激發로 忍無可忍에 躊躇無暇하여 玆에 主權相續의 大義와 大同團結의 問題를 提擧하여 先히 各界 明達 諸公의 贊同을 求하며 繼히 一般國民의 警醒을 催하며 傍으로 世界의 公論을 喚起코자 하노니 一致團結은 新韓의 光明이요, 生命이라. 此를 離하면 吾人의 前途는 暗黑이요, 虛僞요, 死亡이니, 故로 分合問題는 卽 殺活의 歧點이오. 是非의 空言이 아니라, 吾人의 團結이 一日이 早하면 新韓의 復活은 一日이 早하고, 吾人의 團結이 一日이 晩하면 新韓의 建立은 一日이 晩하리니 此는 天理人情에 照하여 至公無私한 議라. 以하여 滿天下 同志諸公 前에 宣布提議하노니, 天이 그 命하심인저. 人이 그 應할진저.提議의 綱領一. 海外各地에 現存한 團體의 大小隱顯을 莫論하고 糾合統一하여 惟一無二의 最高機關을 組織할 것二. 中央總本部를 相當한 地點에 置하여 一切 韓族을 統治하며 各地 支部로 管轄區域을 明定할 것三. 大憲을 制定하여 民情에 合한 法治를 實行할 것四. 獨立平等의 聖權을 主張하여 同化의 魔力과 自治의 劣根을 防除할 것五. 國情을 世界에 公開하여 國民外交를 實行할 것六. 永久히 統一的 有機體의 存立을 鞏固키 爲하여 同志者間의 愛情을 修養할 것七. 右 實行方法은 旣成한 各 團體의 代表와 德望이 有한 個人의 會議로 決定할 것檀帝紀元 四千二百五十年 七月  日申聖(신성)·趙鏞殷(조용은)·申獻民(신헌민)·朴容萬(박용만)·韓震(한진)·洪煒(홍위)·朴殷植(박은식)·申采浩(신채호)·尹世復(윤세복)·曺煜(조욱)·朴基駿(박기준)·申斌(신빈)·金成(김성)·李逸(이일)

    9 9. 『한국통사』를 아문(러시아어)으로 번역

    『한국통사』를 아문(러시아어)으로 번역…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치타에서  『청구신문』을 의지하건대 치타에 사는 김신부 씨는 태백광노(太白狂奴, 박은식) 선생이 저술한 『한국통사』를 아문(러시아어)으로 번역하여 현금인 소개에 부쳤는데 장차 이 책을 팔아서 이익 중 몇 푼은 공익사업에 기부할 터이라더라.

    10 10. 不逞 조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블라디보스토크(浦潮) 정보(블라디보스토크(浦潮) 파견원 보고)불령조선인(不逞朝鮮人)의 행동에 관한 건  재하와이(在布哇) 및 상해(上海) 방면을 방황하던 불령조선인 13명은 연서(連署)하여 ‘대동단결지선언(大同團結之宣言)’이라 제(題)한 인쇄물을 발행하고 각 방면의 동지에게 반포하고 있다. 그 상황에 부쳐 첩지(諜知)한 바는 다음과 같다.1. 선언서의 내용  표지에는 간단하게 선언이라 제하고 내면에 ‘대동단결지선언(大同團結之宣言)’이라 쓴 약 10매의 인쇄물이다. 문의(文意)의 대요(大要)는 ‘이제 해외에 재(在)한 우리 조선민족은 약 백만에 달하니 시험적으로 1년 매인당 평균 50전을 축적하여도 50만원을 얻을 수 있으니 이로 민족을 단결하고 이 자금을 이용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한다면 금일의 기회를 빌리어 회복해야 한다고 운운하고 본 대동단결의 본부를 일정의 지역에 두고 블라디보스토크(浦潮), 상해(上海)와 같이 다수 동포가 재주(在住)한 지방에는 지부를 설치하여 각 방면의 연락통일을 도모한다. 이 선언서를 열독한 인사는 마땅히 그 찬부(贊否)를 본서 발송소 앞으로 표명하기를 바란다. 운운’이다. 그리고 서명자 13명 중에는 아래의 인명이 있다.  박용만(朴容萬)·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조은용(趙殷鏞)·홍위(洪煒)2. 재블라디보스토크(在浦潮) 조선인의 언동  9월 초순경 해당 선언서는 재블라디보스토크 김학만(金學萬), 이규풍(李圭豊) 및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 등에 송부되어 왔다. 김(金)에 대한 몫은 최죽정(崔竹亭), 서상구(徐相矩) 등이 이를 열독하였는데, 김(金)은 길림성(吉林省) 밀산현(密山縣) 봉밀산(蜂蜜山) 지방으로 여행 중이어서 그의 귀래(歸來)를 기다려 동지를 집합하고 협의 결정 후 의견을 회답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인신보사(韓人新報社) 앞으로 온 몫은 열독 후 현재 재블라디보스토크(在浦潮) 육군위수 감옥에 구금 중인 이동휘(李東輝)에게 보내졌고, 또 이규풍(李圭豊- 41~2세로 안면에 마마자국이 있음)은 9월 22일 블라디보스토크(浦潮)를 출발 하얼빈(哈爾賓)을 경유 육로로 상해를 향하고 있는데, 그 요무(要務)는 해당 선언서를 읽고 상해의 유지들과 상의하려고 한다는 설이다.3. 기타  선언서의 발송원은 미상이나 상해 방면에서 만주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浦潮)로 들어온 조선인에게 맡겨져 송달된 형적이 있다.이상보고 통보처총독·정무총감·총무국장·육군대신·참모총장·관동도독·군사령관·사단장·헌병사령관·내각 서기관장·척식(拓植)국장관·외무차관·상해총영사·하얼빈(哈爾賓)총영사·간도파견원